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사이고 다카모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쓰마 번의 하급 무사 출신으로, 메이지 유신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사쓰마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인정을 받아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며, 존황양이 운동과 막부 타도에 기여했다. 사쓰마-조슈 동맹을 성사시키고,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으며, 신정부에서 징병제 도입과 같은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정한론에 대한 갈등으로 정부를 떠나 가고시마로 돌아갔고, 사립 학교를 설립하여 무사들을 교육했다. 이후 서남 전쟁을 주도했으나 패배하여 자결했다. 그의 좌우명은 경천애인(敬天愛人)이며, 일본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사이고 다카모리 - 금문의 변
    금문의 변은 1864년 조슈번이 정치적 영향력 회복을 위해 교토에서 일으킨 무력 충돌로, 막부군에 의해 진압되어 조슈번의 몰락을 가져왔으나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 사이고 다카모리 - 유신십걸
    유신십걸은 일본 메이지 유신에 기여한 주요 인물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이 포함되었으며 정부 수립에 핵심 역할을 수행했지만, 일부는 암살되거나 처형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 일본의 양명학자 - 오쿠보 도시미치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쓰마 번 출신의 일본 정치가 오쿠보 도시미치는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와 함께 막부 타도를 이끌고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근대화를 추진했으나, 강력한 권력과 정책 추진 방식으로 비판받았으며 사족에게 암살당했다.
  • 일본의 양명학자 - 오시오 헤이하치로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1793년에 태어나 부패에 맞서 싸우다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자결한 일본의 양명학자이다.
사이고 다카모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C. 나카가와가 그린 사이고 다카모리 초상화, 1870년대 경
C. 나카가와가 그린 사이고 다카모리 초상화, 1870년대 경
본명사이고 고키치
다른 이름사이고 난슈
사이고 기치노스케
기쿠치 겐고
출생일1828년 1월 23일
출생지가고시마, 사쓰마 번
사망일1877년 9월 24일
사망지가고시마, 일본 제국
묘소난슈 묘지, 가고시마 현, 일본
국적사쓰마 번
별명오니시고
난슈옹
사이고돈
신정대총독
정벌대원수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871년 ~ 1873년
최종 계급육군 대장 (원래는 육군 원수)
주요 전투보신 전쟁
도바-후시미 전투
세이난 전쟁
구마모토 성 공방전
다바루자카 전투
시로야마 전투 (전사)
개인 정보
배우자이주인 스가 (1852년 결혼, 1854년 이혼)
오토마 가네 "아이카나" (1859년 결혼, 1862년 이혼)
이와야마 이토코 (1865년 결혼)
자녀사이고 기쿠지로 (아들)
사이고 기쿠소 (딸)
사이고 도라타로 (아들)
사이고 우마지로 (아들)
사이고 도리조 (아들)
가족사이고 기치베이 (아버지)
시이하라 마사 (어머니)
사이고 주도 (형)
사이고 기치지로 (형)
사이고 고헤이 (형)
이치키 고토 (여동생)
사이고 다카 (여동생)
사이고 야스 (여동생)
로마자 표기
로마자 표기Saigō Takamori
기타 정보
교육교육자
웹사이트https://www.japantimes.co.jp/news/2016/12/10/national/history/meiji-restoration-leaders-lessons-sincerity/

2. 생애

사쓰마 번의 하급 번사였던 사이고 기치베 다카모리(西郷吉兵衛隆盛|사이고 기치베 다카모리일본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고키치(小吉|고키치일본어)이며, 통칭은 기치노스케(吉之介|기치노스케일본어), 젠베에(善兵衛|젠베에일본어), 기치노스케(吉之助|기치노스케일본어) 순으로 바뀌었다. 호는 난슈(南洲|난슈일본어)이다. 원래 이름은 다카나가(隆永|다카나가일본어)였으나, 나중에 다케오(武雄|다케오일본어), 다카모리로 바꾸었다. 다카모리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과 같은데, 이는 왕정복고의 식전에서 위계를 수여받을 때, 친구인 요시이 도모자네가 실수로 아버지의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성인이 될 무렵 그의 신장은 180cm였으며, 몸무게는 90kg였다고 한다.

가고시마 시에 있는 생가 부근


본 항목에서 연월일은 메이지 5년 12월 2일까지는 구력인 천보력, 메이지 6년 1월 1일 이후는 신력인 그레고리력을 사용하며, 일본식 연호를 먼저, 그 뒤 괄호 안에 그레고리력을 표기한다.

사이고 가문의 초대는 구마모토에서 가고시마로 이주했으며, 가고시마에 온 후 7대가 아버지 사이고 기치베, 8대가 요시노스케 다카모리이다. 차남은 보신 전쟁에서 전사한 사이고 요시지로(다카히로), 삼남은 메이지 정부의 중진인 사이고 쥬도(통칭 신고, 호 류안), 사남은 세이난 전쟁에서 전사한 사이고 코베에(다카오, 다카타케)이다. 오야마 이와오(야스케)는 사촌 동생이며, 카와무라 준기(요주로)도 친척이다.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눈에 띄어 발탁되어 그의 곁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으나, 나리아키라가 급사하면서 실각하여 아마미오시마에 유배되었다. 이후 복귀했지만, 시마즈 히사미쓰와 사이가 좋지 않아 다시 오키나에라부 섬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코마쓰 세이렌과 오쿠보 도시미치의 도움으로 복귀하여 겐지 원년(1864년) 금문의 변 이후 활약, 사쓰초 동맹 성립과 왕정복고에 성공하고, 보신 전쟁을 주도했다. 에도 총공격을 앞두고 가쓰 가이슈 등과 항복 협상을 벌여 막부 측의 항복 조건을 받아들여 총공격을 중지했다(에도 무혈 개성).

그 후, 사쓰마로 귀향했지만, 메이지 4년(1871년) 산기로 신정부에 복직했다.[16] 육군대장·근위도독을 겸임했다.[17] 1873년(메이지 6년),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이와쿠라 사절단의 외유 중에 발생한 조선과의 국교 회복 문제에서 개국을 권하는 견한사절로 자신이 조선에 갈 것을 제안하고,[18] 귀국한 오쿠보 등과 대립, 메이지 6년 정변으로 에토 신페이,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과 함께 하야(下野),[19][20] 다시 가고시마로 돌아가 사립학교에서 교육에 전념한다. 사가의 난, 신푸렌의 난, 아키즈키의 난, 하기의 난사족의 반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1877년(메이지 10년) 사립학교 학생들의 폭동[81]에서 시작된 세이난 전쟁의 지도자가 되지만, 패하여 시로야마에서 자결했다.

