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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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의 화가로, 멕시코 현실주의, 초현실주의, 상징주의와 멕시코 토속 문화를 결합한 독창적인 화풍을 창시했다. 1907년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태어났으며, 소아마비와 교통사고로 인한 신체적 고통을 예술로 승화하여 여성의 경험과 정체성을 탐구했다. 공산주의를 지지하며 레프 트로츠키와 교류하고,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하는 등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대표작으로는 《두 명의 프리다》, 《가시 목걸이와 벌새를 든 자화상》 등이 있으며, 말년에는 건강 악화로 고통받다 1954년 사망했다. 그녀는 20세기 미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페미니즘 미술의 선구자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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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리다 칼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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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마그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이 칼데론 |
| 다른 이름 | 마그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이 칼데론 프리다 칼로 |
| 출생일 | 1907년 7월 6일 |
| 출생지 | 멕시코시티 코요아칸 |
| 사망일 | 1954년 7월 13일 |
| 사망지 | 멕시코시티 코요아칸 |
| 국적 | 멕시코 |
| 로마자 표기 | Frida Kahlo |
| 스페인어 표기 | 프리다 칼로 데 리베라 |
| 스페인어 이름 | 마그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이 칼데론 |
| 활동 분야 | 회화 |
| 훈련 | 독학 |
| 사조 | 초현실주의 마술적 사실주의 나이브 |
| 대표작 | 자화상 |
| 주요 소장 미술관 |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 뉴욕주버펄로 Fundación Proa, 부에노스아이레스 프리다 칼로 미술관, 코요아칸 Harry Ransom Humanities Research Center, 텍사스주오스틴 Madison Museum of Contemporary Art, 위스콘신주매디슨 Museo Dolores Olmedo, 멕시코시티 Museo de Arte Moderno, Instituto Nacional de Bellas Artes, 멕시코시티 뉴욕 현대 미술관 피닉스 미술관, 피닉스 샌프란시스코 현대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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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관계 | |
| 아버지 | 기예르모 칼로 |
| 자매 | 크리스티나 칼로 |
| 결혼 | |
| 배우자 | 디에고 리베라 (1929년–1939년, 이혼) 디에고 리베라 (1940년 재혼) |
| 배우자 (스페인어) | 디에고 리베라 |
| 기타 | |
| 작품 목록 | 목록 |
2. 생애
멕시코의 코요아칸 출신 화가로, 독일계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가 독일어로 '평화'를 뜻하는 '프리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83] 그녀는 멕시코의 현실주의, 초현실주의, 상징주의와 토착 문화를 결합한 독창적인 화풍으로 유명하다.
칼로의 삶은 어린 시절 겪은 소아마비와 1925년의 심각한 교통 사고로 인한 평생의 신체적 고통으로 점철되었다. 특히 교통사고 후 병상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화가로서의 삶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의 작품에는 이러한 고통과 경험이 깊이 반영되어 있으며, 대표작으로 《프리다와 유산》, 《헨리포드 병원》 등이 있다.
1929년 멕시코의 유명 벽화가이자 혁명가인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했으며, 이후 이혼과 재결합을 겪었다. 또한 활발한 공산주의 지지자로서 멕시코로 망명한 레프 트로츠키와 교류하기도 했다.[83]
오랜 투병 생활 끝에 1954년 7월 13일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과 가족
마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카흘로 이 칼데론은 1907년 7월 6일 멕시코시티 외곽 코요아칸에서 태어났다.[15] 칼로는 가족의 집인 라 카사 아술(푸른 집)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했지만, 공식 출생 기록에는 근처 외할머니 집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라 카사 아술은 1904년 그녀의 부모가 지은 집으로, 현재 프리다 칼로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아버지는 독일계 사진작가 기예르모 칼로(1871-1941)이고, 어머니는 오악사카 출신의 원주민 아버지와 스페인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마틸데 칼데론 이 곤살레스(1876-1932)였다.[16] 아버지 기예르모는 원래 독일 바덴바덴 출신으로, 본명은 빌헬름 칼로였으나 멕시코로 이주한 후 스페인식 이름인 기예르모로 바꾸었다. 그는 사고로 인한 간질 발작 때문에 대학 공부를 중단하고 1891년 멕시코로 이민 왔다. 칼로는 아버지가 유대인이라고 주장했으며,[17] 1936년 나치의 뉘른베르크 법 제정 이후 자신의 혈통을 강조하는 작품 '<나의 조부모, 부모 그리고 나(가계도)>'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6년 독일 계보학자들의 연구 결과, 아버지는 루터교 신자였던 것으로 밝혀졌다.[18] '프리다'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준 것으로, 독일어로 '평화'를 의미한다.[83]
프리다에게는 마틸데, 아드리아나, 크리스티나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고, 아버지의 첫 결혼에서 태어난 이부자매 마리아 루이사와 마가리타도 있었다.

칼로는 어린 시절 집안 분위기를 "매우, 매우 슬펐다"고 묘사했다. 부모는 자주 아팠고 부부 사이도 좋지 않았으며, 특히 어머니 마틸데와의 관계가 매우 긴장되었다. 칼로는 어머니를 "친절하고, 활동적이고, 지능적이지만, 계산적이고, 잔인하고, 광신적인 종교인"으로 묘사했다. 어머니는 출산 후유증으로 허약해져, 칼로는 유년 시절 주로 유모의 손에 자랐고 어머니의 애정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1910년 멕시코 혁명이 발발하면서 아버지의 사진 사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전 정부로부터 일을 의뢰받았으나 정권이 바뀌고 오랜 내전으로 개인 고객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가족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1913년 6세 때 소아마비(급성 회색 뇌염)에 걸려 약 9개월간 침대에 누워 지냈고, 오른쪽 다리가 왼쪽보다 가늘고 약해지는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이 때문에 몇 달 동안 또래들과 떨어져 지내야 했고, 이후 학교에서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칼로는 장애를 감추기 위해 바지나 멕시코 전통 의상인 롱스커트를 즐겨 입었다.

