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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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리짐산은 히브리 성경에 기록된 산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축복 의식을 거행한 곳으로 묘사된다. 사마리아인들은 이 산을 숭배의 중심지로 삼았고, 기원전 5세기에 야훼에게 헌정된 사마리아 사원을 건설했다. 이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종교적 갈등으로 사원이 파괴되었지만, 사마리아인들은 게리짐산을 신성하게 여겼다. 고고학 발굴을 통해 사마리아 성전과 기독교 교회의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현재도 사마리아인들은 유월절 등 종교 의식을 이곳에서 거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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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짐산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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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산 정보 | |
이름 | 게리짐산 |
다른 이름 | 해당사항 없음 |
![]() | |
해발고도 | 해당사항 없음 |
위치 | 요르단강 서안 지구 |
좌표 | 32°12′3.1″N 35°16′23.73″E |
산맥 | 사마리아산맥 |
지형 | 해당사항 없음 |
종류 | 해당사항 없음 |
언어별 명칭 | |
아랍어 | (자발 자르짐) |
히브리어 | (하르 그리짐) |
한국어 | 게리짐산 |
일본어 | ゲリジム山 |
2. 성서 속의 게리짐산
성경 속 게리짐산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소로 등장한다. 성경에는 게리짐산과 관련된 여러 기록이 전해진다.
신명기와 여호수아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게리짐산에서 축복을, 에발산에서 저주 의식을 행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6][12]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게리짐산과 에발산에 세우고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게 했다. 시므온 지파, 레위 지파, 유다 지파 등 여섯 지파는 게리짐산에,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등 나머지 여섯 지파는 에발산에 서서 의식에 참여했다.[19]
모세는 에발산에 제단을 쌓고 율법을 기록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사마리아 오경과 쿰란에서 발견된 고대 사본에는 게리짐산에 제단을 쌓으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16][12][17] 사해 사본 연구는 사마리아 오경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는 증거를 제시한다.[18]
여호수아기에는 아이 전투 이후 여호수아가 게리짐산에 제단을 쌓고 율법을 기록한 뒤, 백성들이 게리짐산에서 축복을,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했다는 내용이 다시 나온다.[20]
사사기에는 요담이 게리짐산에서 나무들의 비유를 통해 아비멜렉을 왕으로 추대한 세겜 사람들을 비판하는 내용이 나온다.[23]
2. 1. 신명기와 여호수아기의 기록
신명기에 기록된 히브리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인들은 가나안에 처음 들어갔을 때 게리짐산에서 축복 의식을, 근처 에발산에서 저주의 의식을 거행하며 이 사건을 기념했다.[6][12] ''설교자 주석''은 이 산들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땅의 중앙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선택되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케임브리지 학교 및 대학을 위한 성경 주석은 "축복의 산인 게리짐산의 면은 더 비옥하고, 저주의 산인 에발산의 반대쪽 면은 훨씬 더 황폐하다"[13]고 주장하지만, ''설교자 주석''은 게리짐산과 에발산 모두 "비록 둘 다 문화와 초목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똑같이 황량해 보인다"고 말한다.[14]마소라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연석(깎지 않은)으로 에발산에 제단을 짓고, 그곳에 돌을 놓고 석회로 희게 하며,[4] 제물을 제단에 바치고, 그곳에서 먹고, 그곳의 돌에 모세의 율법을 기록하라고 명령했다고 전한다.[15] 사마리아 오경과 쿰란에서 발견된 성경 텍스트의 고대 사본[16]은 마소라 본문과 동일한 내용을 기록했지만, "에발" 대신 "게리짐"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모세가 게리짐산에 제단을 세우라고 명령했다고 기록했다.[12][17] 사해 사본에 대한 최근 연구는 모세가 약속의 땅에서 제단을 지으라고 명령한 첫 번째 장소로 에발산이 아닌 게리짐산을 언급한 사마리아 오경의 기록이 정확함을 뒷받침한다.[18]
성경 텍스트의 모든 버전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게리짐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도록 지시한 방법을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시므온 지파, 레위 지파, 유다 지파, 잇사갈 지파, 요셉 지파, 베냐민 지파는 게리짐으로 보내지고, 르우벤 지파, 갓 지파, 아셀 지파, 스불론 지파, 단 지파, 납달리 지파는 에발에 남아야 했다.[19]
