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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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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주동은 대한제국 개성 출신의 문학가로, 시인, 문학평론가, 국문학자, 번역가, 교육자,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경성중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숭실전문학교, 동국대학교, 연세대학교 등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1923년 동인지 《금성》으로 문단에 등단하여 시집 《조선의 맥박》, 향가 해독서 《조선고가연구》, 《여요전주》 등을 저술했다. 1920년대 번역 논쟁의 중심에 있었으며, 절충주의 문학론을 주창했다. 건국실천원양성소 강사로 활동했으며, 한국독립당과 신민당에서 활동했다. 1977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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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동 (작가)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양주동
한글양주동
한자梁柱東
로마자 표기Yang Ju-dong
무애
한글 (호)무애
한자 (호)无涯
로마자 표기 (호)Mu Ae
기본 정보
출생일1903년 6월 24일
출생지개성시, 경기도, 대한제국
사망일1977년 2월 4일
사망지서울특별시 중구
묘소용인공원, 모현면, 처인구, 용인시, 경기도, 대한민국
본관남해
직업교수, 문학 학자
국적대한민국
종교유교(성리학)
언어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학력와세다 대학교
가족 정보
양원장
강릉 김씨 부인
친척양재연(5촌 종숙부)
양주남(6촌 남동생)
경력
경력동국대학교 대학원장
경력한국독립당 당무위원
활동 기간1919년 ~ 1960년
작품 정보
주요 작품시 《어머님의 마음》
수상
수상 내역평양고보 명예 졸업장 수여(1948.05.31.)
수상 내역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1950.02.01.)
기타 정보
웹사이트두피디아 양주동
대한민국 학술원 양주동 교수

2. 생애

개성에서 태어나 잠시 평양에서 유아기를 보냈고, 장연에서 성장했다. 경성중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1928년 와세다 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19년 염상섭과 공동으로 『문예공론』을 발간했으며, 숭실전문학교(현 숭실대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1923년 동인지 『금성』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1930년 시집 『조선의 맥박』을 출판했다.

그 후, 향가 연구에 몰두하여 1942년 한국인 최초로 향가 25수 전편 해독집 『조선고가연구』를 출판했다. 1947년에는 고려가요 주석을 집대성한 『여요(麗謠)선주(箋注)』를 출판했다. 같은 해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했고, 1954년부터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연세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나, 이후 동국대학교로 돌아갔다.

1948년 5월 31일 평남평양고보 재경 동문회에서 평양고등보통학교 명예 졸업장을 받았으며, 1950년 2월 1일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 제정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역자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본부에 자수하였다.[28][29]

1950년대 이후 자신을 '국보 1호'로 칭했으며, 탄허에게 장자 강의를 듣고 오체투지로 절을 한 일화가 전해진다.[30] 1960년 6월 24일 문학 창작 분야에서 은퇴하고, 1977년 뇌출혈로 사망할 때까지 17년 동안 학술 분야 교수로 활동했다.

2. 1.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

개성에서 태어나 잠시 평양에서 유아기를 보냈고, 장연에서 성장했다. 경성중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8년 와세다 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1] 1919년에 염상섭과 공동으로 『문예공론』을 발간했으며, 1923년 동인지 『금성』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1930년에는 시집 『조선의 맥박』을 출판했다.[2]

1903년 6월 24일 개성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열두 살 때는 어머니를 여의었다.[1] 1920년 서울로 가서 중동고등학교에서 공부했고, 1921년 일본 도쿄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여 영문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2]

2. 2. 교육 활동 및 문학 활동

1922년 경성중동고등보통학교졸업하고 같은 해 일본 도쿄로 유학, 이듬해 1923년 와세다 대학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하여 1928년 문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29년 귀국하여 1932년 9월부터 1941년 9월까지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1923년 동인지 《금성》(金星)으로 등단하였고, 1932년 시집 《조선의 맥박》을 펴냈다. 1919년 염상섭과 함께 발간한 《문예공론》의 평론은 절충론으로 불리기도 한다.[6][7]

이후 향가 해독에 몰입하여 고시대 시가 해석에 힘썼다. 1942년 한국인 최초로 향가 25수 전편 해독집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를 펴냈다.[10] 1947년에는 《여요전주》(麗謠箋注)를 통해 《고려가요》 주석을 집대성하였다.

1947년 8월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하였고, 1954년부터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연세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나, 이후 동국대학교로 돌아갔다.

