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루과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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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루과이의 역사는 약 10,000년 전부터 시작되어, 차루아족 등 원주민들이 거주했다. 16세기 유럽인들이 도래하면서 식민지 시대를 겪었고, 1811년 호세 아르티가스를 중심으로 독립 투쟁이 시작되었다. 1828년 독립을 달성한 후, 대전쟁과 삼국 동맹 전쟁을 거치며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1875년부터 군정이 시작되었고, 이후 '남미의 스위스'로 불리며 사회 개혁과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1955년 이후 경제 침체와 사회 불안이 심화되었고, 1973년부터 군사 독재 시대를 맞이했다. 1985년 민정 이양 이후 경제 개혁과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왔으며, 2019년 총선에서 보수 정당이 승리하면서 좌파 정권이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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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루과이의 역사 | |
|---|---|
| 역사 | |
| 초기 역사 | |
| 독립 투쟁 | |
| 독립 국가 | |
| 20세기 | |
| 군사 정권 | |
| 현대 우루과이 |
2. 선사 시대와 원주민
우루과이 지역에 인류가 처음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약 10,000년 전으로, 초기 주민들은 브라질에서 기원한 문화의 영향을 받은 수렵채집 생활을 영위했다.[223][1]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볼라나 고대 암각화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223][1]
약 4,000년 전에는 차루아족과 과라니족 등이 이 지역에 도착하여 거주했다.[223][1] 유럽인 도착 전에는 이들 원주민 부족이 수렵, 어업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유럽인 접촉 당시에는 수만 명 규모의 원주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223][1]
그러나 유럽인들의 도래 이후, 이들이 옮긴 질병과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원주민 인구는 급격히 감소했으며, 우루과이가 독립할 무렵에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223][1] 특히 1831년 살시푸에데스 학살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을 겪으며 원주민 사회는 크게 위축되었다.[1]
2. 1. 선사 시대
우루과이 지역에 인류가 처음 거주하기 시작한 흔적은 약 10,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 주민들은 브라질에서 기원한 문화의 영향을 받은 카탈루냐(Catalanense) 문화와 쿠아림(Cuareim) 문화에 속하는 수렵채집 문화를 영위했다.[223][1] 가장 오래된 볼라(Bolas)는 약 7,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223][1] 또한 샤망가(Chamangá)에서는 고대 암각화가 발견되어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223][1]약 4,000년 전에는 차루아족과 과라니족이 이 지역에 도착했다.[223][1] 유럽인이 도래하기 전, 우루과이 영토에는 수렵과 낚시, 원시적인 농경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여러 부족이 거주했다. 대표적인 부족으로는 유목 생활을 하던 차루아족을 비롯해 차나족, 아라찬족, 과라니족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223][1] 당시 이 지역은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발전한 잉카 제국의 영향력 밖에 있었다.
2. 2. 원주민
우루과이 지역에 인류가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약 10,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브라질에서 기원한 카탈루냐 문화와 쿠아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수렵채집민이었다. 약 7,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볼라(bolas)가 발견되었으며, 고대 암각화는 샤망가(Chamangá) 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약 4,000년 전에는 차루아족(Charrúa)과 과라니족(Guaraní)이 이 지역에 도착했다.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 우루과이 영토에는 수렵과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유목민인 차루아족, 차나족(Chaná), 아라찬족(Arachán), 과라니족 등 소규모 부족들이 거주했다. 1500년대 유럽인들과 처음 접촉했을 당시, 차루아족은 약 9,000명, 차나족과 과라니족은 합쳐서 약 6,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223][1]
그러나 유럽인들의 도래는 원주민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유럽인들이 옮긴 질병과 끊임없이 이어진 전쟁으로 인해 원주민 인구는 급격히 감소했으며, 우루과이가 독립할 무렵에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223][1]
원주민에 대한 탄압은 1831년 4월 11일 살시푸에데스 학살(Matanza del Salsipuedes)에서 절정에 달했다. 당시 프루크투오소 리베라(Fructuoso Rivera)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우루과이 군대는 대부분의 차루아족 남성들을 학살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약 300명의 차루아족 여성과 아이들은 유럽인 가정의 가사 노예나 하인으로 보내졌다.[1]
3. 식민지 시대

식민지 시대에 현재 우루과이에 해당하는 영토는 반다 오리엔탈(우루과이강 동쪽 지역)로 불렸으며, 북쪽의 포르투갈령 브라질과 남쪽의 스페인 제국의 영향력이 충돌하는 일종의 완충지대였다. 포르투갈인들은 1512년에서 1513년 사이에 이 지역을 처음 탐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24][2]
유럽인으로서 처음 이곳에 상륙한 인물은 1516년 스페인의 탐험가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였으나, 그는 상륙 직후 원주민 차루아족에게 살해당했다.[150] 이후 1520년에는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함대가 훗날 몬테비데오가 세워질 지점에 잠시 정박했으며, 1526년에는 세바스티안 카봇이 라플라타강을 탐험하며 파라나강까지 거슬러 올라갔다.[150] 그러나 이 지역에서는 금이나 은과 같은 귀금속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16세기와 17세기 동안 유럽인들의 본격적인 정착은 제한적이었다.
17세기 들어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1603년, 당시 파라과이 총독이었던 에르난도 아리아스 데 사베드라의 지시로 소와 말이 이 지역에 도입되었고, 광활한 초원에서 야생화된 가축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훗날 가우초 문화와 목축업 발달의 기반이 되었다. 1624년에는 스페인 예수회 선교사들이 네그로강 유역(현 소리아노주)에 빌라 소리아노를 건설했는데, 이는 우루과이 영토 내 최초의 영구적인 유럽인 정착지로 기록된다. 예수회는 이곳을 거점으로 원주민 차루아족 등을 대상으로 한 선교 활동을 시도했다.
