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불 전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청불 전쟁은 1880년대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 지배하려는 과정에서 청나라와 무력 충돌한 사건이다. 프랑스는 18세기부터 베트남에 진출하여 식민 지배를 시도했고, 1858년 제2차 아편전쟁을 계기로 사이공 등지를 점령했다. 1870년대에는 홍강을 통해 중국으로 진출하려 하였고,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대신 중국의 종주권을 부인하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청나라는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지키기 위해 흑기군을 지원하며 프랑스에 대항했고, 1883년 프랑스가 후에를 함락시키자 전쟁은 본격화되었다.
전쟁은 프랑스의 해군 우세 속에 마강 해전, 석포만 해전 등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며 전개되었고, 육상전에서도 프랑스는 통킹 지역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랑선 공세 실패로 프랑스 내각이 붕괴되는 등 프랑스도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885년 톈진 조약을 통해 청나라는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국 지위를 인정하고, 프랑스는 베트남 북부를 획득했다.
청불 전쟁은 청나라의 군사적 근대화의 한계를 드러냈고, 서태후의 독재 정치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심화시키고, 일본의 세력 확장을 부추기는 등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 지배하는 데 성공했지만, 전쟁의 고전으로 식민지 확장에 대한 국내 여론이 악화되었고, 국내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82년 베트남 - 앙리 리비에르
앙리 리비에르는 프랑스 해군 장교로 크림 전쟁 등에 참전했으며 기자로 활동하다가 통킹에서 흑기군과의 전투 중 사망했다.
청불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명칭 | 청불 전쟁 중프 전쟁 프랑스-청나라 전쟁 |
일부 | 통킹 원정 |
날짜 | 1884년 8월 22일 ~ 1885년 4월 4일 |
장소 | 베트남 북부 화남 타이완 |
결과 | 프랑스의 승리 |
영토 | 통킹과 안남에 대한 프랑스 보호령을 중국이 인정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
교전국 2 | 청나라 흑기군 응우옌 왕조 |
지휘관 | |
지휘관 1 | 쥘 페리 아메데 쿠르베 세바스티앙 레스페 루이 브리에르 드 리즐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로랑 조바니넬리 자크 뒤센 |
지휘관 2 | 서태후 (자희태후) 공친왕 판딩신 펑쯔차이 탕징쑹 류밍촨 쑨카이화 류융푸 호앙께비엠 |
병력 규모 | |
병력 1 | 베트남: 프랑스군 25,000명, 현지 비정규군 6,000명 타이완: 육군 3,000명, 해군 11척의 군함 |
병력 2 | 베트남: 윈난군 50,000명, 광시-광둥군 40,000명 이상, 흑기군 5,000명, 현지 비정규군 20,000명 타이완: 정규군 16,000명, 비정규군 20,000명 |
사상자 | |
사상자 1 | 클로드펠터: 사망 및 부상 4,200명, 질병 사망 5,223명 무니에-쿤: 사망 811명, 부상 2,093명, 질병 사망자 미상 |
사상자 2 | 최소 10,000명 사망, 부상자 미상 윈난군: 20,000명 귀향하지 못함 기타 군대: 미상 |
기타 정보 | |
관련 문서 | 통킹 원정 |
2. 프랑스의 베트남 진출
18세기 중엽, 프랑스는 인도에서 영국에게 패한 이후 베트남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당시 베트남은 남북 대립 시기로, 북쪽은 하노이에 여씨(黎氏)가, 남쪽 후에에는 응우옌 왕조가 세력을 잡고 있었다. 1777년 응우옌 씨가 후에를 빼앗고 하노이마저 차지하자, 후에의 응우옌은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프랑스는 영토 할양, 프랑스인 거주, 왕래, 상무 독점 등의 특혜를 조건으로 내세웠으나, 1802년 후에의 응우옌 왕조가 다시 베트남 전역을 통일하였다.
프랑스는 혁명 이후 베트남 경영 문제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베트남도 프랑스를 경계하며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1858년 나폴레옹 3세는 제2차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베트남을 압박, 사이공 등지를 점령하였다. 1862년 베트남은 프랑스의 압력으로 비엔호아, 자딘, 딘뜨엉 등 3성 할양, 배상금 지불, 메콩강 항해, 포교 특권을 인정하고, 타국과의 교섭 시 프랑스 황제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불평등 조약인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
1867년 프랑스는 코친차이나를 병탄하고 메콩강을 통해 운남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상류 항해가 불가능했다. 1871년 프랑스 모험가 뒤퓌(Jeon Dupuis)가 홍강을 통해 운남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프랑스는 이를 통해 중국 진출을 시도, 1873년 11월 군대를 동원해 하노이, 하이즈엉, 닌빈 등지를 공격하였다.
베트남은 흑기군을 불러들여 프랑스에 대항하려 했으나, 1874년 3월 사이공에서 평화와 연맹 조약(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대신, 중국의 베트남 종주권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프랑스와 베트남은 영구 연맹하며,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승인한다.
- 베트남 대외정책은 프랑스 대외정책과 부합해야 한다.
- 베트남에서 천주교는 자유롭게 포교할 수 있다.
- 하노이를 개항하고, 영해에서 운남에 이르는 수로로 대외무역을 개방하여, 프랑스 영사는 치외법권을 향유한다.
- 조약 체결 1년 만에 후에에 공사를 파견한다.
2. 1. 응우옌 왕조 지원
2. 2. 프랑스의 본격적인 침략
18세기 중엽 프랑스는 인도에서 영국에게 패한 이후 베트남으로 진출하였다. 1858년 나폴레옹 3세는 영국과 함께 제2차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베트남을 압박, 사이공 등지를 점령하였다. 1862년에 베트남은 프랑스의 압력으로 비엔호아, 자딘, 딘뜨엉 등 3성의 할양, 배상금 지불과 메콩강의 항해, 포교 특권을 인정하고, 또한 베트남이 다른 나라와 교섭할 때 프랑스 황제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불평등 조약 내용의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프랑스의 베트남 진출은 베트남을 지배하려는 목적이었다. 1867년에 프랑스는 코친차이나를 병탄하고 메콩강을 통해 운남으로 진출하려고 하였으나 그 상류로는 항해가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1871년에 프랑스의 모험가 뒤퓌(Jeon Dupuis)가 홍강(홍하)를 통해 운남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프랑스는 이를 통하여 중국으로 진출하려고 1873년 11월에 군대를 동원하여 하노이, 하이즈엉, 닌빈 등지를 공격하였다.
베트남은 프랑스의 공격을 받게 되자 흑기군을 불러들여 공동으로 프랑스에 대항하려 하였다. 그러나 베트남은 프랑스의 외교적인 압력아래 사이공에서 1874년 3월에 평화와 연맹조약(〈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
베트남(阮朝)에 대한 프랑스의 영토적 야심은 184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858년-1862년)에서 프랑스는 阮朝가 남부에 설치했던 몇몇 행정구를 무력으로 병합하여, 그것들을 통합하여 프랑스령 코친차이나를 형성하고 동남아시아 진출의 거점으로 삼았다.
1883년 8월 20일, 아메데 쿠르베(Amédée Courbet)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원정대가 베트남에 상륙하여 阮朝(응우옌 왕조) 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프랑스의 본격적인 침공을 앞두고 嗣德帝(자덕제)의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阮朝는 계미조약 체결에 동의하며 사실상 프랑스에 항복했다(투안엔 전투).
프랑스는 연말에 흑기군을 섬멸하기 위한 대공세를 계획하면서, 흑기군의 배후 세력인 청나라에 단독 강화를 제안하기 시작했다(동시에 다른 유럽 주요국들에도 참전을 촉구했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는 주프랑스 공사인 증기택으로부터 "프랑스는 전면전에 나설 용기가 없다"는 보고를 받고, 프랑스 주청 공사와 이홍장(李鴻章)이 진행하던 협상을 중단했다. 프랑스 정부는 파리에 있는 증기택 공사와 폴-알망 샬멜-라쿠르 외무장관의 회담을 주선했지만, 외교적 진전은 없었다.
2. 3. 불평등 조약 체결
1862년 베트남은 프랑스의 압력으로 비엔호아, 자딘, 딘뜨엉 등 3성의 할양, 배상금 지불과 메콩강의 항해, 포교 특권을 인정하고, 또한 베트남이 다른 나라와 교섭할 때 프랑스 황제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불평등 조약 내용의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베트남은 프랑스의 외교적인 압력아래 사이공에서 1874년 3월에 평화와 연맹조약(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대신 기존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2. 4. 코친차이나 병탄과 홍강 진출 시도
18세기 중엽, 프랑스는 플라시 전투에서 영국에게 패한 후 베트남으로 진출했다. 1858년, 나폴레옹 3세는 제2차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베트남을 압박, 사이공 등지를 점령했다. 1862년, 베트남은 프랑스의 압력으로 비엔호아, 자딘, 딘뜨엉 등 3성을 할양하고 배상금 지불, 메콩강 항해, 포교 특권을 인정하는 사이공 조약을 체결했다.1867년, 프랑스는 코친차이나를 병탄하고 메콩강을 통해 운남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상류 항해가 불가능하여 실패했다. 그러나 1871년, 프랑스 모험가 뒤퓌(Jeon Dupuis)가 홍강을 통해 운남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프랑스는 홍강을 통한 중국 진출을 노리게 되었다. 1873년 11월, 프랑스 군대는 하노이, 하이즈엉, 닌빈 등을 공격했다.
베트남은 프랑스의 공격에 '흑기군'을 불러들여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1874년 3월, 베트남은 프랑스의 외교적 압력으로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인정받는 대신 기존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부인하게 되었다.
1881년 말, 프랑스 해군 장교 앙리 리비에르는 현지 프랑스 상인에 대한 베트남의 반발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하노이로 파견되었다. 그는 상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하노이 성을 점령했다. 이후 하노이 성은 응우옌 왕조에 반환되었지만, 리비에르의 점령 행위는 응우옌 왕조와 그들을 비호하는 청나라에 경각심을 주었다.
1883년 5월 10일, 흑기군 지도자 유영복은 프랑스에 전투를 걸었고, 5월 19일 종이 다리 전투(Battle of Paper Bridge)에서 프랑스군은 리비에르를 포함한 여러 고위 장교들을 잃고 참패했다.
2. 5. 제2차 사이공 조약과 청나라의 반발
1874년 프랑스는 베트남과 제2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여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였다.335~337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와 베트남은 영구연맹하며,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승인한다.
- 베트남의 대외정책은 프랑스의 대외정책과 부합하여야 한다.
- 베트남에서 천주교는 자유롭게 포교할 수 있다.
- 하노이를 개항하고, 영해에서 운남에 이르는 수로로 대외무역을 개방하여, 프랑스 영사는 치외법권을 향유한다.
