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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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첸라는 7세기 부남을 병합하여 메콩강 유역에서 캄보디아 북서부까지 영역을 확장했던 왕국이다. 600년경 질다사나 왕이 재위했으며, 이샤나바르만 1세는 616년 수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첸라는 쌈보 쁘레이꾹을 수도로 삼았으며, 파바바르만 2세와 자야바르만 1세 시기에 통일되었으나 후계자 부재로 분열되었다. 705-706년에는 해안 진랍과 내륙 진랍으로 나뉘었고, 이후 자바의 침략을 받았다. 802년 자야바르만 2세가 캄부자 제국을 건설하면서 첸라는 앙코르 왕조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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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라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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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반적인 긴 이름 | 첸라 |
일반 명칭 | 첸라 |
시대 | 고전 이후 시대 |
속국 | 푸난의 속국 |
시작 사건 | 자야바르만 2세가 차크라바르틴으로 선포됨 |
종료 사건 | 802년 |
존속 기간 | 550년–802년 |
발생 사건 | 수나라에 대사관 파견 |
발생 날짜 | 616/617년 |
사건 2 | 독립 |
날짜 2 | 627년 |
사건 3 | 육진랍-수진랍 분리 |
날짜 3 | 기원후 707년경 |
선행 국가 | 푸난 |
후행 국가 | 크메르 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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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초기 첸라: 슈레스타푸라, 삼부푸라 육진랍: 삼부푸라 수진랍: 비야다푸라 |
공용어 | 고대 크메르어 (일반) 산스크리트어 (궁정, 종교) |
종교 | 힌두교 불교 |
통화 | 토착 주화 |
정부 형태 | 만달라 왕국 |
현재 국가 |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 |
역사 | |
분열 | 육진랍, 수진랍 |
기타 정보 |
2. 역사
첸라는 초기에 부남의 속국이었으나, 점차 강대해져 7세기에는 부남을 병합하였다. 왕통은 은자 깜부와 선녀 메라를 시조로 한다고 알려졌다.[9] 수서에는 600년경 질다사나(치트라세이나 마헨드라바르만) 왕이 재위했다는 기록이 있다.[4] 첸라는 메콩강 중앙 유역에서 캄보디아 북서부까지를 영역으로 하였으며, 이사나바르만 1세는 616년 수나라에 처음으로 조공을 했다.
첸라의 수도는 현재의 삼보르 프레이 쿠크 유적으로, 왕을 알현하는 큰 회당과 2만 호 이상이 거주하는 큰 성이었으며, 국내에 30개의 다른 큰 성이 있었다고 한다. 639년 파바바르만 2세가 즉위하였고, 그의 아들 자야바르만 1세가 남부 메콩강 삼각주 지역까지 정복하며 국내를 통일했으나, 후계자가 없어 내정이 혼란스러웠다.
중국 측 사료에 따르면, 705년에서 706년 사이에 첸라는 해안 지역의 진랍과 내륙의 진랍으로 분열되었다. 해안 진랍은 메콩강 삼각주 지대에 자리 잡고 여러 작은 나라로 나뉘었고, 내륙 진랍은 메콩강 중앙 유역과 댄 렉 산지 북방에 위치하였다. 내륙 진랍은 8세기에 여러 차례 당나라에 견사를 파견했지만, 해안 진랍은 자바 세력에 점거되었다.[7]
774년경부터 자바 왕국 샤일렌드라 왕조의 침략이 시작되었고,[16] 802년경까지 그 지배하에 있었다. 이 사건은 10세기 아바스 왕조와 인도·중국·동남아시아와의 교역 실태를 기록한 아랍어 문헌 『중국과 인도의 여러 정보-두 번째 책』에 자르바주(자바)의 마하라자 왕국이 크메르 국가를 공격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17]
802년 자야바르만 2세가 국가를 다시 통일하면서 첸라 왕국은 캄부자 제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2. 1. 기원과 부남 정복
첸라는 초기에 부남의 속국이었으나, 점차 강대해져 7세기에는 부남을 병합하였다. 첸라의 왕통은 은둔자 캄부와 천상의 요정 메라를 시조로 한다고 알려져 있다.[9] 수서에는 600년경 질다사나(치트라세이나 마헨드라바르만) 왕이 재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4] 첸라는 메콩강 중앙 유역에서 캄보디아 북서부까지를 영역으로 하였으며, 다음 왕인 이사나바르만 1세는 616년 수나라에 처음으로 조공을 했다.첸라의 수도는 현재의 삼보르 프레이 쿠크 유적으로, 왕을 알현하는 큰 회당과 2만 호 이상이 거주하는 큰 성이었다. 국내에는 30개의 다른 큰 성이 있었다고 한다. 639년에는 파바바르만 2세가 즉위하였고, 그의 아들 자야바르만 1세가 남부 메콩강 삼각주 지역까지 정복하며 국내를 통일했다. 그러나 후계자가 없어 내정은 혼란스러웠다.