한편, 포르투갈은 토르데시야스 조약 상의 경계를 넘어 남하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1680년, 포르투갈 개척자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라플라타강 북쪽 연안에 콜로니아델사크라멘토를 건설했다.[153][154] 이곳은 부에노스아이레스와의 밀무역 거점으로 번성했지만, 스페인과의 군사적 충돌이 끊이지 않는 요충지가 되었다. 포르투갈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스페인 역시 식민 활동을 강화했다. 1726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총독 브루노 마우리시오 데 사바라는 콜로니아 델 사크라멘토의 포르투갈 세력에 맞서기 위해 동쪽 만에 몬테비데오를 건설했다.[155] 천혜의 항구를 가진 몬테비데오는 빠르게 성장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경쟁하는 주요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반다 오리엔탈의 영유권을 둘러싼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분쟁은 여러 조약을 통해 조정되었다. 1750년 마드리드 조약에서는 스페인이 콜로니아 델 사크라멘토를 확보하는 대신 다른 지역 일부를 포기하는 내용이 포함되었으나, 이후 조약 내용이 번복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예수회가 운영하던 선교 구역의 귀속 문제가 불거져 1754년과 1756년에는 예수회와 과라니족 원주민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 연합군에 맞서 싸운 과라니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다.[157] 결국 1777년 제1차 산 일데폰소 조약을 통해 반다 오리엔탈 전역과 미시오네스 동쪽 지역에 대한 스페인의 영유권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156] 한편, 유럽에서의 권력 다툼의 영향으로 1767년에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의 명령에 따라 아메리카 대륙 전역의 스페인령에서 예수회가 추방되었다.[158]
1776년,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행정 개혁(부르봉 개혁)의 일환으로 기존의 페루 부왕령에서 분리되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하는 새로운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이 설치되었고, 반다 오리엔탈은 이 부왕령에 편입되었다.[159] 이 시기 반다 오리엔탈의 토지는 소를 키우는 목장주들(에스탄시에로)에게 분할되었으며, 쇠고기가 지역의 주요 생산품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야생 소를 사냥하고 가죽을 얻으며 살아가는 가우초들이 등장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1800년경 몬테비데오의 인구는 1만 명을 넘어섰고, 농촌 지역까지 합하면 반다 오리엔탈 전체 인구는 3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이 중 약 30%는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온 노예들이었다.[225][3]
19세기 초, 유럽 대륙의 나폴레옹 전쟁은 라플라타 지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과 동맹을 맺었던 영국은 스페인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자 적대 관계로 돌아섰고, 1806년과 1807년 두 차례에 걸쳐 라플라타 지역을 침공했다(영국의 라플라타 침공). 1806년 영국군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점령했으나, 몬테비데오에서 파견된 산티아고 데 리니에르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듬해인 1807년, 영국군은 1만 명의 병력으로 몬테비데오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다시 공격하는 데는 실패했고, 결국 리니에르와의 협상 끝에 몬테비데오에서 철수했다.[4][161] 유럽에서 반도 전쟁이 발발하여 영국과 스페인이 다시 나폴레옹에 맞서는 동맹국이 되면서 영국의 라플라타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은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잠시나마 영국의 점령 하에 자유 무역을 경험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크리오요(현지 태생 백인)들 사이에서는 스페인 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치와 자유로운 교역을 추구하려는 열망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162]
4. 독립 투쟁 (1811년~1828년)

1810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일어난 5월 혁명은 리오 데 라 플라타 부왕령의 해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이는 라플라타 강 동쪽 지역인 반다 오리엔탈(Banda Oriental, 현재의 우루과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몬테비데오를 중심으로 한 지역 사회는 스페인 왕실에 충성하는 왕당파와 독립을 추구하는 혁명 세력으로 나뉘었다.[165]
이러한 혼란 속에서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가 등장하여 반다 오리엔탈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민병대를 조직하여 1811년 라스 피에드라스 전투에서 스페인군에게 승리하고 몬테비데오를 포위하는 등 초기 성공을 거두었다.[166] 그러나 독립 운동은 순탄치 않았다. 스페인 부왕의 요청으로 포르투갈-브라질 연합 왕국 군대가 침공해왔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앙 정부와의 관계도 점차 악화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는 중앙 집권적인 통일 국가를 지향했지만, 아르티가스는 각 주의 자치권을 존중하는 연방주의를 주장하며 대립했다.[166][167]
아르티가스는 엔트레 리오스 주, 코리엔테스 주 등 주변 지역과 함께 연방 동맹(Liga Federal)을 결성하고, 농지 개혁과 같은 독자적인 정책을 추진하며 세력을 넓혔다.[168][169][170] 하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의 견제와 1816년 시작된 포르투갈-브라질 군대의 대규모 침공으로 인해 결국 1820년 타쿠아렘보 전투에서 패배하고 파라과이로 망명해야 했다. 이후 반다 오리엔탈은 브라질 제국의 시스플라티나 주로 편입되었다.[171][172]
브라질의 지배 하에서도 독립을 향한 열망은 계속되었다. 1825년,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가 이끄는 33인의 동방인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원을 받아 반다 오리엔탈에 상륙하여 봉기했다.[174][175] 이는 라플라타 연합주(당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제국 간의 시스플라티나 전쟁으로 이어졌다.[176] 전쟁은 아르헨티나 연합군의 군사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 내부의 정치적 분열로 인해 교착 상태에 빠졌다. 결국 영국의 중재 하에 1828년 몬테비데오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 조약에 따라 반다 오리엔탈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 국가, '''우루과이 동방 공화국'''(República Oriental del Uruguay|레푸블리카 오리엔탈 델 우루과이es)으로 탄생하게 되었다.[177][178]
4. 1. 아르티가스 시대 (1811년~1820년)
1810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일어난 5월 혁명은 리오 데 라 플라타 부왕령에서 스페인 통치의 종식을 알리고 라플라타 연합주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 혁명은 반다 오리엔탈(오늘날의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 주민들을 스페인 왕실에 충성하는 왕당파와 독립을 지지하는 혁명가로 나누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추방된 라 플라타 부왕은 몬테비데오로 이동했고, 하비에르 엘리오가 새로운 부왕이 되어 1811년 2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에 선전 포고를 했다.[165] 이로 인해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스페인 부왕 사이에 제1 동방 밴드 원정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독립 운동에 호응하여 민병대를 이끌고 봉기하며 반다 오리엔탈에서도 독립 운동을 시작했다.[166] 1811년 2월 26일, 아르티가스는 스페인 통치에 대한 전쟁을 촉구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원을 받은 아르티가스는 1811년 5월 18일 라스 피에드라스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격파하고 몬테비데오 포위에 나섰다. 다급해진 스페인 부왕은 브라질의 포르투갈 군대에 동방 밴드 원정에 대한 군사 침공을 요청했다.
