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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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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사절요는 조선 세조 때 편찬이 시도된 역사서로, 단군조선부터 삼국 시대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하여 민족사의 체계를 정립하고 조선 시대 삼국사 서술의 기본 틀을 마련했다. 세종과 세조 시대의 역사학적 학풍에 따라 객관적으로 서술되었으며,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라수이전 등 다양한 사료를 활용하여 기존 역사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했다. 특히, 현존하는 삼국사기의 오류를 바로잡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고, 동국통감 편찬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단군 신화와 불교 관련 기사를 생략하고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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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절요
삼국사절요
일반 정보
제목삼국사절요
한글삼국사절요
한자三國史節要
가타카나사 초료
히라가나さんごくしせつよう
로마자 표기법 종류문화관광부 2000년식:
매큔-라이샤워 표기법
로마자 표기Samguksa jeoryo
Samguksa chŏryo

2. 편찬 배경 및 과정

조선 세조는 왕권 강화와 유교적 통치 질서 확립을 위해 역사서 편찬을 추진하였다. 세조는 자신의 명분이 약함을 알고 왕권을 강화하는 입장에서 고려 시대까지의 역사를 담은 역사서를 편찬하고자 하였다.[6]

삼국사기》를 기본으로 하고 《삼국유사》, 《수이전》, 《동국이상국집》, 《세종실록지리지》, 《고려사》 등을 통해 내용을 보완하였다. 설화, 신화, 전설, 민담은 물론이고, 천재지변, 종교 행사, 풍속, 사냥, 교범, 방언, 축성, 전란 등 국가의 흥망과 백성의 안녕에 관계되는 사건을 상세히 수록하였다.

그러나 《동국통감》은 완성되지 못하고 성종 때 삼국시대까지만 노사신, 서거정, 이파, 김계창, 최숙정 등이 완성하였는데, 그 책이 《삼국사절요》이다.

2. 1. 세조의 명과 동국통감 편찬 시도

조선 세조는 왕권 강화와 명분 확보를 위해 고려 시대까지의 역사를 담은 역사서 편찬을 추진했다. 1458년(세조 4) 동국통감 편찬을 명하고, 1463년 동국통감청(東國通鑑廳)을 설치, 양성지 주관, 신숙주·권람 감수, 이파가 출납을 담당하도록 했다.[6]

세조는 유교 명분론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정권을 잡아 명분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왕권 강화 차원에서 『삼국사기』를 기본으로 하고 다른 자료들을 보충한 역사서 편찬을 지시했다.[2] 세조는 조선의 역사책에 빠진 내용이 많고 체계가 잡혀있지 않다고 보고, 삼국사와 고려사를 합쳐 하나의 역사책으로 편찬하고, 여러 책에서 자료를 보충하라고 명했다.[1]

1458년(세조 4) 9월, 세조는 문신들에게 삼국사와 고려사를 통합한 『동국통감』 편찬을 명하고,[1][2] 1463년 동국통감청을 설치했다.[2] 양성지가 편찬 작업을 주도하고, 신숙주·권람이 감수, 이파가 출납을 맡았다.[1][2] 세조는 『동국통감』에 큰 관심을 보였으나, 1466년 이후 관련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1] 결국, 『동국통감』 편찬은 세조 대에 완료되지 못했다.[1] 이는 원로대신과 유교적 명분을 중시하는 유신들의 반발, 그리고 세조의 죽음으로 작업이 중단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2]

2. 2. 예종과 성종 대의 편찬 작업

예종 즉위 후, 최숙정이 경연에서 《동국통감》 편찬을 완결해야 한다고 건의했다.[1] 예종은 이를 받아들여 편찬을 완수하도록 조치했으나,[1] 곧 사망하여 편찬 작업은 다시 중단되었다.[2][1]

1474년(성종 5년) 신숙주의 건의로 작업이 재개되었는데, 신숙주는 세조 때부터 《동국통감》 편찬에 참여했던 이파에게 완성을 주도하게 했다.[1] 이때는 고대사를 중심으로 서술되었다.[2] 1476년 12월, 삼국 시대까지를 다룬 사서가 완성되어 《삼국사절요》라는 명칭으로 봉헌되었다.[1] 진선은 노사신이, 서문은 서거정이 썼다.[2]

