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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약탈 (15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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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약탈 (1527년)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군대가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끄는 교황령의 수도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카를 5세의 세력 확장에 대항하여 프랑스와 코냑 동맹을 맺은 것이 배경이 되었다. 1527년 5월 6일, 제국군은 로마를 함락하고 약탈을 시작했으며, 교황은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했다. 약탈로 인해 로마는 큰 피해를 입었고,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였던 로마는 인구 감소와 경제 붕괴를 겪었다. 로마 약탈은 교황권의 쇠퇴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종말을 가져왔으며, 영국 종교 개혁을 촉발하는 등 유럽의 정치, 종교, 문화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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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약탈 (1527년) - [전쟁]에 관한 문서
사건 개요
분쟁코냑 동맹 전쟁
날짜1527년 5월 6일
장소교황령 로마
결과신성 로마 제국-스페인 연합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파일:Emblem of the Papacy SE.svg|16px]] 교황령
프랑스
교전국 2[[파일:Charles V Arms-personal.svg|16px]] 카를 5세의 제국
[[파일:Banner of the Holy Roman Emperor without haloes (1400-1806).svg|16px]] 신성 로마 제국
[[파일:Flag of New Spain.svg|테두리|16px]] 스페인
[[파일:Coat of arms of the House of Gonzaga-Guastalla.svg|22px]] 구아스탈라 공국
지휘관
교전국 1 지휘관교황 클레멘스 7세
카스퍼 뢰이스트
렌초 다 체리
미켈레 안토니오
교전국 2 지휘관페란테 곤차가
부르봉 공작 샤를 3세
필리베르 드 샬롱
병력 규모
교전국 1 병력민병대 5,000명
스위스 근위대 189명
교전국 2 병력20,000+ (반란군)
독일 란츠크네히트 14,000명
스페인 군인 6,000명
이탈리아 용병 (불명)
사상자
교전국 1 사상자민병대 1,000명 사망
스위스 근위대 189명 사망
교전국 2 사상자미상
민간인 사상자민간인 45,000명 사망, 부상 또는 망명
시각 자료
요하네스 링겔바흐의 로마 약탈, 17세기 작품
1527년 로마 약탈, 요하네스 링겔바흐, 17세기 작품 (개인 소장)

2. 배경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의 증대되는 권력은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큰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교황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카를 5세의 숙적인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 동맹을 맺고 1526년 코냑 동맹을 결성했다.[3] 이 동맹에는 교황령과 프랑스 외에도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그리고 메디치 가문이 다스리던 피렌체 등이 참여했다.[3]

동맹 결성 후 교황은 카를 5세와 동맹 관계였던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 데스테파문하는 등 적극적으로 황제에 맞섰다. 코냑 동맹은 1526년 시에나 공화국을 공격하며 군사 행동을 시작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교황 군대의 취약성만 드러냈다.[4]

한편, 카를 5세가 파견한 황제군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는 등 전과를 올렸지만, 심각한 재정 문제에 부딪혔다. 병사들에게 약속된 급료를 지불할 자금이 바닥나자, 약 34,000명에 달하는 황제군 병사들은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지휘관인 샤를 3세 드 부르봉 공작에게 로마로 진격하여 약탈을 통해 보상을 얻도록 강요했다. 당시 로마는 교황의 정치적 행보로 인해 외부 세력의 개입에 취약한 상태였다.

황제군은 샤를 3세 드 부르봉 공작 휘하의 스페인 병사 약 6,000명, 게오르크 폰 프룬즈베르크가 이끄는 독일 란츠크네히트 용병 약 14,000명, 그리고 여러 이탈리아 귀족들이 이끄는 보병과 기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독일 출신 란츠크네히트 중 상당수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에 영향을 받은 루터교 신자들로, 가톨릭과 교황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오랜 행군과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 그리고 군대에 합류한 무법자들까지 더해져 황제군은 통제력을 상실해갔다.

결국 샤를 3세 드 부르봉 공작1527년 4월 말, 반란을 일으킨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향했다. 진군 도중 여러 도시를 약탈한 황제군은 5월 5일 마침내 로마 성벽 앞에 당도했다.

2. 1. 유럽의 정치적 상황

15세기 말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을 보여주는 지도. 로마 약탈 직전의 복잡한 세력 구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5세기 말, 프랑스는 백년전쟁(1337-1453) 이후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며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안정된 국정을 바탕으로 국력이 신장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유럽의 중심 국가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492년 레콩키스타를 완성하며 급부상한 스페인은 프랑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스페인은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시칠리아를 지배하고 있었으며, 해외 식민지 개척에서도 앞서나가고 있었다.

1519년, 젊은 카를 5세가 스페인 국왕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겸하게 되면서 유럽의 정치 지형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의 강력한 등장은 기존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렸고, 주변 국가들의 견제와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군사적 충돌의 가능성을 높였다.

16세기 초는 대항해시대가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항로를 통한 무역이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시기였다. 따라서 지중해는 여전히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서 매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유럽 강대국들은 지중해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꾀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하여 프랑스(발루아 왕조)와 신성 로마 제국 간의 충돌이 반복되었다. 1515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를 침공하여 스포르차 가문을 몰아내고 지배권을 확보했다. 그러나 1521년,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는 당시 교황 레오 10세와 손을 잡고 밀라노를 공격하여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레오 10세의 뒤를 이은 교황 클레멘스 7세(레오 10세의 조카)는 점증하는 카를 5세의 세력이 교황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에서 고심하다 결국 카를 5세의 숙적인 프랑수아 1세와 손을 잡았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패배하여 카를 5세에게 포로로 잡혔던 프랑수아 1세가 1526년 석방되자, 클레멘스 7세는 프랑수아 1세와 함께 카를 5세에 대항하기 위한 코냑 동맹을 결성했다.[3] 이 동맹에는 프랑스와 교황령 외에도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그리고 메디치 가문이 통치하는 피렌체 공화국이 참여했다.