포르투갈에 이 지역을 빼앗길 것을 우려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스페인 부왕과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로 인해 아르티가스의 독립 운동과 부에노스아이레스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166] 영국의 압력으로 포르투갈군은 1811년 말 철수했고, 왕당파가 몬테비데오를 계속 장악하게 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결정에 분노한 아르티가스는 약 4,000명의 지지자들과 함께 엔트레 리오스 주로 후퇴했다.
1813년 제2 동방 밴드 원정 동안 아르티가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호세 론도 군대와 합류하여 두 번째 몬테비데오 포위를 시작했고, 결국 1814년 6월 부에노스아이레스 군이 몬테비데오를 점령했다. 그러나 1813년 6월 라 플라타 헌법 제정 의회에 아르티가스파 대표의 참여가 거부되면서 반다 오리엔탈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167]
1814년, 아르티가스는 동방주(반다 오리엔탈)를 중심으로 코르도바 주, 산타페 주, 엔트레 리오스 주, 코리엔테스 주와 함께 연방 동맹(Liga Federal 또는 자유 인민 동맹)을 결성했다. 이 동맹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의 중앙 집권 국가 건설에 반대하며 각 주의 자치권을 옹호했다. 아르티가스는 이 동맹의 '보호자'로 선포되었다. 1815년 1월, 아르티가스파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군으로부터 몬테비데오를 탈환하고, 6월 29일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같은 해 파이산두에 머물던 아르티가스는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농지 개혁령을 발표했다.[168] 스페인 철학자 호베야노스의 영향을 받은 이 개혁은[169] 국외로 도피한 부재지주들의 대토지를 몰수하여 원주민(인디오)과 가난한 백인 및 흑인 빈농 등에게 분배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70] 이는 아르티가스주의로 알려진 그의 정치 사상의 핵심 요소였다.
연방 동맹의 영향력이 커지자, 포르투갈-브라질 및 알가르브 연합 왕국 정부는 공화주의 사상이 인접한 브라질 식민지로 확산될 것을 우려했다. 1816년 7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도로 라플라타 연합주의 독립이 선언된 투쿠만 회의가 열렸으나, 아르티가스파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해 8월, 포르투갈-브라질 군대가 브라질에서 다시 침공하여 포르투갈의 동방 밴드 정복을 시작했다. 이들은 나폴레옹 전쟁 경험이 있는 유럽 용병과 브라질 현지 군인들로 구성되어 군사적 우위를 점했다. 아르티가스 군대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군과 포르투갈 군 양쪽을 상대로 어려운 게릴라전을 펼쳐야 했다.
1817년 1월 20일, 포르투갈 군대는 몬테비데오를 점령했다. 아르티가스파는 저항을 계속했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가 포르투갈의 침공을 사실상 묵인하면서 고립되었다. 결국 1820년, 아르티가스의 군대는 타쿠아렘보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아르티가스는 파라과이로 망명했고, 동방 밴드는 브라질의 시스플라티나 주로 편입되었다.[171] 아르티가스의 실각 후, 브라질과 결탁한 몬테비데오의 과두 지배층에 의해 농지 개혁이나 보호 무역 정책은 폐지되고 대토지 소유 제도가 부활했다.[172]
문화적으로 이 시기에는 연방 동맹의 군인이었던 바르톨로메 이달고가 가우초 문학을 창시했다. 이달고는 가우초를 통해 유럽 문화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아메리카 정체성을 표현했으며[179], 그의 작품은 이베로아메리카 시문학이 유럽으로부터 독립하는 계기가 되었다.[180]
4. 2. 브라질 통치 시대 (1820년~1825년)
연방 동맹(Liga Federal)의 영향력과 위상이 커지자, 포르투갈 정부는 연맹의 공화주의 이념이 인접한 식민지인 브라질로 확산될 것을 우려했다. 결국 1816년 8월, 브라질에서 파견된 군대가 아르티가스와 그의 혁명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포르투갈의 동방 밴드 정복을 시작하며 침공했다. 포르투갈군은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던 숙련된 유럽인 용병들과 현지 브라질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더 많은 군사 경험과 물자적 우위를 바탕으로 1817년 1월 20일 몬테비데오를 점령했다.1820년, 아르티가스의 군대는 타쿠아렘보 전투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이 패배 이후 반다 오리엔탈(Banda Oriental, 현재의 우루과이 지역)은 브라질의 시스플라티나 주로 편입되었다. 이후 1823년부터 1824년까지 브라질 독립 전쟁 기간 동안 또다시 몬테비데오 포위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4. 3. 33인의 동방인 (1825년~1828년)
1816년부터 시작된 포르투갈의 동방 밴드 정복으로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가 이끌던 연방 동맹 세력은 약화되었고, 1820년 타쿠아렘보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동방 밴드(현재의 우루과이 지역)는 브라질의 시스플라티나 주로 편입되었다.그러나 브라질의 지배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다. 1825년 4월 19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원을 받은 후안 안토니오 라바예하가 이끄는 33인 동방인이 시스플라티나에 상륙하며 독립 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5월 20일 몬테비데오에 도착했으며, 6월 14일에는 플로리다에서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
