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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만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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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만춘은 안시성 전투에서 활약한 고구려의 인물로, 그의 생애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이름조차 확실하지 않다. 16세기 명나라 소설에서 처음 등장하며, 조선 시대 문인들이 이 이름을 널리 사용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안시성 성주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며, 류성룡은 안시성 성주의 뛰어난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당 태종이 안시성을 공격했을 때, 양만춘은 안시성을 굳건히 지켜내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냈으며, 당 태종은 그의 용맹함을 기려 비단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양만춘은 드라마와 영화 등 대중문화에서도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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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만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양만춘
원어명楊萬春
직위안시성
성별남성
국적고구려
생애
출생미상
사망미상
군사 경력
소속고구려군
지휘안시성군
주요 참전 전투/전쟁안시성 전투

2. 이름

안시성 전투를 제외한 그의 생애는 모든 것이 미상으로 그 이름조차 현존하지 않는다. 현전하는 기록 중에서 양만춘(梁萬春)이란 이름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6세기 명나라소설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 약칭은 당서연의 혹은 당서지전)이다. 〈태종동정기〉(太宗東征記)는 이 의 후반부를 이른다. 이익은 또다른 전거로 하맹춘(何孟春)의 《여동서록》(餘冬序錄)을 들었으나[17] 여동서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이익이 착오를 범한 듯 하다. 어쨌든 윤근수,[18] 송준길,[19] 박지원[20]조선의 많은 문인들이 당서연의를 채용하면서 양만춘이란 가공의 이름이 널리 퍼졌다.[21] 한편에서는 성씨가 梁(양)이 아니라 楊(양)이라 주장하였고[22] 楊萬春(양만춘) 역시 널리 통용되었다.

김부식은 그의 저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안시성 수비대장의 이름을 알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2]

명나라 시대의 슝다무라는 작가는 그의 역사 소설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에서 수비대장의 이름을 량만춘(梁萬春)으로 썼다.[3]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오종도와 이시파는 윤근수에게 수비대장의 이름이 량만춘이라고 말했다.[4] 1669년, 조선의 현종은 송준길에게 그의 이름을 물었고, 그는 량만춘(梁萬春)의 한국식 발음인 량만춘이라고 대답했다.[5] 1768년에 처음 편찬된 (송준길, 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어떤 사람이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무엇이었습니까?'라고 묻자, 준길이 대답했다. '그것은 량만춘이었다. 그는 태종의 군대를 능숙하게 막아냈으므로, 우리는 그를 '선수성자'(善守城者, "성채를 잘 지키는 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6] 그러나 한국어 발음 규칙인 두음법칙 때문에, 량만춘(량만춘)은 일부 한국 방언에서는 양만춘(양만춘)으로 발음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이름은 점차 양만춘(楊萬春)으로 잘못 해석되기 시작했다. 박지원이 18세기에 쓴 ''열하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화살을 쏘아 당나라 태종의 눈을 맞히자, 황제는 성벽 아래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이것은 즉각적인 공격을 위한 신호가 아니라, 황제가 양만춘에게 비단 100필을 하사하며, 그의 한국 을 위해 성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것을 칭찬하는 관대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7] 시간이 지나면서 양만춘(楊萬春)은 안시성 수비대장의 이름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3. 생애

642년(보장왕 1년) 연개소문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으나, 양만춘은 이에 복종하지 않고 을 지켰다.[11] 644년 당 태종고구려를 침공하여 전쟁을 일으켰고, 645년 안시성까지 진군해온 군에 맞서 오랫동안 버텼다. 강하왕(江夏王) 이도종이 성의 동남방에 토산을 쌓자, 양만춘 역시 성벽을 더욱 높여 대응하였다. 하루에도 예닐곱 번의 교전이 벌어졌으며, 충차나 포석에 파괴된 곳은 목책을 세워 수리하였다. 당군은 60일 동안 밤낮으로 토산을 쌓아 성을 내려다보게 되었으나,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의 실수로 토산이 무너져 안시성 측에 빼앗겼다. 양만춘은 수백 명을 이끌고 토산을 점령하고 해자를 둘러 당 태종의 3일에 걸친 공격을 막아냈다.

