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산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탕산시는 중화인민공화국 허베이성 동부에 위치한 지급시로, 4만 년 전부터 인류가 거주했던 지역이다. 고대에는 고죽국의 수도였으며, 1976년 7.8 규모의 탕산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주요 산업은 철강, 석탄, 도자기, 기계 등이며, 징하선 철도와 징하 고속공로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주요 관광지로는 청동릉, 지진 방지 기념비 등이 있으며, 평극과 탕산 피영극, 러팅 북 등의 전통 예술이 유명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탕산시 - 우북평군
우북평군은 연나라가 설치한 군으로, 허베이성 북부와 랴오닝성 서부를 관할했으며, 시대에 따라 북순군, 북평군으로 불리다가 어양군, 평주 등으로 통합, 변경되었다. - 허베이성의 지급시 - 청더시
청더시는 중화인민공화국 허베이성 북동부에 위치한 지급시로, 청나라 시대 피서산장이 건설되어 제2의 수도 역할을 했으며, 1994년 피서산장과 외팔묘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허베이성의 지급시 - 싱타이시
싱타이시는 3,500년 역사의 중국 허베이성 지급시로, 상나라 시대 수도, 전국시대 조나라 임시 수도였으며, 수당 시대 도자기 생산 중심지, 원명청 시대 지방 행정 단위로서 현재 화북 지역의 천연 자원 기지이자 교통 요충지이다. - 국기 - 중구 (부산광역시)
부산광역시 중구는 부산의 중심지로, 과거 왜관이 위치했으며 부산부청과 부산시청이 있었고 현재는 교통의 요지이자 다양한 관광 명소를 보유하고 있다. - 국기 - 아시아
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인구가 많은 대륙으로, 유라시아 동쪽 4/5를 차지하며, 4대 문명 중 3개의 발원지이고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발전했으며 경제 성장과 분쟁을 동시에 겪고 있다.
탕산시 - [지명]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 | |
![]() | |
![]() | |
![]() | |
위치 | 허베이성 내 탕산시 관할 구역 |
별칭 | 봉황성 (凤凰城, Feng huang cheng) |
일반 정보 | |
로마자 표기 | Tangshan |
한자 | 唐山 |
병음 | Tángshān |
웨이드-자일스 표기 | T'ang2-shan1 |
광둥어 | Tong4-saan1 |
뜻 | 당나라의 산 (다청산) |
행정 | |
국가 | 중국 |
성 | 허베이성 |
정부 소재지 | 루베이 구 |
설치 | 1938년 1월 28일 |
당 서기 | 장청중 () |
시장 | 톈궈량 () |
면적 | 13,472 km² |
도시 면적 | 3,874 km² |
인구 (2020년) | 7,717,983명 |
도시 인구 | 4,963,907명 |
도시 지역 인구 | 3,687,607명 |
인구 밀도 | 자동 계산 |
도시 지역 인구 밀도 | 자동 계산 |
GDP | CN¥ 8910억 위안 |
GDP (미국 달러) | US$ 1000억 달러 |
1인당 GDP | CN¥ 86,667 위안 |
1인당 GDP (미국 달러) | US$ 12,563 달러 |
시간대 | 중국 표준시 |
UTC 오프셋 | +8 |
우편 번호 | 063000 |
지역 번호 | 315 |
ISO 코드 | CN-HE-02 |
상징 | |
시화 | 로사 키넨시스(월계화) |
시목 | 엔주 |
웹사이트 | |
공식 웹사이트 | tangshan.gov.cn |
2. 역사
탕산시 지역은 오랜 역사를 지닌 곳으로, 은·주 시대에는 북방의 제후국인 고죽국의 수도였으며, 이후 전국 시대에는 연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진·한 시대를 거쳐 남북조 시대까지 우북평군이나 요서군 등에 속했으며, 수·당 시대에는 고구려 원정을 위한 전초 기지로 활용되기도 했다. 명나라 시대에는 이미 철광석 정련, 석탄 채굴, 도자기 생산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오늘날 도시 발전의 기초를 마련했다.
청나라 말기인 1876년, 개평진(현재의 개평구)에 탄광이 개발되면서 근대 도시로서의 성장이 본격화되었다. 1881년에는 중국 최초의 표준궤 철도인 당서철도(개평-서각장)가 부설되었고, 이후 증기 기관차, 시멘트, 위생도기 공장 등이 들어서며 중국 근대 산업의 발상지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1899년 탕산진으로 개칭되었고, 1938년 공식적으로 시(市) 제도가 시행되어 탕산시가 되었다. 1948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점령되었고, 1960년에는 주변 지역을 통합하여 성할시로 승격되었다.
1976년 7월 28일 발생한 탕산지진은 도시에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를 남긴 대참사였으나, 이후 신시가지 건설과 구시가지 재건을 통해 복구되었다. 재건된 도시 중심부에는 지진 극복을 기념하는 항진기념비와 항진기념관이 세워졌다.
