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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 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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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비뇽 유수는 1309년부터 1377년까지 7명의 프랑스 출신 교황이 로마가 아닌 프랑스 아비뇽에 머물렀던 시기를 의미한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갈등으로 시작되어, 1305년 프랑스 출신 클레멘스 5세가 교황으로 즉위하면서 아비뇽으로 교황청이 이전되었다. 이 시기 교황청은 프랑스 왕의 영향력 아래 놓였으며, 교황청의 부패와 세속화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귀환하면서 아비뇽 유수는 종식되었지만, 그 후 서방교회 대분열로 이어져 교황권의 권위를 실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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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 유수
지도
프랑스 내 아비뇽 교황청의 교회 영토 지도
아비뇽의 교회 영토 지도
기본 정보
공식 명칭라틴어: Status Ecclesiasticus
오크어: Papat d'Avinhon
프랑스어: Papauté d'Avignon
일반 명칭교황령
시대중세
지위교황 월경지 및 코타베나생의 일부로서 프랑스 내 위치
제국교황령
정부 형태신권 절대 선출 군주제
존속 기간1309년–1376년
시작 연도1309년
시작 사건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이전
종료 사건마지막 아비뇽 교황의 로마 귀환
종료 날짜1377년
이전 국가코타베나생
프랑스 왕국
계승 국가코타베나생
프랑스 왕국
교황령의 깃발 (1300년대)
교황령의 깃발 (1300년대)
아비뇽 교황청의 문장
아비뇽 교황청의 문장
수도
수도아비뇽
언어
공용어라틴어
오크어
프랑스어
종교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통화
통화로마 스쿠도
지도자
직책교황
첫 번째 지도자클레멘스 5세
첫 번째 지도자 재임 기간1305년–1314년
마지막 지도자그레고리오 11세
마지막 지도자 재임 기간1370년–1378년
오늘날
현재 국가프랑스

2. 경과

1303년 필리프 4세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대립 중에 아나니 사건이 발생하여 교황이 프랑스군에게 습격당하고 얼마 후 사망했다.[22][23] 이후 교황들은 프랑스 국왕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1305년 프랑스 출신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즉위하면서 1309년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이전되었다.[24] 당시 아비뇽은 프랑스 왕국 영토가 아닌 프로방스 백작의 영지였다. 아비뇽 유수 기간에는 프랑스 출신의 추기경들이 대거 등용되었으며 교황 또한 모두 프랑스 출신이었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교황청의 부패와 로마를 비운 것을 비판하며 아비뇽을 "서방의 바빌론"으로 표현하였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귀환하여 유수는 종식되었다.[24] 그러나 곧이어 서방교회 대분열(1378~1417)이 발생하였다.[25] 교황 우르바노 6세와 친 프랑스파 추기경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여, 친 프랑스파 추기경들은 클레멘스 7세를 옹립하여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였다. 클레멘스 7세는 아비뇽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교황청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로마와 아비뇽 두 곳에 교황이 공존하는 서방교회 대분열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2. 1. 아비뇽 유수기의 교황

교황 클레멘스 5세(1305년~1314년)는 1309년 3월 9일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이전했다.[7] 이후 교황 요한 22세(1316년~1334년), 교황 베네딕토 12세(1334년~1342년), 교황 클레멘스 6세(1342년~1352년), 교황 인노첸시오 6세(1352년~1362년)가 아비뇽에 거주했다. 교황 우르바노 5세(1362년~1370년)는 1367년부터 1370년까지 로마에 거주했다가 1370년 아비뇽으로 돌아왔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1370년~1378년)는 1376년 9월 13일 로마로 귀환하기 위해 아비뇽을 떠났다.[7]

이후 가톨릭 역사 서술에서는 이들을 정통 교황으로 인정한다.

교황재위 기간
클레멘스 5세1305년–1314년
요한 22세1316년–1334년
베네딕토 12세1334년–1342년
클레멘스 6세1342년–1352년
인노첸시오 6세1352년–1362년
우르바노 5세1362년–1370년
그레고리오 11세1370년–1378년


3. 배경

프랑스 아비뇽교황궁


아비뇽 유수 시대를 애도하는 검은 옷을 입은 미망인으로서의 로마를 의인화한 그림


중세 후기 교황청은 영적인 역할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역할도 수행했다.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간의 갈등은 세속 권력의 주도권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14세기 초 교황권은 절정기를 지나 쇠퇴하고 있었으며, 프랑스필리프 4세는 교회 재정을 장악하려 하면서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갈등을 빚었다.[8][9]

1302년 11월,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교황 칙서 우남 상탐(Unam sanctam)을 발표하여 "모든 인간은 로마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선포하며 교황권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는 필리프 4세를 겨냥한 것이었고, 필리프 4세는 "세속적인 일에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도 복종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다.[10]

