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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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는 니카라과의 반제국주의 혁명가로, 1895년 니카라과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멕시코 혁명의 영향을 받아 반제국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사상을 접했으며, 1926년 니카라과 내전 발발 후 농민들을 규합하여 게릴라전을 이끌었다. 그는 미국의 니카라과 개입에 저항하며 민족주의적 투쟁을 벌였으나, 1934년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의 명령으로 암살당했다. 산디노는 이후 니카라과와 라틴 아메리카에서 미국의 지배에 저항한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그의 게릴라전 방식은 다른 혁명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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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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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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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아우구스토 니콜라스 칼데론 산디노 |
출생일 | 1895년 5월 18일 |
출생지 | 니카라과 마사야 주 니키노오모 |
사망일 | 1934년 2월 21일 |
사망지 | 니카라과 마나과 라레이나가 |
사망 원인 | 암살 |
활동 기간 | 1927년–1933년 |
알려진 이유 | 니카라과 혁명 지도자 |
소속 정당 | 민주당 (니카라과) |
운동 | 니카라과 국가 주권 수호군 (Ejército Defensor de la Soberanía Nacional de Nicaragua, 또는 EDSN) |
반대 세력 | 소모사 가문 미국 |
배우자 | 블랑카 아라우즈 |
서명 | Augusto C. Sandino Signature.svg |
로마자 표기 | Augusto César Sandino |
스페인어 발음 | /auˈɣusto se sanˈdino/ |
문화어 표기 | 아우구스또 쎄싸르 싼디노 |
혁명 활동 | |
활동 | 산디노 전쟁 (바나나 전쟁) |
조직 | 니카라과 국토주권수호군 |
2. 생애
니카라과의 혁명가이자 게릴라 지도자였던 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는 부유한 지주와 원주민 하녀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1921년, 어머니를 모욕한 마을 사람에게 총격을 가한 사건 이후 멕시코로 망명하여 멕시코 혁명을 경험하며 인디헤니스모(indigenismo, 원주민 민족주의) 성향을 갖게 되었다.
1926년, 니카라과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아돌포 디아스의 보수당 정부에 맞서 후안 바티스타 사카사의 자유당이 내전을 일으키자, 산디노는 1927년 라스 세고비아스로 돌아와 지역 농민들을 규합하여 자유당 측에 가담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미국의 개입으로 양측은 무장 해제와 국민위병 창설, 미국 감독 하의 선거 실시에 합의했다. 산디노는 이 협상 결과를 거부하고 무장 해제 요구에 불응하며, 추종자들과 함께 세고비아 지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반군 활동을 이어나갔다.
1931년 니카라과 지진으로 정부 기능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산디노 반군은 세력을 확장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대공황으로 인해 해외 군사 개입 여력이 약화된 미국은 1933년 후안 바티스타 사카사 정권 수립을 지원한 뒤 해병대를 철수시켰다. 1934년 2월, 산디노는 사카사 대통령과 만나 무장 해제 대신 니카라과 북부 지역에서 산디니스타들의 권리 보장을 확보하고자 협상했다. 하지만 산디노는 여전히 미국 장교들의 영향력 아래 있는 국민위병의 해산을 지속적으로 요구했고, 이에 반감을 품은 국민위병 사령관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장군은 독단적으로 암살을 지시했다. 결국 2월 21일, 사카사 대통령과의 회담을 마치고 나오던 산디노는 국민위병대에 의해 암살되었다. 소모사는 산디노 암살 2년 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산디노의 저항 정신은 이후 니카라과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1961년 결성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은 산디노의 유지를 계승함을 내세웠고, 1979년 마침내 소모사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다. 산디니스타 정권 하에서 산디노는 복권되었으며, 2010년 니카라과 국민회의는 만장일치로 그를 "국민영웅"으로 추대했다.