1919년 문학평론가로 시작하여 시, 평론, 수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1960년 6월 24일 문학 창작 분야에서 은퇴하고 이후 17년 동안 학술 분야 교수로 활동하였다.

초기에는 서양 문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데 집중했다. 1923년 유엽, 백기만, 이장희와 함께 잡지 ''금성''을 창간하여 다른 나라의 문학 운동을 소개했다.[5] ''금성''에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샤를 보들레르,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 등이 소개되었다.

2. 3. 향가 및 고려가요 연구

양주동은 30대와 40대에 한국 고전 시가(고려가요)와 향가 연구에 집중했다. 일본 언어학자 오구라 신페이가 1929년 『향가 및 이두 연구』를 출판하자, 양주동은 이 정전(正典)을 연구할 한국인이 필요하다고 느꼈다.[14] 1937년, 그는 오구라의 해석에 대한 비판과 함께 "원왕생가(怨王生歌)의 연구"를 발표했다.[15] 양주동 비판의 핵심은 오구라가 향가를 해석할 때 운율과 리듬의 중요성을 간과했다는 것이었다. 양주동은 원문의 시적 형태를 전달하는 데 운율적 요소의 보존이 중요하다고 믿었다.[15] "연구"는 한국인이 한국의 유산을 분석하려는 최초의 시도로 학계에서 높이 평가받았지만, 양주동의 연구가 몇몇 부분에서 충분한 언어학적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구는 한국의 향가 연구 초창기에 지배적인 업적이었으며, 그의 뛰어난 시적 형식의 활용은 그 분야의 사람들에게 거의 이의 제기를 받지 않았다. 향가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관심은 1942년 『조선고가연구』 출판으로 이어졌다. 한국 해방 이후 양주동은 고려가요에 대한 완역 주해서인 『여요전주』(1947)와 『조선고가연구』의 개정판인 『고가연구』(1954)를 저술했다.

이후 향가 해독에 몰입하면서, 고시대 시가 해석에 힘을 쏟았다. 특히 1942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향가 25수 전편에 대한 해독집인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를 펴냈다. 이어 1947년에는 《여요전주》(麗謠箋注)를 통하여 《고려가요》에 대한 주석을 집대성하였다.

2. 4. 광복 이후 활동

1947년 8월에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하였고, 1954년부터는 대한민국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1948년 5월 31일, 평남평양고보 삼팔선 이남측 재경 동문회에서 평양고등보통학교 명예 졸업장을 받았으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50년 2월 1일,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 제정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역자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본부가 구성되자 부역 행위에 대해 자수하였다.[28][29]

1950년대 이후 자신을 가리켜 ‘국보 1호’라고 칭하고 다녔으며, 이와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10살 연하였던 탄허에게 오대산에서 1주일간 장자 강의를 들은 뒤에는, 탄허에게 오체투지로 절을 했다고 한다. 이후 양주동은 탄허를 가리켜 “장자가 다시 돌아와 제 을 설해도 오대산 탄허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30]

양주동은 자신의 글 ‘연북록’(硏北錄)에서 “어려서부터 평소의 야망은 오로지 ‘불후(不朽)의 문장’에 있었으매, 시인 비평가 사상인(思想人)이 될지언정 ‘학자’가 되리란 생각은 별로 없었다”고 술회하였다.[31]

양주동은 자신의 글 ‘한자 문제’에서 “아닌게 아니라, 내 글에는 한자어가 많고 벽자(僻字)조차 수두룩함이 사실이다. 어려서 한학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일상 용어에 한자어를 남보다 더 많이 쓰는 버릇이 있으니, 문장이 또 그럴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술회하였다.[31]

양주동은 3인칭 대명사로 남자는 ‘그놈’ 여자는 ‘그년’이라 쓰자고 제안한 일이 있다고 한다.[32]

2. 5. 정계 활동

1946년 2월부터 1947년 1월까지 한국독립당 당무위원 겸 문화예술행정특임위원을, 1972년 2월부터 1973년 3월까지 신민당 당무위원 겸 문화예술행정특임고문을 지냈다.