이 경험은 그녀를 내성적으로 만들었지만, 같은 장애(간질)를 가진 아버지 기예르모와의 유대감을 깊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칼로는 아버지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놀랍게 만들었다"며, 문학, 자연, 철학을 가르치고 이해심을 보여주었다고 회상했다. 아버지는 딸의 회복을 돕기 위해 당시 여자아이에게는 부적절하다고 여겨졌던 축구, 수영 등 다양한 운동을 시켰고, 재활을 겸해 하이킹에 자주 데려가 수채화와 사진 기술을 가르쳤다. 칼로는 아버지의 사진 작업을 도우며 사진 수정, 현상, 채색 등을 배웠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화가로서의 칼로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51년 제작한 '아버지의 초상'에는 아버지가 아돌프 히틀러에 맞섰다는 내용을 포함하여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소아마비 때문에 학교에 늦게 입학하여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함께 코요아칸의 지역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녔고, 5, 6학년은 가정 교육을 받았다. 이후 아버지의 뜻에 따라 독일 학교에 다녔으나 불복종으로 퇴학당하고 잠시 직업 학교에 다녔다.
1922년, 멕시코 최고 명문 교육기관인 국립 예비학교에 입학하여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당시 학교는 막 여학생 입학을 허용하기 시작했으며, 전체 학생 2,000명 중 여학생은 칼로를 포함해 35명뿐이었다. 칼로는 학업 성적이 우수했고, 독서를 즐겼으며, 학교에서 장려한 인디헤니스모(토착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아 멕시코 문화, 정치, 사회 정의 문제에 깊이 몰두했다.
학교에서 아홉 명의 동급생과 함께 '카추차스(Cachuchas)'라는 비공식 그룹을 결성했다. 이들은 보수적인 것에 반항하며 장난을 치고, 연극을 상연하며 철학과 러시아 고전을 토론하는 등 지적 활동에 열중했다. 그룹 멤버 중에는 훗날 작가 옥타비오 파스, 미겔 N. 리라, 작곡가 안헬 살라스, 언론인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 등 멕시코 지식인 엘리트가 된 인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칼로는 그룹 리더였던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와 첫사랑에 빠져 미래를 함께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었다.[8][20]
이 시기부터 칼로는 자신이 멕시코 혁명이 시작된 해인 1910년 7월 7일에 태어났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자신을 '혁명의 딸'로 여기고 싶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평생 이 출생 연도를 사용했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을 즐겼던 칼로는 1925년경까지 아버지의 친구이자 판화가, 광고 디자이너인 페르난도 페르난데스에게 그림과 스케치를 배웠고, 몇몇 작품이 남아 있다. 1925년에는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잠시 속기사로 일한 후, 페르난데스의 유료 판화 수습생이 되었다. 페르난데스는 그녀의 재능에 감명받았지만, 칼로 자신은 당시 예술가를 직업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1925년 9월 17일, 18세의 칼로는 남자친구 아리아스와 함께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들이 탄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칼로는 사경을 헤맬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버스의 철제 손잡이가 그녀의 몸을 관통하여 골반뼈를 부수고 복부와 자궁을 꿰뚫었다. 그녀는 이 부상을 "칼이 황소를 찌르는 방식"이라고 묘사했다.[20]
이 사고로 칼로는 척추 세 군데 골절, 오른쪽 다리 열한 군데 골절, 오른쪽 발 골절 및 탈구, 쇄골 골절, 어깨 탈구 등 전신에 걸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20][21]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했고, 퇴원 후에도 집에서 석고 붕대를 한 채 몇 달 동안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다.[22] 척추뼈 세 개가 탈구된 것이 뒤늦게 발견되어 3개월 이상 침상 안정을 더 해야 했다. 이 사고는 의사가 되려던 칼로의 꿈을 앗아갔고, 평생 동안 지속될 고통과 질병, 그리고 수많은 수술의 원인이 되었다. 친구 안드레스 에네스트로사는 칼로가 "죽어가며 살았다"고 표현했다.
침대에 누워 지내는 동안의 극심한 고통과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8] 어머니는 침대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된 이젤을 마련해주었고, 아버지는 자신의 유화 물감을 빌려주었다. 칼로는 자신을 관찰하며 그릴 수 있도록 이젤 위에 거울을 설치했다.[8] 그림은 칼로에게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질문을 탐구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녀는 "나는 너무 자주 혼자이기에 나 자신을 그린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도 하고."라고 말했다.[8] 사고와 고립된 회복 기간은 그녀가 "세상을 보이는 그대로, 더 이상 아무것도 없이 그리기 시작하려는" 열망을 갖게 했다고 훗날 밝혔다.
