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지긴 카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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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르지긴 카말라는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손자이자 진킴의 장남으로, 몽골 제국의 황족이었다. 그는 쿠빌라이 사후 황위 계승 경쟁에서 동생 테무르에게 양위하고, 몽골 고원과 타타르 지역을 관리했다. 카이두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1302년에 사망했으며, 아들 예순 테무르가 후에 원나라 황제 태정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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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지긴 카말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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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보르지긴 카말라 또는 가말라, 카라말 |
현지어 표기 | ᠭᠠᠮᠠᠯᠠ Гамала, Галама |
라틴어 표기 | Kammala |
페르시아어 표기 (음차 병기) | كملا (Kamalā) |
한자 표기 | 孛兒只斤 甘麻剌 (패아지근 감마랄), 甘麻羅 (감마라) |
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1263년 |
출생지 | 원나라 대도 연왕저 |
사망일 | 1302년 2월 8일 (음력 1월 10일) 또는 2월 2일 (음력 1월 4일) |
사망지 | 몽골 카라코룸 진왕부 |
신상 정보 | |
국적 | 몽골 제국, 원나라 |
별명 | 헌무왕 |
부모 | 친킴, 코코친 바이람에게치 |
자녀 | 원 태정제, 송산 |
군사 경력 | |
복무 | 원나라 군대 |
복무 기간 | 1287년 ~ 1302년 2월 |
근무 | 원나라군 육군 |
지휘 | 원나라군 육군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카이두의 난 (1289년 7월부터 참전) |
기타 정보 |
2. 생애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의 황태자 친킴과 코코진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며, 쿠빌라이의 적장손이다. 동생으로는 다르마발라와 훗날 원 성종이 되는 테무르가 있다. 어린 시절에는 할머니 차부이 황후의 보살핌을 받았고, 성장해서는 할아버지 쿠빌라이를 모셨으나, 과묵하고 말을 잘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성인이 된 후 할아버지 쿠빌라이의 명으로 오고데이 가문의 카이두 세력과 분쟁이 격렬했던 몽골 고원에 주둔하게 되었으나, 1289년 카이두와의 전투에서 큰 패배를 겪었다. 1290년에는 양왕(梁王)으로 봉해져 운남으로 출진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1292년 진왕(晉王)으로 다시 봉해져 몽골 고원으로 파견되었다. 진왕의 지위는 칭기즈 칸의 4대 오르도를 계승하고 고원의 유목 군단을 통솔하는 중책이었으며, 몽골 본토에서 카안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했다.
1294년 쿠빌라이가 사망하자 상도에서 쿠릴타이가 열려 후계자를 논의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카말라는 동생 테무르와 경쟁했으나, 군권을 장악한 추밀원사 바얀과 어머니 코코진이 테무르를 지지하면서 카안의 자리를 동생에게 양보했다.
이후 카말라는 계속해서 몽골 고원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300년 카이두가 중앙아시아 군대를 이끌고 마지막 대공세를 펼쳤을 때 카말라의 군대는 큰 위기에 처했으나, 조카 카이샨(훗날 원 무종)과 사촌 안서왕 아난다가 이끄는 지원군 덕분에 1301년 테케리크 전투에서 카이두 군을 격퇴하고 카이두를 전사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카말라는 이 전쟁 직후인 1302년 초에 사망하였다.
카말라 사후, 그의 아들 예순 테무르가 1323년 태정제로 즉위하면서 카말라는 현종(顯宗) 광성인효황제(光聖仁孝皇帝)로 추존되었다. 하지만 1328년 톡 테무르(원 문종)가 즉위한 후, 카말라와 그의 아들 예순 테무르는 방계 혈통으로 간주되어 황실 제사에서 제외되었다.
2. 1. 생애 초반
카말라는 1263년 원나라 대도의 연왕 저택에서 태어났으나, 정확한 생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일설에는 1262년에 태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아버지는 세조 쿠빌라이 칸과 차브이 카툰의 둘째 아들인 연왕 친킴이며, 어머니는 휘인유성황후 코코진 바이람에게치(徽仁裕聖皇后 闊闊真zho)이다. 카말라는 칭기즈 칸의 증손자이며, 동생으로는 다르마발라와 훗날 원 성종이 되는 테무르가 있다.원사의 현종전과 신원사 113권에는 카말라가 휘인유성황후 코코진 카툰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원사 116권 후비전의 코코진 카툰 소생 목록에는 카말라의 이름이 빠져 있다. 또한 카말라가 1263년생이고 동생 다르마발라가 1264년생이라는 점을 들어, 카말라가 코코진 카툰의 소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의 이름 '카말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연꽃을 의미한다. 원사와 원사연의, 신원사 113권 등에는 그의 이름이 카말라(甘麻剌)로 기록되어 있으나, 신원사 104권, 110권에는 카라말(甘剌麻)로, 원사 15권을 비롯한 일부 문헌에서는 감부랄(甘不剌)로 나타나기도 한다.