2. 6. 말년

1977년 자택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74세로 사망했다.[1]

3. 주요 활동 및 평가

양주동은 1920년대부터 문학, 번역, 민족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 양주동은 번역에 대한 비판적 담론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잡지 《금성》에서 김억과 외국 문학의 효과적인 번역 방법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10] 김억은 번역에서 창작의 자유를 중시한 반면, 양주동은 원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양주동은 번역가의 역할을 저자와 독자 사이의 정확한 중재자로 보았으며, 원문의 정확한 전달이 불가능하더라도 번역가는 외국 텍스트를 새로운 독자에게 소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었다.[10]

또한 양주동은 1927년 외국문학연구회 회원들이 발행한 잡지 《해외문학》의 번역 방식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는 번역된 언어가 대상 언어로 국내화되어야 하고, 한자 사용을 피해야 하며, 외국 어휘의 성급한 도입을 삼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일본어, 중국어, 유럽어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를 보존하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준다.[10]

번역에 대한 이러한 논쟁은 번역에 대한 독립적인 의제를 설정하고 외국 작품의 임의적인 수정의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10]

초창기 양주동은 샤를 보들레르,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 등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을 한국에 소개하는 등 서양 문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데 힘썼다.[4] 또한 민족주의 문학과 프롤레타리아 문학 사이의 논쟁에서 양주동은 두 가지의 이분법을 넘어설 것을 주장하는 절충주의적 관점을 제시했다.[6] 그는 문학이 역사적 시대의 다양한 조건하에서 형성되며, 따라서 환경의 정치적 측면과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그는 민족주의적 접근 방식이 일본 식민 시대의 격동기를 거친 후에야 도달할 수 있는 이상이라고 주장하며, 민족주의가 민족의 요구에 맞는 변화를 요구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니즘이 민족주의 문학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방식에 반대하며, 문화적 중요성을 지닌 텍스트가 장기적인 독립을 회복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21]

양주동의 절충주의적 문학론은 당시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파악하고 현대적 요구에 맞게 수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의 접근 방식은 그가 비판했던 두 이데올로기를 대체할 구체적인 청사진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는다.[22]

그 외에도 양주동은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48년에는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하였고,[28] 1950년대 이후 자신을 '국보 1호'라고 칭하며 여러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또한 10살 연하였던 탄허에게 오대산에서 장자 강의를 들은 뒤 오체투지로 절을 하고, 탄허를 가리켜 "장자가 다시 돌아와 제 을 설해도 오대산 탄허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칭송하기도 했다.[30] 그는 자신의 글에서 "어려서부터 평소의 야망은 오로지 '불후(不朽)의 문장'에 있었다"고 술회하며,[31] 자신의 글에 한자어가 많고 어려운 글자도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도 했다.[31]

3. 1. 번역 논쟁

1920년대 양주동은 번역에 대한 비판적 담론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잡지 《금성》에서 김억과 외국 문학의 효과적인 번역 방법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몇 년 후, 그는 외국 문학 연구회와 유사한 문제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이러한 논쟁은 학자 및 작가들에 의한 외국 텍스트 번역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10]

김억과의 논쟁은 김억이 양주동의 《금성》에서의 직역을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 김억은 그것들이 단순히 단어의 전이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양주동은 번역에서 창작의 자유라는 개념은 텍스트의 원래 의미를 왜곡할 위험을 야기한다고 주장했다. 양주동의 비판은 그가 번역의 주요 기능을 저자와 독자 사이의 정확한 중재자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원문의 정확한 전달이 다른 언어로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그는 번역가의 역할이 새로운 독자에게 외국 텍스트를 소개하기 위한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김억은 다른 접근 방식으로 번역을 해석했다. 김억은 번역된 작품을 또 다른 독립적인 텍스트로 간주함으로써 번역의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믿었다. 김억에게 번역가의 핵심은 텍스트 전달보다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는 데 있었다.[10]

한국 학술 담론에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중요한 논쟁은 1927년 외국문학연구회 회원들이 발행한 잡지 《해외문학》에 대한 양주동의 비판이었다. 《해외문학》의 창작자들은 외국 텍스트를 확보하여 한국의 문학적 지평을 넓히는 것을 목표로 했다. 양주동은 잡지의 목적에 동의했지만, 잡지의 번역 방식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다. 양주동은 이 비판에서 번역에 대한 세 가지 요구 사항을 나열했다. 첫째는 번역된 언어가 대상 언어로 국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한자 사용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은 외국 어휘의 성급한 도입을 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양주동과 대조적으로, 외국문학연구회의 대표적인 회원인 이하윤과 김진섭은 텍스트의 명료한 전달에 외국어 사용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양주동이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일본어, 중국어, 유럽어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한국어를 보존하려는 의지로 해석된다.[10]