여호수아기는 아이 전투 후 여호수아가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세우고,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에서 화목제를 드리고, 모세의 율법이 돌에 기록되고, 이스라엘 백성이 신명기에 명시된 두 그룹으로 나뉘어 게리짐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했다고 기록한다.[20] 성경 학자들은 여호수아기의 출처가 신명기보다 앞선다고 보며, 제단을 짓고 비문을 새기는 명령은 여호수아기의 이러한 행위에 기초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다.[21]
여호수아가 늙어 죽어가자, 그는 백성을 세겜(현재의 나블루스)에 모아 작별 연설을 하고, "증거로 돌"을 세우고, 그것을 "야훼의 성소 옆, 상수리나무 아래"에 두었다.[22] 이는 그곳에 하나님의 성소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17]
게리짐산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비유의 장소이기도 하다.[23] 사사기 9장 7절부터 20절은 요담이 산 위에 서서 가시나무를 왕으로 삼고 싶어했던 나무들의 비유를 선포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사악하고 배신적인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고 싶어했던 세겜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2. 2. 사마리아 오경과 사해 사본
신명기에 기록된 히브리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처음 들어갔을 때 게리짐산에서 축복 의식을, 근처 에발산에서 저주 의식을 거행했다.[6][12] 케임브리지 학교 및 대학을 위한 성경 주석은 게리짐산이 에발산보다 더 비옥하다고 주장하지만,[13] ''설교자 주석''은 두 산 모두 황량하다고 말한다.[14]마소라 본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에발산에 제단을 짓고, 석회로 희게 하고,[4] 제물을 바치고, 모세의 율법을 기록하라고 명령했다고 전한다.[15] 그러나 사마리아 오경과 쿰란에서 발견된 성경 텍스트의 고대 사본은 모세가 게리짐산에 제단을 세우라고 명령했다고 기록한다.[16][12][17] 사해 사본에 대한 최근 연구는 사마리아 오경의 기록이 정확함을 뒷받침한다.[18]
성경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게리짐산에서 축복을,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도록 지시했다고 기록한다. 시므온 지파, 레위 지파, 유다 지파, 잇사갈 지파, 요셉 지파, 베냐민 지파는 게리짐으로 보내졌고, 나머지는 에발에 남았다.[19]
여호수아기에는 여호수아가 게리짐산에 제단을 세우고 율법을 기록한 후, 백성들이 게리짐산에서 축복을,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했다는 내용이 다시 언급된다.[20] 학자들은 여호수아기의 출처가 신명기보다 앞선다고 보며, 제단 건설과 율법 기록 명령은 여호수아기의 사건에 대한 어원적 설명을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21]
여호수아는 백성을 세겜(현재의 나블루스)에 모아 작별 연설을 하고, "야훼의 성소 옆, 상수리나무 아래"에 "증거의 돌"을 세웠다.[22] 이는 성소의 존재를 나타낸다.[17]
게리짐산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비유의 장소이기도 하다.[23] 판관기 9장 7절에서 20절에는 요담이 산 위에서 가시나무 비유를 선포하여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려 했던 세겜 사람들을 비유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2. 3. 판관기의 요담의 비유
히브리 성경의 신명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처음 들어갔을 때 게리짐산에서 축복 의식을, 근처 에발산에서 저주 의식을 거행하며 이 사건을 기념했다는 기록이 있다.[6][12] ''설교자 주석''은 이 산들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땅의 중앙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선택되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케임브리지 학교 및 대학을 위한 성경 주석은 "축복의 산인 게리짐산의 면은 더 비옥하고, 저주의 산인 에발산의 반대쪽 면은 훨씬 더 황폐하다"[13]고 주장하지만, ''설교자 주석''은 게리짐산과 에발산 모두 "비록 둘 다 문화와 초목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똑같이 황량해 보인다"고 말한다.[14]마소라 본문에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연석(깎지 않은)으로 에발산에 제단을 짓고, 그곳에 돌을 놓고 석회로 희게 하며,[4] 제물을 제단에 바치고, 그곳에서 먹고, 그곳의 돌에 모세의 율법을 기록하라고 명령했다는 내용이 나온다.[15] 사마리아 오경과 쿰란에서 발견된 성경 텍스트의 고대 사본[16]에는 "에발" 대신 "게리짐"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어 모세가 게리짐산에 제단을 세우라고 명령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마소라 본문과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12][17] 성경 텍스트의 가장 오래된 사본이 포함된 사해 사본에 대한 최근 연구는 모세가 약속의 땅에서 제단을 지으라고 명령한 첫 번째 장소로 에발산이 아닌 게리짐산을 지정한 사마리아 오경의 정확성을 뒷받침한다.[18]
