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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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록매체는 인류가 정보를 보존하고 전달하기 위해 사용해 온 다양한 수단을 의미한다. 선사시대에는 언어, 몸짓, 그림, 매듭문자 등이 사용되었고, 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뼈, 갑골, 바위 등에 기록을 남겼다. 역사시대에는 문자가 발명되면서 점토판, 파피루스, 양피지, 종이 등 다양한 수록매체와 필기구들이 등장했다. 인쇄술의 발명은 정보의 대량 생산과 보급을 가능하게 했으며, 목판 인쇄와 금속활자 인쇄를 거쳐 현대적인 인쇄 기술로 발전했다. 이러한 기록매체의 발전은 인류의 문화, 지식, 사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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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매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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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매체 | |
정의 | 정보를 기록하는 데 사용되는 물리적 객체 또는 장치 |
유형 | |
아날로그 기록 매체 | 종이 사진 필름 자기 테이프 축음기 |
디지털 기록 매체 | 플래시 메모리 광 디스크 (CD, DVD, 블루레이 디스크) 하드 디스크 드라이브 자기 테이프 |
속성 | |
저장 용량 | 기록 매체가 저장할 수 있는 정보의 양 |
접근 속도 | 기록 매체에서 정보를 읽거나 쓰는 데 걸리는 시간 |
내구성 | 기록 매체가 손상되지 않고 정보를 유지할 수 있는 기간 |
휴대성 | 기록 매체를 얼마나 쉽게 휴대할 수 있는지 |
비용 | 기록 매체 비용 |
응용 | |
아날로그 기록 매체 | 문서 저장 사진 및 영화 저장 오디오 및 비디오 저장 |
디지털 기록 매체 | 컴퓨터 데이터 저장 오디오 및 비디오 저장 소프트웨어 저장 |
같이 보기 | |
관련 기술 | 파일 포맷 데이터 압축 데이터 저장 |
기타 | |
추가 정보 | 기록 매체는 기술 발전과 함께 진화하고 있으며, 새로운 유형의 기록 매체가 지속적으로 개발되고 있다. 기록 매체를 선택할 때 저장 용량, 접근 속도, 내구성, 휴대성, 비용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
2. 선사시대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 최초의 기록 매체는 인간이었다. 인간은 소리와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했고, 점차 음성은 언어로 발전하였다. 언어는 더 많은 정보 교환을 가능하게 하여 자연환경에 적응하고 생활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선사시대에는 의사 전달 등을 위하여 뼈나 거북 등딱지, 돌벽, 바위 등에 새기거나 나무껍질이나 살아있는 나무에 표시를 남겼다.
이후 고대 사람들은 그림문자의 의미를 더욱 구체화하고 보편성을 갖게 하려고 상형문자를 고안하였다.
2. 1. 구술 및 신호
인간의 말은 최초의 기록매체였지만, 음성이 전달되는 범위와 시간 내에서만 소통이 가능하여 많은 사람에게 동시에 전달하기 어려웠다. 또한 인간의 기억력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정보가 유지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사회가 발달하고 복잡해지면서 전달해야 할 정보의 양이 많아지자, 이러한 전달성과 보존성의 문제는 더욱 중요해졌다.연기 신호(봉수)나 땅, 눈, 모래 등에 그린 그림은 시각적 정보를 전달했지만, 이 역시 인간의 말처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았다.
