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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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 499년부터 기원전 490년까지 일어난 아케메네스 제국과 그리스 도시 국가 간의 군사적 충돌이다. 이오니아 반란을 진압하고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처벌하기 위해 시작되었으며,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비롯한 다양한 사료를 통해 그 역사를 알 수 있다. 기원전 492년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원정은 폭풍과 부족의 기습으로 실패했고, 기원전 491년에는 그리스 도시 국가에 항복을 요구하는 외교적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다. 기원전 490년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가 이끄는 2차 침공은 에레트리아를 함락시키고 아티카의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군과 플라타이아군의 연합군에 패배하면서 종결되었다. 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일시적인 후퇴를 가져왔지만, 그리스에 대한 페르시아의 야망을 완전히 꺾지는 못했으며, 아테네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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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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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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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 제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
전체 |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
날짜 | 기원전 492년 – 기원전 490년 |
장소 |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키클라데스 제도, 에우보이아 섬, 아티카 |
원인 | 이오니아 반란 지원 |
결과 | 페르시아의 트라키아 종속, 마케도니아와 키클라데스 제도 정복, 에게 해 해상 우위 확보 |
영토 | 페르시아가 마케도니아와 키클라데스 제도를 정복하고 트라키아를 재정복했으며 에게 해에 대한 해상 우위를 확립함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아테네, 에레트리아, 기타 그리스 도시 국가 |
교전국 2 | 아케메네스 제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밀티아데스, 칼리마코스, 스테실라오스, 키나이게이로스 |
지휘관 2 | 다리우스 1세, 마르도니우스, 다티스, 아르타페르네스 |
병력 규모 | |
병력 1 | 아테네 8,000–9,000명, 플라타이아이 1,000명, 총합: 9,000–10,000명 |
병력 2 | 불멸부대 10,000명, 경보병 10,000명, 궁수 5,000명, 기병 1,000–3,000명, 삼단노선 600척, 노 젓는 인원 100,000명 (비전투원), 총합: 26,000–28,000명 |
피해 규모 | |
피해 1 | 아테네 침공: 헤로도토스: 아테네인 192명 전사, 플라타이아이인 11명 전사, 에레트리아 노예화, 낙소스 약탈, 기타 국가 불명 |
피해 2 | 아테네 침공: 헤로도토스: 페르시아인 6,400명 전사, 7척 침몰, 기타 추정: 4,000–5,000명 전사, 전체 캠페인 중 불명 |
캠페인 상자 |
2. 역사적 사료
헤로도투스는 '역사의 아버지'[111]라 불리며, 기원전 484년 소아시아의 할리카르낫소스(당시 페르시아 점령)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원전 440-430년경에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기원을 추적한 《역사》(Historia|히스토리아gre, The Histories|더 히스토리즈영어)를 저술했다. 이 책은 기원전 450년에 끝난 전쟁의 최후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했다.[112] 톰 홀랜드는 헤로도투스가 신의 변덕이나 운명 대신 개인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설명을 서술했다고 평가했다.[111]
기원전 500년경, 페르시아 제국은 비교적 젊고 팽창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국가였지만, 피정복 민족들 사이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16][17][18]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 1세는 찬탈자였기 때문에,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반란을 진압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16] 이오니아 반란 이전에도 다리우스 1세는 제국의 영토를 유럽으로 확장하여 트라키아를 정복하고, 다뉴브강을 넘어 유럽 스키타이 원정을 했으며, 파에오니아를 정복하고, 마케도니아를 페르시아의 종속 왕국으로 만들었다.[111]