성경 텍스트의 모든 버전에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게리짐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도록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내용이 있다. 시므온 지파, 레위 지파, 유다 지파, 잇사갈 지파, 요셉 지파, 베냐민 지파는 게리짐으로 보내지고, 르우벤 지파, 갓 지파, 아셀 지파, 스불론 지파, 단 지파, 납달리 지파는 에발에 남아야 했다.[19]
아이 전투 후 여호수아기에는 여호수아가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세우고,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에서 화목제를 드리고, 모세의 율법이 돌에 기록되고, 이스라엘 백성이 신명기에 명시된 두 그룹으로 나뉘어 게리짐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했다는 내용이 다시 언급된다.[20] 성경 학자들은 여호수아기의 출처가 신명기보다 앞선다고 믿으며, 따라서 제단을 짓고 비문을 새기는 명령은 여호수아기 출처의 이러한 행위에 기초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반대가 아닐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아마도 여호수아기에 기록된 사건에 대한 어원 설명을 제공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21]
여호수아가 늙어 죽어가자, 그는 백성을 세겜(현재의 나블루스)에 모아 작별 연설을 하고, "증거로 돌"을 세우고, 그것을 "야훼의 성소 옆, 상수리나무 아래"에 두었다.[22] 이는 그곳에 하나님의 성소가 존재했음을 나타낸다.[17]
게리짐산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비유의 장소이기도 하다.[23] 판관기 9장 7-20절에는 요담이 산 위에 서서 가시나무를 그들의 왕으로 삼고 싶어했던 나무들의 비유를 선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사악하고 배신적인 아비멜렉을 그들의 왕으로 삼고 싶어했던 세겜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3. 역사
게리짐산은 기원전 5세기에 야훼에게 헌정된 사마리아 사원이 세워지면서 역사에 등장한다.[24][25] 이 사원은 예루살렘의 유대교 제2성전과 동시대에 존재하며, 이스라엘인들이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으로 나뉘는 계기가 되었다.[26] 두 집단은 모두 토라를 준수했지만, 예배 장소에 대한 이견으로 갈등했다. 사마리아인들은 게리짐산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신성하게 여겼다.[4]
기원전 3세기에는 사마리아인들의 문화 중심지가 게리짐산 인근에 건설되었으나,[27] 기원전 112~111년 요한 히르카누스가 이끄는 유대인들에 의해 사원이 파괴되었다.[27][28][29]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리짐산은 사마리아인들에게 계속해서 신성한 장소로 남아 있었으며, 신약성경에도 언급된다.[30]
신약성경의 요한 복음서에는 예수가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 게리짐산 예배에 대해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ישוע אמר לה האישה האמיני לי שתבוא שעה שלא בהר הזה ולא בירושלים תשתחוו לאבינו אתם הסוגדים אינכם יודעים למי אנו סוגדים ויודעים אנו למי כי הישועה מן היהודים היא ואולם תבוא שעה ועתה היא אשר עובדי האלהים האמתיים ישתחוו לאב ברוח ובאמת כי עובדים כאלה חפץ האב להיות לו האלהים הוא רוח והסוגדים לו ברוח ובאמת צריכים להשתחוות לו|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너희가 아버지를 예배할 때가 오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나니,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그러나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느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he
서기 36년에는 사마리아에서 폰티우스 필라투스에 대항하는 소요가 발생했고,[32] 서기 67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중에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학살당했다.[32]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사마리아인들의 게리짐산 예배는 금지되었고, 475년에는 교회[33], 484년에는 테오토코스에게 헌정된 순교자 기념 성당이 세워졌다.[5]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사마리아교를 불법화하고 방어벽을 건설했으며,[4][33] 같은 해 율리아누스 벤 사바르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진압되었다.[4][33]
아바스 왕조 시대 알-무타와킬 통치 7년(855년)에는 사마리아인들의 기도와 쇼파르 사용이 일시적으로 금지되기도 했다.[34]
3. 1. 사마리아 성전 건립과 파괴
