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의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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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유의 북벌은 촉한의 장군 강유가 240년부터 262년까지 조위를 공격하기 위해 주도한 일련의 군사 작전을 의미한다. 제갈량이 죽은 후 촉한의 군사적 후계자가 된 강유는 북벌을 통해 조위를 정벌하려 했으나, 여러 차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북벌은 촉한의 국력 소모를 초래했고, 내부 갈등을 심화시켰으며, 결국 263년 위나라의 침공으로 촉한이 멸망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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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의 북벌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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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분쟁 | 강유의 북벌 |
일부 | 삼국 시대 (중국) |
날짜 | 240년–262년 |
장소 | 중국 북서부 (주로 현대의 간쑤성 및 산시성) |
결과 | 조위의 승리, 촉한의 퇴각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촉한 |
지원 세력 1 | 저 및 강 부족 |
교전국 2 | 조위 |
지휘관 | |
촉한 지휘관 | 강유 |
조위 지휘관 | 곽회 |
2. 배경
227년, 중국은 멸망한 한나라의 영토를 각자 통일하려는 목적을 가진 조위, 촉한, 동오의 세 경쟁 정권으로 분열되었다.[1] 228년부터 234년까지 촉한의 재상이자 섭정이었던 제갈량은 다섯 차례의 북벌을 이끌어 위를 공격했지만, 각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전반적인 결과는 교착 상태였다.[1] 234년 제갈량이 다섯 번째 북벌 중에 병으로 사망하자,[1] 그의 뒤를 이어 촉한의 섭정이 된 장완과 비의는 제갈량의 대(對) 위(魏) 강경 외교 정책을 중단하고 국내 정책과 내부 개발에 더 집중했다.[1] 240년까지 촉한과 위 사이에는 6년간의 비교적 평화로운 기간이 있었는데, 이때 촉한의 장군 강유가 제갈량의 유지를 받들어 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1]
2. 1. 제갈량의 북벌과 그 이후
234년 촉나라의 승상이던 제갈량이 죽은 뒤 강유가 그 군사적 후계자를 맡으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249년 사마의의 쿠데타로 조상의 일당이 처형당하자 조상의 친족 하후현의 숙부 하후패가 옹주에서 군사 3000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옹주 자사 곽회에게 패배하자 촉나라로 망명했고, 강유는 이를 환영해 북벌을 준비한다.227년, 중국은 멸망한 한나라의 영토를 각자 통일하려는 목적을 가진 세 개의 경쟁 정권, 즉 조위, 촉한, 동오로 분열되었다.[1] 228년부터 234년까지 촉한의 재상이자 섭정이었던 제갈량은 다섯 차례의 북벌을 이끌어 위를 공격했지만, 각 원정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전반적인 결과는 교착 상태였다.[1] 제갈량은 234년 다섯 번째 북벌 중에 병으로 사망했다.[1] 제갈량 사후, 그의 뒤를 이어 촉한의 섭정이 된 장완과 비의는 그의 대(對) 위(魏) 강경 외교 정책을 중단하고 국내 정책과 내부 개발에 더 집중했다.[1] 240년까지 촉한과 위 사이에는 6년간의 비교적 평화로운 기간이 있었는데, 이때 촉한의 장군 강유가 제갈량의 유산을 따르고 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1]
2. 2. 강유의 등장과 북벌의 재개
234년 촉나라의 승상이던 제갈량이 죽은 뒤, 강유가 그의 군사적 후계자가 되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1] 249년 사마의의 쿠데타로 조상 일당이 처형당하자, 조상의 친족 하후현의 숙부 하후패가 옹주에서 군사 3000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옹주 자사 곽회에게 패배하자 촉나라로 망명했고, 강유는 이를 환영하며 북벌을 준비한다.[1]제갈량 사후, 그의 뒤를 이어 촉한의 섭정이 된 장완과 비의는 제갈량의 대(對) 위(魏) 강경 외교 정책을 중단하고 국내 정책과 내부 개발에 더 집중했다.[2] 240년까지 촉한과 위 사이에는 6년간 비교적 평화로운 기간이 있었는데, 이때 촉한의 장군 강유가 제갈량의 유지를 받들어 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2]
3. 강유의 북벌 (240년 ~ 262년)
240년부터 262년까지 강유는 위나라를 상대로 여러 차례 북벌을 감행했다.