같은 해 8월 25일, 새롭게 선출된 지방 의회는 시스플라티나 주의 브라질 제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고, 라플라타 연합주(현재의 아르헨티나)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이러한 독립 선언에 대해 브라질 제국은 즉각적으로 군사 행동에 나섰고, 이는 시스플라티나 전쟁으로 이어졌다.[5][6][7]
약 3년간 지속된 시스플라티나 전쟁은 1828년 8월 27일 몬테비데오 조약 체결로 막을 내렸다. 이 조약은 영국 제국의 외교관 폰손비 자작의 중재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우루과이의 독립을 인정하고 양국 사이의 완충 국가로 삼는 데 합의했다. 이로써 우루과이는 공식적으로 독립 국가가 되었다. 독립 이후, 1830년 헌법이 1829년 9월에 승인되었고 1830년 7월 18일에 채택되어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8]
5. 대전쟁(Guerra Grande)과 삼국 동맹 전쟁 (1839년~1870년)

우루과이가 1828년 독립한 이후, 국내 정치는 콜로라도당과 블랑코당의 격렬한 대립으로 점철되었다. 이 갈등은 이웃 아르헨티나 및 브라질과의 관계와 얽히면서 1839년부터 1851년까지 13년간 지속된 대전쟁(Guerra Grande)으로 이어졌다.[181] 이 전쟁 동안 우루과이는 사실상 두 개의 정부로 나뉘었으며, 영국, 프랑스 등 외세의 개입을 겪었다. 전쟁은 아르헨티나의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정권 붕괴와 함께 콜로라도당의 승리로 끝났으나[183], 브라질의 영향력 확대를 초래하여 영토 할양 및 내정 간섭을 용인하는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되었다.[10]
대전쟁 이후에도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되었고, 1864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받은 콜로라도당의 베난시오 플로레스가 블랑코당 정부에 대항해 봉기하면서 또 다른 갈등이 시작되었다. 블랑코당 정부가 파라과이에 도움을 요청하고 브라질이 직접 군사 개입에 나서자, 파라과이가 브라질에 선전포고하며 삼국 동맹 전쟁(1864년~1870년)이 발발했다.[186] 우루과이는 브라질, 아르헨티나와 함께 삼국 동맹을 결성하여 파라과이와 싸웠다. 이 전쟁은 파라과이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영토 확장 등 이익을 얻었지만, 우루과이는 실질적인 소득 없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뿐이었다.[190] 전쟁 이후에도 1868년 전현직 대통령이 암살당하는[13] 등 극심한 혼란이 지속되었다. 이 시기 우루과이는 내전과 외세 간섭으로 점철된 고난의 역사를 겪었다.
5. 1. 대전쟁(Guerra Grande, 1839년~1851년)
우루과이가 독립을 달성한 직후, 정치 상황은 이전 33인 동방인에서 갈라져 나온 두 정당으로 나뉘었다. 보수적인 블랑코스("백색당")와 자유주의적인 콜로라도스("적색당")가 그것이다. 콜로라도당은 초대 대통령 프루투오소 리베라가 이끌었으며 몬테비데오의 상업적 이익을 대변했다. 반면 블랑코스는 제2대 대통령 마누엘 오리베가 이끌었으며, 농촌의 농업 이익을 보호하고 보호 무역을 지지했다.두 정당의 이름은 지지자들이 착용한 완장 색깔에서 유래했다. 콜로라도스는 처음에는 파란색 완장을 사용했으나, 햇볕에 색이 바래자 붉은색으로 바꾸었다. 이 정당들은 이웃 아르헨티나의 정치 분쟁과 깊이 연관되었다. 콜로라도스는 몬테비데오로 망명한 아르헨티나의 자유주의자 유니타리오스를 지지했고, 블랑코스의 마누엘 오리베는 아르헨티나의 통치자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와 가까운 관계였다.
1838년, 프랑스 해군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봉쇄하자 오리베는 로사스를 지지했다. 이는 콜로라도스와 망명 유니타리오스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오리베에 맞서는 계기가 되었다. 1838년 6월 15일, 콜로라도 지도자 리베라가 이끄는 군대가 오리베를 권좌에서 몰아내자 그는 아르헨티나로 망명했다.[182][181] 아르헨티나 유니타리오스는 몬테비데오에 망명 정부를 세웠고, 프랑스의 암묵적인 지지 아래 리베라는 1839년 로사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이 분쟁은 13년간 이어져 대전쟁(Guerra Grande)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81]
1840년, 망명 유니타리오스 군대가 우루과이에서 아르헨티나 북부를 침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842년, 아르헨티나 군대가 오리베를 돕기 위해 우루과이를 침공하여 수도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다. 1843년 2월 시작된 몬테비데오 대포위전은 9년 동안 계속되었다. 포위된 우루과이 정부는 외국인 거주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군단이 조직되었다. 이탈리아 군단은 당시 몬테비데오에서 망명 중이던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끌었으며, 그는 우루과이 해군 사령관직도 맡았다.
이 포위 기간 동안 우루과이에는 두 개의 정부가 병존했다.