겨울이 다가와 보급이 어려워지자 당 태종은 퇴각을 명하며 안시성 주위를 돌며 시위하였다. 양만춘은 병력을 물리고 성에 올라 작별 인사를 했다.[8] 당 태종은 양만춘이 성을 굳게 지킨 것을 높이 평가하여 비단 100필을 내렸다. 이후 양만춘의 행적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의 Xiong Damu|웅대목중국어는 역사 소설 '''『당서지전통속연의』'''에서 안시성 성주를 량만춘(梁万春)이라 칭했다.[12]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오종도 장군과 감사(=지방관)는 윤근수에게 성주 이름이 량만춘이라고 전했다.[13] 1669년, 조선 현종은 송준길에게 이름을 물었고, 송준길은 '량만춘'(Ryang Manchun영어)이라고 답했다.[14] 1768년 처음 편찬된 송준길의 '''『동춘당선생별집』'''에는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송준길이 "량만춘이다. 당 태종의 군대로부터 성을 잘 지켜 '성을 잘 지킨 자'라고 부를 만하다"라고 답했다는 기록이 있다.[15] 그러나 두음법칙에 따라 량만춘한국어(Ryang Manchun영어)은 Yang Manchun영어으로 발음되면서 점차 양만춘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8세기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양만춘이 화살을 쏘아 태종의 눈을 맞히자, 황제가 성벽 아래에 부대를 집결시켰다. 이는 공격 신호가 아니라, 안시성을 지켜낸 양만춘에게 비단 100필을 하사하며 황제의 너그러움을 보인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있다.[16]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했다.[11]

4. 평가

642년, 연개소문영류왕을 살해하고 고구려의 군사 통제권을 장악했으나, 양만춘은 안시성을 항복시키지 않았다. 연개소문은 오랜 포위 공격과 수차례의 공격 시도에도 불구하고 안시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하여 양만춘의 성주 지위를 인정해야 했다.[10]

645년, 당 태종은 고구려를 상대로 한 원정을 이끌었다. 초기 고구려 국경 요새들이 함락되었지만, 당은 안시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고구려는 안시성 전투를 구원하기 위해 15만 명의 군대를 보냈으나, 이 병력은 안시성에 도달하지 못했다. 당군은 안시성을 포위했음에도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다. 태종은 대규모 토성을 건설하도록 명령했지만, 양만춘은 이를 점령하여 방어에 활용했다. 겨울이 다가오자 당군은 철수해야 했다.[10]

안시성 전투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9권(전체 21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지휘관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11] 당 태종이 이끄는 당군이 철수할 때, 양만춘은 안시성 꼭대기에 올라 당군에게 송별의 예를 올렸다고 전해진다.[8]

중국-조선 관계 통사 편찬조는 『중조 관계 통사』(길림인민출판사, 1996년)에서 당군이 대승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고구려에 큰 타격을 주어 고구려의 남진 기세를 늦추었다고 기술하고 있다.[10]

4. 1. [[김부식]]의 평가

김부식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당 태종을 탕왕과 무왕에 비견될 만한 인물로 평가하면서도, 동방 정복에서 안시성 전투에 패배한 것을 언급하며 안시성 성주를 비범한 호걸로 칭송했다. 그러나 사서에 성명조차 전해지지 않아 양웅이 제나라와 노나라 대신들의 이름이 사서에 남지 않았다고 한탄한 것처럼, 안시성주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2]

4. 2. [[류성룡]]의 평가

류성룡선조실록에서 수나라와 당나라 시절에 평안도 하나로 천하의 군대에 대적할 때 안시성주와 을지문덕 같은 사람이 있어 중국 역사에서도 찬미하였다고 평가하였다.[23]

5. 전설

당 태종안시성주가 쏜 화살에 맞아 한쪽 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14세기 고려에 등장하지만[24] 어느 사서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다만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중국 측에서 자신들의 수치로 여겨 감출 가능성은 매우 높고 조선 시대의 학자들도 이 점을 지적했다.

6. 기타

김부식삼국사기에서 안시성 성주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11]

명나라의 웅대목(Xiong Damu)은 역사 소설 '''당서지전통속연의'''에서 안시성 성주를 량만춘(梁万春)이라 언급했다.[12]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 오종도와 감사는 윤근수에게 성주의 이름이 량만춘이라고 말했다.[13] 1669년, 조선 현종은 송준길에게 성주의 이름에 대해 물었고, 송준길은 '량만춘'의 조선식 발음인 Ryang Manchun영어을 제시했다.[14]

1768년에 처음 편찬된 송준길의 '''동춘당선생별집'''에는 어떤 사람이 "안시성 성주의 이름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송준길이 "량만춘입니다. 당 태종의 군대로부터 성을 잘 지켜, 과연 '성을 잘 지킨 자'라고 부를 만하다"라고 답했다는 기록이 있다.[15] 그러나 두음법칙에 따라 량만춘한국어(Ryang Manchun영어)은 Yang Manchun영어으로 발음되었고, 점차 양만춘으로 잘못 알려지기 시작했다.