- 조약체결 1년만에 후에에 공사를 파견한다.335~337
이 조약은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대신, 기존 중국의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부인하는 것이었다.335~337 청나라는 즉각 반발하며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3. 청나라의 대응
청나라는 프랑스가 베트남에 진출하는 것에 맞서,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지키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당시 러시아에 있던 증기택은 프랑스의 야심을 간파하고 총리아문에 베트남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1] 베트남 대표를 베이징에 장기 파견, 베트남인을 프랑스에 파견하여 중국 공사관 수행원으로 임명, 베트남에게 중국 명령에 따르도록 하여 홍강(홍하) 개방 등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홍장은 '홍하 개방은 호랑이를 끌어들이는 것과 같다'며 반대했다.[2]
청나라는 제2차 사이공 조약으로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게 되자, 유영복의 흑기군을 이용하여 프랑스를 견제하려 했다.[3] 유곤일, 유장우, 장지동 등은 흑기군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이홍장은 프랑스와의 담판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4] 그러나 이홍장이 프레데릭 부레(Frédéric Bourée)와 맺은 가조약은 흑기군과 프랑스군 간의 충돌을 야기했고, 프랑스 내에서도 불만을 샀다.[5]
1883년 8월, 프랑스가 무력으로 후에를 함락하고 베트남과 '후에 조약'을 체결하자, 청나라 내 주전파들은 베트남 원조를 주장했다.[6] 공친왕과 이홍장은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으나, 이홍장과 아르튀르 트리쿠(Arthur Tricou)의 회담은 결렬되었다.[7] 결국 프랑스는 흑기군 공격을 시작했고, 1884년 4월 프랑수아 에르네 푸르니에를 파견해 이홍장과 담판하게 했다.[8] 그 결과, 청-프 간명조약이 체결되었으나, 프랑스는 같은 해 6월 베트남과 제2차 후에조약을 체결하여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9]
1883년 7월 상하이에서 프랑스 공사 트리쿠와 이홍장 간의 협상은 프랑스 정부가 전면전을 원치 않는다는 증기택의 낙관적인 평가를 청나라 정부가 받아들이면서 중단되었다.[4] 쥘 페리와 폴-아르망 샬멜라크르는 파리에서 증기택을 여러 차례 만났지만, 외교적 논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4]
프랑스는 흑기군 섬멸을 위한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며 중국에 유영복 지원 철회를 설득하는 동시에, 다른 유럽 열강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중국과의 전쟁 가능성이 커지자 프랑스는 독일 정부에 정원호와 진원호의 인도를 연기시켰다.[4] 한편, 프랑스는 꽝옌(Quảng Yên), 흥옌(Hưng Yên), 닌빈(Ninh Bình)에 주둔지를 설립하여 델타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4]
프랑스와 중국 사이의 긴장 고조는 1883년 가을 중국 내에서 반외국인 시위를 야기했다. 가장 심각한 사건은 광저우에서 발생했으며, 유럽 상인들의 재산과 삼원(Shameian)섬이 공격받았다. 여러 유럽 열강은 자국민 보호를 위해 광저우에 군함을 파견했다.
이홍장은 프랑스와의 담판을 통해 베트남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1882년, 이홍장은 프랑스 공사 프레데릭 부레(Frédéric Bourée)와 톈진에서 담판을 벌여 가조약 3조에 합의했다. 주요 내용은 중국 군대의 운남, 귀주 성 철수, 프랑스의 베트남 불점거, 베트남 국왕 위신 유지, 보승(保勝) 개항 및 무역, 중국과 프랑스의 경계 설정 및 베트남 북부 자치 보호 등이었다.
그러나 톈진 담판의 가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군이 철수하고 베트남 북부 변경을 순시하는 과정에서 흑기군과 충돌하여 프랑스군을 물리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양산대첩'이라 부른다. 청나라 내부에서는 흑기군을 과신한 일부 인사들과 임오군란 당시 조선에 대한 간섭 성공을 경험한 청류파 세력들이 이홍장의 톈진 담판에 반발했다.
프랑스 역시 톈진 담판에 불만을 품고, 주일공사관인 아르튀르 트리쿠(Arthur Tricou)를 전권대표로 삼아 중국과 다시 교섭을 시도했으나, 이홍장이 모친상으로 자리를 비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83년 8월 20일, 프랑스군의 증원군 지휘관이 된 아메데 쿠르베 제독의 증원군이 베트남에 상륙하여, 응우옌 왕조 군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투언안 전투) 프랑스군의 본격적인 침공 전에 뜨득 황제의 죽음으로 혼란한 응우옌 왕조는 〈계미 조약〉(후에 조약)을 체결해 사실상 프랑스에 항복한 것이다.
기세를 탄 프랑스군은 다이강에 주둔하고 있던 유영복의 흑기군에 공세를 가했다. 그렇게 시작된 푸호아이 전투와 팔란 전투에서 일정한 피해를 주었지만 격렬한 저항을 받아야 했다. 두번에 걸친 대규모 공세에도 불구하고, 다이강에서 흑기군을 쫓아내지 못했다. 유럽 국가에서는 ‘프랑스군의 고전’이라고 악평을 했고, 다급해진 프랑스 정부는 1883년 9월 공세 실패를 이유로 육군 사령관을 해임했다. 결국 흑기군은 다이강이 범람했기 때문에 선떠이강 부근의 진지로 후퇴했다.
1883년 8월, 프랑스는 투언안 전투에서 승리하고 휴에 조약을 강요하여 통킹을 프랑스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또한, 프랑스군은 푸호아이 전투와 팔란 전투에서 흑기군을 격파했으나, 유용복(劉永福)의 모든 진지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박닌 전투와 손태 함락 이후, 중국 정부 내 온건파의 입지가 강화되었고, 프랑스와의 전면전을 주장하던 강경파는 일시적으로 신임을 잃었다. 1884년 봄, 프랑스군의 추가적인 승리는 서태후(慈禧太后)가 중국이 타협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만들었고, 5월에 프랑스와 중국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상은 천진(天津)에서 진행되었다. 중국 온건파의 지도자였던 이홍장(李鴻章)이 중국을 대표했고, 프랑스 순양함 볼타(Volta) 함장 프랑수아-에르네스트 푸르니에(François-Ernest Fournier) 대위가 프랑스를 대표했다. 1884년 5월 11일 체결된 톈진 협약은 안남과 톤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령을 중국이 인정하고 톤킨에서 중국군을 철수하는 대신, 프랑스와 중국의 무역 및 상업에 대한 세부 사항을 해결하고 베트남과의 분쟁 중인 국경을 획정하는 포괄적인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규정했다.
6월 6일, 프랑스는 새로운 휴에 조약을 체결하여 안남과 톤킨 모두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령을 수립했다. 이 조약 서명에는 베트남이 중국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포기했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행위가 수반되었다.
그러나 푸르니에는 전문 외교관이 아니었고, 톈진 협약에는 톤킨에서 중국군 철수에 대한 시한이 명시되지 않는 등 여러 가지 미해결 문제가 남아 있었다. 프랑스는 군대 철수가 즉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중국은 군대 철수가 포괄적인 조약 체결을 전제로 한다고 주장했다. 이 협정은 중국에서 매우 인기가 없었고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전쟁파는 이홍장의 탄핵을 요구했고, 그의 정적들은 톤킨에 있는 중국군에게 자리를 지키라는 명령을 내리도록 음모를 꾸몄다.
철병 문제로 양국이 대립하자, 청나라에서는 전쟁 재개를 주장하는 강경파 정치가들뿐만 아니라 옹동화(翁同龢) 등 사적인 원한을 가진 인물들까지 이홍장의 파면을 요구하며 은밀히 군대를 전선으로 이동시켰다.
6월, 프랑스군은 청군이 랑선(Lang Son)에서 철수할 것으로 예상하고 주둔 부대를 파견했다. 6월 23일, 박레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청국군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공격을 개시했지만, 반격을 받고 패주했다.
이 사건 이후 프랑스에서는 개전론이 고조되었다. 쥘 페리 정권은 청국에 사과와 배상금을 요구했지만, 청국은 협상에는 동의했으나 배상과 사과는 거부했다. 양국의 대립은 심화되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프랑스군은 쿨베(Courbet) 제독의 함대를 복주로 이동시켜 청국 해군 복주 船政局 공격에 대비하도록 명령받았다. 1884년 8월 5일, 프랑스 해군은 타이완 기륭만의 석포만(石浦灣)에 포격을 가해 3개의 연안 포대를 파괴하고 기륭에 해병대를 상륙시켰으나, 유명전이 지휘하는 청국군이 구원에 나서자 철수했다. 이로써 양국은 사실상 전쟁 상태에 돌입, 청불 전쟁이 발발했다.
3. 1. 증기택의 외교적 노력
당시 러시아에 있던 증기택은 프랑스의 야심을 간파하고 총리아문에 베트남 문제의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즉 베트남 대표를 베이징에 장기적으로 파견하도록 하고, 베트남인을 프랑스에 파견하여 중국공사관의 수행원으로 임명하며, 베트남에게 중국의 명령에 따르도록 하여 홍강(홍하) 등의 개방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홍장은 '홍하의 개방은 오히려 호랑이를 끌어들이는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3. 2. 흑기군 지원
청나라는 제2차 사이공 조약으로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게 되자, 유영복의 흑기군을 이용하여 프랑스를 견제하려 했다.[1] 유곤일, 유장우, 장지동 등은 흑기군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이홍장은 프랑스와의 담판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2] 그러나 이홍장이 프레데릭 부레(Frédéric Bourée)와 맺은 가조약은 흑기군과 프랑스군 간의 충돌을 야기했고, 프랑스 내에서도 불만을 샀다.[3]1883년 8월, 프랑스가 무력으로 후에를 함락하고 베트남과 '후에 조약'을 체결하자, 청나라 내 주전파들은 베트남 원조를 주장했다.[4] 공친왕과 이홍장은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으나, 이홍장과 아르튀르 트리쿠(Arthur Tricou)의 회담은 결렬되었다.[5] 결국 프랑스는 흑기군 공격을 시작했고, 1884년 4월 프랑수아 에르네 푸르니에를 파견해 이홍장과 담판하게 했다.[6] 그 결과, 청-프 간명조약이 체결되었으나, 프랑스는 같은 해 6월 베트남과 제2차 후에조약을 체결하여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7]
1883년 7월 상하이에서 프랑스 공사 트리쿠와 이홍장 간의 협상은 프랑스 정부가 전면전을 원치 않는다는 증기택의 낙관적인 평가를 청나라 정부가 받아들이면서 중단되었다.[4] 쥘 페리와 폴-아르망 샬멜라크르는 파리에서 증기택을 여러 차례 만났지만, 외교적 논의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4]
프랑스는 흑기군 섬멸을 위한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며 중국에 유영복 지원 철회를 설득하는 동시에, 다른 유럽 열강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중국과의 전쟁 가능성이 커지자 프랑스는 독일 정부에 정원호와 진원호의 인도를 연기시켰다.[4] 한편, 프랑스는 꽝옌(Quảng Yên), 흥옌(Hưng Yên), 닌빈(Ninh Bình)에 주둔지를 설립하여 델타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4]
프랑스와 중국 사이의 긴장 고조는 1883년 가을 중국 내에서 반외국인 시위를 야기했다. 가장 심각한 사건은 광저우에서 발생했으며, 유럽 상인들의 재산과 삼원(Shameian)섬이 공격받았다. 여러 유럽 열강은 자국민 보호를 위해 광저우에 군함을 파견했다.
