심통원
1. 개요
심통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심회의 증손이자 심순문의 아들이다. 1537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1560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명종 대에 외척인 윤원형 등과 권력을 남용하고 뇌물을 받은 혐의로 탄핵받아 물러났으며, 선조 즉위 후에도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그는 이량, 윤원형과 함께 삼흉(三凶)으로 불리기도 했다. 1572년에 사망했으며, 현재 포천시의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묘소가 있다.
| 이름 | 심통원 |
|---|---|
| 한자 표기 | 沈通源 |
| 자 | 사용(士容) |
| 호 | 욱재(勖齋), 만취당(晩翠堂) |
| 별칭 | 심상공(沈相公) |
| 본관 | 청송 |
| 출생 | 1499년, 조선 한성부 |
| 사망 | 1572년 7월 8일, 조선 한성부 |
| 직업 | 문신, 척신, 정치인 |
| 부 | 증 영의정 심순문 |
|---|---|
| 모 | 증 정경부인 평산 신씨 |
| 배우자 | 정경부인 전주 이씨 |
| 자녀 | 4남 2녀 |
| 장녀 | 이황의 처 |
| 장남 | 심뇌 |
| 차남 | 심횡 |
| 3남 | 심화 |
| 4남 | 심전 |
| 차녀 | 심어돈개 |
| 친척 | 신영석(외조부), 덕림군 이자(장인), 심연원(형), 심달원(형), 심봉원(형), 심강(조카), 심전(조카), 심건(조카), 인순왕후(종손), 심의겸(종손), 심충겸(종손), 심우승(종손), 심희수(종손), 윤원형(사돈), 문정왕후(사돈), 이량(사돈), 상진(사돈), 이황(사위), 상기손(사위), 창성부수 이명(사위) |
| 과거 급제 | 1537년(중종 21년) 별시문과에 장원 급제, 1546년(명종 1년) 문과중시에 병과 급제 |
|---|
-
조선의 경상도관찰사 -
방유령
방유령은 1460년에 태어나 1529년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김종직의 문인이며 갑자사화로 파직되었으나 복귀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훈구파이면서 사림파를 두둔하는 등 복잡한 정치적 행보를 보였다. -
조선의 경상도관찰사 -
김성일 (1538년)
김성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이황의 제자이며, 조선통신사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하여 임진왜란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병사, 경상도 초유사,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다. -
1499년 출생 -
이준경
이준경은 조선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명종 대에 영의정을 지냈고 선조 즉위 후 원상으로서 국정을 주도했으며, 을사사화 때 사림을 보호하고 을묘왜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문신이자 정치가이다. -
1499년 출생 -
디안 드 푸아티에
디안 드 푸아티에는 프랑수아 1세와 앙리 2세 시대에 영향력을 행사한 귀족 여성으로, 앙리 2세의 총애를 받으며 왕실 정책에 관여하고 건축 사업에 참여했으나, 앙리 2세 사후 권력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냈으며, 그녀의 삶은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
을사사화 관련자 -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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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사화 관련자 -
윤임
윤임은 조선 중기 무신이자 정치가로,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으나, 인종 즉위 후 윤원형과의 갈등 속에 을사사화로 유배되어 사사되었으며, 그의 생애는 당쟁 속 시대상을 보여주며 정치적 역할과 책임에 대한 논란과 엇갈린 평가를 남긴다.
2. 생애
심통원은 1499년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심회의 증손이자, 갑자사화 때 연산군에 의해 참수된 심순문(沈順門)의 4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조선의 개국공신 심덕부의 5대손으로, 세종의 장인 심온이 그의 고조부이다.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연원은 그의 형이다. 명종의 장인 심강의 숙부로, 명종비 인순왕후는 심통원의 종손녀이다. 선조 때 병조판서를 지낸 심의겸, 심충겸 형제와 심희수의 종조부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비상하여 천재로 불렸다.
1541년(중종 36) 종사관 물망에 올랐으며, 1543년 2월 세자시강원 필선으로 재직 중 경연에서의 강론이 바르지 못하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이후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합격하여, 홍문관 부응교로 등용된 뒤 시강관(侍講官)으로 임금의 학문을 돕다가, 직제학이 되어 조정의 공문서를 도맡아 작성하였다.
1546년(명종 1) 사간원 대사간, 1547년 병조참지,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1548년 승정원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쳐 우승지가 되고, 1549년 좌승지,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이어 예조 참판, 대사헌을 거쳐 바로 형조 참판이 되었다. 한성부 판윤, 1557년 7월 공조판서를 지냈다.