카말라는 태어난 직후 할머니인 차브이 카툰의 손에서 자랐으며, 할아버지 쿠빌라이 칸 곁에서 성장했다. 그는 매사에 신중하고 근신하며 함부로 말하지 않았고, 항상 언행을 조심했다. 그러나 언변이 뛰어나지 못하고 말재주가 부족했으며, 총명한 성격은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말을 잘 하지 못하거나 더듬었다는 평가도 있으며, 원사에서는 그의 성품이 천성적으로 인자하고 후덕하며(仁厚) 부드러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는 할아버지 세조 쿠빌라이 칸을 가까이에서 보좌하였다.
2. 2. 청년기
쿠빌라이의 적장손인 카말라는 어린 시절 할머니인 소예황후 차부이의 보살핌을 받았고, 성장해서는 할아버지 쿠빌라이를 모셨다. 그러나 변설에 약하고 과묵했으며, 그다지 총명해 보이는 성격은 아니었다.1285년 1월, 아버지 친킴 태자가 알콜중독으로 쿠빌라이보다 먼저 사망하자, 어머니 코코진이 황태자부의 관리 권한을 받았다. 코코진은 근신들을 잘 타이르고 신하와 백성을 소중히 여겼다고 전해진다. 친킴의 장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말라 대신 동생 다르마발라나 테무르가 후계자로 점쳐졌다. 어머니 코코진과 할아버지 쿠빌라이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카말라는 동생 다르마발라에게 밀려 후계 구도에서 멀어졌다. 쿠빌라이는 이후 다르마발라를 황태자로 낙점했다. 같은 해 1285년, 세조 쿠빌라이는 내사부(内史府)를 설치하고 카말라를 내사령에 임명했다.
성인이 되자 카말라는 할아버지 쿠빌라이에 의해 오고데이 가문의 카이두 등 서부 여러 왕들과의 분쟁이 격렬했던 몽골고원 주둔을 명받았다. 그러나 지원 26년(1289년)에 카이두를 상대로 큰 패배를 겪었다. 1287년부터는 몽골고원에 있는 칭기즈 칸의 4대 행궁(行宮) 관리를 맡았다.
지원 27년(1290년)에는 양왕(梁王)으로 봉해져 운남으로 출진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지원 29년(1292년)에는 진왕으로 다시 봉해져 몽골 고원으로 이주했다. 카말라의 숙부였던 북평왕 노무간이 사망한 후 주인이 없던 칭기즈 칸의 4대 오르도를 계승하는 것은 칭기즈 칸의 유산을 잇고 고원의 유목 군단을 통솔하는 중요한 역할이었으며, 몽골 본토에서 카안의 대리인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의미했다.
부인은 옹기라트 부족 출신인 부얀케르미시이며, 카말라가 진왕으로 있을 때 혼인했거나 정궁으로 책봉되었다는 설이 있다. 부얀케르미시는 아들 예순 테무르(후일 태정제)를 낳았고, 원비(元妃)로 봉해졌다가 사후 아들 태정제에 의해 선의숙성황후(宣懿淑聖皇后)로 추존되었다. 부얀케르미시의 친정에 대한 기록은 원사 등에 자세히 나타나지 않는다. 카말라의 자녀는 다음과 같다.
