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트샤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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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생트샤펠은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고딕 양식의 왕실 예배당으로, 1239년 루이 9세가 예수 수난의 성유물인 가시관을 구입한 후, 이를 보관하기 위해 1248년에 완공되었다. 건축은 빛나는 양식의 대표적인 예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특징이며, 15개의 거대한 창문과 1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서쪽 장미창이 유명하다. 프랑스 혁명 시기 훼손되었으나, 19세기에 복원되었으며, 현재는 주요 관광 명소로, 루이 9세가 수집한 성유물들은 노트르담 대성당 보물창고에 보관되었다가,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이후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생트샤펠은 이후 유럽 각지에 유사한 건축물에 영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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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트샤펠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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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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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가톨릭교회 |
전례 | 로마 전례 |
지역 | 일드프랑스 |
국가 | 프랑스 |
위치 | 10, boulevard du Palais, 파리 1구 |
주(구획) | 가톨릭 파리 대교구 |
도시 | 파리 |
기능 | 프랑스 대혁명 이후 세속화 |
문화재 지정 | 1862년 |
문화재 지정 번호 | PA00086001 |
웹사이트 | https://www.sainte-chapelle.fr/en/ |
건축 | |
건축 유형 | 왕실 예배당 |
건축 양식 | 레이요낭 고딕 |
착공 | 1242년 |
완공 | 1248년 |
명칭 | |
프랑스어 | Sainte-Chapelle |
영어 | Holy Chapel (홀리 채플) |
2. 역사
생트샤펠은 루이 9세가 그리스도의 성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파리의 시테섬 왕궁 안뜰(현재는 콩시에르주리의 일부)에 지은 왕실 예배당이다. 1239년 루이 9세는 콘스탄티노플의 라틴 황제 발두인 2세로부터 가시관, 에데사의 성상을 포함한 여러 성유물을 거액(135,000 리브르)에 구입했다. 이 유물들은 1239년 8월 파리에 도착했고, 루이 9세는 이를 기념하는 성대한 행사를 열었다.[4]
생트샤펠은 카롤루스 왕조 시대의 왕실 예배당, 특히 샤를마뉴의 아헨 궁정 예배당에서 영감을 받아 지어졌다. 1238년 루이 9세는 이미 생제르맹앙레 샤토에 왕실 예배당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를 바탕으로 더 큰 규모의 생트샤펠을 계획했다. 예배당은 두 층으로 구성되었는데, 위층은 왕족과 귀족, 아래층은 궁정 신하와 병사들이 사용했다.
예배당 건설에는 40,000 리브르가 소요되었으며, 1248년에 완공되었다. 완공 직후 루이 9세는 제7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되었지만,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생트샤펠은 심하게 훼손되었다. 왕실의 상징물은 파괴되고 첨탑은 무너졌으며, 성당은 곡물 창고로 사용되었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법원 기록 보관소로 사용되면서 스테인드글라스 일부가 제거되기도 했다.
1840년부터 루이 필리프 1세의 명으로 대대적인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건축가 펠릭스 뒤방, 장바티스트 라쉬, 에밀 뵈스빌발드, 외젠 비올레르뒤크 등이 참여하여 28년에 걸쳐 복원이 진행되었다. 이들은 생트샤펠의 원래 모습을 최대한 복원하고자 노력했다.
스테인드글라스 복원 작업도 병행되었는데, 원래 유리 패널 중 일부는 클뤼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떼어내기도 했다.
2007년부터 2015년까지 다시 한번 대대적인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보호하기 위한 혁신적인 기술이 사용되었고, 서쪽 장미창 복원은 2015년 루이 9세 탄생 800주년에 맞춰 완료되었다.
생트샤펠의 건설과 관련된 주요 연표는 다음과 같다.
연도 | 사건 |
---|---|
1239년 | 루이 9세가 가시관을 구입하다. |
1241년 | 가시관과 다른 성유물이 파리에 도착하다. |
1242년 ~ 1244년 | 생트샤펠 공사가 시작되다. |
1248년 | 생트샤펠이 완공되고 축성되다. |
1793년 | 혁명군이 성당 문과 왕실 문장을 부수다. 성당이 종교적으로 쓰이지 않게 되고 첨탑이 파괴되다. |
1840년 ~ 1848년 | 성당이 대대적으로 복원되고 장식되다. |
1853년 ~ 1855년 | 현재의 첨탑이 세워지다. |
2008년 | 스테인드글라스 청소 및 보존, 외벽 석조물 청소, 조각상 보존 및 수리 등 복원 프로그램이 시작되다. (7년간, 약 1000만유로 소요). |
2015년 | 성 루이 탄생 800주년을 기념하여 서쪽 정면의 화려한 장미창 복원이 완료되다. |
2. 1. 건설
생트샤펠은 카롤루스 왕조의 왕실 성당, 특히 샤를마뉴가 아헨에 지은 궁정 예배당에서 영감을 받았다. 루이 9세는 1238년에 이미 생제르맹앙레 성에 왕실 성당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를 바탕으로 더 큰 규모의 생트샤펠을 계획했다.새로운 성당은 2층 구조로 지어졌는데, 아래층은 궁정 신하와 병사들이 사용하고 위층은 왕족과 귀빈들이 사용하도록 설계되었다. 길이 36m, 폭 17m, 높이 42.5m의 규모는 당시 프랑스의 고딕 양식 성당들과 비슷했다.
