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온 크리소스토모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디온 크리소스토모스는 2세기 초의 그리스 철학자이자 수사학자로, 현재 80편의 연설문이 남아있다. 그는 비티니아 프루사 출신으로, 로마 제국 시기에 활동하며 정치, 도덕, 철학적 주제를 다루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세에 추방당하여 방랑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네르바, 트라야누스 황제의 지지를 받았다. 그의 작품은 비잔티움 제국 시대까지 널리 수용되었으며, 군주론적인 내용과 비판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15년 사망 - 사마포
사마포는 후한 시대의 관료로, 114년에 대사농에서 태위로 승진했으나 이듬해 사망했으며, 짧은 재임 기간 동안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 115년 사망 - 교황 알렉산데르 1세
교황 알렉산데르 1세는 108/109년부터 118/119년경까지 재임한 로마의 6대 교황으로, 로마 교회의 전례 및 행정 전통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소금을 섞은 성수 사용 및 성찬용 포도주에 물을 섞는 관습 등 그의 업적에 대한 역사적 사실 여부는 논란이 있다. - 40년대 출생 - 프론티누스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는 1세기 로마의 군인이자 행정가, 작가로서, 라인란트 반란 진압과 브리타니아 총독을 역임하며 군사적 능력을 발휘했고, 네르바 황제에 의해 수도교 관리관으로 임명되어 로마의 수도 시설 개선에 기여했으며, 《로마의 수도에 관하여》와 《계략집》 등의 저술을 남겨 고대 로마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 40년대 출생 -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루스티쿠스
루키우스 안티스티우스 루스티쿠스는 1세기 후반 코르도바 출신의 로마 제국 관리로서, 비긴티비리, 군사 호민관, 가도 큐라토르, 군단 지휘관, 바이티카 총독, 카파도키아-갈라티아 총독 등 다양한 직책을 역임하며 활발한 공직 활동을 펼쳤고, 특히 브리타니아 주둔 군단을 베스파시아누스 편으로 결집시키고 카파도키아 총독 재임 중 기근 구제 활동을 펼쳤으며, 뭄미아 니그리나와 혼인했다. - 로마의 고대 그리스인 -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4세기 후반 로마 제국의 군인이자 역사가로, 《역사》를 저술하여 96년부터 378년까지의 로마 역사를 기록했으며, 그의 저서는 4세기 로마 제국의 정치, 군사, 사회상에 대한 귀중한 1차 사료를 제공한다. - 로마의 고대 그리스인 - 카르네아데스
카르네아데스는 키레네 출신의 아카데미적 회의주의 철학자로, 플라톤 아카데미의 수장이 되어 회의론을 부활시키고 웅변과 논쟁술로 명성을 얻었으며, 모든 지식이 불가능하다는 인식불능론과 감각과 이성을 통한 진실 인식의 불확실성을 주장했다.
디온 크리소스토모스 | |
---|---|
기본 정보 | |
![]() | |
출생 | 기원후 40년경 |
출생지 | 프로우사 |
사망 | 기원후 115년경 (75세 추정) |
직업 | 연설가 작가 철학자 역사가 |
이름 | |
그리스어 | Δίων Χρυσόστομος |
로마자 표기 | Diōn Chrysostomos |
라틴어 | Dio Chrysostomus |
영어 | Dio Chrysostom |
다른 이름 | 디온 프루사에우스 |
라틴어 다른 이름 | Dio Cocceianus |
생애 | |
시대 | 로마 제국 시대 |
활동 분야 | 키니코스 학파 중기 플라톤주의 |
저서 | |
작품 | λόγοι (Logoi) |
2. 생애
디온은 로마 비티니아 속주(오늘날 튀르키예 부르사) 프루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파시크라테스는 디온의 교육에 많은 공을 들였다. 디온은 고향에서 중요한 직위를 맡으며 수사학과 궤변학에 관한 글을 썼고, 이후 철학에 전념했다. 스토아 학파와 플라톤 학파에 호의적이었으나, 특정 학파를 따르지는 않았다. 그는 철학을 실생활, 특히 공적 업무에 적용하려 했다.