기원전 492년, 다리우스 1세는 사위 마르도니우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그리스 원정군을 편성했다.[40] 이 원정의 1차 목표는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응징하는 것이었지만, 그 외에 가능한 많은 그리스 도시들을 복속시키는 것도 부가적인 목표였다.[1][41]
투키디데스를 비롯한 후대의 고대 역사가들은 헤로도투스를 비판하기도 했지만,[113][114] 투키디데스는 헤로도투스가 생략한 부분(세스토스 포위전)부터 자신의 역사를 시작하며 헤로도투스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인정했다.[111] 플루타르코스는 헤로도투스를 '야만애호가'로 비난했지만, 이는 역으로 헤로도투스가 공정하게 저술했음을 시사한다.[115] 19세기 이후 고고학적 발견으로 헤로도투스의 기록이 재평가되었지만,[117] 여전히 일부 역사가들은 헤로도투스가 이야기의 대부분을 지어냈다고 믿는다.[118]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기원전 1세기에 《비블리오테카 히스토리카》(Bibliotheca Historica|비블리오테카 히스토리카la)를 통해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설명했으며, 이 기록은 헤로도투스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한다.[119] 그 외에도 플루타르코스, 크니도스의 크테시아스, 아이스킬로스 등이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언급했다. 뱀기둥과 같은 고고학적 증거는 헤로도투스의 주장을 뒷받침한다.[120]
3. 배경
이러한 상황에서 이오니아 반란은 페르시아 제국의 통합을 직접적으로 위협했고, 그리스 본토의 국가들은 제국의 미래 안정에 잠재적인 위협으로 여겨졌다.[20] 이에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와 에게 해를 정복하고, 이오니아 반란에 연루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처벌하기로 결심했다.[1][21]
이오니아 반란은 페르시아의 사트라프 아르타페르네스와 밀레투스의 참주 아리스타고라스가 함께 낙소스를 공격했다가 실패하면서 시작되었다.[22] 아르타페르네스는 아리스타고라스를 권좌에서 몰아내려 했지만, 아리스타고라스는 먼저 밀레투스를 민주주의 국가로 선포하고 권좌에서 물러났다.[22] 다른 이오니아 도시들도 이를 따라 페르시아가 임명한 참주들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선포했다.[22][23] 아리스타고라스는 그리스 본토 국가들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만이 군대를 파견했다.[24]
아테네가 이오니아 반란에 참여하게 된 것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확립과 관련된 복잡한 상황 때문이었다.[1] 기원전 510년, 아테네인들은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메네스 1세의 도움으로 참주 히피아스를 몰아냈다.[25] 히피아스는 사르디스로 도망쳐 페르시아 사트라프 아르타페르네스에게 의탁했고, 복귀를 돕는다면 아테네를 페르시아에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26] 한편, 클레오메네스는 아테네에 친스파르타 참주 이사고라스를 세우려 했다. 이에 알크메오니데 가문의 지도자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인들에게 '민주주의'를 제안했고, 아테네인들은 이를 받아들여 클레오메네스와 이사고라스를 몰아냈다.[27]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로 복귀하여 민주 정부를 수립했고, 이는 아테네가 그리스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28]
클레오메네스는 아테네에 이사고라스를 복귀시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의 지원을 요청했다.[29] 아르타페르네스는 아테네 사절단에게 복종의 징표로 '땅과 물'을 바칠 것을 요구했고, 사절단은 이에 동의했지만 아테네에서 비난을 받았다.[30] 이후 히피아스는 다시 사르디스로 도망쳐 페르시아인들에게 아테네 정복을 설득하려 했다.[31] 아테네는 아르타페르네스에게 사절을 보내 설득하려 했지만, 아르타페르네스는 히피아스를 참주로 다시 받아들이라고 지시했다.[1] 아테네는 이를 거부하고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에레트리아가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상업적인 이유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에레트리아는 상업 도시였고, 페르시아의 에게 해 지배는 에레트리아의 무역에 위협이 되었다.[24] 헤로도토스는 에레트리아가 과거 칼키스와의 전쟁에서 밀레시아인에게 받은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반란을 지원했다고 주장한다.[32]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는 삼단 노선 25척으로 구성된 부대를 소아시아로 파견했다.[33] 그리스군은 사르디스를 기습하여 하층 도시를 불태웠지만, 페르시아 기병대에 쫓겨 퇴각하면서 많은 병사들을 잃었다.[34] 이들의 행동은 다리우스 1세의 분노를 샀고, 그는 두 도시를 처벌할 것을 맹세했다.[35] 라데 해전 (기원전 494년)에서 페르시아 해군이 승리하면서 이오니아 반란은 거의 종식되었고, 기원전 493년까지 마지막 저항 세력도 진압되었다.[36] 다리우스 1세는 이 반란을 기회로 제국의 국경을 동 에게 해의 섬과[37] 프로폰티스까지 확장했다.[38] 이오니아의 평정이 완료되자, 페르시아는 그리스로부터 제국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처벌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39]
