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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회수된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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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회수된 이탈리아(Terre irredente)는 이탈리아 통일 이후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지 못한 이탈리아어 사용 지역을 의미하며,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의 통일 운동의 대상이 되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이탈리아는 트렌티노, 트리에스테, 이스트라, 달마티아, 코르시카, 니스, 몰타 등 주변 지역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려는 이레덴티스모(irredentismo)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의 명분이 되었으며,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팽창주의 정책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이러한 영토 주장을 포기하고, 유럽 연합 가입을 통해 국경 문제를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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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회수된 이탈리아
개요
트리에스테에 있는 이탈리아 통합을 주장하는 기념비
트리에스테에 있는 이탈리아 통합을 주장하는 기념비
이념민족주의, 영토 확장주의
정치적 입장우익 민족주의
존속 기간1870년대 - 1940년대
목표트렌티노, 베네치아 줄리아, 달마티아의 이탈리아 합병
니스, 코르시카, 티치노, 몰타와 같은 기타 지역에 대한 잠재적 주장
역사적 배경
주요 사건이탈리아의 통일
제1차 세계 대전
파시즘의 부상
핵심 인물
주요 인물체사레 바티스티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에토레 톨로메이
영향
영향이탈리아 사회 및 정치에 큰 영향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쇠퇴
관련된 지역
주요 지역트렌티노
베네치아 줄리아
달마티아
트리에스테
피우메 (현재의 리예카)
추가 정보
관련 이념민족주의, 파시즘
기타 관련 정보이탈리아의 영토 회복 운동

2. 역사적 배경

1829년부터 1871년까지의 이탈리아 통일 지도


미회수된 이탈리아는 공식적인 조직이라기보다는 여러 단체가 주장하는 여론 운동으로, 이탈리아가 자연 국경에 도달하거나 이탈리아인이 거주하는 영토를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이와 유사한 민족주의적 사상은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흔했다. 이탈리아어에서 유래된 '미회수주의'라는 용어는 많은 국가에서 사용되었다 (미회수 영토 주장 또는 분쟁 목록 참조).

19세기 동안 이탈리아 미회수주의는 스위스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독일어니스, 코르시카에서 프랑스어와 같이 다른 민족의 언어로부터 이탈리아어를 옹호하는 특징을 보였다.[5]

"미회수된 이탈리아" 해방은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가장 강력한 동기였으며,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은 많은 미회수주의적 주장을 충족시켰다.[4]

이탈리아 미회수주의는 원래 온건한 성향을 띠었으며, 이탈리아 인구가 다수인 지역의 이탈리아 반환만을 요구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파시스트의 영향으로 공격적으로 변하여 이탈리아 왕국에 이탈리아인이 소수이거나 과거에만 존재했던 지역까지 주장했다.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통일 운동) 결과,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지배 하의 트렌티노알토아디제 (남티롤)와 베네치아 줄리아에서는 조국 복귀의 기운이 높아졌고, '''이레덴티스모'''(미회수 이탈리아 운동)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85]

1866년 보오 전쟁 때, 이탈리아는 프로이센과 동맹하여 오스트리아와 싸워 베네치아를 탈환했지만, 전쟁이 불과 7주 만에 종결되어 베네치아보다 더 안쪽에 위치한 영토는 탈환하지 못했다.[86] 1870년 이탈리아 왕국군은 프랑스군 철수를 틈타 로마에 입성하여 교황령을 병합하고, 이듬해 로마로 천도하여 통일을 완성했지만, 남티롤,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등 "미회수된 이탈리아"는 되찾지 못했다.

로마 병합 후 이탈리아는 국내 정비에 집중하며 국제 문제에 소극적이었지만, 국제적 고립을 두려워했다.[86] 오토 폰 비스마르크독일 제국과 관계가 깊어졌고, 독일을 통해 오스트리아와 접촉하기도 했다.[86] 그러나 이탈리아 여론은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인이 많이 사는 지역을 영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 오스트리아 감정이 강했다.[86]

"미회수된 이탈리아"는 "이탈리아어 발음이 들리는 모든 지역", 즉 이탈리아계 언어, 문화, 민족이 지배적인 지역을 모두 이탈리아 영토로 주장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여기에는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프랑스에 할양한 사보이아와 니스, 스위스의 티치노 주와 그라우뷘덴 주 일부, 당시 영국령 몰타, 프랑스령 코르시카까지 포함되었다.