베스파시아누스 재위 기간(69년-79년)에 로마로 가서 결혼하여 아이를 가졌다.[17]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비판하다가 82년에 로마, 이탈리아, 비티니아에서 추방되었다.[18][19] 델포이 신탁의 조언으로 거지 차림을 하고 플라톤의 《파이돈》과 데모스테네스의 ''관직'' 연설문 사본만 지닌 채 키니코스 학파 철학자처럼 로마 제국 북방과 동방을 여행했다.[19][20][21] 트라키아, 미시아, 스키티아, 게타이를 방문하여 연설로 환대받고 좋은 일을 했다.[22][23]
네르바와 친구였던[24] 디온은 도미티아누스 사망(96년) 후 네르바 지지를 위해 병력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네르바 시기에 추방령이 만료되어 프루사로 돌아갔고, 네르바의 후원으로 코케이아누스라는 성을 썼다.[25] 트라야누스는 디온을 존경하고 편의를 제공했다.[26] 티아나의 아폴로니오스, 티레의 에우프라테스 등과 친구였고, 연설로 존경받았다. 111년경 프루사 도시 재건 소송에 관여했고, 몇 년 후 사망했다.[25]
2. 1. 출생과 초기 생애
디온 크리소스토모스는 로마의 비티니아 속주(오늘날 튀르키예 북서쪽 지역)에 있는 프루사(Prusa, 오늘날 부르사)에서 태어났다.[17] 그의 아버지 파시크라테스는 디온의 교육과 이른 정신 수양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17] 디온은 고향에 있을 때 연설문과 수사학 및 궤변학에 관한 수필을 집필하며 중요한 직위를 맡았고, 이후에는 철학 연구에 집중하였다.[17] 그는 스토아 학파와 플라톤 학파 철학자들에게 큰 호감을 얻었지만, 특정 학파에 속하거나 심오한 견해를 내세우지는 않았다.[17] 그는 철학적 교리를 실생활, 특히 공적 업무에 적용하여 더 나은 상황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17]디온은 베스파시아누스 재위 기간(서기 69–79년)에 로마로 건너가 결혼하여 아이를 가졌다.[17] 그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비판자가 되었고,[18] 82년에 황제에 대한 모의 관련자에게 조언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로마, 이탈리아, 비티니아에서 추방되었다.[19] 델포이 신탁의 조언을 받아,[20] 그는 걸인의 차림새를 하고,[21] 주머니에 플라톤의 《파이돈》과 데모스테네스의 ''관직''에 대한 연설문의 사본만을 지닌 채, 키니코스 학파 철학자의 생활을 하며 로마 제국의 북방과 동방의 나라들을 여행했다.[19][20][21] 그는 트라키아, 미시아, 스키티아, 게타이 지역을 방문했고,[22] 그의 연설의 힘과 지혜 덕에 모든 곳에서 환대받고 많은 좋은 일들을 했다.[23]
2. 2. 로마 유학과 추방
디온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재위 기간(서기 69–79년)에 로마로 건너갔으며, 이 시기에 결혼하여 아이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1] 그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비판자가 되었는데,[2] 도미티아누스는 82년에 그를 황제에 대한 모의 관련자에게 조언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로마, 이탈리아, 비티니아에서 추방시켰다.[3]델포이 신탁의 조언을 받아,[4] 그는 거지의 차림새를 하고,[5] 주머니에 플라톤의 《파이돈》과 데모스테네스의 ''관직''에 대한 연설문의 사본만을 지닌 채, 키니코스 학파 철학자의 생활을 살았고, 로마 제국의 북방과 동방의 나라들에 대한 여정을 떠났다. 그래서 그는 트라키아, 미시아, 스키티아, 게타이 지역을 방문했고,[6] 그의 연설의 힘과 지혜 덕에, 그는 모든 곳에서 환대받았고, 많은 좋은 일들을 베풀었다.[7]
그는 네르바의 친구였으며,[8] 도미티아누스가 서기 96년에 살해당하자, 디온은 네르바를 지지하기 위하여, 국경 지대에 주둔하던 병력에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네르바 황제 시기에, 그의 추방령이 만료되었고, 그는 프루사에 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이후 생애에 황제인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가 자신에게 준 후원을 기념하기 위해 코케이아누스 (네르바의 성 코케이우스의 변형)라는 성을 붙이고 다녔다.[9]
2. 3. 방랑 생활과 철학적 성숙
