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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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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순천은 1898년에 태어나 1983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여성 정치인이다. 3·1 운동 참여, 마산 의신여학교 교사, 국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1950년 제2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으며,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신민당 고문을 지냈다. 여성 권익 신장에 기여했으며, 유신정권에 협력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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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5년 11월 당시의 박순천 민주당 최고위원
1955년 11월 당시의 박순천 민주당 최고위원
필명본명(本名)은 박명련(朴命連)
별명은 순천댁
출생일1898년 10월 24일
출생지대한제국 경상남도 동래군
사망일1983년 1월 9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강서구 화곡5동 111-61번지
국적대한민국
종교개신교→천주교(세례명: 요한나)
학력
학력경상남도 동래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도쿄 요시오카 여자의학전문학교 중퇴
일본 도쿄 여자대학교 사회사업학과 중퇴
일본 니혼 여자전문학교 사회학부 여공보전학과 전문학사
경력
직업교육자
독립운동가
정치인
저술가
사회운동가
여성운동가
시민운동가
경력서울중앙여자고등학교 재단 이사장
정치 활동
정당신민당
의원 선수5
가족 관계
배우자변희용
자녀변준오(아들)
변준호(막내아들)
부모박재형(부)

2. 생애

1917년 부산의 여자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의신여학교 교사로 재직 중,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다. "순천댁"이라는 가명을 쓰며 도피 생활을 했고, 기생으로 위장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기요카 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마산 감옥에서 1년 6개월간 복역했다.[1]

출옥 후 다시 일본으로 유학, 일본여자대학에서 수학했다. 변희용과 결혼하여 재학 중 아들을 출산했다.[3] 1923년 고지마치 교회에서 열린 여자 유학생 모임에 산카와 기쿠에를 초청, 황신덕 등과 교류했다.[4] 1926년 일본여자대학을 졸업했다.

귀국 후 경상북도 고령군에서 농촌 계몽 운동을 했으나, 경성으로 옮겨 조선공예주식회사 금강전구공장 여공 감독으로 일했다. 1937년 황신덕과 경성가정여숙을 설립, 부교장을 역임했다.[1] 전시에는 여학생들을 정신대로 보낸 탓에, 전후 친일파 의혹이 제기되었다.[2]

1945년 광복 직후,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건국부녀동맹 부위원장, 독립촉성애국부인회(후의 대한부인회) 부회장, 대한부인회 회장, 국민회 중앙총본부 부위원장, 대한여자청년단 단장, 학교법인 추계학원 이사, 「부인신문」 사장 등을 역임했다. 1950년 총선에 출마하여 초선 국회의원이 되었다.[1] 초기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했으나, 사사오입 개헌 이후 결별하고 자유당의 부패 정치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1955년 신익희, 윤보선, 장면, 조병옥 등과 민주당을 창당했다. 1958년1960년 총선에서 연이어 당선되었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1963년까지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1963년 정치 활동 재개 후, 재건된 민주당[5] 총재를 맡았다. 1965년 민정당[6]과 민주당의 통합으로 민중당이 창당되자, 당대회에서 윤보선을 누르고 대표최고위원(당수)이 되었다. 1967년 신민당 창당 후에는 고문을 역임했다.

통산 5선 (1950년, 1958년, 1960년, 1963년, 1967년)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박근혜가 5선에 성공하기 전까지 한국 여성 정치인 중 유일한 5선 의원이었다.[7]

1972년 정계 은퇴 후 안양 근명학교 이사장을 맡았다. 육영수 추도 기념 사업회 이사장, 국정 자문 위원 등도 역임했다.