기원전 5세기경, 야훼에게 헌정된 사마리아 사원이 게리짐산에 세워졌다.[24][25] 이 사원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제2성전과 동시대에 존재했다.[26]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으로 나뉘었는데, 이들은 모두 성경 속 이스라엘인들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토라를 준수해야 한다고 설교했다. 그러나 하느님을 숭배하는 가장 신성한 장소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는데, 사마리아인들은 게리짐산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신성하게 여겼다.[4]기원전 3세기, 사마리아인들은 게리짐산 인근에 도시를 건설했고, 이 도시는 사마리아인들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27]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간의 종교적 경쟁은 기원전 112~111년에 요한 히르카누스의 명령에 따라 게리짐산의 사마리아 사원이 유대인에 의해 파괴되는 결과를 낳았다.[27][28][29]
사마리아 사원이 파괴된 후에도 게리짐산은 사마리아인들에게 계속해서 신성한 장소로 남아 있었으며, 이는 신약성경에도 언급된다.[30] 서기 138~161년경 나블루스의 로마 조폐국에서 발행된 동전에는 파괴된 사마리아 사원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거대한 사원 단지와 조각상, 그리고 나블루스에서 사원으로 이어지는 웅장한 계단을 볼 수 있다.[31]
3. 2. 로마 시대
야훼에게 헌정된 사마리아 사원이 기원전 5세기에 게리짐산에 세워졌다.[24][25] 이 사원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제2성전과 같은 시대에 존재했다.[26]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으로 나뉘어졌다. 두 집단 모두 성경의 이스라엘인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토라를 준수할 것을 설교했지만, 하느님을 숭배하는 지구상의 가장 신성한 장소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다. 사마리아인들은 게리짐산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신성하게 여겼다.[4]
사마리아인들은 기원전 3세기에 인접한 도시를 건설했고, 그곳은 사마리아인들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27]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간의 종교적 경쟁은 기원전 112~111년에 요한 히르카누스의 명령에 따라 게리짐산이 유대인에 의해 파괴되는 결과를 낳았다.[27][28][29]
유대인에 의해 사원이 파괴된 후에도 게리짐산은 사마리아인들에게 계속해서 신성한 장소로 남아 있었으며, 이는 신약성경에도 언급되어 있다.[30] 나블루스에 위치한 로마 조폐국에서 발행된 동전은 서기 138~161년경으로 추정되며, 파괴된 사마리아 사원을 묘사하고 있으며, 거대한 사원 단지, 조각상, 그리고 나블루스에서 사원으로 이어지는 웅장한 계단을 보여준다.[31]
신약성경의 요한 복음서에서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는 게리짐산(사마리아인들이 그랬듯이)이나 예루살렘(당시 유대인들이 그랬듯이)에서 예배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ישוע אמר לה האישה האמיני לי שתבוא שעה שלא בהר הזה ולא בירושלים תשתחוו לאבינו אתם הסוגדים אינכם יודעים למי אנו סוגדים ויודעים אנו למי כי הישועה מן היהודים היא ואולם תבוא שעה ועתה היא אשר עובדי האלהים האמתיים ישתחוו לאב ברוח ובאמת כי עובדים כאלה חפץ האב להיות לו האלהים הוא רוח והסוגדים לו ברוח ובאמת צריכים להשתחוות לו|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너희가 아버지를 예배할 때가 오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나니,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그러나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느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he
서기 36년,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모세를 통해 묻힌 성스러운 그릇을 발굴한다고 주장하며 사마리아인들을 게리짐산으로 집결시키자 사마리아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집결하는 무리가 증가하자, 군대를 파견하여 그들의 등산을 막았다. 이로 인해 충돌, 사망, 체포가 발생했고, 사마리아 지도자들은 필라투스의 잔혹 행위를 비난했다. 이에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는 유다를 통치하기 위해 마르켈루스를 임명하고 필라투스를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사를 위해 로마로 소환했다. 티베리우스는 필라투스가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다.[32]
서기 67년 여름,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게리짐산에 모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600명의 기병과 3,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를 케리알리스에게 보냈다. 이는 사마리아인들의 방어 부족과 여름철 물 부족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로마군이 도착하자 일부는 항복했지만, 다수는 싸우기로 결정했다. 이 충돌로 요세푸스에 따르면 11,600명에 달하는 사마리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32]