3. 3. 이홍장의 외교적 노력과 톈진 담판
이홍장은 프랑스와의 담판을 통해 베트남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1882년, 이홍장은 프랑스 공사 프레데릭 부레(Frédéric Bourée)와 톈진에서 담판을 벌여 가조약 3조에 합의했다. 주요 내용은 중국 군대의 운남, 귀주 성 철수, 프랑스의 베트남 불점거, 베트남 국왕 위신 유지, 보승(保勝) 개항 및 무역, 중국과 프랑스의 경계 설정 및 베트남 북부 자치 보호 등이었다.그러나 톈진 담판의 가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군이 철수하고 베트남 북부 변경을 순시하는 과정에서 흑기군과 충돌하여 프랑스군을 물리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양산대첩'이라 부른다. 청나라 내부에서는 흑기군을 과신한 일부 인사들과 임오군란 당시 조선에 대한 간섭 성공을 경험한 청류파 세력들이 이홍장의 톈진 담판에 반발했다.
프랑스 역시 톈진 담판에 불만을 품고, 주일공사관인 아르튀르 트리쿠(Arthur Tricou)를 전권대표로 삼아 중국과 다시 교섭을 시도했으나, 이홍장이 모친상으로 자리를 비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83년 8월, 프랑스는 무력으로 후에를 함락하고 베트남과 '후에 조약'을 체결하여 베트남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 소식에 청나라 주전파들은 베트남 원조를 주장했지만, 공친왕과 이홍장은 외교적 해결을 추구하며 '이홍장-트리코 회담'을 재개했다. 그러나 북위 20도선(이홍장 주장)과 22도선(프랑스 주장) 경계 설정 문제로 회담은 결렬되었고, 프랑스는 무력으로 흑기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884년 4월, 프랑스는 프랑수아 에르네 푸르니에를 파견하여 이홍장과 다시 담판하게 했다. 그 결과, 청은 프랑스의 베트남 보호권을 인정하고 청군을 철수시키는 대신, 프랑스는 중국 변경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5개조 '청-프 간명조약'이 체결되었다.
1883년 7월 상하이에서 아르튀르 트리쿠와 이홍장 사이의 협상은 프랑스가 전면전을 원치 않는다는 증기제 후작의 낙관적인 평가를 청 정부가 수용하면서 중단되었다. 쥘 페리와 프랑스 외무장관은 파리에서 증기제 후작을 여러 차례 만났지만, 이러한 외교적 논의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중국은 프랑스와의 전투가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손타이, 박닌, 랑선에서 상당수의 중국 정규군을 철수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독일 정부를 설득하여 중국 북양함대를 위해 건조 중이던 정원호와 진원호의 인도를 연기시켰다.[4]
프랑스와 중국 사이의 긴장 고조는 1883년 가을 중국 내 반외국인 시위를 야기했다. 광둥성에서 가장 심각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광저우의 유럽 상인들의 재산과 삼원(Shameian)섬이 공격받았다. 여러 유럽 열강이 자국민 보호를 위해 광저우에 군함을 파견했다.
3. 4. 톈진 담판의 결렬과 프랑스의 무력 침공
1883년 8월 20일, 프랑스군의 증원군 지휘관이 된 아메데 쿠르베 제독의 증원군이 베트남에 상륙하여, 응우옌 왕조 군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투언안 전투) 프랑스군의 본격적인 침공 전에 뜨득 황제의 죽음으로 혼란한 응우옌 왕조는 〈계미 조약〉(후에 조약)을 체결해 사실상 프랑스에 항복한 것이다.기세를 탄 프랑스군은 다이강에 주둔하고 있던 유영복의 흑기군에 공세를 가했다. 그렇게 시작된 푸호아이 전투와 팔란 전투에서 일정한 피해를 주었지만 격렬한 저항을 받아야 했다. 두번에 걸친 대규모 공세에도 불구하고, 다이강에서 흑기군을 쫓아내지 못했다. 유럽 국가에서는 ‘프랑스군의 고전’이라고 악평을 했고, 다급해진 프랑스 정부는 1883년 9월 공세 실패를 이유로 육군 사령관을 해임했다. 결국 흑기군은 다이강이 범람했기 때문에 선떠이강 부근의 진지로 후퇴했다.
프랑스는 연말에 흑기군을 괴멸시키기 위한 대공세를 계획하면서, 흑기군을 후원하고 있는 청나라에 단독 강화를 타진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다른 유럽 주요 국가에도 참전을 촉구하고 다녔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는 프랑스 주재 공사 증기택으로부터 “프랑스는 전면전에 나설 용기가 없다”는 보고를 받았고, 프랑스 주청공사와 이홍장이 진행하던 협상을 중단했다. 프랑스 정부는 파리의 증기택과 공사와 폴 아르망 샤르멜 라쿠르 외무 장관 회담을 진행시켰지만, 외교적 진전은 보지 못했다.
3. 5. 이홍장-트리쿠 회담과 톈진 협약
1883년 8월, 프랑스는 투언안 전투에서 승리하고 휴에 조약을 강요하여 통킹을 프랑스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또한, 프랑스군은 푸호아이 전투와 팔란 전투에서 흑기군을 격파했으나, 유용복(劉永福)의 모든 진지를 점령하지는 못했다.박닌 전투와 손태 함락 이후, 중국 정부 내 온건파의 입지가 강화되었고, 프랑스와의 전면전을 주장하던 강경파는 일시적으로 신임을 잃었다. 1884년 봄, 프랑스군의 추가적인 승리는 서태후(慈禧太后)가 중국이 타협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만들었고, 5월에 프랑스와 중국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상은 천진(天津)에서 진행되었다. 중국 온건파의 지도자였던 이홍장(李鴻章)이 중국을 대표했고, 프랑스 순양함 볼타(Volta) 함장 프랑수아-에르네스트 푸르니에(François-Ernest Fournier) 대위가 프랑스를 대표했다. 1884년 5월 11일 체결된 톈진 협약은 안남과 톤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령을 중국이 인정하고 톤킨에서 중국군을 철수하는 대신, 프랑스와 중국의 무역 및 상업에 대한 세부 사항을 해결하고 베트남과의 분쟁 중인 국경을 획정하는 포괄적인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규정했다.
6월 6일, 프랑스는 새로운 휴에 조약을 체결하여 안남과 톤킨 모두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령을 수립했다. 이 조약 서명에는 베트남이 중국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포기했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행위가 수반되었다.
그러나 푸르니에는 전문 외교관이 아니었고, 톈진 협약에는 톤킨에서 중국군 철수에 대한 시한이 명시되지 않는 등 여러 가지 미해결 문제가 남아 있었다. 프랑스는 군대 철수가 즉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중국은 군대 철수가 포괄적인 조약 체결을 전제로 한다고 주장했다. 이 협정은 중국에서 매우 인기가 없었고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전쟁파는 이홍장의 탄핵을 요구했고, 그의 정적들은 톤킨에 있는 중국군에게 자리를 지키라는 명령을 내리도록 음모를 꾸몄다.
철병 문제로 양국이 대립하자, 청나라에서는 전쟁 재개를 주장하는 강경파 정치가들뿐만 아니라 옹동화(翁同龢) 등 사적인 원한을 가진 인물들까지 이홍장의 파면을 요구하며 은밀히 군대를 전선으로 이동시켰다.
6월, 프랑스군은 청군이 랑선(Lang Son)에서 철수할 것으로 예상하고 주둔 부대를 파견했다. 6월 23일, 박레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청국군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공격을 개시했지만, 반격을 받고 패주했다.
이 사건 이후 프랑스에서는 개전론이 고조되었다. 쥘 페리 정권은 청국에 사과와 배상금을 요구했지만, 청국은 협상에는 동의했으나 배상과 사과는 거부했다. 양국의 대립은 심화되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프랑스군은 쿨베(Courbet) 제독의 함대를 복주로 이동시켜 청국 해군 복주 船政局 공격에 대비하도록 명령받았다. 1884년 8월 5일, 프랑스 해군은 타이완 기륭만의 석포만(石浦灣)에 포격을 가해 3개의 연안 포대를 파괴하고 기륭에 해병대를 상륙시켰으나, 유명전이 지휘하는 청국군이 구원에 나서자 철수했다. 이로써 양국은 사실상 전쟁 상태에 돌입, 청불 전쟁이 발발했다.
4. 전쟁의 발발과 전개
톈진 협약 체결 이후에도 철군 문제로 갈등이 계속되었다. 간명조약 체결 이후 철군 명령을 전해받지 못한 베트남 주둔 청나라 군대와 홍하를 순시하려는 프랑스 군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는데, 이를 '북려충돌'이라 부른다. 청조에서는 주전파 장지동을 다시 양광총독으로 임명하고 진보침과 장패륜을 광동과 복건에 보내 군무를 처리하도록 하는 한편, 베트남에 있는 유영복을 데려오도록 하였다.
1884년 6월 23일, 박레 지방을 통과하던 프랑스군은 통행을 방해하는 광서군 분견대와 조우했다. 프랑스군은 청국군에 최후통첩을 보내고 공격을 개시했지만(박레 전투), 반격을 받고 패주했다.
이 사건 이후 프랑스에서는 개전론이 고조되었다. 쥘 페리 정권은 청국에 사과와 배상금을 요구했지만, 청국은 협상에는 동의했으나 배상과 사과는 거부했다. 양국의 대립은 심화되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프랑스군은 쿠르베 제독의 함대를 福州로 이동시켜 청국 해군 복주 船政局 공격에 대비하도록 명령받았다. 1884년 8월 5일, 프랑스 해군은 타이완 기륭만의 석포만(石浦灣)에 포격을 가해 3개의 연안 포대를 파괴하고 기륭에 해병대를 상륙시켰으나, 유명전이 지휘하는 청국군이 구원에 나서자 철수했다.
이로써 양국은 사실상 전쟁 상태에 돌입, 청불 전쟁이 발발했다.
