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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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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버라 부시는 미국의 제41대 대통령 조지 H. W. 부시의 부인이자 제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어머니이다. 1925년 뉴욕에서 태어나 1945년 조지 H. W. 부시와 결혼하여, 정치인의 아내로서 남편의 선거 운동을 도왔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미국의 영부인으로 활동하며 문맹 퇴치 운동에 헌신했다. 2018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솔직하고 소탈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사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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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부시
기본 정보
1992년 공식 초상화
1992년 공식 초상화
이름바버라 부시
출생 이름바버라 피어스
출생일1925년 6월 8일
출생지미국 뉴욕주 뉴욕 시 퀸스
사망일2018년 4월 17일
사망지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안장 장소조지 H.W. 부시 대통령 기념 도서관 및 박물관
정당미국 공화당
배우자조지 H. W. 부시 (1945년 결혼)
자녀조지 W. 부시
로빈
제브 부시
닐 부시
마빈 부시
도로시 부시 코크
아버지마빈 피어스
학력스미스 칼리지 (중퇴)
서명
미국 영부인
임기 시작1989년 1월 20일
임기 종료1993년 1월 20일
대통령조지 H. W. 부시
이전 영부인낸시 레이건
다음 영부인힐러리 클린턴
미국 부통령 영부인
임기 시작1981년 1월 20일
임기 종료1989년 1월 20일
부통령조지 H. W. 부시
이전 부통령 영부인조안 먼데일
다음 부통령 영부인매릴린 퀘일
종교
종교미국 성공회

2. 생애

바버라 부시는 1925년 6월 8일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뉴욕주 라이에서 성장했으며, 어릴 적 독서를 좋아했다.[1] 1940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 있는 기숙 학교 애슐리 홀에 진학했다.

1941년 크리스마스 휴가 때, 조지 H. W. 부시를 만나 1945년 1월 6일에 결혼하였다.[3] 부부는 슬하에 조지 W. 부시, 젭, 닐 맬런 부시, 마빈 피어스 부시, 도로시, 폴린 로빈슨 등 여섯 자녀를 두었으나, 폴린 로빈슨은 1953년 백혈병으로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1966년 남편이 미국 의회에 선출되면서 정치에 입문, 이후 남편의 정치 경력을 지원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80년 남편이 로널드 레이건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당선되면서 세컨드 레이디가 되었고, 1989년 남편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영부인이 되었다. 영부인 시절, 문맹 퇴치와 교육 사업에 힘썼으며, HIV/AIDS 환자 지원 등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1993년 남편의 퇴임 이후, 텍사스주 휴스턴과 메인주 케네벙크포트에서 생활하며 자선 활동과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2000년 장남 조지 W.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애비게일 애덤스 이후 미국 대통령의 배우자이자 어머니가 된 두 번째 여성이 되었다.

2018년 4월 17일 9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남편 조지 H. W. 부시도 같은 해 11월 30일 사망했다.[61][62]

2. 1. 어린 시절

1925년 6월 8일, 뉴욕 맨해튼에서 매콜 주식회사 사장 마빈 피어스와 폴린 피어스 사이에서 셋째 딸로 태어났다.[1] 아버지 마빈 피어스는 14대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의 먼 친척이었다.[1] 어머니 폴린 피어스는 오하이오주 대법원 재판관의 딸이었다.

뉴욕주 라이에서 성장한 바버라는 성공회 집안에서 자랐다. 어릴 적 독서를 좋아했으며, 대공황 시기에도 아버지의 성공적인 경력 덕분에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40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 있는 기숙 학교 애슐리 홀에 진학하기 전까지, 라이의 밀턴 공립 학교와 라이 컨트리 데이 학교에서 공부했다.

2. 2. 조지 H. W. 부시와 가족

1941년 크리스마스 휴가 때, 16세의 바버라는 매사추세츠주 앤도버에 있는 필립스 아카데미의 17세 선배인 조지 H. W. 부시를 만났다. 조지는 제2차 세계 대전미국 해군의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하였다. 둘은 1945년 1월 6일에 결혼하였다.[3]

전쟁이 끝난 후 부시 부부는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으로 이주하였고, 조지는 예일 대학교에 신입생으로 등록하였다. 1946년에 부부의 첫 아이인 조지 W. 부시가 태어났다. 1948년 조지 1세는 대학을 졸업하고 석유 사업을 시작하였고, 가족은 텍사스주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하였다. 1949년 바버라의 모친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였다. 바버라는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캘리포니아에서 모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고, 이 사건은 그녀에게 오래도록 상처를 남겼다. 3개월 후, 부시 부부는 둘째 아이를 낳았고, 사망한 모친의 이름을 따서 폴린 로빈슨이라고 이름 지었다. 1953년 10월, "로빈"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 딸은 백혈병으로 사망하여 부시 부부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로빈이 백혈병 진단을 받기 직전에 셋째 아이인 젭이 태어났다. 바버라는 이후 닐 맬런 부시(1955년생)와 마빈 피어스 부시(1956년생), 두 아들을 더 낳았다. 1959년 8월에는 막내 딸 도로시가 태어났다. 바버라 여사는 YMCA와 같은 단체를 지원하며 20여 년 동안 아내와 어머니로서 헌신하였다. 부시 부부는 조지 1세가 석유 산업에서 성공을 거둔 텍사스 주 미들랜드에 정착하였다. 바버라는 남편의 선거 운동을 도우며 공화당 정치에서 그의 초기 경력을 지원하였다. 1966년 남편이 처음으로 미국 의회에 선출되었고, 이듬해 부시 가족은 워싱턴 D. C.로 이주하였다.