결국,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자 사마리아인들은 게리짐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서기 475년에는 그 정상에 기독교 교회가 세워졌다.[33] 484년, 제노 황제 치세에 테오토코스(하느님을 낳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헌정된 순교자 기념 성당 유형의 팔각형 교회가 그 자리에 세워졌다.[5]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사마리아교를 불법화하고 교회를 둘러싸는 방어벽을 건설하도록 조치했다.[4][33] 그 결과, 같은 해 율리아누스 벤 사바르가 사마리아교 지지 반란을 일으켰고 530년까지 사마리아의 대부분을 점령하여 교회를 파괴하고 사제와 관리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531년, 유스티니아누스는 가산 왕조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완전히 진압했고, 살아남은 사마리아인들은 대부분 노예가 되거나 추방되었다. 533년 유스티니아누스는 그 지역에 남아 있던 소수의 불만을 품은 사마리아인들의 습격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게리짐산에 성을 건설했다.[4][33]
아부 알 파트의 "사마리아 연대기"에 따르면,[34] 아바스 왕조 알-무타와킬 통치 7년(855년) 수코트 기간 동안 나블루스의 총독은 사마리아인들이 큰 소리로 기도하고 쇼파르를 부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그 다음 목요일, 그들은 산에 올라가 방해 없이 큰 소리로 기도했다.[34]
이름 | 날짜 | 책임자 |
---|---|---|
사마리아 반란 (서기 36년) 중의 학살.[35] | 36년 | 본디오 빌라도와 로마인 |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중의 학살.[36] | 67년 | 로마 군대 |
3. 3. 비잔틴 시대
기원전 5세기, 야훼에게 헌정된 사마리아 사원이 게리짐산에 세워졌다.[24][25] 이 사원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제2성전과 동시대에 존재했다.[26]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으로 나뉘었는데, 두 집단 모두 성경 속 이스라엘인들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토라를 준수할 것을 설교했지만, 하느님을 숭배하는 가장 신성한 장소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다. 사마리아인들은 게리짐산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신성하게 여겼다.[4]기원전 3세기, 사마리아인들은 인접한 도시를 건설했고, 그곳은 그들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27]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간의 종교적 경쟁은 기원전 112~111년에 요한 히르카누스의 명령에 따라 게리짐산이 유대인에 의해 파괴되는 결과로 이어졌다.[27][28][29]
유대인에 의해 사원이 파괴된 후에도 게리짐산은 사마리아인들에게 계속해서 신성한 장소로 남아 있었으며, 이는 신약성경에도 언급되어 있다.[30] 서기 138~161년경 나블루스에 위치한 로마 조폐국에서 발행된 동전에는 파괴된 사마리아 사원이 묘사되어 있는데, 거대한 사원 단지, 조각상, 그리고 나블루스에서 사원으로 이어지는 웅장한 계단을 볼 수 있다.[31]
신약성경의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게리짐산(사마리아인들이 그랬듯이)이나 예루살렘(당시 유대인들이 그랬듯이)에서 예배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ישוע אמר לה: "האמיני לי, אשה, כי תבוא שעה שלא בהר הזה ולא בירושלים תסגדו לאב. אתם סוגדים למה שאינכם מכירים; אנחנו סוגדים למה שאנחנו מכירים, כי הישועה מן היהודים היא. ואולם תבוא שעה, ועכשיו היא, שהסוגדים האמתיים יסגדו לאב ברוח ובאמת, כי סוגדים כאלה האב מבקש לו. אלהים הוא רוח, והסוגדים לו צריכים לסגוד ברוח ובאמת."|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너희가 아버지를 예배할 때가 오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나니,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그러나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느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he (요한복음 4:21–24)
서기 36년, 사마리아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한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모세를 통해 묻힌 성스러운 그릇을 발굴한다고 주장하며 사마리아인들을 게리짐산으로 집결시켰기 때문이다.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증가하는 군중을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이로 인해 충돌, 사망, 체포가 발생했고, 사마리아 지도자들은 필라투스의 잔혹 행위를 비난했다. 이에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는 유다 통치를 위해 마르켈루스를 임명하고 필라투스를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사를 위해 로마로 소환했다. 티베리우스는 필라투스가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다.[32]