4. 1. 박레 충돌
톈진 협약 이후, 철군 명령을 받지 못한 베트남 주둔 청나라 군대와 홍강을 순시하려는 프랑스 군대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이를 '박레 매복(또는 박레 충돌)'이라고 부른다. 1884년 6월 23일, 박레 지방을 통과한 프랑스군은 통행을 방해하는 광서군 분견 부대와 조우했다. 프랑스군은 청나라군 측에 최후 통첩을 들이대며 공격을 시작했고, 박레 전투에서 반격을 받고 패주했다.이 사건 이후 프랑스 본국에서는 개전론이 높아졌다. 쥘 페리 정권은 청나라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지만, 청나라는 협상에 동의했지만, 배상과 사죄는 거부했다. 양국의 대립은 깊어졌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프랑스군은 쿠르베 제독의 함대를 복주로 이동시켜 청나라 해군의 복주선정국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1884년 8월 5일, 프랑스 해군은 타이완 지룽만에 있는 석포만에 포격을 해서 3대의 해안 포대를 파괴하고 기륭에 해병 부대를 상륙시켰다. 그러나 유명전이 지휘하는 청나라군이 원병으로 왔기 때문에 철수했다. 이에 따라 양국은 사실상 전쟁 상태로 돌입했고, 청불 전쟁이 발발했다.
4. 2. 프랑스의 군사 행동 강화
4. 3. 프랑스 해군의 공세
1884년 8월 23일, 아메데 쿠르베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극동 전대는 복주에 집결해 있던 청나라 복건 함대(장패륜 제독)에게 공격을 명령받았다. 그리하여 ‘마강해전’이 벌어졌다. 복건 함대 22척 중 기함 일등순양함 ‘양무’를 포함한 11척은 서양식 최신 함정이었지만, 13척을 보유한 프랑스 해군과 치른 해전에서 약 1시간만에 대부분 침몰하거나 대파되었고, 수병의 사망자만 3,000명을 넘어선 것으로 보였다.[21] 반면 프랑스가 입은 피해는 경미한 수준이었다. 전투는 중립을 선언했던 미국과 영국 해군에 의해 목격되었다. 해전에서 승리한 후 쿠르베 제독은 복주 해군 공창(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해군인 프로스 지켈의 기술 협력으로 건설된 것)에 큰 피해를 입히고, 해안 포대 몇 곳을 파괴한 후 전역을 이탈했다.
|섬네일|청나라 프리깃 어원을 공격하는 프랑스 어뢰정, 석포만 해전]]
대만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쿠르베 함대는 계속 증원되었고, 1884년 10월 시점보다 막강한 전력을 갖췄다. 1885년 2월 11일, 쿠르베의 극동 전대가 대만을 봉쇄하자 청나라 해군은 남양수사를 출동시켜 해결하려 했다. 2월 14일 밤, 프랑스 해군은 소형 어뢰정으로 기습을 펼쳐 호위함 ‘''어원''’ 1척을 격침시켰다.(석포만 해전)[6] 이어서 쿠르베 전대 본대도 청나라 해군을 추격했고, 닝보에서 가까운 진해 항구로 청나라 해군이 도망치자, 진해만을 봉쇄를 했다. 이후 장갑함 2척을 중심으로 진해 항구에 포격을 퍼부었고, 양쪽 모두 사소한 손실만 입었다.(진해 해전)
1885년 2월 청나라의 요청을 받아 영국 정부는 극동에서 프랑스 해군 입항 거부를 결정했다. 보급항을 잃은 쿠르베 함대는 보복으로 장강에서 거래되던 미곡 유입을 방해하며 식량난을 일으켰다.
4. 3. 1. 마강 해전
1884년 8월 23일, 프랑스는 아메데 쿠르베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극동 전대에게 복주에 집결해 있는 청나라 복건 함대(장패륜 제독)와 결전을 하도록 명령했다. 그리하여, ‘마강해전’이 벌어졌다. 복건 함대 22척 중 기함 일등순양함 ‘양무’를 포함한 11척은 서양식 최신 함정이었지만, 13척을 보유한 프랑스 해군과 치른 해전에서 약 1시간만에 대부분이 침몰하거나 대파되었고, 수병의 사망자만 3,000명을 넘어선 것으로 보였다.[21] 반면 프랑스가 입은 피해는 경미한 수준의 손상만 있었다. 전투의 서전은 중립을 선언했던 미국과 영국 양국 해군에 의해 촉발되었다.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쿠르베 제독은 복주 해군 공창(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해군인 프로스 지켈의 기술 협력으로 건설된 것)에 큰 피해를 입히고, 해안 포대 몇 곳을 파괴한 후 전역을 이탈했다.
이 해전은 스파어 어뢰가 성공적으로 배치된 최초의 사례 중 하나였다.
4. 3. 2. 홍콩 폭동
마강 해전 패배 소식은 청나라 내 반프랑스 감정을 확산시켰고, 이는 영국령 홍콩으로 번졌다. 1884년 9월, 마강 해전에서 손상된 프랑스 함정의 수리를 거부하는 대규모 파업이 발생했다. 수리공들의 파업은 월말에 해산되었지만, 항만 노동을 보조하는 다양한 업종이 파업을 계속했기 때문에 수리는 불가능했다. 영국 정부가 강경 진압을 하는 와중에 경찰에 노동자가 사살당하자, 10월 3일에 심각한 대폭동으로 발전했다. 영국 정부는 광동성 장교들이 배후에서 폭동을 지휘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프랑스의 푸저우 공격은 프랑스와 중국 간의 외교 접촉을 사실상 종식시켰다. 푸젠 함대의 파괴 소식은 중국에서 애국적인 열정의 폭발을 불러 일으켰고, 외국인과 외국 재산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애국적인 분노는 영국 식민지인 홍콩으로 확산되었다. 1884년 9월, 홍콩의 부두 노동자들은 8월 해전에서 포탄 피해를 입은 프랑스 철갑함 ''La Galissonnière''의 수리를 거부했다. 파업은 9월 말에 끝났지만, 부두 노동자들은 항만 노동자, 가마꾼, 인력거꾼을 포함한 다른 중국 노동자 집단에 의해 업무에 복귀하는 것을 막았다. 영국 당국이 부두 노동자들을 괴롭힘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시도는 10월 3일 심각한 폭동으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최소 한 명의 폭도가 사살되고 여러 명의 시크족 경찰관이 부상을 입었다. 영국은 광둥성 중국 당국이 이 소요를 조장했다고 의심했다.
4. 3. 3. 대만 공방전
마강 해전 이후 프랑스군은 8월 5일에 청군에 격퇴당했고, 실패한 대만 북부의 요충지 · 지룽 점령을 다시 계획했다. 프랑스군은 마강 해전의 승리와 함께 북부 대만을 점령해서 조기에 강화를 실현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10월 1일에 프랑스 해군의 해병대 1,800명이 상륙했고, 현지 수비대는 기륭에서 후방 방어 거점으로 철수했다. 상륙한 프랑스군의 전력으로는 지룽시보다 앞서 가기에는 불안했고, 보급도 불안했다. 10월 2일 프랑스 해군의 레스페 제독은 의미없는 해안 포격을 거쳐 수병 600명을 기륭 후방의 담수로 보냈다. (담수 전투) 그러나 손개화 장군의 청군 약 1,000명의 반격을 받고 전투는 교착상태가 되었다.
1884년 말, 프랑스 해군은 가오슝 · 타이난 등 몇 곳의 중요한 항구를 봉쇄했다. 이외에 1885년 1월에 육상 전력을 4,000명으로 증강했다. 하지만 청나라도 병력을 2만 5000명까지 증원했다. 1885년 1월부터 시작된 프랑스군의 공세는 지룽시 주변의 작은 마을 몇 개를 점령하고 끝났고, 큰 비의 영향으로 2월 공세는 중단되었다. (기륭 원정)
4. 3. 4. 석포만 해전과 진해 해전
1884년 10월 시점보다 막강한 전력을 갖춘 쿠르베의 극동 전대가 1885년 2월 11일 대만을 봉쇄하자, 청나라 해군은 남양수사를 출동시켜 해결하려 했다. 2월 14일 밤, 프랑스 해군은 소형 어뢰정으로 기습을 펼쳐 호위함 ''어원'' 1척을 격침시켰다.(석포만 해전)[6]이어서 쿠르베 전대 본대도 청나라 해군을 추격했고, 닝보에서 가까운 진해 항구로 청나라 해군이 도망치자, 진해만을 봉쇄했다. 이후 장갑함 2척을 중심으로 진해 항구에 포격을 퍼부었으나, 양쪽 모두 사소한 손실만 입었다.(진해 해전) 3월 1일에는 프랑스 순양함 니엘리(Nielly)와 중국 해안 포대 사이에 소규모 충돌이 있었는데, 이를 오양리견(歐陽利見)이 '전해 해전'을 방어적 승리로 주장하기도 했다.
4. 4. 통킹 전투
1883년 운남 등 지역에서 동원된 청나라 원정군은 베트남에 진입, 랑선 등 통킹의 주요 거점에 주둔했다. 프랑스 정부 대표 주재 공사 프레데릭 부레는 이홍장과 협상하여 통킹을 청나라와 프랑스가 양분하는 협정(톈진 협약)을 맺고자 했다.한편, 리비에르는 부레의 소극적인 태도에 반발, 1883년 병사 520명을 이끌고 진격을 재개하여 흑기군, 청군, 응우옌 왕조군과 결전을 벌였다. 3월 남딘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하노이 성 근교 자꾹 전투에서도 승리했다. 프랑스 본국에서는 쥘 페리 정권이 들어서 부레를 해임하고 리비에르의 군사적 독단을 칭찬했다.
1883년 4월, 청나라 장군 당경숭은 유영복을 설득하여 흑기군에 의한 공세를 계획했다. 1883년 5월 10일, 흑기군이 프랑스군을 공격, 5월 19일 양군은 꺼우저이 지역에서 충돌했다. 프랑스 병사 550명은 꺼우저이 지역 다리(紙橋)에 진지를 구축한 흑기군에 반격을 받아 지휘관 리비에르가 전사하고 패주했다.(꺼우저이 전투)
쥘 페리 정권의 지지를 얻은 프랑스군은 대규모 증원군을 파병, 청나라와의 전면전으로 발전했다. 프랑스 정부는 초조해졌고, 청나라는 전선에서 철군을 거부했다. 청나라에서는 양이 운동이 각지에서 발생했고, 광동성 광저우 등지에서는 유럽 상인 전체를 습격하는 사태가 발생, 각국이 포함을 파견했다.
프랑스는 독일에 진원, 정원 건조를 늦추도록 요청하고, 통킹 삼각주에 여러 거점을 확보했다. 흑기군과의 전투가 청나라와의 싸움으로 이어질 것이라 예상했지만, 통킹 전역 병합으로 청나라가 영유권을 인정할 것이라 판단했다. 1883년 12월, 1만 명이 넘는 대군이 선떠이강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선떠이 전투는 최대 격전이었다. 청군과 베트남 병사들은 거의 관여하지 않았고, 3,000명의 흑기군이 주력이 되어 전투를 벌였다. 12월 14일 프랑스군 공세를 격퇴했지만, 12월 16일 프랑스군 외인부대와 해병 부대가 선떠이강 방어선을 돌파, 유영복은 남은 군사를 데리고 철수했다.

