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봉환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대정봉환은 1867년 일본 에도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천황에게 통치권을 반환한 사건이다. 막부 말기, 개항과 통상조약 체결 문제로 국론이 분열되고 막부와 조정 간 갈등이 심화되면서, 막부는 공무합체를 통해 권력 강화를 꾀했다. 한편,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은 무력 토막 노선을 추진했고, 도사 번의 고토 쇼지로는 대정봉환론을 제안하며 평화적인 정권 이양을 시도했다. 대정봉환은 도막파의 토막 밀칙과 왕정복고의 대호령으로 이어져 메이지 유신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67년 일본 - 아부라코지 사건
아부라코지 사건은 1867년 신선조가 고료에지 결성자인 이토 가시타로를 암살하고 시신 수습을 위해 온 잔당을 숙청한 사건이다. - 1867년 일본 - 오미야 사건
오미야 사건은 1867년 교토 오미야에서 사카모토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가 암살당한 사건이며, 암살 배후에 대한 여러 설이 존재하고 사건 현장에는 기념 석비가 세워져 있다. - 사카모토 료마 - 고치현립 사카모토 료마 기념관
고치현립 사카모토 료마 기념관은 고치현 고치시에 위치하며, 사카모토 료마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신정부강령팔책 복제본, 해원대 약규 진본, 료마의 편지 등을 주요 전시품으로 갖추고 있다. - 사카모토 료마 - 나라사키 료
사카모토 료마의 아내인 나라사키 료는 테라다야 사건에서 료마를 구한 것으로 유명하며, 료마 사후 니시무라 마쓰베와 재혼하여 니시무라 쓰루로 살다가 알코올 의존증으로 가난하게 생을 마감했고, 그녀의 삶은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 메이지 유신 - 사족 반란
메이지 유신 초기, 특권을 잃은 사족들이 일으킨 일련의 무장 반란인 사족 반란은 사가의 난을 시작으로 세이난 전쟁까지 이어지며 일본 근대화 과정의 사회적 갈등을 보여주었고, 이후 자유민권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 메이지 유신 - 부번현 삼치제
부번현 삼치제는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시행된 지방 행정 체제로, 막부 직할지를 부와 현으로 나누고 번을 존속시키다가 1871년 폐번치현으로 종료되었다.
대정봉환 | |
---|---|
지도 정보 | |
사건 개요 | |
명칭 | 대정봉환(大政奉還) |
로마자 표기 | Taisei Hōkan |
발생 시기 | 1867년 11월 9일 (음력 10월 14일) |
장소 | 일본 교토 니조 성 |
관련 사건 | 메이지 유신 |
배경 | |
시대적 상황 | 19세기 후반, 흑선 사건, 지진, 태풍, 역병 등의 재난 발생 막부의 권위 약화 및 사회 불안정 증가 |
봉환의 주체 | 도쿠가와 요시노부 |
배경 세력 | 사쓰마 번 조슈 번 기타 반막부 세력 |
주요 내용 | |
권력 이양 | 도쿠가와 막부가 조정에 통치권 반환 실질적인 권력은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을 중심으로 한 신정부로 이양 |
봉환의 의도 | 막부 권위 회복 시도 무력 충돌 회피 목적 |
결과 및 영향 | |
정치적 변화 | 막부 체제 종식 메이지 정부 수립 |
사회적 변화 |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사회 변혁의 발단 근대 일본 국가 건설의 시작 |
역사적 평가 | 일본 근대사의 중요한 전환점 |
참고자료 | |
참고 문헌 | 青山忠正, 2017, pp. 131-133 |
외부 링크 | 19세기 후반, 흑선, 지진, 태풍, 역병 등의 재난을 극복하고 메이지 유신으로 나아가다(후쿠와 노부오) |
2. 배경
에도 시대 도쿠가와 쇼군가는 일본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그러나 '천황이 국가 통치를 쇼군에게 위임하고 있다'는 대정위임론(大政委任論)[11]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에도 막부 말기에는 조정이 자립적인 정치 세력으로 급격히 부상했고, 주로 대외 문제에서 막부와 다른 의견을 내세우며 막부 권력의 정통성을 위협했다. 이에 막부는 조정에 대정위임의 재확인을 요구하게 된다.