이름 | 작위 | 비고 |
---|---|---|
예순 테무르(也孫鐵木兒) | 진왕(晉王) | 선의숙성황후 소생. 원나라 6대 황제 태정제. |
숭샨(松山) | 양왕(梁王) | ? ~ 1309년. 서자 혹은 정실 소생 차자. |
질리가아불화(迭里哥兒不花) 또는 질리가불화(迭裏哥不花) | 상녕왕(湘寧王) | ? ~ 1323년. 생모 미상. |
2. 3. 군사 활동
쿠빌라이 칸 생전에 카말라는 군사를 이끌고 카이두의 군대와 여러 차례 교전했으며, 한 번은 카이두의 아들 차파르를 상대로 싸우기도 했다. 정확한 시점은 불분명하나, 1289년 2월 이전에는 대동로에 출진하여 주둔하고 있었다. 1289년 2월 19일, 카말라 주둔지의 병사들이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자, 쿠빌라이 칸은 대동로 현지에서 식량을 확보하여 이들을 구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같은 해 1289년, 쿠빌라이 칸은 카말라에게 군사를 이끌고 곽주로 가도록 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고타이 칸국의 카이두가 몽골고원 서부 지역을 침략해왔다. 카말라는 할아버지 쿠빌라이 칸의 지시로 군대를 이끌고 몽골고원으로 가서 카이두 군대와 맞섰으나 큰 패배를 당했다. 이후 킵차크 출신 장군 투투가쿠가 이끄는 군대가 지원에 나서 항가이산맥 일대에서 카이두 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카말라도 다시 군사를 이끌고 교전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투투가쿠가 이끄는 킵차크 군이 적진을 돌파하여 카말라를 보호하며 간신히 퇴각에 성공했다. 후퇴하는 과정에서도 카이두 군 기병대의 추격이 있었으나, 투투가쿠가 미리 배치한 복병 덕분에 추격을 따돌리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결국 1289년 7월, 쿠빌라이 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카이두 군대를 국경 밖으로 몰아냈다.
1290년 10월 2일, 카말라는 양왕(梁王)에 임명되어 금인(金印)을 하사받고 윈난 성으로 파견되었으며, 중산(中山) 지역도 함께 받았다. 이후 1291년 혹은 1292년 12월 27일, 후계자가 없던 삼촌 노무간을 대신하여 진왕(晉王)으로 봉해지고 수뉴금인(獸鈕金印)을 받아 다시 몽골고원으로 보내졌다. 진왕으로서 카말라는 몽골고원과 칭기즈 칸의 4대 행궁(오르도), 그리고 타타르 지역을 관할하는 중책을 맡았다. 쿠빌라이 칸은 몽골고원이 칭기즈 칸의 본거지임을 강조하며 카말라에게 각별히 신경 쓸 것을 당부했다.
대덕 4년 (1300년), 카이두가 중앙아시아 여러 왕의 군대를 총동원하여 마지막 대규모 공세를 펼치자, 몽골고원에 주둔하고 있던 카말라의 군대는 다시 한번 격파당하며 큰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당시 황제였던 테무르가 파견한 조카 카이샨 (다르마발라의 장남)이 이끄는 킵차크 친위군과 사촌인 안서왕 아난다가 이끄는 군대가 증원군으로 도착했다. 이듬해인 대덕 5년 (1301년), 원나라 연합군은 테케리크 전투에서 카이두의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퇴했으며, 이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카이두는 사망했다. 카말라는 이 전쟁이 끝난 직후인 대덕 6년 (1302년) 초에 사망했다.
2. 4. 칸위 계승 탈락
1294년 2월 10일 세조가 사망하자, 그의 손자들인 카말라와 테무르 중 누가 카안위를 계승할 것인지를 두고 다시 논의가 시작되었다. 상도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후계자 문제가 결정되었다.이 쿠릴타이에서는 조정의 군권을 쥐고 있던 추밀원사 바얀이 테무르의 지지를 표명했고, 다른 장군들과 카말라·테무르 형제의 어머니인 코코진 카툰도 이에 찬성했기 때문에, 카말라는 테무르에게 카안위를 양보했다.
카안위 계승 과정을 둘러싼 몇 가지 설이 전해진다. 라시드 웃딘의 집사에 따르면, 섭정으로서 쿠릴타이를 주재한 코코진 카툰은 쿠빌라이 칸의 유언을 언급하며 "누구든지 칭기즈 칸의 가르침(몽골의 중요한 율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칸에 즉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형제에게 칭기즈 칸의 가르침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묻는 시험이 치러졌다. 총명하고 언변과 기억력이 뛰어났던 테무르는 칭기즈 칸의 가르침을 유창하게 설명했지만, 언변이 서툴렀던 카말라는 말을 더듬으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왕족과 장군들은 만장일치로 테무르가 카안에 더 적합하다고 인정하여 그를 추대했다고 한다.
