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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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광선은 계몽운동가이자 교육자, 정치인 윤치호의 아들로, 1898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한영서원에서 낙농업, 목공 등을 배우고 농장과 목장을 경영하며 광산업에도 참여했으나 실패하여 빚을 지기도 했다. 1945년 광복 후 개성자위대 대장, 미군정청 통역관을 지냈고,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그의 가족은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겪었으며, 딸의 남편은 북한 개성시 인민위원장을 역임했다.

윤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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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윤광선은 1898년 11월 17일 경기도 개성부 송도면에서 윤치호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중국인 마애방(馬愛芳)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형 윤영선, 누나 윤봉희, 윤용희가 있었고, 이복 동생으로는 외교관 윤장선, 피아니스트 윤기선 등이 있었다. 제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은 그의 6촌 형이다.

아버지 윤치호는 윤광선에게 캔들러(Candler), 리드 캔들러(Reid Candler)라는 영문 이름을 지어주었다. 윤광선은 유년 시절 산만하고 주목받고 싶어 하는 성격이었지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한영서원에 입학하여 낙농업, 목공, 어업 등 실용적인 기술을 배웠다. 학창 시절에는 운동선수로도 활동했다.

1917년 3월 17일, 남궁 억의 딸 남궁자경과 종교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아버지 윤치호의 친구이자 누이 윤용희의 양아버지였던 하디 박사(Dr. Hardie)가 맡았다.

1923년 11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에모리 대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링컨 대학교 농과에 편입하여 공부했다. 미국 유학 중에는 이승만, 서재필, 안창호 등과 교류하며 아버지 윤치호와의 연락을 돕기도 했다.

1926년 6월 24일 귀국 후 개성에서 송고목장(松高牧塲), 송고직(松高織)의 대표이사로 농장과 목장을 운영하며 낙농업, 우유 생산, 어장 경영을 했다. 아산에도 목초지를 마련하여 농장과 목장을 운영하였다.

1934년부터 홍성군, 거창군, 창성군, 평산군, 해주군, 홍천군 등에서 광산을 운영하거나 공동 투자하는 등 광공업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개성체육회와 고려청년회 등에서 체육 활동에도 참여했다. 1929년 개성체육회 창립 발기식에 참여하고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1933년 4월 고려청년회 주최 개성시민대운동회 시상부 부원으로, 1935년 7월 18일 고려청년회 주최 제1회 전조선 수영대회 시상부 부원과 심판으로 참여했다.

1934년 3월 1일 홍천 기독교단체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장인 남궁억의 병보석을 신청하여 석방을 도왔다.

1942년 창씨개명으로 광산 대표자 명의를 이토 미쓰요시(伊東光善)로 변경했다. 1944년 현제명의 대화악단에 참여했다.

1945년 광복 후 개성자위대를 조직, 대장으로서 치안 유지에 힘썼고, 미군정 주둔 후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미군정청 통역관으로 근무했다. 1947년 4월 26일부터 홍문대학(현 홍익대학교) 강사로 출강했다.

1947년 개성군정재판소 통역관으로 부임하였으나, 1948년 8월 정부 수립 후 사퇴하였다. 1948년 개성군정재판소 통역관 재직 중 생고무 폭리 문제로 군정청 경무부 형사대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혐의는 중요 물자의 불법 월경이었다. 그는 미군정청 수송부 통역관 재직 시부터 북한으로 밀무역을 했다고 한다.

1950년 6.25 전쟁조선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8월 15일 혹은 8월 25일 납북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2.1. 생애 초반

윤광선은 1898년 11월 17일 경기도 개성부 송도면에서 계몽운동가 겸 교육자, 정치인 좌옹 윤치호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중국인 마애방(馬愛芳)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정치인 겸 사회사업가 윤영선이고, 둘째 형은 윤봉성인데 요절하였다. 누나로는 윤봉희, 윤용희가 있었다. 이복 동생으로는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부영사와 총영사를 지낸 외교관 윤장선, 피아니스트 겸 대학교수 윤기선, 윤정선 등이 있다. 이복 여동생으로는 윤문희, 윤무희, 윤은희, 윤명희, 윤영희, 윤정희 등이 있다.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은 1년 연상으로 그의 6촌 형이다.

형제 정승인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후손으로 도재 윤흔의 9대손이며, 할아버지 윤웅렬은 군부대신과 의정부찬정을 역임했다. 독립운동가인 남궁 억의 딸 남궁자경(다른 이름은 남궁삼인)과 결혼하였다. 딸 윤성희는 화가 원석연과 결혼했고, 딸 윤정희는 약학자이자 서울대 교수인 채동규와 결혼했다.