생트샤펠은 단순한 예배 장소를 넘어, 루이 9세의 정치적, 문화적 야망을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루이 9세는 예술과 건축 후원을 통해 서방 기독교 세계의 핵심 군주로 자리매김하고자 했다. 특히 샤를마뉴의 아헨 궁정 예배당과의 유사성을 통해, 스스로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후계자로 내세우려 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루이 9세가 수집한 성십자가 조각과 가시관이 그리스도가 루이 9세에게 왕관을 씌워준 것을 상징한다고 선포했다.[25]
시테섬 왕궁 안뜰(현재는 콩시에르주리의 일부)에 성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생트샤펠은 1241년 가을부터 1244년 5월 사이에 착공되어 1248년 4월 26일에 축성되었다. 총 건축비는 40,000 리브르였다.
생트샤펠 건설에 직접 참여한 설계자나 건축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피에르 드 몽트뢰유라는 설이 전해지지만, 아미앵 대성당 건축에 참여한 로베르 드 뤼자르슈라는 설도 유력하다.
2. 1. 1. 성유물 구입
루이 9세는 가시관, 에데사의 성상 등 약 30점의 성유물을 시테섬 왕궁 안뜰에 생트샤펠을 지어 보관했다. 루이 9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제국 황제 보두앵 2세에게 135000리브르를 주고 성유물을 샀다. 당시 보두앵 2세는 베네치아인들에게 성유물을 저당잡히고 돈을 빌린 상태였다.[25]1239년 8월, 도미니코회 수도사 두 명이 베네치아에서 이 유물들을 가지고 파리에 도착했다. 루이 9세는 일주일 동안 유물 도착을 기념하는 의식을 거행했는데, 마지막에는 직접 맨발의 고해자 차림으로 성유물을 들고 행진했다. 이 성유물들은 루이 9세가 100000리브르를 들여 만든 '그랑드 샤스'(grande châsse프랑스어)라는 크고 화려한 은 상자에 보관되었다.
생트샤펠 전체를 짓고 꾸미는 데에는 40000리브르가 들었다. 1248년 생트샤펠이 완공되기 전까지 성유물들은 뱅센 성과 생제르맹앙레 성의 성당에 보관되었다. 1246년에는 성십자가 조각과 성창을 비롯한 다른 유물들이 루이 9세의 수집품에 추가되었다. 1248년 4월 26일, 생트샤펠이 축성되었고 루이 9세의 성유물들은 성대한 의식과 함께 새 성당으로 옮겨졌다. 그 직후 루이 9세는 제7차 십자군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혔으나,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2. 2. 훼손과 복원
프랑스 대혁명 시기, 생트샤펠은 종교와 왕권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파괴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성당은 곡물 창고로 사용되었고, 건물 외부의 조각상과 왕실 문장은 파괴되었으며, 첨탑도 무너졌다.[26] 스테인드글라스 일부는 파손되거나 흩어졌지만, 오늘날 남아있는 스테인드글라스의 2/3 정도는 원래부터 있던 것이다. 어떤 스테인드글라스는 성당 안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성유물은 여러 곳으로 흩어졌지만, 일부는 "생트샤펠의 성유물"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그랑드 샤스"를 비롯한 많은 성유물함은 금과 은을 얻기 위해 녹여졌다.1803년부터 1837년까지 생트샤펠 위층은 이웃한 팔레 드 쥐스티스의 기록 보관소로 쓰였다.[26] 문서 작업 중 빛이 더 잘 들도록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쪽 2미터가 제거되었다. 이 유리 중 일부는 다른 창문의 깨진 유리를 대체하는 데 쓰였고, 일부는 시장에 팔렸다.[9] 1835년부터 학자, 고고학자, 작가들이 생트샤펠을 보존하고 중세의 원래 모습으로 복원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840년 루이 필리프 1세 치하에서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다. 건축가 펠릭스 뒤방이 먼저 지휘했고, 이후 장바티스트 라쉬와 에밀 뵈스빌발드가 젊은 외젠 비올레르뒤크의 도움을 받아 작업을 이어갔다. 이들은 모두 진보적인 성향의 건축가들이었다. 28년 동안 이어진 복원 작업은 한 세대의 고고학자들과 복원가들에게 훈련장이 되었다.[26] 복원은 생트샤펠의 원래 모습을 묘사한 글과 그림에 충실하게 진행되었다.[10] 현재의 정교한 첨탑은 르 뒤크의 설계이다.