2. 1. 리소르지멘토와 미회수주의

1861년 이탈리아 왕국 성립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던 트렌티노,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등 이탈리아인이 다수 거주하던 지역에서 이탈리아 귀속을 요구하는 운동이 발생했다. 이를 이레덴티스모라고 불렀다.[85]

1877년 이탈리아 정치인 마테오 레나토 임브리아니는 "미회수 이탈리아를 위한 협회"를 설립하여 이 운동을 주도했다.[8] 이 운동은 초기에는 주세페 가리발디의 지지를 받는 등 민족 통일주의적 성격을 띠었으나,[85][86] 점차 제국주의적 요구와 결합하면서 팽창주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85]

1882년 이탈리아는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삼국 동맹을 맺었으나,[86] 국민들 사이에서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반감이 여전했다.[85] 1887년 총리가 된 프란체스코 크리스피는 삼국 동맹 노선을 강화하고 이레덴티스모 운동을 탄압했지만,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85][86]

20세기 초 이탈리아는 영국, 프랑스와 접근하면서 미회수 이탈리아 운동은 발칸반도 진출을 요구하는 부르주아지제국주의적 요구와 결합되었다.[85] 1910년 엔리코 코ッ라디니가 결성한 이탈리아 민족주의 협회는 이러한 흐름을 주도했다.[85]

2. 2. 제1차 세계 대전과 미회수 지역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국가 통일을 완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이유로 이탈리아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은 제4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으로도 간주된다.[38] 이탈리아는 1915년 런던 조약을 체결하고, 삼국 동맹을 탈퇴하여 연합국 측에 가담했다. 이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는 한 달 안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 포고를 해야 했으며, 1915년 5월 23일에 정식으로 선전 포고를 했다.[41] 그 대가로 이탈리아는 전쟁이 끝난 후 트렌토, 트리에스테, 이스트라, 달마티아 등 다양한 영토를 획득할 예정이었다. 1918년 4월, 이탈리아 해군 사령관 파올로 타온 디 레벨은 "미국 국민에게"라는 공개 서한에서 아드리아해에 대한 이탈리아의 영토 주장을 지지해 달라고 호소하며 "우리는 우리 집에서 침입자를 몰아내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라고 썼다.[42]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와 생제르맹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는 트리에스테, 고리치아, 이스트라, 달마티아 도시 자라를 획득했다.[43] 그러나 우드로 윌슨이 유고슬라비아의 주장을 지지하고 런던 조약을 인정하지 않아, 자라와 같은 이탈리아인 다수 지역과 케르소, 루시노, 라고스타와 같은 일부 달마티아 섬만이 이탈리아에 병합되었다. 다른 달마티아 영토에 대한 이탈리아의 요구는 거부되었고, 이러한 결과는 "절단된 승리"로 비난받았다.[44] 콰르네르에 있는 도시 피우메는 이탈리아인이 다수였으나 런던 조약에서 약속되지 않았고, 1924년까지 이탈리아에 귀속되지 않았다.

1919년 1월에 시작된 파리 강화 회의에서는 런던 비밀 조약에서 보장된 이탈리아의 식민지 확장이 거의 인정되지 않았고, 피우메(현재 크로아티아의 리예카)의 병합 문제도 보류되었다.[88] 이탈리아는 '강화에서의 패전국'이라고 불릴 정도였으며, 강화 회의에 참여했던 총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는 이에 불복하여 회의장을 퇴장했다.[88] 결국, 오를란도 대표는 강화 회의를 보이콧하고 귀국했으며, 피우메 획득 실패를 이유로 1919년 6월 총리직에서 사임했다.[88] 후임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니티가 같은 해 베르사유 조약에 조인했지만, 이탈리아 국민 다수는 강화 내용에 불만을 품었고, '손실된 승리'라는 감정이 확산되었다.[88][89]