다른 설에 따르면, 당시 원나라의 추밀원과 군권을 장악한 대신 바얀이 동생 테무르를 강력히 지지했기 때문에 카말라가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고도 한다. 또한, 어머니 코코진 카툰이 테무르를 더 총애하고 아꼈다는 설도 있다.
원사에는 카말라가 자발적으로 양보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조께서 내게 북방 진무를 맡기셨으니, 사직을 지키라는 뜻이다. 오래도록 변방 일을 보았으니 원컨데 갑옷을 입게 해달라. 동생 테무르는 어질고 효성스러우니 마땅히 대통을 이어야 한다(昔皇祖命我鎮撫北方,以衛社稷,久歷邊事,願服厥職。母弟鐵穆耳仁孝,宜嗣大統)". 어머니 코코진 카툰이 테무르를 적극 지지한다는 소식을 접한 카말라는 카안위에 대한 야망에도 불구하고 패배를 받아들였다.
2. 5. 몽골고원 및 타타르부 관리
1291년 혹은 1292년 12월 27일, 카말라는 후계자가 없는 숙부 노무간을 대신하여 진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수뉴금인(獸鈕金印)을 받고 다시 몽골고원으로 파견되어, 몽골고원과 칭기즈 칸의 4대 행궁, 그리고 타타르 지역의 관리를 맡게 되었다. 할아버지 쿠빌라이는 몽골고원이 태조 칭기즈 칸의 본거지임을 강조하며 그 중요성을 카말라에게 각별히 당부했다. 진왕의 지위는 고비 사막 북쪽의 몽골 지역과 오르도스에 위치한 칭기즈 칸의 능묘를 관리하는 중책이었으며, 이는 몽골 본토에서 카안을 대리하는 부왕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했다.카말라는 몽골고원과 타타르부의 영지를 관리하는 동시에, 시간을 내어 통감의 내용을 몽골어로 번역하여 현지 부족장과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1294년 타타르부에 큰 흉년과 기근이 들자, 카말라는 중앙 정부의 선휘원에 구제를 요청하여 교초 1천만 관(貫)과 은, 직물을 확보하여 타타르부를 지원하는 등 민생 안정에 힘썼다.
1296년 11월 27일에는 고려의 국왕 충렬왕의 아들인 왕원(王謜, 훗날 고려 충선왕)이 카말라의 딸 계국대장공주 부다시리와 혼인하였다. 이 혼사를 위해 충렬왕은 성종 테무르에게 백마 81필을 예물로 보내기도 했다.
한편, 1297년에는 우구데이 칸국 내부에서 아리크 부케의 아들 요부쿠르와 몽케의 손자 울루스 부카 등이 이탈하여 원나라로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카이두의 세력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카이두는 원나라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고, 1298년에는 성종의 사위인 쾨르기즈를 사로잡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해, 카이두는 카말라가 이끄는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결국 퇴각하였다.
2. 6. 생애 후반
1294년 동생 테무르가 카안으로 즉위한 후, 카말라는 몽골고원에 진수(鎭守)하여 칭기즈 칸의 오르도와 군마(軍馬)를 관장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점차 정계에서는 소외되었다. 같은 해 타타르부에 흉년과 기근이 발생하자, 카말라는 선휘원에 구제를 요청하여 교초 1천만 관(貫)과 은, 직물을 받아 타타르부를 지원하였다.1296년 11월 27일, 고려의 충렬왕의 아들 왕원(王謜, 훗날 고려 충선왕)이 카말라의 딸 계국대장공주 부다시리와 혼인하였다. 충렬왕은 폐백 예물로 백마(白馬) 81필을 사신을 통해 원 성종에게 바쳤다.
1297년, 아리크 부케의 아들 요부쿠르와 몽케의 손자 울루스 부카가 오고타이 칸국을 이탈하여 원나라로 귀순하면서 카이두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후 카이두는 지속적으로 원나라를 공격했으며, 1298년에는 원 성종의 사위인 쾨르기즈를 사로잡기도 했으나, 카말라의 군대에게 패배하고 퇴각하였다.
원인을 알 수 없으나, 원사 태정제본기에 따르면 카말라는 동생 원 성종에게 "여러 대에 걸쳐 황제께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황위를 넘보지 않았으며, 본분에 따라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我累朝皇帝根底 不謀異心 不圖位次 依本分與國家出氣力行來)"고 말하며 다시는 황위를 넘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신원사에 따르면, 만년에 나이가 들자 측근들이 아들 예순 테무르에게 직무를 대행하게 할 것을 건의했으나, 카말라는 이는 천자의 소명이라며 사양했다고 전해진다.