이 시기(1926-1928년)에 그린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자신이나 자매들, 학교 친구들의 초상화였다. 이 그림들은 산드로 보티첼리나 브론지노 같은 르네상스 거장들, 그리고 신즉물주의, 큐비즘 같은 당대 아방가르드 운동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사고는 연인이었던 알레한드로와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했고, 이로 인한 고독감 또한 그녀를 그림에 더욱 몰두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2. 2. 화가로서의 시작과 디에고 리베라와의 만남
1925년 9월 17일, 당시 18세였던 프리다 칼로는 통학하던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큰 교통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척추와 오른쪽 다리, 자궁 등을 크게 다쳐 3개월 동안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으며, 평생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다.[8] 침상 생활 동안 칼로는 고통과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8] 어머니는 침대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된 이젤을 마련해주었고, 아버지는 자신의 유화 물감을 빌려주었다. 칼로는 자신을 관찰하기 위해 이젤 위에 거울을 설치했다.[8] 그림은 칼로에게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질문을 탐구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녀는 "나는 종종 혼자이기 때문에 나 자신을 그린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다."라고 설명했다.[8] 이 시기 그녀의 초기 작품들은 주로 자신이나 자매, 학교 친구들의 초상화였다.사고로 인해 이전 연인과의 관계가 끝나면서 느낀 고독감은 칼로를 더욱 그림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된 1928년, 칼로는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모임에 참여하며 멕시코 공산당에 입당했다. 이 모임에서 사진작가 티나 모도티의 소개로 당시 유명 벽화 화가였던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게 되었다. 칼로는 리베라의 예술에 감탄했고, 투병 시절 그린 자신의 작품들을 보여주며 조언을 구했다. 리베라는 칼로의 작품에 담긴 강렬한 표현력과 독창적인 감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워졌고, 1929년 8월 21일, 21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했다. 하지만 칼로의 부모는 나이 차이와 리베라의 외모 등을 이유로 결혼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결혼 후 두 사람은 멕시코시티 중심부의 아파트에서 잠시 살다가, 리베라가 쿠에르나바카의 코르테스 궁전 벽화 작업을 맡게 되면서 쿠에르나바카로 이사했다. 쿠에르나바카에서의 생활은 칼로에게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주었으며, 그녀는 점차 멕시코 민중 예술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의 화풍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는 멕시코 민족(라 라사)과의 일체감과 멕시코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이어져 이후 그녀 예술 세계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한편, 리베라는 1929년 멕시코 공산당으로부터 당원 자격을 박탈당했고, 칼로 역시 이때 함께 탈당했다.
리베라와의 관계는 칼로의 삶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결혼 생활 동안 겪게 되는 여러 사건들, 특히 반복되는 유산의 고통은 그녀의 작품 세계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고통을 탐구하는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2. 3. 미국에서의 활동과 국제적 명성
1930년 말, 남편 디에고 리베라가 쿠에르나바카에서 벽화 작업을 마친 후, 부부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리베라는 샌프란시스코 증권거래소 런천 클럽과 캘리포니아 미술학교의 벽화를 의뢰받아 작업했다.[83] 이 기간 동안 칼로와 리베라는 샌프란시스코의 유력한 미술품 수집가와 후원자들로부터 환대와 칭송을 받으며 주목받았다.[83] 헝가리계 미국인 사진작가 니콜라스 무레이와의 오랜 관계도 이 시기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83]
1931년 여름 잠시 멕시코로 돌아왔다가, 가을에는 리베라의 현대미술관(MoMA) 회고전 개막을 위해 뉴욕으로 갔다. 1932년 4월, 부부는 리베라가 디트로이트 미술관 벽화 제작을 의뢰받으면서 디트로이트로 이주했다.[83] 이때 칼로는 언론과의 소통에서 더욱 대담해져,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기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도시에 도착해서는 자신이 리베라보다 더 위대한 예술가라고 말하기도 했다.[83] 1933년 2월 2일 ''디트로이트 뉴스'' 인터뷰에서 그녀는 "물론 그[리베라]는 어린아이에게 잘하는 거지만, 진정한 거장은 바로 나야."라고 말했다.[23]
디트로이트에서 보낸 1년은 칼로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방문은 즐겼지만, 식민주의적이라고 여긴 미국 사회의 여러 측면과 "지루하다"고 생각한 대부분의 미국인들을 싫어했다.[83] 그녀는 헨리와 에드셀 포드와 같은 자본가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고, 디트로이트의 많은 호텔들이 유대인 투숙객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에 분노했다.[83]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미국의 모든 산업 및 기계 발전에 매우 관심이 있지만", "여기 부자들에게 약간의 분노를 느낀다. 먹을 것이 없고 잘 곳이 없는 가장 끔찍한 빈곤 속에 있는 수천 명의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그것이다. 부자들이 밤낮으로 파티를 하는 동안 수천 수천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무섭다."라고 썼다.[83] 디트로이트에서 칼로의 시간은 임신으로 인해 더욱 복잡해졌다. 그녀의 의사는 낙태를 수행하는 데 동의했지만, 사용된 약물은 효과가 없었다.[83] 칼로는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해 매우 모호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이미 리베라와의 결혼 생활 초기에 낙태를 한 적이 있었다.[83] 낙태 실패 후, 그녀는 마지못해 임신을 계속하기로 동의했지만, 7월에 유산하여 심각한 출혈을 일으켜 2주 동안 입원해야 했다.[83]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멕시코에서 수술 합병증으로 사망했다.[83]
칼로와 리베라는 1933년 3월 록펠러 센터 벽화 제작 의뢰를 받은 리베라를 따라 뉴욕으로 돌아왔다.[83] 이 기간 동안 그녀는 ''내 드레스는 거기에 걸려 있다''(1933) 한 점만 작업했다.[83] 그녀는 또한 미국 언론과 추가 인터뷰를 했다.[83] 5월, 리베라는 록펠러 센터 프로젝트에서 해고되었고, 대신 뉴워커스 스쿨의 벽화 제작을 의뢰받았다.[83][83] 리베라는 미국 체류를 계속하고 싶어했지만, 칼로는 향수병에 시달렸고, 1933년 12월 벽화 공개 후 곧 멕시코로 돌아갔다.[83]
미국에서의 경험은 칼로의 예술 세계에 영향을 미쳤고, 이후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발판이 되었다. 1938년 11월 1일부터 15일까지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뉴욕 미술계에 데뷔했다. 조지아 오키프, 이사무 노구치 등 저명한 미국 예술가들이 개막식에 참석했으며, 그림의 약 절반이 판매되었다.