1846년부터 1855년까지는 스테인드글라스 복원 작업이 병행되었다. 유리 공예가 앙투안 뤼송과 마레샬 드메츠, 루이 스테넬이 작업을 주도했다. 생트샤펠 스테인드글라스의 1/3 정도는 원래 것이 아니라 나중에 추가된 것이었는데, 이를 제거하고 다른 중세 건물에서 가져온 유리나 원래 고딕 양식에 맞게 새로 만든 유리로 교체하였다. 원래 유리 패널 중 열여덟 개는 현재 파리 클뤼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27]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떼어내 안전한 곳에 보관했다. 1945년에는 먼지가 묻거나 폭격으로 흠집이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유리에 광택제를 입혔다.[28] 그러나 광택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색이 어두워져, 이미 흐릿해져 가던 스테인드글라스 그림을 더 알아보기 힘들게 했다.[27] 2007년, 포괄적인 복원 계획이 시작되어 7년간 진행되었다. 모든 스테인드글라스를 깨끗하게 하고, 건물 전면부 석조를 깨끗하게 하고, 일부 조각상을 복원하는 데 대략 1000만유로가 들었다. 예산의 절반은 기부로 충당했고, 나머지 절반은 빌룸 재단이 부담했다.[28] 이 복원 과정에서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보호하기 위해 바깥쪽에 열성형 유리 층을 덧입히는 혁신적인 기술이 사용되었다. 서쪽의 화려한 장미창 복원은 2015년 루이 9세 탄생 800주년 기념일에 맞추어 완료되었다.[29]
2. 3. 연표
연도 | 사건 |
---|---|
1239년 | 루이 9세가 가시관을 구입하다. |
1241년 | 가시관과 다른 성유물이 파리에 도착하다. |
1242년 ~ 1244년 | 생트샤펠 공사가 시작되다. |
1248년 | 생트샤펠이 완공되고 축성되다. |
1264년 ~ 1267년 | 성유물을 놓을 상좌(上座)를 설치하다. |
1383년 | 첫 번째 첨탑이 다시 지어지다. |
15세기 말 | 루이 11세가 외부 계단을 설치하다. |
1460년경 | 14세기의 첨탑이 교체되다. |
1485년 ~ 1498년 | 서쪽 장미창이 설치되다. |
1630년 | 화재로 첨탑과 외부 계단이 손상되다. |
1690년 | 홍수로 성당 아래층이 손상되고 원래 아래층에 있던 스테인드글라스가 치워지다. |
1793년 | 혁명군이 성당 문과 왕실 문장을 부수다. 성당이 종교적으로 쓰이지 않게 되고 첨탑이 파괴되다. |
1803년 ~ 1837년 | 성당이 법무부 문서 보관실이 되다. |
1805년 | 성유물이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옮겨지다. |
1840년 ~ 1848년 | 성당이 대대적으로 복원되고 장식되다. |
1846년 ~ 1855년 | 스테인드글라스 창이 복원되고 새로 만들어지다. |
1853년 ~ 1855년 | 현재의 첨탑이 세워지다. |
1862년 | 성당이 역사적 건물로 지정되다.[9] |
2008년 | 스테인드글라스 청소 및 보존, 외벽 석조물 청소, 조각상 보존 및 수리 등 복원 프로그램이 시작되다. (7년간, 약 1000만유로 소요). |
2015년 | 성 루이 탄생 800주년을 기념하여 서쪽 정면의 화려한 장미창 복원이 완료되다. |
생트샤펠은 레요낭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외부와 내부의 극명한 대비가 특징이다. 외부는 비교적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내부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3. 건축
생트샤펠은 초기 카롤링거 왕조의 왕실 예배당, 특히 아헨(Aix-la-Chapelle)에 있는 샤를마뉴의 팔라티나 예배당에서 영감을 받았다. 루이 9세는 1238년에 이미 생제르맹앙레 샤토에 1층짜리 왕실 예배당을 건립했었는데, 생트샤펠은 이 초기 예배당의 평면 설계를 확장하여 적용했다.
새 예배당은 두 층으로 구성되었는데, 크기는 같지만 목적은 완전히 달랐다. 상층부는 왕족과 그들의 손님만을 위한 공간으로, 성스러운 유물이 보관되었다. 하층부는 궁정 신하, 하인, 병사들이 사용했다. 건물은 길이 36m, 너비 17m, 높이 42.5m로, 당시 프랑스의 새로운 고딕 양식 대성당들과 비슷한 규모였다.