2. 3. 정치적 부인

1970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조지 H. W. 부시에게 하원 의석을 포기하고 텍사스 주에서 상원에 출마할 것을 요청했다. 부시는 텍사스주 상원 선거에서 로이드 벤트슨에게 패했다. 조지가 닉슨에게 자신을 유엔 주재 미국 대사로 임명하도록 압력을 가한 후, 부시 가족은 뉴욕의 유명한 월도프 애스터리아 호텔로 이주했다. 바버라 여사의 사교성과 환대는 그녀를 외국 고위 인사들에게 인기 있게 만들었다.[54]

1973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 대통령은 조지 H. W. 부시에게 유엔 대사직을 떠나 공화당 전국 위원회 의장을 맡으라고 요청했다. 바버라는 닉슨 행정부가 남편의 경력을 손상시킬까 봐 걱정했다. 1974년 8월 닉슨은 사임하고 제럴드 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조지에게 몇몇 외교적 지위가 주어졌고, 그는 중공 주재 미국 연락사무소 소장직을 선택했다. 중공에서 바버라 여사는 문화에 몰두하고 언어를 공부했지만, 가족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1975년 포드 대통령은 조지에게 중앙정보부 국장이 되라고 요청했다. 바버라 여사는 이 직책이 남편의 정치적 미래를 방해할 수 있다고 다시 걱정하기 시작했다.[54]

조지가 중앙정보부에서 복무하고 자녀들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바버라는 우울증을 겪었다.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숨기고 의료적 도움을 찾지 않았다. 하지만 이 경험은 그녀에게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한 큰 이해와 동정심을 주었다. 1979년 조지가 백악관에 출마하기로 결정했을 때 바버라는 선거 운동에 복귀하여 유권자들과 소통했다. 결국 부시 진영은 로널드 레이건의 추진력을 따라잡을 수 없었지만, 1980년 공화당 경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레이건은 조지를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선택했다.[54]

마거릿 대처 부부와 함께 한 부시 부통령 부부


조지 부시 후보 표지판 앞에 서 있는 조지와 바버라. 조지의 팔은 바버라의 어깨에 감싸져 있다.
조지 부시의 의회 당선을 축하하는 부시 부부


1962년, 부시는 남편이 해리스군 공화당 위원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선거 운동을 배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남편이 임명되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선거를 통해 당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시는 남편이 군의 각 구역을 방문할 때마다 동행했다. 그녀는 선거 운동을 통해 활력을 되찾고 남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선거 운동을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휴식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져 자수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부시는 1964년 남편이 텍사스주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다시 한번 선거 운동을 함께했다. 이 선거 운동을 통해 그녀는 정치 생활의 덜 즐거운 면을 보게 되었는데, 남편의 예선 기간 동안 그녀의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라는 허위 정보가 퍼졌기 때문이다. 선거 운동 중에는 때때로 자신의 성을 숨기고 남편에 대한 더 솔직한 의견을 얻으려 했다. 부시는 예선에서 승리했지만, 현직 랄프 야보로에게 본선에서 패했다. 선거 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녀는 남편의 패배를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였다.

1966년 남편이 미국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부시는 다시 선거 운동에 참여했고, 남편의 당선 후 가족은 워싱턴 D.C.로 이사했다. 워싱턴에서 그녀의 주된 관심사는 어린 자녀들을 양육하고 가사를 관리하는 것이었지만, 수도의 활동에도 참여했다. 그녀는 정치 브리핑과 사교 행사에 참석했고, 백악관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하면서 영부인 레이디 버드 존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휴스턴에서 발행되는 "워싱턴 신"이라는 신문 칼럼을 시작했다. 부시는 자신이 살던 지역 사회에서 활동적이었고, 셜리 닐 페티스, 포터 스튜어트, 프랭클린 D. 루즈벨트 주니어와 같은 저명한 이웃들과 친분을 쌓았다. 부시 부부는 휴스턴 시절부터 해오던 매주 일요일 바비큐 파티로 워싱턴에서 유명해졌다. 부시 행정부의 일원인 앤드류 카드는 이 시절 바버라의 주최가 조지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의회 의원들과의 좋은 관계를 맺는 데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언급했다.

남편 조지가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지만, 예비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했다. 하지만 조지는 레이건에 의해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54]

레이건이 당선되자 부통령 부인으로서 다양한 공무를 수행했다. 그녀가 힘을 쏟은 사업으로는 읽기 능력 향상을 추진하는 활동이 있었다. 셋째 아들 닐이 읽기 장애로 고통받았던 것이 동기였다. 바버라는 읽기 능력을 높이는 것이 빈곤을 줄이는 것이라고 믿었다.[54]

1984년에 자신의 애견에 관한 아동 도서 ''C. Fred's Story: A Dog's Life''를 출판하여, 얻은 수익은 자선 사업에 기부했다.[56]

2. 4. 영부인 시절

1981년 조지 H. W. 부시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아래 부통령이 되면서, 바버라 부시는 세컨드 레이디로서 미국의 이익을 대표하여 해외를 방문하고 외국의 국가 원수들과 우정을 쌓았다. 이 시기, 아들 닐의 독서 장애를 계기로 문맹 퇴치 운동에 헌신하게 되었다. 여러 단체와 협력하며 어린이와 성인의 문맹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3]

레이건의 부통령으로 두 번의 임기를 마친 후, 조지 H. W. 부시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민주당 후보 마이클 듀카키스를 꺾고 1989년 미국의 4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바버라 부시는 영부인이 되어서도 낸시 레이건과 달리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 취임식 무도회에 29달러짜리 구두를 신고 나타났으며, 유명 패션 디자이너 아널드 스카시에게 자신의 실용적인 스타일에 맞는 의상을 부탁했다.[54][56]