1303년,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랑스 국왕을 파문하고 프랑스 전체에 파문을 내리는 교황령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 교황령이 확정되기 전에, 프랑스 국왕의 이탈리아 동맹국들이 교황의 관저에 침입하여 보니파시오 8세를 구타했다. 그는 얼마 후 사망했고, 베네딕토 11세가 뒤를 이었으나 8개월 만에 사망했다. 이후 프랑스인이자 필리프 4세의 측근인 클레멘스 5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1305년에 선출된 클레멘스 5세부터 아비뇽 유수 기간 동안 모든 교황은 프랑스인이었다. 당시 남부 프랑스(오크시타니아)는 북부 프랑스와는 독립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아를 왕국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고, 랑그도크의 문화는 북부와 달랐다. 알비 십자군의 영향으로 카타리파라는 독자적인 기독교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클레멘스 5세는 교황청을 푸아티에로 옮겼다가 1309년 아비뇽으로 이전했다. 이는 로마 가문들의 내분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아비뇽은 교황령인 베네송 공작령으로 둘러싸여 있어 안전했다. 공식적으로는 아를의 일부였지만, 실제로는 프랑스 국왕의 영향 아래 있었다. 아비뇽 교황청은 왕실 법정의 특징을 채택했고, 프랑스 추기경들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으며, 프랑스 군대의 근접성은 보니파시오 8세에 대한 기억과 함께 세속 권력을 상기시켰다.

3. 1. 교황청 행정의 중앙집권화

클레멘스 5세와 요한 22세 시기, 가톨릭 교회는 행정 조직을 재편하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8] 교황청은 수입직 임명권을 직접 행사하면서, 기존의 선거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9]

교황청과 추기경들은 다양한 재정 수입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주요 수입원은 다음과 같다.

수입원설명
십일조교회 재산에 부과되는 10%의 세금
연납금주교 등 성직 임명 첫 해 수입
특별세십자군 전쟁 등 특별한 명목으로 부과되는 세금
특별 허가수입직 진입, 개종 유대인의 비개종 부모 방문 등 다양한 경우에 대한 허가



요한 22세, 베네딕토 12세, 클레멘스 6세 등은 값비싼 의복과 제, 제 식기를 사용하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10] 고위 성직자들의 생활은 성직자보다는 왕족에 가까웠고, 이는 하위 성직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부패를 심화시켰다. 주교들은 수입직을 얻기 위해 1년치 수입을 바쳐야 했고, 이를 벌충하기 위해 사면 판매 등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3. 2. 정치적 교황청

가톨릭교회는 세속 구조에 깊이 뿌리내리고 재산을 중시하는 기관이 되면서, 14세기 초부터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비판이 이단으로 선언되기 시작했다. 프라티첼리, 왈덴스파, 보헤미아후스파(존 위클리프에게 영향을 받음) 등이 대표적이다. 교회 고위층의 부의 과시는 가난과 원칙 준수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와 어긋나 교황청의 적들에게 비난의 빌미를 제공했다. 프랑스의 필립 왕과 루트비히 4세는 이러한 점을 이용했다. 루트비히 4세와의 갈등 과정에서 요한 22세는 교황청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와 윌리엄 오컴을 파문하고, 이들은 뮌헨에서 루트비히 4세의 보호를 받았다. 윌리엄 오컴은 교황에게 70가지 오류와 7가지 이단을 주장하며 맞섰다.[1]

비엔 공의회에서 열린 템플 기사단 재판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사건으로, 여러 세력과 그 관계를 보여준다. 1314년 비엔 공의회는 템플 기사단의 유죄 여부를 판결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공의회는 기사단 전체의 유죄를 확신하지 못했고, 증거도 부족하여 유죄 판결을 내릴 가능성이 낮았다. 그러나 기사단의 막대한 재산을 노린 프랑스 왕의 압력으로 클레멘스 5세는 칙령을 통해 기사단을 탄압했다.[1]

비엔의 생 모리스 대성당에서 프랑스 왕과 그의 아들 나바라 국왕이 칙령을 발표할 때 교황 옆에 앉았다. 파문 위협 때문에 교황의 질문 없이는 아무도 말할 수 없었다. 템플 기사단을 변호하기 위해 비엔에 온 기사단원들은 변론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당초 공의회 추기경들은 변론을 허용해야 한다고 결정했지만, 프랑스 왕이 비엔에 도착하면서 압력을 가해 결정이 번복되었다.[1]

4. 14세기 교황청

14세기 교황청은 프랑스 국왕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다. 아나니 사건 이후 교황들은 프랑스 국왕의 꼭두각시처럼 행동했으며,[23] 프랑스는 교황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11]


