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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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사영은 1775년 출생하여 1801년 순교한 조선 후기의 천주교 신자이다. 그는 1791년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앙을 지켰으며, 신유박해 당시 체포를 피해 숨어 지내면서 백서를 작성했다. 황사영 백서는 천주교 박해의 전말을 알리고 청나라의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능지처참을 당하고 가족들은 멸문지화를 겪었다. 황사영 백서 사건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현재 배론 성지에 토굴이 복원되어 있고, 그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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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 |
---|---|
기본 정보 | |
이름 | 황사영 |
한글 | 황사영 |
한자 | 黄嗣永 |
히라가나 | 고 시에이 |
가타카나 | 황 사욘 |
기타 | |
링크 | en |
2. 어린 시절
황사영은 창원을 본관으로 하며 자는 덕소이다. 아버지는 승문원 부정자를 지낸 황석범이며, 황사영은 서울 아현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4] 그는 남인 시파 가문 출신이었다. 1790년(정조 14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이에 정조는 그를 특별히 불러 격려하고 장래를 약속하기도 했다.[5] 같은 해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정난주와 혼인하여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되었다. 이를 통해 이승훈, 정약종 등 초기 천주교 주요 인물들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다.[6]
2. 1. 출생과 성장
본관은 창원이며, 자는 덕소이다. 승문원 부정자를 지낸 황석범의 유복자로 서울 아현에서 태어났다.[4] 남인 시파에 속했다. 1790년(정조 14년) 16세의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정조는 그를 특별히 불러 격려하며 스무 살이 되면 벼슬을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이때 정조가 황사영의 손을 잡아주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손목을 명주로 감고 다녔다고 전해진다.[5] 같은 해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정난주와 결혼하여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되었다. 이로써 이승훈과는 사돈 관계가 되었고, 초기 천주교 교회를 이끌던 정약종과는 처삼촌 관계가 되었다.[6]2. 2. 천주교 입교
황사영은 처갓집의 영향을 받아 천주학을 접하게 되었고, 1791년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입교 직후인 1791년 10월(음력) 신해박해 때 배교자가 속출하였으나, 그는 천주교를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으로 확신하며 신앙을 지켰다. 조상 제사를 포기하는 것은 벼슬길을 포기하는 일이었는데, 정조의 특별한 격려 속에 출세가 보장되어 있었지만 세상 출세에 뜻을 두지 않았다.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에는 측근으로 활동하였고,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798년 서울로 이주한 후 자신의 집을 명도회의 하부 조직인 6회(六會)의 한 장소로 제공하기도 하였다.[4] 그는 서울에서 신도 자제들에게 글과 교리를 가르쳤고, 천주교 서적 필사 작업도 열심히 하였다.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쳤던 그는 신유박해 무렵에 교계의 핵심 지도자 중 한 사람에 속하였다.[5]
2. 3. 천주교와 정국 변화
조선 후기, 진보적인 성향의 남인 소장파들은 기존 유학의 한계를 보완할 방안으로 서양 학문과 천주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조선의 천주교는 다른 나라와는 다른 독특한 방식으로 시작되었는데,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만든 신앙 모임을[7] 통해 외부 선교사의 도움 없이 자생적으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고 성장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조선 천주교는 명례방 사건(1785년), 반회사건(1787년), 신해박해(1791년), 을묘박해(1795년) 등 점차 탄압의 강도가 높아지는 상황에서도 꾸준히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한편, 노론이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영조의 계비가 된 정순왕후는 정조의 즉위를 처음부터 반대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순왕후와 그 가문은 정치적으로 몰락했으며, 특히 1787년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가 유배지에서 사망하면서[8] 정조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정조는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위해 남인을 적극적으로 등용했으며,[9]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한때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직후, 섭정을 맡게 된 정순왕후는 국상 중에는 정사(政事)를 논하지 않는 오랜 관례마저 깨고[10] 노론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이로 인해 정조 시대에 중용되었던 남인 세력의 앞날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3. 