1863년(분큐 3년) 3월과 이듬해 1864년(겐지 원년) 4월에 각각 약간의 보류를 거쳐 대정위임이 재확인되었고, 그때까지 관례에 불과했던 대정위임론이 실질화·제도화되었다.
2. 1. 공무합체와 대정봉환론
막말, 개항(개국)과 통상 조약 체결 문제를 둘러싸고 여론이 분열되자, 이는 막부와 조정 간의 의견 불일치와 갈등으로 표면화되었다. 1858년(안세이 5년) 무오의 밀칙이 막부를 거치지 않고 미토 번에 직접 내려진 것을 시작으로, 조정이 막부 정치 개혁과 양이 실행을 요구하는 사태에 직면했다. 이에 막부는 조정과 막부의 일치, 즉 공무합체의 일환으로 대정위임의 재확인 및 제도화를 조정에 요구했다. 이는 궁극적으로 막부의 명령이 곧 조정의 명령이 되는 '정령일도(政令一途)'를 통해 막부 권력을 재강화하고 국가 통일을 이루려는 목적이었다.한편, 마쓰다이라 슌가쿠의 요청으로 에치젠 번의 개혁을 단행한 요코이 쇼난과 오쿠보 이치오, 가쓰 가이슈 등 개명적인 막신들은 대정봉환론(혹은 대정반상론)을 일찍부터 주장했다. 그러나 막부는 조정의 양이 요구와 타협하면서도 공무합체를 추진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현실화되지 못했다.[14]
2. 2. 도사 번의 대정봉환 건의
사쓰마 번은 공무합체 구상의 실패 이후, 도쿠가와 요시노부와의 대립이 심화되자 조슈 번과 함께 무력으로 막부를 타도하려는 노선으로 전환했다. 1867년 5월 21일, 도사 번의 이누이 다이스케와 다니 다테키 등은 나카오카 신타로의 중개로 사쓰마 번 가로 고마쓰 다테와키의 교토 저택에서 사이고 다카모리 등과 '''삿토 토막의 밀약'''을 맺었다.[16]이에 대항하여 도사 번의 참정 고토 쇼지로는 평화적인 정권 이양을 위한 대정봉환론을 추진했다. 1867년 6월 9일, 사카모토 료마가 대정봉환을 포함한 새로운 정치 강령인 '선중팔책'을 고토에게 제시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후대에 창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고토는 6월 17일부터 데라무라 미치나리, 마나베 마사무네, 후쿠오카 다카치카 등 도사 번 간부들에게 대정봉환론 채택을 주장했다. 사쓰마 번의 고마쓰 다케와키 등도 이에 동의하여, 6월 22일 삿토 맹약이 체결되었다. 삿토 맹약은 막부가 조정에 대정을 봉환하여 정권을 일원화하고, 조정에 의사당을 설치하여 국시를 결정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의원은 공경부터 제후, 배신, 서민에 이르기까지 '정의로운 자'를 선출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대정봉환론은 평화적인 정치 체제 변혁을 구상한 것이었지만, 사쓰마 번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거부할 것으로 예상하고 이를 막부 타도의 구실로 삼으려 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이유로 맹약에는 도사 번의 상경 출병 및 쇼군직 폐지를 건의서에 명기할 것이 약속되었다.
고토는 곧 귀국해서 도사 번병을 이끌고 상경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도사 번에 은거하고 있던 야마우치 요도가 대정봉환을 번론으로 하는 것에는 동의하면서도, 상경 출병은 반대하여 건의서 조문에서 쇼군직 폐지를 삭제했다. 한편, 사쓰마 번은 조슈 번 및 게슈 번과 함께 무력 토막 노선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1867년 9월 7일 삿토 맹약은 파기되고 만다.