2. 2. 그림문자
그림문자는 매듭문자보다 편리하고 합리적인 기록 매체였으며, 직접적·구체적이고 다양하면서도 기록성이 더 뛰어났다. 기원전 5만년경에 최초로 나타난 돌이나 뼈에 새긴 그림은 기원전 1만년경에 그림문자로 발전한다. 처음에는 말로 전해지던 신화와 주변 사물을 사실적인 그림으로 표현하였으나, 후대로 가면서 간략하고 상징적인 그림으로 바뀌었으며, 생각과 감정 및 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기원전 5천년경 동굴에서 살던 사람들은 동굴 벽면 등에 원과 선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려 기록으로 남겼다. 이러한 그림문자는 오늘날 암각화의 형태로 세계 여러 곳에 존재하고 있다.2. 3. 매듭문자
매듭문자는 끈에 매듭을 만들어 서로 의사를 표시하던 방법으로, 아직 온전한 문자는 아니었다. 고대 중국, 페르시아, 잉카제국 등에서 사용되었다.2. 4. 기타 기록매체
뼈, 막대, 조가비띠 등도 기억과 의사소통을 위해 쓰였다. 이 시기는 문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문자처럼 쓰인 시기이며, 기억보조시대라고도 부른다.3. 역사시대
문자의 발명은 기록매체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문자가 발명된 이후, 기록의 전달성과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수록매체가 등장했다. 원시시대부터 사용되던 바위, 동굴 벽, 짐승의 뼈, 나무판, 가죽 등이 계속 사용되었고, 초기 문자시대에는 점토판, 파피루스, 양피지 등이 발명되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종이가 발명되면서 기록 매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쐐기문자는 점토판에 기록되었다. 기원전 3천년경 이집트에서는 상형문자가 만들어져 초기에는 돌에 새겼으나 후기에는 파피루스에 기록되었다. 기원전 1천년경 페니키아인은 쐐기문자와 이집트 상형문자를 간소화하여 오늘날 알파벳의 기원이 되는 문자를 만들었다.
기원전 26세기 무렵 파피루스(papyrus)라는 식물을 이용하여 수록매체를 만들었는데, 그 수록매체는 식물의 이름을 따서 파피루스라고 불렸다. 필기매체로는 갈대 줄기를 연필 모양으로 한쪽 끝을 뾰족하게 잘라 만들고 물감을 머금을 수 있게 홈을 파서 썼다(갈대붓).
기원전 500년경부터 선사시대부터 쓰이던 가죽을 개량한 수록매체인 양피지가 발명되었는데, 양뿐만 아니라 송아지나 염소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양피지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방은 물론 페르시아와 아시아 지역에서 쓰였으며, 3세기경 로마제국, 4세기 유럽에서 서사 재료를 양피지가 독점하게 되었다.
뼈나 거북등갑은 5만 년 전부터 그림 등을 새기는 수록매체로 사용되었다. 문자가 쓰이기 전부터 그림이나 기호를 새겨 점을 치는 데 사용하였기에 갑골복사(甲骨卜辭)라고도 불렸으며, 기원전 14세기 무렵에는 그림문자 또는 상형문자가 새겨지게 되었다.
죽간(竹簡)과 목독(木牘)은 중국에서 기원전 14세기경부터 3·4세기(주변국에서는 8세기)까지 쓰였다고 여겨진다. 그 둘을 합쳐 ‘간독’(簡牘)이라 부르기도 한다. 서주 및 춘추전국시대(기원전 11세기~기원전 3세기)에 금속에 새기거나 주물로 만든 명문(銘文)은 금문(金文)이라고도 하며, 쇠북(청동 종)이나 쇠솥(청동 솥)에 주로 보여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불린다. 견백(絹帛)은 기원전 4·5세기부터 5·6세기까지 사용되었으며, 그 문서 또는 책을 백서(帛書), 거기 그린 그림은 백화(帛畵)라고 불렀다.
105년 채륜이 종이를 공식적으로 처음 발명한 것은 후한 시대로, 점차 서쪽으로 전래되어 유럽에서는 12세기경에 비로소 만들어 사용했다. 당나라와 사라센 제국이 중앙아시아 파미르 고원을 놓고 패권을 다툰 탈라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간 중국인 제지 기술자가 757년 사마르칸트에 처음으로 제지공장을 세웠다. 제지술은 12세기경 무어인에게 전파되어 당시 그들이 정복하고 있던 스페인에 전해짐으로써 유럽 지역에도 처음으로 제지공장이 생겨났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거쳐 독일이나 영국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고대에는 돌판이나 동굴 벽에 돌로 그림이나 기호를 새겼다. 고대 수메르에서는 점토판에 갈대 줄기로 만든 바늘로 글자를 새겼으며, 갑골에는 돌칼이나 돌바늘, 나중에는 금속 칼로 새겼다. 파피루스에는 갈대붓을 사용하였고, 양피지에는 깃촉 펜을 사용하였다. 초기 잉크는 그을음을 기름이나 물에 개어 만들었으며, 점차 다양한 재료와 제조법이 개발되었다. 선진시대에는 나뭇가지에 물감을 머금을 수 있게 만들어 죽간에 옻칠을 묻혀 글씨를 썼는데, 옻칠로 쓴 글자가 마치 올챙이와 비슷하다고 하여 과두문자(蝌蚪文字)로 불렸다. 