3. 구성 및 체제

《삼국사절요》는 총 15권이지만, 삼국 이전의 상고사는 '외기(外紀)'로 권수에 포함하지 않아 14권으로 목차를 구성하였다.[3][1] 실제로는 15권으로 편찬되었지만, 서문이나 표문에서도 14권으로 표기되었다.[1]

서술 체제는 편년체이다.[1][2] 세조 때 편찬이 시도된 《동국통감》은 연대순으로 모든 자료를 모아 놓은 "장편"으로 제작되었는데,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편찬할 때 초고로 만든 것이 시초이다.[1] 책 이름이 "절요"라는 점에 착안하여, "장편"의 내용을 축약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원 자료가 부족한 한국 고대사에서는 "장편"이 거의 대부분 그대로 실렸을 것으로 보인다.[1]

3. 1. 사료 및 내용

삼국사기》를 기본으로 하고 《삼국유사》, 《수이전》, 《동국이상국집》, 《세종실록지리지》, 《고려사》 등을 참고하여 내용을 보완하였다.[3][2] 설화, 신화, 전설, 민담은 물론이고, 천재지변, 종교 행사, 풍속, 사냥, 교빙, 방언, 축성, 전란 등 국가의 흥망과 백성의 안녕에 관계되는 사건을 상세하게 수록하였다.[3][2] 특히, 《삼국사기》의 본기를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삼국 상호 간의 전쟁 기사는 하나의 편년에 의해 서술함으로써 기사의 중복을 피하고, 삼국 간 기사의 오류를 모순 없이 합리적으로 처리했다.[1] 《삼국유사》 기이조에 실린 신화와 전설 등도 상당수 수록하였다.[1] 다만, 단군조선에 대한 신화는 인용하지 않았지만,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1]

3. 2. 삼국 시대 역사 서술의 특징

조선 초 권근이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저술한 《삼국사략》은 삼국 시대의 즉위년칭원법이 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유년칭원법으로 고쳐 서술하였다.[2] 반면 《삼국사절요》는 삼국 당시에 칭했던 그대로 즉위년칭원법을 채택하여 서술하고,[1] 통일 이후에는 절충하여 원년 기사를 전 왕의 말년 기사에 기록했다.[2] 또한, 《동국사략》에서 배제된 국왕 및 국왕 관련 용어를 그대로 기록했다.[2]

권근이 신라 중심으로 서술한[1] 기존의 역사 서술 방식을 고쳐,[2] 신라와 고구려가 병존하기 시작한 신라 시조 19년부터 문무왕 9년(669년)의 통일까지 중국, 신라, 고구려, 백제의 연기를 작은 글씨로 2행에 쓰고, 그 전후는 신라 왕의 연기를 큰 글씨로 앞에 썼으며, 중국 연기는 주석으로 붙여[1] 삼국에 정통이 없다고 보았다.[2] 그리하여 삼국의 역사를 각각 독립적이고 대등하게 다루었다.[1] 669년(문무왕 9년)에 삼국이 통일된 후,[4][2] 신라가 의 진주 통치군을 몰아내고 명실상부한 통일을 완수한 676년(문무왕 16년)[5] 이후부터 신라를 정통으로 취급하였으며,[2][1] 발해사는 제외시켰다.[1] 이는 조선 시대에 성립된 삼국사 서술의 정형이자[2] 관례가 되었다.[1]

4. 의의와 평가

《삼국사절요》는 단군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하여 민족사의 체계를 정립하고, 조선 시대 삼국사 서술의 기본 틀을 마련하였다. 세종과 세조 시대의 역사학 풍조에 따라 객관적으로 서술되었으며, 《삼국사기》에 없는 자료들을 보완하였다.[1]

4. 1. 사학사적 가치

성리학적 명분론에 대한 집착이 『삼국사략』보다 옅어져, 중국과 한국의 고대 문화를 폭넓게 수용하고, 신라 중심의 삼국사관을 극복했으며, 고기류의 사용으로 기존의 정사에서 누락된 부분을 보완할 수 있었다는 점이 이 책의 사학사적 가치이다.[2]