강유의 북벌 연표[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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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적인 기간 | 지역 | 사건 |
240 | 농서, 감숙성 | 제1차 북벌: 강유는 농서군을 공격했으나 곽회에게 격퇴당했다. 곽회는 또한 미당 아래의 강족을 격파하고 항복시켰다. |
247 | 감숙성 및 청해성 | 제2차 북벌: 강족은 농서, 안정, 금성, 서평 군에서 위나라 통치에 반란을 일으켰다. 강유는 촉나라 군대를 이끌고 강족 반란군을 지원했다. 곽회와 하후패는 강유를 격퇴하고 강족 반란을 진압했다. |
248 | 감숙성, 청해성 및 내몽골 자치구 | 제3차 북벌: 강유는 촉나라 군대를 이끌고 지오대를 지원하고 요화를 성중산에 남겨 지키게 했다. 곽회가 요화를 공격하자 강유는 요화를 구하기 위해 되돌아와 지오대와 합류하지 못했다. |
249년 2월 6일 – 3월 1일 | 하후패는 고평릉의 변 이후 촉나라로 투항했다. | |
249년 9월 – 11월 | 감숙성, 섬서성 및 사천성 | 제4차 북벌: 강유는 옹주를 공격하고 구산에 두 개의 요새를 건설했다. 진태, 서지 및 등애는 구산에 있는 두 개의 촉나라 요새를 점령했다. 강유는 후퇴하는 척하며 요화를 보내 백수에서 등애를 공격하고 그를 분산시켰다. 등애는 강유가 실제로 도성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군대를 보내 도성을 강화했다. 강유는 어쩔 수 없이 후퇴했다. |
250 | 청해성 | 제5차 북벌: 강유는 서평군을 공격했으나 점령에 실패하고 후퇴했다. |
253년 2월 16일 – 3월 17일 | 성도, 사천성 | 비의는 위나라 투항자인 곽수에게 암살당했다. |
253년 6월 14일 – 9월 9일 | 합비, 안휘성 | 합비 전투: 장특은 제갈각의 공격으로부터 합비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
동남 감숙성 | 제6차 북벌: 강유는 적도를 포위했다. 사마사는 곽회와 진태에게 강유를 격퇴하라고 명령했다. 강유는 군량이 다 떨어지자 군대를 철수시켰다. | |
254년 7월 2일 – 31일 | 동남 감숙성 | 제7차 북벌: 강유는 농서군을 공격했다. 이건이 투항하여 적도를 촉나라에 항복시켰다. 상우현 전투: 장니와 서지가 전투에서 전사했다. 촉나라 군대는 적도, 합관, 임도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촉나라 영토로 이주했다. |
255년 9월 18일 – 11월 11일 | 동남 감숙성 | 제8차 북벌: 적도 전투 |
256년 8월 8일 – 9월 6일 | 동남 감숙성 | 제9차 북벌: 등애는 강유가 이끄는 침략을 격퇴했다. |
257년 6월 – 258년 3/4월 | 수현, 안휘성 | 제갈탄의 난: 제갈탄은 동오의 지원을 받아 수춘에서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결국 위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
감숙성 및 섬서성 | 제10차 북벌: 강유는 만리장성 근처 위나라 주둔지를 공격했다. 사마망과 등애는 망수에 있는 강유를 포위했지만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다. 강유는 제갈탄의 난 실패 소식을 듣고 후퇴했다. | |
262년 10월 30일 – 11월 28일 | 동남 감숙성 | 제11차 북벌: 등애는 후하현에서 강유를 격파했다. 강유는 타중으로 후퇴했다. |
- 247년: 강족이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키자, 강유는 촉군을 이끌고 강족 반란군을 지원했다. 곽회와 하후패는 강유를 격퇴하고 강족 반란을 진압했다.[3]
- 248년: 곽회는 강족 반란군을 다시 격파하고, 강유는 요화를 성중산에 남겨 요새를 건설하게 했다. 곽회는 요화를 공격했고, 강유는 요화를 구하기 위해 돌아왔다.[7][8][9]
- 249년: 고평릉의 변 이후 하후패가 촉나라에 투항했다. 강유는 옹주를 공격하여 욱산에 두 요새를 건설했으나, 곽회, 진태, 서질, 등애에게 격퇴당했다. 강유는 요화를 보내 등애를 공격했으나, 등애는 강유의 계략을 간파하고 도성을 강화하여 강유는 후퇴했다.[10][11][12][13][14][15][16][17][18][19]