3. 과정
1867년 10월 3일, 도사 번주 야마우치 요도는 대정봉환 건백서를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제출했다.[22][23] 요시노부는 이를 받아들여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이 추진하는 도막(倒幕)을 선제적으로 막기 위해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10월 11일부터 교토에 머물던 10만 석 이상의 다이묘들의 중신들에게 13일 정오에 니조 성으로 출두하라는 글이 전달되었다. 10월 12일 밤에는 대정봉환의 뜻을 담은 밀서가 빗추 국 마쓰야마 번에 있던 이타쿠라 가쓰키요의 고문 야마다 호코쿠에게 전달되었다. 호코쿠는 상표문의 초안을 만들어 교토로 돌려보냈다. 같은 날, 막부 관료와 아이즈 번, 구와나 번 등 유력 번 다이묘들에게도 대정봉환 방침이 전달되었다.[20]
10월 13일, 40개 번의 중신 약 50명이 니조 성 니노마루 대광장에 모였다. 오메쓰케 도가와 야스치카와 메쓰케 시타라 이와지로가 야마다 호코쿠가 작성한 상표문을 포함한 서류 3통을 배포하고, "의견이 있는 자는 남아 장군과 면담하라"고 알렸다.
도사 번의 고토 쇼지로와 후쿠오카 다카치카, 사쓰마 번의 고마쓰 기요카도, 게이슈 번의 쓰지 이가쿠, 우와지마 번의 쓰즈키 아쓰시, 비젠 번의 마키노 곤로쿠로 등 6명이 요시노부를 알현했다.[19] 다른 번의 중신들은 서류에 동의 의사를 적어 반환했다. 이를 통해 막부의 대정봉환 의사가 공식적으로 표명되었다.
10월 14일, 요시노부는 고케 다이묘인 오자와 모토히사를 사자로 하여 "대정봉환 상표문"을 조정에 제출하고 수리를 강력히 요구했다. 섭정 니조 나리유키 등 조정 상층부는 당황했으나, 다음 날인 15일에 요시노부를 포함한 조의에서 수리가 결정되었고, 요시노부에게 명령문이 전달되었다. 이 명령문에서는 충분한 논의를 거친 뒤 앞으로의 결정을 내리고, 쇼군가의 영지에 대해서도 추후 결정하겠다고 명시되어 있다. 같은 날, 조정은 10만 석 이상의 모든 다이묘들에게 상경(上洛)을 명했다.
대정봉환은 도막파의 선수를 쳐서 도막의 명분을 없애려는 의도가 있었으나, 상표문에는 정이대장군직 사임에 대해 전혀 언급되지 않았고, 요시노부는 무가의 동량으로서의 지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요시노부는 고마쓰 다테와키에게 "사임을 표명하면 가신들이 불만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으나, 고마쓰가 사임해야 한다고 권고한 것에 따라 10월 24일에 정이대장군 사임도 조정에 요청하게 되었다.
막부는 조정이 정권을 운영할 능력도 체제도 없으며, 형식적으로 정권을 반환하더라도 도쿠가와 가문이 천황 아래 새로운 정부에 참여하면 실질적으로 정권을 계속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예상대로 10월 22일에는 국시를 결정하기 위한 제후 회동 소집까지를 조건으로 긴급 정무 처리가 막부에 계속 위임되었고, 정이대장군직도 잠정적으로 이전과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조정은 외교에 관해 전혀 대처할 방법이 없었으며, 10월 23일에는 외교는 계속해서 막부가 중심이 되어 진행할 것을 인정하는 통지를 발표했다. 11월 19일에는 에도의 문을 여는 것과 니가타의 개항을 연기한다는 통고를 발표했으며, 28일에는 러시아 제국과의 개정세 약서를 체결한 것도 막부였다.
조정은 요시노부에게 당분간 정무를 위임하고 다이묘들에게 상경을 명했으나, 형세를 관망하기 위해 상경을 거부하는 다이묘들이 잇따랐다. 11월 중 상경한 유력 다이묘는 사쓰마 번, 게이슈 번, 오와리 번, 에치젠 번 등 네 번에 불과했으며, 도사 번의 야마우치 요도는 12월 8일에 입경했다. 왕정복고가 발발한 것은 그 다음날인 12월 9일의 일이었다.
