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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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쟁은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2세 암살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마케도니아 왕국을 계승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코린토스 동맹의 수장직을 물려받았다. 이후 발칸 원정을 통해 북쪽 국경을 안정시키고,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하여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스를 정복했다. 중앙아시아 원정을 거쳐 인도 아대륙까지 진출했으나, 군대의 반란으로 귀환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주요 전투로는 그라니쿠스 전투,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히다스페스 전투 등이 있다. 그의 정복 활동은 헬레니즘 문화를 창출하고 제국 분열을 가져왔으며,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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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
분쟁 개요 | |
분쟁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쟁 |
날짜 | 기원전 336년 – 기원전 323년 |
장소 | 그리스 일리리아 트라키아 다뉴브강 삼각주 아나톨리아 시리아 페니키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소그디아나 박트리아 인도 |
결과 | 마케도니아의 승리 |
영토 변화 | 마케도니아 제국이 발칸 반도와 서쪽의 이집트에서 동쪽의 중앙아시아와 인도까지 확장됨 헬레니즘 시대의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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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마케도니아 제국 헬라스 동맹 |
교전국 2 | 아케메네스 제국 |
발칸 반도 | |
서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 |
인도 | |
지휘관 및 지도자 | |
마케도니아 제국 | 알렉산드로스 대왕 파르메니온 안티파트로스 프톨레마이오스 헤파이스티온 크라테루스 필로타스 클레이토스 페르디카스 코에누스 리시마코스 안티고노스 네아르코스 카산드로스 셀레우코스 |
아케메네스 제국 | 다리우스 3세 베수스 아르시테스 멤논 아제밀쿠스 바티스 아리오바르자네스 마다테스 아리아라테스 1세 아기스 3세 스피타메네스 포루스 |
피해 규모 | |
총 사상자 | 100만 명 이상 |
2. 역사적 배경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세계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전통적인 강자였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쇠퇴하고, 테베가 잠시 패권을 잡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쪽의 마케도니아 왕국이 필리포스 2세의 지도 아래 강력하게 성장했다. 필리포스 2세는 군사 개혁과 외교술을 통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점차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2. 1. 마케도니아 왕국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2세가 신변 경호대의 대장인 오레스티스의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했다.[7] 필리포스 2세의 아들이자 이미 후계자로 지명된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 귀족과 군대에 의해 왕으로 선포되었다.[8] 그는 또한 아버지로부터 아케메네스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마케도니아의 패권 아래 있던 그리스 국가들의 연맹인 코린토스 동맹의 수장직을 물려받았다.
필리포스 2세의 죽음 소식은 테베, 아테네, 테살리아와 마케도니아 북쪽의 트라키아인 부족들을 포함한 많은 국가들을 반란으로 이끌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반란 소식을 듣고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다. 고문들은 외교를 사용할 것을 권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이 조언을 무시하고 3,000명의 마케도니아 기병대를 소집하여 테살리아(마케도니아의 남쪽 인접 지역)를 향해 남쪽으로 진격했다. 그는 올림포스 산과 오사 산 사이의 통로를 막고 있는 테살리아 군대를 발견하고, 병사들에게 오사 산을 넘어 이동하게 했다. 테살리아인들이 깨어났을 때 알렉산드로스가 그들의 뒤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재빨리 항복했으며, 그들의 기병대는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에 합류했다. 그 후 그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향해 남쪽으로 진격했다.[9]