아버지 윤치호는 그의 형제자매에게 영문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윤광선의 영문명은 캔들러(Candler), 리드 캔들러(Reid Candler)이다. 유년 시절 그는 아버지 윤치호의 평에 의하면, 산만하고 항상 주목을 끌고 싶어 하지만 강인한 성격이었다 한다. 아버지 윤치호의 신념에 따라 경성의 유명한 고등보통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한영서원에 입학하여 낙농업과 목공, 어업, 기계 조립, 제도, 건축술 등을 배웠다. 학창 시절부터 윤광선은 운동선수로도 활동하여 이름을 날렸다. 한영서원을 졸업한 후 아버지 윤치호의 원조로 개성에 농장과 목장을 경영하였다. 1917년 1월 천안군 운산리로 가 조포(組苞) 판매를 하였고, 아버지 윤치호의 구리 광산 일에도 참여했다.

1917년 3월 17일 오전 11시 서울 종교교회에서 남궁 억의 딸 남궁자경(다른 이름은 남궁삼인)과 결혼하였고, 아버지 윤치호의 친구이자 누이 윤용희의 양아버지 하디 박사(Dr. Hardie)가 주례를 섰다. 윤치호일기에 의하면 결혼식 피로연은 오후 1시에 간소하게 명월관에서 교회 친구들, 여성 70명과 남자 100여 명을 대접했다 한다. 그해 2월 11일 남궁억(南宮檍)과 자녀의 결혼식을 상의했다 한다.

일본으로 유학갔다가 1923년 11월 미국으로 유학, 에모리 대학교 문과를 졸업한 뒤 링컨 대학교 농과에 편입학하여 수학하였다.

2.2. 미국 유학과 귀국

1923년 11월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유학, 에모리 대학교 문과를 졸업한 뒤 링컨 대학교 농과에 편입학하여 수학하였다. 1922년 5월 14일 일시 귀국, 개성 고려청년회에서 개최한 시민대운동회에 참여, 15마일 마라톤 경주에서 우등을 차지하였다. 1923년 10월 신한민보에 그가 직조학을 배울 목적으로 미국으로 유학한다는 기사가 10월 4일자, 10월 11일자, 10월 18일자에 보도되었다. 그해 누나 윤용희(미국명 헬렌)과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를 경유, 미국으로 건너가 칼라이니 스파틴벡 중학교 단기 과정에 입학했다. 1924년 칼리아니 스파틴벡 중학교를 졸업하고, 에모리 대학 농과에 입학했다. 1924년 2월 28일에는 인디아나 주 기독교 대회에 누나 윤용희와 함께 참여하였다. 1925년 에모리 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링컨 대학교에 편입했다.

1926년링컨 대학교 농과를 졸업하고 6월 24일 귀국하였다. 미국 체류 중에 아버지 윤치호와 친분이 있던 이승만서재필, 안창호를 찾아 조선의 상황을 전하고 이들과 아버지 윤치호 사이의 연락을 주선하였다.

귀국 후 개성에서 송고목장(松高牧塲), 송고직(松高織)의 대표이사로 농장과 목장을 운영하며 낙농업과 우유를 생산하였고, 어장도 경영하였다. 또한 아산에도 목초지를 마련하여 농장과 목장을 경영하였다.

2.3. 광공업 및 기업 활동

1934년 홍성군 결성면, 서부면에서 480000평의 광산을 우세형(禹世亨)과 공동으로 운영하였다. 같은 해 거창군 고제면에서 585700평을 홍인석(洪仁石), 민영태(閔泳台)와 공동으로 경영하였다.

1935년 3월 14일 창성군 신창면의 광산을 개성 사람 김황식(金晃植), 김동순(金東淳), 평안북도 삭주군 남서면 송평동 사람 이태정(李泰鼎) 등과 공동으로 명의 이전, 등록하였다.

1935년 7월 황해도 평산군 용산면에서 790000평의 광산을 경영하였다. 1935년 10월 4일 황해도 창성군 산창면 완풍동 광산에 신완금산(新完金山)을 설립, 운영하였다. 또한 해주군 운산면의 광산을 운영하였다. 그해 12월 16일에는 홍천군 서석면의 광산을 오순만(吳順萬), 박용현(朴用鉉)과 공동으로 등록하였다.

체육을 좋아한 그는 개성체육회와 고려청년회 등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9년 7월 14일 개성시 고려청년회관에서 개성체육회(開城體育會) 창립 발기식에 참여하고, 개성체육회 이사에 선임되었다. 1933년 4월에는 고려청년회 주최 개성시민대운동회의 시상부 부원으로 행사에 참여하였다. 1935년 7월 18일에는 개성부청사 내 수영장에서 열린 고려청년회 주최 제1회 전조선 수영대회의 시상부 부원으로 이선근 등과 함께 행사를 진행하였다. 또한 이 대회의 심판으로도 활동했다.