프랑스군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고, 흑기군은 절반 가까운 병사를 잃었다. 유영복은 이후 전투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1884년 3월, 프랑스군은 샤를 테오도르 밀로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박닌 공격을 재개했다(박닌 원정). 청나라 광서군은 형식적인 저항만 하고 철수했다. 양군 총 3만 명의 대회전이었지만, 피해는 100명 정도였다. 흑기군이 전력 보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 박닌 점령을 용이하게 했다. 밀로 장군은 크루프 강철 대포를 접수했다.
4. 4. 1. 삼각주에서의 승리
프랑스군은 홍강 삼각주 지역에서 청나라군과 흑기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1883년 12월, 프랑스군은 선떠이 전투에서 흑기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매우 격렬했으며, 흑기군은 프랑스군의 공격을 한 차례 격퇴하기도 했지만, 결국 프랑스군이 선떠이강을 점령했다.
1884년 3월, 프랑스군은 박닌 원정을 통해 박닌을 점령했다. 청나라 광서군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후퇴했으며, 흑기군 또한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 프랑스군은 비교적 쉽게 박닌을 점령할 수 있었다.
1884년 9월, 프랑스군은 껩 원정을 통해 광서군을 격파하고, 깨프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깨프와 추에 주요 전진 기지를 구축하여 광서군의 랑선 기지를 위협했다.

1884년 11월, 유옥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흑기군의 매복 공격을 격퇴하고, 홍강 삼각주 동쪽 지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일련의 승리로 프랑스군은 홍강 삼각주 지역을 점령했다.

4. 4. 2. 1차 랑선 공세
1884년 12월, 프랑스 의회는 통킹에서의 육군 작전을 두고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육군 장관은 홍강 삼각주 확보를 주장했지만, 강경파는 통킹 전역에 대한 총공격을 주장했다. 논쟁은 새로 취임한 강경파를 지지하는 육군 장관의 압력으로 결론이 나고, 통킹 최대 도시인 랑선을 향한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전선 기지를 출발한 프랑스군은 1885년 1월 3일부터 4일까지의 공격으로 누이밥 전투에서 광서군 수비대를 격파하고 랑선 공격의 전초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랑선 원정에 한 달의 준비 기간이 필요했다. 1885년 2월 3일, 프랑스군은 7,200명의 정규군과 4,500명의 현지 병력을 이끌고 공격을 재개했고, 청나라 군대 20,000명이 이에 맞섰다. 프랑스군은 장비 수송에 어려움을 겪었고, 타이호아와 동선에서 치열한 저항에 직면했다. 그러나 10일에는 랑선 주변에 도달했고, 12일에는 랑선 북부로 진출하여, 청나라 군대는 랑선을 버리고 후퇴했다.( 1차 랑선 원정)
4. 4. 3. 뚜옌꽝 포위전
랑선 점령 후, 프랑스군은 1884년 11월부터 운남군과 흑기군에 포위된 뚜옌꽝에서 고전 중인 수비대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했다. 운남군과 흑기군의 포위 공격으로 수비대는 통킹 동원병과 함께 방어전을 펼쳤지만, 랑선 점령 시점에서 병력의 3분의 1이 사상당했다.[7]프랑스군 1여단은 뚜옌꽝으로 진격하여, 호아목 전투에서 광서군의 방어 진지를 공격했다. 1885년 3월 2일, 반격에 나서면서 다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윽고 뚜옌꽝에 길을 뚫고 포위를 한 광서군 우익을 저격하는 전투를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남군과 흑기군은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뚜옌꽝 포위전)
고전 끝에 아군을 구한 이 전투로 프랑스군의 사기는 크게 높아졌고, 브리에르 드 리즐 장군은 “프랑스를 구한 영웅”으로 국내에서 찬사를 받았다.

뚜옌꽝 포위전은 청불 전쟁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결이었다. 중국군과 흑기군은 프랑스군 진지까지 체계적으로 사파(sap) 공격을 가했고, 1885년 1월과 2월에는 지뢰를 이용하여 외곽 방어선을 돌파하고 7차례에 걸쳐 공격을 감행했다. 마르크-에드몽 도미네 ''chef de bataillon'' 지휘하에 400명의 프랑스 외인부대원과 200명의 톤킨 보조병으로 구성된 뚜엉꽝 수비대는 모든 돌격 시도를 격퇴했지만, 압도적인 수적 열세 속에서 용감하게 방어하면서 전투력의 3분의 1 이상(전사 50명, 부상 224명)을 잃었다. 2월 중순이 되자 뚜엉꽝은 즉각적인 지원이 없으면 함락될 것이 명백해졌다.
드 네그리에를 랑선에 제2여단과 함께 남겨둔 브리에르 드 릴은 지오바니넬리의 제1여단을 직접 이끌고 하노이로 돌아와 뚜엉꽝 지원을 위해 상류로 이동했다. 푸즈언에서 헝호아에서 온 드 모시옹 중령 지휘하의 소규모 부대의 증원을 받은 여단은 2월 24일 화목(Hòa Mộc)에서 강력한 중국군 방어진에 의해 뚜엉꽝으로 가는 길이 막힌 것을 발견했다. 1885년 3월 2일 지오바니넬리는 중국군 방어선의 좌익을 공격했다. 화목 전투는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두 차례의 프랑스군 공격이 결정적으로 격퇴되었지만, 결국 프랑스군이 중국군 진지를 점령했으나, 매우 많은 사상자(전사 76명, 부상 408명)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엄청난 희생을 치른 승리는 뚜엉꽝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운남군과 흑기군은 포위를 풀고 서쪽으로 철수했고, 지원군은 3월 3일에 포위된 뚜엉꽝에 진입했다. 브리에르 드 릴은 널리 인용되는 일일 명령에서 고전하는 수비대의 용기를 칭찬했다. "오늘 당신들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당신들을 구원한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내일은 프랑스 전체가 당신들을 칭찬할 것입니다!"
랑손 점령 후, 프랑스군은 1884년 11월 운남군과 흑기군에 포위된 뚜옌꽝(宣光)에서 고전 중인 수비대의 구원을 위해 출발했다. 운남군과 흑기군의 포위 공격으로 수비대는 톤킨인 징집병들과 함께 방어했지만, 랑손 점령 당시 병력의 3분의 1이 사상당했다.
프랑스군 제1여단은 뚜옌꽝으로 진격하여, 호아목(Hoa Moc)에 구축된 포위측의 방어진지를 공격했다(호아목 전투). 1885년 3월 2일, 반격을 받아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마침내 뚜옌꽝으로 가는 길을 열고 포위된 아군을 구출하는 전투를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남군과 흑기군은 포위를 포기하고 철수했다(뚜옌꽝 포위전).
고전 끝에 아군을 구출한 이 전투는 프랑스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고, 브리에르 장군은 프랑스를 구했다며 국내에서 찬사를 받았다.
5. 전쟁의 종결과 결과
청불전쟁은 청나라가 완전히 패하지 않았지만 패한 것과 다름없게 되었고, 프랑스 또한 제대로 승리하지 못했지만 승리한 셈이 되었다. 청나라는 제1차 아편전쟁, 제2차 아편전쟁과 달리 프랑스의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여 적절한 전략과 전술을 펼 수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와 또 다른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지 않아도 되었다.
투엔콴으로 향하기 전, 브리에르는 랑손에서 북쪽으로 진격하여 랑손 공세에서 큰 피해를 입었던 광서군을 추격하도록 전선 사령관에게 명령했다. 프랑스군 제2여단은 식량과 탄약을 보급받은 후 명령에 따라 진격을 재개하여 2월 23일 똥당에서 광서군을 격파하고 톤킨에서 청나라 본토로 밀어냈다(동당 전투). 또한 청나라 측 국경 요새 몇 곳을 공격했지만, 제2여단은 더 이상 전과를 확대할 힘이 없었고 랑손으로 귀환했다. 랑손 공세 이후 승승장구하던 프랑스군도 여기서 일단 막히게 되었다. 제2여단은 랑손에서 광서군의 반격에 대처하느라 바빴고, 같은 시기에 제1여단은 운남군의 공격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광서군과 운남군은 수 주 동안 공세로 전환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지만, 프랑스군 2개 여단도 각각 광서군과 운남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길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전쟁의 교착 상태에 격분한 페리 총리는 강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브리에르에게 제2여단을 청나라 남부 국경 지대에 재진입시키도록 엄명했다. 브리에르는 광서성 국경에서 80km 정도까지 군대를 돌출시키는 작전 계획에 대해 상황으로부터 결과를 추측했지만, 3월 17일에 파리로 타전된 결론은 "전력 부족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페리 정권은 더욱 대규모의 증원을 톤킨으로 파병하기로 결정했고, 이로써 일단 교착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증원의 대부분은 제1여단으로 향했고, 제2여단이 랑손을 방어하는 동안 전선에 가로막고 있는 운남군의 거점을 공격했다(방보 전투). 3월 23일 프랑스군은 방보의 몇몇 거점을 점령했지만, 다음 날 시작된 운남군의 맹공에 노출되어 손실을 입은 프랑스군은 방보 점령을 포기하고 후퇴했다. 프랑스군은 전선에 구멍을 내지 않도록 후퇴할 수 있었지만, 후방에서 재편성을 받은 프랑스 병사들은 장기간의 전쟁에 겁을 먹고 있었다. 패배한 프랑스 병사들은 사기를 저하시켰고, 이는 후에 발생할 실책의 전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제1여단이 후퇴한 랑손은 운남군과 발맞춘 광서군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었다. 제2여단은 적은 병력으로 공격을 견디고, 광서군에 반격하여 랑손 탈환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운남군의 승리에 광서군이 편승하는 것을 막은 제2여단은 광서군을 추격하여 앞서 언급된 국경 공격을 재개하려 했으나, 그 과정에서 전선 사령관 네그리에가 부상당하면서 지휘 체계가 마비되었다. 지휘권을 이어받은 부관 폴-기스타브 에르뱅제(Paul-Gustave Herbinger)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지만, 전선 사령관으로서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제1여단은 추격을 하지 않고, 제2여단의 패배를 상쇄하고도 남을 기회를 놓쳤다. 그뿐만 아니라, 밤보 전투의 패배로 인한 병사들의 사기 저하와 광서군 및 운남군의 반격 등으로 평정심을 잃은 프랑스군은 스스로 랑손을 버리고 패주했다(第二次ランソン攻勢(제2차 랑손 공세)). 에르뱅제도 전사했다.
사실 광서군은 반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운남군도 랑손 전투에 참전할 가능성은 없었다. 프랑스군 내에서도 반대 의견이 있었지만, 현실에 반영되지는 않았다. 시작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추격의 공포에 프랑스군 부대는 최소한의 물자만 가지고 앞다투어 도망쳤다. 그 때문에, 체제를 정비한 광서군의 판정신이 "프랑스군 패주"라는 예상치 못한 보고를 받고 랑손을 재점령했을 때, 그곳에는 프랑스산 막대한 물자와 무기가 남아 있었다. 목숨을 걸고 후방으로 도망친 프랑스 병사들은 공포와 피로로 사기를 극도로 잃었지만, 광서군 또한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추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신 마치 추격하는 듯이 흑기군과 운남군이 서쪽에서 프랑스군 수비대를 격파하고 패주시켜(フー・ラム・タオの戦い(푸 람 타오 전투)), 프랑스군의 공황 상태에 박차를 가했다.
