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나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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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에나 대성당은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시에나에 위치한 대성당으로, 1220년대에 착공되어 여러 차례의 증축과 장식을 거쳐 완성되었다. 프랑스 고딕 양식, 토스카나 로마네스크 건축, 고전 건축 요소가 결합된 서쪽 파사드와 다색 대리석 바닥, 니콜라 피사노의 설교단, 미켈란젤로, 도나텔로, 베르니니 등의 예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14세기 흑사병과 도시 경제의 어려움으로 인해 대성당 확장이 중단되었지만, 피콜로미니 도서관, 산 조반니 세례당, 지하실 등 다양한 부속 시설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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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 대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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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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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 | 시에나 대성당 |
다른 이름 | 두오모 디 시에나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산타 마리아 아순타 |
로마자 표기 | Cattedrale Metropolitana di Santa Maria Assunta |
위치 | 시에나, 토스카나 |
상세 정보 | |
종교 | 가톨릭 교회 |
전례 | 로마 전례 |
축성 연도 | 1215년 |
지위 | 대성당 |
건축가 | 조반니 디 아고스티노 조반니 피사노 카마이노 디 크레센티노 |
건축 양식 | 이탈리아 고딕 건축 로마네스크 건축 고전 건축 |
기공 | 1196년 |
완공 | 1348년 |
길이 | 89.4 미터 |
최대 높이 | 77 미터 |
관할 교구 | 시에나-콜레 디 발델사-몬탈치노 로마 가톨릭 대교구 |
대주교 | 안토니오 부온크리스티아니 |
주임 사제 | 로베르토 피알리 |
수석 부제 | 조반니 솔다니 |
세계 유산 정보 | |
지정 구분 | 세계 유산 |
공식 명칭 | 시에나 역사 지구 |
지정 연도 | 1995년 (제19차 회의) |
지정 유형 | 문화유산 |
지정 번호 | 717 |
지정 기준 | i, ii, iv |
지역 | 유럽 및 북아메리카 |
웹사이트 | |
공식 웹사이트 | 시에나 대성당 오페라 웹사이트 |
2. 역사
시에나 대성당의 정확한 기원은 전설 속에 가려져 있지만, 현재 위치에는 9세기경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8] 1058년에는 이곳에서 공의회가 열리기도 했다.[18] 본격적인 대성당 건설은 1196년 석공 길드인 "오페라 디 산타 마리아"(Opera di Santa Maria)가 주도하여 시작되었으며[1], 1220년대에 착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13세기 동안 돔, 트랜셉트, 설교단, 파사드 등 주요 구조물과 초기 장식이 이루어졌다.[10][2][21]
1339년에는 피렌체 대성당과 경쟁하기 위해 기존 건물을 확장하여 서유럽 최대 규모의 성당을 만들려는 야심 찬 계획이 세워졌다.[2] 그러나 1348년 흑사병의 창궐과 재정 문제로 인해 이 거대한 확장 공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비록 확장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대성당 내부 장식 작업은 이후에도 꾸준히 이어져 국제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의 다양한 예술 작품들이 추가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풍부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 1. 초기 역사(9세기~13세기)