4. 페르시아의 침공
마르도니우스는 육군과 함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트를 거쳐 트라키아를 재정복하고, 마케도니아를 페르시아 제국의 완전한 속국으로 만들었다. 한편, 함대는 타소스로 이동하여 타소스인들의 항복을 받은 뒤, 할키디케의 아칸토스를 거쳐 아토스 산 곶을 돌려다 거센 폭풍을 만나 좌초되었다.[41]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때 300척의 배와 2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41] 마케도니아에 주둔하던 육군은 브리기에스라는 트라키아 부족의 야간 기습을 받았으나, 마르도니우스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격파하고 복속시킨 후 헬레스폰트로 퇴각했다.[43]
기원전 491년,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 전역에 사절을 보내 복종의 상징으로 "흙과 물"을 요구했다.[44] 대부분의 도시 국가들은 요구에 응했으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사절을 처형하며 저항했다.[45]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는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응징하기 위해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를 지휘관으로 하는 수륙 양면 원정군을 보냈다. 함대는 사모스를 거쳐 에게 해로 진입, 낙소스를 파괴하고 델로스를 비롯한 여러 섬들을 복속시켰다. 이후 에우보이아 섬 남쪽의 카리스토스를 점령하고, 에레트리아를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에레트리아는 파괴되고 시민들은 노예가 되었다.[86]
페르시아 함대는 아티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여 마라톤 만에 상륙했다.[87] 플라타이아의 지원군과 합류한 아테네군은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군을 공격, 격파했다.[88][90][91]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6,400명의 페르시아군이 전사했고, 아테네군은 192명, 플라타이아군은 11명의 전사자를 냈다.[92][93]
전투 직후, 아테네군은 도시 방어를 위해 급히 귀환했고, 페르시아군은 아시아로 퇴각했다.[96]
4. 1. 1차 침공 (기원전 492년)
기원전 492년 봄, 다리우스 1세의 사위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원정군이 함대와 육군으로 구성되어 소집되었다.[40] 이 원정의 목표는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응징하는 것이었지만, 가능한 한 많은 그리스 도시들을 복속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1][41]
마르도니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트로 진군하는 한편, 함대를 이끌고 소아시아 해안을 따라 이오니아로 항해했다. 이오니아에서는 잠시 시간을 보내며 참주 정치를 폐지하고 민주정으로 대체했다.[1] 이는 이오니아 반란의 주요 원인이 민주주의 확산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마르도니우스가 민주정을 수립한 것은 이오니아를 안정시켜 헬레스폰트와 아테네, 에레트리아로 진격할 때 측면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
이후 함대는 헬레스폰트로 이동했고, 준비가 완료되자 육군을 유럽으로 수송했다.[40] 육군은 트라키아를 통과하며 진군했는데, 이 지역은 이미 기원전 512년 다리우스 1세의 유럽 스키타이 원정 때 페르시아 제국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재정복했다.[42] 마케도니아에 도착한 페르시아 군대는 마케도니아를 페르시아 제국의 완전한 속국으로 만들었다.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6세기 말부터 페르시아의 종속국이었지만, 상당한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함대는 타소스로 이동하여 타소스인들의 항복을 받아냈다.[41] 이후 함대는 할키디케의 아칸토스까지 해안을 따라 이동한 후 아토스 산 곶을 돌려고 시도했다.[41] 그러나 거센 폭풍을 만나 아토스 해안에서 좌초되었고,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300척의 배와 2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41]