먹은 원래 천연 재료인 ‘석인’ 또는 석묵(石墨)의 액에 옻칠을 사용하였으나, 문화가 발달하면서 그을음과 아교를 섞어 찧어 만드는 제묵(製墨, 제먹)의 단계로 발전하였다. 모필(毛筆)로 불리는 붓은 기원전 3세기 무렵 몽념이 발명했다고 전해지지만, 그 이전에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쇄술의 발명은 정보의 대량 생산과 보급을 가능하게 하여, 기록 매체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쇄 기록 매체는 최초의 대중 매체로, 종이를 기본 재료로 사용하여 인쇄술을 통해 하나의 기록을 여러 사람에게 동일한 형태로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도서 등의 기록물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널리 퍼뜨릴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목판 인쇄나 활자 인쇄와 같은 인쇄 기술은 필기 매체가 직접 손으로 쓰는 방식에서 미리 새겨둔 매체(목판 또는 활자)에 잉크를 묻혀 찍어내는 방식으로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인쇄술 발명 이전에는 압인법, 날염법, 탁인법과 같은 방법으로 기록을 남겼으며, 이후에는 필사를 통해 기록을 전달했다. 목판 인쇄는 동양의 당나라, 서양에서는 종이가 보급된 12~13세기 이후에 발명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은 751년 이전에 통일신라 시대에 인쇄된 무구정광다라니경 목판본이다. 초기 활자로는 교니활자(도활자)라고 불리는 흙으로 만든 활자가 있었으며, 북송의 심괄이 저술한 《몽계필담》에는 필승이 교니활자 인쇄술을 발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목활자인 녹권자가 공문서 인쇄에 사용되기도 했다. 금속활자 인쇄술의 등장으로 책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어 교육과 지식의 보급이 확대되었고, 사회 전반에 걸쳐 변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3. 1. 전통적 수록매체
문자가 발명된 이후, 기록의 전달성과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수록매체가 등장했다. 원시시대부터 사용되던 바위, 동굴 벽, 짐승의 뼈, 나무판, 가죽 등이 계속 사용되었고, 초기 문자시대에는 점토판, 파피루스, 양피지 등이 발명되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종이가 발명되면서 기록 매체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쐐기문자는 점토판에 기록되었다. 기원전 3천년경 이집트에서는 상형문자가 만들어져 초기에는 돌에 새겼으나 후기에는 파피루스에 기록되었다. 기원전 1천년경 페니키아인은 쐐기문자와 이집트 상형문자를 간소화하여 오늘날 알파벳의 기원이 되는 문자를 만들었다.
3. 1. 1. 점토판
기원전 26세기 고대 수메르인들은 쐐기문자를 갈대 줄기로 만든 바늘로 점토판에 글을 썼는데, 초기에는 상형문자에 가까웠으나 후대로 가면서 추상화·문자기호화되었다. 수메르의 점토판은 일반적으로 직사각형이며, 대개 폭이 약 5.08cm~약 7.62cm, 길이가 약 7.62cm~약 10.16cm, 두께가 약 2.54cm 정도였다. 그러나 삼각형, 원형, 원추형 점토판도 있었으며, 공문서, 법률 기록, 계약, 약속어음 등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점토판은 부피가 크고 무거워서 사용하기 불편했고, 하나의 책은 수십 내지 수백 개로 이뤄져 있어 보관과 열람이 매우 불편하였다. 그럼에도 보존성은 매우 뛰어나 현존하는 것 중에는 고대 바빌로니아나 앗시리아 지방에서 발굴된 기원전 4천 년경의 점토판도 있어 당시의 문헌 연구에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3. 1. 2. 파피루스
기원전 26세기 무렵 파피루스(papyrus)라는 식물을 이용하여 수록매체를 만들었는데, 그 수록매체는 식물의 이름을 따서 파피루스라고 불렸다. 필기매체로는 갈대 줄기를 연필 모양으로 한쪽 끝을 뾰족하게 잘라 만들고 물감을 머금을 수 있게 홈을 파서 썼다(갈대붓). 초기에는 폭 약 22.86cm~약 27.94cm, 길이 약 12.70cm~약 22.86cm인 파피루스 낱장에 쓰이다가, 나중에는 그것을 20개 정도 이어서 만든 두루말이가 표준 규격이 되었다. 이러한 파피루스는 나중에 종이를 뜻하는 영어 paper의 어원이 된다.파피루스는 양피지나 종이가 사용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쓰이면서 인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사용하기 편리하고 기록면도 넓어서 널리 사용되었으나, 재료가 부스러지기 쉬운데다 습기에 매우 약하고 보존성은 좋지 못하였다.