시에나 대성당의 정확한 기원은 전설 속에 가려져 명확하지 않다. 현재 위치에는 9세기경 성모 마리아를 모신 교회와 주교의 궁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8] 1058년 12월, 이 교회에서는 공의회가 열려 니콜라스 2세가 선출되고 반교황 베네딕토 10세가 축출되었다.[18] 대성당이 1179년 11월 18일에 봉헌되었다는 일반적인 믿음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증거는 거의 없다. 다만, "Ordo Officiorum Ecclesiae senensis"라는 기록에 특정 연도 없이 11월 18일에 봉헌식이 있었다는 내용은 언급되어 있다.[18]
1196년, 대성당 석공들의 길드인 "오페라 디 산타 마리아"(Opera di Santa Maria)가 새로운 대성당 건설을 맡아 남북 트랜셉트(가로 구조물)부터 공사를 시작했다.[1] 현재의 대성당은 1220년대에 착공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날짜나 설계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1215년까지는 이미 새로운 교회에서 매일 미사가 드려졌다.[2] 1226년 이후의 도시 기록에는 파사드(정면)와 종탑 건설을 위해 검은색과 흰색 대리석 블록을 운반하고, 이를 다루는 석공들에게 비용을 지불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2][3] 종탑은 신랑과 남쪽 트랜셉트 사이에 1215년 이전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18]
1259년부터 1260년 사이에는 시민 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궁륭과 트랜셉트가 건설되었다.[10] 1259년에는 마누엘로 디 라니에리(Manuello di Ranieri)와 그의 아들 파리(Parri)가 나무로 된 성가대석을 조각했으나, 이는 약 100년 후 교체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1264년에는 로소 파델라이오(Rosso Padellaio)가 돔 꼭대기의 구리 구체를 제작했으며[2], 1265년부터 1268년까지는 니콜라 피사노(Nicola Pisano)와 그의 제자들이 설교단을 제작했다.[2] 이 설교단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원래 작품 중 하나이며[18], 이탈리아 고딕 조각의 최고 걸작으로 칭송받는다.[21] 니콜라 피사노와 그의 추종자들은 주제단 작업에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18]
1284년경 조반니 피사노(Giovanni Pisano)가 파사드 건설을 시작하여 세 개의 입구와 예언자, 사도들의 조각상으로 장식했다.[21] 1287년에는 "오페라 디 산타 마리아"가 대형 원형 창문에 사용될 스테인드글라스를 주문했고,[2] 1288년에는 두치오 디 부오닌세냐(Duccio di Buoninsegna)가 제작한 원형 창문이 성가대석에 설치되었다.[21] 당시 조반니 피사노는 공장장으로 임명되어 파사드 하단 부분의 공사를 완료했지만, 1297년에 갑자기 해임되어 시에나를 떠났다.[21] 1311년 6월 9일, 대성당의 제단화인 「마에스타」가 두치오의 아틀리에에서 운반되면서 대성당은 대략적인 완성을 보게 된다.[21]
2. 2. 확장 계획과 중단 (14세기)

신랑과 측랑이 될 예정이었던 부분
1339년 8월 23일, 시에나 시 의회인 「종의 평의회」는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에 버금가는 서유럽 최대 규모의 성당을 건설하자는 로렌초 마이타니의 제안을 승인했다. 이 야심 찬 계획은 기존 대성당의 장축(긴 쪽)을 새로운 성당의 단축(짧은 쪽)으로 삼아, 기존 건물을 익랑(가로 방향 공간)으로 활용하고 거대한 본당(세로 방향 공간)을 새로 짓는 구상이었다.
계획 부지가 당시 시에나에서 가장 인구가 밀집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용지 매입 과정을 거쳐 1340년 2월 2일에 기초석을 놓으며 공사가 시작되었다. 계획을 제안했던 로렌초 마이타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고, 란도 디 피에트로가 공장장으로 임명되었으나 그 역시 임명 직후 사망했다. 그럼에도 공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그러나 1342년 시에나에 전염병이 발생하고 연이어 기근이 닥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시의 재정은 이미 악화되고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1348년 흑사병이 도시를 휩쓸면서 경제는 완전히 마비되었다. 대규모 건설을 감당할 재정 능력을 상실하면서 공사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356년, 시 의회는 전문가 위원회를 구성하여 계획의 실현 가능성을 다시 검토했지만,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당시 공사를 책임지고 있던 도메니코 다고스티아노 역시 공사를 계속하는 데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결국 대성당 증축 계획은 완전히 포기되었다.
비록 거대한 확장 계획은 좌절되었지만, 기존 대성당의 내부 장식 작업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내부는 국제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미술의 중요한 작품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2. 3. 이후의 역사 (15세기~현재)
증축은 중단되었지만, 대성당의 장식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내부는 국제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미술의 보고가 되고 있다.3. 건축
시에나 중심부의 카스텔베키오 언덕 위에 서 있는 시에나 대성당(Duomo di Sienaita)은 건물 내외부를 장식하는 흑백 대리석 가로 줄무늬가 매우 인상적이다. 건축 시기와 파사드 디자인 때문에 고딕 건축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건물 전체의 기본적인 구성은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을 따른다.[1]
대성당은 내외부 모두 화려한 대리석 상감 세공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평평하게 잘린 동쪽 끝 부분, 육각형 모양의 돔과 그 아래 교차부, 건물 본체와 통합된 종탑 등이 구조적 특징이다. 특히 다색 대리석과 모자이크로 장식된 서쪽 파사드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파사드 중 하나로 꼽힌다.[4] 건물의 주축은 입구가 있는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뻗어 있다. 부지의 높낮이 차이를 이용하여 대성당 후진 아래 지하에는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ita)이 자리 잡고 있다.
대성당 건축은 여러 단계를 거쳤으며, 특히 서쪽 파사드는 하부(1284년경 시작, 조반니 피사노 감독)와 상부(14세기 중반 완공 추정, 조반니 디 체코 감독)가 다른 시기에 다른 양식적 영향을 받아 건설되었다.[5][6][18] 14세기에는 대성당을 더욱 확장하려는 대규모 계획이 있었으나, 흑사병 등의 이유로 중단되었고 당시 건설된 일부 구조물은 현재 부속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부 역시 흑백 대리석 줄무늬가 특징적이며, 니콜라 피사노의 설교단,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베르니니 등의 조각 작품, 그리고 두초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제단화(현재는 미술관 소장) 등 중요한 예술 작품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10][2][11] 특히 바닥 전체를 덮고 있는 정교한 대리석 상감 모자이크는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그 자체로 뛰어난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는다.[12][13]
3. 1. 외관
시에나 대성당은 시에나 중심부의 카스텔베키오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외벽을 장식하는 인상적인 흑백 대리석 가로 줄무늬가 특징이다. 건축 시기와 파사드 디자인 때문에 고딕 건축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건물 전체의 기본적인 구성은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을 따른다.대성당 건물은 내외부 모두 대리석 상감 세공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외관상으로는 평평하게 잘린 동쪽 끝 부분, 육각형 모양의 돔과 그 아래 교차부, 건물 본체와 통합된 종탑 등이 특징적이다. 건물의 주축은 입구가 있는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뻗어 있으며, 특히 서쪽 파사드는 그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부지의 높낮이 차이를 이용하여 대성당 후진 아래 지하에는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it)이 자리 잡고 있어, 대성당 정문(남서쪽)과 세례당 입구(북동쪽 지하)의 위치가 다르다.
14세기에 시도되었던 대규모 확장 공사는 중단되었고, 당시 건설된 일부 구조물은 현재 부속 미술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3. 1. 1. 파사드