어린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바버라 여사


백악관으로 이주한 해에 그레이브스병 진단을 받았지만,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공적인 활동을 계속했다. '바버라 부시 식자 재단'을 설립하여 미국 전역의 부모와 어린이들에게 독서 능력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지원했다.[54]

부시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냉전 종식, 파나마 침공, 사막의 폭풍 작전 발동 등 국제적인 사건들이 일어났다. 1990년 11월 부시 부부는 사막의 폭풍 작전에 참전한 미군을 위로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웰즐리 대학교에서 고르바초프의 부인 라이사 여사와 함께


1991년 걸프 전쟁에서 승리하며 부시 대통령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지만, 1992년 경제 위기로 지지율이 하락했다. 결국 빌 클린턴에게 패배하면서 1993년 1월 부시 부부는 워싱턴 D. C.를 떠나 텍사스 주로 돌아갔다.[54]

바버라 부시는 영부인 시절, "바버라 부시 가족 독서력 재단"을 설립해 세컨드 레이디 시절의 사업을 확장하고 노숙자와 이민자를 지원했다.[54] 문해력과 교육을 빈곤 퇴치의 핵심으로 여겨,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ABC 라디오에서 ''Mrs. Bush's Story Time''을 진행하며 어린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54] 1990년에 출판한 ''Millie's Book: As Dictated to Barbara Bush''(한국어 제목: 『미리 부시는 퍼스트 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인세는 재단에 기부되었다.[58]

1990년 웰즐리 대학교 연설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재미없는 주부"라며 환영받지 못했지만, 연설 후에는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 연설은 "20세기 미국 연설 베스트 100"에서 45위에 올랐다.[59]

HIV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던 시기에, 레이건 행정부의 소극적인 대처와 달리 HIV 환자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HIV 감염 유아를 안고 있는 사진은 많은 언론에 보도되었고, 이후에도 HIV 환자들을 만나고 병원을 방문하는 등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동성애자 운동가들을 백악관에 초청하여 증오 범죄 문제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으며, 이는 증오 범죄 통계법 제정에 기여했다.[54]

딸 로빈을 백혈병으로 잃은 경험을 바탕으로 백혈병 환자 지원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54]

2. 5. 가족 유산

2000년 조지 W. 부시는 아버지의 선례를 따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2004년 재선되었다. 바버라 부시는 201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밋 롬니의 선거 운동과 2016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입찰을 지원했다. 텍사스주 휴스턴과 메인주 케네벙크포트에 있는 여름 별장에서 남편과 함께 살았던 전 영부인은 아메리케어스를 위한 특사로 일하면서 바버라 부시 식자 재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2. 6. 손자, 손녀들

바버라 부시는 쌍둥이 손녀 바버라와 제나(조지 W. 부시로라 부시의 딸), 조지, 노엘, 존 엘리스(젭 부시의 자녀), 로런(닐 부시의 자녀)을 포함하여 17명의 손자, 손녀를 두었다.[3]

2. 7. 이후의 세월과 사망

2017년 1월 14일, 바버라의 남편 조지는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 문제로 입원하였다. 4일 후, 바버라 여사는 피로기침 증상으로 입원했다가 1월 23일 퇴원했다. 남편은 1월 30일 퇴원했으며, 며칠 후 휴스턴에서 회복한 부시 부부는 NRG 스타디움에서 열린 수퍼볼에 참석하여 경기 시작 전 동전 던지기를 할 때 관중들의 응원을 받았다.[71][72]

2018년 4월 17일 휴스턴에서 향년 92세의 나이로 노환으로 타계했다. 부시는 빌 클린턴의 취임식이 있었던 1993년 1월 20일을 자신과 남편에게는 "힘든 날"이었다고 회상했다. 부시 부부는 조지 부시가 대통령으로서 두 번째 임기를 마땅히 얻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바버라는 클린턴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비난했던 언론을 그의 패배 원인으로 돌렸다. 그녀는 언론이 클린턴의 젊음 때문에 그에게 더 호의적이었다고 믿었다. 부시 부부는 휴스턴으로 돌아가 새 집을 짓는 동안 9개월 동안 임대 주택에서 살았다. 이 새 집에는 가족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1.8m 높이의 벽돌 담이 설치되었다.

휴스턴으로 돌아온 다음 날, 부시 부부는 낸시 레이건이 ABC News에 전화를 걸어 그들을 비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낸시 레이건은 바버라가 1988년 백악관 관람을 하지 않았다는 말을 거짓말이라고 하고, 부시 부부가 레이건 부부를 국빈 만찬에 초대한 적이 없다고 잘못 말했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낸시가 바버라에게 전화를 걸어 즉흥적인 인터뷰에 대해 이야기하자, 바버라는 "더 이상 그녀의 게임을 하고 싶지 않다"고 결정했다. 바버라는 거짓된 내용을 바로잡았고, 낸시를 죄책감 느끼게 하기 위해 인터뷰 때문에 기자들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다시는 전화하지 마세요"라고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두 사람은 국사 행사에서 간단한 의례적인 만남을 제외하고는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부시는 8년간 세컨드 레이디로, 그 후 4년간 퍼스트 레이디로 지낸 후, 요리나 운전과 같은 두 가지 기술을 백악관을 떠난 후 다시 익혀야 했다. 그녀는 휴식을 취할 기회를 더 많이 찾을 수 있었지만, 다양한 자선 활동, 공개석상, 가족과의 약속 등으로 바쁜 생활을 이어갔다. 은퇴 초기 몇 주 동안 부시 부부는 여전히 부유했지만, 이전과 같은 자금에 접근할 수 없었고, 갑자기 직면하게 된 생활비에 놀랐다. 나중에 강연료와 책 계약을 통해 바버라는 상당한 돈을 벌었다. 그녀의 책, 《바버라 부시 회고록》(Barbara Bush: A Memoir)은 1994년에 출판되어 몇 주 동안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목록 정상을 차지했다. 그 해, 부시의 두 아들, 조지 W. 부시와 젭 부시가 정치에 입문했다. 조지 W.는 텍사스 주지사 선거에, 젭은 플로리다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다. 그녀는 두 아들의 선거운동을 도왔지만, 아들들에 대한 정치 공격이 남편에 대한 공격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주었고, 그들의 주지사 선거 토론을 시청할 수 없었다. 젭은 선거에서 패했지만, 조지 W.는 텍사스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두 아들은 1998년에 다시 같은 직책에 출마하여 모두 당선되었다.