사후 십수 년이 지나 명예를 회복하고, 위계는 정3위를 추증받았다.[111] 공적으로, 계승자인 사이고 토라타로가 후작이 된다.[21]

2. 1. 어린 시절과 청년기

분세이 10년 12월 7일(1828년 1월 23일), 사쓰마 국가고시마성 아래 가지야초 야마노구치 바바(시모가지야초 방향)에서, 오간죠가타 쇼토우인 사이고 구로우 다카모리(후에 키치베에 다카모리로 개명, 록 47석여)의 장남(첫째 아들)으로 태어났다. 사이고 씨의 가격은 오쇼네이요였으며, 맨 아래에서 두 번째 신분인 하급 번사였다. 본성은 후지와라 성( 계보 참조)을 칭하지만 명확하지 않다. 선조는 히고 국의 키쿠치 씨의 서가로 여겨지며, 그 가신이었다고 전해진다. 에도 시대겐로쿠 연간에 시마즈 씨가 지배하는 사쓰마 번의 번사가 되었다.

어릴 적 이름은 '''고키치'''(小吉|고키치일본어)이며, 통칭은 기치노스케(吉之介|기치노스케일본어), 젠베에(善兵衛|젠베에일본어), 기치노스케(吉之助|기치노스케일본어) 순으로 바뀌었다. 호는 '''난슈'''(南洲|난슈일본어)이다. 원래 이름은 다카나가(隆永|다카나가일본어)였으나, 나중에 다케오(武雄|다케오일본어), 다카모리로 바꾸었다. 다카모리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과 같은데, 이는 왕정복고의 식전에서 위계를 수여받을 때, 친구인 요시이 도모자네가 실수로 아버지의 이름을 올렸기 때문에, 이후 아버지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쓰게 되었다.[2]

성인이 될 무렵에 그의 신장은 180cm였으며, 몸무게는 90kg였다고 한다.

덴포 10년(1839년), 고우츄우(郷中) 동료들과 매달 하는 신사 참배를 갔을 때, 다른 고우츄우와 친구들이 싸울 뻔하자 싸움을 중재했는데, 상구의 고우츄우가 뽑은 칼이 사이고의 오른팔 안쪽 신경을 잘라버렸다. 사이고는 사흘 동안 고열에 시달렸으나 목숨은 건졌지만, 칼을 쥘 수 없게 되어 무술을 포기하고, 학문으로써 살아가려고 결심했다. 칼을 쥘 수 없게 된 후에도 무술 측면에서는 스모를 배웠다.[22]

덴포 12년(1841년), 원복하고 요시노스케 다카나가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 무렵 하가지야초(시타카지야마치) 고우츄우의 니세이구미(니세코)로 승진했다.

2. 2. 군방서역(郡方書役) 시대

홍화 원년(1844년), 군봉행(郡奉行) 삭전이제(迫田利済) 휘하에서 군방서역조(郡方書役助)를 맡았고, 어소성(御小姓) 여(與, 오코쇼아즈카리 일번조 소여팔번)에 편입되었다. 홍화 4년(1847년), 향중(郷中)의 이재두(二才頭)가 되었다. 가영 3년(1850년), 오유라 소동(お由羅騒動)으로 적산인부(赤山靭負)(유키에)[23]가 할복하였고, 적산의 어용인(御用人)이었던 아버지로부터 할복 상황을 듣고 피묻은 옷을 보았다. 이후, 세자 시마즈 나리아키(島津斉彬)의 습봉을 원하게 되었다.

이토 시게에몬(伊藤茂右衛門)에게 양명학을, 후쿠쇼지(福昌寺)(시마즈가의 보다이지)의 무참화상에게 선(禪)을 배웠다. 이 해, 적산 등의 유지를 잇기 위해, 근사록붕괴(近思録崩れ)의 칫푸 기야스(秩父季保)가 애독했던 『근사록(近思録)』 윤독 모임을 오쿠보 마사스케(大久保正助)(도시미치), 세쇼 키사자에몬(税所喜三左衛門)(아츠시), 요시이 코스케(吉井幸輔)(토미사네), 이지치 류에몬(伊地知竜右衛門)(마사하루), 아리무라 슌사이(有村俊斎)(카이에다 신기(海江田信義))) 등과 함께 만들었다.[24]

2. 3. 시마즈 나리아키라 시대

사쓰마 번의 하급 번사였던 사이고 기치베 다카모리( 西郷吉兵衛隆盛일본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고키치(小吉일본어)이며, 통칭은 기치노스케(吉之介일본어), 젠베에(善兵衛일본어), 기치노스케(吉之助일본어) 순으로 바뀌었다. 호는 난슈(南洲일본어)이다. 원래 이름은 다카나가(隆永일본어)였으나, 나중에 다케오(武雄일본어), 다카모리로 바꾸었다. 다카모리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과 같은데, 이는 왕정복고의 식전에서 위계를 수여받을 때, 친구인 요시이 도모자네가 실수로 아버지의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성인이 될 무렵 그의 신장은 180cm였으며, 몸무게는 90kg였다고 한다.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눈에 띄어 발탁되어, 당대 최고의 개명파 다이묘였던 나리아키라의 곁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홍화 원년(1844년), 군봉행 삭전이제(迫田利済) 휘하에서 군방서역조(郡方書役助)를 맡았고, 어소성(御小姓)에 편입되었다. 홍화 4년(1847년), 향중(郷中)의 이재두(二才頭)가 되었다. 가영 3년(1850년), 오유라 소동(お由羅騒動)에서 적산인부(赤山靭負)(유키에)[23]가 할복하였고, 아버지로부터 할복 상황을 듣고, 피묻은 옷을 보았다. 이후, 세자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습봉을 원하게 되었다.

이토 시게에몬(伊藤茂右衛門)에게 양명학을, 후쿠쇼지(시마즈가의 보다이지)의 무참화상에게 선(禪)을 배웠다. 이 해, 근사록붕괴(近思録崩れ)의 칫푸 기야스(秩父季保)가 애독했던 『근사록(近思録)』을 윤독하는 모임을 오쿠보 마사스케(도시미치), 세쇼 키사자에몬(아츠시), 요시이 코스케(토미사네), 이지치 류에몬(마사하루), 아리무라 슌사이(카이에다 신기(海江田信義)) 등과 함께 만들었다.[24]

나리아키라의 급사로 실각하여 아마미오시마(奄美大島)에 유배(流配)된다. 그 후 복귀하지만, 시마즈 히사미쓰와 사이가 좋지 않아 다시 오키나에라부지마(沖永良部島)에 유배(流罪)를 당한다.

안세이 5년 7월 27일(1858년 9월 4일), 교토에서 시모츠마 사다아키의 사망 소식을 듣고 순사하려 했으나, 게쓰쇼(月照)의 설득으로 시모츠마의 유지를 잇기로 결심했다. 이후 여러 번 유지들과 함께 로쥬(老中) 이이 나오스케를 배척하고, 막정 개혁을 꾀했다. 그러나 9월 9일 우메다 운핀(梅田雲浜)이 체포되고 존황양이파에 위기가 닥치자, 게쓰쇼를 데리고 후시미(伏見)로 탈출하여, 가고시마로 보냈다.