알렉산드로스는 테르모필레에서 멈춰 암피크티오니아 동맹의 지도자로 인정받은 후 남쪽의 코린토스로 향했다. 아테네는 평화를 구했고 알렉산드로스는 사절을 받아 반란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사면했다. 코린토스에서 그는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그리스 군대의 '헤게몬'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코린토스에 있는 동안 그는 북쪽에서 트라키아의 반란 소식을 들었다.[10]
2. 2.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반란
필리포스 2세가 암살당하자, 테베, 아테네, 테살리아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과 마케도니아 북쪽의 트라키아인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9] 알렉산드로스는 즉각적인 조치를 취했는데, 외교를 권하는 고문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3,000명의 마케도니아 기병대를 소집하여 남쪽의 테살리아로 진격했다.[9]
알렉산드로스는 올림포스 산과 오사 산 사이의 통로가 테살리아 군대에 의해 막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병사들에게 오사 산을 넘어 이동하게 했다. 테살리아인들은 알렉산드로스가 그들의 뒤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항복했으며, 그들의 기병대는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에 합류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향해 남쪽으로 진격했다.[9]
알렉산드로스는 테르모필레에서 멈춰 암피크티오니아 동맹의 지도자로 인정받은 후, 남쪽의 코린토스로 향했다. 아테네는 평화를 요청했고, 알렉산드로스는 사절을 받아 반란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사면했다. 코린토스에서 그는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그리스 군대의 '헤게몬'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코린토스에 있는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북쪽에서 트라키아의 반란 소식을 들었다.[10]
3.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주요 원정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된 후 마케도니아 왕국과 코린토스 동맹의 지도자 자리를 물려받았다. 왕위에 오른 후,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는 등 대규모 원정을 수행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주요 원정은 다음과 같다:
원정 | 시기 | 주요 내용 |
---|---|---|
발칸 원정 | 기원전 335년 | 필리포스 2세 사후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반란 진압. 테베 파괴, 아테네 굴복.[13] 트라키아, 일리리아인 격파, 북쪽 국경 안정화.[11][12] |
페르시아 원정 | 기원전 334년 ~ 기원전 330년 | 헬레스폰토스 해협 건너 아시아 진입.[14] 다리우스 3세의 초토화 작전 제안 거부.[15][16] 토로스 산맥 통과 중 폐렴 회복.[2] 페르시아 관문 전투 승리, 페르세폴리스 점령.[26][27][31] 다리우스 3세 사망, 아케메네스 왕조 멸망. |
중앙아시아 원정 | 기원전 329년 ~ 기원전 327년 | 키로폴리스 포위, 작사르테스 전투에서 사카족과 전투.[1] 아케메네스 제국 잔존 세력 격파.[1] 아리아나 정복, 소그디아나 암벽 포위전 승리, 록사네와 결혼.[1] |
인도 원정 | 기원전 327년 ~ 기원전 325년 | 인도 아대륙 진출, 간다라 지역 부족 복속 시도.[32] 아스파시오이, 아사케노이 등과 전투.[32] 히다스페스 전투 승리, 포루스 복속.[34][35] 히파시스강에서 진격 중단.[39] |
인도에서의 귀환 | 기원전 325년 | 게드로시아 사막 통과, 병력 손실.[1] |
3. 1. 발칸 원정 (기원전 335년)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2세가 암살당한 후,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으로 선포되었다.[7][8] 그는 또한 코린토스 동맹의 수장직을 물려받았다.필리포스 2세의 죽음은 테베, 아테네, 테살리아 등 여러 국가들의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외교 대신 군사적 대응을 선택하여 3,0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진격했다. 오사 산을 넘어 테살리아 군대를 기습하여 항복시켰고, 그들의 기병대를 자신의 군대에 합류시켰다.[9]
알렉산드로스는 테르모필레에서 암피크티오니아 동맹의 지도자로 인정받은 후 코린토스로 향했다. 아테네는 평화를 요청했고, 알렉산드로스는 반란 관련자들을 사면했다. 코린토스에서 그는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그리스 군대의 '헤게몬'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북쪽에서 트라키아의 반란 소식이 들려왔다.[10]
발칸 원정