중국 측 사료에 따르면, 705년에서 706년 사이에 첸라는 해안 지역의 진랍과 내륙의 진랍으로 분열되었다. 해안 진랍은 메콩강 삼각주 지대에 자리 잡고 여러 작은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 내륙 진랍은 메콩강 중앙 유역, 댄 렉 산지 북방에 위치하였다. 내륙 진랍은 8세기에 여러 차례 당나라에 견사를 파견했지만, 해안 진랍은 자바 지역 세력에 점거되어 있었다.[7]
802년 자야바르만 2세가 국가를 다시 통일하면서 첸라 왕국은 캄부자 제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첸라가 푸난을 정복했다는 중국 기록 대부분은 단편적인 언급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4] 중국 수나라 역사에는 푸난 왕국의 속국이었던 첸라가 616년 또는 617년에 중국에 사절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지만, 지도자 칫라세나 마헨드라바르만 치하에서 첸라가 독립을 얻은 후 푸난을 정복했다.[4]
첸라는 푸난과 마찬가지로 인도권과 동아시아 문화권의 해상 무역로가 교차하는 전략적 위치에 있어 오랜 사회경제적, 문화적 영향을 받았으며, 남인도 팔라바 왕조와 찰루키야 왕조의 비문 체계를 채택했다.[5][6]
첸라 귀족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이들은 당그렉 산맥 남북에 위치한 지역 소국으로, 가장 오래된 석비문을 남겼는데, 여기에는 점점 더 강력해지는 정치적 지배를 시사하는 계보 기록이 담겨 있다. 최초로 알려진 왕족들은 초기 비문에 언급되어 있다. 숭트랭 지방의 발 칸텔 산스크리트어 비문에는 비라바르만 통치자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는 신성한 왕권 개념을 채택하고 힌두교의 여러 권력 개념을 구현한 신 하리하라의 개념을 사용했다. 그의 후계자들은 이러한 전통을 계속 이어받아 정치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 간의 상관관계라는 개념을 전달했다.[9]
『신당서』는 706년 직후에 이 나라가 육지 첸라(ចេនឡាដីគោក|첸라 데이 꼬옥km)와 수상 첸라(ចេនឡ아ទឹកលិច|첸라 뜩 릭km)로 분열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이름들은 북쪽과 남쪽 절반을 의미하며, 편의상 상 첸라(북쪽)와 하 첸라(남쪽)로 부를 수 있다. 8세기 후반까지 수상 첸라는 자바의 해양 제국 샤일렌드라 왕조와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 도시 국가에 의존하게 되었다. 수상 첸라의 마지막 왕은 약 790년경에 살해당한 것으로 보이며, 그 정치체는 자바 왕국에 통합되었다. 육지 첸라는 자야바르만 2세 치하에서 그대로 유지되었고, 그는 802년에 크메르 제국을 선포했다.[7]
6세기 말, 첸라는 푸난 왕국의 지역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바바바르만 1세가 독립적인 통치자였다. 첸라의 정확한 지리적 기원, 범위, 역동성, 연대기,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 그리고 단일 지도자 아래 통일된 민족이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상당한 학문적 논쟁이 있다.[8]
20세기 후반 학자들은 조르주 코데가 제시한 기존의 역사 서술 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마이클 비커리는 고대 저자들이 "첸라"라는 이름을 수많은 작은 소국에 할당하고 이들을 하나의 단일체로 묶어 더 많은 사람들을 같은 특징으로 분류하고 개별 국가 간의 차이점을 생략했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7세기에 석비문이 현저하게 증가한 이유를 설명한다.
역사가들이 많은 수의 비문 자료를 분석하기 전까지, 첸라 소국의 중심지는 라오스 짬파삭 주의 푸 카오 산 - 링가파르바타에 위치해야 한다는 생각을 뒷받침했다. 현지 왓푸 비석에는 만왕의 왕인 데바니카 왕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만, 연구자들은 이 군주를 "당그렉 족장들"과 연결짓지 않는다. 캄보디아 전설에 따르면, 캄보디아 왕들의 기원은 은둔자 캄부 스바얌부바와 천상의 요정 메라의 결합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부부 사이에서 슈루타바르만 왕이 태어났고, 그의 아들인 슈레스타바르만 왕이 뒤를 이었다. 이 왕은 왓푸로 여겨지는 슈레스타푸라라는 이름을 지었다.[9] 6세기 말 바바바르만 1세와 칫라세나(왕의 칭호: 마헨드라바르만)가 함께 푸난을 공격하여 627~649년경에 정복했다.