조지 W. 부시2000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고려하면서 바버라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스스로 결정하라고 말했다. 나중에, 옳은 일을 하라는 부름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교회 설교 중에 그녀는 아들에게 "당신에게 하는 말입니다"라고 말했고, 그는 그 순간 대통령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조지 W.가 대선 출마를 발표했을 때, 그의 부모는 그를 가리거나 선거를 부시 정치왕조에 대한 것으로 만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선거 운동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않았다. 바버라의 주요 역할은 여성 유권자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W는 여성을 지지합니다" 투어에서 선거 운동과 관련된 다른 여성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었다. 결과를 놓고 벌어진 소송전 이후, 그녀의 아들 상대 후보인 앨 고어가 패배를 인정했고, 바버라는 애비게일 애덤스 이후 미국 대통령의 배우자이자 어머니가 된 두 번째 여성이 되었다.

바버라 부시와 조지 W. 부시가 나란히 서 있다
바버라 부시가 2003년 대통령 집무실에서 아들과 함께


바버라와 조지는 9·11 테러 당시 비행 중이었기 때문에 비행기가 지상에 착륙했고, 비밀경호국에 의해 모텔로 이동했다. 다음 날, 그들은 아들의 특별 허가를 받아 메인주 케네번크포트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9월 14일 다른 전직 대통령과 영부인들과 함께 기도회에 참석했다. 부시는 이후 아들의 위기 대처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 테러는 또한 백악관을 떠난 후 해임했던 그녀 자신의 개인 비밀경호국 보호를 재개하도록 그녀를 설득했다.

2002년 그녀는 텍사스 A&M 대학교의 파이 베타 파이 텍사스 에타 지부의 명예 회원이 되었다. 부시는 남편의 대통령 도서관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 대학교를 선택했다.[4] 그녀는 휴스턴의 주니어 리그 회원이기도 했다.[5] 2003년, 부시는 또 다른 회고록인 ''Reflections: Life after the White House''를 출판했다.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틀 전, 그녀는 임박한 갈등에 대한 텔레비전 뉴스 보도를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기자들의 추측과 추측을 거부했다고 주장했지만, 비판자들은 그녀가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무감각했다고 주장했다. 침공 후, 그녀는 아들이 국방장관 도널드 럼즈펠드, 부통령 딕 체니, 그리고 비서실장 앤디 카드의 과도한 영향을 받고 있다고 느꼈으며, 아들이 그녀를 엄하게 질책할 때까지 이라크에 대한 그의 결정을 재고하라고 거듭 촉구했다.

바버라와 조지가 청중들 사이에 나란히 앉아 있다
조지와 바버라 부시가 동명의 항공모함 명명식에 참석한 모습, 2006년


부시는 2004년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선거 운동에 복귀하여 아들이 대통령직 2기를 추구할 때 그의 대신 연설을 했다. 그는 재선에 성공했다. 그녀는 그의 2기 동안 사회보장 개혁 계획을 홍보하기 위해 2005년 플로리다 순회를 포함하여 그의 정책 목표 중 일부를 홍보하는 데 참여했다. 그녀는 카트리나 허리케인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작업 중 라디오 방송에서 상황에 대한 무감각한 발언을 하면서 논란을 일으켰는데, 피해자들이 "어차피 빈곤층이었기 때문에" 텍사스에 머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부시 부부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인상을 강화시켰다.

그녀의 허리케인 구호 활동 참여는 2006년에 그녀가 자선 단체가 아들 닐이 소유한 교육 소프트웨어 회사와 거래하는 조건으로 부시-클린턴 카트리나 기금에 미공개 금액을 기부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욱 비판을 받았다.[6] 조지가 빌 클린턴과 여러 자선 프로젝트에서 협력하면서 부시 부부의 전 라이벌에 대한 견해가 부드러워졌고, 결국 그는 가족 구성원으로 여겨지게 되었지만, 바버라는 조지보다 1992년 선거에서 클린턴의 승리를 용서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08년 10월 3일, 부시와 그녀의 남편은 뉴잉글랜드 대학교 비드포드 캠퍼스 해안가에 "조지와 바버라 부시 센터"를 개관했다.[7] 이 센터는 뉴잉글랜드에서 바버라 부시의 유산에 대한 기반을 마련하고, 메인에서 부시 가문의 유산을 보존하는 자료인 "부시 유산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으며, 텍사스 A&M 대학교에 있는 조지 H. W. 부시 대통령 도서관에서 대여한 기념품을 포함한다. 특히 가족의 뉴잉글랜드 유산과 바버라의 메인주에 대한 사랑에 중점을 두고 있다.[8]

바버라 부시의 프로필 사진
2012년 11월, LBJ 대통령 도서관에서 바버라 부시 전 영부인


말년에 바버라와 조지 부시는 매 여름 케네번포트에서 보내고 나머지 기간은 휴스턴에서 보냈다. 부시는 2008년 11월 복통으로 입원하여 소장 수술을 받았다. 2009년에는 대동맥 판막 교체 수술을 받았다.[9] 2010년에는 조지 W. 부시가 바버라 부시가 유산 후 태아를 항아리에 보관했다는 일화를 전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이는 그녀가 태아의 유골을 보관하거나 전시했다는 잘못된 인식을 불러일으켰다.[10][11] 수십 년 동안 성공회 예배에 참석한 후, 2015년 신앙을 잘못 표현하지 않고 딘 크로스 상을 받기 위해 성공회 신자로 인정받았다.