9월 16일, 다시 상경하여 여러 의사들과 함께 거병을 도모했으나, 포리(捕吏)의 추적이 심해져 9월 24일 오사카를 출항하여 시모노세키(下関)를 거쳐 10월 6일 가고시마로 돌아왔다. 포리의 눈을 속이기 위해 사이고 산스케(西郷三助)로 개명했다. 11월, 히라노 쿠니오미(平野国臣)과 함께 게쓰쇼가 가고시마에 도착했으나, 막부의 추적을 두려워한 번 당국은 게쓰쇼 등을 히우가 국(日向国)으로 추방한다는 명목으로 도중에서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게쓰쇼·히라노 등과 함께 배를 탔으나, 앞날을 비관하여 16일 밤, 류가스이(竜ヶ水) 앞바다에서 게쓰쇼와 함께 입수했다. 곧 히라노 등이 구조했으나, 게쓰쇼는 사망했고, 사이고는 소생했다. 번 당국은 죽은 것으로 처리하고, 막부의 포리에게 사이고와 게쓰쇼의 무덤을 보여주었다.

12월, 번 당국은 막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사이고의 직책을 면하고, 아마미오시마(奄美大島)에 잠적시키기로 했다. 12월 말, 키쿠치 겐고[30]로 개명하여 안세이 6년 1월 4일(1859년 2월 6일), 야마가와항(山川港)을 출항하여, 나세를 거쳐 1월 12일 류쿄우손(龍郷村) 아단자키(阿丹崎)에 도착했다. 당시 류쿄우에는 야이리 동산(屋入銅山)이 있었고, 현지의 유력자로 사쓰마번으로부터 시족의 신분을 받은 타바타씨(田畑氏)(류씨(龍氏))가 동산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사이고가 그 직책에 발탁되어 아마미오시마에 파견되었다. 섬에서는 미타마 신코(美玉新行)의 빈집을 빌려 자취했다. 11월, 류가[31] 일족, 사에이시(佐栄志)의 딸 토마(아이카나(愛加那))를 소개받아 섬 아내로 맞이했다. 섬에 온 초창기에는 유인으로서의 대우를 받고 고독에 시달렸다. 하지만 섬 아이 3명의 교육을 의뢰받고, 마치 요코메(間切横目) 후지나가(藤長)로부터 친절을 받고, 섬 아내를 맞이하면서 점차 섬 생활에 적응하여, 만엔 2년 1월 2일(1861년 2월 11일)에는 키쿠지로가 태어났다.

2. 4. 유배 생활

분큐 원년(1861년) 10월, 히사미쓰는 공무주선(公武周旋)에 나설 결의를 하고 요로중신(要路重臣)을 경질했지만, 교토에 연줄이 없어, 소납도 역인 오쿠보, 호리지로 등의 건의로 사이고에게 소환장을 보냈다. 사이고는 11월 21일 이를 받고, 섭섭했던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후, 애가나의 생활이 꾸려지도록 한 다음, 분큐 2년 1월 14일(1862년 2월 12일) 아단자키(阿丹崎)를 출발하여, 구치나가루베섬・마쿠라자키를 거쳐 2월 12일에 가고시마에 도착했다. 2월 15일, 살아있는 것이 막부에 발각되지 않도록 사이고 산스케(西郷三助)에서 오시마 사에몬(大島三右衛門)[33]으로 개명했다. 같은 날, 히사미쓰에게 불려갔지만, 히사미쓰가 무관이고, 나리아키라처럼 인망이 없다는 이유로 상경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또한 “어전(御前)에는 두렵지만 지방 사람(地ゴロ)[34]”이기 때문에 주선은 무리라고 말했기에 히사미쓰의 미움을 샀다. 일단 동행을 거절했지만, 오쿠보의 설득으로 상경을 승낙하고, 구직(舊職)에 복귀했다. 3월 13일, 시모노세키(下関)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고, 무라타 신파치를 데리고 선발대로 출발했다.

시모노세키의 시라이시 마사이치로(白石正一郎) 집에서 히라노 구니오미로부터 교토와 오사카의 긴박한 정세를 들은 사이고는, 3월 22일, 무라타 신파치와 모리야마 신조를 데리고 오사카를 향해 출항하여, 29일에 후시미에 도착하여, 격파지사(激派志士)들의 교토 방화와 거병을 막으려고 시도했다. 4월 6일 히메지(姫路)에 도착한 히사미쓰는, 사이고가 대기 명령을 어긴 것과, 호리지로와 우미에다 신기로부터 받은 사이고의 지사 선동 보고에 격노했다. 사이고 등 3명을 체포하여, 10일, 가고시마를 향해 배로 호송시켰다.

한편, 낭사 진무(浪士鎮撫)의 조지(朝旨)를 받은 히사미쓰는, 후시미의 테라다야에 집결한 마키 야스오미, 아리마 신시치 등의 격파지사를 진무하기 위해, 4월 23일에 나라하라 시게루와 오야마 가쿠노스케 등을 테라다야에 파견했다. 나라하라는 격파들을 설득했지만 듣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아리마 신시치 등 8명을 상의토치(上意討ち)했다(테라다야 소동). 이때 거병을 모의하고, 테라다야 등에 분숙하고 있던 격파들 중에는, 삼남인 신고(信吾), 사촌동생인 오야마 이와(야스케) 외에 시노하라 구니모토・나가야마 야이치로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호송되어 야마카와항(山川港)에서 대기 중이던 6월 6일, 사이고는 오시마 기스케(大島吉之助)로 개명하게 되고, 도쿠노시마로 원도(遠島), 무라타 신파치는 기카이섬으로 원도가 명령되었다. 미처벌인 모리야마 신조는 배에서 자결했다.

3.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사쓰마번의 하급 무사였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눈에 띄어 발탁되었고, 당대 최고의 개명파 다이묘였던 나리아키라의 곁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나리아키라가 급사하면서 실각하여 아마미오시마에 유배되었다. 이후 복귀했지만, 새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의 친부이자 사실상 최고 권력자였던 시마즈 히사미쓰와 사이가 좋지 않아 다시 오키노에라부섬에 유배되었다.

1864년 금문의 변 이후 오쿠보 도시미치고마쓰 기요카도 등의 도움으로 복귀하여, 사쓰초 동맹의 성립과 왕정복고에 성공하고, 보신 전쟁을 주도했다. 에도 총공격을 앞두고 가쓰 가이슈 등과 항복 협상을 벌여 막부 측의 항복 조건을 받아들여 총공격을 중지했다(에도 무혈 개성).