아시아로 넘어가기 전, 알렉산드로스는 북쪽 국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기원전 335년 봄, 트라키아로 진격했다. 헤무스 산에서 트라키아 수비대를 격파하고, 트리발리의 공격도 막아냈다. 다뉴브 강에서는 게타이 부족을 격퇴했다.[11] 이후 일리리아인 왕 클리투스와 타울란티의 글라우키아스 왕을 격파하여 북쪽 국경을 안전하게 만들었다.[12]
북쪽 원정 중 테베와 아테네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즉시 대응하여 테베를 철저히 파괴하고, 아테네를 굴복시켰다. 이로써 그리스 전체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복종하게 되었다.[13]
3. 2. 페르시아 원정 (기원전 334년 ~ 기원전 330년)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로 진입했다.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의 움직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로도스의 멤논은 초토화 작전을 제안했다. 그러나 아나톨리아의 사트라프들은 자신의 땅을 지켜야 한다며 반대했고, 결국 다리우스 3세는 5명의 사트라프에게 군대를 모아 알렉산드로스에게 맞서라고 명령했다.[14][15][16]멤논이 사망한 후, 파르나바조스 3세는 에게 해 섬들을 점령하고 남부 그리스에서 반란을 조장하여 알렉산드로스의 보급로를 교란하려 했다. 한편, 다리우스 3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로스를 막으려 했다.[1]
알렉산드로스는 카파도키아를 거쳐 동쪽으로 진군했는데, 토로스 산맥으로 가는 길에는 150km 구간에 물이 없었다. 좁은 협곡인 "관문"을 통과해야 했는데, 카파도키아 총독의 안일함 덕분에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때 큰 행운이 따랐다고 말했다.[1] 토로스 산맥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찬물에 뛰어들었다가 폐렴에 걸려 죽을 뻔했지만, 의사 필립의 치료로 회복했다.[2]
기원전 330년 겨울, 아리오바르자네스는 페르시아 관문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의 최후 방어선을 지휘했다.[26][27] 가우가멜라 전투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과 수사를 점령하고, 왕도를 통해 페르시스로 향했다. 페르시아 관문은 매복에 유리한 좁은 산길이었는데,[28] 알렉산드로스는 정찰을 소홀히 하여 아리오바르자네스의 매복에 걸려 큰 피해를 입었다.[29] 아리오바르자네스는 한 달 동안 관문을 지켰지만,[30] 알렉산드로스는 결국 페르시아 군을 포위하여 방어선을 돌파하고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4개월 후 군대가 페르세폴리스를 약탈하도록 허락했고, 이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도시가 파괴되었다.[31]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 3세를 추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했다. 다리우스는 동부 사트라피들에게 충성을 요구했지만, 그들은 알렉산드로스에게 항복했다. 다리우스는 베소스에게 살해당했고,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의 죽음에 슬퍼하며 그를 왕족의 예우로 장례를 치렀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가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복수를 부탁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다리우스의 죽음으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했다.
3. 2. 1. 소아시아
기원전 334년, 알렉산드로스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로 진입했다. 마케도니아 군대 전체를 수송하는 데 100척 이상의 삼단노선이 필요했지만, 페르시아인들은 이 움직임을 무시하기로 결정했다.[14]이 초기 몇 달 동안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의 움직임에 대해 진지한 도전을 가하지 않았다. 페르시아와 연합한 그리스 용병 로도스의 멤논은 초토화 작전을 옹호했다. 그는 페르시아인들이 알렉산드로스 앞에서 땅을 파괴하여 알렉산드로스 군대가 굶주림에 시달리게 한 다음, 퇴각하게 만들기를 바랐다. 아나톨리아의 사트라프들은 이 조언을 거부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땅을 방어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다.[15] 결국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영토 깊숙이 진격하자 다리우스 3세는 아나톨리아 지방의 5명의 사트라프들에게 군사 자원을 모아 알렉산드로스에게 맞서라고 명령했다. 이 군대는 멤논이 지휘했고, 총 사령관은 5명의 사트라프에게 분할되었다.[16]
3. 2. 2. 시리아