| 정부 | 지도자 | 존속 기간 | 통치 지역 | 본부 |
|---|---|---|---|---|
| 방위 정부 (Gobierno de la Defensa) | 호아킨 수아레스 | 1843년–1852년 | 몬테비데오 | 몬테비데오 |
| 세리토 정부 (Gobierno del Cerrito) | 마누엘 오리베 | 1843년–1851년 | 우루과이 나머지 지역 | 세리토 데 라 빅토리아 |
로사스는 일반적으로 리오 데 라 플라타의 국제 해운을 방해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봉쇄는 효과가 없었지만, 1845년 파라과이로의 접근이 막히자 영국과 프랑스는 로사스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고 그의 함대를 압수했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브라질 역시 아르헨티나에 맞서 전쟁에 참여했다. 로사스는 1849년 영국, 1850년 프랑스와 각각 평화 협정을 맺었다. 프랑스는 로사스가 아르헨티나 군대를 우루과이에서 철수시키는 조건으로 군단 철수를 약속했다. 오리베는 여전히 수도를 느슨하게 포위했다.[182]
그러나 1851년, 아르헨티나 엔트레리오스 주의 유력자 후스토 호세 데 우르키사가 로사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는 망명 유니타리오스, 우루과이 콜로라도스, 브라질과 동맹을 맺었다. 우르키사는 우루과이로 진격하여 오리베를 물리치고 몬테비데오 포위를 풀었다. 그는 이후 1852년 2월 3일 카세로스 전투에서 로사스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키고 몰락시켰다. 로사스의 패배와 망명으로 대전쟁은 마침내 끝났다.[183] 1852년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리베라, 라발레하, 베난시오 플로레스로 구성된 3두 정치가 수립되었으나, 라발레하(1853년 사망), 리베라(1854년 사망), 플로레스(1855년 전복)의 연이은 퇴장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몬테비데오 정부는 브라질의 재정 및 군사 지원에 대한 대가로 1851년 5개의 조약을 체결하여 양국 간 영구 동맹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몬테비데오는 브라질이 우루과이 내정에 간섭할 권리를 확인했다. 우루과이는 또한 쿠아레임강 북쪽의 영토 주장을 포기하여 영토를 약 176000km2로 줄였으며, 메린 석호와 양국 간의 자연 경계인 자구아랑강에서 브라질의 배타적인 항해 권리를 인정했다.[10]
5. 2. 삼국 동맹 전쟁 (파라과이 전쟁, 1864년~1870년)
우루과이 내전 이후에도 블랑코당과 콜로라도당 사이의 정치적 갈등은 계속되었다. 1851년, 우루과이 정부는 브라질 제국으로부터 재정 및 군사 지원을 받는 대가로 5개의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들은 브라질에게 우루과이 내정에 간섭할 권리를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쿠아레임강 북쪽의 영토 약 176000km2를 브라질에 할양하고 메린 석호와 야구아론 강에서의 배타적 항해권을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10] 브라질은 이 조약들을 근거로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마다 우루과이에 군사적으로 개입했다.[11]
1860년 블랑코당 소속의 베르나르도 베로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184], 1863년 아르헨티나로 망명해 있던 콜로라도당 지도자 베난시오 플로레스가 아르헨티나 대통령 바르톨로메 미트레의 지원을 받아 베로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군사 행동, 이른바 해방 십자군을 일으켰다.[185] 전통적으로 콜로라도당과 우호 관계를 유지해 온 브라질 제국 역시 플로레스의 이러한 움직임을 지원했다.[185] 위기에 처한 베로 대통령은 파라과이의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 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1864년 3월에는 아타나시오 아기레가 다시 파라과이에 원조를 요청했다. 같은 해 10월, 브라질군이 로페스의 사전 경고를 무시하고 우루과이에 직접 침공하자, 로페스는 결국 12월에 브라질에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186]
브라질 제국은 자국의 남부 국경 안보와 지역 내 영향력 회복을 명분으로 우루과이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브라질군과 콜로라도당 연합군은 블랑코당의 거점들을 차례로 공격하며 수도 몬테비데오를 포위했다. 군사적 패배가 확실해지자, 1865년 2월 20일 블랑코당 정부는 결국 항복했다.[12] 이로써 베난시오 플로레스가 다시 권력을 장악하고 대통령 자리에 올랐으며[14][188], 블랑코당과 콜로라도당의 연합을 모색했던 이전의 융합주의 정책은 폐기되고 양당 간의 대립 구도는 더욱 선명해졌다.
1865년 5월 1일, 브라질 제국, 아르헨티나, 그리고 플로레스가 이끄는 우루과이의 콜로라도 정부는 파라과이의 프란시스코 솔라노 로페스에 공동으로 대항하기 위한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11][187] 이는 파라과이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영토를 공격하면서 이미 시작된 분쟁을 파라과이 전쟁이라는 전면전으로 확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전쟁은 5년 동안 이어졌고, 1870년 로페스 대통령이 세로 코라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파라과이의 패배로 끝났다. 이 전쟁으로 파라과이는 인구의 상당수를 잃고 영토가 축소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승전국인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파라과이로부터 영토 할양과 각종 이권을 챙겼지만, 동맹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우루과이는 파라과이의 붕괴와 맞바꿔 실질적으로 얻은 이익이 거의 없었다.[190] 다만 전쟁 기간 동안 몬테비데오는 브라질 해군의 주요 보급 기지로 활용되면서 상대적인 번영과 평온을 누리기도 했다.[11][15]
전쟁이 끝난 후에도 우루과이의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되었으며, 1868년 2월에는 전직 대통령이었던 베르나르도 베로와 당시 대통령직에 있던 베난시오 플로레스가 연이어 암살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13]
6. 근대화와 군정 (1875년~1903년)
1875년부터 1890년까지 우루과이는 군부가 정당으로부터 독립하여 군사 정권을 수립한 시기였다.[191] 이 기간 동안 국가는 근대화를 추진하며 현대적인 국가 기구를 확립해 나갔다. 사회적으로는 도시화가 진행되고, 유럽으로부터 스페인인, 이탈리아인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이민이 이루어졌으며, 1876년 보통 교육법 제정을 통해 초등 교육이 의무 교육화되면서 교육 수준이 향상되고 중산층이 발달하는 등 지속적인 변화를 겪었다.[76][194] 1885년에는 결혼이 세속화되어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국가의 관할로 넘어갔다.[193] 경제적으로는 철도망이 영국 자본을 중심으로 확장되었고, 축산업은 철조망 보급과 함께 발전했다.[192]