부시는 처음에는 아들 젭 부시가 대통령직에 출마하는 것에 반대했는데, 이전 부시 대통령들의 비판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우려하며 2013년 "우리는 부시가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젭이 2016년 대선에서 대선 운동을 시작한 2015년에 이 발언을 번복했다.[12][13] 그녀는 공화당 경선에서 젭을 위해 선거 운동을 벌이며, 아들을 정직한 후보라고 묘사하면서 선두 주자였던 도널드 트럼프를 비판했다.[14] 2016년 6월 심장 관련 사건으로 입원했으며, 이후 트럼프 선거 운동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말했다. 선거일에 그녀는 젭의 이름을 적어 투표했다.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부시는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그를 계속 비판했다.

그녀는 만성 폐쇄성 폐 질환과 울혈성 심부전을 앓고 있었다.[15] 2018년 3월 16일, 넘어져 척추를 골절하고 입원했다. 4월 15일, 그녀의 가족은 악화되는 건강 상태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며, 그녀가 더 이상의 치료를 받지 않고 편안한 간호를 받기로 선택했고 가족과 함께 집에 머물기를 원한다고 밝혔다.[16] 부시는 2018년 4월 17일 휴스턴 자택에서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7]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그녀의 죽음을 기리는 의미로 깃발을 반기 게양하도록 명령했다.[18]

부시의 관에는 수천 명의 애도자들이 방문했고, 영구차가 지나갈 때 많은 군중이 모였다. 그녀의 장례식은 2018년 4월 21일 휴스턴의 세인트 마틴 성공회 교회에서 거행되었다.[19] 그녀는 텍사스주 칼리지 스테이션의 조지 부시 대통령 도서관에 딸 로빈의 묘 옆에 묻혔다. 그녀의 요청에 따라 장례식은 90분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레이디 버드 존슨의 2시간 장례식에 참석한 후 그녀가 내린 결정이었다. 부시 사망 후, 클래리언-레저의 마셜 램지가 그린 만화가 널리 퍼졌는데, 이 만화는 바버라가 천국에 들어가자 로빈이 그녀를 맞이하는 장면을 보여준다.[20] 그녀의 남편은 7개월 후인 2018년 11월 30일에 사망했다.[21]

바버라 부시는 말년에 남편과 함께 텍사스주 휴스턴과 메인주 케네번크포트의 넓은 정원, 부시 컴파운드에서 살았다. 그들은 백악관에 자주 손님으로 초대되었다.

1994년에 자서전 『Barbara Bush: A Memoir』을 저술했다.

바버라는 아메리케어즈(AmeriCares)와 메이요 클리닉의 위원을 역임했고, 2012년 버바라 부시 패밀리 리터러시 재단(Barbara Bush Family Literacy Foundation) 이사장직을 차남 젭과 차녀 도로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명예이사장이 되었다.

텍사스의 두 개의 초등학교, 휴스턴 독립 학구의 한 학교와 그랜드 프레리의 댈러스 교외의 한 학교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메인주 포틀랜드의 메인 메디컬 센터의 버바라 부시 소아과 병원도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게다가 조지 W. 부시의 쌍둥이 딸 중 한 명도 바버라라고 이름 지어졌다.

2008년에는 궤양 수술을, 2009년에는 심장 질환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악화되었고, 2017년 1월에는 기관지염으로 입원했다. 2018년 4월 15일에는 건강 상태 악화로 인해 더 이상의 치료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발표했다.[60] 2일 후인 4월 17일 92세로 사망했다.[61] 7개월 반 후인 11월 30일에는 남편 조지도 뒤따라 사망했다.[62]

3. 논란

바버라 부시는 신랄한 발언과 논란을 일으키는 견해로 유명하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 소식을 듣고 회고록에 "일본에 대한 원폭 투하 소식을 듣고 기뻤다. 태평양 전선에서 해군 조종사로 출격 중인 약혼자 조지가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1980년, 남편이 로널드 레이건에게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을 때, 바버라는 레이건과 공화당의 보수적인 정책에 대해 남녀평등헌법수정조항의 성립과 낙태의 자유를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54]

2003년 3월 18일, 미국방송협회(ABC)의 '굿모닝 아메리카'에서 "왜 우리는 시체 가방이나 죽음에 대해 들어야만 하는 거죠? 왜 제가 그런 것에 아름다운 마음을 써야 하죠?"라고 말했다.[63][64] 이 발언은 그녀가 얼마나 무감각하고 냉혹한지를 보여준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지지자들은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기 전 죽음에 대한 추측을 잊고 있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

2005년 9월 5일, 텍사스주 휴스턴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구호 센터를 방문했을 때, NPR 라디오 프로그램 '마켓플레이스'에서 "모두 텍사스에 머물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모두 아주 친절하게 환영받고 있죠. 음, 이 경기장에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차피 어려운 사람들이니까, 그들에게는 잘 되고 있는 거죠"라고 말했다.[65] 이 발언은 아스트로돔의 15,000명의 피난민 대부분이 가난한 흑인이었기에, 그녀의 엘리트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성향을 보여준다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했다.[66][67]

2013년, 차남 젭 부시가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 의향을 밝히자 "이제 '부시'는 그만이야"라고 말해 화제가 되었지만, 젭 부시가 공식적으로 출마한 후에는 열심히 지원했고,[68] 아들을 위해 선거 운동의 선두에 섰기 때문에 네거티브 캠페인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69][70]