황사영 백서 사건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조선 정부의 체포령을 피해 충청북도 제천 배론의 한 토굴에 은신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박해의 참상을 목격하고 이를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알려 청나라와 서양의 힘을 빌려 신앙의 자유를 얻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흰 비단에 비밀 편지를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황사영 백서'이다.[19] 그러나 이 백서를 북경으로 전달하려던 계획은 발각되었고, 결국 황사영은 체포되어 능지처참을 당하게 된다. 이 사건은 조선 천주교회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3. 1. 신유박해
정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통해 노론 벽파 인물들을 조정의 요직에 앉히며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표면적으로는 사학(천주교)을 철폐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정조 재위 기간 동안 성장했던 남인 세력을 숙청하기 위한 목적으로 1801년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령, 즉 신유박해를 일으켰다.[11] 오가작통법을 동원하고 관련자들을 역모죄로 다스리라는 엄격한 명령이 전국에 내려졌다. 노론 벽파는 이를 통해 남인 세력을 정치적으로 완전히 제거하여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만들고자 했다.[12]이 과정에서 정약용이 체포되어 국문을 받던 중 황사영의 이름을 언급하게 되었고[13], 이로 인해 1801년 2월 13일 황사영에게도 체포 명령이 떨어졌다.[14]
체포령이 내려지자 황사영은 변득중, 홍필주의 집을 거쳐 정동에 있는 송재기 집에서 잠시 몸을 숨겼다. 이후 상복으로 변장하고 '이상인'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창의문을 통해 한양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15] 평구역에서 김한빈을 만나 함께 여주, 원주를 거쳐 충청북도 제천에 있는 김귀동의 집으로 피신했다. 김귀동 역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제천에 숨어 지내던 신자였다. 얼마 후, 김한빈과 김귀동은 제천 봉양면 배론(舟論)이라는, 토기를 만들며 살아가는 천주교 신자 마을로 가서 토굴을 파고 이를 옹기굴처럼 위장했다. 토굴이 완성되자 황사영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16]
한편, 정순왕후는 황사영을 반드시 체포하라는 특별 지시를 여러 차례 내렸으며, 황사영이 국외로 탈출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국경 지역의 수비를 강화하도록 명했다. 조정의 체포 독촉이 거세지자 함경도에서는 엉뚱한 사람을 황사영으로 오인하여 체포한 뒤 서울로 압송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17]
3. 2. 황사영의 피신
황사영은 토굴 속에 숨어 지내면서 김한빈과 황심(黃心)을 통해 바깥의 정세를 파악했다. 이 과정에서 주문모, 정약종, 이승훈, 최창현, 강완숙, 최필공, 이존창, 유황검 형제 등 주요 천주교 지도자 100여 명이 처형당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18] 또한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천주교도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으로 숨어든 교인들이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도 접했다.황사영은 이러한 참혹한 박해 상황을 북경의 주교에게 상세히 알리고, 주문모 신부가 중국인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청나라 조정의 개입을 유도하면 박해를 멈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는 훗날 《황사영 백서》로 알려지게 되는 유명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19]
이 편지는 흰색 비단(명주천)에 작성되어 '백서(帛書)'라고 불리며, 크기는 가로 62cm, 세로 40cm이다. 매우 가는 붓을 사용하여 한 줄에 110자씩 총 122행에 걸쳐 13,311자의 글자를 빽빽하게 적어 방대한 내용을 담았다.[20] 또한 비밀 유지를 위해 검은 먹 대신 백반을 사용하여 작성했기 때문에, 물을 묻혀야만 글씨가 나타나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3. 3. 백서 작성
황사영은 토굴 속에 숨어 지내며 김한빈과 황심(黃心)을 통해 정세를 파악하던 중, 교회의 주요 인물인 주문모, 정약종, 이승훈, 최창현, 강완숙, 최필공, 이존창, 유황검 형제 등 100여 명이 처형당했다는 비보를 접했다.[18] 또한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걸쳐 박해가 자행되고 있으며, 이를 피해 깊은 산중으로 도피한 천주교도들이 비참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황사영은 이러한 탄압의 전말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자 했다. 특히 주문모 신부가 중국인이라는 점을 이용해 청나라 조정의 도움을 이끌어낸다면 박해를 멈출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훗날 《황사영 백서》라 불리게 되는 편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19]이 편지는 흰색 비단(명주천)에 쓰였기 때문에 ‘백서(帛書)’라고 불린다. 그 크기는 가로 62cm, 세로 40cm이며, 아주 가는 붓을 사용하여 한 줄에 110자씩 122행에 걸쳐 총 13,311자의 방대한 내용을 담았다.[20] 또한 비밀 유지를 위해 검은 먹 대신 백반으로 작성하여, 물을 묻혀야만 글자를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3. 4. 백서의 내용