디온은 베스파시아누스 재위 기간(69년-79년)에 로마로 갔으며, 이 시기에 결혼하여 아이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1] 그는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비판하였는데,[2] 도미티아누스는 82년에 그를 황제에 대한 모의 관련자에게 조언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로마, 이탈리아, 비티니아에서 추방시켰다.[3] 델포이 신탁의 조언을 받아,[4] 그는 거지 차림새로,[5] 주머니에 플라톤의 《파이돈》과 데모스테네스의 ''관직''에 대한 연설문 사본만을 지닌 채, 키니코스 학파 철학자의 생활을 하며 로마 제국의 북방과 동방의 나라들을 여행했다. 그는 트라키아, 미시아, 스키티아, 게타이 지역을 방문했고,[6] 그의 연설의 힘과 지혜 덕분에 모든 곳에서 환대받았으며, 많은 좋은 일들을 했다.[7]그는 네르바의 친구였으며,[8] 도미티아누스가 96년에 살해당하자, 디온은 네르바를 지지하기 위해 국경 지대에 주둔하던 병력에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네르바 황제 시기에 그의 추방령이 만료되었고, 프루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이후 생애에 황제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가 자신에게 준 후원을 기념하기 위해 코케이아누스(네르바의 성 코케이우스의 변형)라는 성을 붙이고 다녔다.[9] 네르바의 후임자 트라야누스는 디온에게 큰 존경심을 보였고,[10]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했다. 디온의 친절한 기질은 티아나의 아폴로니오스, 티레의 에우프라테스 같은 많은 저명한 친구들을 얻게 해주었고, 그의 연설은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2. 4. 복권과 황제의 총애
81년에 도미티아누스가 즉위한 직후, 디온은 폭정으로 인해 추방되었는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칩거했는지 알 수 없으나, 거지와 같은 행색으로 제국 각지를 방랑했다. 그 동안, 프루사의 본가는 쇠퇴하였고, 흑해 북안이나 다키아 등 변방까지 여행했다. 방랑 중에는 플라톤의 《파이돈》과 데모스테네스의 《περὶ τῆς παραπρεσβείας|페리 테스 파라프레스베이아스|거짓 사절에 관하여grc》를 마음의 지주로 삼았다. 디온에 따르면, 방랑 중에 델포이의 신탁을 받아 땅 끝까지 가도록 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철학자"라고 불리면서(당시 철학자의 전형은 거지와 같은 행색이었다), 자신도 철학에 눈을 떴다고 한다.96년에 도미티아누스가 사망하자 디온은 방랑을 끝내고, 네르바, 트라야누스의 총애를 받았다. 이후, 프루사에서 정치에 관여했다. 대 플리니우스의 《Epistulae|에피스툴라이|서간집la》에 수록된, 110년의 플리니우스와 트라야누스의 왕복 서간에 따르면, 프루사의 공공시설 건설 공정을 둘러싸고 정적에게 트집을 잡혀 소송을 당했다. 이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2. 5. 말년과 사망
96년 도미티아누스가 사망하자 방랑을 끝내고, 네르바의 총애를 받았다.[24] 도미티아누스가 서기 96년에 살해당하자, 디온은 네르바를 지지하기 위하여 국경 지대에 주둔하던 병력에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네르바 황제 시기에 그의 추방령이 만료되었고, 프루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네르바 황제가 자신에게 준 후원을 기념하기 위해 코케이아누스 (네르바의 성 코케이우스의 변형)라는 성을 붙이고 다녔다.[25] 네르바의 후임자 트라야누스는 디온에게 큰 존경심을 가졌고,[26] 최대한의 편의를 보였다. 디온의 친절한 기질은 티아나의 아폴로니오스, 티레의 에우프라테스 같은 많은 저명한 친구들을 얻게 해주었고, 그의 연설은 모든 이들의 존경을 얻어다 주었다. 이후 생애에 디온은 프루사에서 상당한 지위를 지녔었고, 대략 111년에 도시 재건 소송에 그가 관련되었다는 기록들이 존재한다.[25] 그는 그 후로 몇 년 뒤에 사망했을 것이다.3. 저작
디온 크리소스토모스는 80편에 달하는 연설문과 여러 저술을 남겼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의 연설문은 정치, 도덕, 철학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으며, 특히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바친 4편의 왕위에 관한 연설문은 군주론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그는 트로이 전쟁에서 트로이가 승리했다는 독특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으며,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인도에서 번역되었다고 언급했지만, 이는 ''마하바라타''나 ''라마야나''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32]
디온의 작품은 중세 비잔티움 제국까지 널리 읽혔으며, 시네시오스는 그의 전기를 저술하기도 했다. 포티오스와 그의 제자 역시 디온에 대한 저술을 남겼다.
