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행 (14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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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행(李荇, 1478년 ~ 1534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이다. 김종직의 문인인 아버지 이의무의 영향으로 김종직의 문하 최부에게서 수학했으며, 1495년 관직에 진출하여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연산군 시대에는 폐비 윤씨 복위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복귀하여 홍문관 교리, 대사헌, 우의정 등을 역임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했으며, 김안로의 전횡을 비판하다가 함종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했다. 허균은 그의 시를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저서로는 《용재집》 등이 있다.
이행(李荇)은 충청남도 천안 출신으로,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이며, 청학도인(靑鶴道人) 등의 별호를 사용하였다. 증조부는 돈령부지사 이명신(李明晨)이고, 할아버지는 온양군사를 지낸 이추(李抽), 아버지는 홍주부사, 사간원사간 등을 역임한 연헌 이의무(李宜茂)이다.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교리를 지낸 성희(成熺)의 딸이며, 성담수, 성담년은 그의 외삼촌들이다. 이권, 이기가 그의 친형들이다.
이행은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고, 재물 축적에도 관심이 없었다. 소견이 편협하고 비루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으나, 옛것을 좋아하고 선한 것을 즐겨하는 사람을 실없고 망령스럽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시를 지을 때에는 기교를 배격하고 자연스러운 표현을 추구했다.
이행은 시문, 글씨, 그림에 모두 재능이 있었다. 특히 시는 읍취헌 박은과 경향을 같이 하면서도 깊고 차분하며 담아한 점이 특징이며, 오언고시를 잘 지었다.[2] 허균은 "우리나라의 시는 마땅히 이행을 제1로 삼아야 한다"고 평했다.[2]
2. 생애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즐겨하고 시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아버지 연헌 이의무는 김종직의 문인이었는데, 이행도 김종직의 문하였던 최부를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남곤, 홍언충(洪彦忠), 그리고 최부의 문인이었던 읍취헌 박은 등과 가깝게 지내며 글과 작품으로 교류하였다.
1495년 승문원부정자가 된 것을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1500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하성절사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후 홍문관수찬, 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504년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곤장 60대를 맞고 충주에 유배되었다. 이후 함안, 거제도로 유배지가 옮겨졌다가 1506년 중종반정 직후 석방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홍문관교리로 등용되었고, 1507년 책봉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사가독서에 선발되었으며, 의정부사인, 성균관사예, 사성 등을 역임했다. 1514년 《주고(酒誥)》를 지어 왕에게 바쳤고, 중종이 이를 중외에 효유하였다. 1515년 장경왕후 애책문의 글을 지었으며, 폐위된 단경왕후 복위 주장에 반대하였다.
이행은 장경왕후가 이미 원자를 낳고 승하하였는데, 만약 폐비를 복위하여 선후의 의리를 논하면 단경왕후는 먼저이고 장경왕후는 뒤인데 다시 순서가 뒤바뀌어 나라의 근본이 혹 동요될까 염려하여서였다고 한다. 첨지중추부사, 홍문관부제학, 성균관대사성, 승정원좌승지,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17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조광조 등 신진 사류에게 남곤 등과 함께 배척받았다.
1520년 대제학이 되었다가, 공조참판에 임명되면서 바로 사헌부대사헌과 예문관대제학을 겸직하였다. 1521년 공조판서, 의정부우참찬을 거쳐 의정부우찬성으로 승진하였다. 1522년 《동궁계몽(東宮啓蒙)》의 서문을 지었다. 1524년 이조판서가 되었고, 김안로와 대립하였다. 1527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1529년 남곤 등과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하였다.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완성시키고, 의정부좌의정이 되었으나 김안로의 전횡을 논박하였다.
