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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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대승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1527년에 태어나 1572년에 사망했다. 그는 김공집, 정희렴에게 수학하고, 김인후, 이항,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다. 특히 이황과 사단칠정 논쟁을 벌여 조선 유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문장에도 능하여 종계변무의 주문을 썼다. 1590년 광국공신에 녹훈되고, 정헌대부 이조판서 등으로 추증되었으며, 사후에는 월봉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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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승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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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기대승 |
한글 | 기대승 |
한자 | 奇大升 |
가타카나 | 기 데승 |
로마자 표기 | Gi Dae-seung |
일본어 읽기 | 기 다이쇼 |
양반 정보 | |
이름 | 기대승 |
한자 이름 | 奇大升 |
직책 | 조선의 성균관대사성 |
영의정 | 이준경 |
임금 | 조선 선조 |
자 | 명언(明彦) |
호 | 고봉(高峰) · 존재(存齋) |
시호 | 문헌(文憲) |
국적 | 조선 |
성별 | 남성 |
출생일 | 1527년 11월 18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청파 만리현 |
사망일 | 1572년 11월 1일 |
사망지 | 정읍 태인 |
매장지 | 광산구 광산동 산135 |
본관 | 행주(幸州) |
아버지 | 기진(奇進) |
어머니 | 진주 강씨 |
배우자 | 함풍 이씨 |
형제자매 | 기대림, 기대절 |
자녀 | 기효증, 기효민, 기효맹, 녀(울산 김씨 김남중에게 출가) |
친인척 | 부안 김씨 김점(金坫) |
분야 | 성리학 |
스승 | 정희렴 · 김인후 · 이황 |
주요 제자 | 정운룡 · 정즐 · 최시망 · 유은 · 이덕홍(이굉중) · 김경생 · 이운홍 · 윤진 |
주요 저작 | 《주자문록》, 《고봉집》, 《논사록》 |
서훈 | 광국공신 3등 추록 이조판서 추증 월봉서원에 제향 |
2. 생애
기대승은 전라남도 광주 출신으로, 이황과 김인후에게 학문을 배웠다. 일찍부터 경전과 역사, 제자백가에 통달했다. 1558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 대사성과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주희의 사단칠정과 이기론에 대해 이황과 오랜 기간 논쟁을 벌였는데, 이는 조선 유학계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성리학 발전에 기여했다. 만년에는 이준경의 정책에 반대하여 1572년 사직하고 고부군에서 사망했다. 저서로는 "고봉집", "주자문록", "논사록" 등이 있다.
1527년 한성부에서 기진과 진주 강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경기전 참봉이었다. 기묘사화로 인해 집안이 어려움을 겪자, 1530년 가족과 함께 광주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능을 보여 1537년 11세에 김공집의 밑에서 수학, 육갑, 오행 등을 배웠다. 1544년 중종과 1545년 인종이 승하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상을 치렀다.
1548년 함풍이씨와 혼인하였고, 슬하에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1546년 향시 진사과에 합격하고, 1547년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1549년 식년시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1554년 동당향시에서 장원하였다. 1557년 『주자문록』 3권을 편찬하였다.
1558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1562년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 예문관 대교를 역임했다. 1563년 승정원 주서, 예문관 봉교, 부사정을 거쳐 신진사류의 영수로 지목되어 삭직되었다가 기대항의 상소로 복직되었다. 이후 홍문관 부수찬, 경연검토관, 춘추관 기사관 등을 역임했다.
1564년 병으로 사직했다가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에 복직되었다. 1565년 병조좌랑, 성균관 직강, 이조정랑, 교서관 교리를 겸했다. 1566년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사간원 헌납, 의정부 검상·사인을 거쳐 1567년 원접사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이했다. 같은 해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고, 조광조, 이언적 등의 추존을 건의했다.
1568년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영참찬관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했다. 1569년 대사간, 좌승지를 거쳐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을사위훈 삭탈 문제로 논란이 되어 물러났다.