3. 1. 도막파의 대응
1867년 10월 14일, 대정봉환 상표가 제출됨과 동시에 이와쿠라 도모미는 사쓰마 번과 조슈 번에 토막의 밀칙을 은밀히 전달했다.[2] 이 밀칙은 천황의 날짜와 재가가 기재되지 않아 칙서로서의 형식을 갖추지 못한 이례적인 문서였으며, 이로 인해 토막파(討幕派)가 위조한 것이라는 의혹이 짙었다.요시노부의 대정봉환 당시, 이와쿠라를 포함한 도막파 공가들은 조정 내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전년도 12월 고메이 천황이 사망하고 이듬해 1월 9일 메이지 천황이 즉위했으나, 메이지 천황은 만 15세로 어렸고 친막부파인 관백 니조 나리유키가 섭정을 맡고 있었다. 산조 사네토미 등 친조슈 급진파 공가들은 1863년 8월 18일의 정변 이후 교토에서 추방된 상태였다.
이 시기 조정은 니조 섭정과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 등 친막부파 상급 공가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대정봉환이 이루어져도 이러한 조정 아래 구성될 신정부(공무합체정부)는 요시노부가 주도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사쓰마 번, 조슈 번, 이와쿠라 도모미를 중심으로 한 토막파는 쿠데타를 통해 조정 내 친막부파 중심의 섭정·관백 등 기존 관직을 폐지하고 체제를 개편하여 조정의 실권을 장악해야 했다. 토막의 밀칙은 조정 내 주도권이 없던 이와쿠라 등 중하급 도막파 공경들과 사쓰마·조슈 양 번이 요시노부의 의도에 맞서기 위한 비상수단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대정봉환으로 도막파는 혼란에 빠졌다. 고마쓰 다테와키, 요시이 도모자네 등은 요시노부의 대정봉환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무력 봉기를 계획했던 사쓰마 번도 잠시 관망했다. 10월 21일, 조정은 "제후 회의가 수습될 때까지 제정을 막부에 위임할 것인가"라고 질의했고, 사쓰마 번도 이에 찬성했다.
오쿠보 도시미치와 사이고 다카모리를 중심으로 한 사쓰마 번 내 무력 도막파는 요시노부를 경계했다. 결국 이들은 무력을 통해 막부를 타도하는 것으로 번론(藩論)을 통일했고, 11월 29일 번주 시마즈 모치히사(島津茂久)가 군대를 이끌고 상경했다. 이후 12월 9일(1868년 1월 3일), 일본 제국 수립을 선언하는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선포되며 왕정복고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4. 대정봉환 상표의 내용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작성한 상표문은 조정에 정권을 반환하고 천하의 공의를 모아 새로운 정치를 펼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상표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19]
抑〻皇國時運之沿革ヲ考候得バ、往昔ハ朝權衰頽シ、藤氏ニ權ヲ執ラレ、保平ノ亂ニ政權武門ニ移テヨリ、祖宗ニ至リ益〻寵渥ヲ加ヘ、二百餘年子孫相受、其職ヲ奉シ來候處、私ニ至リ數〻失政不少、今日之形勢ニ立至候儀ハ、偏〻私之不德之所致ニシテ、慙愧ニ堪不申候。況ヤ近來外國との御交際日ニ繁ク、朝權一途ニ出不申候而者、到底綱紀難相立申間、此際從來之舊習ヲ改、政權ヲ朝廷江奉歸、廣ク天下之公議ヲ盡シ、聖斷ヲ仰キ、同心協力、共ニ皇國ヲ保護仕候而者、必ス海外萬國ト可並立存候。私〻報國之儀ハ此ニ不過ト奉存候得共、向後得存意之向モ有之候ハバ可申聞旨、諸侯江モ相達置候。右之段謹テ奏聞仕候。以上。