18세기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는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화살을 쏘아 태종의 눈을 맞히자, 황제는 성벽 아래에 부대를 모았다. 이는 즉시 공격하라는 신호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한국의 왕으로서 성공적으로 안시성을 지킨 것을 칭찬하며 양만춘에게 비단 100필을 하사함으로써 황제의 너그러움을 보여준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있다.[16] 결국 양만춘은 안시성 성주의 이름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DDH-973 양만춘광개토대왕급 구축함 제3번함이다.

7. 대중문화

양만춘은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다뤄졌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방영된 KBS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임동진이, 같은 시기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신동훈이 양만춘 역을 맡았다. 2013년 KBS2 드라마 《칼과 꽃》에서는 주진모가, 2018년 영화 《안시성》에서는 조인성이 양만춘을 연기했다.

7. 1. 드라마

방영 연도작품명방송사배우
1992년 ~ 1993년삼국기KBS임혁
2006년 ~ 2007년연개소문SBS임일규, 신동훈
2006년 ~ 2007년대조영KBS임동진
2013년칼과 꽃KBS2주진모
2018년안시성조인성


7. 2. 영화

작품명연도배역방송사/제작사
안시성2018년조인성영화사 수작
대조영2006년~2007년임동진KBS
연개소문2006년~2007년신동훈SBS
칼과 꽃2013년주진모KBS2


참조

[1] 서적 A New History of Korea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6-11-04
[2]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www.khaan.net[...] 2007-12-27
[3] 문서 《唐书志传通俗演义》第82回“[[李世勣]]兵进安市城 [[薛仁贵]]智取黄龙坡:却说守安市城者,却是高丽国左、右亲卫军官镇守,各分绝奴、灌奴等部。绝奴部主帅梁万春、邹定国、李佐升,灌奴部主帅欧飞、暨武、张猴孙,共六员猛将,虎踞于安市城中。
[4] 문서 尹根寿:《月汀漫录》:安市城主抗唐太宗精兵,卒全孤城,其功伟矣。姓名不传,我东之书籍鲜少而然耶?抑高氏时无史而然耶?壬辰乱後天朝将官出来我国者有吴宗道,谓余曰:“安市城主姓名梁万春,見太宗東征記云。”頃見李监司时发言:“曾見《唐书衍义》,則安市城主果是梁万春。而又有他人,守安市之将凡二人云。
[5] 문서 宋浚吉:《同春堂集》别集卷六,《经筵日记》:上曰:“安市城主,其名为谁?”浚吉曰:“梁万春也。能拒太宗之师,可谓善守城者也。”上曰:“此见于何处?”浚吉曰:“故府院君尹根寿闻于中朝而记云矣。”
[6] 문서 '" See ''Dong Chun-dang seonsaeng pyeoljip'' (book 6, "Gyeong’yeon ilgi 經筵日記", Eulyu 乙酉 year, month 4, day 26)》
[7] 문서 ''[[The Jehol Diary]]'', translated with notes by [[Yang Hi Choe-Wall]] (Folkestone, UK: Global Oriental), pp. 38-39.
[8] 뉴스 양만춘 楊萬春,?~? https://www.doopedia[...] [[斗山世界大百科事典]]
[9] 서적 A New History of Korea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6-11-04
[10] 서적 7世紀以前の中国・朝鮮関係史 [[法政大学経済学部学会]] 2020-03-20
[11] 서적 '''『[[三国史記]]』''' ""
[12] 서적 唐書志伝通俗演義 "" ""
[13] 서적 月汀漫録 "" ""
[14] 서적 同春堂先生別集 "" ""
[15] 문서 '''『同春堂先生別集』'''を参照されたい(第六巻「経筵日記」乙酉年四月二十六日)。
[16] 문서 {{仮リンク|崔洋姫|en|Yang Hi Choe-Wall}}の注釈付きで翻訳された'''『{{仮リンク|熱河日記|en|The Jehol Diary}}』'''(Folkestone, UK: Global Oriental), pp. 38-39.
[17] 문서 이익, 《[[성호사설]]》27권 경사문(經史門) 안시성주
[18] 문서 《월정선생별집》(月汀先生別集) 4권 만록(漫錄)
[19] 문서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 6권 경연일기 기유 4월 26일
[20] 문서 《[[열하일기]]》 도강록 28일 을해
[21] 간행물 남재철, 〈안시성주의 성명 '양만춘' 고증(Ⅰ) - 성명의 출처 양상 검토를 중심으로〉, 《동아시아고대학》 vol.35, 동아시아고대학회, 2014
[22] 문서 [[김창흡]] 《삼연집》(三淵集) 19권 답송요좌(答宋堯佐)
[23] 웹인용 조선왕조실록 https://sillok.histo[...] 2024-12-13
[24] 문서 [[이색]], 《목은시고》(牧隱詩藁) 2권 [[정관 (당)|정관]]을 읊다, 유림관에서(貞觀吟 楡林關作, 정관음 유림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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