- 253년: 비의가 암살당하고, 강유는 적도를 포위했다. 사마사는 곽회와 진태에게 강유를 격퇴하라고 명령했고, 강유는 군량이 떨어져 철수했다.[22][23][24][25]
- 254년: 강유는 농서군을 공격하여 적도, 합관, 임도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촉나라 영토로 이주시켰다.[26][27][28]
- 255년: 강유는 다시 위나라를 공격했으나, 장익은 반대했다. 적도 전투에서 강유는 왕경을 격파하고 디다오를 포위했지만, 진태와 등애의 반격으로 후퇴했다.[29][30][31][32][33][34][35][36][37][38][39][40][41][42][43][44][45][46][47][48][49][50][51][52]
- 256년: 등애는 강유의 공격을 예측하고 방어선을 구축했다. 강유는 기산, 동정을 공격했으나 등애에게 격퇴당했다. 강유는 상규를 공격하려 했으나 단곡에서 등애에게 대패했다. 이 패배로 촉은 큰 손실을 입었고, 강유는 삭직되었다.[53][54][55][56][57]
- 257년 ~ 258년: 제갈탄의 난을 틈타 강유는 만리장성 근처 위나라 주둔지를 공격했으나, 사마망과 등애에게 저지당했다. 강유는 제갈탄의 난 실패 소식을 듣고 후퇴했다. 이후 강유는 다시 대장군에 복귀했다.[58][59][60][61][62]
- 262년: 요화는 강유의 북벌을 반대했지만, 강유는 북벌을 강행했다. 강유는 타오양현을 점령했으나, 후허현 전투에서 등애에게 패배하고 탑중으로 후퇴했다.[64][65][66]
잦은 북벌로 인해 촉나라 백성들은 전쟁에 지쳐 있었고, 교주는 "초국론"을 통해 강유의 호전적인 행동을 비판했다.[63]
3. 1. 제1차 북벌 (240년)
240년, 강유는 촉나라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가 통치하는 농서군을 공격했다.[1] 이에 위나라 장수 곽회는 군대를 이끌고 적을 공격하여 강족이 통치하는 영토로 몰아냈다.[1] 강유는 군대를 철수하고 촉나라로 돌아갔다.[1] 그동안 곽회는 미당(迷當)이 이끄는 강족을 공격하여 격파했다.[1] 그는 또한 3,000명 이상의 흉노 부족의 항복을 받아 관중 지역(현재의 섬서성)으로 이주했다.[1]
3. 2. 제2차 북벌 (247년)
247년, 강족은 어하(餓何), 소아(燒戈), 蛾遮塞|아차새중국어 등을 필두로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농서군(현재의 딩시, 간쑤성 일대), 남안(南安; 현재의 우산현, 간쑤성 일대), 금성군(현재의 란저우, 간쑤성 일대) 및 서평군(현재의 시닝, 칭하이성 일대) 등 네 개의 군에서 반란을 시작하여, 이 지역의 여러 도시와 마을을 공격하고 촉군에게 지원을 요청했다.[3]양주의 유력한 두 부족장인 백호문(白虎文)과 지무대(治無戴)도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이에 호응했다. 강유가 촉군을 이끌고 양주로 진입하여 강족 반란군을 지원하자, 백호문과 지무대는 강유에게 항복했다.[4]
위 황실은 하후패에게 군대를 이끌고 측면을 방어하도록 명령했다. 곽회와 그의 군대가 적도(狄道; 현재의 린타오현, 간쑤성 일대)에 나타나자, 그의 참모들은 침입한 촉군을 상대하기 전에 먼저 부한현(枹罕縣; 현재의 린샤현, 간쑤성)을 공격하여 강족을 평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곽회는 강유가 하후패의 위치를 공격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하후패를 지원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다. 그의 예상대로, 강유는 도수 서쪽에서 하후패를 공격했지만, 곽회와 그의 증원군이 나타나자 후퇴했다. 곽회는 이어서 강족 반란군을 공격하여 어하와 소아를 죽이고 수천 개의 강족 씨족을 항복시켰다.[5][6]
3. 3. 제3차 북벌 (248년)