  •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출신으로 프랑스 궁정과의 관계가 밀접했으며, 템플 기사단 탄압 등 프랑스 왕의 요구에 협조했다.
  • 요한 2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와의 갈등으로 프랑스 왕에게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 베네딕토 12세는 카타리파 진압에 적극적이었으며, 프랑스와 영국 간의 중재를 시도하기도 했다.
  • 클레멘스 6세 재위 기간(1342~1352) 동안 교황청은 프랑스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였다. 클레멘스 6세는 루앙 대주교와 필리프 4세의 고문을 지낸 경력으로 프랑스 궁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자신의 재산으로 프랑스의 전쟁 비용을 지원하기도 했다.[12]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고, 아비뇽 교황청은 유례없는 호화로움을 누렸다. 클레멘스 6세는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던 시기(1347~1350)의 교황이었으며, 1348년 아비뇽을 매입하여 교황령에 편입시켰다.[12]
  • 인노첸시오 6세(1352~1362)는 전임 교황보다 덜 당파적이었으나, 프랑스 국왕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는 1345년과 1348년 교황 사절로 활동하며 프랑스와 영국 간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의 금욕적인 태도는 양측 귀족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해 프랑스 국왕은 교황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 우르바노 5세(1362~1370) 시대에는 샤를 5세가 교황청을 더욱 직접적으로 장악했다. 우르바노 5세는 베네딕토 12세 이후 가장 금욕적인 아비뇽 교황으로 평가받지만, 전략가가 아니었고 프랑스 왕에게 상당한 양보를 했다.
  • 그레고리오 11세는 교황령과 로마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로마 귀환을 결정했다. 교황청에 대한 반대가 강해지자, 피렌체는 교황과 공개적으로 충돌했고, 이 갈등은 8성인 전쟁(1375~1378)으로 이어졌다.

4. 1. 협력

필리프 4세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대립 중 발생한 아나니 사건 이후, 교황들은 프랑스 국왕의 꼭두각시처럼 행동했다.[23] 보니파시오 8세 사후 프랑스는 교황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11]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 출신으로 프랑스 궁정과의 관계가 밀접했으며, 템플 기사단 탄압 등 프랑스 왕의 요구에 협조했다. 요한 2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와의 갈등으로 프랑스 왕에게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베네딕토 12세는 카타리파 진압에 적극적이었으며, 프랑스와 영국 간의 중재를 시도하기도 했다.

4. 2. 굴복

클레멘스 6세 재위 기간(1342~1352) 동안 교황청은 프랑스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였다. 클레멘스 6세는 루앙 대주교와 필리프 4세의 고문을 지낸 경력으로 프랑스 궁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자신의 재산으로 프랑스의 전쟁 비용을 지원하기도 했다.[12]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고, 아비뇽 교황청은 유례없는 호화로움을 누렸다. 클레멘스 6세는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던 시기(1347~1350)의 교황이었으며, 1348년 아비뇽을 매입하여 교황령에 편입시켰다.[12]

클레멘스 6세


인노첸시오 6세(1352~1362)는 전임 교황보다 덜 당파적이었으나, 프랑스 국왕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는 1345년과 1348년 교황 사절로 활동하며 프랑스와 영국 간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그의 금욕적인 태도는 양측 귀족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해 프랑스 국왕은 교황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교황 특사들은 갈등을 종식시키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1353년 포르토와 산타 루피나의 주교(포르토와 산타 루피나의 교구) 기 드 불로뉴는 평화 회의를 소집했으나, 프랑스 궁정과의 유착에 대한 영국 측의 불신으로 실패했다. 인노첸시오 6세는 랭커스터 공작 헨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록 우리가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 프랑스 왕국을 특별히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평화를 위해 우리는 사적인 편견을 버리고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노력했습니다."라고 밝혔다.

우르바노 5세(1362~1370) 시대에는 샤를 5세가 교황청을 더욱 직접적으로 장악했다. 우르바노 5세는 베네딕토 12세 이후 가장 금욕적인 아비뇽 교황으로 평가받지만, 전략가가 아니었고 프랑스 왕에게 상당한 양보를 했다. 1369년 플랑드르 백작령의 마르가레타 3세와 부르고뉴 공작령의 필리프 대담한 자의 결혼을 지지하고, 에드워드 3세 아들의 결혼을 불허한 것은 교황청의 당파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4. 3. 8성인 전쟁 (War of the Eight Saints)

그레고리오 11세는 교황령과 로마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로마 귀환을 결정했다. 교황청에 대한 반대가 강해지자, 피렌체는 교황과 공개적으로 충돌했고, 이 갈등은 8성인 전쟁(1375~1378)으로 이어졌다. 시에나의 카타리나는 교황의 로마 귀환을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3][14]

1376년 로마로 귀환한 그레고리우스 11세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 재위 시, 교황에게 우호적인 세력과 적대적인 세력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교황령과 로마 자체의 충성심에 위협이 되었다. 1374년과 1375년 식량 부족 시 교황청이 곡물 수출 금지 조치를 내리자, 피렌체는 교황청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했는데, 밀라노, 볼로냐, 페루자, 피사, 루카, 제노바가 참여했다.

