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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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청군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의 고향으로, 함경남도에 위치한 군이다.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고구려, 발해를 거쳐 고려 시대에는 여진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북청부로, 고종 32년(1895년)에 군으로 개칭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읍으로 승격되기도 했으며, 1952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주요 산업은 농업, 임업, 수산업이며, 북청사자놀음이 유명하다. 교통은 도로와 철도가 발달하여, 평라선, 덕성선, 북청선 등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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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청군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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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이름 | 북청군 (北靑郡) |
로마자 표기 | Bukcheong-gun |
McCune-Reischauer 표기 | Pukch'ŏng kun |
위치 | 함경남도 |
![]() | |
행정 구역 | |
종류 | 군 |
구성 | 1읍, 2로동자구, 38리 |
군청 소재지 | 북청읍 |
통계 | |
면적 | 2375 km² |
인구 (2008년) | 161,886명 |
인구 밀도 | 자동 계산 |
기타 | |
2. 역사
구석기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신석기 시대 유물이 강상리 일대에서 발견되어 이 시기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 시대 유물도 강상리, 토성리 일대에서 발견되었다.[4]
함경도 지역은 본래 옥저가 위치했던 곳으로, 기원전 1세기에서 2세기를 전후해 고구려에 속했다. 고구려의 영토 확장으로 이곳에 군현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신라 진흥왕 때 원산 이북까지 영토가 확장되면서 북청군도 신라의 영역에 포함되었으나, 다시 고구려 땅으로 돌아갔다.
고구려 멸망 후에는 발해의 땅이 되었으며, 발해 오경(五京) 중 하나인 남경남해부(南京南海部)가 이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경남해부에 살던 여진족들은 남쪽으로 내려와 안변 등지에서 노략질을 하기도 했다. 발해 멸망 후에는 오랫동안 여진에게 점령되었으며, 북청 일대는 고려가 천리장성을 쌓을 때 성 밖에 위치했다. 고려 예종 2년(1107년) 윤관이 17만 대군으로 함흥 평야 일대를 공격하여 여진을 몰아내고 동북 9성을 설치했으나, 곧 여진에게 반환했다. 이후 원에 함몰되어 철령 이북 땅을 관할하는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관하의 고을로 삼살(三撒)이라 불렸다.[4]
1356년 고려 공민왕이 반원정책으로 북진을 단행하여 이 지역을 되찾고 안북천호방어소(安北千戶防禦所)를 설치했다. 1372년 북청주(北靑州)로 이름이 바뀌면서 처음으로 북청(北靑)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북청주에는 안무사(安撫使)가 파견되어 만호(萬戶)를 겸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의형제인 쿠룬투란티무르(古論豆蘭帖木兒)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1398년 잠시 청주(靑州)로 이름을 고쳤으나, 1417년 태종 때 같은 이름을 가진 청주목(淸州牧)과의 구별을 위해 다시 북청(北靑)으로 되돌렸다. 1427년 세종 때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고, 1466년 세조 때 북청에 진(鎭)을 설치하고 단천군, 홍원현, 이성현 등을 관할하게 하였으며, 북청부사가 함경도의 병마절도부사(兵馬節度副使)를 겸하게 하였다. 이듬해(1467년) 길주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이 진압된 뒤, 남도와 북도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북청에 남도절도사(南道節度使)의 본영(本營)을 두었다.
북청부사는 함경남도병마절제사(咸鏡南道兵馬節制使)에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겸하였는데, 1509년 중종 때 수군절도사를 감원하였다가 뒤에 다시 겸하였다. 1517년 읍성이 수축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지란의 8대손 이희당(李希唐)이 이붕수(李鵬壽) 등과 결의, 정문부(鄭文孚)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공적을 세웠으나, 이희당은 백탑(白塔)에서 전사하였다.[4] 1721년 경종 때 따로 부사를 설치하면서 판관을 없앴다.[4]
1895년 고종 때 군으로 고쳐졌으며, 일제강점기인 1931년 4월 1일 북청면이 북청읍으로 승격되었다.[6] 1942년 4월 1일 신창면이 신창읍으로 승격되었다.[7]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북청군은 3읍 11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52년 12월 북한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군의 일부가 신포군, 덕성군, 신창군 등으로 분할되었고, 북청면, 가회면, 후창면 전역과 속후면, 신북청면, 덕성면 일부가 북청군(1읍 18리)으로 구성되었다. 1974년에는 신창군이 폐지되면서 그 일부가 북청군에 편입되었다.