푸난과 첸라가 부족, 국가 또는 민족에 적용되지 않는 "모호한 개념"이라는 사실은 캄보디아의 기원 전설과 상반된다. 민속은 데바니카 왕과 같은 단일 통치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는데, "데바니카와 함께 온 사람들과 함께 그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은 번영하는 크메르 사람들의 선구자가 되었다"는 푸 카오 산의 재봉헌된 마하라자디라자 이야기와 같다.[10]
이사나바르만 1세는 푸난의 고대 영토를 병합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로 인해 오양수와 송기가 1060년에 편찬한 《신당서》에서는 그가 푸난을 정복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사나바르만의 통치 시기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616~617년 수나라 궁정에 사절을 파견한 것이다. 이 왕은 자신의 비문에서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이사나푸라에서 발견된 627년 9월 13일자 비문이고, 다른 하나는 카우노이(태국)에서 발견된 637년 5월 7일자 비문이다.
이사나바르만은 약 637년경에 통치를 끝냈고, 이후 비문에는 브하바바르만 2세라는 왕이 등장한다. 그에 대한 유일한 연대가 명시된 비문은 644년 1월 5일자 타케브 비문과 타케브 남쪽 포냐호르 비문 (655년 3월 25일 수요일)이다. 그 뒤에는 이사나바르만의 가문 출신으로 연대가 불분명한 비문에서 알 수 있는 찬드라바르만 왕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찬드라바르만의 아들이 바로 유명한 자야바르만 1세인데, 그의 가장 오래된 비문은 프레이벵 주 투올콕프라와 밧탐방 주 바셋에서 발견되었으며, 모두 657년 6월 14일자이다.
그의 통치 시대의 비문 약 19~20개가 북쪽의 왓푸에서 남쪽의 태국만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신당서》에 따르면, 진랍 왕국은 영휘 연호 이후(즉, 656년 1월 31일 이후), 이전(638/39년)에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북서 캄보디아의 여러 작은 나라들을 정복했다. 자야바르만 1세의 통치는 약 30년간 지속되었으며, 아마도 690년 이후에 끝났을 것이다. 자야바르만 1세 사후(그의 마지막으로 알려진 비문은 681/82년으로 추정됨) 왕국에 혼란이 닥쳤고, 8세기 초 왕국은 여러 작은 나라로 분열되었다.
앙코르 지역은 그의 딸인 자야데비 여왕이 다스렸는데, 그녀는 713년 4월 5일 수요일자 서쪽 바라이 비문에서 "어려운 시대"를 호소하고 있다. 당나라 역사에는 신룡 연호 이후(707년 2월 6일 이후) 진랍이 육진랍(문단 또는 폴로라고도 함)과 수진랍 두 왕국으로 나뉘어 푸난의 왕들과 초기 진랍의 왕들에 의해 통일되기 전의 무정부 상태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슈루타바르만, 슈레슈타바르만 또는 푸슈카락샤와 같은 왕들은 훨씬 후대의 앙코르 비문에서만 확인되며, 그들의 역사적 사실 여부는 의심스럽다. 육진랍은 717년 중국에 사절을 보냈고, 722~723년 중국에 대한 마이툭론의 반란을 지원했다. 750년에 중국을 방문한 또 다른 사절단은 아마도 수진랍에서 온 것일 것이다. 중국 연대기에 따르면 문단 왕의 아들이 753년 중국을 방문하여 이듬해 남조에 대한 원정 중 중국군에 합류했다.
771년 문단 사절단 파견 후 왕세자 포미가 황실에 왔고, 12월 13일 최고의 명예 칭호 중 하나인 개부의동삼사 칭호를 받았다. 799년에는 문단의 사절 리토우지도 중국 칭호를 받았다. 803/04년자 비문에는 샴부푸라의 통치자로 인드라로카 왕과 닙라텐드라데비, 자얀드라바, 셰슈타리아 세 명의 연이은 여왕이 기록되어 있다.
두 개의 비문은 자야바르만이라는 통치자를 언급하고 있는데, 첫 번째 비문은 콤퐁참 남쪽 프라탓프라스레이 출신으로 770년 4월 20일자이며, 두 번째 비문은 샴부푸라 근처 크라체 부근 로복스롯 출신으로 781년자이다.
코데스는 그를 자야바르만 이비스라고 불렀지만, 비커리가 지적했듯이 그는 앙코르 왕국의 창시자인 자야바르만 2세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자야바르만 2세는 남쪽 출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왕보다도 비야다푸라와 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바삭/라오스의 찬 낙온 비문에 따르면, 비라바르만은 치트라세나(왕족칭호 마헨드라바르만(첸라))의 아버지였으며, 치트라세나는 바바바르만 1세의 이복동생이었다. 두 왕자는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가 달랐다는 점이 분명하며, 이는 현재 태국의 시 텝 비문에서도 확인된다. 시 텝 비문은 바바바르만이 프라티비인드라바르만의 아들이자 차크라바르틴의 손자였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한편, 우본/태국의 팍 문 비문에서는 비라바르만의 아버지 이름이 사르바바우마였다고 알려준다.