2. 1. 초기 생애
'''아우구스토 니콜라스 칼데론 산디노'''는 1895년 5월 18일 니카라과 마사야주의 작은 마을 니키노호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페인계 백인으로 작은 커피 농장을 운영하던 돈 그레고리오 산디노였고, 어머니는 그의 농장에서 일하던 원주민 하녀 마르가리타 칼데론이었다. 산디노는 둘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5]산디노는 9살 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아버지가 결혼하면서 정식 아들로 인정받아 아버지와 그의 가족이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6] 이때부터 아버지의 성인 산디노를 따랐고, 어머니의 성인 칼데론은 중간 이름(C)으로 사용했다.[7] 그는 사생아였지만 아버지로부터 장남 대우를 받았고, 지식인이었던 아버지 서재의 책들을 읽으며 공부했다. 로마 제국 역사를 읽고 자신의 이름 C를 '카이사르'(Caesar)로 여기기도 했다.
17세였던 1912년 7월, 산디노는 아돌포 디아스 대통령에 대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니카라과에 개입한 미군을 목격했다. 당시 많은 니카라과인들은 디아스 대통령을 미국의 꼭두각시로 여겼다. 히노테가주 라 콘코르디아의 벤하민 셀레돈 장군은 그해 10월 4일, 미 해병대가 코요테페 언덕 전투에서 코요테페 요새와 마사야 시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전사했다. 미 해병대는 셀레돈의 시신을 소달구지에 실어 카타리나에 묻었다. 이러한 경험은 산디노의 반미 감정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니카라과 공업학교를 다닌 후 코스타리카에서 기능공으로 일했던 산디노는 1921년 니카라과로 돌아왔다. 26세가 된 그해, 술집에서 어머니에 대해 비난하는 발언을 한 유력 보수주의자 마을 사람의 아들 다고베르토 리바스를 총으로 쏘았으나 살해하지는 못했다. 이 사건으로 니카라과에 머물 수 없게 된 산디노는 온두라스, 과테말라를 거쳐 멕시코로 망명했다.
멕시코에서는 탐피코 항구 근처의 스탠더드 오일 정유소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당시 멕시코는 멕시코 혁명의 군사적 단계가 끝나고 1917년 헌법에 기반한 새로운 "제도적 혁명" 정권이 수립되던 시기였다. 산디노는 이곳에서 성실한 노동자로 일하며 노동쟁의를 경험하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영매주의, 그리고 반제국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등 다양한 사상을 접했다. 특히 멕시코 혁명의 반교권주의와 라틴 아메리카의 원주민 유산을 찬양하는 인디헤니스모 사상을 받아들였다. 멕시코 노동자들에게 니카라과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던 경험은 그의 애국심을 더욱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산디노가 훗날 즐겨 입었던 서부극에 나오는 총잡이 같은 복장은 이때 유전에 드나들던 텍사스 출신 상사의 복장을 모방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한편, 산디노의 아버지 돈 그레고리오는 열렬한 자유당원이었고, 산디노 역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자유당을 지지했다. 이는 훗날 그가 헌법 수호 전쟁이 발발했을 때 자유당군 장군으로 참전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2. 2. 니카라과 내전과 게릴라 활동
1926년 니카라과에서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아돌포 디아스의 보수당과 이에 대항하는 후안 바티스타 사카사의 자유당 간의 니카라과 내전이 발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산디노는 니카라과로 돌아왔다.귀국 직후, 카리브해 연안 항구 푸에르토 카베사스에서 자유당 군인들이 미국의 지원을 받는 보수당 대통령 아돌포 디아스에 맞서 봉기하면서 헌법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봉기 지도자 호세 마리아 몬카다 장군은 망명 중이던 자유당 부통령 후안 바우티스타 사카사를 지지한다고 선언했고, 사카사는 12월 푸에르토 카베사스에 도착하여 멕시코의 승인을 받은 "헌법적"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산디노는 주로 금광 광부들로 임시 군대를 조직하여 산 알비노 광산 근처의 보수당 수비대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몬카다를 만나러 푸에르토 카베사스로 갔지만, 자유당 주류와 별개로 독자적인 게릴라 활동을 벌이는 산디노를 몬카다는 불신했다.[10] 사카사 역시 산디노의 무기 및 군사 위원회 요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산디노가 도주하는 보수당 군인들에게서 소총을 노획하자, 다른 자유당 지휘관들은 그에게 위임장을 주기로 합의했다.