시에나 대성당의 파사드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매력적인 파사드 중 하나이며, 시에나에서 가장 인상적인 특징 중 하나로 꼽힌다.[4] 동서남북 각 방위에는 서로 다른 작품이 있으며, 그중 서쪽 파사드가 가장 인상적이다. 두오모의 정문 역할을 하는 이 파사드는 세 개의 입구를 가지고 있으며, 중앙 입구는 청동 태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서쪽 파사드는 두 단계에 걸쳐 건축되었으며, 프랑스 고딕 양식, 토스카나 로마네스크 건축, 그리고 고전 건축의 요소가 결합되어 시에나의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예시이다.
하부 공사는 1284년경 시작되었다.[5] 다색 대리석을 사용하여 지어졌으며, 두오모 파사드와 설교단 작업에서 아버지 니콜라 피사노의 영향을 받은 조반니 피사노가 감독했다.[6] 토스카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져 수직적인 구분보다는 입구 주변의 수평적 통일성을 강조한다. 루네트로 장식된 세 개의 입구는 조반니 피사노의 초기 디자인을 기반으로 하며, 입구 주변의 조각과 방향 역시 그의 설계를 따랐다.[7] 문 주변과 위쪽, 그리고 입구 사이의 기둥은 아칸서스 덩굴, 우화적 인물, 성서 장면 등으로 풍성하게 장식되어 있다. 구약의 여러 예언자를 포함한 입구 위의 인물들은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과장된 자세와 특징으로 조각되었다.[10]
조반니 피사노는 시에나 대성당 건축과 유지를 감독하는 단체인 오페라 델 두오모와의 창작적 견해 차이로 인해 1296년경 시에나를 갑자기 떠날 때까지 자신의 작업을 감독할 수 있었다.[8] 피사노가 떠난 후 하부 파사드 작업은 카마이노 디 크레센티노의 지휘 아래 계속되었지만, 원래 계획에는 몇 가지 변경이 있었다. 교회의 네이브가 높아짐에 따라 파사드 높이가 조정되었고, 두초 디 부오닌세냐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시에나 시에서 의뢰한 더 큰 장미창이 설치되었다. 서쪽 파사드 공사는 1317년 오페라 델 두오모가 모든 노력을 동쪽 파사드로 돌리면서 갑자기 중단되었다.[10]