이사나푸라(고고학 유적지 삼보르 프레이 쿠크)의 로방 로마스 비문에는 바바바르만, 마헨드라바르만(첸라)(치트라세나의 통치 이름), 이사나바르만의 잇따른 왕들의 신하였던 나라심하굽타가 598년 4월 13일 바바바르만 재위 시절 칼파바수데바(비슈누)의 조각상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첸라를 언급하는 가장 오래된 중국 문헌인, 위정이 서기 636년에 편찬한 『수서』와 일치한다. 수서는 7세기 초 첸라가 치트라세나와 이사나바르만에 의해 통치되었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후자의 수도는 이사나푸라였고, 그의 전임자 바바바르만 1세는 아마도 현재의 탈라 바리밧 근처에 위치한 바바푸라에 거주했을 것이다. 이사나바르만 1세 재위 시대의 비문은 그가 "바다까지 이르는 수바르나부미를 다스리는 만왕의 왕"이었다고 주장하여 첸라를 수바르나부미와 동일시한다.[15]
오래된 중국의 기록은 현재 라오스 남부에서 캄보디아 동부에 위치했던 젠라(王都는 슈레슈타푸라)를 통치한 초대 왕 슈르타바르만(435년-495년)과 2대 왕 슈레슈타바르만(495년-530년) 두 명의 왕을 언급하고 있다. 550년경에는 푸난의 속국이었으며, 약 60년 후에 독립을 이루고, 궁극적으로는 푸난을 점령하여 백성과 문화를 흡수하였다. 이때 푸난의 쇠퇴는 로마 제국과 그 이후 지중해와 중국 사이의 통상로 붕괴로 설명할 수 있다.
캄보디아 문화에 큰 영향을 준 것은 현재 캄퐁톰에 해당하는 바바푸라를 수도로 하는 푸난에서 형성되었다. 그 유산은 가장 중요한 지배자 이사나바르만 1세가 612년부터 628년에 걸쳐 푸난을 점령 완료한 것이다. 613년 그는 이 새로운 나라의 첫 수도를 현재 삼보 프레이 쿠크에 해당하는 이샤나푸라로 삼았다.
681년 자야바르만 1세의 죽음 이후 왕국에는 혼란이 일어났고, 8세기 초 무렵 왕국은 많은 작은 왕국으로 붕괴되었다. 젠라(Shambhupura)의 통치자였던 푸슈카락샤는 자신이 캄보자스의 왕임을 선포했다.
706년경 젠라는 “육로의 젠라”와 “수로의 젠라”로 분리되었다. 현재 라오스의 참파삭에 해당하는 곳이 북부의 중심이 되었고, 메콩 삼각주와 해안 지역은 남부의 일부가 되었다. 중국의 연대기에 따르면 8세기에 젠라가 육젠라와 수젠라로 분리되었다(706년-802년). 이 시기 푸슈카락샤의 아들 샴부바르만은 8세기 동안 말레이인과 자와인이 지배했던 많은 크메르 소왕국인 수젠라의 대부분을 지배했고, 육젠라를 샴부바르만의 형제 라젠드라바르만 1세가 지배하였다.
774년경부터 자바 왕국의 샤일렌드라 왕조의 침략이 시작되었고,[16] 802년경까지 그 지배하에 있었다. 이 사건은 10세기의 아바스 왕조와 인도·중국·동남아시아와의 교역 실태를 기록한 아랍어 문헌 『중국과 인도의 여러 정보-두 번째 책』에 자르바주(자바)의 마하라자의 왕국이 크메르 국가를 공격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17]
2. 2. 분열과 쇠퇴
705년에서 706년 사이, 첸라는 해안 지역의 진랍과 내륙의 진랍으로 분열되었다. 해안 진랍은 메콩강 삼각주 지대에 위치하여 여러 작은 나라로 나뉘었고, 내륙 진랍은 메콩강 중앙 유역과 댄 렉 산지 북쪽에 자리 잡았다. 내륙 진랍은 8세기에 당나라에 여러 차례 당견사를 파견했으나, 해안 진랍은 자바 세력에 점거되었다.[11]탕서(唐書)에 따르면, 신룡(神龍) 연호(707년 2월 6일 이후)가 끝난 후 첸라는 육첸라(陸真臘)와 수첸라(水真臘)로 나뉘었다. 이는 푸난(Funan)과 초기 첸라 왕들 아래 통일되기 이전의 무정부 상태로 돌아간 것을 의미한다. 수첸라는 메콩 삼각주와 연결되어 강과 그 이점을 누릴 수 있었지만, 공격에 더 취약했다는 단점이 있었다.