3. 1. 3. 양피지
기원전 500년경부터 선사시대부터 쓰이던 가죽을 개량한 수록매체인 양피지가 발명되었는데, 양뿐만 아니라 송아지나 염소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양피지는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방은 물론 페르시아와 아시아 지역에서 쓰였으며, 3세기경 로마제국, 4세기 유럽에서 서사 재료를 양피지가 독점하게 되었다. 파피루스의 최대 결점인 약한 내구성을 해결한 양피지는 장기 보존을 가능하게 했지만 값이 비싸고 재료도 한정되었다. 필기매체로는 깃촉 펜이 사용되었다.양피지를 이용하여 로마제국에서 발명한 코덱스(codex) 형태는 양피지를 네모나게 자른 다음 쪽 배열을 한 것인데, 이는 오늘날의 책과 같은 특징을 갖추게 되어 학문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코덱스(codex)는 책자본(冊子本)이란 의미로 쓰이는데, 그 어원은 나무토막을 뜻하는 라틴어 'caudex'이며, 수록매체의 형태로 볼 때 오늘날의 책은 모두 코덱스로 볼 수 있다.
3. 1. 4. 갑골
뼈나 거북등갑은 5만 년 전부터 그림 등을 새기는 수록매체로 사용되었다. 문자가 쓰이기 전부터 그림이나 기호를 새겨 점을 치는 데 사용하였기에 갑골복사(甲骨卜辭)라고도 불렸으며, 기원전 14세기 무렵에는 그림문자 또는 상형문자가 새겨지게 되었다. 갑골문은 한자의 초기 형태로 여겨진다.3. 1. 5. 죽간과 목독
죽간(竹簡)과 목독(木牘)은 중국에서 기원전 14세기경부터 3·4세기(주변국에서는 8세기)까지 쓰였다고 여겨진다. 그 둘을 합쳐 ‘간독’(簡牘)이라 부르기도 한다. 간독은 종이가 발명된 이후에도 널리 쓰였을 만큼 가장 보편적인 필기매체였으며, 한자를 종서하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나가는 방법이나, 심지어 종이가 발명된 이후의 서적의 단위, 용어 및 행격의 형식까지도 모두 간독에서 유래하였다. 좁고 긴 1매의 죽판을 간(簡)이라 하였으며, 보통 1행으로 문자가 쓰여졌다. 글자 수가 많으면 여러 매의 간에 써서 끈으로 연결하였는데, 이것을 책(冊) 혹은 책(策)이라고 하였다. 책(冊)은 비교적 짧고 구체적인 기록에 사용되었으며, 내용이 비교적 길고 몇 책을 포괄하는 문장의 단위에는 편(篇)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편은 실로 엮은 것을 사편(絲編), 가죽으로 엮은 것을 위편(韋編)이라 불렀다. 두루마리 형태일 때는 권(卷)이라고 불렀다. 책·편·권은 오늘날에도 쓰이는 용어이다.전한 때부터는 백서(비단 문서)와 후한 때부터는 지서(종이 문서)와 함께 쓰이다가 후에 점차 지서로 대체되었다. 간독은 갑골이나 청동기보다 글을 쓰기 쉽고 가격이 저렴한 장점이 있었으나, 무겁고 휴대와 대량 보관이 불편하며 편(篇)으로 만들어진 죽간이 탈락하면 유실되기 쉽다는 단점이 있었다.