예배 장소로서의 기능 외에도 생트샤펠은 루이 왕과 그의 후계자들의 정치적, 문화적 야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자리에 플랑드르 백작이 앉아 있고 신성 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져 있던 상황에서, 루이의 예술적, 건축적 후원은 그를 서방 기독교 세계의 중심 군주로 자리매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생트샤펠은 샤를마뉴의 팔라티나 예배당과의 유사성을 통해 루이가 자신을 최초의 신성 로마 황제의 합당한 후계자로 제시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참십자가 조각과 가시관의 존재는 루이 9세에게 엄청난 명성을 안겨주었고,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이것이 그리스도가 상징적으로 루이에게 자신의 왕관을 씌워준 것을 의미한다고 선포했다.
파리의 학자 장 드 잔듄은 생트샤펠을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칭송하며, "왕궁 벽 안에 가장 적절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가장 단단한 돌로 완벽하고 불가분의 구조를 자랑"한다고 언급했다. 또한 "그림의 가장 훌륭한 색상, 이미지의 귀중한 금박, 사방의 붉은 창문의 아름다운 투명성" 등이 예배당에 "과장된 아름다움"을 부여한다고 덧붙였다.
생트샤펠은 빛나는 양식(Rayonnant)이라 불리는 고딕 건축 양식 단계의 대표적인 예로, 무게감이 없는 듯한 느낌과 강한 수직적 강조가 특징이다. 성당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건립된 생트샤펠은 그 자체가 뒤집어진 귀중한 유물함과 같았는데, 가장 화려한 장식은 내부에 있었다. 내부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지배적이지만, 벽면과 궁륭의 모든 부분도 화려한 색상으로 장식되었다.
평면도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독창적인 특징은 상층 예배당에 벽돌 벽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벽은 기둥과 버팀벽으로 대체되었고, 그 사이 공간은 거의 전부 유리로 채워져 상층 예배당을 빛으로 가득 채웠다.
3. 1. 외부
생트샤펠의 외관은 레요낭 양식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인다. 깊은 부벽 위에 작은 뾰족탑을 올리고, 지붕선을 따라 덩굴무늬 장식을 새긴 박공, 바 트레이서리로 나누어진 커다란 창문 등이 그것이다. 위층과 아래층은 돌림띠를 통해 건물 바깥쪽에도 분명하게 구분된다. 아래층 벽에는 뢸로 삼각형 모양의 창문이 나 있다. 여러 장식에도 불구하고 생트샤펠의 외관은 비교적 단순하고 소박하며, 커다란 조각상이나 버팀도리가 없어 내부의 화려함과 대비를 이룬다.
생트샤펠을 설계한 건축가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19세기에는 생드니 대성당 개축을 맡았고 노트르담 대성당의 남쪽 파사드를 완성시킨 피에르 드 몽트뢰유가 설계했다고 알려졌었다.[30]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를 부정하고 장 드 셸 또는 토마 드 코르몽이 설계했다고 추정한다. 로버트 브래너는 설계에서 아미앵 출신의 신원 미상 석공의 손길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생트샤펠의 주요 건축적 선례는 아미앵 대성당의 후진 예배당(일반적인 형태 유사)과 누아용 대성당의 주교 예배당(2층 설계 차용)이 있다(1180년대). 전체 설계는 당대 금속 세공, 특히 모잔 금세공인들이 만든 귀중한 신전과 성물함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버팀벽은 상당하지만, 궁륭에 너무 가까워 측면 압력을 완전히 상쇄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전 구조물의 부벽을 대체하기 위해 인장을 지탱할 수 있는 철봉이나 사슬 같은 금속 요소가 사용되었다.
서쪽 전면부와 첨탑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각각의 하위 문단을 참고하라.