1871년 신정부에 복귀하여 산기(参議)가 되었고,[16] 이후 육군대장(陸軍大将)·근위도독(近衛都督)을 겸임했다.[17] 1873년 정한론 논쟁에서, 사이고는 조선메이지 천황일본 제국의 국가 원수로 인정하지 않고 일본 사절에게 모욕적인 대우를 했다는 이유로 조선과의 전쟁을 주장했다.[6] 그는 직접 조선을 방문하여 고의로 모욕적인 행동을 해 전쟁의 명분을 만들겠다는 제안까지 했다.[6]

정한론 논쟁. 사이고 다카모리가 중앙에 앉아 있다. 1877년 목판화


그러나 이와쿠라 사절단을 통해 서구 열강과의 국력 차이를 확인한 오쿠보 도시미치 등은 예산 문제 등을 이유로 사이고의 계획에 반대했다. 결국 사이고는 메이지 6년 정변으로 에토 신페이,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과 함께 모든 정부 직책에서 사임하고 고향 가고시마로 돌아갔다.[19][20]

3. 1. 사쓰마-조슈 동맹(薩長同盟)

1866년 사쓰마번조슈번의 동맹(사쓰마-조슈 동맹)을 협상하였다.[16]

3. 2. 왕정복고(王政復古)와 보신 전쟁(戊辰戦争)

40세가 되기 전, 사이고는 교토에 주둔했던 사쓰마번 군대의 사령관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사쓰마번 내 결정자 중 하나로서, 전국적으로 천황당원들과 널리 연락하며 쇼군 정부를 무너뜨리기로 하였다. 1866년 사쓰마번조슈번의 연합(사쓰초 동맹)을 협상하기도 하였다. 1867년 11월 8일 쇼군을 무력으로 사임시켰다.

사이고는 이 사건으로 국민적 영웅으로 부상했다. 사이고는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와 함께 쿠데타, 즉 메이지 유신을 일으켰다. 1868년 1월 3일 새벽, 사이고가 지휘하는 군인들이 왕궁의 문을 지켰다. 명사 의원 회의는 어린 메이지 천황에게 일본의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포고령을 읽도록 하였다.

쇼군의 군대와 사쓰마 번, 조슈번이 공급한 천황 군대 간의 전쟁(보신 전쟁)이 일어나자, 5월 사이고는 참모 총장으로서 에도의 항복을 성공적으로 준비하였다. 이후 11월까지 쇼군의 후원자들을 대항하는 전투를 지휘하였다.

사쓰마번의 하급 무사였던 사이고는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눈에 띄어 발탁되었고, 당대 최고의 개명파 다이묘였던 나리아키라의 곁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나리아키라가 급사하며 실각, 아마미오시마에 유배되었다. 이후 복귀했지만, 새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의 친부이자 사실상 최고 권력자였던 시마즈 히사미쓰와 사이가 좋지 않아 다시 오키노에라부섬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가로 고마쓰 기요카도(帯刀)와 오쿠보 도시미치의 도움으로 복귀, 겐지 원년(1864년) 금문의 변 이후 활약하여 사쓰초 동맹의 성립과 왕정복고에 성공하고, 보신 전쟁을 주도했다. 에도 총공격을 앞두고 가쓰 가이슈 등과 항복 협상을 벌여 막부 측의 항복 조건을 받아들여 총공격을 중지했다(에도 무혈 개성).

겐지 원년(1864년) 7월 23일, 조슈번 토벌 칙명(제1차 조슈 정벌)이 내려지고, 24일에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서국 21개 번에 출병을 명령하자, 사쓰마 번은 세력 신장을 꾀하고자 이에 응했다. 8월, 사국 연합 함대 시모노세키 포격 사건이 일어났다. 이어 조슈 번과 사국 연합 함대 간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막부와 사국 대표 간 배상 협정 조인도 이루어졌다. 이 기간 중 9월 중순, 사이고는 오사카의 전칭사에서 가쓰 가이슈를 만나[49] 그의 의견을 참고하여 조슈에 대해 강경책 대신 완화책을 쓰기로 했다. 10월 초순, 어측역(御側役)·대대소반[50]이 되었고, 오시마 기치노스케(大島吉之助)[51]에서 사이고 기치노스케(西郷吉之助)로 개명했다.

10월 12일, 사이고는 정장군(征長軍) 참모에 임명되었다. 24일, 오사카에서 정장총독 도쿠가와 요시카쓰를 알현하여 의견을 진술, 조슈 번 처분을 위임받았다. 요시이 도모자네, 세쇼 아쓰시를 대동하고 이와쿠니에서 조슈 측 대표 요시카와 쓰네타다를 만나 조슈 번 삼가로(三家老)의 처분(할복)을 요구했다. 이후 도쿠가와 요시카쓰에게 경과를 보고하고, 고쿠라로 가서 부총독 마쓰다이라 시게아키와 사쓰마 번 총독 시마즈 히사아키에게도 경과를 보고했다. 결국 사이고의 타협안에 따라 수습이 이루어졌고, 12월 27일 정장총독이 출병 각 군에 철병을 명령하며 정벌 행동이 끝났다.

3. 3. 메이지 신정부 참의(參議) 시절

1871년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부에 들어가 신 정부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여러 번에서 봉건제를 폐지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다조칸(국가 회의)에 임명되어 기도 다카요시와 함께 새로운 프로그램을 세우는 책임을 맡았다.[16] 이후 육군 대장 및 근위도독을 겸임했다.[17]

오쿠보 도시미치 등 다른 인물들이 메이지 유신 수립에 더 적극적이었지만, 사이고는 핵심적인 역할을 유지했으며, 그의 협력은 판적폐지와 징병제 도입에 필수적이었다.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이 해외를 시찰(1871~1873)하는 동안에는 임시 정부를 책임졌다.

당시 징병제 도입에 관한 논의가 활발했다. 유럽 군대를 연구한 정부 인사들은 전국적인 군사 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으나, 일각에서는 무사 계급의 특권을 빼앗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는 반론도 있었다. 이 논쟁이 격화되는 동안 사이고는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사이고는 일본의 근대화와 서구와의 통상 개방에 초기에는 반대했으며, 철도 건설보다는 군사력 강화에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

1873년 정한론 논쟁에서, 사이고는 조선메이지 천황일본 제국의 국가 원수로 인정하지 않고 일본 사절에게 모욕적인 대우를 했다는 이유로 조선과의 전쟁을 주장했다. 그는 직접 조선을 방문하여 고의로 모욕적인 행동을 해 전쟁의 명분을 만들겠다는 제안까지 했다.[6]

그러나 다른 일본 지도자들은 예산 문제와 이와쿠라 사절단을 통해 확인한 서구 열강과의 국력 차이를 이유로 사이고의 계획에 반대했다. 결국 사이고는 항의의 표시로 모든 정부 직책에서 사임하고 고향 가고시마로 돌아갔다.

1873년(메이지 6년),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이와쿠라 사절단이 해외에 있는 동안 조선과의 국교 회복 문제가 발생했다. 사이고는 자신이 직접 조선에 건너가 개국을 권유하는 사절로 가겠다고 제안했으나,[18] 귀국한 오쿠보 등과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메이지 6년 정변으로 에토 신페이,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과 함께 정부를 떠나게 되었고,[19][20] 다시 가고시마로 돌아가 사립학교에서 교육에 힘썼다.