1558년 초 풍기군수 장문보(張文輔)의 장계를 받고 우의정 안현(安玹) 등과 함께 훼손된 안향의 영정을 개수, 복원하는 것을 주선하였다. 같은 해 8월 예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명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冬至使)로 연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1558년 12월 의정부 우찬성으로 승진했고, 1559년 의정부 좌찬성 등을 지냈다.
1560년 초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의정부 우의정으로 승진, 심통원은 영의정을 지낸 심연원에 이어 정승 자리에 오르면서, 형제 정승으로 이름을 날렸다.
1564년 의정부 좌의정에 이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 뒤 명종이 자신의 외삼촌 윤원형을 견제할 목적으로 이량을 세우자, 윤원형의 경쟁자이기도 했던 심통원은 그를 지원하였다. 1565년 왕의 외척으로서 윤원형 등과 권력을 남용하고 뇌물을 받아 물의를 빚었으며, 3사로부터 탄핵을 받고, 좌의정에서 물러나,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으며 약방 도제조를 겸하였다. 한편 그는 새로 영의정이 된 이준경과도 갈등하였다.
병약한 명종은 후사도 없이 임종을 목전에 두었는데, 이준경은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 균을 왕재로 보았다. 그러나 심통원은 다른 뜻을 품고 있어 동의할 낌새가 없었다. 이준경은 심통원에게 약을 가져오라고 한 뒤, 아랫사람에게 시키자 그를 꾸짖고 손수 내의원 별당 다락으로 올라가 약을 찾게 하였다. 그때 이준경은 다락으로 통하는 문을 잠가버렸다. 그리고 다급히 명종을 배알하고는 후사를 지명할 것을 주청했다. 명종이 "덕흥군 제삼자"라고 말하니, 주서 황대수가 큰 글자로 받아 적어 등에 지고 나갔고, 이로써 하성군이 왕업을 물려받으니 그가 바로 선조였다.
1567년 율곡 이이는 심통원이 명종 때 윤원형 등과 함께 뇌물을 받고 권력을 축재하였다고 탄핵하였다. 선조 즉위 후, 왕대비의 가까운 친척이라는 이유로 죄를 감면하자는 여론이 있었으나, 아부한 죄로 삼사의 탄핵을 받았다. 이이는 다시 탄핵상소를 올려 심통원의 관직을 삭탈했다. 심통원은 1572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심통원은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뒷날 포천시 소흘읍) 이곡리 42번지 산에 안장되었으며, 1575년 묘소 근처에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묘소는 포천시의 향토유적 제16호 《심통원선생 묘 및 신도비》로 지정되었다.
2.1. 가계와 출생
1499년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 심회의 증손이자, 갑자사화 때 연산군에 의해 참수된 심순문(沈順門)의 4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조선의 개국공신 심덕부의 5대손으로, 세종의 장인 심온이 그의 고조부이다.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연원, 기묘명현(己卯名賢) 심달원, 동지돈녕부사 심봉원(沈逢源)은 그의 형이다. 명종의 장인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의 숙부로, 명종비 인순왕후는 심통원의 종손녀이다. 선조 때 병조판서를 지낸 서인의 초대 영수 청양군(靑陽君) 심의겸, 병조판서를 지낸 청림군(靑林君) 심충겸 형제와 청성부원군 심희수(沈喜壽)의 종조부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비상하여 천재로 불렸다.
2.2. 관료 생활 초기
1541년(중종 36) 종사관 물망에 올랐다. 1543년 2월 세자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弼善)으로 재직 중 경연에서의 강론이 바르지 못하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당시 사헌부는 '이때 학술이 바르지 못하여 평소 물론이 있고 전에 본원(本院)의 사서(司書)로 있으면서 서연(書筵)에서 강론할 즈음에 바르지 못한 논리를 발설하고도 굳게 고집하고 좀처럼 반성하지를 않는다'고 하였고, 왕이 이를 수락하여 면직되었다.
이후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합격하여, 홍문관 부응교로 등용된 뒤 시강관(侍講官)으로 임금의 학문을 돕다가, 직제학이 되어 조정의 공문서를 도맡아 작성하였다. 1546년(명종 1) 사간원 대사간, 1547년 병조참지,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1548년 승정원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쳐 우승지가 되고, 1549년 좌승지,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이어 예조 참판, 대사헌을 거쳐 바로 형조 참판이 되었다.