1570년 사직하고 낙향하여 고마산에 낙암 서실을 짓고 학문에 전념했다. 송순을 찾아 뵙고 「면앙정기」를 지었으며, 이황의 부음에 신위를 설치하고 통곡했다.
1571년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종계변무주청부사로 임명되어 상경하던 중 대사성에 제수되었고, 종계변무 주문을 썼다. 이후 공조참의,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낙향하던 중 태인에서 1572년 46세로 사망했다.
2. 1. 출생과 가계
1527년(중종 22) 11월 18일 한성부 청파 만리현(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에서 기진(奇進)과 진주 강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5] 아버지는 경기전 참봉이었다.고려 문하평장사 기순우의 후예로,[6] 고조부는 정무공 판중추부원사 기건, 증조부는 풍저창부사 기축, 조부는 홍문관 부응교 기찬이다. 기묘명현 중 한 명인 기준은 그의 계부(季父)이며, 원나라 혜종의 기황후[7]는 그의 11대조 기필선의 둘째 형 기윤숙의 4대손이다.
아버지 기진(奇進)은 1521년(중종 16) 동생 기준(奇遵)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8] 함경도 온성으로 유배된 후 교수형에 처해지는 불행을 겪었다. 1522년(중종 17) 과거에 응시하여 사마시에 합격했고,[9] 1527년(중종 22) 재상의 천거로 경기전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10]
1528년(중종 23) 선비 숙인 김씨의 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른 후 벼슬 뜻을 버리고, 1530년(중종 25) 부인의 고향인 영광 인근 광주 고룡리 금정 마을로 가족을 데리고 이사하였다.[11] 이때 이복 셋째 형 기원(奇遠)도 함께 낙담하여 인근 장성에 살았다. 이후 행주 기씨가 호남에 정착하게 되었다.
2. 2. 유·소년기
1534년(중종 29) 8세에 선비 진주 강씨(晉州姜氏)가 별세하니 애통함이 성인과 같았다.[12] 9세에 『효경』을 읽고, 『소학』(小學)을 외웠다. 1536년(중종 31) 10세에 부친 물재공을 따라 산사(山寺)에 들어가 글을 읽고 문자를 익혔다.1537년(중종 32) 11세에 향숙에 나아가 김공집(金公緝)의 밑에서 《대학장구》를 배우고 연구(聯句)를 지었다. 수학 및 육갑과 오행성쇠의 이치에도 정통하였다. 1540년(중종 35) 14세에 부친에게 『사략』을 배워 읽으니 문리가 훤하게 트였다.
1541년(중종 36) 15세에 130구에 이르는 서경부(西京賦)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용산(龍山) 정희렴(鄭希濂)이 글을 보고 칭찬하였다.[13]
1544년(중종 39) 18세 11월에 중종이 승하하고, 이듬해 1545년 7월에 인종이 승하하자 졸곡 때까지 곡을 하고 거친 음식을 먹었다.
2. 3. 혼인과 가정생활
1548년(명종 3) 22세 12월 나주에 사는 충순위 이임(李任)의 딸 함풍이씨와 혼인하였다. 1550년(명종 5) 8월에 큰아들 효증(孝曾)이 출생하였다. 1561년(명종 16) 9월 둘째 아들 효민(孝閔)이 태어났고, 1569년 울산 김씨 사인 김남중(1570~1636)에게 출가한 첫째 딸이 태어났으며, 1572년(선조 5) 2월 셋째 아들 효맹(孝孟)이 태어났다.2. 4. 수학
1546년(명종 원년) 20세에 향시 진사과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듬해 1547년(명종 2)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1549년(명종 4) 23세에 식년시 사마 양시에 합격하였다.[14][15] 1554년(명종 9) 봄, 용산(龍山) 정희렴(鄭希濂)의 상에 조문하였다. 같은 해 가을, 동당향시(東堂鄕試)에서 장원을 하였다.[16] 1557년 31세에 주자대전을 발췌하여 『주자문록(朱子文錄)』 3권을 편찬하였다.2. 5. 관료 생활
1558년(명종 13) 10월 32세에 식년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를 제수받았다.[20] 1562년(명종 17) 5월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기사관에 임명되었다가 12월 예문관 대교로 자리를 옮겼다.1563년(명종 18) 3월 승정원 주서, 5월 예문관 봉교, 부사정에 임명되었다. 8월 17일 신진사류[17]의 영수로 지목되어 훈구파 및 외척이었던 명종비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의 주도로 삭직되고 문외 출송을 당하였으나, 복재 기준의 아들 종형 기대항의 상소로 복직되었다. 9월 예문관 봉교에 제수되고 이전의 관직을 임명받았다. 12월 12일 독서당에 선발되어 사가독서를 하였다. 12월 21일 홍문관 부수찬 겸 경영검토관, 춘추관 기사관에 제수되었다.