3. 1. 주요 저작
디온 크리소스토모스는 현존하는 80개의 연설문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 연설문들은 정치, 도덕, 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27] 이 연설문들은 구술 교육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한다.- 트라야누스에게 전달된 왕위에 관한 4개의 연설문
- 시노페의 디오예니스의 인격에 대한 4개의 연설문
-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성질을 저버릴 때 발생하는 문제점에 대한 연설문
- 군주가 직면하는 어려움에 대한 연설문
- 노예제와 자유에 관한 수필
- 연설가로서 명성을 얻는 방법에 대한 연설문
- 여러 도시들에 관한 정치적 담론
- 윤리와 실용 철학에 관한 주제
- 신화 및 소감문에 관한 주제
그는 매춘을 허용하는 것에 강력히 반대했으며,[30]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이 인도에서 번역되어 불린다고 주장했지만,[31] 이는 ''마하바라타'' 및 ''라마야나''와의 혼동으로 인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32] 디온의 연설문 중 2개(37편과 64편)는 현재 파보리누스의 것으로 분류된다. 80개의 연설문 외에도 50개의 남아있는 부분들이 있으며, 디온의 이름으로 된 5개의 서신도 현존한다.
디온은 트로이 전쟁에서 트로이인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했으며,[33] 일부 현대 학자들도 이와 같은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34] 그는 철학서 및 역사서도 저술했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없다. 그가 저술한 책 중 하나는 게타이에 대한 게티카였는데,[27] 수다는 이 책을 디오 카시우스의 저작으로 잘못 기록했다.[35]
현존하는 80편의 작품은 『변론집』(롭판 영어 제목: Discourses영어)에 수록되어 전해진다. 그 외에 시네시우스의 『대머리의 찬미』에 수록된 『머리카락의 찬미』 단편 등이 있다. 산실된 작품으로는 『앵무새의 찬미』, 『무소니우스에 대한 반론』, 『알렉산드로스의 덕에 대하여』, 『게타이족에 대하여』 등이 있다.
『변론집』 제1-4편을 차지하는 『왕정론』은 주로 트라야누스를 향해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며, 후세의 율리아누스나 테미스티오스에게도 영향을 준 군주론적인 작품이다. 제11편 『트로이 함락되지 않다』는 고대에 여러 편 쓰여진 트로이 전쟁 이설 중 하나로, 호메로스의 거짓을 폭로하고 트로이의 명예를 회복한다는 작품이다(당시 호메로스는 사실로 여겨졌으며, 로마인은 트로이인의 후예로 여겨졌다). 제53편 『호메로스에 대하여』에서는 호메로스가 인도에서도 번역되어 불리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마하바라타』, 『라마야나』를 오인한 것으로 추측된다.[16]
디온의 작품은 유서 깊은 아티카 방언으로 쓰여진 점도 있어 중세 비잔티움 제국에 이르기까지 널리 수용되었다. 시네시우스는 전기 『디온론』을 저술했다. 포티오스도 전기를 저술했으며, 포티오스의 제자는 주석서를 저술했다. 또한 디온을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15세기부터 『왕정론』과 『트로이 함락되지 않다』를 중심으로 라틴어·그리스어로 출판이 이루어졌다.
3. 2. 작품의 특징과 의의
디온 크리소스토모스는 2세기 초 후기 소피스트 학파의 그리스 철학자였다. 그는 필로스트라토스,[27] 시네시오스,[28] 포티오스[29] 등 고대인들에게 가장 저명한 그리스 수사학자이자 소피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혔다.[13] 이는 현존하는 그의 80개의 연설문으로 확인되며, 이 연설문들은 구술을 가르치기 위한 용도로 쓰인 것으로 보이며, 정치, 도덕, 철학적 주제에 대한 수필 종류들이었다.80개의 연설문 외에도 50개의 남아있는 부분들이 존재하며, 디온의 이름으로 된 서신 5개 역시도 현존한다. 그는 매춘을 허용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주장을 하였다.[30] 그는 또한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이 인도에서 번역되고 불린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31] 이는 사실이 아닐 것으로 보이며, ''마하바라타'' 및 ''라마야나''와 혼동이 있었을 수 있다.[32] 디온의 연설문 두 개 (37편과 64편)는 현재 파보리누스의 것으로 분류된다.
그는 그 외에 많은 철학서 및 역사서를 지필했으나, 남아있는 것은 없다. 그가 지필한 것 중 하나는 게타이에 대한 게티카로,[27] 수다는 이 서적을 디오 카시우스가 쓴 것이라 잘못 나타냈다.[35]
현존하는 80편의 작품은 『변론집』(롭판 영어 제목: Discourses|디스코스영어)에 수록되어 전해진다. 그 외에 시네시우스의 『대머리의 찬미』에 수록된 『머리카락의 찬미』 단편 등이 있다. 산실된 작품으로는 『앵무새의 찬미』, 『무소니우스에 대한 반론』, 『알렉산드로스의 덕에 대하여』, 『게타이족에 대하여』 등이 있다.