2. 4. 멕시코 귀국과 예술적 성숙
1939년 디에고 리베라와 이혼한 후, 칼로는 멕시코로 돌아와 코요아칸의 생가인 '푸른 집'(Casa Azul|카사 아술es)에 정착하여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이듬해인 1940년, 그녀는 리베라와 재결합했다.[83] '푸른 집'은 현재 멕시코 시티에서 프리다 칼로 박물관으로 운영되며 작품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이 시기 칼로는 멕시코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멕시코 민중 예술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녀는 특히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복잡한 내면과 경험을 표현했으며, 멕시코 문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두 명의 프리다》(1939)와 《가시 목걸이와 벌새를 든 자화상》(1940) 등이 있다.
2. 5. 말년과 죽음
1940년대 후반부터 프리다 칼로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하여 병원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83]1950년에는 멕시코시티의 ABC 병원에서 척추에 새로운 골이식 수술을 받았으나, 심각한 감염이 발생하여 여러 차례 추가 수술을 받아야 했다.[83][8][27] 같은 해, 오른쪽 다리의 혈액 순환 문제로 발가락이 괴사하여 절단 수술을 받기도 했다.[83]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는 대부분 푸른 집(La Casa Azul)에 머물렀으며, 이동을 위해서는 휠체어와 목발을 사용해야 했다.[83][8][27] 그해 11월경부터는 침대 위에 특수 제작된 이젤을 설치하고 누워서 그림 작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83]
1951년 이후로는 극심한 통증 때문에 진통제 없이는 생활하기 어려워졌고, 그녀의 특징이었던 정교한 기법을 사용한 작품 제작도 힘들어졌다.[83]
건강이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도 칼로는 정치적 신념에 따른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48년 멕시코 공산당에 다시 가입했으며,[83] 핵무기 반대 운동인 스톡홀름 호소 서명 운동에 참여하는 등 평화를 위한 활동에 힘썼다.[83]
1953년 8월, 오른쪽 다리에 괴저가 발생하여 결국 무릎 아래까지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83][8][27] 이 사건 이후 칼로는 극심한 우울증과 불안감에 시달렸고, 진통제 의존도는 더욱 심해졌다.[83][8][27] 남편 디에고 리베라가 또다시 불륜을 저지르자, 약물 과다 복용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83][8][27] 1954년 2월에 쓴 일기에는 당시의 고통과 심경이 담겨 있다. "6개월 전에 다리를 절단했고, 수 세기 동안 고통을 받았으며, 몇 번이나 정신을 잃을 뻔했다. 계속 자살하고 싶다. 디에고가 나를 막고 있다. 그는 내가 그리워할 것이라는 헛된 생각 때문이다. ... 하지만 내 인생에서 이렇게 고통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잠시 기다리겠다..."[83][8][27]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던 1954년 7월 2일, 칼로는 폐렴으로 인해 대부분 침대에 누워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리베라와 함께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과테말라 침공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하는 등 마지막까지 정치적 목소리를 냈다.[83][8][27] 그녀는 죽음을 예감한 듯 주변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일기장에 해골과 천사를 그렸다.[83][8][27]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은 검은 천사였는데, 전기 작가 헤이든 헤레라는 이를 죽음의 천사로 해석했다.[83][8][27] 그림에는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도 함께 적혀 있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출구를 기다린다 –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 – 프리다" (Espero Alegre la Salida – y Espero no Volver jamáses).[83][8][27]
시위에 참여한 이후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고, 7월 12일 밤에는 고열에 시달리며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83][8][27] 결국 1954년 7월 13일 아침 6시경, 간호사에 의해 푸른 집 침대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83][8][27] 향년 47세였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색전증으로 기록되었으나, 부검은 이루어지지 않았다.[83][8][27]
하지만 칼로의 죽음을 둘러싸고 자살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전기 작가 헤이든 헤레라는 칼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주장했다.[27][83][8] 그녀의 약물 복용을 관리하던 간호사는 칼로가 사망 당일 밤, 처방된 최대 복용량인 7알을 훨씬 넘는 11알의 진통제를 복용했다고 증언했다.[83][8][27] 또한, 칼로가 죽기 전날 리베라에게 한 달 이상 남은 결혼기념일 선물을 미리 건넸다는 점과[83][8][27] 일기에서 반복적으로 자살을 언급했던 점 등이 자살설의 근거로 제시된다.[83]
7월 13일 저녁, 칼로의 시신은 벨라스아르테스 궁전으로 옮겨져 공산당 깃발 아래 안치되었고, 수많은 조문객이 그녀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다.[83][8][27] 다음 날, 시신은 돌로레스 시민묘지(Panteón Civil de Dolores)로 옮겨져 가까운 친척과 친구들이 참석한 가운데 비공식 장례식이 치러졌고, 그녀의 유언에 따라 화장되었다.[83][8][27] 리베라는 칼로의 죽음을 "내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날"이라고 표현했으며, 3년 후인 1957년 세상을 떠났다.[83][8][27]
칼로의 유골은 콜럼버스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항아리에 담겨 그녀가 평생을 보낸 푸른 집에 안치되었다.[83][8][27] 1958년 7월 12일, 푸른 집은 칼로가 남긴 작품과 민속 예술품 컬렉션, 사용했던 미술 도구, 편지, 일기 등을 전시하는 프리다 칼로 박물관으로 문을 열어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83]
3. 예술 세계
프리다 칼로의 예술 세계는 멕시코 혁명 이후 발전한 민족주의 운동인 멕시카니다드(Mexicanidad)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27] 그녀는 멕시코 고유의 원주민 문화에 가치를 부여하며 식민 시대의 문화적 열등감에 저항하고자 했던 시대정신 속에서 멕시코 민중을 위한 예술을 추구했다. 유럽 중심의 미술 교육 배경을 드러내기보다 스스로를 "자기 교육을 받은 순진한 예술가"로 표현하며 멕시코 정체성을 강조했다.