1300년, 오고타이 칸국의 칸 카이두가 멜릭 테무르, 차가타이 칸국의 칸 두아 등 중앙아시아의 여러 왕족과 부족장들을 이끌고 몽골고원 서부를 다시 침공했다. 이때 카말라가 이끄는 고원의 군대는 카이두 군대에게 크게 밀려 거의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 카말라는 카라코룸 방면에서 카이두 군과 교전했으나 고전했다. 그러나 아들 예순 테무르가 이끄는 군대와 원 성종이 파견한 조카 카이산의 군대, 캉글리족 부대, 킵차크 칸국에서 파견한 친위군, 안서왕 아난다가 이끄는 중국 서부 군단의 도움으로 카이두 군을 겨우 격파할 수 있었다.
1301년, 세력 약화에 위기감을 느낀 카이두는 아리크 부케의 차남 멜릭 테무르, 차가타이 칸국의 칸 두아와 함께 다시 대규모 원정에 나섰다. 전쟁 초기에는 카이두 군이 우세하여 카말라와 아들 예순 테무르의 군대를 압도했으나, 카이산의 군대가 지원에 나서면서 전황이 급변했다. 1301년 8월 테케리크 전투에서 카이산이 쏜 화살에 카이두가 부상을 입었다. 두아 역시 전투 중 부상을 입고 본국으로 퇴각했으며, 카이두는 이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이 전투에서 카말라 역시 부상을 입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이듬해 사망하게 된다. 1301년, 원 성종은 변방의 신하를 보내 카말라에게 금 1천만 관을 하사했다.
카말라는 천성이 어질고 후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직접 승려들을 초빙하여 불법과 불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1302년 2월 8일(혹은 2월 2일) 카라코룸에서 전년도 전투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진왕(晉王)의 지위는 아들 예순 테무르가 계승했다.
2. 7. 사후
카말라의 장례와 부조에 대한 기록은 원사, 신원사, 원사연의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의 묘소는 기련곡(起輦谷)이라 전해지나 정확하지는 않다. 카말라가 잇단 전쟁에서 패배하고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원 성종은 이를 계기로 진왕부(晉王府)의 관할 영지를 대폭 축소하였다.카말라 사후, 아들 예순테무르가 진왕직을 계승하여 카라코룸과 주변 지역을 관리했다. 1309년부터는 다른 아들 델게르부카가 원 무종으로부터 북녕왕(北寧王) 작위와 금인을 받고 카라코룸과 그 주변 지역을 관리했으며, 아수드부 병력 500명을 받았다. 이후 델게르부카는 1311년 상녕왕(湘寧王)으로 개봉(改封)되어 1323년까지 카라코룸을 관리했다.
1311년 원 인종이 즉위한 후, 카말라에게 헌무(獻武)라는 시호를 추서하여 진헌무왕(晉獻武王)이 되었다. 이후 1324년 1월 7일, 아들 예순테무르가 황제로 즉위(태정제)하면서 아버지 카말라를 황제로 추존하였다. 이때 묘호는 현종(顯宗), 시호는 광성인효황제(光聖仁孝皇帝)로 올려졌다. 존호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치화 원년 (1328년)에 아리기바(예순 테무르의 장남)가 실각하고 톡 테무르(문종, 카이샨의 차남)가 즉위하자, 예순 테무르를 포함한 진왕가 출신 카안들은 방계의 찬탈자로 간주되어 황실 제사에서 제외되었다.
3. 가족 관계
카말라는 원 세조 쿠빌라이 칸과 차브이 카툰의 손자이며, 칭기즈 칸의 증손자이다. 아버지는 쿠빌라이 칸과 차브이 카툰의 차남인 황태자 친킴이며, 어머니는 코코진이다.
원사 현종전, 신원사 113권 등에는 카말라가 코코진 카툰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원사 116권 후비전의 코코진 카툰 소생 기록에는 카말라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한, 카말라(1263년생 추정)와 그의 동생 다르마발라(1264년생)의 출생 연도가 매우 가까운 점을 들어, 일각에서는 카말라가 코코진 카툰의 소생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3. 1. 형제
카말라는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의 차남인 황태자 친킴과 코코진 카툰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 중 장남이다. 동생으로는 다르마발라와 테무르가 있다. 테무르는 훗날 원나라의 성종으로 즉위한다.