3. 1. 1. 서쪽 전면부
서쪽 전면부는 15세기에 위쪽 예배당에 설치된 화려 양식 고딕 장미 창문 아래에 2층 높이의 현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꼭대기에는 첨두 아치형 창문과 원형 창문이 있으며, 지붕 아래쪽에는 샤를 5세가 배치한 얽힌 플뢰르 드 리 문장으로 장식된 난간이 있다. 현관 양쪽에는 윗 예배당으로 이어지는 좁고 구불구불한 계단이 있는 탑이 있는데, 이 탑은 버팀벽을 가리고 있다. 탑의 첨탑 또한 가시관 조각 아래에 왕가의 플뢰르 드 리로 장식되어 있다. 이 장식은 15세기에 만들어졌으며, 약 1850년에 조프루아-데숌(Geoffroy-Dechaume)에 의해 복원되었다.[1]
윗 예배당 입구는 윗층 발코니에 있다. 서쪽 입구의 원래 조각은 혁명 중에 파괴되었고, 1854년에서 1873년 사이에 조프루아-데숌에 의해 복원되었다.[1]
3. 1. 2. 첨탑
현재의 첨탑은 높이가 33m이며, 13세기 이후 생트샤펠에 세워진 다섯 번째 첨탑이다.[14] 최초의 첨탑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1383년 샤를 5세 때 세워진 두 번째 첨탑은 베리 공작의 매우 풍부한 시간 삽화에 묘사되어 있다.[14] 1460년경에 이 첨탑은 다른 것으로 교체되었지만, 1630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다시 교체되었으나, 1793년 프랑스 혁명 때 파괴되었다. 현재의 첨탑은 1852년 건축가 라수(Lassus)가 향나무로 건설한 것이다. 첨탑을 장식하는 조각상은 1853년 조프루아-드슈옴(Geoffroy-Dechaume)이 디자인했다. 화가이자 디자이너인 스타인하일(Steinheil)은 첨탑 기단의 조각상을 디자인했으며, 그의 얼굴은 사도 토마스와 바르톨로메오 두 사도로 등장한다. 박공 위에는 예수 수난의 도구를 들고 있는 천사들을 묘사한 조각상이 있다. 후퇴석 위에는 용을 죽이는 대천사 미카엘의 조각상이 있다. 대천사의 발 주변에는 조프루아-드슈옴이 디자인한 조각상들이 있는데, 복원 작업자들이 대천사의 발에 화환을 놓는 여덟 명의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다.[14]
3. 2. 내부
생트샤펠은 아래층과 위층, 두 층으로 나뉜다. 크기는 같지만 목적은 완전히 달랐다.[6] 아래층은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되었으며, 왕족이 아닌 궁정 신하, 하인, 병사들이 사용했다.[6] 반면 위층은 왕족과 그들의 손님만을 위해 마련되었으며, 성스러운 유물이 보관되어 있었다.[6]
하층 예배당하층 예배당 입구에는 성모 마리아를 묘사한 기둥 조각상이 있다.[20] 예배당의 높이는 6.6m에 불과하며, 폭 6m의 중앙 통로와 두 개의 좁은 측면 통로로 구성되어 있다. 천장 볼트는 작고 우아한 아치형 부벽과 금속 구조물로 보강되어 있다.
140개의 기둥 머리는 13세기 중반의 꽃 장식으로 되어있고, 각각 금박을 입힌 잎은 위쪽으로 올라가 볼트를 지탱하는 가느다란 기둥과 이어진다. 기둥에는 꽃 무늬 디자인과 카스티야의 블랑슈의 문장인 양식화된 성이 번갈아 칠해져 있다. 빨간색, 금색, 파란색 페인트는 19세기 복원 당시의 것이다.
원래 스테인드글라스는 1690년 홍수로 파괴되어 무색 유리로 대체되었고, 현재의 유리는 19세기 복원 당시 슈타인하일(Steinheil)이 디자인한 것으로, 성모 마리아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왼쪽 측면 통로에는 13세기에 수태고지 벽화로 장식되었던 성구실로 가는 문이 있었는데, 19세기 작업 중에 재발견되어 복원되었다.
상층 예배당상층 예배당은 아래층에서 탑의 좁은 계단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33m × 10.7m의 직사각형 구조에 네 개의 가로지르는 벽과 동쪽 끝에 일곱 개의 창문이 있는 후진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벽이 거의 없고, 기둥과 버팀벽 사이 공간이 대부분 유리로 채워져 있다는 점이다. 서쪽 끝의 장미창을 제외하고 총 670m2의 유리가 사용되었다. 각 창문의 수직 지지대는 일곱 개의 가느다란 기둥으로 구성되어 두께를 감추고, 벽과 창문은 외부에서 두 개의 철제 체인 띠로 지탱된다. 중앙선의 창문은 후진의 창문보다 약간 높게 설치되어 예배당이 실제보다 더 길어 보이는 효과를 낸다.
세 번째 가로지르는 벽에는 벽에 두 개의 작은 벽감이 있는데, 위에는 천사의 그림과 조각으로 장식된 아치가 있다. 이곳은 종교 의식 중 왕과 왕비가 예배를 드리던 장소였다.