교황은 동맹 결성 후 카를 5세와 동맹 관계였던 페라라의 공작 알폰소 1세 데스테파문하고 로마에 유폐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카를 5세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코냑 동맹은 1526년 시에나 공화국을 공격하며 군사 행동을 개시했으나 실패로 돌아가면서 교황 군대의 취약성을 드러냈다.[4] 이에 카를 5세는 이탈리아에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황제군은 프랑스군을 격파했지만, 병사들에게 지급할 급료가 부족했다. 결국 약 34,000명에 달하는 황제군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켜 지휘관인 샤를 3세 드 부르봉 공작에게 로마로 진격할 것을 강요했다. 당시 로마는 교황의 정치적 행보로 인해 외부의 공격에 취약한 상태였다. 황제군에는 샤를 3세 드 부르봉 공작 휘하의 스페인 병사 약 6,000명 외에도, 게오르크 폰 프룬즈베르크가 이끄는 약 14,000명의 독일 란츠크네히트 용병, 파브리치오 마라말도와 폼페오 콜론나 추기경, 루이지 곤자가가 이끄는 이탈리아 보병, 그리고 페란테 1세 곤자가와 오렌지 공 휘하의 기병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독일 용병 중에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에 영향을 받아 가톨릭교회와 교황에 대해 적대감을 가진 루터교 신자들이 많았으며, 오랜 행군과 급료 미지급으로 굶주린 상태였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들이 이후 벌어질 로마 약탈의 비극적인 배경이 되었다.

2. 2. 도시 로마의 상징성

도시 로마가 위치한 이탈리아는 과거 찬란했던 로마 제국의 문명과 정신이 깃든 곳이었다. 유럽 각국은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지도 국가의 지위를 공인받기 위해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이탈리아 반도를 차지하려 했다. 또한 유럽이 가톨릭화되면서 교황청이 있는 로마는 가톨릭 문화와 정신 문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럽의 군주들은 자신이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이자 대륙의 지도자로 인정받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교황으로부터 공인받아야 했다. 이 때문에 여러 나라는 이탈리아와 로마 내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탈리아 반도는 유럽 각국의 패권 다툼의 각축장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정작 이탈리아 반도는 여러 개의 작은 도시 국가로 분열되어 있어 외세의 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혼란만 거듭하고 있었다.

2. 3. 교황 클레멘스 7세와 코냑 동맹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가 교황으로 즉위했을 당시 유럽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 간의 패권 다툼, 특히 이탈리아 반도의 주도권을 둘러싼 대립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젊은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탈리아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기 위해 두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시도했으나, 그의 행보는 때때로 불안정한 정세를 더욱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황제군에게 대패하고 프랑수아 1세마저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하자, 교황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미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왕국시칠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카를 5세가 북부 이탈리아에서도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면서, 이탈리아 반도 전체에 대한 그의 지배력이 강화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3]

이러한 상황에서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의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직접 나섰다. 그는 카를 5세의 숙적인 프랑수아 1세(1526년 2월 석방)와 손을 잡고 군사 동맹 결성을 추진했다.[25] 그 결과 1526년 5월, 교황령, 프랑스,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 등이 참여하는 코냑 동맹이 결성되었다.[3][26] 이 동맹은 카를 5세의 증대되는 권력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

2. 3. 1. 코냑 동맹 결성과 이탈리아의 상황



16세기 초 유럽은 새로운 강대국들의 등장과 경쟁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프랑스는 백년전쟁 이후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을 이루며 유럽의 강자로 부상했고, 스페인레콩키스타 완성(1492년)과 신대륙 발견을 통해 신흥 강국으로 떠올랐다. 특히 스페인은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시칠리아까지 지배하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519년, 젊은 카를 5세가 스페인 국왕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겸하게 되면서 유럽의 힘의 균형은 크게 흔들렸다. 카를 5세의 막강한 권력은 주변 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고, 이는 군사적 충돌의 불씨가 되었다. 당시 대항해시대가 열렸지만, 여전히 지중해 무역은 중요했고, 이탈리아 반도는 지중해 주도권을 둘러싼 각축장이었다.

이탈리아를 둘러싼 갈등은 이탈리아 전쟁으로 이어졌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카를 5세의 황제군에게 참패하고 프랑수아 1세 국왕마저 포로로 잡히는 사건은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이 소식은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미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한 카를 5세가 북부 이탈리아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교황령을 포함한 이탈리아 전체가 그의 지배하에 놓일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3]

이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의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직접 나섰다. 그는 카를 5세의 숙적인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1526년 2월 석방)와 손을 잡고 군사 동맹 결성을 추진했다.[25] 이 동맹은 1526년 5월, 프랑스 코냑에서 최종 조약이 체결되어 코냑 동맹으로 불리게 되었다.[26] 동맹에는 교황령, 프랑스,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피렌체가 참여했으며[3], 일부 기록에는 제노바 공화국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동맹군의 총사령관은 우르비노 공작이 맡았다.

각 참여 세력은 저마다의 이유로 동맹에 가담했다. 프랑스는 파비아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카를 5세의 독주를 막으려 했다. 밀라노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는 1521년 카를 5세 덕분에 스포르차 가문의 통치권을 되찾았지만, 밀라노 주둔 스페인군의 간섭에 불만을 품고 황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동맹에 합류했다. 베네치아와 피렌체 역시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황제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며 동맹에 참여했다.

코냑 동맹은 결성 직후 1526년 시에나 공화국을 공격하며 활동을 시작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동맹군의 군사적 역량 부족만 드러내는 결과를 낳았다.[4]

2. 3. 2. 코냑 동맹 전쟁의 시작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의 커져가는 권력은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불안감을 주었으며, 교황은 카를 5세를 교황권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했다.[3] 이에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의 오랜 경쟁자인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 손을 잡고 코냑 동맹을 결성했다.[3] 이 동맹은 1526년, 파비아 전투에서 패배하고 카를 5세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난 프랑수아 1세가 카를 5세에 대항하기 위해 주도한 것이었다.