3. 1. 6. 금문
서주 및 춘추전국시대(기원전 11세기~기원전 3세기)에 금속에 새기거나 주물로 만든 명문(銘文)은 금문(金文)이라고도 하며, 쇠북(청동 종)이나 쇠솥(청동 솥)에 주로 보여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불린다. 주로 청동으로 제작되었기에 청동명문이라고도 불린다.3. 1. 7. 견백과 백서
견백(絹帛)은 기원전 4·5세기부터 5·6세기까지 사용되었으며, 그 문서 또는 책을 백서(帛書), 거기 그린 그림은 백화(帛畵)라고 불렀다. 비단이나 죽책은 두루마리처럼 말아서[捲] 보관하였는데, 이를 권(卷)이라고 했다. 비단은 유연하고 가벼우며 내구성과 흡습성이 있었다. 또한 표면이 백색이기 때문에 글씨가 분명하고 가벼워서 휴대와 보관이 쉬웠다. 부피가 적어서 죽이나 목보다 대량으로 수장할 수 있었고, 글을 쓰기 용이하며 수시로 재단할 수 있고 폭이 넓어서 그림을 넣기가 쉬운 장점이 있었다. 반면에 가격이 비싸고 생산량이 적어 대중에게 보급되지 못했고, 귀족과 문인들의 사치품으로 쓰여 간독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전국시대 이후부터 육조까지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후한에 이르러 종이가 개량된 후로는 점차 사라졌고, 수·당 이후에는 예술적인 회화나 서예의 재료로 쓰였을 뿐 보편적인 서적의 기록 재료로는 쓰이지 못하였다.3. 1. 8. 종이
105년 채륜이 종이를 공식적으로 처음 발명한 것은 후한 시대로, 점차 서쪽으로 전래되어 유럽에서는 12세기경에 비로소 만들어 사용했다. 다만, 제지술의 원천이 되는 견사(비단)를 만드는 방직기술에서 발전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도 종이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한서》에는 "등황후(鄧皇后, 81~121년)가 영원 14년(102년) 즉위하자 만국에서 공물을 헌납하였는데, 세공지(歲供紙)와 먹(墨) 등이었다"라고 하여 종이가 진상품이었음을 보여준다. 채륜은 수부(樹膚 : 나무껍질), 마두(麻頭), 폐포(布 : 못쓰는 천), 어망(魚網) 등을 물에 불려 찧어서 종이를 만들었는데, 이는 오늘날 기계로 나무를 빻고 백토 등을 가하여 망(網)을 통해 펄프 형태로 처리하는 현대식 제지법과 기본적인 원리가 같다. 초기에는 대량생산이 불가능하고 품질도 좋지 않아 기록에 불편함이 있었고, 평민이 만든 값싼 물품이라는 인식 때문에 지식층이나 상류층은 지위 손상을 염려하여 사용을 경시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삼국시대와 진(晋)나라를 거쳐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점차 사라지고 종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종이가 간독과 백서의 단점을 보완하고 대량생산이 가능해져 저렴한 가격으로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종이는 전문적인 서사(쓰고 베끼다) 및 인서(印書 : 책을 인쇄)의 재료로 사용되었고, 오늘날까지 그 위력이 과시되고 있다.당나라와 사라센 제국이 중앙아시아 파미르 고원을 놓고 패권을 다툰 탈라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간 중국인 제지 기술자가 757년 사마르칸트에 처음으로 제지공장을 세웠다. 제지술은 12세기경 무어인에게 전파되어 당시 그들이 정복하고 있던 스페인에 전해짐으로써 유럽 지역에도 처음으로 제지공장이 생겨났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거쳐 독일이나 영국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종이 보급이 본격화된 것은 인쇄술이 발명되고 발전된 뒤라고 할 수 있다.