1532년 김안로와의 갈등으로 평안도 함종(咸從)으로 유배되었고, 1534년 유배지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성품은 여색(女色)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재물을 축적함이 적었다. 그러나 소견이 편협하고 얕고 비루하다는 평이 있고, 옛것을 좋아하고 선한 것을 즐기는 사람을 실없고 망령스럽다고 하였다. 소세양, 정사룡, 이희보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2. 1. 어린 시절
충청남도 천안 출신으로 자는 택지(擇之)이고 호는 용재(容齋)이며, 이외에도 청학도인(靑鶴道人), 어택어수(漁澤漁搜), 창택어수(滄澤漁水) 등의 별호를 사용하였다. 돈령부지사 이명신(李明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온양군사를 지낸 이추(李抽)이고, 아버지는 홍주부사, 사간원사간 등을 역임한 연헌 이의무(李宜茂)이며,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로 교리를 지낸 성희(成熺)의 딸이다. 성담수, 성담년은 그의 외삼촌들이다. 이권, 이기가 그의 친형들이다.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즐겨하였으며 시를 잘 짓고 문장에 뛰어났다.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아버지 연헌 이의무는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었는데, 이행도 김종직의 문하였던 최부를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남곤, 홍언충(洪彦忠), 그리고 최부의 문인이었던 읍취헌 박은 등과 가깝게 지내며 글과 작품으로 교류하였다. 읍취헌 박은은 이행과 같이 최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직접 김종직을 찾아가 사사하기도 했다.
2. 2. 관료 생활과 유배
1495년 승문원부정자가 되고, 예문관 검열, 봉교, 성균관전적을 역임하고, 무공랑 예문관 봉교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0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하성절사의 질정관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후 홍문관수찬을 거쳐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다. 1501년 사헌부지평이 되었다가 정인인 사건으로 관원들이 사퇴하자 그해 9월 그도 면직되었다.
1504년(연산군 9) 사간원헌납을 거쳐 홍문관응교가 되었다. 연산군은 폐출당하고 사사된 어머니 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권, 추숭하려 했는데, 1504년 3월 그는 홍문관원으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위를 적극 반대하다가 연산군에게 밉보이게 되었다. 그해 4월 홍문관 원 최숙생, 이자화, 권달수, 박광영, 이사균, 김양진, 유부, 김내문, 강홍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4월 4일 연산군은 홍문관 관원들에게 태 40대를 구형했다가, 속으로 바치게 했다. 1504년 조의제문 필화 사건이 갑자사화가 되면서 김종직의 문도들을 축출할 때, 그도 곤장 60대를 맞고 충주에 유배되었다. 그해 6월 27일 장형을 집행할 때 연산군은 승지 박열을 보내 곤장 숫자대로 치지 않고 결장하는지 여부를 감시하게 했다.
충주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2월 2일 다시 형이 변경되어 장 1백 대에 처하고, 먼 외방에 노비로 보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어 함안으로 유배지가 옮겨졌으며, 1506년(연산군 12) 초 다시 이배되어 거제도로 보내지고 곧 위리안치되었다.
1506년 9월 중종반정 직후 석방되어 풀려나와 상경, 다시 홍문관교리로 등용되었다.
2. 3. 중종반정 이후 복권과 활동
1506년 중종반정 직후 석방되어 홍문관교리로 등용되었다. 1507년 책봉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사가독서에 선발되었으며, 의정부사인, 성균관사예, 사성 등을 역임했다. 1514년 《주고(酒誥)》를 지어 왕에게 바쳤고, 중종이 이를 중외에 효유하였다. 1515년 장경왕후 애책문의 글을 지었으며, 폐위된 단경왕후 복위 주장에 반대하였다.
이행은 장경왕후가 이미 원자를 낳고 승하하였는데, 만약 폐비를 복위하여 선후의 의리를 논하면 단경왕후는 먼저이고 장경왕후는 뒤인데 다시 순서가 뒤바뀌어 나라의 근본이 혹 동요될까 염려하여서였다고 한다.
첨지중추부사, 홍문관부제학, 성균관대사성, 승정원좌승지,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17년 대사헌이 되었으나, 조광조 등 신진 사류에게 남곤 등과 함께 배척받았다. 예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곧 중추부첨지사로 좌천당하자 사직하고 충청도 면천으로 내려갔다.
2. 4. 생애 후반
1520년 대제학이 되었다가, 공조참판에 임명되면서 바로 사헌부대사헌과 예문관대제학을 겸직하였다. 동지의금부사와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 등도 겸직하였다. 이후 이조판서를 거쳐 1521년(중종 16) 1월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곧 의정부우참찬, 그해 9월 명나라 사신 접견을 위한 원접사(遠接使)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좌참찬 등을 거쳐 12월 다시 우참찬, 좌참찬을 거쳐 의정부우찬성으로 승진하였다. 1522년(중종 17) 홍문관이 《동궁계몽(東宮啓蒙)》을 편찬하자 왕명으로 서문을 지었다.