1564년 3월 병으로 수찬에서 체직되고 전적 겸 지제교로를 임명받았다. 6월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에 임명되었다. 12월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565년(명종 20) 병조좌랑, 성균관 직강, 이조정랑에 임명되었다. 이후 교서관 교리를 겸하였다. 12월에 소재(穌齋) 노수신이 광주 북방에 있는 진국원(鎭國院)으로 옮기자 찾아가서 뵙고 인심도심설에 대하여 논하였다.
1566년 4월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헌납, 의정부 검상·사인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1월 원접사 종사관으로 충용되었다. 이후 사헌부 장령, 의정부 사인,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고, 5월 홍문관 응교에 임명되었다.
1567년(선조 즉위년) 7월 원접사 종사관이 되어 관서에 가서 명나라 사신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을 영접하여 도성에 들어왔다. 10월 5일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다. 10월 23일 입시하여 기묘년 이후의 시비를 가릴 것을 청하고 기묘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죽임을 당한 조광조·이언적 등에 대한 추존을 건의하였다.[18] 10월 23일 홍문관 전한 겸 예문관 응교에 제수되었다. 11월 석강에서 예기를 강하고 사친에게 치제하는 것이 잘못임을 아뢰었다. 1568년(선조 1) 2월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영참찬관에 임명되었다가, 4월 병으로 동부승지에서 체직되었다.
1569년(선조 2) 3월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4월 좌승지에 제수되었다가 7월 병으로 체직하였다. 8월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을사위훈을 논할 때 "을사의 녹훈이 위훈이 아닐 뿐더러 또 선왕이 이미 정한 것이니 삭탈할 수 없다"고 하여 삭탈을 주장한 사람들의 반발을 사 9월에 물러났다.[19]
1570년(선조 3) 2월 대신들에게 허물을 입었다 하여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4월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5월 고마산(顧馬山) 남쪽 아래에 낙암(樂庵) 서실을 완성하였다. 10월에 낙향한 면앙(俛仰) 송순을 찾아 뵙고 「면앙정기」(俛仰亭記)를 지었다. 12월에 퇴계 이황의 부음을 듣고 신위를 설치하고 통곡하였다.
1571년(선조 4) 4월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9월 이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선조 5) 2월 종계변무주청부사에 임명되어 조정에 나가는 도중, 3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고 종계변무 주문을 썼다. 7월에 공조참의에 제수되고 중국에 들어갔다 돌아오는 도중인 9월에 대사간에 제배되었다. 서울에 와서 병으로 체직하고 10월에 낙향하였다.