3. 2. 필기매체와 물감
고대에는 돌판이나 동굴 벽에 돌로 그림이나 기호를 새겼다. 고대 수메르에서는 점토판에 갈대 줄기로 만든 바늘로 글자를 새겼으며, 갑골에는 돌칼이나 돌바늘, 나중에는 금속 칼로 새겼다.3. 2. 1. 펜과 잉크
파피루스에는 갈대붓을 사용하였고, 양피지에는 깃촉 펜을 사용하였다. 초기 잉크는 그을음을 기름이나 물에 개어 만들었으며, 점차 다양한 재료와 제조법이 개발되었다.펜(pen)의 어원은 깃털을 뜻하는 라틴어 ''penna''에서 왔는데, 서기 500년 무렵 새의 날갯깃으로 잉크를 머금을 수 있도록 펜을 만든 데서 유래하였다. 파피루스용 갈대붓과 펜에 쓰인 잉크는 기본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 최초의 잉크는 그을음을 기름이나 물에 개어 썼다. 점차 기름의 그을음인 유연(油煙)에 고무 용액을 섞어서 만든 검은 잉크와 붉은 진흙이 산화철로 만든 빨간 잉크가 쓰였다. 나중에 그 잉크에 목탄을 넣거나, 로마 제국에서는 소나무 그을음인 송연(松煙)에 고무 용액을 섞어 사용하였고, 식초를 섞어 보존 기간을 늘리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3. 2. 2. 옻칠
선진시대에는 나뭇가지에 물감을 머금을 수 있게 만들어 죽간(竹簡)에 옻칠을 묻혀 글씨를 썼는데, 옻칠로 쓴 글자가 마치 올챙이와 비슷하다고 하여 과두문자(蝌蚪文字)로 불렸다. 이 글자체는 주로 은·주 시대부터 선진시대까지 쓰였다. 한편 죽간에는 주로 옻칠을 하여 글을 남겼으므로 죽간칠서(竹簡漆書)라고 불렸다.3. 2. 3. 먹
먹은 원래 천연 재료인 ‘석인’ 또는 석묵(石墨)의 액에 옻칠을 사용하였으나, 문화가 발달하면서 그을음과 아교를 섞어 찧어 만드는 제묵(製墨, 제먹)의 단계로 발전하였다. 중국 후한 때 서예가이며 제묵자(製墨者)였던 위탄(179~253)이 발명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후한서》에는 “등황후(81~121년)가 영원 14년(102년) 즉위하자 만국에서 공물을 헌납하였는데, 세공지(歲供紙)와 먹(墨) 등이었다”라고 나와 있어, 이전에도 먹이 존재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처음에는 소나무 연기와 그을음을 기름에 개어 만든 송연묵(松煙墨, 숯먹,개먹)이 만들어졌다. 나중에는 송나라 때 장우라는 사람이 기름의 그을음으로 만들어진 유연묵(油煙墨, 참먹,기름먹)이 만들어졌다. 필사용으로는 유연먹보다 송연먹이 좋았으며, 송연먹은 먹색이 진하고 아교가 많이 섞인 것은 윤택이 나서 목판 인쇄에 매우 적합하다. 유연먹의 기름은 응고력과 점착력이 있어 쇠붙이에 착묵(着墨. 착먹)이 잘 될 수 있기 때문에 금속활자 인쇄에 매우 적합하나, 목판 인쇄를 할 때는 착먹이 묽고 희미한 것이 흠이다. 고서를 감정할 때 먹색을 보면 송연먹과 유연먹 중 어느 것을 사용하였는가는 곧 식별할 수 있다.
3. 2. 4. 붓
모필(毛筆)로 불리는 붓은 기원전 3세기 무렵 몽념이 발명했다고 전해지지만, 그 이전에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두문자뿐만 아니라 모필로 쓴 글자체(자형)가 이전 시기의 유물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붓의 끝으로 먹을 묻혀 종이에 글씨를 적는 필수(筆穗)는 호료(毫料), 필호(筆毫), 호재(毫材) 등으로 표현되는 재료, 주로 털(毫)을 사용하여 만들었다.3. 3. 인쇄기록매체
인쇄술의 발명은 정보의 대량 생산과 보급을 가능하게 하여, 기록 매체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쇄 기록 매체는 최초의 대중 매체로, 종이를 기본 재료로 사용하여 인쇄술을 통해 하나의 기록을 여러 사람에게 동일한 형태로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도서 등의 기록물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널리 퍼뜨릴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목판 인쇄나 활자 인쇄와 같은 인쇄 기술은 필기 매체가 직접 손으로 쓰는 방식에서 미리 새겨둔 매체(목판 또는 활자)에 잉크를 묻혀 찍어내는 방식으로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인쇄술 발명 이전에는 압인법, 날염법, 탁인법과 같은 방법으로 기록을 남겼으며, 이후에는 필사를 통해 기록을 전달했다. 목판 인쇄는 동양의 당나라, 서양에서는 종이가 보급된 12~13세기 이후에 발명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은 751년 이전에 통일신라 시대에 인쇄된 무구정광다라니경 목판본이다. 초기 활자로는 교니활자(도활자)라고 불리는 흙으로 만든 활자가 있었으며, 북송의 심괄이 저술한 《몽계필담》에는 필승이 교니활자 인쇄술을 발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목활자인 녹권자가 공문서 인쇄에 사용되기도 했다.