248년, 곽회는 상류에서 공격할 것처럼 꾸몄지만, 실제로는 몰래 군대에 강 하류를 건너 백토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공격은 성공했고 반란군은 패배했다. 지무대는 부족 병력을 이끌고 무위군을 공격했지만, 그의 가족은 서해군(西海郡, 내몽골 자치구의 거연 해 분지)에 남겨두었다. 곽회는 이 사실을 알고 군대를 이끌고 서해군을 공격했지만, 무위군에서 돌아오던 지무대와 그의 군대와 마주쳤다. 두 군대는 롱이현(龍夷縣, 현재 황위안 현 서쪽) 북쪽에서 격돌했고, 위나라 군대가 승리하여 지무대의 군대는 퇴각했다.[7]강유는 촉나라 군대를 이끌고 석영(石營, 현재 시허 현 북서쪽)에서 강천(彊川, 현재 린탄 현 서쪽)으로 가서 지무대와 그의 퇴각하는 군대와 합류했다. 그는 요화를 성중산(成重山, 현재 린타오 현 서쪽)에 남겨 요새를 건설하고 남아있는 강족 군대를 모아 요새에 인질로 잡도록 했다. 곽회는 강유의 진격을 듣고 군대를 둘로 나누어 적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장교들은 다른 의견을 냈다. 그들은 강유가 서쪽으로 가서 지무대를 만나 그들의 군대를 합칠 것으로 예상했고, 요화는 성중산에서 촉나라의 위치를 방어하기 위해 남아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만약 그들이 군대를 둘로 나누면 공격력이 크게 감소하고, 강유를 막지도 못하고 요화의 위치를 점령하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곽회에게 강유와 지무대가 만나기 전에 서쪽으로 진격하여 그들을 따로 공격하는 데 집중하라고 촉구했다.[8]
곽회는 처음 계획을 고수하며 말했다. "만약 우리가 요화를 공격하면, 우리는 적을 방심하게 할 수 있다. 그러면 강유는 틀림없이 요화를 구하기 위해 되돌아올 것이다. 그가 돌아올 때쯤이면 우리는 이미 요화를 격파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강유와 그의 병사들이 앞뒤로 이동하며 지치게 만들 수 있다. 만약 강유가 오랑캐를 만나지 않으면, 오랑캐는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는 하후패에게 한 부대를 이끌고 강유를 따라 타중(沓中, 현재 주취 현 북서쪽, 간쑤 성)으로 추격하도록 지시하고, 자신은 다른 부대를 이끌고 요화를 공격했다. 곽회가 예상한 대로, 강유는 요화를 구하기 위해 되돌아갔고 지무대와 합류하지 못했다.[9]
3. 4. 제4차 북벌 (249년)
249년 봄, 위나라 섭정 조상은 고평릉의 변에서 공동 섭정 사마의가 일으킨 쿠데타로 처형되었고, 사마의는 위나라 조정을 완전히 장악했다. 하후패는 당시 하후현의 부하였는데, 하후현은 정서장군(征西將軍) 직책을 맡고 있었다. 하후현은 하후패와 조상의 친척이었다. 조상이 죽은 후, 사마의는 하후현을 수도 낙양으로 소환하고 곽회로 교체했다. 곽회는 이로써 하후패의 새로운 지휘관이 되었다. 하후패는 곽회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자신도 조상과 같은 처지가 될까 두려워 촉나라에 투항했다.[10][11]가을, 강유는 촉군을 이끌고 위나라가 통치하는 옹주를 공격하여 욱산(麴山, 현재 감숙성 민현 동남쪽)에 두 개의 요새를 건설하고, 부관 구안과 이흠에게 요새를 지키도록 명령했다. 또한 강족과 접촉하여 옹주의 지휘부를 괴롭히는 데 도움을 요청했다. 곽회는 옹주 자사(刺史) 진태와 촉의 침략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진태는 "욱산의 요새는 방어가 잘 되어 있겠지만, 촉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고, 많은 보급품이 필요할 것입니다. 강족은 촉군의 이러한 약점을 우려하여 촉을 돕는 것을 꺼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요새를 포위하고 공격하면 쉽게 점령할 수 있습니다. 촉의 지원군이 도착하더라도, 위험한 산악 지형은 그들을 지치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12][13]