2. 6. 낙향과 최후
1570년(선조 3) 2월에 낙향하였다. 4월에 다시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할 수가 없어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후 고마산 남쪽 아래에 서실 낙암을 짓고 살면서 학문에 전념했는데, 제자가 되어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22] 10월 7일 관직을 사임하고 낙향한 담양의 송순을 찾아뵙고 「면앙정기」(俛仰亭記)를 지었다. 12월 8일 퇴계 이황이 별세하였다는 부음을 듣고 신위를 설치하고 통곡하였다.1571년(선조 4) 1월에 안동 도산에 사람을 보내어 퇴계 이황의 영전에 조문하였다. 4월에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과 예문관직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9월에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선조 5) 2월에 종계변무주청부사에 임명되어 조정에 나가는 도중, 3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고 종계변무 주문을 썼다. 7월에 공조 참의에 제수되고 중국에 들어갔다 돌아오는 도중인 9월에 대사간에 제배되었다. 서울에 와서 병으로 체직하고 10월에 낙향하였다. 10월 3일에 낙향하던 중 10일 천안에 도착하였는데 볼기에 종기가 발병하였다. 15일에 정읍 태인에 도착하니 병이 극심하여 관사에 머물며 치료하였다. 25일 병이 위독해지자 사돈 매당 김점(金坫)이 황급히 찾아와 할 말을 물으니, 관사에서 죽을 수 없다 하며 사돈집으로 가기를 재촉하니 28일 저녁 무렵에 도착하였다. 선조가 병세가 위중함을 듣고 특별히 어의와 약을 내려보내 병을 구완케 하고 어찰을 보내어 위문하도록 하였다.[23]
1572년(선조 5) 11월 1일 정읍 태인에서 46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이듬해 2월 8일 나주 북쪽 오산리 통현산 너부실 언저리에(현재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산135 묘좌 유향) 안장하였다.
3. 학문 세계
어릴 때 김공집, 용산 정희렴에게서 배우고, 성장해서는 김인후, 이항, 이황 문하에서 공부하며 선학들을 놀라게 하는 새로운 학설을 많이 제시하였다. 특히 이황과 8년 간에 걸쳐 진행한 사칠이기논쟁은 조선 유학사에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유명하다. 이후 이황도 그의 이론을 상당 부분 수용하였다.
고전에 능통하고, 문학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문장에도 재주가 뛰어나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주문(奏文)을 썼다. 박순, 박광옥, 조희문, 기효간, 백광훈 등과 교류하였다.
3. 1. 이황과의 사단칠정 논쟁
1558년(명종 13) 서울에 과거 시험을 보러 가던 도중 장성의 하서 김인후와 태인의 일재 이항을 만나 태극도설을 논하였다. 그해 8월에는 서울에서 추만 정지운의 《천명도》를 보았고, 10월에는 서울에 있던 퇴계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누었다.[20]1559년(명종 14) 1월 퇴계 이황의 서신을 받아보고, 3월 퇴계에게 답서를 올려 사칠이기설을 논변했다. 8월에는 퇴계에게 편지를 올려 출처와 거취의 의리에 대하여 논하고, 『성정설』을 주장하였다. 그해 겨울, 인근에 살던 하서 김인후에게 나아가 이황의 『사단칠정 이기호발설』에 대해 질문하였고, 하서 김인후는 세밀하게 분석하여 변론을 투철하고 정밀하게 해주었다.[21]
1560년(명종 15) 8월에는 그동안 하서 김인후로부터 얻은 소득을 바탕으로 「사칠설」 및 「장서」를 저술하여 퇴계 이황에게 드렸으며, 퇴계와 「사칠호발」에 대해 강론할 때 이를 밝히니 수만 언에 이르렀다.
1559년(명종 13)부터 1566년까지 퇴계 이황과 8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사칠이기논쟁의 서신은 '퇴계ㆍ고봉'의 「사칠 왕복서」로 세상에 전해진다. 이 논쟁은 조선 유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때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고 하여 '주정설'을 주장했다.
1566년(명종 21) 그동안 하서 김인후로 부터 얻은 전설(前說)을 다 버리고, 결론에서 형식적으로 퇴계 이황의 설에 자신의 설을 합치시키며 이황을 스승으로 받들었다. 후대에 이러한 그의 행동은 논리의 일관성을 잃어 버리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황과 사단칠정과 이기론의 관계를 두고 오랜 기간 논쟁을 벌였는데, 이 논쟁은 후진 유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조선 유학계의 중심 과제 중 하나가 되었으며, 성리학의 수준 향상에 기여했다.