교황 특사인 제네바의 로베르트는 사보이아 가문의 친척으로, 이들 도시에 대한 지배력을 재확립하기 위해 특히 무자비한 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그레고리우스 교황을 설득하여 브르타뉴 용병을 고용하게 했다. 체세나 주민들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존 호크우드를 고용하여 대다수 주민을 학살했는데(2,500명에서 3,500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됨) 이러한 사건 이후 교황청에 대한 반대가 강해졌다.

피렌체는 교황과 공개적으로 충돌했는데, 이 갈등은 갈등을 조율하기 위해 선출된 8명의 피렌체 의원들을 가리켜 "8성인 전쟁"이라고 불린다. 피렌체 전역이 파문당했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성직자 세금 납부가 중단되었다. 무역이 심각하게 방해받자 양측은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5. 서방교회 대분열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카타리나 시에나의 권고를 받아들여 교황청을 로마로 복귀시켰으나, 이듬해 그레고리오 11세가 선종하면서 아비뇽 유수는 막을 내렸다.[19] 새 교황 선출 과정에서 로마에서는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선출되었지만, 프랑스 추기경들은 이에 반발하여 별도로 클레멘스 7세(대립교황)를 선출하면서 로마와 아비뇽 두 곳에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는 서방교회 대분열(시스마)이 발생했다.[20]

1409년 피사 공의회에서 이 분열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세 명의 교황이 난립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교황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이 분열은 1417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마르티누스 5세가 새 교황으로 선출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6. 영향

아비뇽 유수와 서방교회 대분열은 교황권의 권위를 크게 떨어뜨렸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15] 교황청은 프랑스 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유럽의 정치적 세력 균형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4세기 말,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유럽의 주요 강국으로 부상했으며, 교황청은 대부분의 직접적인 정치적 권력을 상실했다.[20]

14세기 동안 교황청과 프랑스의 관계는 보니파시오 8세와 프랑스 필리프 4세 사이의 공개적인 갈등으로 시작하여 1305년부터 1342년까지 협력 관계로, 그리고 마침내 1378년까지 프랑스 왕권의 강한 영향 아래 놓이는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교황청의 이러한 편향은 교황청에 대한 존경심이 떨어진 이유 중 하나였으며, 이는 1378년부터 1417년까지의 서방교회 대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서방교회 대분열 시기 동안 교황청의 권력 투쟁은 주요 강대국들의 전장이 되었고, 프랑스는 아비뇽의 대립교황을 지지했고, 잉글랜드는 로마의 교황을 지지했다.

참조

[1] 서적 The Avignon Papac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서적 The Oxford Companion to Christian Thought Oxford University Press
[3] 웹사이트 Catholic Encyclopaedia entry http://www.newadvent[...]
[4] 서적 The Ecumenical Councils of the Catholic Church: A History Liturgical Press
[5] 서적 Saints & Sinners: A History of the Popes Yale University Press
[6] 서적 The History of the Council of Constance A. Bettesworth
[7] 서적 Reform and Revolution in France: The Politics of Transition, 1774–1791 Cambridge University Press
[8] 서적 Caesaris Baronii Annales Ecclesiastici Bar-le-Duc
[9] 서적 History of France from the Earliest Times to 1848 New York
[10] 웹사이트 The Acts and Monuments https://www.dhi.ac.u[...] The Digital Humanities Institute 2024-10-23
[11] 서적 Papal Genealogy: The Families and Descendants of the Popes McFarland
[12] 서적 Avignon Papacy Routledge
[13] 서적 Raiding Saint Peter: Empty Sees, Violence, and the Initiation of the Great Western Schism (1378) Brill
[14] 서적 The English in Rome, 1362–1420: Portrait of an Expatriate Commun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5] 웹사이트 Medieval Sourcebook: Petrarch: Letter Criticizing the Avignon Papacy http://www.fordham.e[...] Fordham.edu 2011-06-10
[16] 서적 書簡集 岩波文庫
[17] 서적 黒死病 ペストの中世史 中央公論新社
[18] 서적 世界大百科事典 平凡社
[19] 서적 グローバルワイド最新世界史図表 第一学習社
[20] 서적 世界史用語集改訂版 山川出版社
[21] 백과사전 아비뇽유수 (Avignonese Captivity) 두산백과
[22] 백과사전 아나니 사건 종교학대사전 1998-08-20
[23] 백과사전 아비뇽 유수 시사상식사전
[24] 서적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 2005-12-10
[25] 서적 이야기 프랑스사 청아출판 200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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