멤논이 사망한 후, 그의 후임 파르나바조스 3세(마케도니아에서 시간을 보낸 페르시아인)는 헬레스폰트 인근의 에게 해 섬들을 점령하고 남부 그리스에서 반란을 조장하여 알렉산드로스의 보급로를 교란했다.[1] 한편, 다리우스는 페르시아 군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로스를 가로막으려 했다.[1]알렉산드로스는 군대를 이끌고 카파도키아를 거쳐 동쪽으로 진군했는데, 150km에 달하는 구간에는 물이 없었다.[1] 군대가 토로스 산맥에 접근했을 때,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관문"이라고 불리는 좁은 협곡임을 발견했다.[1] 협곡은 매우 좁아서 쉽게 방어할 수 있었다.[1] 그러나 카파도키아의 페르시아 총독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대평가에 빠져 있었다.[1] 그는 그라니쿠스 강 전투에 참전했었고, 멤논의 초토화 전략이 여기서도 통할 것이라고 믿었다.[1] 그는 지형의 다른 환경적 조건 때문에 그 전략이 쓸모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1] 만약 그가 협곡에 대한 믿을 만한 방어를 구축했다면, 알렉산드로스는 쉽게 격퇴되었을 것이다.[1] 그는 협곡을 지키기 위해 소규모 병력만 남겨두고, 자신의 군대 전체를 이끌고 알렉산드로스 군대 앞에 놓인 평원을 파괴했다.[1] 협곡을 지키도록 배치된 페르시아 병력은 곧 그곳을 버렸고, 알렉산드로스는 아무 문제 없이 통과했다.[1] 알렉산드로스는 이 사건 이후 자신의 생애에서 이처럼 운이 좋았던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1]
토로스 산맥에 도착한 후,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산에서 흘러나오는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있는 시냇물을 발견했다.[2] 생각 없이 알렉산드로스는 시냇물에 뛰어들었고, 경련과 발작을 일으켜 거의 죽을 뻔했다.[2] 그는 곧 폐렴에 걸렸지만, 그의 의사들은 그가 죽으면 책임을 져야 할 것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그를 치료하려 하지 않았다.[2] 어릴 적부터 알렉산드로스를 치료해 온 필립(Philip)이라는 의사 한 명이 그를 치료하기로 동의했다.[2] 그는 곧 혼수상태에 빠졌지만, 결국 회복했다.[2]
3. 2. 3. 페르시스
기원전 330년 겨울, 오늘날 이란 야수지 북동쪽에 위치한 페르시아 관문 전투에서 페르시아 사트라프(총독) 아리오바르자네스가 페르시아군의 최후 방어선을 지휘했다.[26][27] 가우가멜라 전투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과 수사로 진격했다. 왕도는 수사와 페르세폴리스, 파사르가다에 등 페르시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수도"를 가지고 있었다)의 더 동쪽에 있는 수도들을 연결했으며, 알렉산드로스의 계속되는 원정을 위한 자연스러운 장소였다. 수사 정복 후,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장군 파르메니온은 왕도를 따라 한 부대를 이끌었고, 알렉산드로스 자신은 페르시스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 페르시스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페르시아 관문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곳은 매복에 매우 적합한 좁은 산길이었다.[28]알렉산드로스는 우크시족과의 승리 이후 더 이상 적군을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선두 부대에 정찰병을 보내는 것을 소홀히 하여 아리오바르자네스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마케도니아 군대가 좁은 길로 충분히 진격하자, 페르시아인들은 북쪽 경사면에서 그들에게 바위를 쏟아냈다. 남쪽 경사면에서는 페르시아 궁수와 투석기가 투사체를 발사했다.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처음에는 막대한 피해를 입어, 한 번에 부대가 통째로 궤멸되었다.[29] 아리오바르자네스는 페르시아 관문에서 알렉산드로스를 격파하면 페르시아가 다른 군대를 배치할 시간을 더 확보하여 마케도니아의 침략을 완전히 막을 수 있기를 희망했다.
아리오바르자네스는 한 달 동안 관문을 지켰지만,[30]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군대를 포위하는 데 성공하여 페르시아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페르시아 관문에서 아리오바르자네스 군대의 패배는 알렉산드로스와 페르세폴리스 사이의 마지막 군사적 장애물을 제거했다. 페르세폴리스에 도착한 알렉산드로스는 프라사오르테스라는 장군을 아리오바르자네스의 후임으로 임명했다. 4개월 후, 알렉산드로스는 군대가 페르세폴리스를 약탈하도록 허락했다. 불이 발생하여 도시의 나머지 부분으로 번졌다. 이것이 술에 취한 사고였는지, 아니면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동안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를 불태운 것에 대한 고의적인 복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31]
전투 후 파르메니온은 페르시아의 짐마차 행렬을 포위했고,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친위대는 다리우스를 따라잡기 위해 쫓아갔다. 전투 후 상당한 양의 전리품이 획득되었으며, 4,000 탈렌트와 왕의 개인 전차와 활도 획득했다. 다리우스는 동쪽으로 더 이동하여 알렉산드로스에 맞설 또 다른 군대를 소집할 계획을 세웠고, 그와 마케도니아인들은 페르시아의 수도 중 하나인 바빌론으로 향한 다음 또 다른 수도인 수사로 향했다. 그곳에서 알렉산드로스는 그조차 상상할 수 없었던 부를 발견했다. 그는 군대에 급여를 지급하고, 스파르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테네의 연간 수입의 6배에 달하는 돈을 그리스로 보냈다. 한편, 다리우스는 동부 사트라피들에게 충성을 유지해달라는 서신을 보냈으나, 사트라피들은 다른 의도를 품고 알렉산드로스에게 즉시 항복했다.