삼국사기』에 이용되지 않은 자료를 보완했다는 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 특히, 『수이전』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으므로, 여기에 인용된 자료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1]

현전하는 『삼국사기』 고본 중 완질을 갖춘 가장 오래된 것은 1512년(중종 7년) 경주에서 목판으로 인쇄한 것이지만, 이 판본에는 많은 오자가 있다.[1] 『삼국사절요』에서 인용한 자료는 고려 시대, 그렇지 않으면 조선 태조 초년에 인쇄한 판본을 대본으로 이용한 것이므로, 『삼국사기』의 오자를 바로잡는 데 매우 귀중한 지침이 된다.[1] 1485년에 간행된 『동국통감』 편찬에서 고대사의 대본으로 이용된 의의도 주목할 만하다.[1][2]

1482년에 간행되어 전주사고에 보관되었고, 그 후 필사되어 전해졌으며, 1973년에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했다.[2]

다만, 전체적으로 『삼국사기』와 관련된 것을 주로 다루고, 단군 신화를 언급하지 않고, 불교 기사를 생략한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2] 사론은 『삼국사기』와 『삼국사략』의 것을 이용했지만, 대부분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고대 문화를 비판한 것이었다.[2]

4. 2. 한계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내용을 구성하고, 단군 신화를 언급하지 않았으며, 불교 관련 기사를 생략한 점은 한계로 지적된다.[2]。사론은 『삼국사기』와 『삼국사략』의 것을 이용했지만, 대부분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고대 문화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2]

5. 현대적 의의

《삼국사절요》는 단군조선부터 삼국 시대 말까지 한국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하여 민족사의 체계를 정립한 역사서이다. 세종과 세조 시대의 역사학 풍토에 따라 객관적으로 서술하여 조선 시대 삼국사 서술의 기본 틀이 되었고, 《삼국사기》에 이용되지 않은 자료를 보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1] 특히, 《수이전》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으므로, 여기에 인용된 자료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1]

현존하는 《삼국사기》의 가장 오래된 완질본은 1512년(중종 7년) 경주에서 목판으로 인쇄한 것이지만, 이 판본에는 오자가 많다. [1] 그런데 《삼국사절요》에서 인용한 자료는 고려 시대, 그렇지 않으면 조선 태조 초년에 인쇄한 판본을 대본으로 이용한 것이므로, 《삼국사기》의 오자를 바로잡는 데 매우 귀중한 지침이 된다.[1] 더욱이, 1485년에 간행된 《동국통감》 편찬에서 고대사의 대본으로 이용된 의의가 특히 주목할 만하다.[1][2]

또한, 이 책의 사학사적 가치는 《삼국사략》보다 성리학적 명분론에 대한 집착이 옅어져, 중국과 한국의 고대 문화를 폭넓게 수용하고, 신라 중심의 삼국사관을 극복하고, 고기류의 사용으로 기존의 정사에서 누락된 부분을 보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2] 1482년에 간행되어 전주사고에 보관되었고, 그 후 필사되어 전해졌으며, 1973년에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했다.[2]

다만, 전체적으로 《삼국사기》와 관련된 것을 주로 다루고, 단군 신화를 언급하지 않고, 불교 기사를 생략한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2] 사론은 《삼국사기》와 《삼국사략》의 것을 이용했지만, 대부분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고대 문화를 비판한 것이었다.[2]

참조

[1] 웹사이트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http://encykorea.aks[...] 韓国学中央研究院 2020-01-02
[2] 웹사이트 삼국사절요 [ 三國史節要 ] https://terms.naver.[...] ネイバー 2020-01-02
[3] 문서 『グローバル世界大百科事典』「韓国史」近世社会の発展/両班社会と経済生活/両班官僚の文化#三国史節要 https://ko.wikisourc[...]
[4] 문서 新羅#中国の発展と三国時代の終焉
[5] 문서 新羅#歴史
[6] 백과사전 삼국사절요 http://www.encyber.c[...] 2008-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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