상부 파사드 공사가 언제 완료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1360년에서 1370년 사이에 완공되었다고 본다. 언제 공사가 재개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조반니 디 체코의 지휘 아래 작업이 계속되었으며, 그는 파사드에 대한 피사노의 계획을 일부 수정했다. 디 체코는 오르비에토 대성당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더 정교한 디자인을 선호했다. 네이브가 다시 한번 높아졌기 때문에 파사드는 원래 예상보다 훨씬 더 높게 지어져야 했다.[18]
이러한 변경은 높아진 네이브와 프랑스 고딕 양식 건축의 영향을 크게 받은 디 체코의 더욱 정교한 디자인 계획을 수용하기 위해 필요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로 인해 대성당 상부와 하부가 분리되어 보이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상부의 첨탑은 일반적인 대성당처럼 중앙 입구 측면 기둥에서 이어지지 않고 상당히 벗어나 있어, 당시 대성당에서는 드문 수직적 불연속성을 보이며 구조적 약점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불균형을 조정하기 위해 대성당 양쪽 탑에 창문을 추가하여 무게를 줄였다. 상부는 또한 토스카나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순한 기하학적 디자인과는 대조적으로 무거운 고딕 양식의 장식이 특징이다.[10]

화려한 파사드의 하층부를 장식하는 대부분의 조각상은 예언자, 철학자, 사도를 묘사한 조반니 피사노와 그의 조수들이 조각한 것이다. 반면, 상층부를 장식하는 더 고딕적인 조각상(장미창 주변 벽감의 반신상 족장 포함)은 후대의 익명 조각가들의 작품이다. 오늘날 대성당을 장식하는 거의 모든 조각상은 복제품이며, 원본은 시에나 두오모 미술관의 조각상 지하실에 보관되어 있다.[18]

파사드 박공에는 1878년 베네치아에서 제작된 세 개의 대형 모자이크가 있다. 중앙의 가장 큰 모자이크인 성모 승천은 루이지 무시니의 작품이다. 양쪽의 작은 모자이크인 예수 탄생과 성전의 마리아 봉헌은 알레산드로 프랑키가 제작했다.[18]
청동으로 만들어진 중앙 문은 원래 나무 문을 대체한 것으로 비교적 최근에 추가되었다. '감사의 문'이라는 뜻의 포르타 델라 리코노센차(Porta della Riconoscenzaita)로 알려진 이 큰 문은 1946년 시에나의 독일 점령이 끝날 무렵 의뢰되었다.[9] 비코 콘소르티가 조각하고 엔리코 만프리니가 주조한 이 문의 장면들은 시에나의 수호성인인 성모 마리아의 영광을 나타낸다.[18]
파사드의 왼쪽 모서리 기둥에는 조반니 피사노의 무덤을 표시하는 14세기 비문이 있다. 파사드 옆에는 늑대가 로물루스와 레무스에게 젖을 먹이는 콘트라데 루파(Contrade Lupaita) 동상이 있는 기둥이 서 있다. 지역 전설에 따르면, 레무스의 아들이자 시에나의 창립자인 세니우스와 아스키우스는 로마의 아폴론 신전에서 이 동상을 훔쳐 로마를 떠났다고 한다.[10]
3. 1. 2. 측면
대성당의 측면은 인상적인 대리석 가로 줄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종탑은 교회당 돔의 기저부에 교회당과 일체로 건설되었다. 부지의 고저차를 이용하여 교회당 후진 지하에는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it)이 자리 잡고 있으며, 세례당 입구는 지하의 북동쪽에 있다. 14세기에 진행된 대규모 확장 계획으로 새로운 측랑의 일부가 건설되었으나 공사가 중단되었다. 현재 이 측랑은 부속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3. 1. 3. 종탑
종탑은 교회당 돔의 기저부에 교회당과 일체로 건설되었다.[1]3. 2. 내부
대성당 내부는 들어서는 순간 벽과 기둥을 장식한 흑백 대리석 줄무늬의 강렬한 시각적 효과로 깊은 인상을 준다. 흑백은 시에나 시의 문장을 상징하는 색이다.[18] 평면도를 보면, 긴 본당(Nave)과 좌우의 측랑(Aisle)을 지나면 육각형 돔 아래의 넓은 중앙 공간에 다다른다. 이곳을 중심으로 좌우로는 익랑(Transept)이 뻗어 있고, 동쪽 끝에는 성소(Presbytery)와 후진(Apse)이 자리한다. 본당 북쪽 측랑에는 피콜로미니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있다.