1890년, 콜로라도당의 훌리오 에레라 이 오베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군정은 종식되고 민간 통치 시대로 복귀했다.[41] 에레라 이 오베스는 현직 대통령이 후임 대통령 후보를 지명해야 한다는 이른바 '지침적 영향력'(Influencia directriz|인플루엔시아 디렉트리스es)을 주장했다.[42] 이는 콜로라도당 내 특정 분파인 ''라 콜렉티비다드'' 구성원들이 대통령직을 연이어 차지하는 집단주의적 행태로 이어졌다.[43] 에레라 이 오베스 취임 직후 발생한 베어링 위기는 우루과이 경제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44]
1894년, ''라 콜렉티비다드'' 소속의 후안 이디아르테 보르다가 에레라 이 오베스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재임 중 국립 은행인 공화국 은행이 설립되었다.[45][46] 하지만 ''라 콜렉티비다드'' 중심의 국정 운영과 콜로라도당의 지배력 강화는 국민당의 반발을 샀다. 국민당은 1896년 선거가 부정하게 치러졌다고 비판했으며, 당시 선거법으로 인해 의회에서 제대로 된 대표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배제되었다.[47]
그러나 혼란은 계속되어 1897년 8월 25일, 후안 이디아르테 보르다 대통령이 독립 기념일 행사 참석 중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50] 그의 뒤를 이어 후안 린돌포 쿠에스타스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1903년까지 재임했다.[51]
한편, 19세기 말 우루과이 사회는 높은 교육 및 문화 수준을 바탕으로 "900세대"라 불리는 영향력 있는 작가, 시인, 지식인 그룹을 배출했다. 이 세대에는 플로렌시오 산체스, 마리아 에우헤니아 바스 페레이라, 훌리오 에레라 이 레이시그, 델미라 아구스티니, 오라시오 키로가 등이 포함된다.[52] 이 시기는 수십 년간 지속된 카우디요주의가 약화되고 상류 부르주아 계층의 정치적 지배력이 강화되는 특징을 보였다.[76]
7. '남미의 스위스' 시대 (1903년~1955년)

호세 바트예 이 오르도녜스는 1903년부터 1907년까지, 그리고 1911년부터 1915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하며 우루과이 현대 정치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고, 1929년 사망할 때까지 정치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트예는 부서(Department) 분할을 정당 간의 비민주적인 협정으로 간주하여 공조 협정에 반대했다. 이에 블랑코당은 비례대표제 도입 시 권력 상실을 우려하여 1904년 혁명을 일으켰다. 이 혁명은 아파리시오 사라비아가 이끌었으나, 마솔레르 전투에서 콜로라도당의 승리로 끝났다.[53]
바트예 시대에는 노동자를 위한 새로운 권리 보장[59], 식민지화 장려[60], 남성 보통 선거 도입, 외국 소유 기업의 국유화, 현대적 사회 복지 시스템 구축 등 다양한 개혁이 이루어졌다.[54][55][56][57][58] 바트예 정권 하에서 유권자 수는 46,000명에서 188,000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저소득층 소득세는 1905년에 폐지되었고, 모든 도시에 중등학교가 설립되었으며(1906), 여성에게 이혼 권리가 부여되었고(1907), 전화망이 국유화되었다(1915).[1] 상업 직원을 위한 퇴직금 제도는 1914년에, 8시간 노동제는 1915년에 도입되었다. 가난한 농부들에게는 대출과 종자가 제공되었고 농업 식민지가 설립되었다.[62] 몬테비데오 역시 이 기간 동안 많은 사회적, 경제적 발전을 겪었다.[63] 병원, 산부인과, 연구소는 물론 중등학교가 모든 부서의 수도에 건설되었다.[64] 중등 교육은 '대학교의 중등 및 예비 교육부'에 통합되었으며, 1919년에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성인들을 위한 야간 중등학교도 설립되었다.[65]
바트예주의 경제 정책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특정 서비스는 국가가 제공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기업의 국유화를 추진했다.[66] 국유화는 법적 한도 내에서 이루어졌으며, 전기 공급(이를 위해 UTE(발전소 및 송전의 국가 행정부)가 설립됨), 보험사 및 모기지 대출(국가 보험 은행(Banco de Seguros del Estado) 및 우루과이 모기지 은행(Banco Hipotecario del Uruguay)이 각각 1911년 설립되어 1912년 국유화됨) 등이 포함되었다.[67] 또한 영국이 관리하던 철도와 경쟁하기 위해 철로와 평행한 도로 건설이 시작되었고, 몬테비데오에는 국가가 관리하는 트램 네트워크가 설치되었다.[68]
1918년에는 1918년 우루과이 헌법이 통과되어 정교 분리가 선포되었다.[61] 이 헌법은 정치적 타협의 결과로, 행정부를 공화국 대통령과 집단 기관인 국민 집정 위원회(Consejo Nacional de Administración)로 나누어 권력을 분산시켰다.[69] 4년 임기의 대통령은 내무부, 국방부, 외교부 장관을 임명했고, 국민 집정 위원회는 재무부, 교육부, 노동부, 보건부, 공공사업부 장관을 임명했다. 국민 집정 위원회는 직접 선거로 선출되었으며, 위원의 1/3이 2년마다 교체되었다.[70]
1900년경 우루과이의 영아 사망률(IMR)은 세계 최저 수준으로 매우 건강한 인구를 나타냈으나, 1910년대에는 다른 국가들의 IMR이 계속 감소하는 동안 정체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설사 및 호흡기 질환과 같은 주요 사망 원인이 줄어들지 않았음을 의미하며, 공중 보건 문제의 심화를 시사했다.[71]
바트예 사망 이후에도 사회 경제 개혁은 계속되었다.[72][73] 1930년 우루과이는 최초의 1930년 FIFA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우승을 차지했다.[74] 이 시기 우루과이는 민주주의와 복지 국가를 공고히 하고 높은 교육 및 문화 수준을 달성하여 '남미의 스위스' 또는 '아메리카의 스위스'로 불리기 시작했다.[75][201]
그러나 1929년 세계 대공황은 농축산물 수출에 의존하던 우루과이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1931년 콜로라도당 소속의 가브리엘 테라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32년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었지만[202], 테라는 1933년 3월 쿠데타를 일으켜 복수 행정 제도를 무너뜨리고 독재를 시작했다.[203] 친파시즘 성향의 테라는 1934년 신헌법을 제정하여 언론과 노동 운동을 탄압하고,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과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우루과이 국민 다수가 이러한 정책을 지지하지 않아 1938년 선거에서 패배하고 사임했다.[204]