== 페리 정권 붕괴 ==
프랑스군은 랑선 공세 이후 승승장구했지만, 1885년 3월 28일 랑선 퇴각에서 보인 추태는 전투 결과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추격에 스스로 겁을 먹은 결과였다. 패주 후에도 프랑스군은 여전히 우세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평정을 잃은 전선의 보고는 브리에르 드 릴 장군 등 후방 사령부에도 공포를 전염시켰다. 프랑스군 사령부는 본국에 패전 가능성을 통보했고, 이 전보는 프랑스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최초의 전보가 공개되자 프랑스 의회에서는 전쟁 지속 여부를 묻는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고, 이는 전쟁을 수렁으로 몰아넣은 쥘 페리 정권에 대한 불신임안 제출로 이어졌다. 결국 3월 30일, 쥘 페리는 총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다시는 총리직에 복귀하지 못했고, 정계에서도 한직으로 밀려났다. '통킹 사건'으로 불리는 이 정치적 문제는 페리의 정치 경력을 완전히 끝내버렸다.
== 정전 협상과 톈진 조약 체결 ==
샤를 드 프레이시네가 새로운 총리가 되면서 청나라와 강화 협상을 추진했고, 영국, 미국, 독일 등의 중재로 협상이 진전되었다. 특히 영국은 총세무사 하트를 통해 제임스 캠벨을 파리에 파견하여 정전 협정을 체결하도록 했다. 청나라는 톈진 협약을 이행하고 프랑스는 박레 매복 사건의 배상 청구를 취하하는 조건이었다.
1885년 6월, 이홍장과 프랑스 공사 쥘 파트노트르 사이에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베트남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인정하고, 중국과 베트남 변경 두 곳에 통상 장소를 설치하기로 했다. 프랑스 화물은 베트남과 광서성 변경에서 관세율을 감면받고, 향후 중국 철도 건설 시 프랑스와 협상하도록 규정되었다. 전쟁 배상금은 없었지만, 청나라는 전쟁으로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입었다.
정전 협정 직전, 프랑스는 대만 전선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기륭 원정에서 프랑스군은 기륭 포위망을 돌파하고 타이페이로 진출했으며, 펑후 해전에서 승리하여 펑후 제도를 점령했다. 그러나 대만 전역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페스카도레스 전투는 중요한 승리였지만, 전쟁 결과에 영향을 주기에는 너무 늦었다. 3월 28일 에르빙거가 랑선에서 후퇴했다는 소식에 프랑스의 추가 작전은 취소되었고, 4월 평화 예비 협정으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4월 4일 평화 의정서 소식은 즉시 전달되지 않아, 4월 14일 께프(Kép)에서 마지막 교전이 벌어졌다. 프랑스군은 흥화와 추의 주요 요새를 강화하며 광서군과 운남군에 맞섰다. 군사적으로 통킹에서의 전쟁은 교착 상태로 끝났다.
4월 4일 평화 의정서에 따라 중국은 통킹에서 군대를 철수시켰고, 프랑스는 기륭과 페스카도레스를 점령했다. 쿠르베 제독은 6월 11일 마쿵 항구에 정박한 기함 ''바야르''에서 사망했다. 한편, 중국은 평화 협정을 준수하여 1885년 6월 말까지 운남군과 광서군, 흑기군 모두 통킹에서 철수했다.
== 청나라에 미친 영향 ==
1884년 8월 23일, 마강해전에서 복건함대가 패배하면서 청나라가 양무운동을 통해 추진해 온 군사적 근대화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났다. 청불 전쟁의 교훈은 청 제국의 전근대적인 지휘 체계와 장비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주력 함대의 일부는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그 이유가 일본을 대비하기 위함이라는 청나라 지도부의 변명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비장의 해군 전력을 아낀 것이 프랑스군을 유리하게 했다.
청나라 내부에서는 이 시기 서태후의 독재정치가 확립되었고, 당시 당권자를 비판하면서 주전파였던 청류파의 세력이 해체되었다.
1884년 마강해전에서 복건함대의 패배는 청나라가 추진해 온 근대화 정책(양무운동)을 후퇴시켰다. 청불 전쟁의 교훈은 모두 청 제국의 전근대적인 지휘 체계와 장비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주력 함대의 일부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를 일본에 대한 대비로 삼았다는 제국 상층부의 변명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핵심 해군 부대를 아껴 쓴 것이 프랑스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텐진 조약(톈진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전쟁 중 10억 냥 이상을 전비로 소모하고 약 2억 냥의 빚을 지게 되었다.
청불 전쟁으로 청나라의 무력함이 드러나자 영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이 중국과 그 주변 국가들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선과 중국 동북지역(만주)이 전략적 요충지로 떠올라, 청불 전쟁 이후 10년 간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일본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 중국의 보호국이었던 조선에서 갑신정변(1884년 12월)을 지원하며 세력 확장을 꾀했다. 이로 인해 일본과 청나라는 전쟁 직전까지 가는 위기 상황을 맞이했다. 이후 청나라 조정은 프랑스보다 일본을 더 큰 위협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1885년 1월, 서태후는 신하들에게 프랑스와 명예로운 평화를 맺도록 지시했고, 비밀 회담 끝에 전쟁은 종결되었다.
조선 문제로 인해 일본과 러시아의 중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중국 북부에서 일본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개입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중국 북부는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에 참전할 가능성에 위협을 느꼈고, 중국군이 육상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평화협정을 추진했다.
전쟁 내내, 이홍장은 조선 문제와 일본의 개입 위협을 이유로 북양함대를 프랑스에 대항해 투입하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사실 이홍장은 함대를 중국 북부에 정박시켜 전투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함대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 양무운동의 한계 ===
1884년 8월 23일, 마강해전에서 복건함대가 패배하면서 청나라가 양무운동을 통해 추진해 온 군사적 근대화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났다. 청불 전쟁의 교훈은 청 제국의 전근대적인 지휘 체계와 장비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주력 함대의 일부는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그 이유가 일본을 대비하기 위함이라는 청나라 지도부의 변명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비장의 해군 전력을 아낀 것이 프랑스군을 유리하게 했다.[20]
=== 정치적 변화 ===
청나라 내부에서는 이 시기 서태후의 독재정치가 확립되었고, 당시 당권자를 비판하면서 주전파였던 청류파의 세력이 해체되었다.
=== 경제적 타격 ===
1884년 마강해전에서 복건함대의 패배는 청나라가 추진해 온 근대화 정책(양무운동)을 후퇴시켰다. 청불 전쟁의 교훈은 모두 청 제국의 전근대적인 지휘 체계와 장비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주력 함대의 일부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를 일본에 대한 대비로 삼았다는 제국 상층부의 변명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핵심 해군 부대를 아껴 쓴 것이 프랑스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텐진 조약(톈진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전쟁 중 10억 냥 이상을 전비로 소모하고 약 2억 냥의 빚을 지게 되었다.[20]
=== 국제적 위상 저하 ===
청불 전쟁으로 청나라의 무력함이 드러나자 영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이 중국과 그 주변 국가들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선과 중국 동북지역(만주)이 전략적 요충지로 떠올라, 청불 전쟁 이후 10년 간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일본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 중국의 보호국이었던 조선에서 갑신정변(1884년 12월)을 지원하며 세력 확장을 꾀했다. 이로 인해 일본과 청나라는 전쟁 직전까지 가는 위기 상황을 맞이했다. 이후 청나라 조정은 프랑스보다 일본을 더 큰 위협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1885년 1월, 서태후는 신하들에게 프랑스와 명예로운 평화를 맺도록 지시했고, 비밀 회담 끝에 전쟁은 종결되었다.
조선 문제로 인해 일본과 러시아의 중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중국 북부에서 일본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개입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중국 북부는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에 참전할 가능성에 위협을 느꼈고, 중국군이 육상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평화협정을 추진했다.
전쟁 내내, 이홍장은 조선 문제와 일본의 개입 위협을 이유로 북양함대를 프랑스에 대항해 투입하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사실 이홍장은 함대를 중국 북부에 정박시켜 전투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함대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 프랑스에 미친 영향 ==
1885년 6월 9일에 체결된 톈진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베트남 북부를 획득하고 통상로를 확보했다. 전쟁 종식 후 한동안 베트남계 반란 진압이 필요했지만, 1887년에는 캄보디아와 남북 베트남을 합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성립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라오스 등 다른 식민지를 병합해 나갔다. (프랑스-시아므 전쟁/Franco-Siamese War영어 참조).
그러나 청불 전쟁에서 프랑스군의 실책은 프랑스 공화국의 제국주의에 큰 타격을 주었고,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널리 퍼뜨렸다. “랑선 철수”로 이미 정치가로서의 권위를 상실한 쥘 페리뿐만 아니라, 그의 후임으로 그를 보좌했던 앙리 브리송도 1885년 12월에 있었던 “통킹 논쟁”에서 신랄한 비판을 받고 단기간 내에 사임으로 몰렸다. “통킹 논쟁”에서 클레망소 등 식민지 확장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은 통킹에서의 완전 철수까지 요구했고, 의회에서 행해진 철군안의 의결은 반대 273표, 찬성 270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부결되었다. 단 몇 명만 더 찬성표를 던졌더라도 베트남은 독립을 회복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청불 전쟁의 고전은 프랑스 국내에서 식민지 확장을 주장하는 세력의 신뢰를 잃게 하였고, 마다가스카르섬 등 몇몇 점령 계획이 연기되었다. 프랑스가 전쟁을 재개한 것은 1890년경이 되어서였다.
=== 식민지 확장 ===
1885년 6월 9일에 체결된 톈진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베트남 북부를 획득하고 통상로를 확보했다. 전쟁 종식 후 한동안 베트남계 반란 진압이 필요했지만, 1887년에는 캄보디아와 남북 베트남을 합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성립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라오스 등 다른 식민지를 병합해 나갔다. (프랑스-시아므 전쟁/Franco-Siamese War영어 참조).
그러나 청불 전쟁에서 프랑스군의 실책은 프랑스 공화국의 제국주의에 큰 타격을 주었고,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널리 퍼뜨렸다. “랑선 철수”로 이미 정치가로서의 권위를 상실한 쥘 페리뿐만 아니라, 그의 후임으로 그를 보좌했던 앙리 브리송도 1885년 12월에 있었던 “통킹 논쟁”에서 신랄한 비판을 받고 단기간 내에 사임으로 몰렸다. “통킹 논쟁”에서 클레망소 등 식민지 확장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은 통킹에서의 완전 철수까지 요구했고, 의회에서 행해진 철군안의 의결은 반대 273표, 찬성 270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부결되었다. 단 몇 명만 더 찬성표를 던졌더라도 베트남은 독립을 회복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청불 전쟁의 고전은 프랑스 국내에서 식민지 확장을 주장하는 세력의 신뢰를 잃게 하였고, 마다가스카르섬 등 몇몇 점령 계획이 연기되었다. 프랑스가 전쟁을 재개한 것은 1890년경이 되어서였다.