3. 4. 정한론(征韓論) 논쟁

사이고는 1873년 정한론 논쟁에서, 한국이 메이지 천황일본 제국의 국가 원수로 인정하지 않고, 통상 및 외교 관계를 수립하려는 일본 사절들에게 모욕적인 대우를 했다는 이유로 일본이 한국과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 그는 직접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인들이 그를 죽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모욕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전쟁의 명분''을 만들겠다고 제안했다.[6]

사이고는 일본이 사무라이 정신을 잃을 것이라고 불안감을 느껴 1873년 조선 정벌론, 즉 정한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조선의 태도가 일본을 욕보인 것으로서 징벌해야 한다고 느꼈다. 이 주장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국가 회의와 싸우며, 자신이 조선에 특별 교섭인으로 가서 명시적으로 뛰어난 논쟁들을 진정시키겠다고 하였다. 거기에서 자살하면서, 전쟁 선언을 위한, 일본에 질문적이지 않은 정당화를 일본에 제공하겠다고 획책하였다. 사이고는 자신의 국가에 자신의 인생을 바치는 것이 그의 가장 친애하는 욕망이라는 이론에 답변을 하였다. 계속되는 간청들 후, 정부 인사들이 서양을 여행하고 돌아오기 전인 8월 18일에 천황에 의하여 자신의 계획이 찬성되는 성공을 거두었다. 결정에서 간담이 서늘해지자, 외국 모험에 국내적 발전이 먼저임을 논의한 인사들에 의하여 사이고의 계획을 취소시킬 수 있었다.

다른 일본 지도자들은 예산 문제와 이와쿠라 사절단에서 목격한 서구 국가들에 비해 일본의 약점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러한 계획에 강력히 반대했다. 사이고는 항의의 표시로 모든 정부 직책에서 사임하고 고향인 가고시마로 돌아갔다.[6]

4. 가고시마 귀향과 사립 학교(私学校) 설립

1876년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 사무라이 반란이 시작되었을 때, 가고시마는 그 논란의 중심지가 될 위험이 있었다.[81]

사이고 다카모리 자살지점 비석(南洲翁終焉之地之碑)
가고시마 시


가고시마로 돌아온 몇 달 후, 사이고는 군사학과 육체적 훈련을 중요시하는 자신의 사립 학교를 열었다. 일본 전국에서 몰려든 전직 무사들이 그의 밑에서 공부하였으며, 1877년에는 학생 수가 20,000명으로 늘었다. 사이고에게는 이것이 공직에서 일할 젊은이들을 훈련시키는 단순한 학교였으나, 도쿄에 있는 정부에게는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 모든 번의 행정이 번지사들의 통치에서 사이고의 후원자들 손으로 넘어갈 위협 때문이었다.

5. 서남전쟁(西南戦争)

1877년 메이지 유신 이후 사족들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사가의 난, 신푸렌의 난, 아키즈키의 난, 하기의 난 등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가고시마로 돌아가 시가쿠코를 설립하여 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사립학교 학생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서남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사이고는 이 전쟁의 지도자가 되었지만 결국 패배하여 시로야마에서 자결하였다.[81]

도쿄 우에노 공원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그의 좌우명은 "경천애인(敬天愛人)"이었다.

5. 1. 발발 배경

1877년 1월 29일 사이고의 제자들은 가고시마의 군수 공장과 해군 기지를 공격하였다. 산에서 사냥을 즐기고 있던 사이고는 망설이며 돌아왔다. 그가 가고시마에 도착했을 때, 그의 후원자들은 군수 공장에서 추가적인 군사 행위를 위한 군수물자를 준비하기 위해 작전을 꾸미고 있었으며, 사이고는 반란의 지도자로 추대되는 것에 동의하였다.[81]

정부를 비판하며 도쿄로 행진한다는 계획과 함께 2월 15일 사이고 군대는 전쟁을 시작하였다. 정부군은 구마모토번에서 사이고 군대의 행진을 가로막았고, 이후 6개월 동안 전면적인 전쟁이 이어졌다. 사이고의 옛 친구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당시 전쟁부 장관이자 사이고 군대에 맞서는 야전군 사령관이었다.

5. 2. 경과 및 최후

1877년 1월 29일 사이고의 제자들은 가고시마의 군수 공장과 해군 기지를 공격했다. 산에서 사냥을 즐기던 사이고는 망설이며 돌아왔다. 가고시마에 도착했을 때, 후원자들이 군수 공장에서 군수물자를 준비하기 위한 작전을 꾸미고 있었고, 사이고는 반란의 지도자로 추대되는 데 동의했다.

2월 15일 사이고 군대는 정부를 비판하며 도쿄로 행진하는 계획과 함께 전쟁을 시작했다. 정부군은 구마모토번에서 사이고 군대의 행진을 가로막았고, 이후 6개월 동안 전면적인 전쟁이 이어졌다. 사이고의 옛 친구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당시 전쟁부 장관이자 사이고 군대에 맞서는 야전군 사령관이었다.

5월에 수세였던 사이고는 여름에 패전을 거듭했고, 9월에는 패색이 짙어졌다. 그는 몇백 명의 부하를 이끌고 다시 가고시마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도시 전경이 보이는 언덕에 진지를 구축했다. 9월 24일 정부군이 최후 공격을 가했고, 부상을 당한 사이고는 자결했다. 일설에 그의 부하가 목을 베었다고도 한다. 무사와 정부군 양쪽에서 12,000명 사상자와 20,000명 부상자를 냈다.

이후 도쿄에서 사이고를 따르기 위해 사직한 사무라이들을 위해 시가쿠코라는 사설 군사학교가 가고시마에 설립되었다. 불만을 가진 사무라이들은 가고시마 정부를 지배하게 되었고, 반란을 우려한 정부는 가고시마 무기고에서 무기를 제거하기 위해 군함을 가고시마로 파견했다. 1877년 사무라이 쌀 급여가 폐지되면서 이미 긴장이 극도로 고조된 상태였기에 이는 공개적인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반란에 크게 실망했지만, 사이고는 마지못해 중앙 정부에 맞서 반란군을 이끌 것을 설득당했다.

시로야마 전투에서 군대를 지휘하는 사이고 다카모리(오른쪽 위)


반란군은 중앙 정부와 구마모토 성 공방전과 다바루자카 전투에서 주요 전투를 치렀다. 사이고는 처음에 구마모토 성을 함락할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성을 방어하는 제국 징집병들의 효율성을 과소평가했다. 공격이 실패한 후 사이고는 포위 공격을 선택했다. 제국군 증원부대는 결국 다바루자카 전투에서 반란군 전열을 돌파하여 포위 공격을 종식시켰다. 사이고의 잔여 군대는 진격하는 제국군 앞에 후퇴했고, 제국군은 이들을 끈질기게 소모시켰다. 결국 사이고와 남은 사무라이들은 시로야마 전투에서 포위되어 전멸했다.