1927년, 산디노는 라스 세고비아스 지역으로 돌아가 현지 농민들을 모집하여 정부군을 상대로 성공적인 공격을 이어갔다. 4월에는 산디노 부대가 마나과로 진격하는 주요 자유당 군대를 지원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멕시코의 지원을 받은 몬카다의 자유당 군대가 수도를 점령할 것처럼 보였으나, 미국은 군사 개입 위협으로 자유당 장군들에게 휴전을 강요했다.
1927년 5월 4일, 양측 대표는 미국 대통령 캘빈 쿨리지의 특사 헨리 L. 스팀슨이 중재한 에스피노 네그로 협정에 서명했다. 협정에 따라 양측은 무장을 해제하고 디아스 대통령의 임기 보장, 그리고 과르디아 나시오날(국가경비대) 창설에 합의했다. 미국의 감독 하에 11월 대통령 선거를 치르기로 했으며, 협정 이행을 위해 로건 펠랜드 소장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가 니카라과에 주둔했다.
산디노는 에스피노 네그로 협정과 무장 해제 요구를 거부하고, 추종자들과 함께 세고비아 산맥으로 들어가 반군 활동을 계속했다. 1931년 니카라과 지진으로 정부 기능이 마비되자 산디노 반군의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2. 3. 암살
대공황의 여파와 미국의 좋은 이웃 정책에 따라, 마지막 미 해병대는 후안 바티스타 사카사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1933년 1월 니카라과를 떠났다. 미군 철수 후 산디노는 1933년 2월 수도 마나과에서 사카사 대통령과 만나 충성을 맹세하고, 3개월 이내에 자신의 부대가 무기를 반납하도록 명령하는 데 합의했다.[30] 그 대가로 사카사는 무기를 항복한 병사들에게 코코 강 계곡의 토지에 대한 소작권을 주기로 합의했고,[30] 정부의 명령에 따라 100명의 산디니스타 전투원이 그 지역을 경비하게 하고,[30] 니카라과 북부의 공공 사업에 산디니스타를 우선적으로 고용하기로 합의했다.[30]
그러나 산디노는 미국 군부와의 유착 때문에 위헌적이라고 생각한 니카라과 국가경비대에 반대했고,[10] 해산을 주장했다.[10] 국가경비대 지도자인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 장군과 그의 장교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일반 국가경비대 병사들에게 산디노를 인기 없게 만들었다.[10] 사카사와 상의하지 않고,[10] 소모사 가르시아는 산디노의 암살을 명령하여 경비대 고위 장교들의 충성심을 얻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10]
1934년 2월 21일, 산디노, 그의 아버지, 그의 형제 소크라테스, 그의 두 총애하는 장군 에스트라다와 우만소르, 그리고 사카사 대통령의 농업부 장관이었던 시인 소포니아스 살바티에라는 사카사와의 새로운 회담에 참석했다.[31] 회담 후 사카사 대통령궁을 나서던 여섯 명은 대문에서 니카라과 국가경비대 대원들에게 차를 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31] 경비대원들은 산디노의 아버지와 살바티에라를 제외하고 산디노, 그의 형제 소크라테스, 그리고 두 장군을 라레이나가(Larreynaga)의 삼거리로 데려가 처형했다.[31] 산디노의 유해는 소모사 가르시아 장군의 심복 중 한 명인 리고베르토 두아르테(Rigoberto Duarte) 소령이 지휘하는 국가경비대 부대에 의해 마나과의 라레이나가 지역에 매장되었다.[31]
다음 날, 국가경비대는 산디노의 군대를 대규모로 공격하여 한 달 만에 궤멸시켰다.[10] 2년 후, 소모사 가르시아 장군은 사카사를 사임하게 강요하고 자신을 니카라과 대통령으로 선포했다. 그는 니카라과를 다음 40년 동안 지배하는 독재 정권과 왕조를 수립했다.
산디노의 시신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그의 암살과 그의 유해의 행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니카라과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미스터리 중 하나이다. 산디노의 시신에 대한 몇 가지 가설은 다음과 같다.