교황과 프랑스 국왕 외에도, 동맹에는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그리고 메디치 가문이 통치하는 피렌체가 참여했다.[3] 교황은 황제와 동맹 관계에 있던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 데스테파문하고 로마에 유폐시키기도 했다. 동맹군은 1526년 시에나 공화국을 공격하며 활동을 시작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이는 교황이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의 한계를 드러냈다.[4]

한편, 코냑 동맹군이 롬바르디아로디를 함락하는 등 북부 이탈리아를 점령해나가자 카를 5세는 분노했다. 특히 자신이 복위시켜 준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의 배신에 격분하여 제국군을 보내 밀라노를 점령하고 스포르차 가문의 통치권을 회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냑 동맹은 분열되는 모습을 보였다. 프랑스군은 파비아 전투(1525년)에서의 패배 경험 때문에 전쟁에 소극적이었고, 베네치아는 자국의 사정을 핑계로 군대 파견을 꺼렸다.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자 다른 도시국가들도 점차 소극적으로 전쟁에 임하며 제국군과의 직접적인 정면 대결을 피했다.

황제군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병사들에게 약속된 급료를 지불할 자금이 부족했다. 이로 인해 샤를 3세[27]가 지휘하는 34,000명의 황제군은 불만이 극에 달해 반란을 일으켰고, 지휘관에게 로마로 진격할 것을 강요했다. 당시 로마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여 약탈하기 쉬운 목표로 여겨졌다.

황제군은 샤를 3세 휘하의 스페인 병사 약 6,000명, 게오르크 폰 프룬즈베르크 휘하의 란츠크네히트 용병 약 14,000명, 그리고 파브리치오 마라말도, 스키라 콜론나(강력한 이탈리아 추기경 폼페오 콜론나의 세력), 루이지 곤차가, 페란테 1세 곤차가, 필리베르 드 샬롱 등이 지휘하는 이탈리아 보병과 기병대로 구성되었다. 특히 독일 출신 란츠크네히트 중 다수는 마르틴 루터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루터교 신자들로, 가톨릭과 교황에 대한 종교적 적개심을 가지고 로마 점령을 강하게 원했다. 또한, 장기간의 행군으로 굶주린 병사도 많았으며, 수많은 무법자들과 동맹군의 탈영병들이 행군하는 군대에 합류했다.

샤를 3세는 1527년 4월 20일 아레초를 떠나 로마로 향했다. 이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그 동맹국 사이에서 클레멘스 7세의 가문인 메디치 가문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 혼란스러운 틈을 탄 것이었다. 규율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그의 군대는 진군 도중 아쿠아펜덴테와 산 로렌초 알레 그로테를 약탈한 후, 비테르보론칠리오네를 점령하고 5월 5일 로마 성벽에 도착했다.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알려진 카를 5세의 군대가 감히 교황령의 수도이자 성도(聖都)인 로마를 침공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제국군이 실제로 로마 성벽 앞에 나타나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크게 당황했다.

3. 로마 약탈

1526년, 파비아 전투에서 패배하여 황제 카를 5세의 포로가 되었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석방된 후, 그는 카를 5세에 대항하기 위해 코냑 동맹을 결성했다. 교황 클레멘스 7세 역시 이 동맹에 가담하였는데, 이는 황제 카를 5세의 분노를 샀다. 카를 5세는 이에 대응하여 독일 용병(란츠크네흐트)과 스페인 병사 등으로 구성된 제국군을 로마로 파견했다. 당시 제국군은 오랜 행군과 급료 미지급 문제로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고, 특히 독일 용병 중 다수를 차지했던 루터교 신자들은 가톨릭의 중심지인 로마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1527년 5월 6일, 제국군은 로마를 공격했다. 로마를 방어하는 병력은 렌초 다 체리가 이끄는 민병대 5,000명과 교황 스위스 근위대 189명에 불과하여[6] 수적으로 절대적인 열세였다.[5] 제국군은 지아니콜로 언덕과 바티칸 언덕의 성벽을 돌파하며 로마 시내로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제국군 지휘관이었던 부르봉 공작샤를 3세가 전사했지만, 지휘관의 죽음은 오히려 병사들의 통제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지휘 체계가 무너진 제국군은 로마 시내에서 무자비한 약탈과 파괴, 학살을 자행했다. 교회와 수도원, 귀족과 추기경들의 궁전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으며, 수많은 로마 시민들이 살해되거나 고통받았다. 특히 교황을 보호하려던 스위스 근위대는 용맹하게 저항했으나 거의 전멸했고, 소수의 생존자만이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하는 것을 도왔다.[6]

약탈은 며칠간 계속되었고, 로마는 극심한 혼란과 파괴에 휩싸였다. 바티칸 도서관은 제국군 지휘관 필리베르 드 샬롱이 본부로 사용하면서 파괴를 면했지만,[7] 도시 곳곳의 문화유산과 예술품이 약탈되거나 소실되었다. 산탄젤로 성에 피신해 있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결국 6월 6일 항복했고, 막대한 배상금(40만 두카토)을 지불하고 영토 일부를 할양하는 조건에 동의해야 했다. 이 사건으로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였던 로마는 심각한 타격을 입고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성기 르네상스 시대는 사실상 종말을 맞이했다.

정치적으로는 황제 카를 5세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1529년 교황과 황제는 바르셀로나 조약을 맺고 화해했으며, 이탈리아에서 카를 5세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1530년에는 볼로냐에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직접 카를 5세에게 신성 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주는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또한, 이 혼란기에 피렌체 공화국에서 추방되었던 메디치 가문의 알레산드로는 카를 5세의 지원을 받아 복귀하여 1532년 피렌체 공국을 세웠다.

3. 1. 제국군의 진격과 로마 함락

신성 로마 제국 황제군은 독일 용병(란츠크네흐트) 14,000명, 스페인군 6,000명, 그리고 일부 이탈리아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5] 이들은 오랜 행군과 급료 미지급으로 불만이 가득했고, 특히 독일 용병 중에는 루터교 신자가 많아 가톨릭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반면, 로마를 방어하는 병력은 매우 적었다. 렌초 디 체리가 이끄는 민병대 5,000명과[6]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스위스 근위대 189명뿐이었다. 로마에는 견고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과 포병대가 있었지만, 수적으로 압도적인 제국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국군 지휘관 샤를 3세[27]는 로마를 포위한 상태에서 후방의 코냑 동맹군에게 협공당할 위험을 피하고자 신속하게 도시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공성전을 서둘렀다.