국회에서 남성 의원으로부터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을 듣자 즉시 반박했다. 여성 노동자의 생리 휴가와 60일 산후 휴가를 보장하는 “박순천법”을 제정하는 등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한 입법 활동을 펼쳤다.[2]

2. 1. 학창 시절과 교육 활동 (1898~1919)

1898년 10월 24일(음력 9월 10일) 경상남도 동래군(현 부산광역시 기장군)의 양반 집안에서 한학자인 박재형의 딸로 태어났다.[2] 어린 시절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에서 보냈으며, 12세에 아버지가 기장읍내에서 일본인에게 상투가 잘리고 모욕당하는 모습과,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가 태극기를 담장 아래 묻으며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교육에 헌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부산진일신여학교를 졸업하고[12] 마산 최초의 여학교였던 의신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성경 채플 담당 교사, 생리학 겸 동물학 교사를 맡았다. 당시 일본인 교사는 24원의 월급을 받았지만, 그는 12원의 월급을 받아 일본인 교사와의 차별에 항의하며 싸우기도 했다. 1919년 삼일운동에 참여하여 체포되었고, “순천댁”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도피 생활을 했다.[1]

2. 2. 여성 독립운동 (1919~1945)

1917년 부산의 여자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의신여학교 교사로 재직 중,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다. "순천댁"이라는 가명을 쓰며 도피 생활을 했고, 기생으로 위장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기요카 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마산 감옥에서 1년 6개월간 복역했다.[1]

출옥 후 다시 일본으로 유학, 일본여자대학에서 수학했다. 변희용과 결혼하여 재학 중 아들을 출산했다.[3] 1923년 고지마치 교회에서 열린 여자 유학생 모임에 산카와 기쿠에를 초청, 황신덕 등과 교류했다.[4] 1926년 일본여자대학을 졸업했다.

귀국 후 경상북도 고령군에서 농촌 계몽 운동을 했으나, 경성으로 옮겨 조선공예주식회사 금강전구공장 여공 감독으로 일했다. 1937년 황신덕과 경성가정여숙을 설립, 부교장을 역임했다.[1] 전시에는 여학생들을 정신대로 보낸 탓에, 전후 친일파 의혹이 제기되었다.[2]

2. 2. 1. 3.1 운동과 수배 생활

1919년 각지에서 3·1 운동이 발생하자, 박순천도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3월 5일 박순천은 많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마산 장에 나온 장꾼들에게 나눠 주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1] 이 사건으로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어 신마산에 있는 일본 헌병대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는데, 3월 12일 한석규 목사와 시인 이은상, 이승규 목사(이은상의 아버지) 등의 신원보증을 받고 가석방되었다. 12일 헌병대는 석방과 동시에 가택수색을 실시했는데, 이곳에서 태극기를 비롯 독립선언서와 항거계획, 일기장 등이 발견되자 도주하여 다시 쫓기는 몸이 되었다.[1]

박순천은 야산으로 피신하여 산행 중 밤중에 30리 길을 걸어 칠원에 도착했다. 칠원에서 3개월간 은신했다가 다시 마산으로 돌아왔으나, 일본 형사들의 눈을 피해 제자인 이수학의 집에 숨어있었다. 그는 마산교회 한석진 목사의 따님인 한소재의 권고로, 경찰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그를 따라 기생으로 가장하고 일본으로 출국하는데 성공하였고, 동경 기찌오까 의전에 입학하였다.[1]

일본 도피 생활 중 사용한 순천댁(順天宅)이라는 별칭에서 '박순천'이라는 이름이 나왔다.[1]

2. 2. 2. 일본 유학과 결혼

1920년 4월, 일본 우씨고매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동경 유학생 총무였던 변희용이 면회 등 성의를 보였다.[1] 박순천은 보안사범으로 죄수번호 98번을 부여받고 일본 형무소에서 마산형무소로 이감되어 1년 4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1921년 8월 출감, 고향인 기장의 대변리로 돌아왔다.[1] 출감 후, 황신덕과 함께 항공사가 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여성이라는 체력적 약점 때문에 니혼 여자 전문학교 사회학부 여공보전과에서 유학했다.[1] 1923년 초여름, 고지마치의 교회에서 열린 여자 유학생 모임에 산카와 기쿠에를 초청하여, 황신덕 등과 교류했다.[4] 1924년 귀국, 12월 24일 서울 무교동의 태화관에서 변희용과 결혼했다.[1] 도쿄에서 유학 중이던 변희용과 결혼하여, 동교 재학 중에 아들을 출산했다.[3]