4. 정치적 신념

부시 여사는 남편과 여러 주요 정치 문제에 대해 의견이 달랐지만, 언론에는 정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거부했다.[4] 남편과 달리 돌격 소총 규제를 지지했지만, 범죄자들은 법을 무시할 것이기 때문에 법을 준수하는 시민들만 제한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더 광범위한 총기 규제에는 반대했다.[5]

부시는 자신의 사회 정책에 대한 입장과 공화당의 입장을 자유주의적이라고 묘사하며, 이러한 맥락에서 자유주의를 "사람들을 엄청나게 걱정하는 것"으로 정의했다.[6] 공화당의 사회적 입장이 더 보수적으로 변하면서 그녀는 공화당과 점점 더 의견을 달리했다.[7] 그녀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돕는 사업을 지원했지만, 정치적으로 논란이 없는 사업으로 제한했다.[8] 그녀는 문맹이 다른 사회 문제를 야기한다고 믿었고, 비정치적인 성격 때문에 문해력을 강조했다.[9] 부시의 친구들과 친척들은 딸의 죽음이 그녀의 사회적 신념에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하며, 로빈이 죽은 후 그녀가 불운한 사람들에게 매우 공감하게 되었다고 말했다.[10] 그녀는 낙태나 동성애와 같은 문제에 정당이 입장을 취하는 것에 반대했다.[11]

바버라의 낙태에 대한 의견은 조지의 정치 경력에 문제가 되었다.[12] 초기에는 제1분기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일반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를 거부했다.[5] 그녀는 1980년 대선 운동 기간에 철학적 질문과 자녀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언급하는 여러 페이지의 메모를 쓰면서 낙태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개인적으로 조정했다. 그녀는 영혼이 출생 시 몸에 들어온다고 결론지었고, 이것이 낙태를 도덕적으로 허용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또한 낙태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접근 가능하도록 연방 정부가 자금을 지원해야 하며, 원치 않는 출산을 방지하기 위한 정부의 조치는 교육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고 믿었다.[12] 그녀는 삶의 후반기에야 낙태가 허용 가능하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6]

부시는 동성애자 권리 옹호자가 아니었지만, 영부인으로 재직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생각에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녀의 에이즈 구호 활동은 LGBT 공동체가 직면한 차별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그녀는 이 문제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차별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백악관의 누군가가 동성애자 권리를 지지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최초의 사례였다. 1994년에 연설하면서 그녀는 자녀를 돌보는 가정이 부모가 동성 커플인지 아닌지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2015년 오바마 행정부가 성전환자를 공개적으로 채용한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티모시 나프탈리 역사학자와의 대화 후 마음을 바꿨다.[13]

부시는 주부로서의 자신의 삶에 대한 비판 때문에 부분적으로 페미니스트 운동에 회의적이었다.[14] 그녀는 1980년대 동안 여성의 평등권 수정안을 지지했지만, 영부인으로 재직하는 동안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을 중단했다.[15] 그녀는 파나마 침공 동안 여군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보였는데, 여성은 전쟁을 감당할 감정적 능력은 있지만 육체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믿었다. 그녀는 마누엘 노리에가가 체포되는 한 그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결정했다.[6] 그녀는 걸프 전쟁에서의 미국의 행동을 더 명확하게 지지했고,[16]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이 전쟁 범죄로 기소되어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제안했을 때 거의 반발을 받지 않았다.[17]

부시는 남편의 대통령직 이후 공화당의 우경화에 반대했다.[12] 팻 뷰캐넌이 1992년 경선에서 민족주의적 반이민 플랫폼으로 남편에게 도전했을 때, 그녀는 그가 "인종차별적인 은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18] 부시는 또한 그의 정치 경력 이전인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도널드 트럼프를 매우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그녀는 그의 2016년 대선 운동과 그 이후의 대통령직에 반대했다. 그녀는 그의 승리에 대한 반응을 "공포"라고 묘사했고, 어떤 여성이 그를 지지할 수 있는지 혼란스러워했다. 트럼프 당선 후, 그녀는 그의 임기 종료까지의 날짜를 세는 디지털 시계를 선물로 받았는데, 그녀는 이 시계를 침실에 두었다. 2018년 초, 사망 직전에 부시는 당시 존재했던 공화당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19]

5. 유산

바버라 부시는 대체로 인기 있는 영부인이었다.[22] 소탈한 여성이자 좋은 어머니로서의 이미지는 미국 국민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고, 정책 문제에 대해서는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려는 그녀의 결의 또한 마찬가지였다.[22] 전기 작가 수전 페이지는 그녀를 "현대사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영부인"으로 묘사하기도 했다.[22]

부시는 이미지와 스타일 면에서 전임자인 낸시 레이건과 대조되기도 한다. 레이건은 패션 감각과 작은 체구로 알려진 반면, 부시는 흰 머리와 단순한 패션으로 인정받았다.[22] 특히 3줄짜리 인조 진주 목걸이는 미국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22] 그녀는 자신을 "뚱뚱한 여성들을 위한 롤모델"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22] 후임자인 힐러리 클린턴과 비교할 때, 부시는 생활 방식으로 차별화되었다. 클린턴은 평생 남편으로부터 유지해 온 독립성 수준에 대해 비판을 받았지만, 부시는 남편으로부터의 독립성 부족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22] 부시는 자신을 엘리너 루스벨트베스 트루먼에 비유하기도 했다.[22]