8세기 후반, 자바 해적의 공격으로 메콩 삼각주가 점령되었고, 결국 첸라 제국 전체가 점령되었다. 그러나 마이클 비커리(Michael Vickery)는 중국인들이 만든 수첸라와 육첸라의 구분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주장하며, 802년까지 고대 캄보디아 땅에는 하나의 거대한 국가가 아닌 여러 개의 작은 국가들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706년경 첸라는 육첸라(陆真腊중국어)와 수첸라(水真腊중국어)로 분리되었다. 북부는 현재 라오스의 참파삭에 해당하는 곳이 중심이었고, 남부는 메콩 삼각주와 해안 지역을 포함했다. 중국 연대기에 따르면 8세기에 첸라는 육첸라와 수첸라로 분리되었으며(706년-802년), 이 시기 푸슈카락샤의 아들 샴부바르만(Shambhuvarman)은 8세기 동안 말레이인과 자와인이 지배했던 많은 크메르 소왕국인 수첸라의 대부분을 지배했고, 육첸라는 샴부바르만의 형제 라젠드라바르만 1세(Rajendravarman Ier프랑스어)가 지배하였다.
774년경부터 자바 왕국 샤일렌드라 왕조의 침략이 시작되었고,[16] 802년경까지 그 지배하에 있었다. 10세기의 아바스 왕조와 인도·중국·동남아시아와의 교역 실태를 기록한 아랍어 문헌에는 자르바주(자바)의 마하라자의 왕국이 크메르 국가를 공격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17] 여기서 자르바주는 샤일렌드라, 마하라자는 인도 고대의 대왕 칭호 마하라자, 크메르는 크메르 국가를 의미하며, 샤일렌드라가 크메르 왕을 살해하고 잠시 동안 크메르 국가를 속국으로 삼았던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802년 자야바르만 2세가 국가를 다시 통일하면서 첸라는 캄부자 제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2. 3. 앙코르 왕조로의 계승
706년경 첸라는 “육로의 첸라”(陆真腊|육젠라중국어)와 “수로의 첸라”(水真腊|수젠라중국어)로 분리되었다.[16] 라오스의 참파삭이 북부 중심지였고, 메콩 삼각주와 해안 지역은 남부에 속했다. 중국 연대기에 따르면 8세기에 첸라는 육젠라와 수젠라로 분리되었는데(706년-802년), 이 시기 푸슈카락샤의 아들 샴부바르만은 8세기 동안 말레이인과 자와인이 지배했던 많은 크메르 소왕국인 수젠라의 대부분을 지배했고, 육젠라는 샴부바르만의 형제 Rajendravarman Ier|라젠드라바르만 1세프랑스어가 다스렸다.774년경부터 자바 왕국 샤일렌드라 왕조의 침략이 시작되어[16] 802년경까지 그 지배하에 있었다. 이 사건은 10세기 아바스 왕조와 인도·중국·동남아시아와의 교역 실태를 기록한 아랍어 문헌 『중국과 인도의 여러 정보-두 번째 책』에 자르바주(자바)의 마하라자 왕국이 크메르 국가를 공격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17] 여기서 자르바주는 샤일렌드라, 마하라자는 인도 고대 대왕 칭호인 마하라자, 크메르는 크메르 국가를 가리키며, 샤일렌드라가 크메르 왕을 살해하고 잠시 동안 크메르 국가를 속국으로 삼았던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8세기 동안 비문 수는 급격히 감소했다. 그러나 중국 사료를 검토한 일부 학자들은 첸라가 700년대에 내부 분열과 자바 샤일렌드라 왕조의 외부 공격으로 몰락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이들이 첸라를 장악하고 자야바르만 2세의 앙코르 왕국에 합류했다고 주장한다. 스독 각톰 비문(1053년)에 따르면, 자야바르만 2세와 그의 아들 인드라유다는 790년 참 군대를 물리치고 톤레사프 호수 북쪽으로 이동하여 앙코르에서 남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하리하랄라야 도시를 건설했다.
다른 역사학자들은 고전적인 몰락 시나리오에 반박하며, 애초에 첸라라는 통일된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고, 오히려 오랜 기간 지배권 다툼이 벌어진 지역이며, 혼란스러운 왕위 계승과 지속적인 중심지를 확립할 수 없었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고 주장한다. 역사 서술은 802년 자야바르만 2세가 크메르 제국을 건설할 때까지 이 무명의 격변 시대를 마무리한다.
3. 어원
"첸라"(Chenla) 또는 "전라"(Zhenla)는 중국 기록에 나타나는, 중국 황제에게 조공을 바친 세력의 명칭이다.[1][2] '푸난'(Funan)과 마찬가지로 "첸라" 또는 "전라"라는 명칭은 고대 크메르어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4] 민간어원설은 첸라(真臘)를 중국식 명칭을 번역한 "순수한 밀랍"으로 연결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는 중국 연대기에 언급된 지역 특산품 중 하나였다.