- 매장: 처형 목격자들은 경비대원들이 산디노와 다른 세 명의 포로를 땅에 눕히고 총을 쏜 후 매장하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31] 산디노의 추종자들은 나중에 산디노의 시신을 발굴하여 공개되지 않은 장소에 다시 매장했다고 한다.[31]
- 화장: 1944년, 산디노 암살 10년 후, 라 칼라베라(La Calavera) 구덩이에 매장되었던 유해가 발굴되어 티스카파(Tiscapa) 호수 남쪽 근처로 옮겨져 화장되었고, 그 재는 마나과 호에 뿌려졌다. 이는 그 해 마나과 중앙대학교 학생들의 소모사 대통령 재선에 반대하는 시위 때문이었다.
- 전리품: 산디니스타 전승에 따르면, 소모사의 암살자들은 산디노의 머리를 베어 시신을 훼손한 후, 그 잘린 머리를 그들의 충성심을 보여주는 표식으로 미국 정부에 전달했다.
3. 사상과 이념
(내용 없음)
3. 1. 반제국주의와 민족주의
멕시코 망명 시절, 산디노는 멕시코 혁명의 영향을 받았고 반제국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등 다양한 사상을 접하며 라틴 아메리카의 원주민 유산을 강조하는 ''인디헤니스모'' 사상을 받아들였다. 이는 그의 반미, 민족주의 사상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니카라과로 돌아온 산디노는 헌법주의 전쟁에 참여했으나, 미국의 개입으로 호세 마리아 몬카다 등 자유당 지도부가 미국과 타협하자 이를 거부했다. 1927년 5월, 미국 특사 헨리 L. 스팀슨이 주도한 에스피노 네그로 협정이 체결되어 자유당과 보수당 양측의 무장 해제와 미군 주둔 하의 선거 실시가 결정되었지만, 산디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추종자들과 함께 세고비아 산맥으로 들어가 무장 투쟁을 계속했다.
1927년 7월 초, 산디노는 몬카다가 자유주의 혁명을 배신했다고 비난하며, 미국을 "북쪽의 거인"이자 "우리 민족의 적"이라고 부르며 선전포고를 했다.[9] 그는 자신의 투쟁을 단순히 니카라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도-히스파닉 민족" 전체, 즉 라틴 아메리카 전체를 미국의 제국주의로부터 방어하는 것이라는 인종적,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보았다. 같은 해 7월 1일 발표한 '산 알비노 선언'에서는 미국의 침략을 강하게 규탄하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밝혔다.[35][36]
> 와라, 모르핀 중독자 떼들아! 우리 땅에 와서 우리를 죽이려 하거든, 나는 애국적인 병사들을 이끌고 굳건히 서서 너희를 기다리겠다. 너희가 얼마나 많은지 상관없다. 명심하라. 이 일이 벌어지면, 너희의 위대함의 파괴는 워싱턴의 국회의사당을 뒤흔들 것이며, 너희의 피는 너희의 유명한 백악관, 즉 너희의 범죄를 모의하는 동굴을 덮고 있는 흰 구체를 붉게 물들일 것이다.
> — 산디노, 1927년 7월 1일[35][36]
산디노의 주요 요구는 아돌포 디아스 대통령의 사임, 미군 철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감독하는 새로운 선거, 그리고 미국에 니카라과 운하 건설 독점권을 부여한 브라이언-차모로 조약의 폐기였다. 그러나 1928년 10월, 미국이 감독한 선거에서 자신의 옛 상관이자 이제는 정적이 된 호세 마리아 몬카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산디노는 선거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몬카다와의 협상을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요구 사항을 확대하여 중앙아메리카 연합의 복원을 주장하며 이를 자신의 정치적 목표의 핵심으로 삼았다.
1929년 3월, 아르헨티나 대통령 히폴리토 이리고옌에게 보낸 "볼리바르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계획"이라는 편지에서 산디노는 더욱 야심 찬 구상을 밝혔다. 그는 모든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참여하는 회의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하여 "인도-라틴 아메리카 대륙 및 안틸레스 연방"이라는 단일 정치체를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이를 통해 라틴 아메리카가 미국의 지배에 저항하고 니카라과 운하를 라틴 아메리카의 통제하에 둘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산디노는 국제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온두라스의 시인이자 외교관인 프로일란 투르시오스를 공식 외교 대표로 임명하여 중남미 국가들과 멕시코에서 지지를 확보하려 했고, 멕시코에서는 니카라과 망명자 페드로 세페다가 대표 역할을 했다. 코민테른 남미 지부 산하의 범미 반제국주의자 동맹과 미국 공산당은 산디노를 지지하며 미국의 개입에 반대하는 집회를 조직했다. 중화민국의 중국 국민당은 북벌 과정에서 미군과 충돌한 경험을 바탕으로 산디노의 이름을 딴 '산디노 여단'을 편성하기도 했다.
