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의 황제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역대 통치자들을 의미한다. 금나라는 여진족 추장 완안아골타가 1115년에 건국했으며, 금 태조가 초대 황제에 즉위했다. 금나라는 북송을 멸망시키고 요나라를 정복하는 등 영토를 확장했으나, 몽골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1234년에 멸망했다. 금나라 황제는 태조, 태종, 세종, 애종 등 총 10명이었으며, 이 외에도 추존된 황제들이 존재한다. 금나라는 멸망 이후 대진국 등 여러 세력이 등장하기도 했다.
2. 여진족과 금나라 건국
여진족은 만주 지역에 살던 민족으로, 12세기 초 아골타가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금나라를 건국하였다. 금나라는 1115년부터 1234년까지 존속했다.[1]아골타 이전의 여진족 추장들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이들은 부족 연합체의 성격을 유지했다.
2. 1. 여진족 추장
금나라 건국 이전, 여진족 추장들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금 태조 아구다 이전까지 이들은 부족 연합체의 성격을 유지했다.
* 중도 공방전, 개봉부 공방전, 하북구공: 금나라가 몽골에 수도와 하북 지역 대부분을 상실하였다.
* 삼봉산 전투 (1232년): 금나라 주력군이 몽골군에 대패하였다.
* 채주 전투 (1234년): 몽골군과 남송 연합군이 금나라를 멸망시켰다.
'''잔존국 대진국''' (1215년 건국, 1233년 멸망): 금나라 장수 포선만노가 동경에서 건국하였으나, 몽골에 항복하였다.
4. 1. 해상의 맹과 요나라 멸망
1115년 완안아골타가 이끄는 여진족은 송나라와 연합하여 요나라를 공격하기로 하는, 이른바 해상의 맹을 맺었다.[1] 이 동맹에 따라 송나라와 금나라는 각각 남쪽과 북쪽에서 요나라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1] 이 사건은 고려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요나라가 멸망하면서 거란족 유민들이 고려로 피난해 오기도 했다.[1]
4. 2. 정강의 변과 남송과의 관계
정강의 변으로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건국되었다.[3]1127년금나라 군대가 북송의 수도 카이펑을 함락하고 휘종과 흠종을 포함한 황족과 관료 등 3천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3] 이 사건을 정강의 변이라고 한다.[3] 휘종의 아들이자 흠종의 동생인 고종이 남쪽으로 피신하여 임안(현재의 항저우)에서 남송을 건국하였다.[3]
금나라와 남송 사이에는 여러 차례 전쟁이 벌어졌다.[3] 주요 전투로는 황천탕 전투, 화상원 전투, 요봉소 전투, 선인소 전투, 언성 전투, 순창 전투 등이 있다.[3]1141년 양국은 소흥화의를 맺고 화평 관계를 수립하였다.[3]
4. 3. 몽골과의 전쟁과 멸망
1211년몽골 제국은 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3] 몽골군은 야호령 전역에서 금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3] 중도 공방전을 벌여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를 함락 직전까지 몰고 갔다.[3] 금나라는 몽골에 강화를 요청하여 몽골군이 물러갔으나, 1215년 몽골군이 다시 중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3]
금나라는 수도를 개봉부로 옮겨 저항을 이어갔지만, 몽골군의 계속된 공격에 밀려 하북 지역 대부분을 상실했다.[3]1232년 삼봉산 전투에서 금나라의 주력군이 몽골군에 대패하면서 멸망이 가속화되었다.[3]1234년, 몽골군과 남송의 연합군이 채주 전투에서 금나라를 멸망시켰다.[3]
4. 4. 금나라 멸망 이후
몽골-금 전쟁에서 1234년 채주 전투로 금나라가 멸망한 이후, 금나라의 장수였던 포선만노는 1215년에 동경에서 대진국을 건국했다.[1] 대진국은 18년 만에 몽골에 항복하였다.[1]
5. 금나라의 문화
금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국가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1119년 완안아골타의 명으로 완안희윤이 여진 문자를 창제하였다.[1] 이는 한자의 해서체를 본떠 만든 것으로, 표의 문자와 표음 문자가 섞여 있었다.[1]
금나라의 통화, 건축물, 역사서에 대한 내용은 각각 통화, 회령부, 중도, 『금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1]
5. 1. 여진 문자
금나라의 여진족은 초기에는 고유 문자가 없어 거란 문자를 빌려 썼으나, 1119년 완안아골타의 명으로 완안희윤이 여진 문자를 창제하였다.[1] 이는 한자의 해서체를 본떠 만든 것으로, 표의 문자와 표음 문자가 섞여 있는 형태였다.[1]
여진 문자는 금나라의 공식 문자로 사용되었으며, 몽골의 침입으로 금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일부 사용되었다.[1] 특히, 조선세종대에 여진과의 관계에서 여진 문자가 사용되기도 하였다.[1]
여진 문자는 현대 한국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1] 여진어는 퉁구스어족에 속하며,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알타이어족에 속할 가능성이 있어 언어학적 비교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1]
금나라 건국 이전, 여진족은 고려와 잦은 군사적 충돌을 겪었다. 특히 고려 문종 때부터 여진족은 고려의 동북면(東北面) 변경을 자주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1107년 고려는 윤관을 원수로 삼아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축조하였다.[1] 그러나 9성 축조 이후에도 여진족의 침입은 계속되었고, 고려는 9성을 방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 결국 1109년 고려는 여진족에게 9성을 돌려주고 강화를 맺었다.[1]
금나라 건국 초기, 완안부는 고려와 외교 관계를 맺으려 했다. 1126년정강의 변 이후 금나라는 고려에 조공을 요구했고, 고려는 이자겸의 주도로 금나라의 요구를 수용하여 조공 관계를 맺었다.[1]
女眞중국어족은 1115년금나라 건국 이전부터 고려와 잦은 군사적 충돌을 겪었다. 특히 고려 문종 때부터 여진족은 고려의 동북면(東北面) 변경을 자주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다.[1] 이에 고려는 1107년윤관을 원수로 삼아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축조하였다.[1]
윤관이 이끄는 고려군은 여진족을 북방으로 몰아내고, 함흥 평야 지대에 9개의 성을 쌓아 국경을 확정하였다.[1]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함흥 일대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1]
그러나 9성 축조 이후에도 여진족의 침입은 계속되었고, 고려는 9성을 방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 결국 1109년 고려는 여진족에게 9성을 돌려주고 강화를 맺었다.[1] 이후 여진족은 금나라를 건국하고 고려와 군신 관계를 맺게 된다.
6. 3. 조공 관계
金朝중국어는 1126년 정강의 변 이후 고려에 조공을 요구했다. 고려는 이자겸의 주도로 금나라의 요구를 수용하여 조공 관계를 맺었다.[1]
참조
[1]
문서
世宗による追尊。
[2]
문서
世宗による追尊。
[3]
문서
世宗による追尊。
[4]
문서
即位前の王号。
[5]
문서
世宗により海陵郡王に降格された後、王号も剥奪され、庶人に落とされた。
[6]
문서
宣宗により即位前の衛王に戻された。
[7]
서적
大金国志
[8]
서적
金史 哀宗本紀
[9]
서적
大金国志 巻二十六
[10]
서적
大金国志 巻二
[11]
문서
熙宗による追尊。
[12]
문서
海陵王によって改称されたものの、世宗によって旧号に復された。(『[[金史]]』本紀第一第二・列伝第三)
[13]
문서
海陵王による追尊。
[14]
문서
世宗によって廟号・諡号ともに剥奪され、皇伯・太師・梁宋王に降格された。
[15]
문서
章宗による追尊。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