북청군의 행정 구역 변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연도 | 내용 |
---|---|
1914년 4월 1일 | 안산면이 풍산군에, 평포면이 홍원군에 편입. 북청군에 노덕면, 양가면, 청해면, 신창면, 거산면, 평산면, 후창면, 양화면, 신포면, 양천면, 속후면, 가회면, 상차서면, 하차서면, 덕성면, 성대면, 니곡면 설치 (17면). |
1930년 | 노덕면이 북청면으로 개칭 (17면). |
1931년 4월 1일 | 북청면이 북청읍으로 승격 (1읍 16면). |
1937년 | 신포면이 신포읍으로 승격. 양가면, 양천면 및 평산면 일부가 합병하여 신북청면 발족. 청해면이 신창면에 편입. 평산면 잔부가 속후면에 편입 (2읍 12면). |
1942년 4월 1일 | 신창면이 신창읍으로 승격 (3읍 11면). |
1945년 | 북청읍, 신포읍, 신창읍이 각각 면으로 강등 (14면). |
1952년 12월 | 북청면, 가회면, 후창면 및 속후면, 신북청면, 덕성면 일부로 북청군 설치 (1읍 18리): 북청읍, 죽상리, 청흥리, 종산리, 당우리, 중리, 양가리, 중평리, 장항리, 문동리, 부동리, 오평리, 나흥리, 봉의리, 초리, 용전리, 신상리, 안곡리, 신북청리. |
1953년 12월 2일 | 북청읍 일부에서 서리 발족. 당우리, 문동리, 초리 일부가 합병하여 지만리 발족 (1읍 20리). |
1954년 | 중리 일부에서 마산리 발족. 신북청리 일부가 신창군 양천동리, 양천서리로 분할 편입 (1읍 21리). |
1956년 9월 | 덕성군 나하대리 일부 편입 (1읍 22리). |
1957년 4월 13일 | 신북청리가 신북청노동자구로 승격 (1읍 1노동자구 21리). |
1958년 | 문동리, 초리 일부가 당우리에 편입 (1읍 1노동자구 21리). |
1974년 1월 | 신창군 신창노동자구, 건자리, 반송리, 상립석리, 상세동리, 하세동리, 평리, 보천리, 하호리, 동도리, 양천서리, 양천동리, 경안대리, 토성리, 청해리, 예승리, 덕음리, 만춘리 편입 (1읍 2노동자구 38리). |
2. 1. 고대 ~ 고려 시대
북청 지역에서는 신석기 시대 유물이 강상리 일대에서 발견되어, 이 시기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 시대 유물도 강상리, 토성리 일대에서 발견되었다.[4]함경도 지역은 본래 옥저가 위치했던 곳으로, 옥저는 기원전 1세기에서 2세기를 전후해 고구려에 속했다. 고구려의 영토 확장으로 이곳에 군현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신라 진흥왕 때 원산 이북까지 영토가 확장되면서 북청군도 신라의 영역에 포함되었으나, 다시 고구려 땅으로 돌아갔다.[4]
고구려 멸망 후에는 발해의 땅이 되었으며, 발해 오경(五京) 중 하나인 남경남해부(南京南海部)가 이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경남해부에 살던 여진족들은 남쪽으로 내려와 안변 등지에서 노략질을 하기도 했다. 발해 멸망 후에는 오랫동안 여진에게 점령되어 있었으며, 북청 일대는 고려가 천리장성을 쌓을 때 성 밖에 위치했다. 고려 예종 2년(1107년) 윤관이 17만 대군으로 함흥 평야 일대를 공격하여 여진을 몰아내고 동북 9성을 설치했으나, 곧 여진에게 반환했다. 이후 원에 함몰되어 철령 이북 땅을 관할하는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관하의 고을로 삼살(三撒)이라 불렸다.[4]
2. 2. 조선 시대
고려가 이 지역을 영토로 확보한 후 원의 지배를 받으면서 삼살(三撒)이라고 불렸다. 1356년 고려 공민왕이 반원정책으로 북진을 단행하여 이 지역을 되찾고 안북천호방어소(安北千戶防禦所)를 설치했다. 1372년 북청주(北靑州)로 이름이 바뀌면서 처음으로 북청(北靑)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북청주에는 안무사(安撫使)가 파견되어 만호(萬戶)를 겸했다.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의형제인 쿠룬투란티무르(古論豆蘭帖木兒)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1398년 태조 7년에 잠시 청주(靑州)로 이름을 고쳤으나, 1417년 태종 17년에 같은 이름을 가진 청주목(淸州牧)과의 구별을 위해 다시 북청(北靑)으로 되돌렸다. 1427년 세종 9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고, 1466년 세조 12년에 북청에 진(鎭)을 설치하고 단천군, 홍원현, 이성현 등을 관할하게 하였으며, 북청부사가 함경도의 병마절도부사(兵馬節度副使)를 겸하게 하였다. 또 판관(判官)을 두었다가 얼마 안 가서 부사는 폐해 버렸다. 이듬해(1467년) 길주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이 진압된 뒤, 남도와 북도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북청에 남도절도사(南道節度使)의 본영(本營)을 두었다.