사이고의 죽음으로 사쓰마 반란은 끝을 맺었다.

1877년 11월, 하세가와 사다노부 2세가 그린 사이고 다카모리의 목판화 초상화. 그의 경력을 보여준다


시로야마 전투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엉덩이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의 사망 경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목격자의 공식적인 보고는 없다. 부하들의 증언에 따르면, 부상 후 일어서서 할복을 했거나, 친구인 벳푸 신스케에게 자결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사망 당시 시신 상태에 대한 세 가지 직접적인 증언이 존재한다.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배에 칼을 찔렀으며, 이후 동료 시민에 의해 고의로 참수당했다고 전해진다. 세 가지 증언 모두 시신이 참수되었다는 점을 보고하고 있다. 두 가지 증언은 엉덩이 또는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목격자 증언도 복부의 상처나 신선한 칼에 의한 상처를 언급하지 않으므로, 사이고가 칼로 자신의 배를 찔렀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7] 일부 학자들은 사이고가 부상으로 인해 쇼크 상태에 빠져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사무라이들이 그를 이런 상태로 보았을 때, 그가 바랐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사의 자결을 돕기 위해 그의 머리를 잘랐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그가 진정한 사무라이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할복했다고 말했을 것이다.[8]

사이고의 머리가 사후 즉시 어떻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부 전설에 따르면 사이고의 하인이 머리를 숨겼고, 나중에 정부군 병사가 발견했다고 한다. 어떤 식으로든 정부군이 머리를 회수하여 사이고의 시신과 합치시켰고, 그의 부관인 기리노와 무라타의 시신 옆에 안치되었다. 이는 미국의 선장 존 케이펀 허버드가 목격했다. 머리가 결코 발견되지 않았다는 신화가 남아 있다.

6. 사후(死後)



시로야마 전투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는 엉덩이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의 사망 경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목격자의 공식적인 보고는 없다. 그의 부하들의 증언에 따르면, 부상 후 일어서서 할복을 했거나, 친구인 벳푸 신스케에게 자결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의 사망 당시 시신 상태에 대한 세 가지 직접적인 증언이 존재하는데,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배에 칼을 찔렀으며, 이후 동료 시민에 의해 고의로 참수당했다고 전해진다. 세 가지 증언 모두 시신이 참수되었다는 점을 보고하고 있다. 두 가지 증언은 엉덩이 또는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다고 묘사하고 있으나, 어떤 목격자 증언도 복부의 상처나 신선한 칼에 의한 상처를 언급하지 않으므로, 사이고가 칼로 자신의 배를 찔렀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7] 일부 학자들은 그 어떤 것도 사실이 아니며, 사이고가 부상으로 인해 쇼크 상태에 빠져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여러 사무라이들이 그를 이런 상태로 보았을 때, 그가 바랐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사의 자결을 돕기 위해 그의 머리를 잘랐을 것이며, 이후 그가 진정한 사무라이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할복했다고 말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8]

사이고의 머리가 사후 즉시 어떻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부 전설에 따르면 사이고의 하인이 머리를 숨겼고, 나중에 정부군 병사가 발견했다고 한다. 어떤 식으로든 정부군이 머리를 회수하여 사이고의 시신과 합치시켰고, 그의 부관인 기리노와 무라타의 시신 옆에 안치되었다. 이는 미국의 선장 존 케이펀 허버드가 목격했다. 머리가 결코 발견되지 않았다는 신화가 남아 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군무소(軍務所) 지폐, 1877년 그의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발행됨. 일본 통화 박물관


사이고에 관한 여러 전설이 생겨났는데, 그중 상당수는 그의 죽음을 부정하는 내용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그가 러시아로 도망쳤거나 화성으로 승천했다고 믿었다.[9] 심지어 19세기 말에 그의 모습이 혜성에 나타났다는 기록도 있는데, 적들에게는 불길한 징조였다. 메이지 정부는 전통적인 사무라이 미덕의 모범이었던 그에 대한 국민의 애정을 극복할 수 없어 1889년 2월 22일 사후에 그를 사면했다. 일본 국민은 그가 1877년 죽을 때까지 자신의 미덕에 충실했던 사실을 높이 평가했다.

사후 십수 년이 지나 명예를 회복하고, 위계(位階)는 정삼위(正三位)를 추증받았다.[111] 공적으로, 계승자인 사이고 토라타로(西郷寅太郎)가 후작(侯爵)이 되었다.[21]

7. 사상과 평가

사쓰마 번의 하급 무사였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눈에 띄어 발탁되었고, 그의 곁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나리아키라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실각하여 아마미오시마에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복귀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번주 시마즈 다다요시의 아버지이자 사실상 최고 권력자였던 시마즈 히사미쓰와 사이가 좋지 않아 다시 오키나에라부 섬으로 유배를 갔다. 가로였던 고마쓰 기요카도와 오쿠보 도시미치의 도움으로 복귀하여, 1864년 금문의 변 이후 활약하며 사쓰초 동맹의 성립과 왕정복고에 성공하고, 보신 전쟁을 이끌었다. 에도 총공격을 앞두고는 가쓰 가이슈 등과 항복 협상을 벌여 막부 측의 항복 조건을 받아들여 총공격을 중지했다(에도 무혈 개성).

이후 사쓰마로 귀향했지만, 1871년에 산기로 신정부에 복직했다.[16] 육군대장·근위도독을 겸임했으며,[17] 1873년 오쿠보, 기도 등 이와쿠라 사절단의 외유 중에 발생한 조선과의 국교 회복 문제에서는 자신이 직접 조선에 가서 개국을 권하는 견한사절이 될 것을 제안하고[18], 귀국한 오쿠보 등과 대립했다. 이 결과 1873년 메이지 6년 정변으로 에토 신페이,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과 함께 하야하고[19][20], 다시 가고시마로 돌아가 사립 학교에서 교육에 전념한다. 사가의 난, 신풍련의 난, 아키쓰키의 난, 하기의 난 등 시족의 반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1877년에 사립 학교 학생들의 폭동[81]에서 시작된 세이난 전쟁의 지도자가 되지만, 패하여 시로야마에서 자결했다.

7. 1. 경천애인(敬天愛人)

敬天愛人|경천애인일본어은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의미로, 사이고 다카모리가 자주 사용하던 표현이다.

7. 2. 평가

사이고 다카모리는 여러 전설적인 이야기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중 상당수는 그의 죽음을 부정하는 내용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러시아로 도망쳤다거나 화성으로 승천했다고 믿었다.[9] 심지어 19세기 말에는 그의 모습이 혜성에 나타났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였는데, 이는 그의 적들에게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다. 메이지 정부는 사무라이의 미덕을 상징하는 사이고에 대한 국민적 애정을 무시할 수 없어 1889년 2월 22일, 그를 사후 복권시켰다. 일본 국민들은 그가 1877년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킨 것을 높이 평가했다.