『변론집』 제1-4편을 차지하는 『왕정론』은 주로 트라야누스를 향해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며, 후세의 율리아누스나 테미스티오스에게도 영향을 준 군주론적인 작품이다. 제11편 『트로이 함락되지 않다』는 고대에 여러 편 쓰여진 트로이 전쟁 이설 중 하나로, 호메로스의 거짓을 폭로하고 트로이의 명예를 회복한다는 작품이다(당시 호메로스는 사실로 여겨졌으며, 로마인은 트로이인의 후예로 여겨졌다). 제53편 『호메로스에 대하여』에서는 호메로스가 인도에서도 번역되어 불리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는 『마하바라타』, 『라마야나』를 오인한 것으로 추측된다.[16]
디온의 작품은 유서 깊은 아티카 방언으로 쓰여진 점도 있어 중세 비잔티움 제국에 이르기까지 널리 수용되었다. 시네시우스는 전기 『디온론』을 저술했다. 포티오스도 전기를 저술했으며, 포티오스의 제자인 아레타스는 주석서를 저술했다. 유스타티우스도 디온을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15세기부터 『왕정론』과 『트로이 함락되지 않다』를 중심으로 라틴어·그리스어로 출판이 이루어졌다.
4. 철학
디오는 철학을 다루었지만, 명확하게 속하는 학파는 없었다.[1] 여러 작품에서 디오게네스를 주역으로 삼았지만, 견유학파를 신봉한 것은 아니었고, 거지처럼 방랑했지만, 기이한 행위까지는 하지 않았다.[1] 스토아학파의 요소도 가지고 있지만, 속한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1] 플라톤의 대화편을 애독했지만, 플라톤 철학에 강한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1] 다만 에피쿠로스 학파에게만은 냉담했다.[2]
필로스트라토스는 『소피스트 열전』에서 디오를 "소피스트라고 불린 철학자"로 분류하면서, 소피스트와 철학자 양쪽의 면모를 가지고 있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3] 작품에서도 철학과 변론술이 융합되어 있으며,[1] 『변론집』 제22편에서는 "자신은 변론가가 아니라 철학자다"라는 것을 변론가적으로 연설하고 있다.[4]
4. 1. 실천적 지혜 강조
디오는 철학을 다루었지만, 명확하게 속하는 학파는 없다.[1] 여러 작품에서 디오게네스를 주역으로 삼았지만, 견유학파를 신봉한 것은 아니었고, 거지처럼 방랑했지만, 기이한 행위까지는 하지 않았다.[1] 스토아학파의 요소도 가지고 있지만, 속한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1] 플라톤의 대화편을 애독했지만, 플라톤 철학에 강한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1] 다만 에피쿠로스 학파에게만은 냉담했다.[2]필로스트라토스는 『소피스트 열전』에서 디오를 "소피스트라고 불린 철학자"로 분류하면서, 소피스트와 철학자 양쪽의 면모를 가지고 있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3] 작품에서도 철학과 변론술이 융합되어 있으며,[1] 『변론집』 제22편에서는 "자신은 변론가가 아니라 철학자다"라는 것을 변론가적으로 연설하고 있다.[4]
4. 2. 다양한 사상의 융합
디오는 철학을 다루었지만, 명확하게 속하는 학파는 없다[1]. 여러 작품에서 디오게네스를 주역으로 삼았지만, 견유학파를 신봉한 것은 아니었고, 거지처럼 방랑했지만 기이한 행위까지는 하지 않았다[1]. 스토아학파의 요소도 가지고 있지만, 속한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1]. 플라톤의 대화편을 애독했지만, 플라톤 철학에 강한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1]. 다만 에피쿠로스 학파에게만은 냉담했다[2].필로스트라토스는 『소피스트 열전』에서 디오를 "소피스트라고 불린 철학자"로 분류하면서, 소피스트와 철학자 양쪽의 면모를 가지고 있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3]. 작품에서도 철학과 변론술이 융합되어 있으며[1], 『변론집』 제22편에서는 "자신은 변론가가 아니라 철학자다"라는 것을 변론가적으로 연설하고 있다[4].