2. 1. 고대 ~ 근대
탕산시 지역에는 약 4만 년 전부터 인류가 거주했던 유적이 발견되었다.[1] 은·주 시대에는 북방의 제후국인 고죽국의 수도였으며, 이 나라의 왕자였던 백이와 숙제 형제가 주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다 순직한 일화로 잘 알려져 있다.[2] 전국 시대에는 연나라의 영토였고, 진·한 시대부터 남북조 시대까지는 유주에 속하거나 우북평군, 요서군 등에 편입되었다.[2][1] 수·당 시대에는 고구려 원정을 위한 전초 기지 또는 원정 기지로 활용되었다.[2][1] 탕산(唐山)이라는 이름은 도시 중앙에 있는 다청산(大城山)에서 유래했는데, 다청산은 원래 탕산(唐山)으로 불렸다. 전설에 따르면 서기 645년,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청산에 주둔했는데, 이때 총애하던 후궁 조비(曹妃)가 병사하자 그녀를 기리기 위해 산의 이름을 당나라의 국호인 '당(唐)'을 따서 탕산으로 바꾸었고, 이후 도시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명나라 시대에는 이미 철광석 정련, 석탄 채굴, 도자기 생산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오늘날 도시 발전의 기초를 마련했다.[2][1] 청나라 시대에는 직례성 영평부와 준화직례주의 관할 하에 있었다.[1]1876년, 양무 운동을 추진하던 청 정부는 개평진(현재의 개평구)에 관독상변 기업인 개평광무국을 설치하여 탄광을 개발하고, 이를 위한 도시로 교둔진(喬屯鎭)을 두었다.[2][1] 1881년에는 중국이 자력으로 건설한 최초의 표준궤 철도인 당서철도(唐胥鐵道, 개평-서각장(현재의 풍남구))를 부설했으며, 이는 후에 천진-임유 구간을 잇는 진유철도(津楡鐵道)로 확장되었다.[2][1] 또한 중국 최초의 증기 기관차 공장, 시멘트 공장, 위생도기 공장 등이 이곳에 세워지면서 중국 근대 산업의 발상지 중 하나가 되었다.[2][1] 1899년, 교둔진은 마을 북쪽에 있는 다청산(당시 이름은 탕산)의 이름을 따서 탕산진(唐山鎭)으로 개칭되었고, 난주(현재의 난주시)의 관할 하에 있다가 1938년 시 제도가 시행되면서 공식적으로 탕산시가 설립되었다.[2][1]
2. 2.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시대 동안 탕산의 행정 체계는 이전 청나라의 체제를 따랐다. 1929년, 직례성은 허베이성으로 개명되었다. 1938년에는 시 제도가 시행되어 정식으로 탕산시가 설립되었다. 1939년 1월 28일, 동허베이 자치 정부는 탕산의 특별한 경제적, 정치적 지위를 고려하여 탕산시를 설립했으며, 처음에는 "탕산 시정부"라고 불렸다가 나중에 "탕산 시사무소"로 변경되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한 후, 베이징에 있던 중국 국민당은 일본으로부터 탕산에 대한 정치적 통제권을 넘겨받아 행정감찰사무소를 설치했다. 1946년 4월, 중국 공산당 허베이성 위원회 제132차 회의에서 탕산시 설립이 결정되었고, 같은 해 5월 5일, 공산당 측의 탕산 시정부가 설립되었다. 1948년 12월, 국공 내전 중 탕산은 중국 공산당 군에 의해 점령되었다.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탕산시는 12개 구역을 관할하는 성급 행정구역으로 유지되었다. 1955년 3월, 탕산시 제1차 인민대표대회 제2차 회의에서 탕산시 인민정부를 탕산시 인민위원회로 변경하기로 결정했지만, 행정 구역은 변경되지 않았다. 1958년 4월 28일, 국무원은 탕산 지구의 설립을 승인했고, 같은 해 8월 29일에는 탕산 특파원 사무소를 창리현에서 탕산시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59년 6월 3일 탕산시를 세계에 개방되는 45개 도시 중 하나로 지정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6월 8일, 탕산 특파원 사무소와 탕산 인민위원회를 탕산 인민위원회로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1960년 4월 2일, 국무원은 탕산 지구의 폐지를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이전에 탕산 지구가 관할하던 친황다오시, 첸안, 창리, 라오팅, 바오디, 위톈, 지셴 현, 쭝화, 루안셴 현, 펑룬 현(이전 구역), 바이지좡 농장 등을 탕산시에 편입시켜 성할시로 재편했다.