칼로는 멕시코의 현실주의, 초현실주의, 상징주의와 토착 문화를 결합한 독창적인 화풍을 발전시켰다. 당대 멕시코 미술계를 주도했던 디에고 리베라 등 벽화가들과 교류하며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이념을 공유했지만, 거대한 공공 벽화 대신 주로 작은 크기의 자화상에 집중했다.[27] 그녀의 작품은 교통사고 후유증과 병고, 디에고 리베라와의 복잡한 관계, 유산의 아픔 등 개인적인 고통과 경험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멕시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사회적 문제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특히 1930년대 칼로의 작품에서는 레타블로(retablos)라 불리는 멕시코 민중 종교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재난이나 질병에서 구원받은 것에 감사하며 봉헌하는 소박한 그림인 레타블로의 상징적이고 서사적인 표현 방식은 칼로가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응축하여 전달하는 데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칼로는 약 2,000점의 레타블로를 수집하기도 했다. 또한 멕시코 민중의 삶을 그린 에르메네질도 부스토스, 사회 풍자적인 판화를 남긴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 등 자국 예술가뿐 아니라, 히에로니무스 보쉬, 피터르 브뤼헐과 같은 유럽 거장들의 작품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여성의 삶과 고통을 다룬 시인 로사리오 카스테야노스의 작품 역시 칼로의 예술 세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후반부터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1940년대에는 멕시코 내에서도 중요한 예술가로 인정받아 여러 상을 수상하고 문화 기관의 회원으로 활동했다.[61] 또한 미술학교 '라 에스메랄다(La Esmeralda)'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62][63][67]
3. 1. 주요 작품 경향
멕시코 혁명 이후 발전한 낭만적 민족주의 운동인 멕시카니다드(Mexicanidad)는 프리다 칼로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27] 멕시카니다드 운동은 식민지 시대에 형성된 문화적 열등감에 저항하며 멕시코 고유의 원주민 문화에 가치를 부여하려 했다. 칼로는 이러한 시대정신 속에서 멕시코 국민을 위한 그림을 그리고자 했으며, 유럽 중심의 엘리트 미술 교육 배경을 감추고 스스로를 "자기 교육을 받은 순진한 예술가"로 포지셔닝하기도 했다.칼로가 활동을 시작한 1920년대 멕시코 미술계는 벽화가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디에고 리베라,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등은 사회주의와 멕시코 민족주의를 주제로 거대한 공공 벽화를 제작했지만, 칼로는 주로 작은 크기의 자화상 작업에 집중했다.[27] 그녀는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삶, 특히 교통사고와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상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디에고 리베라와의 복잡한 관계 등을 솔직하게 담아냈다. 자화상을 그리는 이유에 대해 칼로는 미술평론가 안토니오 로드리게스에게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고, 나 자신을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나 자신을 그립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자화상의 특징으로는 고독을 반영하는 듯한 황량한 공간 모티브를 즐겨 사용하는 것이다.
특히 1930년대 칼로의 작품은 레타블로(retablos)라 불리는 멕시코 민중 예술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준다. 레타블로는 재난이나 질병에서 보호해 준 성인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봉헌된 엽서 크기의 소박한 종교화로,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상징적인 이미지와 강렬한 색채로 사건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특징이 있다. 칼로는 약 2,000점의 레타블로를 수집했으며, 이 형식은 그녀가 작품 속에서 상징과 서사, 우의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또한 멕시코 민중의 삶을 그린 에르메네질도 부스토스나 사회 풍자적인 작품을 남긴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와 같은 자국 예술가들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칼로의 작품은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독특한 스타일 때문에 종종 초현실주의와 연관되기도 했다. 실제로 초현실주의 운동의 창시자인 앙드레 브르통은 칼로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고 교류하기도 했으나, 칼로 자신은 특정 예술 사조에 얽매이기보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칼로의 작품에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상징들이 많다. '뿌리' 이미지는 땅에 묶인 자신의 정체성, 개인적 성장과 동시에 속박의 의미를 내포하며, 과거의 기억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을 상징한다. '머리카락'은 성장과 여성성의 상징이지만, ''자른 머리카락을 한 자화상''에서는 남성 정장을 입고 머리카락을 잘라냄으로써 디에고 리베라에 대한 분노와 멕시코의 가부장적 사회(마치스모)에 대한 저항을 표현하기도 한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평생 수술과 병원 생활을 반복했던 경험은 '의학적 이미지'로 작품에 자주 나타난다. 피 흘리는 모습, 열린 상처 등은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유산의 경험과 같은 정신적 고통, 죄책감 등을 드러내는 장치가 되었다.