오코탈 전투(1927년 7월) 등 미군과의 직접적인 전투에서는 큰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산디노는 게릴라전을 통해 끈질기게 저항했다. 미군은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산디노를 체포하는 데 실패했다. 미국 내에서도 미국 의회는 산디노 체포 작전에 소극적이었고, 버턴 K. 휠러 상원의원처럼 니카라과 개입에 비판적인 목소리도 나왔다.[20]
대공황으로 인해 미국의 해외 군사 개입 비용 부담이 커지자, 미국은 좋은 이웃 정책을 내세우며 1933년 1월 니카라과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미군 철수 후 산디노는 새로 취임한 후안 바우티스타 사카사 대통령과 만나 충성을 맹세하고 무장 해제에 합의했다. 그러나 그는 미군과의 유착 관계 때문에 니카라과 국가경비대를 위헌적인 조직으로 간주하고 해산을 주장했으며,[10] 이는 국가경비대 사령관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가르시아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3. 2. 영적 신념
멕시코 체류 기간 동안 산디노는 보편 공동체 자력 영령주의 학파(EMECU)의 회원이 되었다. EMECU는 1911년 바스크인 전기 기술자 호아킨 트린카도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설립한 단체로, 아나키즘의 정치적 이상과 조로아스터교, 카발라, 그리고 카르데크 영령주의를 독특하게 종합한 우주론을 결합했다. 트린카도는 자본주의와 볼셰비즘 모두를 비판하며, 인류 역사의 마지막 단계에서 기존의 모든 종교를 대체할 "빛과 진리의 영령주의"에 기반한 공산주의를 주장했다. 그는 이 마지막 단계가 20세기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시작될 것이며, 이 시기에는 사유 재산과 국가가 폐지되고, 잘못된 종교로 인한 증오가 사라지며, 모든 인류가 하나의 종족(히스패닉)과 하나의 언어(스페인어)로 통합되는 "보편 공동체"가 건설될 것이라고 보았다.산디노는 트린카도와 편지를 통해서만 소통했지만, 니카라과로 돌아온 후 그의 선언문과 개인적인 활동은 점차 EMECU의 이상에 영향을 받았다. 그는 트린카도를 자신의 공식 대표자 중 한 명으로 임명했으며, 기존에 사용하던 상징(미 해병대를 참수하는 농민 그림)을 EMECU의 상징으로 교체했다. 또한 이전의 공산주의 동료들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가장 신뢰했던 부관 중 한 명인 엘살바도르 출신의 파라분도 마르티와 관계를 끊었다. 산디노는 마르티가 공산주의자들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했다고 비난했다.
1931년 2월, 산디노는 자신의 신념에 나타난 새로운 천년왕국설적인 색채를 반영한 "빛과 진리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최후의 심판, 즉 "지상의 불의가 파괴되고 빛과 진리의 정신, 즉 사랑이 지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는 니카라과가 이 투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도록 선택받았으며, 자신의 군대는 신성한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라고 주장했다. 그는 "형제들이여, 니카라과에서 우리는 지상의 불의를 처벌하는 것을 시작하도록 신의 정의에 의해 선택받았다는 영광이 우리에게 돌아왔습니다."라고 선언했다.[25]
한편, 멕시코 탕피코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시절, 산디노는 노동쟁의를 목격하고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등 다양한 사상에 노출되며 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니카라과인이라는 이유로 멕시코 노동자들에게 차별받았던 경험은 그의 애국심을 키우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4. 국제적 연대
산디노의 투쟁이 성공을 거두면서, 그는 소련과 코민테른으로부터 상징적인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코민테른의 남미국 사무국이 감독하는 범미 반제국주의자 동맹은 산디노를 지지하는 여러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내에서는 반제국주의 연맹 미국 지부가 니카라과에서 미국 정부의 행동에 대한 반대를 공표했으며, 뉴욕시에 살던 산디노의 이복형제 소크라테스는 연맹과 미국 공산당이 조직한 니카라과 미국 개입 반대 집회에서 연사로 나섰다. 1928년 여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6차 세계대회는 "니카라과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산디노 장군의 영웅적인 민족 해방군에 대한 연대를 표명하는" 성명을 발표했다.[21]
중화민국에서는 북벌 과정에서 미 해병대와 충돌했던 중국 국민당 군대의 한 부대가 1928년 베이징 점령 후 "산디노 여단"으로 명명되었다.[21] 이듬해인 1929년 6월, 산디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세계 반제국주의 연맹 제2차 대회에 대표를 파견했다.