육군이 마케도니아에 주둔하는 동안, 브리기에스라는 트라키아 부족이 야간 기습을 감행하여 많은 페르시아 군을 죽이고 마르도니우스를 부상시켰다.[43] 마르도니우스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브리기에스를 격파하고 복속시킨 후 육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트로 돌아갔으며, 해군 잔존 세력도 아시아로 퇴각했다.[43] 비록 이 원정은 불명예스럽게 끝났지만, 그리스 본토로 가는 육상 접근로가 확보되었고, 그리스인들은 다리우스의 의도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45]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다리우스가 보낸 함대는 600척의 삼단노선으로 구성되었다.[56] 역사 기록에는 수송선이 얼마나 동행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 1세의 2차 침공 당시 1,207척의 삼단노선과 함께 3,000척의 수송선이 동행했다고 주장했다.[57]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이 숫자를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600척이 삼단노선과 수송선을 합한 숫자이거나,[70][58] 600척의 삼단노선 외에 말 수송선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59]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군대의 규모를 추정하지 않고, 단지 "크고 잘 갖춰진 군대"라고만 언급했다.[60] 다른 고대 자료를 보면, 동시대 인물인 시모니데스는 20만 명, 후대 작가인 코르넬리우스 네포스는 보병 20만 명과 기병 1만 명으로 추산했다.[61] 현대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숫자를 과장된 것으로 본다.[59] 600척의 삼단노선이 수송할 수 있는 해병의 수를 계산하면, 대략 18,000~26,000명의 보병을 수송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59][69] 페르시아 보병의 수는 18,000~100,000명으로 추정되지만,[70][58][71][72][73] 대략 25,000명 정도였을 것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진다.[59][72]
침공에 사용된 페르시아 보병은 제국 각지에서 모집된 다양한 집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갑옷 종류와 전투 방식에는 대체로 일관성이 있었다.[74] 일반적으로 병사들은 활, 짧은 창, 칼로 무장하고 버드나무 방패를 들고 가죽 겉옷을 입었다.[74][91] 예외는 페르시아 병사들로, 사슬 갑옷을 입었을 수도 있다.[74] 일부 부대는 다른 무장을 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사카는 도끼병으로 유명했다.[75] 페르시아 보병의 정예 부대는 페르시아인, 메디아인, 키시아인, 사카인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74] 페르시아 군은 적과 거리를 두고 활을 사용하여 적을 약화시킨 다음 창과 칼로 결정타를 가하는 전술을 사용했을 것이다.[74]
기병은 대략 1,000~3,000명 정도로 추정된다.[59][78] 페르시아 기병은 주로 페르시아인, 박트리아인, 메디아인, 키시아인, 사카인으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 경무장 미사일 기병이었을 것이다.[74][79] 함대에 기병 수송선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4. 2. 외교적 노력 (기원전 491년)
다리우스 1세는 기원전 491년 그리스 전역의 도시 국가들에 사절을 보내 복종의 상징으로 "흙과 물"을 요구했다.[44] 대부분의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힘을 두려워하여 요구에 응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는 사절들이 재판에 회부된 후 처형되었고, 스파르타에서는 우물에 던져졌다.[45] 이 사건으로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공동으로 페르시아에 맞서 싸우게 되었고, 다가올 전쟁의 전선이 확고해졌다.[45]
한편, 스파르타는 내부 문제로 혼란을 겪었다. 아이기나가 페르시아에 굴복하자, 아테네는 페르시아가 아이기나를 해군 기지로 사용할 것을 우려하여 스파르타에 개입을 요청했다.[46] 스파르타의 왕 클레오메네스 1세는 아이기나에 직접 갔지만, 또 다른 왕 데마라투스의 반대에 부딪혔다.[47] 클레오메네스는 델포이 신탁을 매수하여 데마라투스를 폐위시키고, 그의 사촌 레오티키데스를 왕위에 앉혔다. 결국 아이기나는 항복하고 아테네에 인질을 넘겼다.[48] 그러나 클레오메네스의 뇌물 사건이 발각되어 추방되었다가 다시 복귀했지만, 곧 광인으로 몰려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49] 그의 이복 형제 레오니다스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4. 3. 2차 침공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는 아테네를 효과적으로 고립시킨 후,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응징하기 위해 수륙 양면 원정을 시작했다.[50] 수사에서 군대가 소집되어 킬리키아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함대가 편성되었다.[50] 원정 지휘는 메디아인 다티스와 사트라프 아르타페르네스의 아들인 아르타페르네스에게 맡겨졌다.