베소스는 동쪽으로 도주하기 전에 다리우스를 치명적으로 찔렀다.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정찰병 중 한 명에게 고통에 신음하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죽어가며 소에 의해 끌려가는 짐마차에 묶여 있던 다리우스는 외로운 개 옆에 누워 있었고 그의 왕실 옷은 피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물을 요구했고, 마케도니아 군인의 손을 잡고 완전히 혼자 버려져 죽지 않아 감사하다고 말했다. 다리우스의 죽음에 진심으로 슬픔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를 아케메네스 왕조 선조들 옆에 완전한 군사 장례로 매장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가 죽어가면서 알렉산드로스를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고 자신의 죽음을 복수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주장했는데, 알렉산드로스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점에서 놀라운 아이러니였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은 다리우스의 죽음으로 멸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3. 3. 중앙아시아 원정 (기원전 329년 ~ 기원전 327년)
기원전 329년, 알렉산드로스는 키로폴리스 포위를 시작했고, 작사르테스 전투에서 사카족과 싸웠다.[1] 기원전 328년 가바이 전투에서 아케메네스 제국의 마지막 군대를 격파한 후,[1] 기원전 327년 아리아나 정복을 위한 새로운 원정을 시작했다.[1] 그는 알렉산드로스 시대에 알려진 세계의 끝, 즉 인도의 동쪽 끝까지 정복하길 원했으며, 당시 그리스인들은 중국이나 박트리아 동쪽의 다른 지역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1]소그디아나에 있는 박트리아 북쪽의 요새인 소그디아나 암벽 포위전은 기원전 327년에 일어났다.[1] 박트리아의 옥시아르테스는 아내와 딸들(그 중 한 명은 록사네)을 그곳으로 보냈는데, 그곳은 난공불락이라고 여겨졌고 장기간의 포위에 대비해 식량을 비축해두었다.[1] 알렉산드로스가 항복을 요구하자, 수비대는 거절하며 그를 "날개 달린 사람"이 필요할 것이라고 비웃었다.[1] 알렉산드로스는 지원자를 모집하여, 요새 아래 절벽을 오르면 보상하겠다고 약속했다.[1] 이전의 포위전을 통해 암벽 등반 경험을 쌓은 300여 명의 병사들이 텐트 말뚝과 튼튼한 아마 밧줄을 사용하여 밤에 절벽을 기어올랐으며, 등반 과정에서 30명 정도가 사망했다.[1]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에 따라, 그들은 린넨 조각을 흔들어 아래에 있는 군대에게 성공을 알렸고, 알렉산드로스는 전령을 보내 적의 전초 기지에 항복하면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을 외치게 했다.[1] 수비대는 이에 너무 놀라고 사기가 꺾여 항복했다.[1] 알렉산드로스는 록사네를 처음 보고 사랑에 빠졌으며, 고대 역사가들은 그녀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불렀다(고대 여왕에게 흔한 칭호).[1] 결국 그녀와 결혼했다.[1] 이 포위전 이야기는 로마 역사가 플라비우스 아리아누스가 쓴 알렉산드로스 원정기 (4.18.4–19.6)에 기록되어 있다.[1]
3. 4. 인도 원정 (기원전 327년 ~ 기원전 325년)
스피타메네스가 죽고 록사네(박트리아어로 로샤나크)와 결혼하여 새로운 중앙아시아 사트라프와의 관계를 다진 후, 알렉산드로스는 인도 아대륙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현재 파키스탄 젤룸강 북쪽에 위치한 옛 간다라 사트라피의 모든 부족장들에게 자신에게 와서 복종할 것을 요청했다. 탁실라의 통치자인 암비(옴피스)는 인더스강에서 히다스페스까지 자신의 왕국을 확장하여 이에 응했지만, 아스파시오이와 아사케노이를 포함한 일부 언덕 부족의 족장들은 복종을 거부했다. 이들은 캄보자 부족의 일부로, 인도 기록에는 아슈바야나와 아슈바카야나로 언급되어 있다.[32]기원전 327/326년 겨울, 알렉산드로스는 직접 이 부족들을 상대로 원정을 지휘했다. 대상은 쿠나르 계곡의 아스파시오이, 구라에우스 계곡의 구라에인, 그리고 스와트 계곡과 부네르 계곡의 아사케노이였다.