전라(Zhenla)는 당나라 발음으로 'Tsienliäp'으로 재구성되었고, 이는 캄보디아의 도시 씨엠립(Siem Reap)의 명칭과 음이 유사하며, 이 명칭은 종종 "평정된 시암"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시암을 정복한"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원은 명칭이 처음 사용된 지 수세기 후에 시암과 캄보디아 간의 분쟁이 발생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따라서 첸라와 씨엠립의 명칭이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마이클 비커리(Michael Vickery)는 두 명칭의 원래 의미는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사한 설명이 후대 변형된 형태인 전라(占臘)에도 적용될 수 있다. 피터 해리스(Peter Harris)에 따르면 "전(占)은 중국어로 참족을 의미하기 때문에 '참족을 정복한'이라는 의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는 또한 ''송사''에 나오는 설명을 언급했다. "송나라 경원(慶元) 연간(1195-1200)에 캄보디아가 참파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차지했다. 이 때문에 그 나라는 이름을 전라로 바꾸었다. 그러나 원나라 시대에도 전라(Zhenla)로 불렸다."
첸라(Chen La)는 ''문단(文單)''(''Muntal''로 재구성, 아마도 만달라)와 같이 다른 여러 이름으로 알려졌을 수도 있으며, 호시노 다쓰오(Tatsuo Hoshino)에 따르면 문단은 수도였다.[5]
힌두교 신왕(神王)(데바라자) 전통에 따라[3] 왕은 수호신 또는 아바타의 산스크리트어 이름을 선택하고, '…에 의해 보호받는'이라는 의미의 접미사 –varman을 붙여 마누법전(Manusmṛti)의 크샤트리아 전사 계급을 위한 '마누의 법'의 행동 강령을 따랐다.[6]
4. 사회
첸라 사회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산스크리트어 지식을 바탕으로 계층이 결정되었다. 산스크리트어는 신들의 언어로 여겨져 가치가 높았으며, 이를 배운 사람들은 관리나 왕실 관리 등 높은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1] 그러나 대부분의 평민은 산스크리트어를 배울 기회가 없어 사원과 조상신을 위해 잉여 생산물을 바치며 생계를 이어갔다.[2]
사회 계층은 있었지만, 성별에 따른 차별은 없었다. 여성은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공예에 능숙했으며, 고위 관리가 되기도 했다.[3] 이는 모계 계승 전통이 남아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4]
평민들은 사찰과 신전에서 청소, 요리, 건설 등의 노동에 동원되었고, 보상은 거의 받지 못했다. 고대 비문에는 14가지 종류의 노예가 있었는데, 이들은 빚 때문에 팔리거나 주어졌으며 도망칠 자유가 없었다.[5][6]
첸라의 경제는 자급자족 농업보다는 논농사와 인력 동원을 통해 이루어졌다.[2] 비옥한 땅은 사원에 기증되었고, 노예들이 농사를 지어 사원의 수입을 올렸다.[1] 첸라는 광범위한 관개 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며, 쌀 잉여분이 무역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7세기 초에는 무역 중심에서 농업 중심으로 경제 구조가 바뀌면서, 해안 근처의 무역 중심지는 쇠퇴하고 내륙의 농업 중심지가 성장했다.[3] 주요 항구였던 옥쩌에서는 로마,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등 여러 지역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인도 상인들의 부와 번영이 캄보디아인들이 다른 문화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데 영향을 주었음을 보여준다.