1938년 콜로라도당 민주파 출신의 Alfredo Baldomir|알프레도 발도미르es가 대통령에 취임하여 친파시즘 외교를 수정하고 국내 민주화에 힘썼다.[205]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우루과이는 연합국에 우호적인 중립 자세를 취했다. 라 플라타 해전 당시 나치 독일의 포켓 전함 아드미랄 그라프 슈페호가 몬테비데오 항에 입항했을 때, 우루과이는 중립 외교 원칙을 지켰고, 결국 그라프 슈페호는 몬테비데오 앞바다에서 자침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1947년 콜로라도당 소속이자 호세 바트예의 조카인 Luis Batlle Berres|루이스 바트예 베레스es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루이스 바트예 정권 하에서 급속한 산업화와 복지 국가 강화가 추진되었다.[206] 그는 호세 바트예의 뜻을 이어받아 1951년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국민 집정 위원회(Colegiado)가 행정을 담당하는 독특한 제도를 도입했다.[207] 이 제도는 1955년까지 이어지며 '남미의 스위스' 시대를 상징하는 정치 체제로 자리 잡았다. 195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브라질 대표팀을 꺾고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며 국민적 자긍심을 높였다.[208]
8. 경제 침체와 사회 불안 (1955년~1973년)
1950년대 중반 이후 지속된 경제 침체는 사회 불안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기존 양대 정당(콜로라도당, 블랑코당)에 대한 민심 이반이 나타났고, 1959년 쿠바 혁명의 영향 아래 1962년 라울 센디크를 중심으로 도시 게릴라 조직인 투파마로스가 결성되었다.[210] 투파마로스는 브라질의 카를루스 마리게이라가 제시한 도시 게릴라 전술을 채택하여 수도 몬테비데오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사회 불안과 경제 위기 심화, 그리고 투파마로스의 활동에 대응하기 위해 1966년에는 행정 효율성 강화를 명목으로 기존의 합의제 행정 방식인 국민 집정 위원회가 폐지되고 대통령 중심제로 회귀했다.[211] 1967년 콜로라도당 소속의 오스카르 디에고 헤스티도 대통령이 취임했으나 급사하였고, 부통령이었던 호르헤 파체코 아레코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여 투파마로스에 대한 강경 노선을 펼쳤다.
투파마로스는 점차 대중적 지지를 넓혀갔고,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투파마로스가 지지한 좌파 정당 연합 확대 전선이 전국적으로 18%, 수도 몬테비데오에서는 31%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상당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212] 그러나 선거에서 확대 전선이 패배하자 투파마로스의 무장 투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에 우루과이 의회는 1972년 4월 내전 상태를 선포하고 군경을 총동원하여 투파마로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전개했다. 같은 해 9월, 라울 센디크를 비롯한 주요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투파마로스는 사실상 와해되었다.[213]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운 군부는 1973년 쿠데타를 일으켜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 대통령과 함께 의회를 해산시키고 민주주의 체제를 전복시켰다. 이로써 '남미의 스위스'로 불리던 우루과이의 오랜 민주주의 역사는 중단되었다.
8. 1. 신(新) 바트예 시대 (1947년~1958년)
한국 전쟁이 끝난 후인 1955년부터 우루과이 경제는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국가의 주요 산업인 농축산물에 대한 세계적인 수요가 줄어들면서 수출이 크게 감소했다. 또한, 국내 시장 규모가 작아 수입 대체 공업화 정책도 한계에 부딪혔다. 늘어나는 사회 복지 비용 역시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었다.[209]9. 블랑코 단체 집권 시대 (1958년~1966년)
1954년 우루과이 총선에서 콜로라도당이 국가평의회 다수를 다시 차지했으나[114], 1955년부터 농산물에 대한 세계 시장 수요 감소로 인한 경제 위기의 영향이 악화되었다.[115] 공무원 수 증가와 함께 퇴직자 및 연금 수급자 수가 늘어나면서 재정 부담이 커졌고, 이는 Neobatllismo|신 바틀리즘es 모델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초래했다.[115]
경제 위기가 심화되는 가운데, 전통적인 양대 정당이 민중으로부터 멀어졌음을 반영하듯, 1959년 쿠바 혁명의 영향도 받아 1962년에는 라울 센디크에 의해 게릴라 조직 투파마로스가 결성되었다.[210] 투파마로스는 브라질의 카를루스 마리게이라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 몬테비데오에서 도시 게릴라 전술을 채택하여 활동했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과 경제 위기 속에서, 1966년에는 투파마로스에 대한 대응과 경제 재건을 위한 행정 효율성 향상을 명목으로 국가평의회(국민 집정 위원회)가 폐지되었다.[211]
10. 군사 독재 시대 (1973년~1985년)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 대통령은 투파마로스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군부에 크게 의존하였고, 이는 좌익 세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지만 동시에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는 부작용을 초래했다.[213] 결국 1973년 6월, 보르다베리 대통령과 결탁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 실권을 장악했고[214], 이로써 관료주의적 권위주의 체제로 평가받는 군사 정권이 들어섰다.[215]
군부는 점차 직접적인 통치를 원하게 되었고, 1976년에는 보르다베리 대통령을 축출하고 아파리시오 멘데스를 새로운 대통령으로 내세웠다. 멘데스 정권은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추진하여 거시 경제 지표상으로는 고도 성장을 달성하기도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실업률이 1977년 기준 11.8%까지 치솟는 등 사회적 불균형을 심화시켰다.[216]
군사 정권 하의 우루과이는 극심한 억압 사회로 변모했다. 1982년 당시 인구 약 296만 명 중[217] 군인과 경찰을 합한 치안 조직 인력이 10만 명에 달했고, 시민 사회 내부에 10만 명의 정보원이 활동하는 비정상적인 경찰 국가 체제가 구축되었다. 이러한 체제 속에서 밀고가 조장되었으며, 좌익 성향 인물뿐만 아니라 정치와 무관한 일반 시민들에 대한 탄압도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218] 이러한 폭압적인 통치를 피해, 전체 인구의 약 17%에 달하는 50만 명 가량의 우루과이인들이 국외로 망명하는 길을 택했다.[219]