서기 67년 여름,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게리짐산에 모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케리알리스에게 600명의 기병과 3,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를 보냈는데, 이는 사마리아인들의 방어 부족과 여름철 물 부족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로마군이 도착하자 일부는 항복했지만, 다수는 싸우기로 결정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충돌로 11,600명에 달하는 사마리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32]
결국,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자 사마리아인들은 게리짐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서기 475년에는 그 정상에 기독교 교회가 세워졌다.[33] 484년, 제노 황제 치세에 테오토코스(하느님을 낳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헌정된 순교자 기념 성당 유형의 팔각형 교회가 그 자리에 세워졌다.[5]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사마리아교를 불법화하고 교회를 둘러싸는 방어벽을 건설하도록 조치했다.[4][33] 그 결과, 같은 해 율리아누스 벤 사바르가 사마리아교 지지 반란을 일으켰고, 530년까지 사마리아 대부분을 점령하여 교회를 파괴하고 사제와 관리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531년, 유스티니아누스는 가산 왕조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완전히 진압했고, 살아남은 사마리아인들은 대부분 노예가 되거나 추방되었다. 533년 유스티니아누스는 그 지역에 남아 있던 소수의 불만을 품은 사마리아인들의 습격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게리짐산에 성을 건설했다.[4][33]
아부 알 파트의 "사마리아 연대기"에 따르면,[34] 아바스 왕조 알-무타와킬 통치 7년(855년) 수코트 기간 동안 나블루스의 총독은 사마리아인들이 큰 소리로 기도하고 쇼파르를 부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그 다음 목요일, 그들은 산에 올라가 방해 없이 큰 소리로 기도했다.[34]
3. 4. 아바스 왕조 시대
야훼에게 헌정된 사마리아 사원이 기원전 5세기에 게리짐산에 세워졌다.[24][25] 이 사원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제2성전과 같은 시대에 존재했다.[26]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으로 나뉘었는데, 두 집단 모두 성경 속 이스라엘인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토라를 준수할 것을 설교했지만, 하느님을 숭배하는 가장 신성한 장소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다. 사마리아인들은 게리짐산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신성하게 여겼다.[4]기원전 3세기, 사마리아인들은 게리짐산 인근에 도시를 건설했고, 그곳은 그들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27] 기원전 112~111년, 요한 히르카누스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이 게리짐산을 파괴하면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간의 종교적 경쟁은 극에 달했다.[27][28][29]
사원이 파괴된 후에도 게리짐산은 사마리아인들에게 계속해서 신성한 장소로 남아 있었으며, 이는 신약성경에도 언급된다.[30] 서기 138~161년경 나블루스에 있던 로마 조폐국에서 발행된 동전에는 파괴된 사마리아 사원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거대한 사원 단지, 조각상, 그리고 나블루스에서 사원으로 이어지는 웅장한 계단이 나타나 있다.[31]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중 게리짐산이나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서기 36년, 사마리아에서는 한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모세를 통해 묻힌 성스러운 그릇을 발굴하겠다고 주장하며 사마리아인들을 게리짐산으로 집결시키는 소요가 일어났다.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늘어나는 군중을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이 과정에서 충돌, 사망, 체포가 발생했다. 사마리아 지도자들은 필라투스의 잔혹 행위를 비난했고,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는 마르켈루스를 유다 통치자로 임명하고 필라투스를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사를 위해 로마로 소환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필라투스가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다.[32]