군사 및 재정적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산디노는 여러 라틴 아메리카 지도자들과 멕시코에 지원을 요청했다. 미군 철수를 대가로 한 항복 협상이 실패한 후, 멕시코 대통령 에밀리오 포르테스 길은 산디노에게 망명을 제안했고, 산디노는 1929년 6월 니카라과를 떠났다. 그러나 막시마토 시기 멕시코의 정치적 분위기는 산디노의 급진주의를 환영하지 않았고,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멕시코 정부는 산디노를 메리다 시에 사실상 감금했다. 호텔에 머물면서도 그는 지지자들과 계속 연락을 유지할 수 있었다.[24] 멕시코시티로 가서 포르테스 길 대통령을 만났지만 지원 요청은 거절당했다. 멕시코 공산당과의 관계도 점차 소원해졌고, 산디노가 멕시코 정부를 비판했다는 정보가 공산당에 의해 유출되면서 멕시코에서의 입지가 위험해졌다. 결국 1930년 4월, 산디노는 멕시코를 떠나 니카라과로 돌아왔다.
5. 유산
아우구스토 세사르 산디노는 니카라과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외세, 특히 미국의 개입과 국내 부유층의 지배에 맞서 싸운 저항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그는 많은 이들에게 민중의 영웅으로 여겨지며, 그의 투쟁은 단순한 국내 분쟁을 넘어 라틴 아메리카 전체의 반제국주의 운동과 연결되었다.
산디노의 사상과 그의 상징적인 모습, 특히 챙 넓은 모자는 1961년 창설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에 의해 계승되어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FSLN은 산디노의 이름을 내걸고 소모사 가문의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게릴라전 방식과 저항 정신은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우고 차베스 등 후대의 라틴 아메리카 혁명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여러 좌파 무장 단체들의 투쟁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산디노는 자신의 투쟁을 국제적인 연대로 확장하고자 노력했으며, 코민테른을 비롯한 국제 사회주의 운동과 중화민국의 국민당 등 다양한 세력으로부터 지지와 연대를 받았다. 그의 삶과 투쟁은 후대에 영화 ''산디노''(1990) 등으로 재조명되기도 했다.
5. 1. 니카라과에서의 평가
산디노는 미국과 같은 외세 및 부유한 엘리트들의 지배에 저항한 인물로, 니카라과뿐만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사람들에게 로빈 후드와 같은 영웅으로 여겨진다. 그는 미국의 통제에 반대했지만, 일반 미국인들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감정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사진과 특유의 챙 넓은 카우보이 모자를 쓴 실루엣은 1961년 카를로스 폰세카, 토마스 보르헤 등이 창설하고 이후 다니엘 오르테가가 이끈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의 상징으로 채택되었다.
산디노의 사상과 투쟁 방식은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우고 차베스 등 라틴 아메리카의 저명한 혁명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게릴라 전술은 쿠바 혁명, 콜롬비아의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 등 여러 좌파 무장 단체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1979년, 산디노의 정치적 후계자를 자처한 산디니스타는 독재자 소모사 가문의 마지막 통치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데바일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1980년대 산디니스타 정부는 수도의 관문인 마나과 국제공항의 이름을 '아우구스토 C. 산디노 국제공항'으로 변경하여 그를 기렸다. 그러나 2001년, 과거 소모사 정권 지지 세력이었던 아놀도 알레만 대통령은 집권 후 공항 이름을 다시 마나과 국제공항으로 되돌렸다.