칼로는 자신의 작품에 아즈텍 신화와 멕시코 민속 신앙의 상징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멕시코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탐구했다. 원숭이, 해골, 피, 심장 등의 이미지는 코아틀리쿠에, 케찰코아틀, 쇼틀 등 아즈텍 신화의 신들을 연상시키며, 삶과 죽음, 전근대와 근대, 멕시코와 유럽, 남성과 여성 등 이원론적인 주제를 다루는 데 활용되었다. 또한 멕시코 민속 설화 속 비극적 여성 인물인 라요로나와 라 말린체의 이미지를 작품에 투영하여 여성으로서 겪는 고통과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헨리 포드 병원''(1932)에서 유산 후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의 모습은 자녀를 살해한 비극적 여성 라요로나의 모습과 겹쳐진다. 이 그림은 전통적으로 칼로의 실패한 임신에 대한 슬픔과 고통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되었지만, 그림 속 상징과 칼로의 실제 모성관을 고려하면, 멕시코 사회에서 자녀를 갖지 않기로 선택한 여성의 비전통적이고 금기시되는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칼로는 자신의 몸을 주요 소재로 삼아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냈다. 상처 입고 부서진 몸, 어린아이의 모습, 전통 테우아나 의상이나 남성 정장을 입은 모습 등을 통해 여성에게 부여된 사회적 역할에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유산, 출산, 남장 등 당시로서는 비전통적이고 금기시되었던 여성의 경험과 신체를 솔직하게 묘사함으로써 기존의 성 역할 규범에 도전하고 여성의 주체성을 드러냈다. 이러한 시도는 여성의 신체와 성에 대한 사회적 금기를 깨뜨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녀의 남편이었던 디에고 리베라는 칼로를 "여성 특유의, 또는 여성에게 보편적인 주제를, 가식 없는 솔직함과 냉철한 엄격함으로 그린, 미술사상 최초의 여성이다"라고 평가했다.
칼로의 작품은 단순히 개인적인 경험의 기록을 넘어, 멕시코 사회의 성별, 인종, 계급 문제와 정체성에 대한 복잡한 질문을 던진다. 역사가 리자 베이크웰은 칼로가 멕시코 혁명 이데올로기가 가져온 갈등, 즉 "멕시코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 현대적이면서도 콜럼버스 이전의; 젊으면서도 늙은; 반가톨릭이면서도 가톨릭인; 서구적이면서도 신세계적인; 발전하면서도 저개발된; 독립적이면서도 식민지화된; 메스티소이면서도 스페인인도 인디언도 아닌" 것과 같은 정체성의 복잡성을 인식했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칼로의 작품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평가절하되거나 정치적 함의가 간과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여성 주체성, 문화적 정체성, 사회 비판적 메시지 등 다층적인 의미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미술사학자 조앤 보르사는 칼로의 작품에 대한 비판적 수용이 "자신의 위치, 유산, 사회적 조건을 조사하는 데 관련된 정치적 측면을 너무 자주 부인하거나 과소평가해 왔습니다... 비판적 반응은 칼로의 개인적인 것을 재구성하는 것을 계속해서 간과하고, 그녀의 성, 성적 차이, 주변성, 문화적 정체성, 여성 주관성, 정치 및 권력에 대한 질문을 무시하거나 최소화하고 있습니다."라고 지적했다.
3. 2. 대표작
프리다 칼로는 생애 동안 2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으며, 그중 상당수는 자화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겪은 사건들, 특히 고통과 역경을 작품의 주요 소재로 삼았다. 자화상을 자주 그린 이유에 대해 칼로는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고, 나 자신을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나 자신을 그립니다."라고 말했다.[18] 그녀의 작품은 멕시코의 전통 문화, 현실주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요소가 결합된 독창적인 화풍을 보여준다.-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 (1931): 디에고 리베라와의 결혼(1929) 이후 초기에 그린 작품으로, 결혼 사진을 바탕으로 한 2인 초상화이다. 칼로의 초기 작품 경향과 리베라와의 복잡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 '''헨리 포드 병원''' (1932): 1930년 첫 유산 이후 1932년 디트로이트에서 겪은 두 번째 유산의 고통을 그린 작품이다.[32] 칼로는 병상에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과 함께 달팽이(느린 유산 과정), 골반뼈(사고로 인한 손상), 태아, 난초 등을 붉은 끈으로 연결하여 표현했다. 이 작품은 여성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과 출산 및 유산 경험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멕시코 민담 속 아이를 잃고 슬퍼하는 여인 라요로나의 이미지를 차용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사회의 금기를 깨는 시도로 평가받는다.