[32] 아스파시오이와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알렉산드로스 본인이 화살에 맞아 어깨에 부상을 입었지만, 결국 아스파시오이는 전투에서 졌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후 아사케노이와 마주쳤는데, 이들은 용감하게 싸웠고, 마사가, 오라, 그리고 아오르노스의 요새에서 알렉산드로스에게 완강하게 저항했다. 마사가 요새는 알렉산드로스 본인이 발목에 심각한 부상을 입는 등 며칠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겨우 함락되었다. 쿠르티우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마사가의 모든 사람을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건물까지 파괴하여 폐허로 만들었다."[33] 그 후 오라에서도 비슷한 학살이 뒤따랐다. 이곳은 아사케노이의 또 다른 요새였다. 마사가와 오라의 참사 이후, 수많은 아사케니안들이 아오르노스 요새로 도망쳤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뒤를 바싹 따라가, 4일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전략적인 언덕 요새를 함락했다. 이 전투는 알렉산드로스가 찾고 있던 도전이었으며, 거대한 코끼리를 보유한 군대는 알렉산드로스를 거의 패배시킬 뻔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옛 아케메네스 왕조의 사트라피인 간다라를 장악한 후, 탁실라를 포함하여 펀자브로 진격하여 지역 왕 포루스(푸루)와 전투를 벌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6년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포루스를 물리쳤지만,[34][35] 왕이 보여준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아 포루스가 자신의 왕국을 사트라프로서 계속 통치하도록 허락했다.[36]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히다스페스 전투는 마케도니아인들이 치른 가장 큰 손실을 입은 전투였다.[37]
포루스 왕국의 동쪽, 갠지스강 근처에는 강력한 난다 왕조(난다 제국)의 마가다가 있었다. 그리스 자료에 따르면, 난다 군대는 마케도니아 군대보다 5배나 더 컸다.[38] 강력한 난다 제국 군대와 맞서 싸울 것을 두려워하고, 수년간의 원정으로 지친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히파시스강에서 반란을 일으켜 더 동쪽으로 진격하는 것을 거부했다. 따라서 이 강은 알렉산드로스 정복의 가장 동쪽 경계가 되었다.
> 그러나 마케도니아인들에게는 포루스와의 싸움이 용기를 무디게 하고, 더 이상의 인도 진출을 막았다. 2만 명의 보병과 2천 명의 기병만 동원한 적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기에, 그들은 너비가 32펄롱이고 깊이가 100패덤이며, 강둑 너머에는 무장한 병사, 기병, 코끼리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된 갠지스강을 건너가라는 알렉산드로스의 주장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갠데리테스와 프라에시 왕들이 기병 8만 명, 보병 20만 명, 전차 8천 대, 전투 코끼리 6천 마리를 이끌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39]
알렉산드로스는 군대에게 연설하며 인도 진격을 설득하려 했지만, 코이노스는 그의 의견을 바꾸고 돌아갈 것을 간청했다. 그는 병사들이 "다시 부모님, 아내와 자녀, 고향을 보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부하들의 의지를 확인하고 동의하여 방향을 돌렸다. 가는 길에 그의 군대는 말리 부족(현대 물탄)을 정복했다. 그는 인더스 지역에서 자신의 장교 페이톤을 사트라프로 임명했고, 그는 기원전 316년까지 10년 동안 그 자리를 유지했다. 펀자브에서는 에우데모스에게 군대를 맡겼으며, 그는 포루스와 탁실레스의 사트라프 옆에서 활동했다. 에우데모스는 그들이 죽은 후 펀자브의 일부를 통치하게 되었다. 두 통치자는 기원전 316년에 군대와 함께 서쪽으로 돌아갔다. 기원전 321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인도에 마우리아 제국을 세우고 그리스 사트라프들을 전복시켰다.