=== 국내 정치의 혼란 ===
1885년 6월 9일에 체결된 톈진 협약으로 프랑스는 베트남 북부를 획득했지만, 청불 전쟁에서 프랑스군의 실수는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한 회의론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랑선에서의 완패'는 쥘 페리 내각의 붕괴를 초래했고, 그의 후임인 앙리 브리송도 1885년 12월 '통킹 논쟁'에서 조르주 클레망소 등 식민지 확장에 반대하는 정치인들로부터 통킹 완전 철수를 요구받는 등 신랄한 비판을 받고 단기간에 사임했다. 의회에서 열린 철군안 의결에서 반대 273표, 찬성 270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철군안은 부결되었지만, 이는 프랑스 내 식민지 확장에 대한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청불 전쟁의 고전은 프랑스의 식민지 확대 정책에 제동을 걸었고, 마다가스카르섬 점령 계획 등이 지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 군사적 한계 ===
비록 톈진 협약을 통해 프랑스가 베트남 북부를 획득했지만, 청불 전쟁에서 프랑스군의 실수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특히 ‘랑선에서의 완패’는 쥘 페리의 정치 생명을 끝냈고, 그의 후임 앙리 브리송 역시 1885년 12월 ‘통킹 논쟁’에서 조르주 클레망소 등에게 신랄한 비판을 받고 단기간에 사임했다. '통킹 논쟁'에서 식민지 확장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은 통킹 완전 철수를 요구했고, 의회에서 철군안이 근소한 차이로 부결되었다.[20]
청불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이는 프랑스 내 식민지 확대 세력의 신뢰를 떨어뜨렸다. 마다가스카르섬 점령 계획 등이 지연되었고, 프랑스가 전쟁을 재개한 것은 1890년 이후였다.
브루스 A. 엘레먼(Bruce A. Elleman)에 따르면, 중국군은 프랑스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고 무기는 현대적이었지만 훈련 수준은 열세였다. 청군은 초기 손실을 입었지만 랑선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는 등 승리도 거두었다. 그러나 1885년 4월, 청나라 조정의 경제적 우려, 프랑스의 해군 우세, 외국의 지원 부족, 러시아와 일본의 위협 등으로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20] 당시 중국의 성공을 고려할 때 평화 제안은 일부 중국인들에게 믿기 어려웠고, 최전선 지휘관 반조(Ban Zhao)는 공격을 계속하라고 간청했으며, 장지동(張之洞) 등도 전쟁 종식에 항의했다.[20]
제인 E. 엘리엇(Jane E. Elliott)은 당시 유럽 자료들이 프랑스의 손실을 보도하는 것을 꺼리고 실수를 덮어버렸다고 지적한다. 전투 기록은 프랑스를 우월하게 묘사하고 패배하지 않도록 조작되었으며, 최근 연구조차도 "프랑스가 중국을 쉽게 물리쳤다는 신화를 영속시킨다"고 비판한다.[20]
5. 1. 페리 정권 붕괴
프랑스군은 랑선 공세 이후 승승장구했지만, 1885년 3월 28일 랑선 퇴각에서 보인 추태는 전투 결과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추격에 스스로 겁을 먹은 결과였다. 패주 후에도 프랑스군은 여전히 우세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평정을 잃은 전선의 보고는 브리에르 드 릴 장군 등 후방 사령부에도 공포를 전염시켰다. 프랑스군 사령부는 본국에 패전 가능성을 통보했고, 이 전보는 프랑스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최초의 전보가 공개되자 프랑스 의회에서는 전쟁 지속 여부를 묻는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고, 이는 전쟁을 수렁으로 몰아넣은 쥘 페리 정권에 대한 불신임안 제출로 이어졌다. 결국 3월 30일, 쥘 페리는 총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다시는 총리직에 복귀하지 못했고, 정계에서도 한직으로 밀려났다. '통킹 사건'으로 불리는 이 정치적 문제는 페리의 정치 경력을 완전히 끝내버렸다.
5. 2. 정전 협상과 톈진 조약 체결
샤를 드 프레이시네가 새로운 총리가 되면서 청나라와 강화 협상을 추진했고, 영국, 미국, 독일 등의 중재로 협상이 진전되었다. 특히 영국은 총세무사 하트를 통해 제임스 캠벨을 파리에 파견하여 정전 협정을 체결하도록 했다. 청나라는 톈진 협약을 이행하고 프랑스는 박레 매복 사건의 배상 청구를 취하하는 조건이었다.1885년 6월, 이홍장과 프랑스 공사 쥘 파트노트르 사이에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베트남을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인정하고, 중국과 베트남 변경 두 곳에 통상 장소를 설치하기로 했다. 프랑스 화물은 베트남과 광서성 변경에서 관세율을 감면받고, 향후 중국 철도 건설 시 프랑스와 협상하도록 규정되었다. 전쟁 배상금은 없었지만, 청나라는 전쟁으로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입었다.
정전 협정 직전, 프랑스는 대만 전선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기륭 원정에서 프랑스군은 기륭 포위망을 돌파하고 타이페이로 진출했으며, 펑후 해전에서 승리하여 펑후 제도를 점령했다. 그러나 대만 전역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페스카도레스 전투는 중요한 승리였지만, 전쟁 결과에 영향을 주기에는 너무 늦었다. 3월 28일 에르빙거가 랑선에서 후퇴했다는 소식에 프랑스의 추가 작전은 취소되었고, 4월 평화 예비 협정으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4월 4일 평화 의정서 소식은 즉시 전달되지 않아, 4월 14일 께프(Kép)에서 마지막 교전이 벌어졌다. 프랑스군은 흥화와 추의 주요 요새를 강화하며 광서군과 운남군에 맞섰다. 군사적으로 통킹에서의 전쟁은 교착 상태로 끝났다.
4월 4일 평화 의정서에 따라 중국은 통킹에서 군대를 철수시켰고, 프랑스는 기륭과 페스카도레스를 점령했다. 쿠르베 제독은 6월 11일 마쿵 항구에 정박한 기함 ''바야르''에서 사망했다. 한편, 중국은 평화 협정을 준수하여 1885년 6월 말까지 운남군과 광서군, 흑기군 모두 통킹에서 철수했다.
5. 3. 청나라에 미친 영향
1884년 8월 23일, 마강해전에서 복건함대가 패배하면서 청나라가 양무운동을 통해 추진해 온 군사적 근대화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났다. 청불 전쟁의 교훈은 청 제국의 전근대적인 지휘 체계와 장비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주력 함대의 일부는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그 이유가 일본을 대비하기 위함이라는 청나라 지도부의 변명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비장의 해군 전력을 아낀 것이 프랑스군을 유리하게 했다.청나라 내부에서는 이 시기 서태후의 독재정치가 확립되었고, 당시 당권자를 비판하면서 주전파였던 청류파의 세력이 해체되었다.
1884년 마강해전에서 복건함대의 패배는 청나라가 추진해 온 근대화 정책(양무운동)을 후퇴시켰다. 청불 전쟁의 교훈은 모두 청 제국의 전근대적인 지휘 체계와 장비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주력 함대의 일부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를 일본에 대한 대비로 삼았다는 제국 상층부의 변명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핵심 해군 부대를 아껴 쓴 것이 프랑스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텐진 조약(톈진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전쟁 중 10억 냥 이상을 전비로 소모하고 약 2억 냥의 빚을 지게 되었다.
청불 전쟁으로 청나라의 무력함이 드러나자 영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이 중국과 그 주변 국가들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선과 중국 동북지역(만주)이 전략적 요충지로 떠올라, 청불 전쟁 이후 10년 간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일본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 중국의 보호국이었던 조선에서 갑신정변(1884년 12월)을 지원하며 세력 확장을 꾀했다. 이로 인해 일본과 청나라는 전쟁 직전까지 가는 위기 상황을 맞이했다. 이후 청나라 조정은 프랑스보다 일본을 더 큰 위협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1885년 1월, 서태후는 신하들에게 프랑스와 명예로운 평화를 맺도록 지시했고, 비밀 회담 끝에 전쟁은 종결되었다.
조선 문제로 인해 일본과 러시아의 중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중국 북부에서 일본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개입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중국 북부는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에 참전할 가능성에 위협을 느꼈고, 중국군이 육상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평화협정을 추진했다.
전쟁 내내, 이홍장은 조선 문제와 일본의 개입 위협을 이유로 북양함대를 프랑스에 대항해 투입하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사실 이홍장은 함대를 중국 북부에 정박시켜 전투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함대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5. 3. 1. 양무운동의 한계
1884년 8월 23일, 마강해전에서 복건함대가 패배하면서 청나라가 양무운동을 통해 추진해 온 군사적 근대화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났다. 청불 전쟁의 교훈은 청 제국의 전근대적인 지휘 체계와 장비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주력 함대의 일부는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그 이유가 일본을 대비하기 위함이라는 청나라 지도부의 변명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비장의 해군 전력을 아낀 것이 프랑스군을 유리하게 했다.[20]5. 3. 2. 정치적 변화
청나라 내부에서는 이 시기 서태후의 독재정치가 확립되었고, 당시 당권자를 비판하면서 주전파였던 청류파의 세력이 해체되었다.5. 3. 3. 경제적 타격
1884년 마강해전에서 복건함대의 패배는 청나라가 추진해 온 근대화 정책(양무운동)을 후퇴시켰다. 청불 전쟁의 교훈은 모두 청 제국의 전근대적인 지휘 체계와 장비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주력 함대의 일부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를 일본에 대한 대비로 삼았다는 제국 상층부의 변명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핵심 해군 부대를 아껴 쓴 것이 프랑스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텐진 조약(톈진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전쟁 중 10억 냥 이상을 전비로 소모하고 약 2억 냥의 빚을 지게 되었다.[20]
5. 3. 4. 국제적 위상 저하
청불 전쟁으로 청나라의 무력함이 드러나자 영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이 중국과 그 주변 국가들에 대한 침략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선과 중국 동북지역(만주)이 전략적 요충지로 떠올라, 청불 전쟁 이후 10년 간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일본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 중국의 보호국이었던 조선에서 갑신정변(1884년 12월)을 지원하며 세력 확장을 꾀했다. 이로 인해 일본과 청나라는 전쟁 직전까지 가는 위기 상황을 맞이했다. 이후 청나라 조정은 프랑스보다 일본을 더 큰 위협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1885년 1월, 서태후는 신하들에게 프랑스와 명예로운 평화를 맺도록 지시했고, 비밀 회담 끝에 전쟁은 종결되었다.