금속활자 인쇄술의 등장으로 책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어 교육과 지식의 보급이 확대되었고, 사회 전반에 걸쳐 변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3. 3. 1. 인쇄술 발명 이전
압인법(押印法), 날염법(捺染法), 탁인법(拓印法) 등은 인쇄술의 초기 형태로 여겨진다.인쇄술 발명 이전, 고대에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록을 남겼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압인법, 날염법, 탁인법이다.
- 압인법(押印法): 기원전 5천년경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방법이다. 도장처럼 문자나 그림을 새긴 원통이나 인형(印形)을 점토판에 굴리거나 눌러 자국을 남겼다. 둥근 통을 굴리는 원압식(圓壓式)과 평평한 도장을 누르는 평압식(平壓式)이 있었다. 수메르의 봉니(封泥)는 원압식, 인장(印章)은 평압식의 대표적인 예이다.
- 날염법(捺染法): 인도에서 발달한 방직 기술과 관련이 깊다. 나무나 금속 판에 그림이나 무늬를 새겨 천에 물을 들이는 방식이다. 초기에는 천에 무늬를 찍었지만, 나중에는 종이에 그림, 글자, 불경까지 찍어내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이는 목판 인쇄술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 탁인법(拓印法): 비석 등에 새겨진 문자나 그림을 복사하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돌에 글을 쓰는 과정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복사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기원전 4천년경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되었으며, 중국 후한(後漢)시대 때 《5경(五經)》을 탁본으로 만든 기록이 있다. 탁본은 돌에 새긴 글자 위에 종이를 놓고 물을 뿌려 붙인 다음, 먹물을 묻힌 헝겊으로 두드려 찍어낸다.
3. 3. 2. 필사의 시기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동서양 모두 필사본을 통해 기록을 전달했다. 필사본은 손으로 직접 글씨를 써서 만든 서적을 의미하며, 사본(寫本), 수서본(手書本), 서사본(書寫本), 초사본(抄寫本) 등 여러 용어로 불렸다. 인쇄술 발달 이후에는 원본을 베낀 책이나 서류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필사본은 고대 문서를 옮겨 적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는데, 서양에서는 파피루스 원본을 양피지나 종이에, 동양에서는 죽간 등으로 만든 간책(簡冊) 원본이나 종이 원본을 종이에 베껴 썼다. 복사본으로 책을 만들면 필사본 제작이 완료되었으며, 목판인쇄술 발명 이후에도 필사본 전통은 이어졌다. 동서양 모두 종교 경전을 필사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시기에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서책이 만들어졌고, 필사, 인쇄, 장식 문자 및 그림, 삽화, 교정 작업 등의 순서가 정착되었다.
3. 3. 3. 목판 인쇄
목판 인쇄는 동양에서는 당나라 때, 서양에서는 종이가 보급된 12~13세기 이후에 발명되었다. 목판 인쇄술은 몇 글자 또는 그림 한두 개를 새긴 인장 또는 목판화의 확장이라 볼 수도 있다. 목판에 글자를 새기는 ‘새김 기법’에는 양각(陽刻), 음각(陰刻), 음평각(陰平刻), 양음각(陰陽刻), 양환각(陽環刻) 등이 있으며, 이는 모두 도장 및 목판화 새김에도 쓰인다.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은 문헌기록보다 앞선 751년 이전에 통일신라 시대에 인쇄되어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 봉안되었다가 출토된 소형 두루마리 다라니경인 《무구정광다라니경》 목판본이다. 중국에서 발견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은 868년(함통(咸通) 9년)에 간행된 목판 권자본(두루마리)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의 크기는 《무구정광다라니경》의 4배에 달하고 판식과 판면 등의 여러 가지 특징이 송나라 때 간행된 일반 경전과 비교해 볼 때,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발전된 형태이다.
한편 목판 인쇄술이 발명되기 직전에는 금속판이나 석판에 글을 새기고 찍어내는 탁인법(拓印法)이 유행하기도 했다. 탁인법은 원래 대량 인쇄를 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으나, 한국의 삼국시대에는 석판에 새긴 불경(예컨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등을 대량으로 찍어낼 때 자주 쓰인 방법이다. 기술 면에서는 탁인법과 목판인쇄술에 큰 차이가 없으나, 비용 면에서 목판이 금속판이나 돌판보다 값싸고, 또한 새기는 비용도 더 저렴했기에 목판인쇄술이 널리 쓰였다.