곽회는 진태, 서질, 등애에게 위군을 이끌고 욱산의 요새를 공격하여 식량과 물 공급을 차단하도록 명령했다. 구안과 이흠은 병사들을 이끌고 등애를 도발했지만, 등애는 그들을 무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 요새는 보급품이 떨어졌다. 강유는 우두산(牛頭山, 현재 사천성 광원 조화구 서쪽)에서 병력을 이끌고 요새를 지원하러 갔다. 그들은 가는 길에 진태와 그의 군대를 만났다. 진태는 "'손자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우두산을 점령하면 강유의 퇴로가 봉쇄되고, 쉽게 포획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군대에게 강유의 군대에 저항하는 요새를 건설하라고 명령했지만, 적과 교전하는 것은 자제했다. 동시에 그는 곽회에게 서신을 보내 우두산 공격에 도움을 요청했다. 곽회는 도하를 건너 우두산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14][15]
강유가 퇴각한 후, 구안과 이흠은 욱산 요새에서 고립되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16] 곽회는 군대를 서쪽으로 더 이끌고, 불안정한 강족을 공격하여 항복시켰다.[17] 등애는 "적이 멀리 퇴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다시 공격할 수도 있으므로, 병력을 분산시켜야 합니다."라고 경고했다.[18]
등애는 뒤에 남아 사천성 청천현에 있는 백수(白水) 북쪽에 주둔했다. 사흘 후, 강유는 요화를 보내 군대를 이끌고 백수 남쪽에서 등애의 진영에 접근하게 했다. 등애는 부관들에게 "강유가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우리 군대는 적습니다. 이상적으로는 강을 건너 다리를 건설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강유가 우리를 여기에 묶어두기 위해 요화를 보냈고, 그 동안 그는 동쪽에서 도성(洮城, 현재 감숙성 민현 북동쪽)을 공격할 것이라고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도성은 강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등애의 위치에서 약 60 리 떨어져 있었다. 등애는 즉시 병력을 파견하여 하룻밤 사이에 도성으로 가서 요새를 방어하게 했다. 강유는 강을 건너 도성을 공격했지만, 등애가 이미 방어를 강화했기 때문에 요새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자, 강유는 군대를 촉으로 철수시켰다.[19]
3. 5. 제5차 북벌 (250년)
는 250년에 촉군을 이끌고 위나라가 통치하는 서평군(西平; 현재의 칭하이성 시닝시 일대)을 공격했으나, 군을 점령하는 데는 실패하고 퇴각했다.[20][21]3. 6. 제6차 북벌 (253년)
253년 정월, 비의가 곽순에게 암살당했다.[22] 그해 여름, 강유는 수만 명의 촉군을 이끌고 시영(현재의 시허현 북서쪽, 간쑤성)에서 출발하여 디다오(현재의 린타오현, 간쑤성 주변)를 포위했다.[23][24]같은 시기, 촉의 동맹국인 동오는 위나라의 동쪽 국경을 공격하여 합비 전투를 벌였다.
위나라의 섭정 사마사는 곽회와 진태에게 관중 지역에 주둔한 위군을 이끌고 강유를 공격하여 디다오 포위를 풀도록 명령했다. 진태는 낙문(현재의 우산현, 간쑤성)에서 적을 공격했다. 강유는 결국 식량이 떨어지자 군대를 철수했다.[25]
3. 7. 제7차 북벌 (254년)
254년 여름, 강유는 촉군을 이끌고 다시 농서군을 공격했다. 위나라 관리 이건 (狄道; 현재 린타오 부근)은 강유에게 항복했다.[26] 강유는 이어서 상무현 (襄武縣; 현재 농서현 동남쪽)을 공격하여 위나라 장수 서질과 교전했다. 서질은 패배하여 전사했지만, 촉군 또한 장수 장익을 잃었다.[27] 이 승리로 촉군은 3개 현(狄道, 하관(현재 딩시 부근), 린타오)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촉나라 영토로 강제 이주시켰다.[28]3. 8. 제8차 북벌 (255년)