1934년 3월 1일 홍천 기독교단체 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인 장인 남궁억의 병보석을 신청하였다. 여러번의 병보석 신청 끝에 그해 7월 받아들여져 남궁억은 7월 31일에 석방되었다.

1942년 당시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7-21번지 산에서 광산을 운영하였다. 당시 대표자 명의를 윤광선에서 이토 미쓰요시(伊東光善, 창씨명)로 개명하여 대표자 명의를 변경한 것이 조선총독부 관보 제4669호(쇼와17년 8월 20일자) 9면 1단에서 확인된다.

1944년 현제명의 대화악단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2.4. 광복 이후

1945년 광복 후 개성자위대를 조직, 대장으로서 치안 유지에 힘썼다. 그해 9월 미군정이 주둔하자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미군정청 통역관이 되었다. 광복 직후 아버지 윤치호가 친일파로 몰려 규탄받다가 그해 12월에 사망했지만, 그는 연좌되지 않았다. 미군정청 수송부 통역관으로 근무했다.

1947년 4월 26일부터 홍문대학(현 홍익대학교) 강사로 출강하였다.

1947년 개성군정재판소 통역관으로 부임하였고, 1948년 8월 정부 수립 후 사퇴하였다. 1948년 개성군정재판소 통역관으로 재직 중 생고무 폭리 문제로 군정청 경무부 형사대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4월 21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혐의는 중요 물자의 불법 월경이었다. 4월 25일 서울종로삼영무역 사장 김성균, 개성무역 사장 홍원혁, 중국인 상인 양모(楊某)를 통해 생고무, 자동차 등 물자 수천만 원을 3.8선 너머로 판매한 혐의로 미군정 경무부 수사국 형사과 형사들에게 문초받았다. 4월 26일 생고무 큰 통과 승용자동차 4대를 3.8선 이북으로 팔고, 수천만 원의 돈을 받은 혐의로 송청되었다. 그는 미군정청 수송부 통역관으로 재직할 때부터 북한으로 밀무역을 했다고 한다.

2.5. 한국전쟁과 납북

1950년 6.25 전쟁조선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인 남궁자경과 아들 몇 명은 피난했지만, 개성에 있던 그의 누나 윤봉희 일가, 윤광선과 그 가족, 6촌 누나인 윤시선 일가 등은 1950년 8월 말 퇴각하던 조선인민군 내무서원에 의해 납치되었다. 8월 15일 혹은 8월 25일에 납북되었는데,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납치된 장소는 서울 종로구 권농동 179번지인지 중구 신당동 노상인지 불분명하다.

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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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아버지윤치호1865년 1월 16일1945년 12월 9일계몽운동가, 교육자, 정치인
어머니마애방(馬愛芳)1871년 2월 19일1906년 2월 14일중국인
부인남궁자경(南宮子景)1896년?남궁억의 딸, 다른 이름은 남궁삼인
아들윤용구(尹龍求)1919년 2월 16일?
며느리한원희??
손자윤시영??
아들윤정구1927년?고려원양 전무, 상무 역임
손자윤도영??
아들윤명구(尹明求)1930년?
윤자희??음악인
사위김명호(金明浩)??북한 개성시 인민위원장 역임
윤정희??
사위채동규1917년2003년 12월 18일서울대학교 약학대학 제2대 학장, 대한약학회 회장 역임
외손자채건??미국 국립보건환경연구원 수석연구원
외손자채영문??연세대 보건대학원 교수
외손자채성준??기업인
외손자채성문??미국 성아그네스병원 전문의
외손자채기준??이화여자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외손녀채현순??
외손녀사위정동섭??자애의원 원장 역임
윤성희1929년?
사위원석연1922년2003년 11월 5일화가

4. 기타

윤광선의 가문은 6.25 전쟁이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겪었다. 윤광선은 1950년 8월 6.25 전쟁조선인민군 내무서원에 의해 납북되었고, 이후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누나 윤봉희 일족, 육촌 누나 윤시선 일족 등도 함께 납북되었다.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석곡리 선영 근처에는 그의 가묘가 조성되어 있다.

이러한 비극 속에서도 윤광선의 가족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딸 윤자희는 일본 도쿄 유학 후 음악 공부를 하였고, 개성부 고려동 출신 김명호와 결혼했다. 김명호는 개성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북한 개성시장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아들 윤정구는 고려원양 전무와 상무를 지냈고, 사위 채동규는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교수와 학장을 역임했다. 또 다른 사위 원석연은 연필화가로 이름을 알렸다.

윤광선의 아들 윤용구(1918년생)는 아버지 윤치호의 첫 손자였고, 윤용구의 아들 윤시영(1941년생)은 윤치호가 생전에 본 첫 증손자였다. 윤치호 생전에 태어난 다른 손녀 윤경희(1945년 9월 16일생)는 할아버지의 친누나와 동명이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