2.3. 명종 대의 관료 생활
1543년 2월 세자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弼善)으로 재직 중 경연에서의 강론이 바르지 못하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사헌부는 '이때 학술이 바르지 못하여 평소 물론이 있고 전에 본원(本院)의 사서(司書)로 있으면서 서연(書筵)에서 강론할 즈음에 바르지 못한 논리를 발설하고도 굳게 고집하고 좀처럼 반성하지를 않는다'고 하였고 왕이 수락하여 면직되었다.
이후 문과 중시(文科重試)에 병과로 합격하여, 홍문관 부응교로 등용된 뒤 시강관(侍講官)으로 임금의 학문을 돕다가, 직제학이 되어 조정의 공문서를 도맡아 작성하였다. 1546년(명종 1) 사간원 대사간, 1547년 병조참지,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고, 1548년 승정원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쳐 우승지가 되고, 1549년 좌승지,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이어 예조참판, 대사헌을 거쳐 바로 형조참판이 되었다. 이후 한성부 판윤, 1557년 7월 공조판서를 지냈다.
1558년 초 풍기군수 장문보(張文輔)의 장계를 받고 우의정 안현(安玹) 등과 함께 훼손된 안향의 영정을 개수, 복원하는 것을 주선하였다. 1558년 8월 예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명나라에 파견되는 동지사(冬至使)로 연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1558년 12월 의정부 우찬성으로 승진했고, 1559년 의정부 좌찬성 등을 지냈다.
1560년 초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의정부 우의정으로 승진, 심통원은 영의정을 지낸 심연원에 이어 정승 자리에 오르면서, 형제 정승으로 이름을 날렸다.
1564년 의정부 좌의정에 이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 뒤 명종이 자신의 외삼촌 윤원형을 견제할 목적으로 이량을 세우자, 윤원형의 경쟁자이기도 했던 심통원은 그를 지원하였다. 1565년 왕의 외척으로서 윤원형 등과 권력을 남용하고 뇌물을 받아 물의를 빚었으며, 3사로부터 탄핵을 받고, 좌의정에서 물러나,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으며 약방 도제조를 겸하였다.
한편 그는 새로 영의정이 된 이준경과도 갈등하였다.
2.4. 명종 임종 직전
병약한 명종은 후사도 없이 임종을 목전에 두었는데, 이준경은 덕흥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 균을 왕재로 보았다. 그러나 외척인 좌의정 심통원은 다른 뜻을 품고 있어 동의할 낌새가 없었다. 그러자 이준경이 심통원에게 일렀다.
"태의가 전하를 진맥해 본 결과 아무 약이 효험이 있다고 하니 좌상께서 내의원 별당으로 가서 그 약을 좀 가져오시지요." 심통원은 수하에게 영상의 명을 대행하게 했다. 그러자 이준경은 눈을 부릅뜨고 심통원을 꾸짖었다. "전하의 환우가 심히 불안한 지경인데 상감께 올릴 약을 어찌 아랫사람에게 시킨단 말이오!"
심통원은 얼른 사과하고는 손수 내의원 별당 다락으로 올라가 약을 찾았다. 그때 이준경은 다락으로 통하는 문을 잠가버렸다. 그리고 다급히 명종을 배알하고는 후사를 지명할 것을 주청했다. "아직 나라의 근본이 정해지지 않았으니 하교해 주시기 바랍니다." 숨이 턱에 받친 명종이 간신히 입을 열어 "덕흥군 제삼자"라고 말하니 이준경이 뒤를 돌아보고는 큰 소리로 따라 외쳤다. 주서 황대수가 큰 글자로 받아 적어 등에 지고 나갔고, 이로써 하성군이 왕업을 물려받으니 그가 바로 선조였다.
2.5. 말년과 죽음
1567년 율곡 이이는 심통원이 명종 때 윤원형 등과 함께 뇌물을 받고 권력을 축재하였다고 탄핵하였다. 선조 즉위 후, 왕대비의 가까운 친척이라는 이유로 죄를 감면하자는 여론이 있었으나, 아부한 죄로 삼사의 탄핵을 받았다. 이이는 다시 탄핵상소를 올려 심통원의 관직을 삭탈했다. 심통원은 1572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심통원은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뒷날 포천시 소흘읍) 이곡리 42번지 산에 안장되었으며, 1575년 묘소 근처에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묘소는 포천시의 향토유적 제16호 《심통원선생 묘 및 신도비》로 지정되었다.
3. 사후
1567년 명종 때의 외척으로 율곡 이이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다. 1572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뒷날 포천시 소흘읍) 이곡리 42번지 산에 안장되었으며, 1575년 묘소 근처에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묘소는 포천시의 향토유적 제16호 《심통원선생 묘 및 신도비》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