255년, 촉한의 강유가 다시 위를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을 때, 장익은 촉의 자원 부족과 백성들의 전쟁 피로를 이유로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강유는 이를 무시하고 장익과 하후패를 부장으로 삼아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위를 공격했다. 9월 18일부터 10월 17일 사이에 촉군은 부한현(현재 간쑤성 린샤현 북동쪽)에 도착하여 적도(현재 간쑤성 린타오현) 공격을 준비했다.[29][30]한편, 위의 옹주 자사 왕경은 촉의 침략을 장군 진태에게 보고했다. 곽회가 255년에 사망한 후, 진태는 정서장군이 되어 옹주와 양주의 군사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31] 왕경은 진태에게 촉군이 세 그룹으로 나뉘어 기산(현재 간쑤성 례현 주변 산악 지역), 석영(현재 간쑤성 시허현 북서쪽), 금성군(현재 간쑤성 위중현 주변)을 각각 공격할 것이라고 보고하며, 부한현과 기산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다. 진태는 촉군이 양주 공격을 위해 세 그룹으로 나뉘면 전력이 감소할 것이라고 결론내리고, 왕경에게 기다리면서 적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한 다음 동쪽과 서쪽에서 협공하라고 지시했다.[32][33]
진태와 증원군이 진창(현재 산시성 바오지시 동쪽)에 도착했을 때, 왕경은 이미 구관에서 강유에게 패배하여 도강을 건너 후퇴한 상태였다. 진태는 왕경이 디다오에서 위의 진지를 방어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걱정하여 군대를 이끌고 디다오를 지원했다. 왕경은 도강 서쪽에서 강유와 교전하여 패배했다. 약 10,000명의 병력만 남은 왕경은 디다오로 후퇴했고, 그의 나머지 병력은 흩어지거나 죽었다.[34][35]
강유는 기세를 몰아 진격하여 디다오를 포위했다.[36] 이때 장익은 강유에게 "이제 그만해야 합니다. 더 이상 진격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얻은 모든 것을 잃을 위험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는 것은 뱀에 다리를 더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37]
한편, 상규현(현재 간쑤성 톈수이시)에 있던 진태는 병력을 분산시키고 밤낮으로 진격하여 이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를 신속하게 점령하고 방어하도록 명령했다.[38] 위 황실은 등애를 안서장군으로 임명하고 군대를 이끌고 촉의 침략에 저항하도록 명령했다. 며칠 후, 태위 사마부도 후방 병력을 이끌고 진태를 지원했다.[39] 등애, 호분, 왕비(王秘)가 이끄는 위 증원군은 상규현에 도착하여 진태의 병력에 합류했다. 그들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 농서군으로 진격했다.[40] 앞서 진태는 디다오 포위를 풀 방법에 대해 다른 장교들과 의견이 달랐다. 등애와 다른 장교들은 왕경을 격파한 후 촉군의 사기가 높으므로 먼저 후퇴하여 전략적 요충지를 지키면서 반격할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41] 반면에 진태는 촉군이 높은 사기를 이용하여 더 많은 위 영토를 정복하고 강(羌)과 저(氐) 부족으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얻기 전에 신속한 공격을 시작하여 결연히 격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2][43]
진태는 군대를 이끌고 고성령(현재 간쑤성 웨이위안현 북서쪽)을 건너 밤낮으로 은밀히 이동하여 디다오 남동쪽 언덕에 도착했다. 언덕에서 진태는 부하들에게 더 많은 불을 피우고 큰 북을 쳐서 포위된 디다오의 위 군에게 증원군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신호를 보냈다. 예상대로 디다오의 위 수비군은 사기가 급상승했고 촉군은 기습을 받았다. 강유는 부하들에게 후퇴를 명령했다. 진태는 또한 부하들에게 촉군이 퇴로를 차단할 계획이라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도록 지시했다. 강유는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44] 11월 11일에 군대를 철수했다. 디다오 포위는 이렇게 풀렸다.[45][46][47]