황사영 백서는 1785년(정조 9년) 이후 조선 천주교회의 상황과 박해가 시작된 배경을 간략히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신유박해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상세히 기록하고, 박해로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의 간략한 전기(약전)를 담았다. 또한, 조선에 입국해 활동했던 주문모 신부의 행적과 그가 스스로 관아에 나아가 순교하기까지의 과정을 증언하고 있다.백서에는 당시 조선 천주교인들이 처한 절박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들이 제시되었는데, 이는 청나라 황제에게 조선 정부가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제해달라는 요청을 포함한다. 다른 방안으로는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만들어 직접 감독하게 하자는 제안도 포함되었다. 마지막으로, 서양의 군함 수백 척과 군대 5만에서 6만 명을 동원하여 조선 조정을 압박하고 신앙의 자유를 강제로 얻어내는 방안까지 제시하였다.[21]
4. 체포와 순교
신유박해를 피해 제천 배론의 토굴에 은신하던 황사영은 박해의 실상을 알리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백서를 작성하여 중국 천주교 북경교구에 전달하려 하였다.[22] 그러나 이 계획은 백서를 전달하기로 한 황심(黃沁)이 체포되면서 발각되었고, 황사영 본인도 1801년 9월 26일(음력)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23]
체포 당시 그의 옷 속에서 발견된 백서는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 벽파 세력은 처음에는 이를 천주교 탄압의 좋은 명분으로 여겼으나,[24] 외세의 개입을 요청하는 등 그 내용의 파격성에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규정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은 끝에 1801년 11월 5일(음력 9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능지처참을 당하며 순교하였다.[3] 그의 나이 27세였다.
황사영의 죽음 이후 그의 가족과 친척, 심지어 집안의 노비들까지 연좌되어 귀양을 가거나 관노비로 전락하는 등 멸문지화를 당했다.[3] 이는 조선 사회에서 천주교 신앙이 얼마나 큰 위협으로 간주되었는지, 그리고 당시 지배층의 천주교 박해가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건이다.
4. 1. 백서 적발
황사영은 백서를 황심(黃沁)과 옥천희(玉千禧)를 통해 음력 10월에 출발하는 동지사 일행에 합류시켜 중국 천주교 북경교구의 주교에게 전달하려 했으나,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22] 1801년 9월 15일, 제천 배론에서 황심(黃心)이 먼저 체포되었고, 열흘 뒤인 9월 26일에는 황사영 본인도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23] 8개월 넘게 도피 중이던 황사영의 체포 소식에 조정에서는 크게 기뻐했다고 전해진다.[24] 체포 당시 황사영의 옷 속에서 비밀리에 작성된 백서가 발견되자,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 벽파 세력은 다시 한번 환호성을 질렀다.[24] 그러나 백서의 내용을 확인한 후에는 큰 충격과 경악에 빠졌다. 그들은 황사영이 천주교라는 '사교'에 빠져 외세의 힘을 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려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4. 2. 멸문지화
국청이 열리고 혹독한 심문이 이어졌다.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 벽파는 백서의 사본이 중국에 전달되었는지 여부를 가장 염려했으며, 백서 작성의 배후나 관련자들을 색출하려 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 황사영, 황심, 김한빈 세 사람 외에는 이 일에 관여한 자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황사영은 1801년 11월 5일 대역죄로 서소문 밖에서 온몸이 찢기는 능지처참을 당했다.[3]그의 죽음 이후 가족과 관련 인물들에게도 처벌이 내려졌다. 모친 이윤혜는 거제도로, 부인 정명련(정약용의 조카)는 제주도 대정현으로 노비로 끌려갔다. 당시 두 살이었던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로 귀양을 갔고, 숙부 황석필은 함경도 경흥으로 귀양 갔다. 심지어 집안의 머슴과 종들도 화를 피하지 못했다. 종 육손은 갑산, 돌이는 삼수, 여종 판례는 위원, 복덕은 흉양으로 귀양 갔으며, 여종 고음연은 단성으로 귀양 갔다가 이듬해 사망했다. 고음연의 남편 박삼취는 거창으로 유배되었다. 또한 황사영이 극형을 당한 다음 날, 그의 집은 헐리고 그 자리에 웅덩이를 파서 물이 고이게 하였다.[3]
5. 사후 역사
황사영 백서 사건은 황사영 개인의 순교로 끝나지 않고, 이후 조선 사회와 천주교 역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백서의 내용은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는 빌미가 되었지만, 동시에 박해를 피해 흩어진 신자들을 통해 천주교 신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또한, 황사영과의 인척 관계였던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는 이 사건으로 인해 다시 한번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조선 조정은 백서의 내용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고 박해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청나라에 사절을 보내 해명하는 등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오랫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백서 원본은 약 100년 뒤 극적으로 발견되어 현재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으며, 황사영이 순교 전 은거했던 배론 성지의 토굴 등 관련 유적지가 남아 그의 행적을 전하고 있다.