이러한 상황에서, 미회수 지역주의자 가브리엘레 다눈치오는 1919년 9월, 의용병을 이끌고 연합군 공동 관리 하에 있던 피우메를 점령하여 피우메 독립 정부를 수립했다.[88][90] 1920년 11월 라팔로 조약으로 남티롤 지방, 트렌티노 지방, 트리에스테를 포함한 이스트리아 반도 지방, 달마티아 지방의 일부 섬이 이탈리아 영토가 되었지만, 피우메는 유고슬라비아 영토로 결정되었다. 다눈치오는 라팔로 조약 철회를 요구하며 이탈리아 국군과 교전 상태가 되었고, 1920년 12월 항복하여 약 15개월간의 점령은 끝났다.[88][90]

2. 3. 파시즘과 제2차 세계 대전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은 미회수주의를 이용하여 팽창 정책을 정당화하고, 지중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46]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모두 받을 자격이 있었던" 것을 받지 못한 "배반당한 이탈리아"에 맞선 전쟁 영웅주의의 당연한 결과로 여겨지려 노력했으며, 아르디티 군인들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이탈리아 동쪽에서는 파시스트들이 달마티아가 이탈리아 문화의 땅이며, 이탈리아인들이 달마티아에서 추방되어 이탈리아로 망명했다고 주장하며, 달마티아 유산을 가진 이탈리아인들의 귀환을 지지했다.[47] 무솔리니는 달마티아가 로마 제국베네치아 공화국을 통해 수세기 동안 강력한 이탈리아 문화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인식했다.[48] 파시스트들은 특히 달마티아의 베네치아 문화 유산을 기반으로 한 주장에 집중했으며, 베네치아의 통치가 모든 달마티아인에게 유익했으며 달마티아 인구에 의해 받아들여졌다고 주장했다.[48] 파시스트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와 연합국 간의 1915년 런던 조약에서 달마티아가 이탈리아에 합류하기로 한 합의가 1919년에 철회되었을 때 분노했다.[48]

이탈리아 서쪽에서는 파시스트들이 프랑스가 점유하고 있는 코르시카, 니스, 사보이 영토가 이탈리아 땅이라고 주장했다.[49][50] 파시스트 정권은 코르시카와 니스의 ''이탈리아성''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는 문헌을 제작했다.[51] 파시스트들은 "이탈리아의 경계는 바르이며, 따라서 니스는 이탈리아의 일부이다"라고 말한 중세 이탈리아 학자 페트라르카와 니스(현재 니스라고 불림) 출신의 이탈리아 국민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의 말을 인용했다.[51] 무솔리니는 처음에 코르시카의 기존 자치 경향을 장려하고, 그 다음 프랑스로부터 코르시카의 독립을 장려한 다음, 코르시카를 이탈리아에 병합하는 방식을 통해 정치적, 외교적 수단을 통해 코르시카의 병합을 추진했다.[52]

1923년, 무솔리니는 섬 내 이탈리아 소수 민족인 코르푸 이탈리아인을 근거로 미회수 주장을 펼치며 코르푸를 일시적으로 점령했다. 이는 이탈리아 왕국 주변의 섬들, 즉 몰타 이탈리아인, 코르푸 이탈리아인, 코르시카 이탈리아인들을 대상으로 지중해(라틴어로 "우리의 바다"라는 의미의 ''마레 노스트룸'')를 통제하기 위한 전술이었을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1년부터 1943년까지 달마티아의 상당 부분이 이탈리아에 병합되어 달마티아 총독부가 되었다. 코르시카니스 또한 1942년 11월에 행정적으로 이탈리아에 병합되었다. 몰타는 심하게 폭격을 받았지만, 섬 침공을 위해 준비된 병력을 북아프리카로 돌리라는 에르빈 롬멜의 요청에 따라 점령되지 않았다.