- '''멕시코와 미합중국 국경의 자화상''' (1932): 남편 디에고 리베라를 따라 미국에 머물던 시기에 그린 작품이다. 그림 속 칼로는 멕시코 국기를 들고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채 멕시코와 미국, 두 세계의 경계에 서 있다. 한쪽에는 아즈텍 유적과 토착 식물 등 멕시코의 전통적인 모습이, 다른 한쪽에는 포드 공장과 마천루 등 미국의 산업화된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해 칼로는 양국 간의 문화적 차이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 '''레온 트로츠키에게 헌정하는 자화상''' (1937): 멕시코로 망명한 러시아 혁명가 레프 트로츠키와의 짧은 관계를 기념하며 그린 작품이다. 칼로는 전통 의상을 입고 편지를 든 자신의 모습을 커튼 사이에 그렸으며, 이 작품을 트로츠키의 생일이자 러시아 혁명 기념일에 선물했다.[40] 이 작품은 트로츠키를 지지했던 초현실주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의 주목을 받아 칼로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41]
- '''두 명의 프리다''' (1939): 디에고 리베라와의 이혼(1939) 직후 그린 작품으로, 칼로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다.[52] 그림에는 두 명의 칼로가 나란히 앉아 있다. 한 명은 전통 테우아나 의상을 입고 리베라의 작은 초상화를 손에 쥔 채 심장이 온전한 모습이지만, 다른 한 명은 유럽식 흰 드레스를 입고 심장이 드러난 채 동맥이 끊어져 피를 흘리고 있다. 두 인물은 서로 손을 잡고 있으며, 동맥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이혼으로 인한 고통과 정체성의 분열, 멕시코 전통과 유럽 문화 사이의 갈등 등 칼로의 복잡한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가시 목걸이와 벌새를 든 자화상''' (1940): 리베라와의 재혼(1940) 이후 그린 자화상이다. 칼로는 가시나무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는데, 가시는 목을 찔러 피를 흘리게 한다. 목걸이에는 죽은 벌새가 매달려 있는데, 벌새는 멕시코 민속에서 행운과 사랑의 부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깨 위에는 불운을 상징하는 검은 고양이와 칼로의 분신으로 해석되는 원숭이가 앉아 있다. 이러한 상징들을 통해 칼로는 사랑과 고통,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자신의 내면세계를 강렬하게 표현했다.
- '''《부러진 기둥》''' (1944): 척추 수술 실패 후 극심한 고통 속에서 그린 작품이다. 칼로는 코르셋을 착용한 나체의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몸 중앙에는 부서진 이오니아식 기둥이 척추를 대신하고 있다. 온몸에는 못이 박혀 있어 육체적 고통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배경은 황량한 풍경으로 처리되어 고독과 절망감을 더한다. 이 작품은 사고 후유증과 계속되는 수술로 인한 칼로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이다.
- '''상처 입은 사슴''' (1946): 자신의 얼굴을 한 사슴이 숲 속에서 여러 발의 화살을 맞고 피를 흘리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는 칼로가 겪고 있는 육체적 고통과 운명적인 슬픔을 상징한다. 배경의 마른 나뭇가지들과 멀리 보이는 폭풍우 치는 바다는 절망적인 상황을 암시하지만, 사슴의 표정은 고통 속에서도 담담함을 잃지 않는다. 이 작품 역시 칼로의 신체적, 정신적 상처를 동물에 비유하여 표현한 대표적인 예이다.
이 외에도 칼로는 《짧은 머리의 자화상》, 《물에 비친 모습》, 《희망 없이》(1945), 《희망의 나무, 굳건히 서라》(1946), 말년의 정치적 신념을 담은 《마르크스주의가 병든 자에게 건강을 줄 것이다》(약 1954) 등 자신의 삶과 내면을 탐구하는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그녀의 작품은 여성의 신체와 경험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멕시카니다드와 같은 멕시코의 문화적 정체성을 탐구하며, 개인적인 고통을 보편적인 인간 경험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4. 정치, 사회 활동
프리다 칼로는 활발한 공산주의 지지자였다.[83] 그녀는 10월 혁명의 주역이며 제4인터내셔널의 지도자였던 레프 트로츠키와 교류했으며,[83] 멕시코로 망명한 트로츠키와의 관계는 그녀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미국의 자본주의 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5. 유산과 영향
테이트 모던은 프리다 칼로를 "20세기 가장 중요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평가하며,[28] 미술사학자 엘리자베스 베이크웰(Elizabeth Bakewell) 역시 칼로가 "멕시코에서 가장 중요한 20세기 인물 중 한 명"이라고 언급했다. 칼로의 예술가로서의 명성은 그녀의 생애 후반에 이르러서야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고, 사후에 더욱 커졌다. 생전에는 주로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이자 국제적인 문화 엘리트들 사이에서 독특한 인물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1970년대 후반, 페미니즘 학자들이 미술사에서 여성과 비서구권 예술가들이 소외된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고, 치카노 운동이 칼로를 자신들의 상징적인 인물로 내세우면서 그녀는 점차 더 많은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29] 멕시코에서는 1976년 테레사 델 콘데와 1977년 라켈 티볼(Raquel Tibol)이 각각 칼로에 관한 첫 책들을 출판했다. 1977년에는 그녀의 그림 '희망의 나무는 굳건히 서 있다'(1944)가 소더비 경매에서 1.9만달러에 낙찰되며 칼로 작품 중 처음으로 경매에서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 이러한 관심 증가는 1978년 멕시코시티의 벨라스아르테스 궁전과 시카고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칼로의 첫 회고전으로 이어졌다.