사후 십수 년이 지나 사이고는 명예를 회복하고 정삼위(正三位)의 위계(位階)를 추증받았다.[111] 공식적으로는 그의 후계자인 사이고 도라타로(西郷寅太郎)가 후작(侯爵) 작위를 받았다.[21]

8. 가계(家系)

인물관계출생사망
증조부모사이고 기치베1803년1월 28일
(불명)마치다 고에몬의 딸
조부모사이고 다쓰에몬 다카미쓰1852년 9월 1일
(불명)요쓰모토 요시테루의 여동생1862년 5월 29일
부모사이고 기치베아버지1806년1852년 9월 27일
시하라 마사어머니1853년 음력 11월 29일
배우자 및 자녀스가아내
이토코아내1843년1922년 6월 11일
사이고 도라타로장남1866년 음력 7월 12일1919년 1월 1일
노부코며느리
사이고 다카유키손자
사이고 다카테루손자1900년1920년 11월
사이고 기치노스케손자1906년 7월 20일1997년 10월 12일
사이고 기치타로증손
사이고 다카아키손자1911년1992년
사이고 다카미쓰증손
사이고 다카히로증손
사이고 우마지로아들1871년
사이고 도리조아들1873년
아이카나1837년1902년 음력 8월 27일
사이고 기쿠지로서자1861년 음력 1월 2일1928년 11월 27일
사이고 다카히데서손1985년
사이고 다카야스서손
사이고 다카후미서증손1947년
사이고 히토시서손1916년1945년 5월 28일
형제자매 및 사촌사이고 다카히로남동생1833년1868년 9월 29일
사이고 류준조카
사이고 주도남동생1843년 6월 1일1902년 7월 18일
기요코제수
가미무라 쓰구요시조카1881년 1월1937년 3월 23일
사이고 주토쿠조카1878년 10월 21일1946년 2월 6일
고마쓰 주시조카
사쿠라코조카
사이고 다카카쓰남동생1847년 11월 18일1877년 2월 27일
고토여동생1832년1913년
다카여동생1862년
오야마 이와오사촌1842년 10월 10일1916년 12월 10일



아이카나(1837–1902)