부시의 사회 사업과 계획은 그녀의 자녀들에 의해 이어졌다. 제브와 조지 모두 정치 경력에서 교육을 강조했고, 제브와 도로시는 2014년 바버라 부시 읽기 재단을 인수했다.[22] 조지는 대통령 재임 시 아프리카의 수백만 명의 에이즈 환자들을 지원한 PEPFAR 계획을 제정할 때 어머니의 영향을 언급하기도 했다.[22] 그녀의 손녀인 바버라 피어스 부시는 에이즈 구호를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삼는 글로벌 헬스 코퍼스(Global Health Corps)를 공동 설립했다.[22]

2021년, 질 바이든은 바버라 부시 가족 읽기 재단의 전국 정상 회의에서 연설하는 동안 부시를 자신의 롤모델 중 한 명으로 여기며 자신의 역할에서 본받고 싶은 영부인이라고 말했다.[22]

6. 수상 및 영예

1995년, 부시는 제퍼슨 어워드 재단(Jefferson Awards Foundation)이 매년 수여하는,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공공 봉사를 한 사람에게 주는 상인 공공봉사상(Award for Greatest Public Service Benefiting the Disadvantaged)을 수상했다.[23] 1997년에는 읽기 프로그램에서의 활동으로 미스 아메리카 여성상(The Miss America Woman of Achievement Award)을 받았다.[24] 같은 해, 그녀는 미국 업적 아카데미(American Academy of Achievement)의 골든 플레이트 상(Golden Plate Award)을 수상했다.[25] 2016년에는 휴스턴 대학교(University of Houston) 지부에서 명예 회원(honorary membership)으로 피 베타 카파(Phi Beta Kappa)에 가입했다.[26]

건물 벽에
휴스턴 파크웨이 빌리지(Parkway Villages) 소재 바버라 부시 초등학교


바버라 부시의 이름을 딴 여러 학교가 있다. 휴스턴, 텍사스주 그랜드 프레리(Grand Prairie), 애리조나주 메사(Mesa)에 바버라 부시 초등학교(Barbara Bush Elementary School)가 있다. 텍사스주 샌 안토니오(San Antonio)와 어빙(Irving)에는 바버라 부시 중학교(Barbara Bush Middle School)가 있다.[3] 메인주 포틀랜드(Portland)에 있는 메인 메디컬 센터(Maine Medical Center)의 바버라 부시 어린이 병원(Barbara Bush Children's Hospital)도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녀의 이름을 딴 장소들 중에서 그녀는 사망 당시 휴스턴에서 건설 중이었던 시청과 인근 도서관을 연결하는 "읽기 광장(Literacy Plaza)"을 가장 자랑스러워했다고 말했다.

바버라 부시는 여러 기관으로부터 명예 학위를 받았다.

날짜대학교학위
1972년아르카디아 대학교 (Arcadia University)펜실베이니아법학 박사 (LLD)[27]
1981년마운트 버넌 세미나리 앤드 칼리지 (Mount Vernon Seminary and College)워싱턴 D.C.공공 봉사 박사[27]
1981년 5월카디널 스트리치 칼리지 (Cardinal Stritch College)위스콘신법학 박사 (LLD)[27][28]
1987년 5월 10일하워드 대학교 (Howard University)워싱턴 D.C.인문학 박사 (DH)[29][30]
1988년주드슨 칼리지앨라배마인문학 박사 (DHL)[27]
1989년 5월 14일베넷 칼리지 (Bennett College)노스캐롤라이나인문학 박사 (DHL)[27][31]
1989년 5월 21일보스턴 대학교 (Boston University)매사추세츠인문학 박사 (DHL)[27]
1989년 10월 6일모어하우스 의과대학 (Morehouse School of Medicine)조지아인문학 박사 (DHL)[27][32]
1989년 9월 6일스미스 칼리지 (Smith College)매사추세츠인문학 박사 (DHL)[33][34]
1990년펜실베이니아 대학교 (University of Pennsylvania)펜실베이니아법학 박사 (LLD)[35]
1990년 5월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교 (University of South Carolina)사우스캐롤라이나교육학 박사[27][36]
1990년 5월 19일세인트루이스 대학교 (Saint Louis University)미주리인문학 박사 (DHL)[37]
1991년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교 (South Carolina State College)사우스캐롤라이나인문학 박사 (DHL)[27]
1991년미시간 대학교 (University of Michigan)미시간법학 박사 (LLD)[38]
1991년 6월 15일노스이스턴 대학교 (Northeastern University)매사추세츠공공 봉사 박사[39]
1992년 5월 17일마케트 대학교 (Marquette University)위스콘신법학 박사 (LLD)[40]
1992년센트럴 주립대학교 (Central State University)오하이오인문학 박사 (DHL)[27]
1992년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 (Louisiana State University)루이지애나인문학 박사 (DHL)[27]
1992년페퍼다인 대학교 (Pepperdine University)캘리포니아법학 박사 (LLD)[27]
1997년후드 칼리지 (Hood College)메릴랜드인문학 박사 (DHL)[27]
1997년 4월 18일호프스트라 대학교 (Hofstra University)뉴욕인문학 박사[41]
1998년오스틴 칼리지 (Austin College)텍사스인문학 박사 (DHL)[27]
1998년마이애미 대학교 (University of Miami)플로리다인문학 박사 (DH)[27]
1999년워싱턴 칼리지 (Washington College)메릴랜드공공 봉사 박사[27]
2000년센테너리 칼리지루이지애나법학 박사 (LLD)[27]
2001년 5월 21일웨이크 포레스트 대학교 (Wake Forest University)노스캐롤라이나인문학 박사[42]
2002년 3월 11일베일러 대학교 (Baylor University)텍사스인문학 박사 (DHL)[43]
2003년 6월 7일뉴잉글랜드 대학교
골수병원
메인인문학 박사 (LHD)[44]
2005년 12월 16일텍사스 A&M 대학교 (Texas A&M University)텍사스인문학 박사[45]
2006년 5월 21일조지 워싱턴 대학교 (George Washington University)워싱턴 D.C.공공 봉사 박사[46]
2010년 5월 15일서니 대학교 (Sewanee: The University of the South)테네시민법 박사 (DCL)[47]