로마 약탈. 피터 브뤼헬의 작품


1527년 5월 6일, 제국군은 지아니콜로 언덕과 바티칸 언덕의 성벽을 공격하여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공격 도중 지휘관 샤를 3세가 벤베누토 첼리니가 쏜 총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전사했다.[28][29] 샤를은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눈에 잘 띄는 흰색 망토를 입고 있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적에게 지휘관임을 드러내는 표적이 되었다. 존경받던 지휘관의 죽음은 급료 미지급 등으로 불만이 쌓여 있던 병사들의 분노를 폭발시켰고, 군대의 규율은 완전히 무너졌다. 병사들은 통제를 잃고 무너진 성벽을 통해 로마 시내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갔다. 샤를의 뒤를 이어 필리베르 드 샬롱이 지휘를 맡았지만, 그는 병사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흥분한 병사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로마 약탈. 1527년 5월 6일. 마르틴 판 헤엠스케르크 (1527)의 작품


이 과정에서 교황의 스위스 근위대는 처절한 최후를 맞이했다. 근위대장 카스파 로이스트가 이끄는 189명의 스위스 근위대는 남은 로마 수비대와 함께 바티칸 내 테우토니코 묘지에서 제국군에 맞서 싸웠다. 로이스트는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집으로 피신했으나, 추격해 온 스페인 병사들에게 아내가 보는 앞에서 살해당했다.[6] 스위스 근위대는 용맹하게 싸웠지만 압도적인 수적 열세 속에 거의 전멸했다. 일부 생존자들은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성 베드로 대성당 계단으로 후퇴했으나 그곳에서 학살당했다. 헤르쿨레스 골드리가 지휘하는 42명의 근위대만이 살아남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바티칸 시국과 산탄젤로 성을 잇는 비밀 통로인 보르고 통로를 통해 피신하는 동안 필사적으로 제국군의 추격을 막아냈다.[6]

로마를 점령한 제국군은 약 1,000명의 수비군을 처형한 뒤, 무자비한 약탈을 시작했다. 교회와 수도원, 추기경과 고위 성직자들의 궁전이 예외 없이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심지어 황제에게 협력했던 추기경들조차 난폭해진 병사들로부터 재산을 지키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했다. 5월 8일에는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숙적이던 폼페오 콜론나 추기경이 로마에 입성했다. 그는 과거 교황군에게 피해를 입었던 자신의 영지 농민들을 이끌고 복수를 위해 왔으나, 도시의 참혹한 상황에 충격을 받고 자신의 궁전에 일부 로마 시민들을 피난시켜 주기도 했다. 바티칸 도서관은 필리베르 드 샬롱이 그곳에 지휘 본부를 설치한 덕분에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7]

약탈은 3일간 계속되었고, 이후 필리베르가 약탈 중단을 명령했지만 따르는 병사는 거의 없었다. 그동안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산탄젤로 성에 갇혀 있었다. 코냑 동맹 군대를 이끌던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와 미켈레 안토니오 살루초는 6월 1일에야 로마 북쪽 몬테로시에 도착했지만, 이미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 제국군을 상대로 쉽게 승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공격 기회를 놓쳤다. 결국 6월 6일, 클레멘스 7세는 항복하고 자신의 목숨을 보장받는 대가로 40만 두카토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파르마, 피아첸차, 치비타베키아, 모데나신성 로마 제국에 할양하는 데 동의했다(실제로는 모데나만 넘어갔다). 이 혼란을 틈타 베네치아는 체르비아와 라벤나를 점령했고,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는 리미니로 돌아왔다.

3. 2. 로마 수비군의 저항과 스위스 근위대의 용맹

로마를 방어하는 군대는 렌초 다 체리가 이끄는 민병대 5,000명과[6] 교황 스위스 근위대 189명뿐으로 수적으로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5] 도시에는 아우렐리안 성벽과 상당한 포병 전력이 있었지만, 제국군은 포위 장기화와 외부 지원군 개입을 피하기 위해 신속한 점령을 시도했다.

1527년 5월 6일, 제국군은 지아니콜로 언덕과 바티칸 언덕의 성벽을 공격했다. 공격을 이끌던 부르봉 공작은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눈에 띄는 흰색 망토를 입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벤베누토 첼리니가 쏜 총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존경받던 지휘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제국군은 통제력을 상실했고, 같은 날 로마의 성벽은 쉽게 함락되었다. 이후 필리베르 드 샬롱이 지휘권을 넘겨받았으나 군대를 효과적으로 통솔하지 못했다.

제국군이 로마 시내로 쏟아져 들어오자 교황청이 고용한 다른 용병들은 대부분 싸움을 피해 달아났지만, 스위스 근위대만큼은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저항했다. 바티칸 내 테우토니코 묘지와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향하는 길목 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스위스 근위대는 격렬하게 싸웠으나, 압도적인 수적 열세 속에 거의 전멸 상태에 이르렀다. 근위대장 카스파 로이스트는 전투 중 부상을 입고 집으로 피신했으나, 추격해 온 스페인 병사들에게 아내가 보는 앞에서 살해당했다.[6] 초기 189명의 근위대원 중 생존자는 단 42명에 불과했다.

스위스 근위대의 필사적인 저항 덕분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피신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헤르쿨레스 골드리가 이끄는 42명의 생존 근위대는 교황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산탄젤로 성[30]까지 이어지는 비밀 통로인 파세토 디 보르고를 통해 800m 떨어진 산탄젤로 성으로 안전하게 피신하는 동안 제국군의 추격을 필사적으로 막아냈다.[6] 교황은 이들에게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으나, 그들은 충성 서약을 지키겠다며 교황의 안전한 피신을 끝까지 도왔고, 이 과정에서 대부분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처럼 최악의 상황에서도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한 스위스 근위대의 용맹함은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후 교황청 근위대에 주로 스위스 출신 용병을 기용하는 전통이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다.[31] 현재까지도 매년 5월 6일이 되면, 바티칸에 주둔하는 신참 스위스 근위병들은 1527년 당시 용맹하게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선배들을 기리기 위해 충성 서약식을 거행한다.