2. 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가 패배한 후, 1946년에는 남티롤 지방의 독일계 주민에게 자치권이 인정되었다.[1]

1975년 오시모 조약을 통해 트리에스테 자유 지구를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가 분할하는 것을 상호 승인하여 트리에스테 문제도 해결되었다.[1]

이후 이탈리아가 창립 회원국으로 가입했던 유럽 연합오스트리아(1995년), 슬로베니아(2004년), 크로아티아(2013년)가 차례로 가입하면서, 사실상 모든 미회수된 이탈리아와의 국경선이 사라져 미회수된 이탈리아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1]

3. 주요 지역 및 쟁점

이탈리아 미회수주의 운동은 이탈리아인이 거주하거나 이탈리아와 역사적, 문화적 연관성이 있는 지역을 이탈리아 왕국에 통합하려는 운동이었다.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흔했던 민족주의적 사상을 바탕으로, 이탈리아는 "자연 국경"에 도달하거나 이탈리아인이 거주하는 영토를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

이탈리아 미회수주의는 원래 온건한 성향을 띠었으며, 이탈리아 인구가 다수인 지역의 반환만을 요구했다.[5]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파시스트의 영향으로 공격적으로 변하여 이탈리아 왕국에 이탈리아인이 소수이거나 과거에만 존재했던 지역까지 주장했다.

이탈리아 통일과 1866년 이탈리아 독립 전쟁 이후, 새롭게 창설된 이탈리아 왕국 주변 여러 국가의 국경 내에는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공동체가 존재했다. 민족주의자들은 그러한 모든 지역을 새롭게 통일된 이탈리아에 합병하려 했다.

19세기 초,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모든 지역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려는 이상은 이탈리아 합병론을 낳았다. 많은 이스트리아 이탈리아인과 달마티아 이탈리아인들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싸운 ''리소르지멘토'' 운동에 공감했다.[10]

미회수주의 운동의 주요 대상 지역 및 쟁점은 다음과 같다.

지역현황주요 내용
트렌티노-알토 아디제/쥐트티롤이탈리아 볼차노 자치도1866년 보오 전쟁에서 베네치아는 탈환했지만, 트렌티노-알토 아디제는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있었다. 1920년 라팔로 조약으로 이탈리아 영토가 되었으나, 오스트리아는 반발했다.
트리에스테와 이스트리아 반도이탈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항구였던 트리에스테이탈리아인과 슬로베니아인이 함께 살던 도시였다. 이스트리아 반도는 역사적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탈리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이 섞여 살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에 속하게 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트리에스테 자유 지구를 거쳐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로 나뉘었다.
달마티아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와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탈취하려 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1915년 런던 조약 (1915년)에 의해 이탈리아는 달마티아의 상당 부분을 합병할 권리를 보장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이탈리아의 달마티아 총독부가 설치되기도 했으나, 종전 후 대부분 유고슬라비아에 귀속되었다.
피우메 (현 리예카)크로아티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항구 도시였으며, 이탈리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함께 살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왕국 사이에 영토 분쟁이 벌어졌고, 가브리엘레 다눈치오가 이끄는 군대가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했다. 1924년 로마 조약을 통해 이탈리아에 귀속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에 귀속되었다.
니스와 사보이프랑스1860년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프랑스에 할양된 지역이다. 주세페 가리발디는 1871년 국민 의회에서 니스에서 선출되었고, 그의 고향을 새롭게 탄생한 이탈리아 통일 국가에 병합하려 했지만 발언이 금지되었다.[16]
몰타몰타역사적으로 이탈리아와 문화적, 언어적 연관성이 깊은 지역이다. 1813년 몰타 왕령 식민지가 되었고, 1년 후 파리 조약 (1814년)을 통해 확인되었다.[12]
코르시카프랑스1768년까지 제노바 공화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파스콸레 파올리코르시카 공화국의 공용어를 이탈리아어로 지정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스위스 스위스현재의 이탈리아 스위스는 16세기까지 밀라노 공국에 속해 있었으나, 이후 스위스에 편입되었다. 이탈리아어와 롬바르드어, 특히 티치노 방언을 사용하는 원주민 이탈리아인을 유지해 왔다.



이 외에도 이오니아 제도, 산마리노, 블로러 지역 해안, 팔라그루자 등도 미회수 지역으로 여겨졌다.