|엎드려 황국의 시운(時運)의 연혁(沿革)을 생각하온즉, 옛날에는 조정의 권력이 쇠퇴하고 후지와라씨가 정권을 잡았으며, 호겐의 난·헤이지의 난으로 정권이 무가(武家)로 옮겨간 이후, 조종(祖宗)(도쿠가와 이에야스)께서 더욱 총애를 베푸시어 200여 년 동안 자손이 그것을 계승해 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직책을 맡아 왔으나, 정치를 잘못 다스린 점이 적지 않아 오늘날과 같은 형세에 이르게 된 것은 오로지 제 불덕(不德)의 소치이며, 참회(慙愧)를 금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요즘에는 외국과의 교제가 날로 성행하고 있어 조정에 권력을 하나로 하지 않으면 더 이상 나라의 근본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종래의 구습(舊習)을 바꾸어 정권을 조정에 반납하고, 널리 천하의 공의(公議)를 다한 뒤에 성단(聖斷)을 듣고, 모두 마음을 하나로 하여 협력하여 함께 황국을 지킨다면, 반드시 해외 만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국가에 공헌할 수 있는 것은 이것으로 다하지만, 앞으로의 의견이 있으면 경청하겠다는 뜻을 제후(諸侯)들에게 통달하였습니다. 이상, 본건에 대해 삼가 아뢰옵니다.일본어
요약하면, 요시노부는 과거 조정의 권력 쇠퇴와 무가 정권의 등장을 언급하며, 자신의 실정으로 인해 현재의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음을 인정한다. 특히 외국과의 관계가 중요해짐에 따라 조정으로 권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권을 반납하고 천하의 의견을 모아 새로운 정치를 펼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통해 일본이 국제 사회에서 당당히 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5. 대정봉환 이후의 국가 구상
1867년 10월 13일, 기요히토는 개성소 교수직을 역임한 막신(幕臣)이자 서양의 정치학과 철학을 연구했던 니시 아마네(西周)에게 영국(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의원제도 등에 대해 자문했다. 대정봉환이 성립된 11월, 니시 아마네는 의견서로서 '의제초안'을 기요히토 측근인 히라야마 케이타다(平山敬忠)에게 제출했다.[8]
니시 아마네는 이 안에서 도쿠가와 중심의 구체적인 정권 구상을 제시했다. 삼권분립(權力分立)이 형식적으로나마 도입되어, 행정권(行政権)은 공부(公府) (사법권(司法権)을 겸임)가, 입법권(立法権)은 각 번(藩) 다이묘(大名) 및 번사(藩士)가 구성하는 의정원(議政院)이 가지는 것으로 하고, 천황(天皇)은 상징적인 지위에 두었다. 공부의 수장은 '대군(大君)'이라 불리고, 도쿠가와 당주(즉 기요히토)가 취임하여 상원(上院) 의장을 겸임하고, 하원(下院)의 해산권을 가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군사(軍事)에 대해서는 당분간 각 번에 그 소유를 인정하지만, 수년 후에는 중앙에 통합하는 것으로 했다. 그 외에도 종래의 다이묘령을 현 상태대로 하고, 공부의 기구는 막부의 그것과의 관련이 의식되고 있는 등, 매우 현실적인 계획이었다.[8]
또한, 11월 27일, 나가이 히사시(永井尚志)는 고토 쇼지로에게 기요히토는 장래적으로 군현제(郡県制)를 시행할 구상이 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6. 결과 및 영향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대정봉환을 통해 막부의 권력을 천황에게 반납했지만, 쇼군직을 유지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12] 요시노부는 1867년 11월 19일(음력 10월 24일) 쇼군직 사직원을 제출했지만, 각 번에 대한 군권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13]
대정봉환의 목적은 내전을 피하고 공의 정권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었지만, 제후 회의 소집이 지연되면서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조정은 요시노부에게 당분간 정무를 위임하고 다이묘들에게 상경을 명했으나, 많은 다이묘들이 상경을 거부하며 상황은 진전되지 않았다.