4. 1. 수도
조르주 꼬데에 따르면, 참파삭은 첸라 지배 왕조의 기원이며 왓푸는 그 정신적 중심지였다. 꼬데와 동시대 학자들은 첸라의 왕궁이 링지아보포(Ling-jia-bo-po) 또는 링가파르바타(Lingaparvata)라는 산 근처에 있었다고 밝히는 수나라의 역사 기록을 언급한다. 왓푸는 라오스의 푸카오 산 기슭에 있는 매우 인상적인 크메르 힌두 사원으로, 이로 인해 이론가들은 푸카오 산이 그 구절에서 언급된 산이며 왓푸가 언급된 사원일 것이라고 추측하게 한다.[12]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현대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클로드 자크와 마이클 비커리 저자는 모호한 묘사에 부합하는 캄보디아에 여러 언덕이 있기 때문에 푸카오 산을 '링지아보포'/링가파르바타로 식별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따라서 논쟁은 남아 있으며 첸라가 통일 국가였는지, 왓푸에 수도가 있었는지 여부는 의문스럽다. 당시의 증거나 기록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 지역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말할 수 없다. 중국 연대기는 학자들이 분석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료 중 하나이다.[12]
약 550년경 참파삭을 근거지로 삼았던 첸라 사람들은 약 600년경 이사나푸라(삼부푸라)에 수도를 건설했다.[12]
폴 펠리오에 따르면, 삼부푸라는 ចេនឡាដីគោកkm(상첸라)의 수도였고 비야다푸라는 ចេនឡាទឹកលិចkm(하첸라)의 수도였다.[13]
이사나바르만은 톤레사프호 북쪽에 있는 새로운 수도 이사나푸라(삼보르 프레이 쿡)의 창시자이다.[12]
4. 2. 종교
푸난 제국 시기에는 매장 문화와 더불어 화장도 행해졌다.[1] 힌두교와 불교는 모두 푸난의 무역망을 통해 동남아시아에 전파되었다.[2] 산스크리트어 비문, 작은 조각상 등 유물들은 푸난에 불교와 힌두교 신앙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3]6세기경 크메르어를 사용하는 민족이 푸난을 정복하고 참파 왕국(첸라)을 건국했다는 중국 기록이 있다.[4] 삼보 프레이 쿠크(이사나푸라)는 첸라의 주요 거주지이자 왕궁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 세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5] 각 지역에는 벽돌로 된 성역이나 사원이 있었고, 중심에는 링가와 유사한 것이 있었다.[6] 첸라 왕들은 주로 "-varman"이라는 산스크리트어 접미사와 함께 현지 힌두 신의 이름을 사용했다.[7] 왕들은 인도화 과정을 통해 통치를 강화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비슈누와 시바를 결합한 하리하라 조각상이 종교 시설에서 자주 묘사되었다.[8] 이는 창조와 파괴의 균형이라는 첸라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브라흐마, 인드라 등 다른 힌두 신들과 크리슈나 고바르다나, 락슈미 등도 숭배되었다. 씨엠립주의 비문은 8세기 후반 캄보디아 불교도들이 보살을 숭배했음을 보여준다.[9]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는 첸라에서 힌두교와 평화롭게 공존했다. 발견된 조각상에서 부처의 열두 이미지를 통해 불교의 두 학파가 확인되었다.[10] 이는 왕들이 종교적 견해를 강요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인도 역사가 히만추 프라바 레이는 불교가 해상 무역 네트워크 확장에 효과적인 동기가 된 반면, 브라만 힌두교는 농업 경제에 더 중점을 두었다고 설명한다.[11]
첸라 지역에는 힌두교 신들을 위한 사원과 신당이 많았다. 평민들은 종교 단지 유지를 위해 노력했으며, 토지, 물품, 노예를 기증했다. 거대한 사원 기반 시설들은 자체 토지와 사람들을 소유하며 강력한 기업체처럼 기능했다. 작은 사원들조차 시설을 갖추고 세금을 징수했다.[12] 왕들은 권력 강화 수단으로 사원을 건립했지만, 실제로는 제국으로부터 귀중한 토지와 시민들을 빼앗았을 수 있다.
그러나 사원들은 왕국을 안정시키고 힌두교 신앙을 따르는 시민들을 끌어들여 확장하는 요인이었을 수도 있다. 힌두교는 사람들이 왕의 통치를 따르는 이유가 되었고, 외국인들이 무역, 사업, 상품을 가져와 경제 효율성을 높였다.

사원과 신전 설계는 인도 북부와 중부의 굽타 제국의 영향을 받았다. 사원 단지는 벽돌과 돌을 기반으로 건설되었으며, 중앙에는 힌두교 신이나 석가모니불을 나타내는 조각상이 있었다. 중요한 사원에는 주로 쿨렌 산맥에서 채취한 사암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많은 인력, 대개 노예들이 필요했다.
벽돌로 둘러싸인 화장 매장지도 발견되었다. 이는 매장이 힌두교 관습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브라만 카스트 구성원을 숭배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13]
4. 3. 사회 계층
첸라의 사회적 지위는 크메르어나 산스크리트어 지식을 기반으로 결정되었다. 산스크리트어는 신들의 언어로 여겨져 더 가치 있게 평가되었다. 논밭에서 일하는 사람과 더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의 구분은 산스크리트어 지식 수준에 따라 결정되었다. 교육을 통해 산스크리트어를 습득한 사람은 관리나 왕실 관리 등 더 높은 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1] 그러나 산스크리트어 이름을 얻을 능력이 없는 대다수 주민은 사원과 조상신을 위해 잉여 생산물을 생산하며 생계를 유지했다.[2]이는 힌두교가 초기 캄보디아 사회에 미친 영향을 보여준다. 힌두교와 관련된 산스크리트어는 토착 크메르어보다 더 가치 있게 여겨졌다. 이는 인도화 이전 동남아시아 초기 사회가 불안정했고, 영구적인 종교나 사회 구조가 없어 외국인의 가르침에 의존했음을 보여준다.