내부 곳곳은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높은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바닥 전체를 덮고 있는 정교한 대리석 상감 세공과 니콜라 피사노,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베르니니 등 거장들의 조각 작품들은 대성당을 하나의 거대한 예술 박물관처럼 만든다. 본당 입구 근처에는 몬타페르티 전투(1260년)의 승리를 기념하는 높은 깃대가 세워져 있기도 하다. 내부 장식과 주요 예술 작품, 그리고 바닥 모자이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2. 1. 바닥

시에나 대성당의 바닥은 세밀하게 조각된 대리석 모자이크로 덮여 있으며, 이탈리아 전체에서도 가장 화려한 바닥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바닥은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약 40명의 예술가(대부분 시에나 출신)들이 참여하여 완성했다.[13]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이자 건축가인 조르조 바사리는 이 바닥을 보고 "지금까지 만들어진 것 중 가장 아름답고, 위대하며, 장엄한 바닥"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다.[12]
바닥은 총 56개의 패널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기와 모양이 다양하다. 대부분은 직사각형이지만, 나중에 만들어진 횡단부의 패널들은 육각형이나 마름모꼴 형태를 띠고 있다. 패널들은 시빌라, 구약 성서의 장면, 우화, 미덕, 고대 세계의 인물 등 다양한 주제를 묘사하고 있으며, 대부분 원래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초기 작품들은 그라피토(graffito) 기법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대리석 표면에 선을 새기고 그 홈을 역청이나 광물성 피치로 메우는 방식이다.[18] 이후에는 검은색, 흰색, 녹색, 빨간색, 파란색 등 다양한 색상의 대리석 조각을 맞춰 그림을 만드는 인타르시아(intarsia) 기법이 사용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상감 기법은 더욱 발전하여, 밝고 어두운 색의 강렬한 대비를 통해 거의 현대 인상주의 회화와 같은 느낌을 주는 정교한 작품들이 만들어졌다.[18]
바닥 전체를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기간은 제한적이다. 보통 매년 9월을 포함하여 약 6주에서 10주 동안만 공개되며, 이 외의 기간에는 제단 근처의 바닥은 보호를 위해 덮개가 씌워지고, 입구 근처의 일부만 관람할 수 있다.[14]

성당 중앙부(네이브) 바닥에는 고대 신화나 역사 속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교회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특징이다. 이러한 이교적이거나 고전적인 주제가 포함된 것은 시에나 출신의 두 교황,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와 프란체스코 테데스키니 피콜로미니의 영향이 컸다. 그들은 고전 작가나 인물들의 사상 속에도 기독교 신앙과 통하는 보편적인 지혜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3]
입구 바로 안쪽에는 15세기 당시 '인류 지혜의 창시자'로 여겨지며 인기가 높았던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를 묘사한 패널이 있다.[13] 1488년 조반니 디 스테파노가 디자인한 이 작품은 방문객을 성당 내부로 안내하며, 바닥 전체에 걸쳐 펼쳐지는 '지혜'라는 주제를 암시한다.[13]

중앙부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패널들이 있다.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젖 먹이는 늑대 여신'' 또는 ''시에나의 늑대 여신'' 패널은 원래 1360년대에 만들어졌으나, 1865년 레오폴도 마카리가 대대적으로 복원했다. 중앙에는 시에나의 상징인 늑대가 있고, 그 주위에는 이탈리아 주요 도시들의 문장을 담은 여덟 개의 작은 원이 배치되어 있다.[18] ''지혜의 산의 비유''는 1505년 핀투리키오가 디자인하고 1506년 파올로 만누치가 완성한 작품이다.[18] 이 복잡한 그림은 운명을 상징하는 여인이 현명한 사람들을 이끌고 험난한 길을 지나 지혜를 상징하는 여인을 만나러 가는 과정을 묘사한다.[13] 또 다른 주요 패널인 ''운명의 수레바퀴''는 1372년에 완성되었고 1864년 레오폴도 마카리에 의해 복원되었다.[18] 중앙에는 꼭대기에 왕이 앉아 있고 세 명의 남자가 매달려 있는 수레바퀴가 그려져 있으며, 그 주변에는 고대 철학자 네 명이 묘사되어 있다.[13]