3. 2. 학문적 영향
1558년(명종 13) 서울에서 과거 시험을 보러 가던 중 김인후와 이항을 만나 태극도설을 논하였다.[20] 서울에서 정지운의 《천명도》를 보았고,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누었다. 귀향하면서 다시 이항을 만나 재차 논의했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김인후는 이와 기는 혼합되어 태극이 음양을 떠나 존재할 수 없지만, 도와 기의 구분은 분명하여 태극과 음양은 하나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20]1559년(명종 14) 이황에게 서신을 보내 사칠이기설을 논변하고, 『성정설』을 주장하였다. 김인후는 이황의 『사단칠정 이기호발설』에 대한 질문에 상세히 분석하여 변론하였다.[21]
1560년(명종 15) 김인후가 세상을 떠나자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21] 정지운과 서신으로 천명도에 대해 논하고, 김인후에게서 얻은 내용을 바탕으로 「사칠설」 및 「장서」를 저술하여 이황에게 보내고, 이황과 「사칠호발」에 대해 토론하였다.
1559년(명종 13)부터 1566년까지 이황과 8년간에 걸쳐 사칠이기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조선 유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퇴계ㆍ고봉'의 「사칠 왕복서」로 세상에 전해진다. 기대승은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고 하는 '주정설'을 주장했다.
1566년(명종 21) 김인후에게서 얻은 전설(前說)을 버리고, 결론에서 이황의 설에 자신의 설을 합치시키며 이황을 스승으로 받들었다. 후대에 이러한 그의 행동은 논리의 일관성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릴 때 김공집, 용산 정희렴에게 배우고, 성장하여 김인후, 이항, 이황 문하에서 공부하며 선학들을 놀라게 하는 새로운 학설을 제시하였다. 이황과 8년 간의 사칠이기논쟁(四七理氣論爭)은 조선 유학사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황도 그의 이론을 상당 부분 수용하였다.
고전에 능통하고, 문학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문장에도 재능이 뛰어나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주문(奏文)을 썼다. 박순, 박광옥, 조희문, 기효간, 백광훈 등과 교류하였다.
이황과 김인후의 문인으로, 경전을 널리 섭렵하고 고금의 역사와 전적, 구류백가에 통달했다. 1558년 과거에 급제하여 사관, 대사성, 대사간을 역임했다. 주희의 사단칠정과 이기론을 두고 이황과 오랜 기간 논쟁을 벌였는데, 이는 조선 유학계의 중심 과제가 되었으며, 성리학의 수준 향상에 기여했다.
4. 저서
- 《고봉집》
- 《주자문록》
- 《논사록》
- 《왕복서》
- 《이기왕복서》
5. 평가 및 추증
1590년(선조 23) 광국공신 3등에 녹훈되고,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 경연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에 추증되었으며,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졌다.[1] 1646년(인조 24) 문헌(文憲)의 시호가 추증되었다.[2] 1884년(고종 21) 문묘 종향을 상소하였으나 불허되었다.[3]
기대승은 이황과 김인후의 제자로, 경전을 널리 공부하고 고금의 역사와 전적, 구류백가에 통달했다. 주희가 주장한 사단칠정과 이기론의 관계에 대해 이황과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는데, 이는 후대 유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조선 유학계의 중심 과제 중 하나가 되었으며, 성리학의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5. 1. 긍정적 평가
기대승은 이황과 김인후의 제자로, 경전을 널리 공부하고 고금의 역사와 전적, 구류백가에 통달했다.[1] 1558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고, 대사성,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1]주희가 주장한 사단칠정과 이기론의 관계에 대해 이황과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는데, 이는 후대 유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조선 유학계의 중심 과제 중 하나가 되었으며, 성리학의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1]
5. 2. 추증
1590년(선조 23) 광국공신 3등에 녹훈되고,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의금부성균관춘추관사에 추증되었으며,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졌다.[1] 1646년(인조 24) 문헌(文憲)의 시호가 추증되었다.[2] 1884년(고종 21) 문묘 종향을 상소하였으나 불허되었다.[3]6. 사후 서원 건립 및 제향
1578년(선조 11) 장남 함재 기효증(奇孝曾)이 선친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고마봉(叩馬峯) 아래 낙암(樂菴, 현 광산군 신룡동)가에 사우(祠宇) '''망천사'''(望川祠)를 창건하고 제향하였다.[26]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었다. 1646년(인조 24) 사우 망천사를 망월봉(望月奉) 아래 동천(桐川, 현 광산구 광산동 광곡 마을)으로 옮겼다. 1654년(효종 5) 8월 유림들의 소청(疏請)으로 월봉(月峯)이라 사액이 내려졌다. 1655년(효종 6) 4월 예조낭관 원격(元格)이 제문을 받들고 와서 치제하였다.