3. 5. 인도에서의 귀환 (기원전 325년)
알렉산드로스는 군대의 상당 부분을 장군 크라테루스와 함께 카르마니아(현재 남부 이란)로 보냈고, 제독 네아르코스 휘하의 함대에 페르시아 만 해안을 탐험하도록 위임했다. 그는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게드로시아 사막(현재 남부 이란 및 마크란, 현재 파키스탄의 일부)을 통과하는 남부 경로로 페르시아로 돌아갔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사막을 60일 동안 행군하는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가혹한 사막 환경으로 인해 그의 군대의 4분의 3을 잃었다.[1]4.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투 목록
결과 | 날짜 | 전쟁 | 작전 | 상대 | 유형 | 위치 (현재) | 계급 |
---|---|---|---|---|---|---|---|
승리 | 기원전 338년 8월 2일 | 필리포스 2세의 그리스 정복 | 카이로네이아 전투 | 테바이, 아테네 및 기타 그리스 도시들 | 전투 | 그리스 | 왕자 |
승리 | 기원전 335년 | 알렉산드로스의 발칸 원정 | 헤무스 산 전투 | 게타이, 트라키아인 | 전투 | 불가리아 | 왕 |
승리 | 기원전 335년 | 알렉산드로스의 발칸 원정 | 펠리움 포위전 | 일리리아인 | 포위전 | 알바니아 | 왕 |
승리 | 기원전 335년 | 알렉산드로스의 발칸 원정 | 테베 전투 | 테바이 | 전투 | 그리스 | 왕 |
승리 | 기원전 334년 5월 | 페르시아 원정 | 그라니쿠스 전투 | 아케메네스 제국 | 전투 | 터키 | 왕 |
승리 | 기원전 334년 | 페르시아 원정 | 밀레토스 포위전 | 아케메네스 제국, 밀레토스인 | 포위전 | 터키 | 왕 |
승리 | 기원전 334년 | 페르시아 원정 | 할리카르나소스 포위전 | 아케메네스 제국 | 포위전 | 터키 | 왕 |
승리 | 기원전 333년 11월 5일 | 페르시아 원정 | 이수스 전투 | 아케메네스 제국 | 전투 | 터키 | 왕 |
승리 | 기원전 332년 1월~7월 | 페르시아 원정 | 티레 포위전 | 아케메네스 제국, 티루스인 | 포위전 | 레바논 | 왕 |
승리 | 기원전 332년 10월 | 페르시아 원정 | 가자 포위전 | 아케메네스 제국 | 포위전 | 팔레스타인 | 왕 |
승리 | 기원전 331년 10월 1일 | 페르시아 원정 | 가우가멜라 전투 | 아케메네스 제국 | 전투 | 이라크 | 왕 |
승리 | 기원전 331년 12월 | 페르시아 원정 | 욱시안 협곡 전투 | 욱시안 | 전투 | 이란 | 왕 |
승리 | 기원전 330년 | 페르시아 원정 | 페르시아 관문 전투 | 아케메네스 제국 | 전투 | 이란 | 왕 |
승리 | 기원전 329년 | 페르시아 원정 | 키로폴리스 포위전 | 소그디아인 | 포위전 | 투르크메니스탄 | 왕 |
승리 | 기원전 329년 10월 | 페르시아 원정 | 작사르테스 강 전투 | 스키타이 | 전투 | 우즈베키스탄 | 왕 |
승리 | 기원전 327년 | 페르시아 원정 | 소그디아나 암벽 포위전 | 소그디아인 | 포위전 | 우즈베키스탄 | 왕 |
승리 | 기원전 327년 5월 – 기원전 326년 3월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 | 코펜 원정 | 아스파시안 | 원정 | 아프가니스탄 및 파키스탄 | 왕 |
승리 | 기원전 326년 4월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 | 아오르노스 포위전 | 아슈바카 | 포위전 | 파키스탄 | 왕 |
승리 | 기원전 326년 5월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 | 히다스페스 전투 | 포루스 | 전투 | 파키스탄 | 왕 |
승리 | 기원전 326년 11월 – 기원전 325년 2월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 | 말리 원정 물탄 포위전 | 말리족 | 포위전 | 파키스탄 | 왕 |
5.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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