내부는 스테인드글라스가 지배적이지만, 벽면과 궁륭의 모든 부분도 화려한 색상으로 장식되었다.[15] 원래 색상은 19세기 복원가들이 선호했던 색상보다 훨씬 밝았고 스테인드글라스 색상에 더 가까웠다.[15] 벽면 아케이드의 네잎무늬에는 성인과 순교자의 장면이 그려져 있었고, 채색 유리와 금박 유리가 박혀 있었으며, 화려한 직물 장식이 내부의 풍요로움을 더했다.[15]
4. 스테인드글라스
생트샤펠에서 가장 유명한 특징은 상층 예배당의 신랑과 앱스에 있는 15개의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다. 이 창문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예술 작품으로 손꼽히며, 13세기 중반에 만들어졌다. 석벽 표면은 정교한 틀 이상으로 축소되어, 수천 개의 작은 유리 조각들이 벽을 다채로운 빛의 거대한 스크린으로 바꾸어 놓았다. 대부분 짙은 청색과 적색이며, 시간에 따라 빛의 강도가 변한다.[1]
대부분의 창문은 1242년에서 1248년 사이에 설치되었다. 유리 예술가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술사가 루이 그로데키는 서로 다른 스타일을 가진 세 개의 다른 작업장을 확인했다. 앱스의 창문들과 신랑 북쪽 벽의 대부분의 창문들은 하나의 작업장에서 제작되었는데, 이 작품들은 유연한 형태와 의상, 단순화된 특징으로 유명하다. 그로데키가 에제키엘 창문의 거장으로 명명한 두 번째 작업장은 에제키엘과 다니엘 창문, 그리고 왕들의 창문을 제작했으며, 길쭉한 형태와 더욱 정교하고 각진 드레이프가 특징이다. 세 번째 예술가 또는 작업장은 유딧과 에스더 창문의 독특한 스타일과 욥의 창문으로 인해 유딧과 에스더의 거장으로 불린다. 이들은 얼굴의 더 미묘한 디테일과 삽화 원고의 인물과의 유사성으로 구별된다.[2]
창문들은 명확한 도상 프로그램을 보여준다. 동쪽 앱스의 세 개의 창문은 신약을 보여주는데, 그리스도의 수난(중앙)과 그리스도의 탄생(왼쪽), 그리고 요한 복음사가의 삶(오른쪽)의 장면이 담겨 있다. 반대로, 신랑의 창문은 왕실 후원자들에게 명백한 암시로서 이상적인 왕권/여왕권의 구약의 전형적인 예시가 지배적이다. 그 순환은 북쪽 벽의 서쪽 창문에서 창세기의 장면(대부분 복원됨)으로 시작된다. 신랑의 다음 열 개의 창문은 시계 방향으로 출애굽기, 요셉, 민수기/레위기, 여호수아/신명기, 사사기, (남쪽 벽으로 이동) 예레미야/토비트, 유딧/욥, 에스더, 다윗과 열왕기의 장면이 이어진다. 남쪽 벽의 서쪽 끝에 있는 마지막 창문은 그리스도의 유물의 재발견, 그들이 행한 기적, 그리고 루이 9세의 손에 의해 파리로 옮겨지는 일련의 장면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현재까지 이어 나간다.[16]
창문의 장면들은 원형이나 타원형 또는 다른 기하학적 형태로 둘러싸여 있으며, 모두 루이 9세(금빛 플뢰르 드 리스)와 그의 어머니 카스티유의 블랑슈(성)의 문장으로 구성된 배경에 배치되어 있다. 이 요소는 모든 창문에 특별한 통일성을 부여하며, 회화 장식에도 등장한다.[2]
4. 1. 서쪽 장미창
생트샤펠 상층 예배당 서쪽에 있는 장미창은 15세기 후반에 제작되어 다른 창문들보다 늦게 만들어졌다. 화려 양식 고딕 양식의 훌륭한 예시로, 불꽃 모양의 곡선 디자인이 특징이다. 지름은 9미터이며, 요한계시록의 장면을 묘사하는 89개의 개별 패널로 구성되어 있다. 15세기 유리 공예가들은 은착색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유리에 에나멜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고 불을 사용하여 페인트를 유리에 융합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색상을 수정하고 음영과 기타 세부 사항을 표현할 수 있었다. 이 장미창은 2014년에서 2015년에 걸쳐 완전히 청소되어 밝기와 선명도가 향상되었다.[1]
4. 2. 다른 박물관에 있는 생트샤펠 스테인드글라스
생트샤펠에서 제거된 초기 스테인드글라스 중 일부는 현재 파리의 국립 중세 박물관(Musée de Cluny)과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을 포함한 다른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이미지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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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뤼니 박물관(Musée de Cluny) |
-- | 클뤼니 박물관(Musée de Cluny) |
-- | 클뤼니 박물관(Musée de Cluny) |
-- | 클뤼니 박물관(Musée de Cluny) |
-- |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 |
5. 예술과 장식
생트샤펠은 프랑스 혁명 동안 입구의 많은 조각상이 파괴되었으나, 1855년부터 1870년 사이에 조각가 아돌프-빅토르 조프루아-드슈옴이 18세기의 설명과 판화를 참고하여 재현하였다.[1] 상층 예배당 입구 위 팀파눔에는 그리스도가 축복을 내리는 모습과 함께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이 곁에 있고, 두 천사가 가시관과 십자가를 들고 있다. 아래 문틀에는 미카엘 대천사가 죽은 자들의 영혼을 저울질하는 조각상이 있는데, 왼쪽에는 천국으로 가는 사람들, 오른쪽에는 저주받은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다.[1]
19세기 복원 당시 건축가들은 13세기 내부 모습을 최대한 재현하고자 했다. 기둥에서 원래의 다색 페인트 흔적을 찾아내어 1842년에 내부 장식 계획을 세웠다. 원래 색상이 발견되지 않은 하부 석조대좌에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의 색과 조화를 이루도록 중성적인 색을 사용했다. 다른 장식의 색은 왕립 도서관에 있는 13세기 시편 삽화를 참고했다. 석조대좌 아치의 44개 사분원형 메달리온은 금박 배경에 성인의 순교 장면을 묘사하며, 1845년 슈타인하일이 다시 칠했다.[1] 예배당 전체에 걸쳐 플뢰르드리와 카스티야 왕국의 성 문양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루이 9세의 왕족 출신(아버지 루이 8세를 통한 프랑스 카페 왕가 가문의 플뢰르드리와 어머니 블랑슈 드 카스티야의 왕족 출신인 스페인 카스티야 왕가의 성)을 나타낸다.