서기 67년 여름, 제1차 유대-로마 전쟁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게리짐산에 모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케리알리스에게 600명의 기병과 3,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를 보냈는데, 이는 사마리아인들의 방어 부족과 여름철 물 부족을 고려한 조치였다. 로마군이 도착하자 일부는 항복했지만, 다수는 싸우기로 결정했고, 이 충돌로 요세푸스에 따르면 11,600명에 달하는 사마리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32]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사마리아인들은 게리짐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475년에는 게리짐산 정상에 기독교 교회가 세워졌고,[33] 484년에는 제노 황제 치세에 테오토코스 (하느님을 낳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헌정된 순교자 기념 성당 유형의 팔각형 교회가 세워졌다.[5]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사마리아교를 불법화하고 교회를 둘러싸는 방어벽을 건설하도록 조치했다.[4][33] 같은 해 율리아누스 벤 사바르가 사마리아교 지지 반란을 일으켜 530년까지 사마리아 대부분을 점령, 교회를 파괴하고 사제와 관리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531년, 유스티니아누스는 가산 왕조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완전히 진압했고, 살아남은 사마리아인들은 대부분 노예가 되거나 추방되었다. 533년 유스티니아누스는 게리짐산에 성을 건설하여 남아 있던 소수의 불만을 품은 사마리아인들의 습격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했다.[4][33]
아부 알 파트의 "사마리아 연대기"에 따르면,[34] 아바스 왕조 알-무타와킬 통치 7년(855년) 수코트 기간 동안 나블루스의 총독은 사마리아인들이 큰 소리로 기도하고 쇼파르를 부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그 다음 목요일, 사마리아인들은 산에 올라가 방해 없이 큰 소리로 기도했다.[34]
4. 고고학적 발굴
이 지역의 발굴은 1983년에 시작되어 2006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요르단 통치 시기에 시작되어 이스라엘 통치 하에서 계속되었다.[37][31]
4. 1. 주요 유적
1983년부터 2006년까지 이 지역에서 발굴 작업이 진행되어 수만 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발굴 결과, 사마리아인 성전이 기원전 5세기 중반에 게리짐산 꼭대기에 존재했으며, 기원전 2세기 초에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고, 이후 기원전 111-110년에 유대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37]사마리아 성전 구역은 문을 제외하고 가로 96m, 세로 98m 크기였다. 성전 둘레에서는 수천 개의 도자기 그릇과 양, 염소, 소, 비둘기 등 동물을 희생 제물로 태운 뼈,[37] 테트라그라마톤(하느님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들이 발견되었다.[37]
475년에는 기독교 교회가 산 정상에 세워졌다. 요새화된 교회와 이전의 사마리아 성전으로 인해 게리짐산의 다소 평평한 꼭대기에는 광범위한 유적이 남아 있다. 교회 주변의 벽은 쉽게 볼 수 있으며,[4] 이전 성의 일부도 볼 수 있다. 초기 고고학 연구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지은 성이 이 지역의 이전 구조물(아마도 사마리아 성전)에서 가져온 돌을 사용했다고 추정했다.[33] 평원 중앙에는 움푹한 곳이 있는 매끄러운 표면이 있다.[33]

이 발굴은 요르단 통치 시기에 시작되어 이스라엘 통치 하에서 계속되었다. 발굴 결과, 코린트식 기둥, 가로 65m, 세로 44m 크기의 직사각형 플랫폼, 두께 2m와 높이 9m의 벽, 플랫폼에서 대리석 광장까지 이어지는 너비 8m의 계단이 발견되었다.[31] 또한 후기 로마 시대의 도자기가 발견된 저수조들도 발견되었다.[31]
이 유적들은 "구조물 A"로 불리며, 발굴된 동전과 외부 문헌 증거를 통해 하드리아누스 시대로 추정된다.[31] "구조물 A" 아래에서는 기반암 위에 지어진 대형 석조 구조물인 "구조물 B"가 발견되었다. "구조물 B"는 가로 21m, 세로 20m, 높이 8.5m의 거의 정육면체에 가깝고, 내부에 방이나 칸막이 벽이 없이 절단되지 않은 석회암 슬라브를 모르타르 없이 쌓아 만들었다.[31]
"구조물 B"는 가로 60m, 세로 40m, 벽 두께 1.5m인 안뜰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 기반암에 뚫린 저수조에서 발견된 도자기를 통해 헬레니즘 시대 이전 또는 그 시기로 추정된다.[31] 발굴 고고학자는 "구조물 B"가 사마리아인들이 기원전 5세기 또는 6세기에 지은 제단이라고 생각했다.[31]
5. 어원
게리짐산의 이름은 히브리 성경에 따르면 필리스티아인 근처에 살았던 부족인 "게리족의 산"을 의미할 수 있다. 이들은 다윗에게 정복당했다.[17] 또 다른 가능한 의미는 "둘로 잘린 산"이다.[33]
판관기에 나오는 요담에 대한 이야기에 따르면, 세겜은 "언약의 신"과 "언약의 주"를 의미하는 ''엘-브리트''의 성소가 있던 곳이었다. 이곳은 바알 브리트로도 알려져 있다.[38] 학자들은 이 장소에 대한 여호수아 이야기가 가나안 시대에 그곳에서 맺어진 언약에서 유래되었다고 제안했다.[39] 판관기 이야기에서 "세겜에 있던 기둥"은 근처 평원에 이름을 부여할 만큼 중요한 것으로 보이며, 이 기둥은 엘-브리트의 베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돌을 증인으로 세우는 여호수아 이야기는 후기 이스라엘 신학에 따라 어원을 제공하려는 시도일 뿐이다.[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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