양쪽 측랑(아일)에는 각각 다섯 개씩, 총 열 개의 시빌라(Sibyls, 고대 예언녀)를 묘사한 패널이 있다.[18] 각 패널은 당시 알려진 세계의 각 지역을 대표하는 시빌라를 보여주며, "페르시아 시빌라", "헬레스폰티네 시빌라", "에리트레아 시빌라", "프리기아 시빌라", "사미아 시빌라", "델피 시빌라", "리비아 시빌라", "김메리아 시빌라", "쿠마에 시빌라", "티부르티네 시빌라"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13] 이들은 기독교 메시지가 특정 지역이나 문화에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임을 상징한다. 각 시빌라는 붉은색과 검은색이 대비되는 배경 앞에 서 있으며, 옷자락을 휘날리는 등 다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18]
3. 2. 2. 주요 예술 작품


시에나 대성당 내부는 벽과 기둥을 장식하는 흑백 대리석 줄무늬의 강렬한 시각적 효과가 특징이다. 흑백은 시에나 시의 문장 색깔이다.[18] 본당 서쪽 기둥들의 주두에는 우화적인 흉상과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본당과 제대 주변의 수평 몰딩에는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제작된 교황 172명의 석고 흉상이 성 베드로부터 루키우스 3세까지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이 코니스 아래 둥근 아치의 스펜드럴에는 36명의 황제 흉상이 있다. 금색 별이 박힌 파란색으로 칠해진 둥근 천장은 볼트의 포르메르(반원형 리브)와 티에르세롱(보조 리브)에 정교한 장식 문양을 더했다.[10]
육각형 돔은 베르니니가 제작한 금박 랜턴으로 마감되어 금빛 태양처럼 빛난다. 트롱프뢰유 기법으로 장식된 천장은 15세기 후반에 금색 별과 파란색으로 칠해졌으며, 돔의 드럼 부분 열주에는 1481년 기도초 코차렐리와 벤베누토 디 조반니가 그린 42명의 족장과 예언자의 이미지 및 조각상이 있다. 돔 아래 스펜드럴의 스투코 조각상 8개는 1490년 벤투라 디 줄리아노와 바스티아노 디 프란체스코가 제작했으며, 원래는 여러 색으로 칠해졌으나 1704년에 금박 처리되었다.
주요 예술 작품으로는 니콜라 피사노와 그의 공방이 1265년에서 1268년 사이에 조각한 카라라 대리석 설교단이 있다. 이 설교단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한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대성당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 중 하나이다.[10] 또한 1288년 두초가 디자인한 합창단의 원형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성모 승천'을 묘사하며 이탈리아 초기 스테인드글라스의 중요한 예시이다.[2][18] 두초의 또 다른 걸작인 '마에스타' 제단화(1308-1311)는 원래 이 창문 아래에 위치하여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대성당의 주제를 강조했다.[11] (현재 '마에스타'는 시에나 두오모 미술관 소장)
이 외에도 대성당 내부는 수많은 예술 작품으로 가득 차 있다. 안토니오 페데리기가 조각한 성수반(1462-1463), 발다사레 페루치가 설계한 대리석 제단(1532), 베키에타가 제작한 청동 감실(1467-1472),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 마르티니와 도메니코 베카푸미가 만든 제단 주변의 천사상들,[10] 그리고 도나텔로가 제작한 조반니 디 바르톨로메오 페치 주교의 청동 묘비(1427)[16] 등이 있다. 피콜로미니 제단화에는 젊은 시절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네 개의 조각상(1501-1504)이 포함되어 있으며,[10] 베르니니는 '맹세의 예배당'에 성 예로니모와 막달라 마리아 조각상을 남겼다.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약 40명의 예술가가 참여하여 제작한 정교한 대리석 상감 세공 바닥 역시 대성당의 중요한 예술적 유산이다.[13][18]
4. 부속 시설
대성당에는 여러 부속 시설이 있다.
우측 횡랑에 위치한 키지 예배당(Cappella della Madonna del Votoit)은 시에나 대성당에 추가된 마지막이자 가장 호화로운 공간 중 하나이다. 시에나 출신 키지 가문의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의뢰로 1659년에 지어졌다. 금박으로 장식된 돔이 있는 이 원형 예배당은 기존의 15세기 예배당 자리에 독일 건축가 요한 파울 쇼어가 바로크의 거장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건설했다. 예배당 뒤편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경받으며 매년 콘트라다(contrade, 시에나의 각 지구)의 참배를 받는 ''마돈나 델 보토''(13세기, 귀도 다 시에나의 추종자 작)가 모셔져 있다. 이 성화는 1260년 몬타페르티 전투 전날, 시에나 시가 성모 마리아에게 도시를 봉헌한 것과 관련이 깊다. 당시 압도적인 수의 피렌체군을 상대로 시에나군이 거둔 기적적인 승리는 성모 마리아의 보호 덕분이라고 여겨졌다.
벽감에는 네 개의 대리석 조각상이 있는데, 그중 ''성 예로니모''와 ''마리아 막달레나''는 베르니니가 직접 조각한 작품이다. 나머지 두 작품은 ''성 베르나르디노''(안토니오 라지 작)와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에르콜레 페라타 작)이다. 예배당을 둘러싼 여덟 개의 대리석 기둥은 로마의 라테라노 궁전에서 가져온 것이며, 입구의 청동 문은 조반니 아르투시의 작품이다.
대성당 왼쪽에는 피콜로미니 도서관이 있다. 이곳은 교황 피우스 3세가 그의 삼촌인 교황 피우스 2세의 서적과 사본을 보관하기 위해 설립했으며, 핀투리키오가 그린 화려한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
또한 대성당 합창단 아래 지하에는 산 조반니 세례당이 위치해 있다. 피렌체나 피사와 달리 별도의 건물로 지어지지 않았으며, 도나텔로, 야코포 델라 케르차 등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으로 장식된 육각형 세례반이 중심을 이룬다.
4. 1. 피콜로미니 도서관