5. 1. 조각
프랑스 혁명 동안 대부분의 입구 조각상이 파괴되었지만, 1855년부터 1870년 사이에 조각가 아돌프-빅토르 조프루아-드슈옴(Adolphe-Victor Geoffroy-Dechaume)은 18세기의 설명과 판화를 사용하여 이를 재현하였다.[1] 상층 예배당 입구 위의 팀파눔에는 축복을 내리는 그리스도상과 그 옆에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이 있고, 뒤에는 두 명의 천사가 가시관과 십자가를 들고 있다. 아래 문틀에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저울질하는 미카엘 대천사 조각상이 있고, 왼쪽에는 천국으로 보내진 자들, 오른쪽에는 저주받은 자들이 묘사되어 있다.[1] 아래쪽 벽면 패널에는 창세기와 노아의 방주를 포함한 구약 성경 장면을 묘사한 조각상들이 있으며, 1869년에서 1870년 사이에 조프루아-드슈옴이 제작하였다.외부 조각상 대부분은 19세기에 제작되었지만, 상층 예배당 제대에는 12세기 원형 조각상들이 여러 개 있는데, 외부 조각상과 달리 다색이었다. 19세기 복원 작업 중 색상 흔적이 발견되어 조각상들은 색상을 포함하여 복원되었다. 성물함이 놓였던 동쪽 끝 제대 트리뷴 아치는 13세기 원형 다색 천사상으로 장식되어 있다.[2]

상층 예배당 벽에는 1240년경 제작된 16개의 사도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일부는 간단한 고전 의상과 맨발로, 다른 일부는 다색에 정교한 성직자 의상을 입고 사도들을 묘사한다. 이들 중 일부는 현재 클뤼니 박물관 중세 국립 박물관 소장품에 있다.
5. 2. 회화
19세기 복원 당시 주요 건축가였던 뒤르뱅(Durban)과 라쇠(Lassus)는 생트샤펠 내부를 13세기 모습과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하고자 했다. 이들은 기둥에서 원래의 다색 페인트 흔적을 수집하여 1842년에 내부 장식에 대한 종합적인 계획을 발표했다. 원래 색상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하부 석조대좌(soubassements)에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의 색상과 충돌하지 않도록 중성적인 색조를 사용했다. 다른 장식의 색상표는 왕립 도서관의 13세기 시편 책 삽화를 참고했다.석조대좌 아치에 있는 44개의 13세기 사분원형 메달리온은 체계적으로 다시 칠해졌는데, 이 메달리온에는 금박 배경에 성인의 순교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1845년 슈타인하일(Steinheil)은 두 개의 왕실 알코브에 있는 메달리온을 제외하고 원래 구성을 따르면서 본당의 모든 메달리온을 다시 칠했다. 1983년 역사 유적 관리국(Service of Historic Monuments)은 복원되지 않은 4개의 메달리온을 청소하고, 다시 칠해진 2개의 메달리온을 복원하지 않은 상태로 남겨 1845년 이전의 원래 페인트 흔적을 연구했다.[1]
6. 성유물과 성유물함
생트샤펠 건립의 주된 목적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관련된 성유물을 보관하기 위한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성유물은 그리스도가 십자가형을 당할 때 썼다고 전해지는 가시관과 참십자가 조각이었다. 이 성유물들은 1204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을 때 발견되었다.[17]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통치하던 보두앵 2세는 베네치아 은행가들에게 도시 방어 자금을 빌리면서 가시관을 담보로 잡혔다. 루이 9세는 1239년 13만 5천 리브르라는 거액을 주고 가시관을 구입했다. 이를 통해 루이 9세는 콘스탄티노플 정복 자금을 지원했다는 명성을 얻는 동시에, 자신의 신앙심을 과시할 수 있었다. 가시관은 파리에 도착한 후 왕궁 근처 생니콜라 예배당에 임시 보관되었다.[17]
1241년, 루이 9세는 보두앵 2세로부터 참십자가 조각과 다른 성유물들을 추가로 구입하여 파리로 가져왔다. 이후 매년 성금요일에는 생트샤펠에서 성유물을 꺼내 신자들에게 공개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17]