3. 1. 트렌티노-알토 아디제/쥐트티롤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통일 운동) 결과,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다. 그 후, 오스트리아 지배 하에 있던 트렌티노-알토 아디제(남티롤)에서는 조국 복귀의 기운이 높아졌고, '''이레덴티스모'''(미회수 이탈리아 운동)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85]

1866년 보오 전쟁 때, 이탈리아는 프로이센과 동맹하여 오스트리아와 싸워 베네치아를 탈환했지만, 전쟁이 불과 7주 만에 종결되었기 때문에 베네치아보다 더 안쪽에 위치한 영토는 탈환하지 못했다.[86]

1920년 라팔로 조약 등으로, 남티롤 지방과 트렌티노 지방이 이탈리아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피우메는 유고슬라비아(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영토로 결정되었다.

이탈리아 볼차노 자치도가 된 남티롤은, 당시부터 독일계 주민이 오랫동안 거주하며 티롤주의 일부로 정착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오스트리아 여론이 '고유의 영토를 부당하게 빼앗겼다'고 반발하며 그 탈환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 및 유고슬라비아와 새로운 국경 분쟁을 안게 되었다.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가 패배한 후, 1946년에는 남티롤 지방의 독일계 주민에게 자치권이 인정되었다.

3. 2. 트리에스테와 이스트리아 반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항구였던 트리에스테이탈리아인과 슬로베니아인이 함께 살던 도시였다. 이스트리아 반도는 역사적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탈리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이 섞여 살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에 속하게 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트리에스테 자유 지구를 거쳐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로 나뉘었다.[88][90]

19세기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이탈리아인들은 점차 슬라브 민족주의의 압력을 받았다. 1866년 11월 12일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이탈리아인이 거주하는 지역을 독일화 또는 슬라브화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24] 1909년에는 크로아티아어만이 공식 언어로 인정되면서 이탈리아어는 공공 및 행정 분야에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36]

191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스트리아의 인구 구성은 슬라브어 사용 인구(크로아티아어 및 슬로베니아어) 57.8%, 이탈리아어 사용 인구 38.1%였다.[34] 달마티아의 경우, 슬라브어 사용 인구가 96.2%, 이탈리아어 사용 인구가 2.8%였다.[35]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20년 라팔로 조약을 통해 트리에스테를 포함한 이스트리아 반도 지방이 이탈리아 영토가 되었다.[88][90]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리아가 패배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88]

1975년 오지모 조약을 통해 트리에스테 자유 지구는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양국에서 분할하기로 합의하면서 트리에스테 문제는 해결되었다.[88][90]

3. 3. 달마티아

191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인구 조사에 따른 달마티아 지역의 달마티아 이탈리아인 비율


달마티아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와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탈취하려 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탈리아는 1915년 런던 조약 (1915년)에 동의하면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는데, 이 조약은 이탈리아가 연합국의 편에 서는 대가로 달마티아의 상당 부분을 합병할 권리를 보장했다.[55] 1918년 11월 5일부터 6일까지 이탈리아군은 리사, 라고스타, 세베니코 등 달마티아 해안의 다른 지역에 도착한 것으로 보고되었다.[56] 1918년 11월 적대 행위가 종료될 무렵, 이탈리아군은 런던 조약에 의해 이탈리아에 보장된 달마티아 전체를 장악했고, 11월 17일까지 피우메도 장악했다.[56] 1918년, 엔리코 밀로 제독은 스스로를 이탈리아의 달마티아 총독으로 선포했다.[56] 유명한 이탈리아 민족주의자 가브리엘레 다눈치오는 달마티아 점령을 지지했고 1918년 12월 이탈리아 군함을 타고 자라로 향했다.[57]