참조

[1] 서적 Barbara Bush: A Memoir https://books.google[...] Simon and Schuster 2015-05-26
[2] 서적 Grace & steel: Dorothy, Barbara, Laura, and the women of the Bush dynasty St. Martin's Press 2021
[3] 웹사이트 First Lady Biography: Barbara Bush http://www.firstladi[...] First Ladies National Historic Site|National First Ladies Library 2008-01-21
[4] 웹사이트 "We walk by faith and not by sight" - Saying goodbye to Barbara Pierce Bush https://www.franbecq[...] 2019-10-03
[5] 웹사이트 Notable Members - The Association of Junior Leagues International https://www.ajli.org[...] 2022-02-20
[6] 웹사이트 Katrina funds earmarked to pay for Neil Bush's software program http://chron.com/dis[...] 2011-11-17
[7] 웹사이트 The George and Barbara Bush Center http://www.une.edu/b[...] University of New England in Maine, Tangier and Online 2016-09-07
[8] 웹사이트 Barbara Bush leaves lasting legacy in Maine http://www.wmtw.com/[...] WMTW 2018-04-17
[9] 웹사이트 Former first lady Barbara Bush released from hospital http://politicaltick[...] 2012-05-11
[10] 웹사이트 Fetus in jar: Bush says he didn't forsee a 'national dialogue' https://abcnews.go.c[...] 2023-06-08
[11] 잡지 George W. Bush, his mom and her fetus: Not so weird after all https://healthland.t[...] 2023-06-08
[12] 웹사이트 Watch Barbara Bush tell son Jeb she's changed her mind about 'enough Bushes' https://abcnews.go.c[...] 2023-06-08
[13] 잡지 Jeb wins the all-important Barbara Bush primary https://time.com/371[...] 2023-06-08
[14] 뉴스 Barbara Bush brings her flair to Jeb's New Hampshire campaign https://abcnews.go.c[...] 2020-06-27
[15] 뉴스 Former First Lady Barbara Bush Dies at 92 https://variety.com/[...] 2023-12-19
[16] 웹사이트 Former first lady Barbara Bush in failing health, not seeking further treatment https://www.npr.org/[...] NPR 2018-04-15
[17] 웹사이트 Former first lady Barbara Bush dies at age 92 https://abcnews.go.c[...] 2020-06-27
[18] 웹사이트 Trump orders flags to half-staff for Barbara Bush CNN Politics https://www.cnn.com/[...] 2023-10-13
[19] 뉴스 Barbara Bush is remembered at her funeral for her wit and tough love https://www.nytimes.[...] 2023-06-11
[20] 뉴스 How the Barbara Bush cartoon took on a life of its own https://www.usatoday[...] 2018-04-19
[21] 뉴스 George Bush Senior dies at the age of 94 https://www.bbc.com/[...] 2023-06-08
[22] 웹사이트 Jill Biden reflects on Barbara Bush and what it means to be first lady: 'Nothing can prepare you' https://people.com/p[...] 2023-09-15
[23] 웹사이트 Past Winners http://www.jefferson[...] Jefferson Awards Foundation 2018-04-18
[24] 웹사이트 Live presentation of the 77th annual Miss America Pageant http://www.tcm.com/t[...] Turner Classic Movies 2014-01-07
[25] 웹사이트 Golden Plate Awardees of the American Academy of Achievement https://achievement.[...] American Academy of Achievement 2020-09-10
[26] 웹사이트 University of Houston https://www.pbk.org/[...] The Phi Beta Kappa Society 2018-04-18
[27] 서적 Reflections : life after the White House https://archive.org/[...] Simon & Schuster International 2005
[28] 웹사이트 Stritch Magazine http://www.stritch.e[...] Cardinal Stritch University 2018-04-18
[29] 웹사이트 Recipients of honorary degrees and other university honors (by year) https://www.howard.e[...] Howard University 2018-04-18
[30] 뉴스 COMMENCEMENTS: Howard University https://www.nytimes.[...] 2018-04-18
[31] 웹사이트 Barbara Bush receives Doctor of Humane Letters degree https://www.upi.com/[...] 2018-04-18
[32] 뉴스 The presidential portrait that was a bust https://www.washingt[...] 2018-04-18
[33] 웹사이트 Honorary Degrees https://www.smith.ed[...] Smith College 2018-04-18
[34] 웹사이트 America's leading (and most-admired) college dropout-First... https://www.chicagot[...] 2018-04-18
[35] 웹사이트 Alphabetical Listing of Honorary Degrees https://secure.www.u[...] University of Pennsylvania 2018-04-18
[36] 웹사이트 Jeb Bush to speak at commencement http://www.sc.edu/uo[...]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2014-11-25
[37] 웹사이트 First lady gets honorary degree https://www.deseretn[...] 1990-05-20
[38] 웹사이트 Honorary Degrees Awarded 1836-Present https://president.um[...] University of Michigan
[39] 뉴스 Photos: The life of former first lady Barbara Bush https://www.cnn.com/[...] CNN 2017-01-20
[40] 뉴스 Barbara Bush speaks to grads about family values https://www.upi.com/[...] 1992-05-17
[41] 웹사이트 Academic Convocation, Apr 18 1997 Video https://www.c-span.o[...] C-SPAN 1997-04-18
[42] 웹사이트 2001 - Commencement News https://commencement[...] Wake Forest University
[43] 웹사이트 Baylor Honors Barbara Bush With Honorary Doctorate | Media Communications https://www.baylor.e[...] Baylor University 2002-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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