결국 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막부는 폐지되고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졌다. 이 쿠데타는 사쓰마 번을 중심으로 한 토막파가 주도했으며, 도바·후시미 전투와 보신 전쟁으로 이어지는 내란을 초래했다.
한편, 아이즈 번, 구와나 번, 기슈 번 등 막부 측에서는 대정봉환이 사쓰마 번과 도사 번의 책략이라는 반발이 확산되었고, 대정 재위임을 요구하는 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7. 역사적 평가
대정봉환은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지만, 그 평가는 다양하다. 일본 내에서는 대정봉환을 근대화의 시작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있는 반면, 제국주의 팽창의 기원으로 비판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한국에서는 대정봉환을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발단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며, 과거사 문제 해결과 올바른 역사 인식 정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8. 참고 사항
"메이지 N년"은 1868년을 1년으로 계산하지만, 대정봉환이 일어난 1867년은 "'''메이지 0년'''"에 해당한다. 즉, "메이지 N년"은 "대정봉환으로 N년 후"를 의미한다.[12]
일본 제국 시대에는 천황 관련 행사가 대정봉환 다음 날인 11월 10일에 실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쇼와 천황의 즉위식 (1928년)과 황기 2600년 기념식 (1940년)이 모두 11월 10일에 개최되었는데, 이는 대정봉환 다음날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12]
참조
[1]
뉴스
19世紀後半、黒船、地震、台風、疫病などの災禍をくぐり抜け、明治維新に向かう(福和伸夫)
https://news.yahoo.c[...]
2020-08-24
[2]
웹사이트
『板垣精神 : 明治維新百五十年・板垣退助先生薨去百回忌記念』
https://ci.nii.ac.jp[...]
一般社団法人 板垣退助先生顕彰会
2019-02-11
[3]
웹사이트
「大政奉還」克明に記録-「慶喜は大広間で各藩重臣に表明した」に非ず、参加者自筆の記録を初確認 二条城伝達から150年(1/2ページ) - 産経WEST
https://www.sankei.c[...]
産経新聞社
2017-10-13
[4]
웹사이트
第7回「慶喜は姿を見せたか?
https://www.city.kyo[...]
2022-06-15
[5]
웹사이트
国宝・二の丸御殿 二条城 世界遺産・元離宮二条城
https://nijo-jocastl[...]
2022-06-13
[6]
웹사이트
「土佐藩大政奉還建白書写」(三条家文書12-8)慶応3(1867)
https://www.kodomo.g[...]
[7]
웹사이트
「土佐藩大政奉還建白書写」
https://dl.ndl.go.jp[...]
[8]
서적
幕末維新史の研究
吉川弘文館
[9]
뉴스
19世紀後半、黒船、地震、台風、疫病などの災禍をくぐり抜け、明治維新に向かう(福和伸夫)
https://news.yahoo.c[...]
2020-08-24
[10]
기타
[11]
기타
[12]
기타
[13]
기타
[14]
기타
[15]
기타
[16]
웹인용
『板垣精神 : 明治維新百五十年・板垣退助先生薨去百回忌記念』
https://ci.nii.ac.jp[...]
一般社団法人 板垣退助先生顕彰会
2019-02-11
[17]
기타
[18]
기타
[19]
웹인용
「大政奉還」克明に記録-「慶喜は大広間で各藩重臣に表明した」に非ず、参加者自筆の記録を初確認 二条城伝達から150年(1/2ページ) - 産経WEST
https://www.sankei.c[...]
産経新聞社
2017-10-13
[20]
웹인용
第7回「慶喜は姿を見せたか?
https://www.city.kyo[...]
2022-06-15
[21]
웹인용
国宝・二の丸御殿 二条城 世界遺産・元離宮二条城
https://nijo-jocastl[...]
2022-06-13
[22]
웹사이트
「土佐藩大政奉還建白書写」(三条家文書12-8)慶応3(1867)
https://www.kodomo.g[...]
[23]
웹사이트
「土佐藩大政奉還建白書写」
https://dl.ndl.go.jp[...]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