달마티아 총독부의 세 이탈리아 주에 대한 상세 지도: 자라 현, 스팔라토 현 및 코토르 현


달마티아에서 상당한 이탈리아인이 거주했던 마지막 도시는 자라(현재 자다르로 불림)였다. 191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인구 조사에서 자라 시는 9,318명의 이탈리아인(총 13,438명 중 69.3%)을 보유했다.[58] 1921년에는 인구가 17,075명으로 증가했으며, 이 중 12,075명이 이탈리아인이었다(70.76%).[59]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유고슬라비아는 이탈리아와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다. 달마티아는 이탈리아가 달마티아 총독부를 구성하고, 크로아티아 독립국라구사와 모를라키아를 합병하면서 양분되었다. 카시빌레 휴전 (1943년 9월 8일) 이후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자라와 같이 분쟁 시작 전에 이탈리아령이었던 영토를 제외하고 달마티아 총독부를 합병했다. 1943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연합국에게 자라가 유고슬라비아 주둔 독일군의 주요 보급 기지라고 알렸다. 그는 그 중요성을 과장함으로써 그들에게 자라의 군사적 중요성을 설득했다. 이탈리아는 1943년 9월에 항복했고, 그 후 1년 동안, 특히 1943년 11월 2일부터 1944년 10월 31일까지 연합군은 자다르를 54번 폭격했다. 약 2,000명이 잔해에 묻혔고, 10,000~12,000명이 탈출하여 트리에스테로 피난했으며, 1,000명 약간 넘는 사람들이 풀리아에 도착했다. 티토의 유격대는 1944년 10월 31일 자라에 입성했고 138명이 사망했다.[60] 1947년 평화 조약으로 자라에 살고 있던 이탈리아인들은 달마티아로부터의 이탈리아인 탈출을 따랐고, 현재 도시에는 약 100명의 달마티아 이탈리아인만 남아 있다.

1920년부터 1975년까지 이탈리아 동부 국경의 변화.

  • 달마티아의 이탈리아 이레덴티즘은 19세기와 20세기 동안 아드리아해 달마티아의 이탈리아 통일을 지지하는 정치 운동이었다. 9세기에서 1797년 사이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나폴레옹에게 정복당할 때 이스트라, 크바르너 제도, 달마티아까지 지배력을 확장했다.[70] 나폴레옹 몰락 이후(1814년) 이스트라, 크바르너 제도, 달마티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합병되었다.[71] 많은 달마티아 이탈리아인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싸운 ''리소르지멘토'' 운동에 동조하는 입장을 보였다.[10] 달마티아 이탈리아인이 이탈리아 통일에 참여한 첫 번째 사건은 1848년 혁명이었으며, 이 기간 동안 그들은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공화국 헌법 제정에 참여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가장 주목할 만한 달마티아 이탈리아인은 니콜로 토마세오와 페데리코 세이스미트-도다였다.[72]

3. 4. 피우메 (현 리예카)



피우메(현재의 리예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항구 도시였으며, 이탈리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함께 살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 왕국 사이에 영토 분쟁이 벌어졌고, 가브리엘레 다눈치오가 이끄는 군대가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했다.[88][90]

1919년 9월, 다눈치오는 피우메를 점령하고 독립 정부(카르나로 이탈리아 섭정)를 세웠다.[88][90] 처음에는 피우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으나, 식량 배급 문제와 라팔로 조약 철회 요구로 이탈리아 국군과 교전 상태에 들어가면서 지지를 잃었다.[88][90] 결국 1920년 12월, 다눈치오는 항복하고 약 15개월간의 점령은 끝났다.[88][90]

1924년 로마 조약을 통해 피우메는 이탈리아에 귀속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에 귀속되었다.

3. 5. 기타 지역

1755년 자신의 코르시카 공화국에서 이탈리아어를 공용어로 지정한 코르시카 영웅 파스콸레 파올리의 기념비


이탈리아 통일과 1866년 이탈리아 독립 전쟁 이후, 새롭게 창설된 이탈리아 왕국 주변 여러 국가의 국경 내에는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공동체가 존재했다. 민족주의자들은 그러한 모든 지역을 새롭게 통일된 이탈리아에 합병하려 했다. 목표로 한 지역은 코르시카, 달마티아, 고리차, 이스트라, 몰타, 니스 백국, 티치노, 그라우뷘덴과 발레의 작은 부분, 트렌티노, 트리에스테, 피우메였다.[7]

이탈리아 미회수주의자들이 주장했던 기타 지역은 다음과 같다.

4. 이탈리아 미회수주의와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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