3. 3. 약탈의 참상과 피해



:유린된 둥지〔몰수된 부르봉의 영지〕를 버리고 날아오르네

:내려앉은 곳은 유럽의 가장 높은 곳〔로마〕

:그곳이라면 평안과 휴식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에

:신성하기 그지없는 그 땅을, 하늘을 나는 사슴이 침략하네

:그 악명 높은 모독의 손〔독일 용병대〕으로……

3. 3. 1. 약탈의 역사와 비교



황제군은 독일 용병 란츠크네흐트 14,000명, 스페인군 6,000명, 그리고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으나 이탈리아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5] 반면 로마를 방어하는 군대는 렌초 다 체리가 이끄는 민병대 5,000명과[6] 교황 스위스 근위대 189명에 불과했다. 로마 시는 거대한 아우렐리안 성벽과 상당한 포병 전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제국군은 공성 장비가 부족했다. 이에 부르봉 공작은 포위된 로마와 외부의 동맹군 사이에 갇힐 위험을 피하고자 도시를 신속하게 점령해야만 했다.

1527년 5월 6일, 제국군은 지아니콜로 언덕과 바티칸 언덕의 성벽을 공격했다. 이 공격 중에 부르봉 공작은 벤베누토 첼리니가 쏜 총에 맞아 치명상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병사들의 눈에 띄기 위해 자신의 유명한 흰색 망토를 입고 있었는데, 이는 의도치 않게 그를 적에게 지도자로 식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존경받던 지휘관이 사망하자 제국군 병사들은 통제력을 상실했고, 같은 날 로마의 성벽은 쉽게 함락되었다. 필리베르 드 샬롱이 군대의 지휘를 맡았으나, 그는 인기가 없었고 병사들에게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었기에 거의 권위를 행사하지 못했다.

스위스 근위대는 남은 수비대 병력과 함께 바티칸 내 테우토니코 묘지에서 최후의 저항을 벌였다. 이들의 대장 카스파 로이스트는 전투 중 부상을 입고 나중에 자신의 집으로 피신했으나, 스페인 병사들이 그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그를 살해했다.[6] 스위스 근위대는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수적으로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 거의 전멸 상태에 이르렀다. 일부 생존자들은 피난민들과 함께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계단으로 후퇴했지만 그곳에서 학살당했으며, 단 42명만이 살아남았다. 헤르쿨레스 골드리가 지휘한 이 42명의 생존자들은 교황의 측근이 바티칸 시국과 산탄젤로 성을 연결하는 안전한 고가 통로인 보르고 통로를 통해 피신하는 동안 합스부르크 군대의 추격을 막아냈다.[6]

교황의 수도이자 성지에서 약 1,000명의 수비 병력이 처형된 후, 본격적인 약탈이 시작되었다. 교회와 수도원, 그리고 추기경과 고위 성직자들의 궁전이 무차별적으로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심지어 황제에게 우호적이었던 추기경들조차 난폭해진 병사들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했다. 5월 8일, 교황 클레멘스 7세의 개인적인 정적인 폼페오 콜론나 추기경이 로마에 입성했다. 그는 교황군에게 피해를 입었던 자신의 영지 농민들을 이끌고 약탈에 대한 복수를 하러 왔으나, 도시의 참혹한 상황을 목격하고는 자신의 궁전에 일부 로마 시민들을 피신시키기도 했다.

바티칸 도서관은 필리베르 드 샬롱이 그곳에 본부를 설치한 덕분에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7] 3일간의 무자비한 약탈 이후, 필리베르는 병사들에게 약탈 중단을 명령했으나, 그의 명령에 따르는 자는 거의 없었다. 그동안 클레멘스 7세는 산탄젤로 성에 사실상 감금된 상태였다.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와 미켈레 안토니오 살루초가 이끄는 교황 지원군이 6월 1일 로마 북쪽 몬테로시에 도착했지만, 그들의 지나치게 신중한 태도로 인해 당시 완전히 무질서 상태에 빠진 제국군을 상대로 손쉬운 승리를 거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6월 6일, 클레멘스 7세는 항복을 선언하고,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는 대가로 40만 두카토의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데 동의했다. 항복 조건에는 파르마, 피아첸차, 치비타베키아, 모데나를 신성 로마 제국에 할양하는 내용도 포함되었으나, 실제로 제국에 넘어간 것은 모데나뿐이었다. 한편, 베네치아는 이 혼란한 상황을 이용하여 체르비아와 라벤나를 점령했으며,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는 리미니로 복귀했다.

3. 3. 2. 교황의 항복과 로마의 피해

1527년 6월 6일, 클레멘스 7세는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그는 자신의 신변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신성 로마 제국파르마, 치비타베키아, 모데나를 넘겨주고 몸값으로 40만 두카토를 지불하는 조건에 동의했다.[25] 그러나 실제로 이행된 것은 몸값 지불뿐이었고, 영토 할양 약속 중에서는 모데나만이 실제로 넘어갔다. 이 혼란을 틈타 베네치아는 체르비아와 라벤나를 점령했고,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는 리미니로 돌아갔다.

클레멘스 7세는 산탄젤로 성에 포로로 약 7개월간 감금되었다. 1527년 12월 초, 그는 제국 관리들을 매수한 뒤 몰래 성을 탈출하여[32][33] 오르비에토를 거쳐 비테르보로 피신했다.[25] 교황이 로마로 돌아온 것은 1528년 10월이었지만, 도시는 이미 황폐해진 뒤였다.