함대는 이오니아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여 사모스를 거쳐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에게 해로 진입했다.[81] 함대는 10년 전 원정에 저항했던 낙소스를 응징하기 위해 낙소스로 향했다.[81]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많은 주민들이 산으로 도망갔고, 페르시아인에게 붙잡힌 사람들은 노예가 되었다.[1] 그 후 페르시아인들은 낙소스의 도시와 신전을 불태웠다.[82]
페르시아 함대는 델로스로 접근했고, 델로스인들 또한 그들의 집에서 도망쳤다.[83] 다티스는 낙소스에서 페르시아의 힘을 과시한 후, 복종하는 다른 섬들에게는 자비를 베풀 의도였다.[81] 그는 델로스인들에게 사자를 보내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 "성스러운 사람들이여, 왜 도망가서 내 의도를 잘못 판단했는가? 이 땅과 그 주민들에게 두 신이 태어난 땅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은 나의 소망이며, 왕이 내게 내린 명령이다. 그러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 섬에서 살라."[83]
다티스는 델로스에 있는 아폴론의 제단에서 300 탈렌트의 유향을 태워 존경을 표했다. 그 후 함대는 에레트리아로 가는 길에 에게 해의 나머지 섬들을 건너면서 각 섬에서 인질과 군대를 징집했다.[81] 페르시아군은 마침내 에우보이아 섬 남쪽 끝에 있는 카리스토스에 도착했다. 카리스토스 시민들은 인질 제공을 거부했고, 결국 포위되어 토지가 황폐화되자 페르시아에 항복했다.[84]
원정군은 에우보이아 섬을 돌아 첫 번째 주요 목표 지점인 에레트리아로 향했다.[85]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에레트리아인들은 고지대로 도망갈 것인지, 포위를 견딜 것인지, 아니면 페르시아인에게 항복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다수의 결정에 따라 도시에 남기로 했다.[86] 에레트리아인들은 페르시아군이 상륙하거나 진격하는 것을 막으려 하지 않았고, 그 결과 포위당했다.[86] 6일 동안 페르시아군은 양측 모두의 손실을 보면서 성벽을 공격했다.[86] 그러나 7일째 되는 날, 두 명의 에레트리아인이 성문을 열고 페르시아인에게 도시를 넘겨주었다.[86] 도시는 파괴되었고, 사원과 신전은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 다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페르시아인들은 남아있는 모든 시민들을 노예로 만들었다.[86]
페르시아 함대는 아티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여 아테네에서 대략 약 40.23km 떨어진 마라톤 만에 상륙했다. 이는 전 아테네의 참주인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히피아스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87] 아테네인들은 플라타이아에서 온 소규모 병력과 합류하여 마라톤으로 진군했고, 마라톤 평원에서 두 개의 출구를 막는 데 성공했다.[88] 동시에 아테네 최고의 달리기 선수인 페이디피데스 (또는 필리피데스)가 스파르타에 파견되어 스파르타 군대의 지원을 요청했다.[88] 페이디피데스는 ''카르네이아'' 축제 기간에 도착했고, 스파르타 군대는 보름달이 뜰 때까지 전쟁에 나설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아테네는 최소한 10일 동안 지원군을 기대할 수 없었다.[89] 그들은 당분간 마라톤에서 버티기로 결정했고, 플라타이아에서 온 중장보병 부대의 지원을 받았다.[88]
5일 동안 교착 상태가 이어졌고, 아테네인들은 (그 이유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페르시아 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90] 페르시아 군이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장보병은 치명적인 효과를 발휘하여 페르시아 군의 양익을 격파한 후 페르시아 군의 중앙으로 진격했다. 페르시아 군의 잔당은 전투에서 물러나 배로 도망쳤다.[91] 헤로도토스는 전장에서 6,400명의 페르시아 군 시신이 확인되었다고 기록했다.[92] 아테네인들은 192명[92], 플라타이아인들은 11명만 잃었다.[93]
전투 직후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함대가 수니온 곶을 돌아 아테네를 직접 공격하기 위해 항해했다고 말하지만,[94]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이 시도를 전투 직전으로 본다.[95] 어느 쪽이든 아테네인들은 도시가 여전히 위협받고 있음을 분명히 깨닫고, 가능한 한 빨리 아테네로 돌아갔다.[96]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 군이 상륙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시간에 도착했고, 기회를 놓쳤음을 깨달은 페르시아 군은 방향을 돌려 아시아로 돌아갔다.[96] 다음 날, 스파르타 군대가 도착하여 불과 3일 만에 220km를 이동했다. 스파르타인들은 마라톤 전장을 둘러보고 아테네인들이 훌륭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데 동의했다.[97]
5. 마라톤 전투
페르시아 함대는 아티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여 아테네에서 대략 약 40.23km 떨어진 마라톤 만에 상륙했다. 이는 전 아테네의 참주인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히피아스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87] 아테네인들은 플라타이아에서 온 소규모 병력과 합류하여 마라톤으로 진군했고, 마라톤 평원에서 두 개의 출구를 막는 데 성공했다.[88] 동시에 아테네 최고의 달리기 선수인 페이디피데스 (또는 필리피데스)가 스파르타에 파견되어 스파르타 군대가 아테네를 지원하기 위해 진군해 줄 것을 요청했다.[88] 페이디피데스는 평화의 신성한 기간인 ''카르네이아'' 축제 기간에 도착했고, 스파르타 군대는 보름달이 뜰 때까지 전쟁에 나설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아테네는 최소한 10일 동안 지원군을 기대할 수 없었다.[89] 그들은 당분간 마라톤에서 버티기로 결정했고, 플라타이아에서 온 중장보병 부대의 지원을 받았다.[88]