조선 문제로 인해 일본과 러시아의 중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중국 북부에서 일본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개입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중국 북부는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에 참전할 가능성에 위협을 느꼈고, 중국군이 육상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평화협정을 추진했다.
전쟁 내내, 이홍장은 조선 문제와 일본의 개입 위협을 이유로 북양함대를 프랑스에 대항해 투입하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사실 이홍장은 함대를 중국 북부에 정박시켜 전투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함대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5. 4. 프랑스에 미친 영향
1885년 6월 9일에 체결된 톈진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베트남 북부를 획득하고 통상로를 확보했다. 전쟁 종식 후 한동안 베트남계 반란 진압이 필요했지만, 1887년에는 캄보디아와 남북 베트남을 합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성립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라오스 등 다른 식민지를 병합해 나갔다. (프랑스-시아므 전쟁/Franco-Siamese War영어 참조).그러나 청불 전쟁에서 프랑스군의 실책은 프랑스 공화국의 제국주의에 큰 타격을 주었고,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널리 퍼뜨렸다. “랑선 철수”로 이미 정치가로서의 권위를 상실한 쥘 페리뿐만 아니라, 그의 후임으로 그를 보좌했던 앙리 브리송도 1885년 12월에 있었던 “통킹 논쟁”에서 신랄한 비판을 받고 단기간 내에 사임으로 몰렸다. “통킹 논쟁”에서 클레망소 등 식민지 확장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은 통킹에서의 완전 철수까지 요구했고, 의회에서 행해진 철군안의 의결은 반대 273표, 찬성 270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부결되었다. 단 몇 명만 더 찬성표를 던졌더라도 베트남은 독립을 회복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청불 전쟁의 고전은 프랑스 국내에서 식민지 확장을 주장하는 세력의 신뢰를 잃게 하였고, 마다가스카르섬 등 몇몇 점령 계획이 연기되었다. 프랑스가 전쟁을 재개한 것은 1890년경이 되어서였다.
5. 4. 1. 식민지 확장
1885년 6월 9일에 체결된 톈진 조약을 통해 프랑스는 베트남 북부를 획득하고 통상로를 확보했다. 전쟁 종식 후 한동안 베트남계 반란 진압이 필요했지만, 1887년에는 캄보디아와 남북 베트남을 합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성립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라오스 등 다른 식민지를 병합해 나갔다. (프랑스-시아므 전쟁/Franco-Siamese War영어 참조).그러나 청불 전쟁에서 프랑스군의 실책은 프랑스 공화국의 제국주의에 큰 타격을 주었고,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널리 퍼뜨렸다. “랑선 철수”로 이미 정치가로서의 권위를 상실한 쥘 페리뿐만 아니라, 그의 후임으로 그를 보좌했던 앙리 브리송도 1885년 12월에 있었던 “통킹 논쟁”에서 신랄한 비판을 받고 단기간 내에 사임으로 몰렸다. “통킹 논쟁”에서 클레망소 등 식민지 확장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은 통킹에서의 완전 철수까지 요구했고, 의회에서 행해진 철군안의 의결은 반대 273표, 찬성 270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부결되었다. 단 몇 명만 더 찬성표를 던졌더라도 베트남은 독립을 회복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청불 전쟁의 고전은 프랑스 국내에서 식민지 확장을 주장하는 세력의 신뢰를 잃게 하였고, 마다가스카르섬 등 몇몇 점령 계획이 연기되었다. 프랑스가 전쟁을 재개한 것은 1890년경이 되어서였다.
5. 4. 2. 국내 정치의 혼란
1885년 6월 9일에 체결된 톈진 협약으로 프랑스는 베트남 북부를 획득했지만, 청불 전쟁에서 프랑스군의 실수는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한 회의론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랑선에서의 완패'는 쥘 페리 내각의 붕괴를 초래했고, 그의 후임인 앙리 브리송도 1885년 12월 '통킹 논쟁'에서 조르주 클레망소 등 식민지 확장에 반대하는 정치인들로부터 통킹 완전 철수를 요구받는 등 신랄한 비판을 받고 단기간에 사임했다. 의회에서 열린 철군안 의결에서 반대 273표, 찬성 270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철군안은 부결되었지만, 이는 프랑스 내 식민지 확장에 대한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청불 전쟁의 고전은 프랑스의 식민지 확대 정책에 제동을 걸었고, 마다가스카르섬 점령 계획 등이 지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5. 4. 3. 군사적 한계
비록 톈진 협약을 통해 프랑스가 베트남 북부를 획득했지만, 청불 전쟁에서 프랑스군의 실수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특히 ‘랑선에서의 완패’는 쥘 페리의 정치 생명을 끝냈고, 그의 후임 앙리 브리송 역시 1885년 12월 ‘통킹 논쟁’에서 조르주 클레망소 등에게 신랄한 비판을 받고 단기간에 사임했다. '통킹 논쟁'에서 식민지 확장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은 통킹 완전 철수를 요구했고, 의회에서 철군안이 근소한 차이로 부결되었다.[20]청불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고, 이는 프랑스 내 식민지 확대 세력의 신뢰를 떨어뜨렸다. 마다가스카르섬 점령 계획 등이 지연되었고, 프랑스가 전쟁을 재개한 것은 1890년 이후였다.
브루스 A. 엘레먼(Bruce A. Elleman)에 따르면, 중국군은 프랑스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고 무기는 현대적이었지만 훈련 수준은 열세였다. 청군은 초기 손실을 입었지만 랑선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는 등 승리도 거두었다. 그러나 1885년 4월, 청나라 조정의 경제적 우려, 프랑스의 해군 우세, 외국의 지원 부족, 러시아와 일본의 위협 등으로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20] 당시 중국의 성공을 고려할 때 평화 제안은 일부 중국인들에게 믿기 어려웠고, 최전선 지휘관 반조(Ban Zhao)는 공격을 계속하라고 간청했으며, 장지동(張之洞) 등도 전쟁 종식에 항의했다.[20]
제인 E. 엘리엇(Jane E. Elliott)은 당시 유럽 자료들이 프랑스의 손실을 보도하는 것을 꺼리고 실수를 덮어버렸다고 지적한다. 전투 기록은 프랑스를 우월하게 묘사하고 패배하지 않도록 조작되었으며, 최근 연구조차도 "프랑스가 중국을 쉽게 물리쳤다는 신화를 영속시킨다"고 비판한다.[20]
6. 역사적 의의와 영향
6. 1. 베트남의 식민지화 가속화
6. 2. 동아시아 국제 질서 재편
1883년 12월, 프랑스의 타이완 진출을 묵과할 수 없었던 일본 정부는 프랑스어에 능통한 외교관 원경을 천진으로 파견했다. 원경은 프랑스 영사 리히터 뤼벨과 연락을 취하면서 사태를 살피고, 『청불사건약지』를 작성하여 일본 정부에 기륭 공략과 프랑스의 해상봉쇄 등 사건의 동정을 보고했다.[22] 1884년 10월에는 주청공사 에노모토 타케아키가 천진에서 총리아문 총재 경군왕과 회담하고, 조정 역할로 평화적 개입을 시도했지만 청나라 측의 조건이 맞지 않아 성공하지 못했다.[22]청나라 군대와 흑기군의 공격이 심해짐에 따라 프랑스 정부는 불평등 조약 개정 등의 조건을 제시하며 일본에 제휴를 타진했다. 하지만 일본은 참전에 소극적이었다. 전쟁 후반부인 1884년 12월 4일에 발생한 갑신정변을 계기로 일본 국내에서 대중 여론이 악화되어 참전론이 고조되었지만(당시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는 참전에 의욕을 보였으나, 이토 히로부미와 사이고 쥬도 등이 반대했다), 반대로 프랑스는 랑손 공세 무렵이 되자 일본의 참전에 흥미를 잃고, 사실상 무산되었다.
청불전쟁은 동아시아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서구 열강과 일본의 세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 재편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6. 3. 한국 근대사에 미친 영향
1883년 프랑스와 청나라의 충돌이 고조되면서, 일본은 프랑스어에 능통한 외교관 원경을 천진에 파견하여 사태를 주시했다.[22] 1884년 10월, 주청공사 에노모토 타케아키가 천진에서 총리아문 총재 경군왕과 회담하여 평화적 개입을 시도했으나, 청나라 측의 조건이 맞지 않아 실패했다.[22]청불전쟁은 조선의 개화파에게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날 기회를 제공했지만, 1884년 12월 4일에 발생한 갑신정변의 실패로 인해 오히려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이후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화 노력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일본 내에서는 갑신정변을 계기로 대중 여론이 악화되어 참전론이 고조되었으나, 프랑스가 랑손 공세 이후 일본의 참전에 흥미를 잃으면서 무산되었다.[22]
참조
[1]
뉴스
Named To Be Rear Admiral: Eventful and Varied Career of 'Sailor Joe' Skerrett
https://timesmachine[...]
The New York Times
1894-04-19
[2]
서적
Cambridge History of China
[3]
서적
Late Ch'ing, 1800–1911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01-18
[4]
서적
Au Tonkin
[5]
일반
[6]
서적
[7]
서적
[8]
서적
Counterinsurgency: Exposing the Myths of the New Way of War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9]
서적
Vietnamese Anticolonialism, 1885–1925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0]
서적
French Modern: Norms and Forms of the Social Environment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1]
서적
Le Tonkin: ou la France dans l'Extrême-Orient
https://archive.org/[...]
Hinrichsen
[12]
서적
Pirates et rebelles au Tonkin: nos soldats au Yen-Thé
https://books.google[...]
Hachette
[13]
서적
Goldthwaite's Geographical Magazine
https://books.google[...]
Wm. M. & J.C. Goldthwaite
[14]
서적
Decennial Reports on the Trade, Navigation, Industries, Etc., of the Ports Open to Foreign Commerce in China and Corea, and on the Condition and Development of the Treaty Port Provinces ...
https://books.google[...]
Statistical Department of the Inspectorate General of Customs
[15]
서적
Around Tonkin and Siam
https://archive.org/[...]
Chapman & Hall
[16]
서적
The Medical World
https://books.google[...]
Roy Jackson.
[17]
서적
Asian Review
https://books.google[...]
East & West
[18]
서적
The Imperial and Asiatic Quarterly Review and Oriental and Colonial Record
https://archive.org/[...]
Oriental Institute
[19]
논문
French influence overseas: The rise and fall of colonial Indochina
https://web.archive.[...]
[20]
논문
Conceptualizing the Blue Frontier: The Great Qing and the Maritime World in the Long Eighteenth Century
http://archiv.ub.uni[...]
Ruprecht-Karls-Universität Heidelberg
2013-06-28
[21]
서적
中国・韓国が死んでも教えない近現代史
徳間書店
[22]
서적
明治外交官物語:鹿鳴館の時代
吉川弘文館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