이후 2007년, 다시 집권한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은 산디노의 역사적 의미를 복원한다는 취지하에 공항 이름을 '아우구스토 C. 산디노 국제공항'으로 재변경했다. 니카라과의 예술가 로헤르 페레스 데 라 로차는 소모사 독재 정권 시절 금기시되었던 산디노와 그의 동지들의 초상화를 다수 제작하여 니카라과의 국가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32]
산디노의 삶은 칠레-스페인 합작 영화 ''산디노''(1990)로 제작되기도 했다. 미구엘 리틴 감독이 니카라과 현지에서 촬영했으며,[33] 포르투갈 배우 조아킴 드 알메이다가 산디노 역을 맡고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딘 스톡웰, 빅토리아 아브릴, 앙헬라 몰리나 등 국제적인 배우들이 출연했다.[34]
5. 2. 국제적 영향
산디노는 자신의 투쟁을 단순히 니카라과 내부의 문제가 아닌, 미국의 개입에 맞서 "인도-히스파닉 민족" 전체를 방어하는 라틴 아메리카 전체의 투쟁으로 확장하여 인식했다. 그는 이러한 국제적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반란 초기에는 온두라스의 시인이자 외교관인 프로일란 투르시오스(Froylán Turcios)를 공식 외교 대표로 임명했다. 테구시갈파(Tegucigalpa)에 기반을 둔 투르시오스는 산디노의 선전물과 보고서를 배포하고, 무기와 자원봉사자를 제공하는 외부 지지자들과의 연락책 역할을 수행했다.[10] 멕시코에서는 니카라과 망명자 페드로 세페다(Pedro Zepeda)가 주요 대표로서 활동하며 멕시코 정부와의 관계를 조율했다.
산디노의 국제적 구상은 더욱 확장되어, 1929년 3월 아르헨티나 대통령 히폴리토 이리고옌(Hipólito Yrigoyen)에게 보낸 "볼리바르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계획"이라는 편지에서 구체화되었다. 그는 모든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참여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 회의를 제안하며, 이를 통해 "인도-라틴 아메리카 대륙 및 안틸레스 연방"이라는 단일 정치체를 구성하여 미국의 추가적인 지배에 공동으로 저항하고, 논란이 된 니카라과 운하(Nicaragua Canal) 건설 계획이 라틴 아메리카의 통제 하에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디노의 반제국주의 투쟁은 국제적인 지지와 연대를 이끌어냈다. 코민테른은 산디노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고, 코민테른 남미 지부 산하의 범미 반제국주의자 동맹은 그를 지지하는 성명을 여러 차례 발표했다. 이 조직과 미국 공산당은 미국의 니카라과 개입에 반대하는 집회를 조직했으며, 산디노의 이복동생 소크라테스는 뉴욕에서 열린 이러한 집회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중화민국의 국민당 역시 북벌 과정에서 미 해병대와 충돌한 경험을 바탕으로, 미군에 맞서 싸운 산디노의 이름을 딴 산디노 여단이라는 부대를 편성하며 연대의 뜻을 표했다.
산디노는 외세와 부유한 엘리트의 지배에 저항하는 모습으로 니카라과뿐만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로빈 후드와 같은 민중 영웅으로 여겨졌다. 그는 미국 정부의 통제에 반대했지만, 일반 미국인들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상징인 챙 넓은 카우보이 모자 실루엣과 사진은 1961년 카를로스 폰세카, 토마스 보르헤 등이 창설하고 이후 다니엘 오르테가가 이끈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의 중요한 상징으로 채택되었다.
산디노의 사상과 투쟁 방식은 후대의 라틴 아메리카 혁명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우고 차베스와 같은 인물들이 그를 숭배했으며, 그의 게릴라전 방식은 쿠바 혁명, 콜롬비아의 FARC, 엘살바도르의 FMLN, 그리고 산디니스타 자신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산디노의 영향력은 문화 영역으로도 이어져, 1990년 칠레-스페인 합작 영화 ''산디노''가 미구엘 리틴 감독에 의해 니카라과 현지에서 제작되었다.[33] 이 영화에는 조아킴 드 알메이다가 산디노 역을 맡았고,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딘 스톡웰, 빅토리아 아브릴, 앙헬라 몰리나 등 국제적인 배우들이 출연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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