멕시코 외부에서 칼로의 삶과 예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1982년 런던의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피터 울렌과 로라 멀베이가 기획한 칼로의 그림과 티나 모도티의 사진 전시회로, 이 전시는 스웨덴, 독일, 미국, 멕시코를 순회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둘째는 1983년 미술사학자 하이든 헤레라가 출판한 전기 '프리다: 프리다 칼로의 전기'가 국제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다.[30]
1984년, 멕시코 정부는 칼로의 작품을 국가 문화유산의 일부로 선포하고 해외 반출을 금지했다.[31] 이로 인해 그녀의 그림은 국제 경매 시장에 거의 나오지 않으며, 대규모 회고전도 드물게 열린다.[3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 가치는 계속 상승하여, 1990년 '나와 디에고'(Diego and I)가 소더비 경매에서 143만달러에 낙찰되어 라틴 아메리카 예술가 최초로 100만 달러를 돌파했다. 2006년에는 '뿌리'(Roots, 1943)가 560만달러에,[32] 2016년에는 '숲 속의 두 누드'(Two Nudes in a Forest, 1939)가 800만달러에 팔리며 기록을 경신했다.[33]
칼로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프리다 매니아"(Fridamania)라는 용어가 생겨날 정도로 뜨거워졌다. 그녀는 "가장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그녀의 얼굴 이미지는 체 게바라나 밥 말리처럼 자주 사용되고 비슷한 상징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녀의 삶과 예술은 다양한 상품 제작에 영감을 주었고, 독특한 외모는 패션계에서 끊임없이 차용되고 있다.[34][35] 2002년에는 줄리 테이머 감독, 살마 헤이엑 주연의 할리우드 전기 영화 '프리다'가 개봉되어 전 세계적으로 5600만달러의 수익을 올리고 아카데미상 6개 부문 후보에 올라 분장상과 음악상을 수상했다.[36][37] 2017년에는 월트 디즈니 픽처스-픽사 애니메이션 '코코'에 나탈리아 코르도바-버클리가 목소리를 연기한 칼로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했다.[38]
칼로의 대중적 인기는 그녀의 삶 이야기, 특히 고통과 비극으로 점철된 측면에 대한 매혹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된다. 그녀는 페미니스트, LGBTQ 커뮤니티, 치카노와 같은 여러 소수자 집단과 정치 운동의 아이콘이 되었다. 미술사학자 오리아나 배들리는 칼로가 사회 규범에 순응하지 않는 "문화적 소수의 원형"이 되었으며, "희생자이자 불구자, 학대받은 사람"인 동시에 "맞서 싸우는 생존자"로 여겨진다고 설명했다. 에드워드 설리반(Edward Sullivan)은 많은 사람들이 칼로를 영웅으로 여기는 이유가 "자신의 목소리와 대중적 개성을 찾기 위한 투쟁을 칼로에게서 확인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비평가 존 버거는 칼로의 인기가 "고통의 공유가 21세기 사회에서 존엄과 희망을 되찾는 필수적인 전제 조건 중 하나"라는 사실과 관련 있다고 보았다. MoMA의 전 수석 큐레이터였던 커크 벌니도는 칼로의 사후 성공이 "그녀가 오늘날의 감성에 어떻게 들어맞는지"와 관련이 있다고 지적하며, 그녀의 자기 탐구, 정체성 재창조, 자기 연출 등이 신디 셔먼, 키키 스미스, 마돈나와 같은 현대 예술가 및 대중문화 아이콘들의 관심사와 일치한다고 분석했다.[19]
그러나 칼로의 사후 인기와 이미지의 상업화는 비판적인 시각도 낳았다. 많은 학자와 문화 평론가들은 그녀의 삶의 여러 측면이 신화화되었을 뿐 아니라, 전기적인 드라마가 예술 자체를 가리고 작품에 대한 단순한 해석을 유도한다고 지적한다. 즉, 그녀의 작품을 삶의 사건들을 단순히 반영하는 것으로 축소시킨다는 것이다. 저널리스트 스테파니 멘시머(Stephanie Mencimer)는 칼로가 "모든 가능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대의를 위한 포스터 걸"처럼 소비되면서, 그녀의 복잡하고 결함 있는 인간적 면모가 생략되고 왜곡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예술가보다 예술가의 삶에 더 초점을 맞추는 현상이 칼로의 역사적 위치에 대한 이해를 저해하고 작품 속의 깊은 의미를 가린다고 우려했다.[35] 배들리는 칼로 현상을 빈센트 반 고흐의 고난에 찬 삶에 대한 관심과 비교하면서도, 대부분 사람이 반 고흐를 그림과 연결 짓는 반면 칼로는 그녀 자신의 이미지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남성 예술가와 여성 예술가가 다르게 인식되는 방식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피터 울렌 역시 칼로에 대한 컬트적 추종 현상이 실비아 플라스의 경우처럼 복잡하고 모순적인 예술 세계가 단순화된 삶의 이야기 뒤에 가려지는 결과를 낳는다고 비교했다.
멕시코 정부는 칼로의 작품을 국가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으며, 그녀가 태어나고 생을 마감한 '푸른 집'(La Casa Azul)은 현재 프리다 칼로 박물관으로 운영되어 그녀의 예술 세계와 삶의 흔적을 기리고 있다.
6. 한국과의 관계
2015년 세종문화회관 미술관과 소마미술관에서 프리다 칼로의 작품 전시회가 열렸다.[83] 2016년에는 예술의전당에서 프리다 칼로와 그녀의 남편이었던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이 함께 전시되었으며, 디에고 리베라 작품을 비롯해 총 150여 점이 소개되었다.[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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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비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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