번역에 대한 이러한 논쟁은 두 가지 주요 측면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첫째, 번역에 대한 독립적인 의제를 설정하는 방향으로의 진전을 보여주었고, 둘째, 외국 작품에 대한 임의적인 수정의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양주동의 비판적인 논쟁은 한국의 초기 번역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며, 모호한 텍스트 번역에 대한 의제를 설정한 시대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여겨진다.[10]

3. 2. 절충주의 문학론

초창기 양주동은 서양 문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데 힘썼다. 1923년, 유엽, 백기만, 이장희와 함께 잡지 ''금성''을 창간하여 다른 나라의 문학 운동을 소개했다. ''금성''에는 샤를 보들레르,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 등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이 소개되었다.[4] ''금성''은 또한 한국 시인들의 창작 시를 많이 실어 1920년대 한국 현대시 발전에 기여했다.[5]

이 시기 양주동의 연구는 민족 문학의 이론적 토대를 만드는 데 집중되었다. 민족주의 문학과 프롤레타리아 문학 사이의 논쟁 속에서 양주동은 당시 주류 문학적 관점이었던 두 가지의 이분법을 넘어설 것을 주장했다.[6] 이러한 절충주의적 관점은 그의 논문 "문예비평가의 태도 기타"에서 처음 나타났으며, "다시 문예비평의 태도에 취하야"에서 구조적 관점으로 발전했다.[7]

양주동은 1920년대 한국에서 민족주의와 프롤레타리아니즘 사이의 절충적 관점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16] 1920년대는 민족주의와 프롤레타리아니즘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던 시기였다. 일제강점기에 놓인 한국의 학자들은 문학의 주요 목표를 민족 주권 회복으로 여겼지만, 이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에 대한 견해는 달랐다. 민족주의자들은 민족 정신을 반영하는 작품을 선호하며 텍스트 자체에 중점을 둔 반면, 프롤레타리아니스트들은 문학이 정치적 메시지를 고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니즘 지지자들은 카프(KAPF)[17]를 창립하고 민족주의 문학을 적극적으로 비판했다.

이 두 관점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시대의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양주동은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들을 통해 양쪽의 급진성을 비판하고, 두 관점 사이의 타협점을 모색했다.[18] 1927년에는 민족주의와 프롤레타리아적 가치를 모두 포용하는 방식으로 문학을 발전시키고 연구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신간회 회원이였던 양주동은 민족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두 관점 모두의 결점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9]

이러한 관점은 양주동의 논문 "철저와 중용—조선이 가지고 싶은 문학"(조선일보 1926.1.10–12)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문학이 역사적 시대의 다양한 조건하에서 형성되며, 따라서 환경의 정치적 측면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20] 문학이 역사적 문제와 책임을 반영한다는 그의 생각은 사회적 요소의 영향을 과소평가한 민족주의 학자들을 비판했다. 양주동은 민족주의적 접근 방식이 일본 식민 시대의 격동기를 거친 후에야 도달할 수 있는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민족주의가 민족의 요구에 맞는 변화를 요구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또한 프롤레타리아니즘이 민족주의 문학의 중요성을 폄하하는 방식에 반대했다. 양주동은 문화적 중요성을 지닌 텍스트가 장기적인 독립을 회복하는 데 필수적이며, 따라서 정치적 텍스트에 치우쳐 소홀히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21]

오늘날, 양주동의 관점은 당시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파악하고 현대적 요구에 맞게 수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양주동의 접근 방식은 또한 그가 비판했던 두 이데올로기를 대체할 구체적인 청사진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종종 받는다.[22]