5일 동안 교착 상태가 이어졌고, 아테네인들은 (그 이유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페르시아 군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90] 페르시아 군이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장보병은 치명적인 효과를 발휘하여 페르시아 군의 양익을 격파한 후 페르시아 군의 중앙으로 진격했다. 페르시아 군의 잔당은 전투에서 물러나 배로 도망쳤다.[91] 헤로도토스는 전장에서 6,400명의 페르시아 군 시신이 확인되었다고 기록했다.[92] 아테네인들은 192명[92], 플라타이아인들은 11명만 잃었다.[93]
전투 직후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함대가 수니온 곶을 돌아 아테네를 직접 공격하기 위해 항해했다고 말하지만,[94]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이 시도를 전투 직전으로 본다.[95] 어느 쪽이든 아테네인들은 도시가 여전히 위협받고 있음을 분명히 깨닫고, 가능한 한 빨리 아테네로 돌아갔다.[96]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 군이 상륙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시간에 도착했고, 기회를 놓쳤음을 깨달은 페르시아 군은 방향을 돌려 아시아로 돌아갔다.[96] 다음 날, 스파르타 군대가 도착하여 불과 3일 만에 220km를 이동했다. 스파르타인들은 마라톤 전장을 둘러보고 아테네인들이 훌륭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데 동의했다.[97]
6. 결과 및 영향
마라톤 전투에서의 패배로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은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트라키아와 키클라데스 제도는 페르시아 제국에 재정복되었고, 마케도니아는 제국의 부속 왕국으로 전락했다. 기원전 6세기 후반부터 페르시아의 속국이었지만, 광범위한 자치권을 유지했다.[99] 다리우스는 여전히 제국의 서쪽 부분을 확보하기 위해 그리스를 정복하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더욱이 아테네는 이오니아 반란에서의 역할에 대해 처벌받지 않았으며, 아테네와 스파르타 모두 페르시아 사절단을 대우한 것에 대해 처벌받지 않았다.
다리우스는 그리스를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 거대한 신규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원전 486년, 이집트 신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그리스 원정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다리우스는 이집트 원정을 준비하던 중 사망했고, 페르시아의 왕위는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넘어갔다.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 반란을 진압한 후, 그리스 침공 준비를 매우 빠르게 재개했다. 이 원정은 기원전 480년에 마침내 준비되었고, 크세르크세스 자신이 지휘하는 제2차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이 시작되었다.
페르시아인들에게 두 차례의 그리스 원정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새로운 영토가 제국에 편입되었고 에레트리아는 벌을 받았다.[99] 마라톤에서의 패배는 단지 사소한 좌절이었을 뿐, 페르시아 제국의 막대한 자원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103] 그러나 그리스인들에게 이는 매우 중요한 승리였다.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인을 이긴 것은 처음이었고, 페르시아인이 무적이 아니며, 굴복보다는 저항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04]
마라톤에서의 승리는 젊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결정적인 순간이었으며, 단결과 자기 신념을 통해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전투는 아테네의 '황금기'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105] 이는 그리스 전체에도 적용되었다. "그들의 승리는 그리스인들에게 서양 문화가 탄생한 3세기 동안 지속될 그들의 운명에 대한 믿음을 부여했다".[7][106] 존 스튜어트 밀은 "마라톤 전투는 영국 역사에서도 헤이스팅스 전투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견해를 밝혔다.[107]
군사적으로 그리스인들에게 중요한 교훈은 중장보병 팔랑크스의 잠재력이었다. 이 전술은 그리스인들 사이의 내전 동안 발전했다. 각 도시 국가가 같은 방식으로 싸웠기 때문에, 중장보병 팔랑크스의 장단점이 분명하지 않았다.[108] 마라톤은 팔랑크스가 더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과 처음으로 맞붙은 전투였고, 중장보병이 전투에서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108] 팔랑크스 대형은 여전히 기병에게 취약했지만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그리스 군대가 매우 신중했던 이유), 적절한 상황에서 사용될 경우 잠재적으로 파괴적인 무기임이 드러났다.[109] 페르시아인들은 마라톤의 군사적 교훈을 거의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침공을 위한 보병의 구성은 페르시아 통치하의 영토에서 중장보병과 다른 중보병을 동원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침공 때와 동일했다.[110] 이전에 중장보병과의 전투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페르시아인들은 마라톤 전투를 단순한 이례적인 사건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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