진태가 농서군으로 후퇴할 때, 그는 강유가 가는 길에 산악 지형을 이용하여 매복을 시도할 것이라고 예측하여 남쪽으로 우회하여 농서로 돌아갔다. 예상대로 강유는 실제로 3일 동안 매복할 군대를 보냈다.[48] 그러나 역사가 배송지는 강유가 매복을 설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는데, 왜냐하면 그는 디다오를 포위했을 때 위 증원군이 나타날지 몰랐기 때문에 매복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49]
디다오 포위가 풀린 후, 왕경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리의 물자는 10일 이상 지속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증원군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도시는 적에게 함락되었고 온 주(州)가 잃었을 것입니다." 진태는 병력을 정비하고 이 지역의 방어를 강화한 후 상규현의 주둔지로 돌아갔다.[50] 강유는 린타오현 남쪽 종제로 후퇴했다.[51][52]
3. 9. 제9차 북벌 (256년)
등애는 도하 서쪽에서의 승리가 사소한 것이 아니며, 촉군의 병력 및 물자 손실, 난민 발생 등을 들어 촉이 쇠약해졌다고 판단했다.[53] 그는 적의 강점과 약점을 분석하며, 특히 강족의 곡물과 기산 너머의 밀밭을 노릴 것이라고 예측했다.[54]256년 가을, 등애의 예측대로 강유는 기산을 공격했지만, 등애가 구축한 방어선에 막혔다. 이후 강유는 동정(董亭)으로 향했지만, 등애는 무성산(武城山)에 주둔하며 강유의 산악 지형 장악 시도를 저지했다. 강유는 위수를 건너 상규를 공격하려 했으나, 단곡(段谷)에서 등애에게 저지당하고 대패했다.[55]
등애는 이 공로로 진서장군(鎮西將군)으로 승진했다. 강유가 상규에서 패배한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촉나라 장수 호제가 제때 지원군을 이끌고 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아홉 번째 북벌 실패로 촉은 막대한 인명 및 자원 손실을 입었고, 백성들은 강유를 더욱 원망하게 되었다. 강유는 스스로 삭직을 요청하여 위장군(衞將軍)으로 강등되었으나, 여전히 대장군(大將軍) 직무를 수행했다.[56][57]
3. 10. 제10차 북벌 (257년 ~ 258년)
257년 강유는 장서와 부첨을 장수로 뽑아 군사 훈련을 해 북벌을 계획했는데, 마침 회남에서 사마씨 정권에 대항하는 제갈탄의 난이 일어나자 이 틈을 타 군사를 일으켰다. 초주가 경고했지만, 강유는 무시하고 부첨의 건의로 낙곡을 공략하고 침령을 넘어 장성으로 진격했다.[58]장성을 지키던 사마망은 군량과 마초는 많지만 군사와 말이 적어, 부하 왕진과 이붕에게 군사를 이끌고 촉군과 교전하게 했다. 그러나 부첨에게 왕진과 이붕이 모두 죽고 사마망은 크게 패해 부성으로 달아나 성문을 굳게 잠갔다.
강유는 장성 안에 불화살과 화포를 쏘았고, 이에 등애와 그의 아들 등충이 군사를 이끌고 강유와 대적했다. 등애는 영채에서 나오지 않았다.[59][60]
그 사이 제갈탄의 난이 진압되고 사마소가 원군을 보내자, 강유는 군사를 물렸다.
258년 강유는 다시 북벌을 계획해 10만 대군을 일으켰다. 요화와 장익을 선봉, 왕함과 장빈을 좌군, 장서와 부첨을 우군, 호제를 후군으로 삼고, 자신은 하후패와 함께 중군이 되어 후주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
강유는 하후패의 건의로 기산으로 출진했다. 등애는 아들 등충과 부하 사찬에게 2만 군사를 주어 촉군을 좌우에서 습격하게 하고, 부장 정륜에게 군사 500명을 주어 땅굴을 파 촉군을 습격하게 했다. 등충의 기습으로 왕함과 장빈은 영채를 버리고 달아났지만, 강유는 침착하게 대응해 위군을 무찔렀다.
강유는 제갈량의 팔진법에 따라 진을 펼쳤고, 등애도 64개의 진문법으로 대응하며 교전했다. 그러나 강유가 장사권지진을 펼치자 등애는 크게 패하고 사마망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등애는 정륜을 선봉으로 다시 진법 싸움을 겨뤘다. 사마망이 팔괘진을 펼치자 강유는 등애가 산 뒤에 매복한 것을 알고 군사들을 이끌고 공격했다. 등애와 정륜은 장익과 요화의 공격으로 활을 4대나 맞고 겨우 돌아왔다.
그러자 등애는 당균을 보내 촉의 환관 황호에게 뇌물을 바쳤고, 황호의 꼬임에 넘어간 후주는 강유에게 회군 명령을 내렸다.[61][62]
정사에서 이 시기 강유는 다시 대장군에 올랐다. 군정을 맡던 하후패가 이 해에 사망했다.