로마의 피해는 처참했다. 1527년 인구 조사 당시 약 5만 4,000명(어린이 제외)이 거주했으나,[34] 약탈 과정에서 발생한 사상자와 도시를 떠난 피난민을 합쳐 총 4만 5,000명 가량이 피해를 입었다고 추정된다. 이 중 사망자만 약 1만 2,000명에 달했다. 제국군은 로마를 약 9개월간 점령하며[35] 도시와 주변 지역을 약탈했고, 1528년 2월 중순이 되어서야 철수했다.

점령 기간 동안 제국군 소속 용병들은 지휘 체계가 무너진 상태에서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급료가 제때 지급되지 않자 지휘관들에게 항명하며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고, 성 베드로 대성당을 마굿간으로 사용하는 등 신성 모독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건물의 문과 문틀 등 나무로 된 것은 모조리 뜯어 땔감으로 사용했다. 거리에는 시신이 그대로 방치되어 썩어갔고, 이는 각종 전염병의 창궐로 이어졌다. 교회와 수도원, 추기경과 고위 성직자들의 궁전이 약탈되고 파괴되었으며, 심지어 제국에 협조적이었던 추기경들조차 재산을 지키기 위해 병사들에게 돈을 지불해야 했다. 다만 바티칸 도서관은 제국군 지휘관 필리베르 드 샬롱이 그곳을 본부로 사용했기 때문에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7]

이 사건으로 로마에 모여 있던 수많은 문화인과 예술가들이 살해되거나 다른 도시로 피난을 떠났다. 귀중한 문화재가 약탈당하고 파괴되면서,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였던 로마는 큰 타격을 입고 정체기를 맞이했다. 이로써 1450년대부터 이어져 온 성기 르네상스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4. 영향

로마 약탈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종말을 고하는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유럽의 정치, 문화, 종교 전반에 걸쳐 지속적인 파급 효과를 남겼다.[8]

약탈 이전까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야심에 맞섰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 사건으로 군사적, 재정적 기반을 완전히 상실했다.[9] 이후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와의 직접적인 대립을 피하고 화해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으며[9][10], 이는 교황권의 약화와 황제권의 강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탈리아 사회와 문화, 특히 로마는 이 사건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와 후원의 중심지였던 로마는 약탈로 인해 인구가 급감하고 경제가 붕괴했으며, 수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도시를 떠나거나 희생되었다.[12] 이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서 로마의 황금기가 막을 내렸음을 의미했다.[8] 코냑 동맹 전쟁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독립을 위해 벌인 마지막 주요 시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11]

권력의 중심이 교황에서 황제로 이동하면서 가톨릭 교회에도 지속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카를 5세는 바르셀로나 조약 (1529년)과 볼로냐 대관식(1530)을 통해 교황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교회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10]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의 요구에 따라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의 혼인 무효화 요청을 거부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영국 종교 개혁을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6][8][17][18]

또한 이 사건은 가톨릭 교회가 르네상스 인문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 반종교 개혁과 종교적 정통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으며[19][9], 가톨릭교와 개신교 사이의 분열을 더욱 고착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약탈 이후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의 압력에 밀려 트렌트 공의회 소집에 동의했지만[20][21], 실제 공의회 개최는 그의 사후에 이루어졌다.[22]

한편, 로마 약탈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보호하다 희생된 스위스 근위대의 용맹을 기리기 위해, 매년 5월 6일에 스위스 근위대 신병들이 선서를 하는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23]

4. 1. 교황권의 쇠퇴와 르네상스의 종말

로마 약탈은 교황권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추락시키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종말을 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로마 약탈 소식에 당황하여 중지를 명령했지만, 자신에게 대항했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군대와 도시를 잃고 산탄젤로 성에 유폐된 상황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실제로 카를 5세는 교황을 압박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에 어느 정도 자율성을 부여했기에 약탈에 대한 부분적인 책임이 있었다.

이 사건 이후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울트레흐트 교구의 세속 재산을 합스부르크 왕가에 양도하는 데 동의했으며, 1528년에는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고 많은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결국 1530년 2월, 볼로냐에서 카를 5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인정하는 대관식을 거행하며 왕관을 씌워주었다.[36][37] 이후 교황은 카를 5세의 의도에 부합하는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25] 클레멘스 7세는 이 사건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예술가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하여 시스티나 성당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했다.

코냑 동맹의 붕괴와 함께 교황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쇠퇴로 이어졌다.[38] 마르틴 루터가 촉발한 종교 분열(1517) 문제의 해결 역시 교황이 아닌 세속 군주들의 주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30년 전쟁을 거쳐 베스트팔렌 조약(1648)이 체결되면서 교황의 명목상 권한마저 축소되었다. 이 사건은 근세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황제권이 교황권을 압도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으며, 교황이 세속 군주로부터 이토록 심한 굴욕을 겪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기독교 군대가 교황령을 침공하여 궤멸적인 타격을 입힌 이례적인 사건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권력의 정점과 교황권 몰락을 동시에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로마 약탈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종말을 가져온 사건으로 자주 언급되며, 유럽, 이탈리아, 그리고 기독교 역사 전반에 걸쳐 지속적인 파급 효과를 낳았다.[8] 약탈 이전 로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와 후원의 중심지였으며, 교황청의 후원을 통해 명성과 부를 얻으려는 유럽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러나 약탈로 인해 로마는 인구가 5만 5천 명 이상에서 1만 명으로 급감하고 경제는 붕괴했으며, 수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이 다른 곳으로 흩어졌다.[12] 약탈 과정에서 6천 명에서 1만 2천 명의 시민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희생자 중에는 교황 비서 파올로 발다바리니[13]와 자연사 교수 아우구스토 발도[14] 같은 지식인들도 포함되었다.