2. 2. 3. 친일 논란

박순천은 경성가정여숙 부교장이자 여성계와 교육계의 저명 인사로서, 태평양 전쟁 시기에 전쟁 지원을 독려하는 친일 활동을 했다. 1940년 친일 단체인 황도학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했고, 1941년부터 조선임전보국단 주최의 강연에 연사로 참여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과 친일단체 부문에 선정되었다.

경성가정여숙 학생이었다가 조선여자근로정신대에 지원했던 김금진의 증언을 근거로, 황신덕과 함께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13] 그러나 김금진이 지원해 근무한 정신대는 통상적으로 알려진 일본군 위안부와는 다른 여자 근로 정신대이며, 정신대 지원이 없으면 학교가 폐교된다는 협박 때문에 자발적으로 지원한 것이므로 황신덕과 박순천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도 있다.[14]

2. 3. 정치 활동 (1945~1972)

1945년 광복 직후,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건국부녀동맹 부위원장, 독립촉성애국부인회(후의 대한부인회) 부회장, 대한부인회 회장, 국민회 중앙총본부 부위원장, 대한여자청년단 단장, 학교법인 추계학원 이사, 「부인신문」 사장 등을 역임했다. 1950년 총선에 출마하여 초선 국회의원이 되었다.[1] 초기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했으나, 사사오입 개헌 이후 결별하고 자유당의 부패 정치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1955년 신익희, 윤보선, 장면, 조병옥 등과 민주당을 창당했다. 1958년1960년 총선에서 연이어 당선되었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1963년까지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1963년 정치 활동 재개 후, 재건된 민주당[5] 총재를 맡았다. 1965년 민정당[6]과 민주당의 통합으로 민중당이 창당되자, 당대회에서 윤보선을 누르고 대표최고위원(당수)이 되었다. 1967년 신민당 창당 후에는 고문을 역임했다.

통산 5선 (1950년, 1958년, 1960년, 1963년, 1967년)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박근혜가 5선에 성공하기 전까지 한국 여성 정치인 중 유일한 5선 의원이었다.[7]

1972년 정계 은퇴 후 안양 근명학교 이사장을 맡았다. 육영수 추도 기념 사업회 이사장, 국정 자문 위원 등도 역임했다.

국회에서 남성 의원으로부터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을 듣자 즉시 반박했다. 여성 노동자의 생리 휴가와 60일 산후 휴가를 보장하는 “박순천법”을 제정하는 등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한 입법 활동을 펼쳤다.[2]

2. 3. 1.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

1945년 광복 직후 건국부녀동맹에 참가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며, 우익 여성 단체인 독립촉성애국부인회 회장(1947), 《부인신문》 사장 등을 지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종로 갑구) 총선에서 낙선하였다. 같은 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감찰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49년 대한부인회 회장, 대한여자청년단 단장 등을 지냈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는 박순천, 뒷줄 맨 왼쪽은 현석호, 장면 순, 가운데는 신익희, 뒷줄 왼쪽 첫 번째는 신창현, 두 번째는 곽상훈


1949년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15] 1950년 대한부인회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 3. 2. 민주당 창당과 야당 지도자

1954년 사사오입 개헌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결별하고 여당 자유당의 부패 정치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1955년 신익희, 윤보선, 장면, 조병옥 등과 함께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고,[1] 그해 말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신당 창당 운동에 동참하였다.