피콜로미니 도서관은 1492년 프란체스코 토데스키니 피콜로미니 추기경(당시 시에나 대주교이자 훗날 교황 피우스 3세)이 그의 삼촌인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 추기경(훗날 교황 피우스 2세)의 서적과 사본을 보관하기 위해 설립했다. 소장품에는 삼촌의 저서,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로 된 책들, 그리고 많은 희귀한 양피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17] 오늘날 원래 소장품의 상당수는 유실되었지만, 서고에는 여전히 리베랄레 다 베로나(Liberale da Verona)와 지롤라모 다 크레모나(Girolamo da Cremona)가 1466년부터 1478년 사이에 제작하고 이후 다른 시에나 미술가들이 작업한 정교한 삽화가 들어간 시편들이 많이 남아 있다.[18]
대성당 왼쪽에 위치한 도서관 입구는 두 개의 큰 아치가 있는 대리석 기념물로 구분된다.[17] 이 대리석 입구는 로렌초 디 마리아노(Lorenzo di Mariano)가 1497년에 건설했으며, 조반니 디 스테파노가 만든 '성 요한 복음사가'(추정)의 둥근 부조와 제단 아래 알베르토 디 베토 다 아시시(Alberto di Betto da Assisi)가 1421년에 만든 다색의 '피에타'가 있다. 입구 위에는 핀투리키오가 1504년에 그린 '피우스 3세의 교황 대관식' 프레스코화가 있다.[18]

도서관 내부는 대성당의 어둡고 엄숙한 분위기와 달리 밝고 화려한 색상으로 가득 차 있다.[17] 이는 벽과 천장을 뒤덮은 수많은 프레스코화 덕분이다.
벽에는 도서관이 헌정된 교황 피우스 2세의 생애에서 중요한 열 가지 장면을 묘사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17] 핀투리키오는 1502년부터 1507년 사이에 이 프레스코화 연작을 그렸으며, 여러 그림에 라파엘로와 자신을 그려 넣었다. 이 프레스코화가 적어도 부분적으로 라파엘로의 디자인에 기반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18] 이 걸작들은 매우 세밀하고 생생한 색채가 특징이며, 각 장면 아래에는 라틴어 설명이 덧붙여져 피우스 2세의 세속적, 종교적 경력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들을 보여준다.[18]