3. 3. 기타


  • 1948년 5월 31일, 평남평양고보 삼팔선 이남측 재경 동문회에서 평양고등보통학교 명예 졸업장을 받았으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50년 2월 1일,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 제정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역자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본부가 구성되자 부역 행위에 대해 자수하였다.[28][29]
  • 1950년대 이후 자신을 '국보 1호'라고 칭하고 다녔으며, 이와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 10살 연하였던 탄허에게 오대산에서 1주일간 장자 강의를 들은 뒤, 탄허에게 오체투지로 절을 했다고 한다. 이후 양주동은 탄허를 가리켜 "장자가 다시 돌아와 제 을 설해도 오대산 탄허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30]
  • 양주동은 자신의 글 '연북록'(硏北錄)에서 "어려서부터 평소의 야망은 오로지 '불후(不朽)의 문장'에 있었으매, 시인, 비평가, 사상인(思想人)이 될지언정 '학자'가 되리란 생각은 별로 없었다"고 술회하였다.[31]
  • 양주동은 자신의 글 '한자 문제'에서 "아닌게 아니라, 내 글에는 한자어가 많고 벽자(僻字)조차 수두룩함이 사실이다. 어려서 한학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일상 용어에 한자어를 남보다 더 많이 쓰는 버릇이 있으니, 문장이 또 그럴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술회하였다.[31]
  • 양주동은 3인칭 대명사로 남자는 '그놈', 여자는 '그년'이라 쓰자고 제안한 일이 있다고 한다.[32]

4. 건국실천원양성소

1947년 김구가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있던 원효사를 본부로 설립한 건국실천원양성소는 명예소장 이승만, 소장 김구, 이사장 장형으로 출발하였다.[33][34][35] 전국 각지의 우수한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건국운동의 중견 일꾼으로 양성하고자 교육을 시켰으며, 매 기 교육 인원은 100명 내외였다. 교육 기간은 제1기가 2개월, 제2기부터 제9기까지는 1개월이었다. 교육 내용은 독립운동사·정치·경제·법률·헌법·역사·선전·민족문화·국민운동·철학·약소민족문제·농촌문제·협동조합·사회학·공산주의 비판·여성문제 등과 특별강의였다.

강사는 조소앙·조완구·신익희·지청천·나재하·김성주·김경수·김정실·양주동·민영규·엄상섭·엄항섭·김학규·설의식·김기석·이상조·주석균·홍병선·김하선·김석길·안재홍·정인보·황기성·이인·김활란·김법린·박순천·이은상 등 각계의 인사들이었다. 이때 양주동은 친분이 있던 김정실, 엄항섭과 함께 강사로 참여하였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된 후, 1949년 8월 23일 건국실천원양성소는 해체되고 건물 원효사는 1949년 9월 홍익대학교에 인수되었다.[33][34][35]

5. 저술


  • 《조선의 맥박》 (1930)
  • 《조선고가연구》 (1942)
  • 《여요전주》 (1947)
  • 《국학연구논고》 (196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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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백과사전 Geum-Seong [금성] encykorea.aks.ac.kr/[...]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1996
[5] 간행물 "[Reviewing the Poetic World of Baek Kiman ['향토문학계 거목' 백기만 시인 창작세계 재조명]" https://www.kyongbuk[...] Kyongbok Ilbo [경북일보] 2015-07-13
[6] 논문 A study of Yang, Ju-dong's Eclectic Literature Theory Korean Education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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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간행물 “Yang Ju-dong’s Debate on Translation [양주동의 번역 논쟁]” https://www.hani.co.[...] Hankyoreh [한겨레] 201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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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문서 Korea Artista Proletaria Federatio
[18] 문서 Ibid.,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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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웹사이트 양주동(梁柱東) http://encykorea.aks[...] 2022-09-07
[24] 웹사이트 국문학자 梁柱東(양주동)박사 別世(별세) https://newslibrary.[...] 2022-09-07
[25] 문서 해당 시문 작품 구절 전문에, 서양 고전 클래식 음악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이흥렬]]([[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역임)이 멜로디(악곡)를 붙이어 작곡하여, 동명 제목의 국내 서양식 가곡 작품으로도 발표.
[26] 문서 [[음력 6월 24일]]
[27] 웹사이트 링크 http://m.newsinmul.c[...]
[28] 뉴스 부역행위 자수자 증가 서울신문 1950-12-11
[29] 웹사이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
[30] 뉴스 오대산 탄허선사 http://www.hani.co.k[...] 한겨레 2005-05-31
[31] 뉴스 말들의 풍경 <29> 戱文의 우아함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6-09-19
[32] 뉴스 우리말과 2인칭 호칭 https://news.naver.c[...] 대전일보 2006-10-11
[33] 뉴스 「建實(건실)」解散(해산) 경향신문 1949-08-25
[34] 뉴스 建國實踐員養成所(건국실천원양성소) 弘益大財團(홍익대재단)서 經營(경영) 경향신문 1949-09-25
[35] 뉴스 서울대 법대 학장 지낸 민법학자 진승록 http://news.koreanba[...] 대한변협신문 201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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