5. 1. 천주교 탄압과 확산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인해 조정은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는 입장을 확고히 할 증거를 확보했고, 천주교는 매국의 종교라는 낙인이 찍혔다.[25] 백서의 내용이 알려지자 재야 유생들은 조정에 천주교를 성토하는 글을 올렸으며,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서원을 중심으로 천주교 배척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26] 사회적으로 천주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졌다. 박해를 피해 살아남은 천주교도들은 경기도의 야산 지대나 강원도, 충청도의 산간 지방,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깊은 산골짜기로 숨어들었다. 이러한 이동은 결과적으로 천주교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유박해를 전후하여 지식인 중심이었던 조선 천주교회는 서민 사회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27]5. 2. 정약용과 정약전
사헌부의 홍낙안과 사간원의 신구조는 황사영 백서 제작의 배후로 정약전, 정약용, 이치훈 등을 지목하며 이들을 다시 체포하여 심문할 것을 주장했다.[28] 이 주장에 따라, 정약용과 정약전은 각각 유배 중이던 장기와 신지도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황사영이 정약용 형제의 조카사위였기 때문에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노론 벽파의 홍낙안 등은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 하나를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못한 것과 같다"고 말하며 이번 기회에 정약용을 제거하려 했다.[29] 그러나 사건과 관련된 직접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고, 노론 벽파 내부에서도 의견이 나뉘면서 정약용 형제는 극형을 면할 수 있었다.[30] 결국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시 유배되었다.[31]5. 3. 동지사 파견
정순왕후는 《황사영 백서》 사본이 청나라에 전달되어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이 알려질 것을 염려했다. 이에 따라 1801년 10월에 파견된 동지사에게 신유박해의 정당성을 설명하도록 지시했다. 동지사는 토사교문과 함께 《황사영 백서》를 16행, 총 922여 자로 축소한 <가백서>를 청나라에 전달했다.[32] 이 축소본에는 조선 조정에 불리한 내용은 삭제하고 서양 선박과 군대 파견을 요청한 사실 등을 적어 박해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았다. 이를 통해 신유박해 전반에 관해 청나라의 이해를 구하고, 주문모가 청나라 사람임을 모르고 처형했다고 거짓으로 해명했으며, 더 이상의 천주교 탄압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33]5. 4. 백서 발견
현재 전해지는 백서는 원본과 사본 2종이 있다. 이 백서는 신유박해 이후 거의 백 년 동안 의금부 창고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 때 옛 문서들을 파기하는 과정에서 원본이 우연히 발견되었다. 발견된 원본은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이후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열린 조선 천주교회 순교 복자 79명의 시복식 때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헌되었으며, 현재는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34]5. 5. 유적지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에 있는 배론 성지에는 황사영이 은거했던 토굴이 복원되어 있으며, 그 안에 백서의 실물 크기 복사본이 전시되어 있다.[35] 황사영은 능지처참형을 받은 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가마골 홍복산 자락 아래에 매장되었다. 1980년 황씨 집안 후손이 사료 검토와 고증을 거쳐 이곳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했다. 무덤 발굴 결과, 석제 십자가와 비단 띠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와 황사영의 무덤임을 확인했다.[36]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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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News 성지] 성지/사적지 목록,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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