9. 관련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Meiji Restoration leader's lessons of sincerity https://www.japantim[...] 2021-06-29
[2] 서적 Asashi Nihon rekishi jinbutsu jiten https://www.worldcat[...] Asahi Shinbunsha
[3] 서적 The Last Samurai: The Life and Battles of Saigō Takamori https://books.google[...] John Wiley and Sons 2011-08-07
[4] 웹사이트 https://www.nippon.c[...]
[5] 웹사이트 On Saigō and the establishment of a railway http://www.unu.edu/u[...] 2006-10-21
[6] 서적 The last Samurai - The life and Battles of Saigō Takamori Wiley Online library
[7] 논문 The Apocryphal Suicide of Saigō Takamori: Samurai, Seppuku, and the Politics of Legend
[8] 웹사이트 The Real Last Samurai http://www.emory.edu[...] Emory University 2009-04-10
[9] 논문 The Apocryphal Suicide of Saigō Takamori: Samurai, "Seppuku", and the Politics of Legend https://www.jstor.or[...] 2010
[10] 간행물 In the Footsteps of the Real Last Samurai
[11] 웹사이트 Fan, 1877–1890 https://statenisland[...] Staten Island Historical Society 2011-12-02
[12] 웹사이트 西郷氏(隆盛系) https://reichsarchiv[...] 2019-01-05
[13] 기타 [[西南戦争]]時の肩書
[14] 기타
[15] 백과사전 2022-10-11
[16] 서적 西郷隆盛:人を相手にせず、天を相手にせよ ミネルヴァ書房 2017-08-10
[17] 기타
[18] 서적 西郷南洲書簡集 実業之日本社 1910
[19] 기타
[20] 기타
[21] 논문 議員薨去及弔辭 / 侯爵西鄕寅太郞 日本マイクロ写真 1919-01-07
[22] 간행물 NHK G-Media 大相撲中継 初場所決算号 栃ノ心 初優勝 2018-02-17
[23] 서적 八 赤山靱負の邸 高千穂社
[24] 기타
[25] 기타
[26] 서적 維新経国秘録 : 海舟と南洲 大日本皇道奉賛会 1944
[27] 서적 2 幕府と日米通商條約の締結 大日本皇道奉賛会
[28] 기타
[29] 기타
[30] 기타
[31] 기타
[32] 기타
[33] 기타
[34] 기타
[35] 서적 村田十蔵日記—宗門手札御改付家内人数改帳留 鹿児島:「鹿児島県史料拾遺」刊行会
[36] 본문
[37] 음반 〈沖永良部島の島歌〉(10)さいさい節 キングレコード 1991
[38] 서적 大西郷と沖永良部島 和泊町 1968
[39] 본문
[40] 서적 鹿児島県史
[41] 서적 西郷隆盛全集
[42] 서적 西郷隆盛全集
[43] 서적 阪谷朗廬関係文書目録 国立国会図書館 1990
[44] 본문
[45] 본문
[46] 본문
[47] 뉴스 明治10年11月(中略)'''薩賊'''発行の紙幣政府で引換か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36-1940
[48] 서적 隴上偶語 東京堂 1897
[49] 뉴스 【維新150年 大阪の痕跡を歩く】勝海舟と西郷隆盛の初会談は「大坂」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18-04-22
[50] 본문
[51] 본문
[52] 서적 大西郷の逸話
[53] 본문
[54] 서적 詳説西郷隆盛年譜
[55] 본문
[56] 본문
[57] 본문
[58] 서적 板垣退助君戊辰戦略 一般社団法人板垣退助先生顕彰会
[59] 웹사이트 慶應4年閏4月 大久保の東下と西郷の上洛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36
[60] 웹사이트 明治元年11月 大村西郷板垣等行賞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36
[61] 본문
[62] 서적 丁丑公論
[63] 서적 西郷隆盛全集
[64] 서적 西南記伝
[65] 서적 西南記伝
[66] 웹사이트 大隈伯演説座談 {{NDLDC|782936/52}}
[67] 웹사이트 西郷隆盛が陸軍大將兼參議
[68] 서적 鹿児島県史料・忠義公史料
[69] 아카이브
[70] 본문
[71] 서적 前原一誠年譜
[72] 간행물 明治9年8月 臺灣役の戰歿者と西郷隆盛の祭文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73] 서적 西南役前後の思出の記
[74] 논문
[75] 간행물 明治8年9月 鹿兒島縣では軍器愛重の流行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76] 간행물 明治8年6月 三條の使者西下―西郷隆盛韜晦して面會せず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77] 간행물 明治8年9月 西郷隆盛前原一誠に武器供給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78] 서적 1912
[79] 문서
[80] 간행물 明治10年2月 鹿兒島の不平黨大西郷に迫り―西郷之に應ぜず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81] 간행물 明治10年2月 鹿兒島叛徒の彈藥奪取事件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82] 문서
[83] 서적 1912
[84] 문서
[85] 서적 西南戦争における薩軍出陣の「練兵場」について
[86] 간행물 明治10年2月 熊本鎭臺薩摩へ出兵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87] 간행물 明治10年2月 鹿兒島私學校徒蜂起して不意に縣廳を襲擊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88] 서적 補遺 聯隊旗奪取の始末
[89] 간행물 明治10年2月 鹿兒島は宛然治外政權の地―一藩の叛情已に明白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90] 간행물 明治10年5月 田原坂戰爭餘聞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91] 간행물 明治10年2月 鹿兒島叛徒に軍資なく兵器なし―而も政府の廟議一決せず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92] 간행물 明治10年5月 死人の肉を傷口にあてる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93] 간행물 明治10年5月 賊の第二陣は肥南三太郞の嶮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94] 간행물 明治10年5月 賊軍隊人名簿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95] 간행물 征討總督宮及び參軍將校に御慰問の勅書を賜はる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96] 간행물 明治10年5月 西郷中將の居常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97] 간행물 明治10年5月 賊軍僞造の紙幣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98] 간행물 明治10年11月 薩賊發行の紙幣政府で引換か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99] 간행물 明治10年7月 西郷隆盛への賣掛金を外人が政府へ請求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100] 서적 大西郷突囲戦史 1936
[101] 간행물 明治10年5月 西郷の異圖、巳に廟堂を退く時に發せり 新聞集成明治編年史編纂会 1940
[102] 서적 鎮西戦闘鄙言
[103] 뉴스 いつも主にあって喜びなさい 穂森幸一 http://www.christian[...] クリスチャントゥデイ 2017-07-01
[104] 서적 西南記伝
[105] 문서
[106] 웹사이트 2022-04-00
[107] 서적 西南戦争と県令岩村通俊
[108] 서적 明治筆蹟集 文会堂ほか 1888-00-00
[109] 서적 三条家文書目録 国立国会図書館 1973-00-00
[110] 서적 西陲擾乱期 明治9年7月-同11年 林泉社 1940-00-00
[111] 간행물 叙任辞令:明治22年2月11日 / 贈正三位故西郷隆盛(中略、昨11日官報号外再掲) 1889-02-12
[112] 서적 トリビアの泉〜へぇの本〜 5 講談社
[113] 웹사이트 うどめ:意味=どんぐり眼。大きな目 https://kagoshimaben[...] 鹿児島弁ネット辞典編纂委員会 2022-04-27
[114] 서적 西郷隆盛 万世閣 1925-00-00
[115] 서적 大西郷の逸話 南方新社
[116] 뉴스 西郷隆盛の軍服を制作-宿陣跡資料館 http://www.yukan-dai[...] 夕刊デイリー 2017-07-29
[117] 서적 早稲田清話
[118] 서적 トリビアの泉〜へぇの本〜 講談社
[119] 서적 西郷南州史料 東西文化調査会
[120] 서적 お雇い外国人キヨッソーネ研究 中央公論美術出版
[121] 서적 思ひ出づるまま
[122] 뉴스 1905-06-05
[123] 서적 薩摩琵琶 ぺりかん社
[124] 서적 南洲翁逸話
[125] 웹사이트 【広角レンズ】幕末、明治とどめた古写真 学問として解読、語り始める歴史 https://www.sankei.c[...] 産経新聞:産経ニュース 2016-01-04
[126] 간행물 顔認証技術を用いた古写真の人物特定 ~「フルベッキ写真」への応用~ 社団法人 日本写真学会
[127] 웹사이트 本物のせごどん? 造幣局行幸時の写真巡り論争「資料には本人」「写真嫌いで特徴違う」…件の1枚、公開へ(1/3ページ) https://www.sankei.c[...] 2018-04-16
[128] 웹사이트 本物のせごどん? 造幣局行幸時の写真巡り論争「資料には本人」「写真嫌いで特徴違う」…件の1枚、公開へ(2/3ページ) https://www.sankei.c[...] 2018-04-16
[129] 서적 消された「西郷写真」の謎 学研パブリッシング
[130] 서적 南洲翁遺訓
[131] 웹사이트 故事ことわざ辞典 http://kotowaza-allg[...]
[132] 서적 南洲翁遺訓
[133] 서적 逸話文庫 通俗教育 志士の巻
[134] 서적 西南役側面史
[135] 서적 ハエ・蚊とその駆除
[136] 웹사이트
[137] 서적 維新侠艶録 万里閣書房 1929-00-00
[138] 서적 正編
[139] 서적 続編
[140] 서적 続々編
[141] 신문 征韓論の回顧(三)板垣伯爵語る 1910-09-02
[142] 서적 海舟先生氷川清話
[143] 웹사이트 七英八傑
[144] 서적 浪漫人 三島由紀夫 その理想と行動 1973
[145] 서적 西郷南洲遺訓 附 手抄言志録及遺文 岩波書店 1939
[146] 서적 維新史の片鱗
[147] 서적 明治三傑
[148] 서적 西郷隆盛伝
[149] 서적 明治三傑
[150] 서적 南洲翁は曠世の英雄
[151] 서적 大西郷の威容と宏量
[152] 서적 余の観たる南洲先生
[153] 서적 丁丑擾乱記
[154] 서적 西郷南洲逸話
[155] 서적 維新史の片鱗
[156] 서적 維新史の片鱗
[157] 서적 西郷南洲遺訓
[158] 서적 木戸孝允日記 第三巻
[159] 웹사이트 伊藤侯,井上伯,山県侯元勲談
[160] 서적 伊藤侯,井上伯,山県侯元勲談
[161] 서적 中正公勤王事跡
[162] 웹사이트 観樹将軍豪快録
[163] 편지 1865-01
[164] 서적 生きている歴史
[165] 서적 明治三傑
[166] 서적 西郷南洲と予の関係
[167] 서적 徳川慶喜公回想談
[168] 웹사이트 大久保利通之一生
[169] 서적 渋沢栄一自伝
[170] 서적 青淵回顧録
[171] 웹사이트 大隈伯百話
[172] 웹사이트 木戸松菊公逸話
[173] 서적 早稲田清話
[174] 서적 早稲田清話
[175] 서적 西郷隆盛伝
[176] 서적 逸事史補
[177] 간행물 歴史読本 臨時増刊'79-12
[178] 서적 生きている歴史
[179] 서적 勤王芸者 維新情史
[180] 서적 海舟座談
[181] 서적 御一新の嵐 筑摩書房 2001
[182] 뉴스 西郷さんNG、クマに変更/新幹線熊本駅のPRキャラ https://www.shikoku-[...]
[183] 뉴스 西郷さんNG、クマに変更 新幹線熊本駅のPRキャラ https://web.archive.[...]
[184] 뉴스 西郷隆盛の息子「酉三」の写真、初確認…息子全員の写真出そろい「青年期の西郷想像できる」 https://www.yomiuri.[...] 2024-03-1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