1523년 의정부좌참찬, 의금부당상, 지의금부사 등을 거쳐 그해 9월 대제학으로서 문장가(文章家)의 책 편찬을 건의하여 승낙받았다. 10월에는 경연에서 세자빈 간택을 주장하였다. 그해 말 우찬성 겸 지경연사와 대제학을 겸직하고, 좌찬성이 되었다가 다시 우찬성이 되었다. 1524년 6월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중종의 딸 효혜공주와 아들 김미의 혼인으로 외척이 된 김안로(金安老)가 집권하자 남곤 등과 함께 그를 공격하였다. 이후 김안로의 미움을 받았으며, 김안로는 그의 형 이기, 이권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1525년 판의금부사, 대제학 지경연사, 의정부좌찬성을 거쳐 1527년 10월 우의정이 되었으며,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홍문관대제학에 임명되어 우의정과 홍문관대제학직 등을 겸임하였다. 1529년 남곤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의 내용 수정 및 보완 명령을 받고 여지승람 수찬당상(輿地勝覽 修撰堂上)이 되어 1530년까지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완성시키고, 의정부좌의정(左議政) 경연영사가 되었으나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논박하였다.
김안로의 석방에 대해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이듬해 김안로의 전횡을 비판, 논박하다가 김안로의 미움을 받았으며, 오히려 그 일파의 반격으로 중추부영사로 전임되었다가 행중추부판사로 좌천되고, 1532년 평안도 함종(咸從)으로 유배되었다. 1535년에는 그의 문하생이라는 이유로 장옥(張玉) 등이 조사받기도 했다. 아들들에게 연좌제를 적용하려는 시도에 1537년 중종이 직접 이행(李荇)의 아들을 금고(禁錮)하지 말라는 교지를 내렸다.
성품은 여색(女色)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재물을 축적함이 적었다. 그러나 소견이 편협하고 얕고 비루하다는 평이 있고, 옛것을 좋아하고 선한 것을 즐기는 사람을 실없고 망령스럽다고 하였다. 소세양(蘇世讓), 정사룡(鄭士龍), 이희보(李希輔)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고 이장(李璋), 장옥 등도 그의 문인이었다. 이행은 자신의 문인이자 관료인 소세양과 정사룡을 후계자로 키우려 했지만 정사룡은 처첩 문제로 논란이 되었다.
시를 지을 때 기교를 배격하고 떠오르는 시상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려 하였다. 스스로 자신의 시를 표현함에 자연 성장(自然成章)하며 억지로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저서로는 시문집 《용재집 (容齋集)》 2권 7책과 시문집 사행시고 등이 있으며, <진속동문선전 進續東文選箋>, <장주호접변 莊周蝴蝶辨>, <신고당기 信古堂記>, <소자파묘지문 >, <박중설묘지 朴仲說墓誌> 등의 글이 있다.
1534년 11월 11일 유배지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시신은 검시관에 의해 검험되어 검시장(檢屍狀)에 ‘염중 희백(髥中稀白)’이라 하고, 또 ‘잠백(暫白)’이라고 하였다.
3. 사상과 평가
4. 작품
4. 1. 저서
4. 2. 작품성
그는 시문에 모두 재능이 있고 글씨와 그림에도 능하였는데, 특히 그의 시는 당시 그와 가깝게 지낸 읍취헌 박은과 경향을 같이 하면서도, 깊고 차분하면서도 담아(澹雅)함이 있는 점이 특징이며, 특히 오언고시(五言古詩)를 잘 지었다. 허균은 "우리나라의 시는 마땅히 이행을 제1로 삼아야 한다"고 평하였으며, 또한 "그의 오언고시는 두보의 시를 거쳐 진사도의 시경(詩境)을 넘나들어 그 고고간절(高古簡切)함은 필설(筆舌)로 다 찬양할 수 없다"는 평도 남겼다. 후대의 홍만종도 그의 시를 두고 "인공(人工)으로 이룰 수 없는 천재가 있다"고 극찬했다.
참조
[1]
문서
본래 시호는 문정(文定)인데, 뒤에 문헌(文獻)으로 개시(改諡)되었다.
[2]
문서
비석에 쓰는 것은 성세창(成世昌)이 해서로 썼다.
[3]
참고
선원록 참고
[4]
문서
이명 이환(李芄)
[5]
문서
[[태종]]의 4남 [[경녕군]]의 증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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