1956년 부산과 1960년 서울에서 거듭 당선되면서 4대, 5대, 6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민주당 신파 계열에서 여성 정치인의 대표격으로 활동했다. 1960년 7월 민의원에서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1표를 얻었다.[16]

2. 3. 3. 군사정권과의 갈등과 협력

1961년 5·16 군사 정변 직후, 박순천은 5.16이 우발적인 정변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탐욕스러운 군인들의 쿠데타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윤보선 등 민주당 구파 출신이 군사 정변을 방조한 점 역시 비판하였다. 그러나 군정 측은 군인 세력이 타락한 한민당 계열과 동일한 세력일 리 없다며 반박하였다.[17] 정치활동정화법으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고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를 당했다가 1963년 2월 해금되었다.

정치활동 금지에서 풀리면서 1963년 초 민주당 재건위를 조직하여 장면, 오위영, 현석호, 조재천, 김도연 등과 함께 민주당 재건에 참여하였다. 이후 와병 중인 장면을 대신하여 구 민주당 신파의 리더가 되어 재건된 민주당의 총재에 추대되었고,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민주당이 창당되자 총재에 피선되었고, 초기에는 대통령 후보로 나설 의향을 보였으나 야당 후보단일화를 위해 대통령 후보 자리는 윤보선에게 양보하였다.

1963년 3월 22일 윤보선, 변영태·박순천 등의 재야지도자들은 박정희의 3월 16일 군정연장 선언에 반발하여 '민주구국선언대회'[17]를 열어 군정연장봉쇄를 결의하고 가두데모에 나섰다.[18]

1963년 10월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한 윤보선의 예방을 받았다. 1964년 민주당과 민정당이 통합되어 민중당이 설립되자 민중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가, 1967년 범야당 통합에 참여하고, 그해 신민당 고문 등 야당의 지도자를 역임했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이 한일기본조약을 강행하자 윤보선, 함석헌, 장택상 등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 투쟁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소극적으로 참여하여 윤보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나중에 박정희 정권에 호의적으로 변하였는데, 송건호는 그가 박정희에게 붙었다고 비판하였다.[19]

유신정권에서 국토통일원 고문, 육영수 여사 추모기념사업회 이사장, 대통령 국정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2. 4. 정계 은퇴와 말년 (1972~1983)

1972년 정계를 은퇴한 후, 경기도 안양의 근명학교 이사장에 취임했다. 육영수 여사 추도 기념 사업회 이사장, 국정자문회의 위원 등을 역임했다.[2]

1980년 2월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선출되었고, 1981년 4월 23일 전두환에 의해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재선출되었다.

1982년 12월 29일 고혈압성 신부전증과 뇌졸중으로 연세대학교 의료원에 입원하였다가 이듬해 1983년 1월 9일 오후 10시 30분에 사망했다.[1]

3. 사상과 신념

박순천은 일제강점기부터 여성 권익 신장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농촌 계몽 운동과 여성 교육 사업에 힘썼다.[1]

1945년 광복 후에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고, 대한부인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후에는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고 자유당의 부패 정치에 맞서 싸웠으며,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는 등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1]

3. 1. 여성 권익 신장

1945년 광복 후, 박순천은 대한부인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여성 권익 신장에 힘썼다.[1] 국회에서는 여성의 권익을 위한 입법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남성 의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성 노동자의 생리 휴가와 60일의 산후 휴가를 보장하는 내용의 법안, 일명 "박순천법"을 만들어 여성 권익 향상에 기여했다.[2]

3. 2. 민주주의 발전

사사오입 개헌 이후, 박순천은 여당 자유당의 부패 정치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1955년 신익희, 윤보선, 장면, 조병옥 등과 함께 민주당 결성에 참여했다.[1]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1963년까지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1963년 2월, 정치 활동 재개 후 재건된 민주당[5] 총재를 맡았고, 1965년 민정당[6]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결성된 민중당 당대회에서 윤보선을 제치고 대표 최고위원(당수)에 선출되었다.[7] 1967년 결성된 신민당에서는 고문을 맡았다.