로마 약탈,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아메리고, 1884. 비블리오테카 무세우 빅토르 발라게르


약탈에 가담했던 많은 제국 군인들 역시 약탈 이후 도시에 방치된 시신들로 인해 발생한 질병으로 사망했다. 약탈은 초기 공격 8개월 후인 1528년 2월, 도시의 식량이 고갈되고 몸값을 지불할 사람이 남지 않았으며 역병이 창궐하면서 마침내 끝났다.[9] 클레멘스 7세는 이후에도 로마에서 예술 후원과 건설 프로젝트를 계속했지만, 메디치 가문이 주도했던 르네상스의 황금기는 지나갔다.[8] 도시의 인구는 1560년경이 되어서야 약탈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기 시작했다.[15]

로마 약탈, 플랑드르 학파, 16세기


프랑스의 시인 모리스 세브는 당시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타조〔카를 5세〕의 부름을 들은 하늘을 나는 사슴〔부르봉 공작〕은
유린된 둥지〔몰수된 부르봉의 영지〕를 버리고 날아오르네
내려앉은 곳은 유럽의 가장 높은 곳〔로마〕
그곳이라면 평안과 휴식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에
신성하기 그지없는 그 땅을, 하늘을 나는 사슴이 침략하네
그 악명 높은 모독의 손〔독일 용병대〕으로……"

교황으로부터 황제로의 권력 이동은 가톨릭 교회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카를 5세는 자신의 군대가 교황을 투옥한 것에 당황했지만, 로마 파괴를 피하면서도 교황을 자신의 통제 하에 두기 위해 군대를 이탈리아에 주둔시켰다. 결국 바르셀로나 조약(1529)과 볼로냐 대관식(1530)을 통해 교황과 합의를 이루며 교회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10]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에게 더 이상 직접적으로 반대하지 못하고 그의 요구를 수용했다. 여기에는 카를 5세가 지명한 추기경 임명, 1530년 볼로냐에서의 황제 대관식, 그리고 카를 5세의 숙모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의 결혼 무효화 요청 거부가 포함되었다. 이 마지막 결정은 결과적으로 영국 종교 개혁을 촉발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16][8][17][18]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가톨릭 교회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메디치 교황 시대에 구현되었던 르네상스적 자유 사상에서 벗어나 반종교 개혁이 보여주는 종교적 정통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클레멘스 7세가 1534년 사망한 후, 카를 5세와 그의 아들 펠리페 2세 국왕(1556–1598)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종교 재판이 만연해졌고, 르네상스 문화가 장려했던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교회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져 억압받았다.[19][9]

로마 약탈, 17세기 그림


로마 약탈은 가톨릭교와 개신교 사이의 분열을 영구화하는 데도 기여했다. 약탈 이전부터 카를 5세와 클레멘스 7세는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던 마르틴 루터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 문제에 대해 이견을 보였다. 카를 5세는 문제 해결을 위해 교회 공의회 소집을 주장했지만, 클레멘스 7세는 군주가 교회 정책을 좌우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고, 과거 서방 분열을 심화시켰던 공의회주의의 부활을 우려하여 반대했다.[20][21] 약탈 이후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의 뜻에 따라 공의회 소집에 동의하고 그 장소를 이탈리아 트렌토로 지정했지만, 생전에는 위험한 권력 다툼을 우려하여 트렌트 공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1545년, 클레멘스 7세가 사망한 지 11년 후, 그의 후임자인 교황 바오로 3세가 마침내 트렌트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는 카를 5세가 예측했던 대로 가톨릭 교회 내의 부패를 개혁하는 역할을 했지만[22], 이미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화해 가능성은 사라진 뒤였고 분열은 더욱 고착화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이러한 상황을 두고 "그리스도는 루터를 위해 교황을 파괴하도록 강요받은 황제가 교황을 위해 루터를 박해하는 방식으로 통치한다"(LW 49:169)고 평했다.

한편, 매년 5월 6일에 거행되는 스위스 근위대 신병들의 선서식은 로마 약탈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보호하다 희생된 스위스 근위대의 용맹함을 기리기 위한 전통이다.[23] 또한, 이 소동을 틈타 피렌체 공화국에서 추방되었던 클레멘스 7세의 서자 알레산드로는 1530년 카를 5세의 지원으로 복귀하여 1532년에 공작위를 받고 피렌체 공국을 세우게 되었다.

4. 2. 종교 개혁의 가속화

로마 약탈 이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약탈 소식을 들은 카를 5세는 당혹감을 표하며 중지를 명했지만[9], 자신에게 대항했던 교황이 군사적, 재정적 기반을 잃고 산탄젤로 성에 유폐된 상황 자체는 내심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카를 5세는 클레멘스 7세를 압박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에 어느 정도 자율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약탈에 간접적인 책임이 있었다.[9][10]

이 사건 이후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극도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9][10] 그는 카를 5세의 요구에 따라 울트레흐트 교구의 세속 재산을 합스부르크 왕가에 양도하는 데 동의했고, 1528년에는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결국 1530년 2월, 클레멘스 7세는 볼로냐에서 카를 5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시키는 대관식을 거행하며[36][37] 카를 5세의 우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교황은 카를 5세의 의사에 부합하는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25] 이 사건은 교황이 세속 군주에게 겪은 가장 큰 굴욕으로 기록되었으며, 교황권의 몰락과 황제권의 강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로마 약탈은 마르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 개혁의 흐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면서 종교 분열 문제를 해결하는 주도권은 사실상 세속 군주인 카를 5세에게 넘어갔다.[38] 카를 5세는 이전부터 루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 공의회 소집을 주장했지만, 클레멘스 7세는 공의회주의의 부활과 교황권 약화를 우려하여 반대해왔다.[20][21] 그러나 로마 약탈 이후 힘을 잃은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의 요구에 따라 공의회 소집에 동의하고 개최지로 이탈리아 트렌토를 지정했다. 다만 그는 생전에 공의회를 소집하지는 않았고, 그의 사후인 1545년에야 후임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트렌트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다.[22] 트렌트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내부 개혁을 이끌어냈지만, 이미 개신교와의 화해 시점은 지나가 버린 뒤였다.