1285년 아버지 친킴이 사망한 후, 원나라의 후계 구도에서 카말라는 장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들과 경쟁하는 상황에 놓였다. 처음에는 동생 다르마발라가 할아버지 쿠빌라이 칸에 의해 후계자로 고려되었으나, 다르마발라는 1292년에 요절하였다.
1294년 쿠빌라이 칸이 사망하자 상도에서 쿠릴타이가 열렸고, 카말라는 막내 동생인 테무르와 카안 자리를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이 쿠릴타이에서 군권을 쥐고 있던 바얀과 어머니 코코진 카툰이 테무르를 지지하면서 카말라는 카안의 자리를 동생에게 양보하였다.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 따르면, 쿠릴타이를 주재한 코코진은 쿠빌라이 칸의 유언에 따라 칭기즈 칸의 훈언(빌리크)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카안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테무르는 여러 훈언을 유창하게 설명했지만, 카말라는 눌변으로 제대로 답하지 못했고, 결국 테무르가 카안으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3. 2. 후비
- 선의숙성황후 옹기라트씨 - 예순 테무르의 생모이다. 사후 황후로 추존되었다.
- 부얀켈미슈 (비자)
- 배배해 비자
- 홀상해 비자
3. 3. 황자
카말라에게는 여러 명의 자녀가 있었다.'''아들'''
- '''예순테무르''' (몽골어: ᠶᠡᠰᠦᠨ ᠲᠡᠮᠦᠷ|Yesün Temür|mon, 也孫鐵木兒|예쑨톄무얼|zho): 진왕(晉王) 작위를 계승했으며, 이후 원나라의 제6대 황제(진종)로 즉위했다. 생모는 옹기라트 부족 출신의 부얀켈미슈(선의숙성황후)이다. 일부 기록에는 차남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 '''숭샨'''(松山|쑹산|zho, ? ~ 1309년): 양왕(梁王)에 봉해졌다. 생모가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아 서자, 정실 소생 차자, 후궁 소생, 혹은 부얀켈미슈 소생 등 여러 기록이 존재한다. 일부 기록에는 장남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 '''질리가아불화'''(迭里哥兒不花|뎨리거얼부화|zho 또는 迭裏哥不花|뎨리거부화|zho, ? ~ 1323년): 상녕왕(湘寧王)이다. 생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1309년 원 무종으로부터 북녕왕(北寧王) 작위와 금인을 받고 카라코룸 및 주변 지역을 관리했으며, 아수드부 병력 500명을 받았다. 이후 1311년 상녕왕(湘寧王)으로 고쳐 봉해졌고, 1323년까지 카라코룸을 관리했다. 일부 기록에서는 델게르 부카(델게르부카)로도 불린다.
'''딸'''
-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지궈다창궁주|zho) '''부다시리'''(寶塔實憐|바오타스롄|zho 또는 卜答失裡|부다스리|zho): 고려의 제26대 국왕 충선왕 왕장(王璋)의 왕비가 되었다. 1296년 혼인이 이루어졌으며, 충렬왕은 예물로 백마(白馬) 81필을 원 성종에게 바쳤다.
- '''수녕대장공주'''(壽寧大長公主|서우닝다창궁주|zho): 생모와 부마(남편)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 '''조국공주'''(趙國公主|자오궈궁주|zho) '''아납적납팔랄'''(兒納的納八剌|얼나디나바라|zho): 생모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조왕(趙王) 주안(注安|주안|zho)에게 시집갔다.
3. 4. 황녀
- 계국대장공주 보탑실련(寶塔實憐) 또는 복탑실리(卜答失裡)는 고려의 제26대 국왕 고려 충선왕 왕장(王璋)의 왕비가 되었다.
- 수녕대장공주(壽寧大長公主)는 생모가 알려져 있지 않다. 나이만부에 시집가 바부사(八不沙)를 낳았는데, 바부사는 후에 원 명종 코실라의 황후가 되어 원 영종 이린지발을 낳았다.
- 조국공주(趙國公主) 아납적납팔랄(兒納的納八剌) 또는 아라데나바라(阿剌的纳八剌)는 생모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옹구트 부족의 조왕(趙王) 주안(注安)에게 시집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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