루이 9세는 성유물들을 보관하고 전시하기 위해 '그랑드 샤스(Grande Châsse)'라고 불리는 대형 성유물함을 제작하도록 했다. 이 성유물함은 길이 2.7m에 달하는 은과 금박을 입힌 구리로 만들어진 상자 형태로, 앞면을 열어 성유물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각 성유물은 보석으로 장식된 별도의 귀금속 상자에 보관되었다. 처음에는 제단 위에 놓였으나, 1264년에서 1267년 사이에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교회 후진의 높은 주단 위로 옮겨졌다. 1306년에는 성인으로 선포된 루이 9세의 두개골 일부가 새로운 성유물로 추가되었다.[17]
프랑스 혁명 기간 동안, 왕권과 교회의 권위를 상징하던 그랑드 샤스와 성유물 용기들은 파괴되었다. 혁명 세력은 보석과 귀금속을 얻기 위해 성유물함을 녹였다. 십자가 조각은 1793년 골동품 수집품으로 옮겨졌다가 파리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가시관은 새로운 금과 수정 성유물함에 보관되었다. 1801년 조약 이후 노트르담 대성당 보물 창고에 전시되었으나, 2019년 화재에서 구출되어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17]
7. 오르간
초기부터 오르간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1493년, 1550년, 1762년에 교체되었다.[1]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1791년 7월에 생트샤펠에서 생제르맹로제루아 교회로 옮겨졌다.[1] 이 오르간은 피에르-노엘 루세가 디자인한 케이스에 1752년 프랑수아-앙리 클리코가 제작한 것이다.[1]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신고전주의 양식이 당시 시대에 비해 너무 현대적인 것으로 여긴다.[1]
8. 다른 생트샤펠
루이 9세의 예배당은 왕실이나 공작의 예배당으로, 유물(특히 왕이 기증한 루이의 수난 유물 조각)을 보관하기 위해 건설된, 비슷한 건축 양식을 가진 여러 "모방 건축물"에 영감을 주었다.[18] 이러한 예배당은 일반적으로 공작의 궁전(예: 부르주, 리옹)이나 왕실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수도원(예: 생제르메르드플리)에 딸려 있었다. 원래의 생트샤펠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성채 예배당은 거의 항상 정규 궁정 예배당이나 수도원 예배당에 추가되었으며, 전용 성직자(일반적으로 대성당 장의회로 설립됨)가 있었다.[19] 후원자들에게 이러한 예배당은 개인적인 경건함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귀중한 외교적 도구로서, 중요한 방문객들이 유물을 참배하도록 장려하고 프랑스 왕관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프랑스의 주목할 만한 생트샤펠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건물 | 설립 연도 및 설립자 | 비고 |
---|---|---|
부르봉라르샹보 | 1310년경, 부르봉 공작 루이 1세 | 참나무 십자가 조각을 보관하기 위해 설립. |
샹베리 | 1400년경 | |
샤토드엉 | 1451년 | |
부르주 | 1392년, 장 드 베리 | 앙드레 뵈뇌브가 조각과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 현재는 파괴됨. |
리옹 | 1382년, 장 드 베리 | |
생제르메르드플리 수도원 | 파리 예배당 건립 12년 후 수도원 교회에 추가. 생트샤펠이라고 불림. | |
뱅센 | 1379년, 프랑스의 샤를 5세 | 발루아 왕가의 가장 좋아하는 궁전 중 하나에 설립. |
비비에르앙브리 | 1358년, 미래의 프랑스의 샤를 5세 (당시 도핀) |
성 루이의 지위가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높아짐에 따라, 그의 유명한 예배당의 영향력 또한 프랑스를 넘어 확대되었으며, 프라하 근처 칼슈테인 성(1360년경), 빈의 호프부르크 예배당(1449년 봉헌), 브로츠와프의 성십자가와 성 바르톨로메오 대성당(1350년경) 및 옥스퍼드 엑서터 칼리지(1860년)에 중요한 모방 건축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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