프레스코화의 열 가지 장면은 다음과 같다:
#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ESP)가 바젤 공의회로 떠나는 장면. 배경의 폭풍 장면은 서양 미술사상 최초의 시도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 스코틀랜드 궁정의 대사로서의 ESP.
# 프리드리히 3세 황제에게 궁정 시인으로 임명되는 ESP.
#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게 복종 서약을 하는 ESP.
# 시에나 주교인 ESP가 시에나의 포르타 카몰리아에서 프리드리히 3세 황제에게 그의 신붓감인 포르투갈의 엘레오노라를 소개하는 장면.
# 1456년 추기경으로 서임되는 ESP.
# 1458년 교황으로 선출되어 라테라노 궁으로 입성하는 ESP.
# 피우스 2세가 1459년 새로운 십자군을 선포하기 위해 만토바에서 제후 회의를 소집하는 장면.
# 피우스 2세가 1461년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를 시성하는 장면.
# 피우스 2세가 십자군을 시작하기 위해 안코나에 도착하는 장면.
천장은 네 개의 패널로 장식되어 있으며, 각 패널에는 신화적 주제가 그려져 있고 다채로운 기하학적 패턴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들은 1502년에서 1503년 사이에 핀투리키오와 그의 조수들이 제작했다.[18] 초승달 문양이 있는 파란색 세라믹 바닥 또한 방의 화려함을 더한다. 방 중앙에는 팔을 얽고 미소 짓는 세 여성의 대리석 조각상, 즉 세 여신상이 놓여 있다.[17] 이 조각상은 원래 그리스 작품을 로마 시대에 복제한 것으로, 도서관을 위해 특별히 구입되었다.[18]
4. 2. 산 조반니 세례당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it)은 피렌체나 피사와 달리 별도의 건물로 지어지지 않고, 시에나 대성당의 동쪽 후진(後陣) 지하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부지의 고저차를 이용한 설계이다. 세례당 건설은 1316년 대성당의 성가대석과 익랑 증축과 함께 카마이노 디 크레센티노의 감독 아래 시작되었다. 그러나 1322년, 로렌초 마이타니를 비롯한 전문가 위원회는 공사 중인 구조물에서 붕괴 위험이 있을 정도의 심각한 결함을 발견했다. 이러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시의회의 결정이 늦어지는 사이 공사는 계속 진행되었고, 결국 1325년에 세례당이 완공되었다.[18]
세례당의 주요 볼거리는 중앙에 위치한 육각형 세례반이다. 1416년부터 1430년 사이에 제작된 이 세례반에는 야코포 델라 케르차, 도나텔로, 로렌초 기베르티 등 당대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세례당 좌측 통로(좌랑)에 위치한 예배당 후면에는 풍부한 르네상스 장식과 함께 도나텔로가 제작한 청동 세례자 요한상이 있다.
또한, 세례당 내부에는 핀투리키오가 알베르토 아링히에리의 의뢰를 받아 1504년에서 1505년 사이에 그린 8점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이 중 ''세례자 요한의 탄생'', ''광야의 세례자 요한'', ''설교하는 세례자 요한'' 등이 원본 그림으로 남아있으며, ''몰타 기사단 망토를 걸친 아링히에리''와 ''갑옷을 입은 기도하는 기사'' 두 점의 초상화도 그렸다. 이 초상화들은 매우 상세한 배경 묘사가 특징이다. 하지만 일부 프레스코화는 17세기에 다시 칠해지거나 1868년에 완전히 대체되었다. 이 외에도 로렌초 디 피에트로 베키에타 등이 1450년경부터 1453년경까지 작업한 천장화와 예배당 벽화가 있다.
4. 3. 지하실
피렌체나 피사와 달리 시에나는 별도의 세례당을 건설하지 않았다. 세례당은 두오모 합창단 동쪽 부분 지하에 위치해 있다. 내부 건설은 주로 카마이노 디 크레센티노 감독하에 이루어졌으며, 1325년경 완공되었다.[18] 주요 볼거리는 도나텔로, 야코포 델라 케르차 등의 조각품이 있는 육각형 세례대이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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