당시 촉나라 백성들은 해마다 위나라를 상대로 벌이는 군사 작전에 지쳐 전쟁의 비용과 피해를 감당하기 힘들어했다. 촉나라 관리 교주는 강유의 호전적인 행동을 비판하는 "초국론"(仇國論; "원수 맺는 나라에 대한 논쟁")을 썼다.[63]
3. 11. 제11차 북벌 (262년)
요화는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을 자제하지 않는 자는 결국 자신을 불태울 것이다."라며 강유의 북벌을 반대했다.[64] 그럼에도 강유는 북벌을 강행하여 감숙성 린타오에 위치한 타오양현(洮陽)을 점령했다.[65] 그러나 덩아이와의 후허현(侯和) 전투에서 패배한 후, 감숙성 주취 서북쪽에 위치한 탑중(沓中)으로 후퇴하여 주둔했다.[65][66] 정사에서 '후화 전투'는 단곡과 함께 강유의 대표적인 패배로 기록되어 있으나, 매우 기록이 미비하여 국경에서의 소규모 접전으로 취급되고 있다.4. 북벌의 결과와 영향
강유의 계속된 북벌은 촉나라의 국력을 소진시켰지만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67][68][69] 262년, 위나라 섭정 사마소는 촉나라를 정복하기 위한 원정을 계획했고, 263년 종회, 등애, 제갈서가 이끄는 위나라 군대가 촉나라를 침공했다. 강유는 검각에서 위군에 맞섰으나, 등애는 험한 산길을 통해 촉나라의 방어를 우회하여 수도 성도를 기습했다. 촉 황제 유선은 등애에게 항복하여 촉나라는 멸망했다.
4. 1. 촉한 내부의 갈등과 국력 소모
강유가 촉나라 군대를 이끌고 해마다 적극적으로 위나라를 공격했지만, 이러한 원정은 촉나라의 자원을 소모했을 뿐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46년 촉나라 재상 동윤이 사망한 후, 환관 황호가 권력을 잡고 간접적으로 촉나라 정부를 통제했다. 황호는 강유를 권력에서 제거하고 자신이 총애하는 엄유로 교체하려 했다.[67][68] 강유는 이 소식을 듣고 촉나라 황제 유선에게 황호가 부패하고 반역했다고 비난하며 황호를 처형하라고 촉구하는 글을 썼다. 그러나 유선은 "황호는 단지 작은 관리일 뿐이다. 과거에 나는 그가 동윤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싫어했다. 왜 그를 신경 써야 하는가?"라고 답했다. 강유는 황호가 조정에 많은 지지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공개적으로 황호를 비난했을 때 곤경에 처할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수도 성도로 돌아가는 대신, 타중으로 물러나 그곳에 주둔하기로 결정했다.[69]4. 2. 위나라의 촉한 정벌 (263년)
강유가 촉나라 군대를 이끌고 해마다 적극적으로 위나라를 공격했지만, 이러한 원정은 촉나라의 자원을 소모했을 뿐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46년 촉나라 재상 동윤이 사망한 후, 환관 황호가 권력을 잡고 간접적으로 촉나라 정부를 통제했다. 황호는 강유를 권력에서 제거하고 자신이 총애하는 엄유로 교체하려 했다.[67][68] 강유는 이 소식을 듣고 촉나라 황제 유선에게 황호가 부패하고 반역했다고 비난하며 황호를 처형하라고 촉구하는 글을 썼다. 그러나 유선은 "황호는 단지 작은 관리일 뿐이다. 과거에 나는 그가 동윤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싫어했다. 왜 그를 신경 써야 하는가?"라고 답했다. 강유는 황호가 조정에 많은 지지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공개적으로 황호를 비난했을 때 곤경에 처할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수도 성도로 돌아가는 대신, 타중으로 물러나 그곳에 주둔하기로 결정했다.[69]262년, 위나라 섭정 사마소는 촉나라를 정복하기 위한 원정을 시작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263년, 종회, 등애, 제갈서가 이끄는 세 개의 위나라 군대가 촉나라를 침공했다. 강유가 촉나라 군대를 이끌고 산길 검각(현재의 검각현, 사천성)에서 종회와 제갈서의 군대를 막는 동안, 등애가 이끄는 위나라 군대는 산악 지형을 가로지르는 더 위험한 길을 택하여 촉나라의 방어를 우회하고 촉나라 수도 성도에 나타났다. 촉나라 황제 유선은 기습을 받아 등애에게 자발적으로 항복했고, 이로써 촉나라의 존재는 종말을 고했다.
5. 평가와 역사적 의의
강유의 북벌은 그 평가와 역사적 의의에 있어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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