3. 3. 4. 초기의 활자
최초로 실용화된 활자는 흙이나 진흙을 구워서 만든 활자로, 도활자(陶活字) 또는 교니활자(膠泥活字)라고 부른다. 북송의 심괄(沈括, 1031~1095)이 저술한 《몽계필담》(夢溪筆談)에는 필승(畢昇, 990~1051)이 교니활자 인쇄술을 발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목활자의 발명자도 필승인데, 도활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시험 제작 과정에 목활자도 있었다. 그러나 필승은 목활자 실용화에 성공하지 못했고, 원나라 때 왕정(王禎)이 목활자 실용화에 성공하였다. 왕정은 자신이 저술한 《현지》를 목활자로 찍었는데, 이는 중국 최초의 목활자본이다. 또한 왕정은 농학 서적 《농서》를 목활자로 100부 이상 찍어내었다. 《농서》의 부록에는 활자 제작부터 인쇄까지의 모든 과정이 상세하고 체계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목활자인 녹권자(錄券字)가 만들어져 공문서 인쇄에도 쓰였다. 문서 내용을 미리 활자로 만들어 보관하다가 필요할 때 종이에 찍는 방식이었다. 조선 말기에는 한자·한글 병용활자인 학부인서체자(學部印書體字)를 만들어 교과서를 찍었으며, 기독교 선교사들이 제작한 야소삼자경자(耶蘇三字經字)로는 기독교 성경을 보급했다.
동아시아에서 목활자가 오랫동안 쓰인 이유는 금속보다 값이 싸고, 활자를 만들기 쉬웠으며, 한자와 한글은 활자로 만들어야 할 글자 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반면 서양에서는 숫자, 대문자, 소문자, 기호 등을 모두 합쳐도 100여 자에 불과하여 금속활자가 발명되자마자 빠르게 보급되었다.
3. 3. 5. 금속활자와 인쇄술
직지심체요절 금속활자본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금속활자를 발명하게 된 배경과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으며, 관련 문헌과 주변 여건을 통해 추정할 뿐이다. 현존하는 금속활자로는 고려복자(高麗㠅字)가 있다.한편, 서양에서는 1445년경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납으로 연활자(鉛活字) 주조에 성공하였다. 그는 활자로 조판을 한 후 포도압착기를 응용하여 만든 평압식(平壓式) 인쇄기로 성서를 인쇄해냈다. 이는 인쇄기를 이용한 최초의 볼록판 인쇄였다. 구텐베르크는 인쇄기를 이용하여 성경을 찍어냈지만, 한자문화권에서 찍어낸 금속활자본은 전부 목판인쇄술의 방법대로 금속활자로 조판하고 먹물을 먹인 뒤 종이를 덮어 사람이 손으로 찍어냈다.
금속활자 인쇄술의 등장으로 책을 만드는 일이 쉬워지고 대량 생산이 가능해져, 보다 싼값으로 책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교육과 지식의 보급이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이루어지게 하였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변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절대 왕권사회가 근대 시민사회로 바뀌는 원동력이 되었고, 종교적으로는 성서의 보급을 확대시켜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했으며, 사회적으로는 권위주의가 무너지고 자유주의가 싹트게 되었다.
금속활자 인쇄술은 어느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사회적 요인이 겹쳐져서 이루어졌다. 1336년에 독일 최초의 제지공장이 건설되었으며, 1410년 네덜란드 반 아이크 형제가 유성잉크를 발명했고, 1430년 조각동판이 최초로 제작되었으며, 1438년에 구텐베르크가 목제 인쇄기를 발명했다. 구텐베르크는 1447년에 납활자를, 1450년에는 가동식 인쇄기를 발명했다. 즉, 근대 인쇄술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기본 구성요소는 가동활자, 인쇄기, 물감(유성잉크), 종이인데, 구텐베르크가 살던 시기에 이 기본 구성요소가 모두 충족되었다.
4. 한국의 기록매체
한국은 고대부터 다양한 기록매체를 사용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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