국회에서 남성 의원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고 발언하자, 박순천은 즉시 이에 반박했다. 또한 여성의 권익을 위한 입법 활동에 힘썼으며, 남성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성 노동자의 생리 휴가와 60일간의 산후 휴가를 보장하는 "박순천법"을 제정했다.[2]

4. 평가

박순천은 민주당 창당 후 대표최고위원을 지냈고, 장면, 곽상훈, 정일형, 이철승 등과 함께 민주당 신파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5·16 직후 정치 활동 금지를 당하였다가 해제 후, 1963년 민주당을 재건하였으나, 유신 정권에서 국토통일원 고문, 육영수 여사 추모기념사업회 이사장, 대통령 국정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4. 1. 긍정적 평가

박순천은 국회에서 남성 의원으로부터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즉시 반박했다.[2] 여성 노동자의 생리 휴가와 60일의 산후 휴가 등을 보장하는 “박순천법”을 만들었다.[2]

4. 2. 부정적 평가

민주당 지도자였음에도 10월 유신 이후 유신정권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았다.[2] 송건호는 박순천과 곽상훈박정희 정권 말기에 변절했다고 비판했다.[2]

5. 가족 관계

관계이름
남편변희용 (제4대 성균관대학교 총장)
아들변준오 (음식점 "월선옥" 경영)
막내아들변준호[20]


6. 박순천을 연기한 배우

7.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대수직책선거구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락비고
제헌 국회의원 선거제1대국회의원서울 종로구 갑독립촉성애국부인동지회5,518표15.10%2위낙선
제2대 국회의원 선거제2대국회의원서울 종로구 갑대한부인회11,251표54.98%1위당선초선
제3대 국회의원 선거제3대국회의원서울 종로구 갑무소속4,306표14.68%3위낙선[8]
제4대 국회의원 선거제4대국회의원부산 동구 갑민주당22,907표59.95%1위당선재선
제5대 국회의원 선거제5대국회의원부산 동구 갑민주당22,668표57.53%1위당선3선
제6대 국회의원 선거제6대국회의원서울 마포구민주당50,250표67.67%1위당선4선
제7대 국회의원 선거제7대국회의원전국구신민당3,554,224표32.70%전국구 1번당선5선


참조

[1] 웹사이트 박순천(朴順天) https://encykorea.ak[...] 2023-08-16
[2] 웹사이트 [부산 정치비화 60년] ① 여성 정치의 시대를 열다 박순천 https://mobile.busan[...] 2011-01-01
[3] 서적 おんな二代の記 平凡社
[4] 서적 おんな二代の記 平凡社
[5] 웹사이트 제2공화국 시대의 정당
[6] 웹사이트 제2공화국 시대의 정당
[7] 뉴스 박근혜 능가하는 역대 최다선 여성의원은?(朴槿恵凌駕する最多選女性議員は?)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1-08-19
[8] 웹사이트 윤보선 당선
[9] 웹사이트 부산 직할시 승격
[10] 웹사이트 대한민국헌정회 https://www.rokps.or[...] 2022-07-24
[11] 웹사이트 음력 9월 10일
[12] 저널 [아주 특별한 인터뷰] 진보학계 거목 최장집 교수 http://newsmaker.kha[...] 2008-06-10
[13] 뉴스 박순천/여성·야당 ‘거목’ 정신대 관련 친일행위 오명 http://www.hani.co.k[...] 한겨레 2002-06-18
[14] 뉴스 3.1절을 맞는 감회 http://www.koreatime[...] 미주한국일보 2007-03-01
[15] 서적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 역사비평사
[16] 서적 한국정치론 오름
[17] 웹사이트 19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 관련성 부인
[18] 서적 한국정치론 오름
[19] 서적 학문의 길 인생의 길 역사비평사
[20] 방송 영욕의 청와대, 유신에서 10.26까지 KBS 199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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