그러나 1961년 5월 23일, 국무원은 탕산 지구의 재설립을 승인하여 탕산 지구와 탕산시는 다시 분리되었고, 탕산은 특별 행정구역으로 변경되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인 1968년 1월 6일, 탕산 지역 혁명위원회의 부속 기관으로 탕산시 혁명위원회가 설립되었다. 1978년 3월 11일, 탕산은 다시 성급 행정구역으로 변경되었다. 1982년 10월, 탕산시 제7차 인민대표대회에서 탕산시 혁명위원회를 폐지하고 탕산시 인민정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국무원은 1983년 3월 3일 이 변경을 승인했으며, 그 이후 시-현 관할 시스템을 시행했다. 1983년 5월 13일, 허베이성 인민정부는 탕산 지역의 시민 행정 사무소 폐지를 발표했으며, 이는 1983년 5월 15일에 운영을 중단했다. 1984년 12월 15일, 국무원은 탕산시를 13개의 전국 “비교적 큰” 도시 중 하나로 승인했다.
2. 3. 1976년 탕산 대지진
1976년 7월 28일 오전 3시 42분, 탕산시는 모멘트 규모 7.8(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7.5)의 직하형 지진인 탕산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전까지 대지진 기록이 없었고 건축물은 간단한 벽돌 구조가 주류였기 때문에, 시내뿐만 아니라 주변 건축물도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공식 발표에 따르면 시내에서 14만 8,000명, 전체 24만 명(다른 보고에서는 25만 5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하나, 실제 사망자 수는 이보다 2~3배 많은 75만 명에 달할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이는 현대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지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지진으로 인해 도시의 대부분을 재건해야 했다. 광산이 있어 도시를 완전히 포기하고 이전할 수는 없었기에, 시 영역을 넓혀 인접한 곳에 이재민을 위한 주거 단지와 이전된 공장 등으로 이루어진 신시가지를 건설하고, 이후 구시가지의 재건에 착수했다. 재건된 구시가지 중심부에는 지진 극복을 기념하는 항진기념비와 항진기념관이 세워졌다. 이 지진은 2010년 영화 ''대지진''에 묘사되기도 했다.
2. 4. 현대
1976년 7월 28일 오전 3시 42분, 탕산은 규모 7.8(중국 공식 보고서는 7.5)의 강력한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지진은 현대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지진 중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공식 사망자 수는 25만 5천 명에 달했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실제 사망자 수가 이보다 2~3배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진으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어 대대적인 재건이 필요했다. 이 참사는 2010년 영화 ''대지진''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재건된 구시가지 중심부에는 지진 희생자를 기리는 항진 기념비와 항진 기념관이 세워졌다.1990년대에는 탕산시 고신기술개발구가 건설되어 첨단 산업 발전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2007년에는 탕산 현대 장비 제조 공업구가 설립되었고, 파나소닉, 고베제강소, 아이신 등 다수의 외국 기업들이 진출했다. 이후에도 스미토모중기계, 스미토모 건설 기계, 소믹이시카와, 닛피콜라겐과 같은 일본 기업들의 투자가 이어졌다.
2022년 6월 10일, 탕산 시내의 한 식당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충격적인 집단 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식사 중이던 여성 일행에게 한 남성이 접근하여 성추행을 시도했고, 이를 거부하자 남성은 여성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가게 밖에 있던 남성 여러 명이 가세하여 여성을 가게 밖으로 끌고 나가 잔인하게 폭행했다. 이 과정이 담긴 영상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퍼지면서 중국 국내외에서 큰 비난 여론이 일었다.[28][29] 피해 여성 중 2명은 심각한 부상을 입고 집중 치료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사건 이후 가해 남성들과 지역 경찰 간의 유착 의혹이 제기되었고, 허베이성 당국은 관련 경찰 간부 5명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탕산시는 중국 공산당 정부가 수여하는 '전국 문명 도시' 자격을 박탈당했다.[28]
3. 지리
탕산시는 허베이성 동부에 위치한다. 남쪽으로는 보하이만(渤海灣)에 접하고 있으며, 해안선 길이는 196.5km에 달한다. 북쪽으로는 옌산산맥(燕山山脈)과 만리장성을 경계로 청더시와 접한다. 동쪽으로는 항만 도시인 친황다오시와 롼허(灤河)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톈진시와 인접해 있다. 톈진 도심까지의 거리는 약 100km, 베이징시까지는 약 150km이다.[2][3]
탕산시는 화베이 평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시역 대부분은 롼허 수계에 속하고 롼허는 탕산시에서 가장 큰 강이다.[3] 지리적 범위는 남북으로 약 160km, 동서로 약 120km에 이르며, 총 면적은 13472km2이다.[4]
환발해 경제권(또는 보하이 경제권)의 중심부에 위치한 탕산시는 화북 지역과 중국 동북 지역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중요한 산업 도시이다.[2][3] 또한, 베이징시와 공동으로 건설한 징탕항과 심해항인 당산 차오페이뎬항을 보유한 주요 항구 도시이기도 하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