1669년(현종 10) 월봉서원을 중창하였다. 사우(祠宇)·동재(明誠齋)·서재(存省齋)·강당(忠信堂)을 건립하여 사액 서원으로서의 규모를 갖추었다. 1671년(현종 12) 문간공 눌제 박상, 문충공 사암 박순을 이향(移享)하였다. 1683년(숙종 9) 문원공 사계 김장생을 추가 배향하였다. 1693년(숙종 19) 나주 경현서원을 추가 배향하였다. 1769년(영조 45) 문경공 신독제 김집을 추가 배향하였다. 1788년(정조 12) 4월 예조좌랑 박흥복(朴興福)이 명을 받들어 치제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훼철되었다. 1938년 강당 빙월당(氷月堂) 5칸을 신축하였다.[27] 1972년 고직사(庫直舍) 4칸을 건립하였다. 1979년 8월 빙월당(氷月堂)이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로 등록되었다. 1982년 사당 숭덕사(崇德祠)와 내삼문(內三門)을 건립하였다. 1983년 장판각(藏板閣)을 건립하였다. 1990년 명성재(明誠齋) 4칸과 존성재(存省齋) 4칸 및 외삼문(外三門)을 건립하였다. 1991년 서원을 복원하고 위패를 봉안하였으며, 의전(儀典)을 순성(順成)하였다. 1992년 《고봉문집》 목판 474매가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었다. 1998년 묘정비를 건립하였다. 2004년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춘 · 추향제 : 매년 음력 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에 시행한다.
7. 관련 문화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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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호 고봉의 유래
[2]
문서
기대승 출생지 (기대승 년보)
[3]
서적
고봉 기선생 행장
기암집 권10
[4]
서적
승정원 좌승지 조공 묘갈명
남계집 권74
[5]
문서
기대승 출생지 및 가족 이주 (기대승 연보)
[6]
문서
기순우와 기대승의 관계
[7]
문서
기대승의 친정 아버지
[8]
문서
기묘사화
[9]
문서
기대승 어머니와 과거 응시
[10]
문서
기대승 형제의 출생 연도
[11]
문서
기대승 생가 위치
[12]
문서
기대승의 배우자
[13]
문서
기대승의 서경부 평가
[14]
문서
기대승의 과거 시험 성적
[15]
문서
기대승의 알성시 낙방
[16]
문서
향시에 대한 설명
[17]
문서
신진사류 명단
[18]
문서
양재역 벽서사건
[19]
문서
기대승의 해직
[20]
문서
기대승과 이황의 태극 논쟁
[21]
문서
기대승의 김인후 추모 제문
[22]
문서
기대승의 문인들
[23]
문서
기대승 구원 실패
[24]
문서
이덕홍의 다른 이름
[25]
문서
기대승과 김인후의 관계
[26]
문서
기대승 서원 건립 지원
[27]
문서
빙월당 당호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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