1981년, 군부는 자신들의 정치 개입을 영구적으로 합법화하기 위해 헌법 개정을 시도했으나, 이는 국민 투표에서 부결되며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적 열망을 보여주었다.[216]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81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레고리오 알바레스 장군은 결국 1985년에 민정 이양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1984년에는 콜로라도당, 군부, 광역 전선이 참여한 「해군 클럽 합의」가 체결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군부 주도 하에 민주화 과정이 시작되었다.[220]
11. 민정 이양 이후 (1985년~현재)
1984년 선거에서 콜로라도당의 훌리오 마리아 상기네티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라파엘 아디에고 브루노의 짧은 임시 대통령직을 거쳐 1985년부터 1990년까지 첫 임기를 수행하며 민정 이양이 완료되었다. 상기네티 행정부는 경제 개혁을 시행하고 군사 통치 이후 민주화를 공고히 하는 데 주력했다. 외국 무역과 자본 유치에 중점을 둔 경제 개혁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어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국민 화합을 증진하고 민주적 통치 복귀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상기네티는 군사 정권 하에서 인권 침해를 저지른 혐의를 받는 군 지도자들에 대한 논란이 많은 일반 사면을 국민 투표를 통해 승인받았으며, 이전 게릴라들의 석방을 가속화했다.[221]
1989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국민당의 루이스 알베르토 라카예가 승리하여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재임했다. 라카예 정부는 주요 경제 구조 개혁을 단행하고 무역 체제 자유화를 추진했으며, 1991년 우루과이가 메르코수르(MERCOSUR)에 가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그의 구조 조정 및 민영화 노력은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일부 개혁은 국민 투표를 통해 부결되기도 했다.[222]
1994년 선거에서는 상기네티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여 1995년부터 2000년 3월까지 두 번째 임기를 수행했다. 단일 정당이 국회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자, 국민당은 상기네티의 콜로라도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했다. 상기네티 정부는 우루과이의 경제 개혁과 메르코수르 통합을 지속했으며, 선거 제도, 사회 보장, 교육, 공공 안전 개선을 목표로 한 개혁도 추진했다. 임기 대부분 동안 경제는 꾸준히 성장했으나, 1999년 낮은 상품 가격과 주요 수출 시장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경기 침체가 시작되어 2002년까지 이어졌다.
1999년 전국 선거는 1996년 헌법 개정으로 도입된 새로운 선거 제도 하에서 치러졌다. 4월 예비 선거에서 각 당의 단일 대통령 후보가 결정되었고, 10월 본선거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아 11월 결선 투표가 실시되었다. 결선 투표에서는 국민당의 지원을 받은 콜로라도당 후보 호르헤 바트예가 광역전선 후보 타바레 바스케스를 누르고 당선되었다.[133] 콜로라도당과 국민당은 입법 연정을 지속했으나, 2002년 11월 국민당(블랑코스)이 내각에서 철수하면서 공식 연정은 종료되었다.
바트예의 5년 임기(2000-2005)는 심각한 경제 침체와 불확실성으로 특징지어졌다. 1999년 브라질 헤알화 평가절하, 2001년 우루과이 주요 산업인 쇠고기 부문의 구제역 발생,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정치·경제적 붕괴가 연이어 타격을 주었다. 실업률은 20%에 육박했고, 실질 임금은 하락했으며, 페소 가치는 폭락했고, 빈곤층 비율은 거의 40%에 달했다. 이러한 경제 상황 악화는 바트예 행정부와 이전 정부들이 추진했던 자유 시장 경제 정책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키웠고, 2003년 국영 석유 회사 민영화와 2004년 국영 수도 회사 민영화 제안이 국민 투표에서 거부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2004년, 우루과이 국민들은 광역전선의 타바레 바스케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광역전선은 양원 모두에서 과반수를 확보하며 우루과이 역사상 첫 좌파 정부를 수립했다.[135] 이는 건국 이래 지속되어 온 콜로라도당과 블랑코당(국민당)의 양당제에 종지부를 찍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새로 출범한 바스케스 정부는 우루과이의 대외 부채 상환 약속을 지키면서도, 광범위한 빈곤과 실업 문제 해결을 위해 긴급 일자리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등 사회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009년 선거에서는 전 투파마로스 게릴라이자 농업부 장관이었던 호세 무히카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2010년 3월 1일 바스케스의 뒤를 이었다.[136] 무히카 정부는 진보적인 사회 개혁을 단행하여, 2012년 낙태를 합법화했고,[137] 이듬해인 2013년에는 동성 결혼[138]과 대마초를 합법화했다.[139] 이 외에도 사회 보장,[140] 조세,[141] 교육,[142] 주택,[143] 담배 규제,[144] 노동자 권리[145]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혁이 이루어졌다. 광역전선 집권 기간 동안 노동조합 활동이 활발해져, 2003년 11만 명이었던 조합원 수가 2015년에는 40만 명 이상으로 4배 가까이 증가했다. 국제노동조합연맹(ITUC)에 따르면 우루과이는 결사의 자유, 단체 교섭권, 파업권 등 기본 노동권 존중 면에서 미주 대륙에서 가장 진보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2014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타바레 바스케스 전 대통령이 중도 우파 야당 후보인 루이스 라칼레 푸를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146] 2015년 3월 1일, 바스케스는 호세 무히카의 뒤를 이어 다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147]
2019년 11월 선거에서는 보수 성향의 국민당 후보 루이스 알베르토 라카예 포우가 승리하면서 15년간 이어졌던 광역전선의 좌파 통치가 막을 내렸다. 2020년 3월 1일, 루이스 알베르토 라카예 전 대통령의 아들인 라카예 포우가 우루과이의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148][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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