북청부사는 또한 함경남도병마절제사(咸鏡南道兵馬節制使)에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겸하였는데, 1509년 중종 4년에 수군절도사를 감원하였다가 뒤에 다시 겸하였다. 1517년 중종 12년에 북청에 읍성이 수축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지란의 8대손 이희당(李希唐)이 이붕수(李鵬壽) 등과 결의, 정문부(鄭文孚)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켜 전장에서 공적을 세웠다. 이희당은 백탑(白塔)에서 일본군과의 교전 중에 이붕수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4]
1721년 경종 원년에 따로 부사를 설치하면서 판관을 없앴다.[4]
2. 3. 일제강점기 ~ 현대
1931년 4월 1일 북청면이 북청읍으로 승격되었다.[6] 1942년 4월 1일 신창면이 신창읍으로 승격되었다.[7]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북청군은 북청읍, 신포읍, 신창읍의 3읍과 11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52년 12월 북한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군의 일부가 신포군, 덕성군, 신창군 등으로 분할되었고, 북청면, 가회면, 후창면 전역과 속후면, 신북청면, 덕성면 일부가 북청군(1읍 18리)으로 구성되었다. 1974년에는 신창군이 폐지되면서 그 일부가 북청군에 편입되었다.
북청군의 행정 구역 변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연도 | 내용 |
---|---|
1914년 4월 1일 | 안산면이 풍산군에, 평포면이 홍원군에 편입. 북청군에 노덕면, 양가면, 청해면, 신창면, 거산면, 평산면, 후창면, 양화면, 신포면, 양천면, 속후면, 가회면, 상차서면, 하차서면, 덕성면, 성대면, 니곡면 설치 (17면). |
1930년 | 노덕면이 북청면으로 개칭 (17면). |
1931년 4월 1일 | 북청면이 북청읍으로 승격 (1읍 16면). |
1937년 | 신포면이 신포읍으로 승격. 양가면, 양천면 및 평산면 일부가 합병하여 신북청면 발족. 청해면이 신창면에 편입. 평산면 잔부가 속후면에 편입 (2읍 12면). |
1942년 4월 1일 | 신창면이 신창읍으로 승격 (3읍 11면). |
1945년 | 북청읍, 신포읍, 신창읍이 각각 면으로 강등 (14면). |
1952년 12월 | 북청면, 가회면, 후창면 및 속후면, 신북청면, 덕성면 일부로 북청군 설치 (1읍 18리): 북청읍, 죽상리, 청흥리, 종산리, 당우리, 중리, 양가리, 중평리, 장항리, 문동리, 부동리, 오평리, 나흥리, 봉의리, 초리, 용전리, 신상리, 안곡리, 신북청리. |
1953년 12월 2일 | 북청읍 일부에서 서리 발족. 당우리, 문동리, 초리 일부가 합병하여 지만리 발족 (1읍 20리). |
1954년 | 중리 일부에서 마산리 발족. 신북청리 일부가 신창군 양천동리, 양천서리로 분할 편입 (1읍 21리). |
1956년 9월 | 덕성군 나하대리 일부 편입 (1읍 22리). |
1957년 4월 13일 | 신북청리가 신북청노동자구로 승격 (1읍 1노동자구 21리). |
1958년 | 문동리, 초리 일부가 당우리에 편입 (1읍 1노동자구 21리). |
1974년 1월 | 신창군 신창노동자구, 건자리, 반송리, 상립석리, 상세동리, 하세동리, 평리, 보천리, 하호리, 동도리, 양천서리, 양천동리, 경안대리, 토성리, 청해리, 예승리, 덕음리, 만춘리 편입 (1읍 2노동자구 38리). |
함경산맥이 군을 관통하기 때문에 북청군은 산지가 많은 지형이나, 해안가를 따라서 좁은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다. 최고봉은 검덕산이다. 군 내부에 남대천과 보천천이 흐르며, 이 일대는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온화한 기후를 띤다.[1]
신창로동자구
3. 지리
남쪽으로 신포시, 서쪽으로 홍원군, 북쪽으로 덕성군, 동쪽으로 리원군과 접하며, 남쪽으로는 동해에 접해 있다.[1]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은 완전히 산악 지형이다.[2] 함경산맥이 군을 관통하며, 주요 하천으로는 남대천과 보천천이 있다.[2] 함경남도 내에서는 비교적 온화한 기후를 보인다.[2] 군역은 동해에 면하지만, 군의 중심지인 북청읍은 내륙부에 위치한다.[3] 함경산맥에 둘러싸인 산악 지형이며, 덕성군에서 발원하는 남대천이 남북으로 관통하며 좁은 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남대천은 하류에서 신포시와의 경계가 되어 동해로 흘러든다.[3]
4. 행정 구역
건자리, 경안대리, 당우리, 덕음리, 동도리, 라하대리, 라흥리, 양가리, 용전리, 마산리, 만춘리, 문동리, 반송리, 보천리, 봉의리, 부동리, 상립석리, 상세동리, 서리, 신상리, 안곡리, 양천동리, 양천서리, 예승리, 오평리, 장항리, 종산리, 죽상리, 중리, 중평리, 지만리, 청해리, 청흥리, 초리, 토성리, 평리, 하세동리, 하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