4. 3. 도덕성과 공공선 추구
디오는 철학을 다루었지만, 명확하게 속하는 학파는 없다.[1] 여러 작품에서 디오게네스를 주역으로 삼았지만, 견유학파를 신봉한 것은 아니었고, 거지처럼 방랑했지만 기이한 행위까지는 하지 않았다.[1] 스토아학파의 요소도 가지고 있지만, 속한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1] 플라톤의 대화편을 애독했지만, 플라톤 철학에 강한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1] 다만 에피쿠로스 학파에게만은 냉담했다.[2]필로스트라토스는 『소피스트 열전』에서 디오를 "소피스트라고 불린 철학자"로 분류하면서, 소피스트와 철학자 양쪽의 면모를 가지고 있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3] 작품에서도 철학과 변론술이 융합되어 있으며,[1] 『변론집』 제22편에서는 "자신은 변론가가 아니라 철학자다"라는 것을 변론가적으로 연설하고 있다.[4]
4. 4. 비판 정신
디오는 철학을 다루었지만, 명확하게 속하는 학파는 없다[1]. 여러 작품에서 디오게네스를 주역으로 삼았지만, 견유학파를 신봉한 것은 아니었고, 거지처럼 방랑했지만, 기이한 행위까지는 하지 않았다[1]. 스토아학파의 요소도 가지고 있지만, 속한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1]. 플라톤의 대화편을 애독했지만, 플라톤 철학에 강한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1]. 다만 에피쿠로스 학파에게만은 냉담했다[2].필로스트라토스는 『소피스트 열전』에서 디오를 "소피스트라고 불린 철학자"로 분류하면서, 소피스트와 철학자 양쪽의 면모를 가지고 있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3]. 작품에서도 철학과 변론술이 융합되어 있으며[1], 『변론집』 제22편에서는 "자신은 변론가가 아니라 철학자다"라는 것을 변론가적으로 연설하고 있다[4].
5. 영향
(요약 및 참조할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아, '디온 크리소스토모스'의 '영향' 섹션에 대한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참조
[1]
서적
Orat. 46.13
https://penelope.uch[...]
[2]
서적
Orat. 3.13
https://penelope.uch[...]
[3]
서적
Orat. 13.1
https://penelope.uch[...]
[4]
서적
Orat. 13.9
https://penelope.uch[...]
[5]
서적
Orat. 13.11
https://penelope.uch[...]
[6]
서적
Orat. 12.16
https://penelope.uch[...]
[7]
서적
Orat. 36
https://penelope.uch[...]
[8]
서적
Orat. 45.2
https://penelope.uch[...]
[9]
서적
Epistles, 10.81
http://www.attalus.o[...]
[10]
서적
Orat. 3.2
https://penelope.uch[...]
[11]
서적
Vitae sophistorum i.7
[12]
서적
Dion
[13]
서적
Bibl. Cod. 209
[14]
서적
Orat. vii.133‑152
https://penelope.uch[...]
[15]
서적
Dion
[16]
서적
The Shape of Ancient Thought: Comparative Studies in Greek and Indian Philosophies
Allworth Communications
2002
[17]
서적
Orat. xlvi. 13
http://penelope.uchi[...]
[18]
서적
Orat. iii. 13
http://penelope.uchi[...]
[19]
서적
Orat. xiii. 1
http://penelope.uchi[...]
[20]
서적
Orat. xiii. 9
http://penelope.uchi[...]
[21]
서적
Orat. xiii. 11
http://penelope.uchi[...]
[22]
서적
Orat. xii. 16
http://penelope.uchi[...]
[23]
서적
Orat. xxxvi
http://penelope.uchi[...]
[24]
서적
Orat. xlv. 2
http://penelope.uchi[...]
[25]
서적
Epistles, x. 81
http://www.attalus.o[...]
[26]
서적
Orat. iii. 2
http://penelope.uchi[...]
[27]
서적
Vitae sophistorum i.7
[28]
서적
Dion
[29]
서적
Bibl. Cod. 209
[30]
서적
Orat. vii.133‑152
http://penelope.uchi[...]
[31]
서적
Orat. liii. 6-8
http://penelope.uchi[...]
[32]
서적
The Shape of Ancient Thought: Comparative Studies in Greek and Indian Philosophies
Allworth Communications
2002
[33]
웹인용
Dio Chrysostom - Luwian Studies
https://luwianstudie[...]
[34]
웹인용
Trojan Horse of Western History
https://publications[...]
[35]
서적
Dion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