사회 계층은 존재했지만, 성별에 따른 차별은 없었다. 여성은 2등 시민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오히려 많은 여성이 의식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공예에 특화되었으며, 고위 관리로서 높은 계급을 부여받았다.[3] 이는 최근까지 가족들이 부계 사회 대신 모계 계승을 따랐기 때문에 초기 사회의 일부 측면이 유지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4]
많은 평민은 보상 없이 사찰과 신전을 청소하고, 요리하고, 건설하는 노동자로 배정되었다. 고대 비문을 분석한 결과, 첸라에는 기원과 임무의 종류가 다른 14가지 종류의 노예가 있었다.[5] 이들은 부모의 빈곤이나 빚 때문에 매매되거나 주어졌으며, 도망칠 자유가 없었다.[6]
4. 4. 경제
1세기 말, 첸라 지역에는 힌두교 신들을 위한 사원과 신당이 많았습니다. 많은 평민들은 이러한 종교 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첸라 사람들은 토지, 물품, 노예를 기증해야 했습니다. 거대한 사원 시설들은 자체 토지와 사람들을 소유하며 강력한 기업처럼 기능했습니다. 작은 사원들조차도 시설을 갖추고 세금을 징수했습니다.[1] 왕들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러한 사원들을 건립했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구조물들이 제국으로부터 귀중한 토지와 백성들을 빼앗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원들이 징수한 세금은 지도자에게 더 많은 부를 가져다주었을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이러한 구조물들은 왕국을 안정시키고 왕이 힌두교 신앙을 따르는 더 많은 백성들을 끌어들여 확장할 수 있도록 한 요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힌두교는 사람들이 왕의 통치를 따르는 이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시설들을 통합하면 외국인들이 무역, 사업, 상품을 가져와 지역 경제 효율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첸라와 주변 지역의 부는 자급자족 농업이 아닌, 논농사와 인력 동원에서 비롯되었습니다.[2] 생산적인 토지는 사원에 기증되었고, 노예들이 그곳에서 농사를 지어 사원의 수입을 올리는 데 기여했습니다.[1] 첸라는 광범위한 관개 시스템을 유지했으며, 이를 통해 생산된 쌀 잉여분이 무역의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국제 무역은 왕국에 필수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7세기 초, 캄보디아 사회는 무역 중심에서 농업 중심으로 경제적 전환기를 맞았습니다. 푸난 시대 해안 근처의 무역 중심지는 쇠퇴하고, 내륙의 농업 중심지가 등장했습니다.[3]
주요 항구였던 옥쩌(현재 베트남) 유적에서는 로마, 그리스, 페르시아 출신의 물품과 인도 및 인근 국가의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인도의 영향력이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초기 캄보디아인들과 무역을 했던 인도 상인들이 부유하고 번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캄보디아인들이 다른 문화의 종교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5. 통치자
순서 | 국왕 | 재위 기간 | |
---|---|---|---|
1 | 슈르타바르만 | 약 550년–555년 | |
2 | 슈레슈타바르만 | 약 555년–560년 | |
3 | 비라바르만 | 약 560년–575년 | |
4 | 캄부자라자락슈미 (왕비) | 약 575년–580년 | |
5 | 바바바르만 1세 | 약 580년–600년 | |
6 | 마헨드라바르만 | 약 600년–616년 | |
7 | 이사나바르만 1세 | 약 616년–635년 | |
8 | 바바바르만 2세 | 약 639년–657년 | |
9 | 자야바르만 1세 | 약 657년–681년 | |
10 | 자야데비 (왕비) | 약 681년–713년 | |
육지와 수로로 분리 | |||
11 | Pushkaraksha|푸시카락샤프랑스어 | 약 713년–730년 | |
12 | Shambhuvarman (roi khmer)|샴부바르만프랑스어 | 약 730년–760년 | |
13 | Rajendravarman Ier|라젠드라바르만 1세프랑스어 | 약 760년–770년 | |
14 | 마히파티바르만 | 약 770년–780년 | |
15 | 자야바르만 2세 | 약 780년–802년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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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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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ไทย-กัมพูชา" เป็นเครือญาติ ไม่ใช่คู่บาดหมาง! : ขรรค์ชัย-สุจิตต์ ทอดน่องท่องเที่ย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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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チャンパーのポ・ナガル(Po-Nagar)碑文によれば784年、ヤン・ティクー(Pang TiKuh)碑文によれば787年にジャワの黒い肌の賊軍が来襲したとの記載がある。更に大越史記全書外紀巻五には767年の事件として安南都護府(現ハノイ)を崑崙闍婆の襲撃事件が記されている(崑崙はマレー系の人々、ジャワはジャワ、即ちシャイレーンドラ、若しくは占城(チャンパー(当時の南ベトナム)だと考えられている。チャンパー、ジャワのいずれであってもマレー系の人々だと考えられる)
[17]
서적
中国とインドの諸情報-第二の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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