또한,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의 정치적 압력에 굴복하여,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와 카를 5세의 숙모인 아라곤의 캐서린의 혼인 무효화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는 헨리 8세가 1534년 수장령을 발표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성공회를 설립하는 영국 종교 개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16][8][17][18]

이처럼 로마 약탈은 교황권의 약화와 황제권의 강화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을 촉발하고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분열을 더욱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마르틴 루터는 이 사건을 두고 "그리스도는 루터를 위해 교황을 파괴하도록 강요받은 황제가 교황을 위해 루터를 박해하는 방식으로 통치한다"고 평가하며,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서 종교 개혁이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했다. 약탈 이후 강화된 카를 5세와 그의 아들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영향력 아래 가톨릭 교회는 반종교 개혁의 길을 걸으며 종교 재판이 강화되었고,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교회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19][9]

4. 3. 잉글랜드 종교 개혁

로마 약탈 이후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군사적, 재정적 기반을 상실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9] 이전과 달리 카를 5세에게 직접적으로 반대할 수 없게 된 클레멘스 7세는 황제의 요구를 수용하는 정책을 펼쳤다.[9][10][25]

카를 5세는 교황에게 여러 요구를 했는데, 그중 하나는 자신의 숙모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의 혼인을 무효화해 달라는 헨리 8세의 요청을 거부하라는 것이었다. 카를 5세의 압력에 굴복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결국 이 혼인 무효 요청을 승인하지 않았다.[16][8][17][18]

교황의 이러한 결정은 잉글랜드 종교 개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헨리 8세는 교황의 권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1534년 수장령을 발표하였고, 이를 통해 잉글랜드 교회는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적인 성공회를 설립하게 되었다.[16][8][17][18] 이는 로마 약탈로 인해 교황권이 실추되고 세속 군주의 영향력이 강화된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이다.

4. 4. 이후의 이탈리아 전쟁과 교황의 도발

1535년 11월,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이탈리아를 둘러싼 긴장감이 다시 높아졌다. 당시 튀니스 원정[39]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폴리에서 겨울을 보내던 카를 5세[40] 이 소식을 듣고 즉시 밀라노를 접수하여 자신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넘겨주려 했다. 이에 프랑스가 강하게 반발하며 1536년 3월 밀라노를 침공했고, 이는 이탈리아 전쟁의 여섯 번째 단계인 6차 이탈리아 전쟁(1536-1538)으로 이어졌다.

전쟁 중이던 1536년 5월, 카를 5세로마를 방문하여 교황 바오로 3세(재위 1534~1549)로부터 큰 환대를 받았다.[41] 이는 교황의 지지를 받았던 튀니스 원정이 성공하여 해적 소탕은 물론, 노예로 끌려갔던 많은 유럽 기독교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는 1527년 약탈 사건 이후 9년 동안 상당 부분 복구된 상태였다.

그러나 로마 약탈의 비극이 잊혀갈 무렵인 1557년, 약 30년 만에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과거의 교훈을 잊은 교황 바오로 4세의 오판이 원인이었다.[42] 그는 1527년의 사건을 잊지 않고 프랑스와 손을 잡고, 당시 나폴리 왕국밀라노를 통치하며 토스카나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펠리페 2세스페인 합스부르크 세력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려 시도했다.[43][44]

이러한 움직임은 1552년 프랑스의 앙리 2세가 밀라노와 나폴리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며 카를 5세에게 전쟁을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호응한 시에나 공화국은 스페인 주둔군을 추방하고 프랑스군을 받아들였다.[45] 펠리페 2세의 명령을 받은 나폴리 총독이 진압에 실패하자, 스페인의 동맹국인 토스카나 공국이 1554년 시에나를 침공하는 등[46] 이탈리아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1555년 즉위한 교황 바오로 4세는 조카 카를로 카라파의 설득에 넘어가[43]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펠리페 2세의 나폴리 왕국 통치권을 박탈한다고 선언했다.[47]

이에 나폴리 부왕인 알바 공작이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자, 교황은 휴전을 요청하며 프랑스군의 지원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나폴리-스페인 연합군이 이동 중이던 프랑스군을 격파했다.[48] 결국 1557년 9월, 알바 공작이 로마로 진격하자 교황 바오로 4세는 뒤늦게 항복을 선언했다.[42] 교황은 9월 12일 스페인이 제시한 조건을 수용하며 카베 평화 조약에 서명했고, 알바 공작은 로마에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고 철군했다.

5.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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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이비드 L. 홈즈, ''성공회의 간략한 역사'', 1993 (컨티넘 인터내셔널 출판 그룹), ISBN 1-56338-060-9.
  • 바바라 W. 터치먼, ''바보들의 행진: 트로이에서 베트남까지'', 1985 (랜덤 하우스 무역 페이퍼백), ISBN 0-345-308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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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 ''르네상스 지식인의 패배: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의 선별된 글'', 카를로 첼리 번역 및 편집, 2019 (펜실베니아 주립 대학교 출판부), ISBN 9780271084312.
  • 메르쿠리노 아르보리오 디 가티나라 (후작), ''1527년 로마 약탈: 보고'', 1866 (제네바: G.-G. 피크).
  • 카를로 밀라네시 (편집), ''MDXXVII의 로마 약탈: 동시대인들의 이야기'' (이탈리아어), 1867 (피렌체: G. 바르베라).
  • 한스 슐츠, ''로마 약탈: 카를 5세의 로마 군대, 1527–1528'', 할레의 근대사 연구 32호 (독일어), 1894 (할레: 막스 니에마이어).
  • 마리아 루도비카 렌치, ''1527년의 로마 약탈'', 1978 (피렌체: 라 누오바 이탈리아).
  • E. R. 챔벌린, ''로마 약탈'', 1979 (뉴욕: 도르셋).
  • 다미엔 도스 산토스 다빔, ''코냐크 동맹 시대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자 카를 5세'' (프랑스어), 2021 (라 브뤼이에르 에디션), ISBN 9782750016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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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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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서적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 도서출판 마티
[41] 서적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 도서출판 마티
[42] 서적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 도서출판 마티
[43] 서적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2014-01
[44] 서적 교황연대기 바다출판 2014-08-05
[45] 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46] 서적 메디치 가문 이야기 현대지성 2020-07-09
[47] 간행물 Letter from the Duque of Alba to Paul IV https://archive.org/[...] Colección de documentos inéditos para la historia de España, vol. II
[48] 웹사이트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 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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