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알아즈하르 모스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알아즈하르 모스크는 969년 파티마 왕조가 이집트를 정복한 후 건설된 이슬람 사원이다. 이슬람 세계의 학문 중심지이자 이집트의 주요 회중 모스크 역할을 해왔으며, 파티마, 아이유브, 맘루크, 오스만 제국 시대를 거치며 여러 차례 증축되었다. 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에는 대학교와 분리되어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과 정치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현재는 수니파 종교 당국으로서 이슬람 세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알아즈하르 모스크 - 알아즈하르 대학교
    알 아즈하르 대학교는 970년 파티마 왕조 시대 카이로의 알 아즈하르 모스크에 부속된 마드라사로 시작하여 이슬람 학문 중심으로 성장, 현대에는 종합대학으로 개편되어 종교 연구와 교육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 알아즈하르 모스크 - 알아즈하르의 대이맘
    알아즈하르의 대이맘은 1961년 신설된 직책으로 알아즈하르의 수장을 지칭하며, 과거에는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다가 현재의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 카이로의 모스크 - 무함마드알리 모스크
    무함마드알리 모스크는 이집트 카이로 시타델에 위치한, 무함마드 알리의 지시로 오스만 제국 양식을 차용하여 건설된 이슬람 건축의 대표적 사례로, 석회암과 설화 석고를 사용하여 넓은 안뜰과 웅장한 미나렛, 섬세한 내부 장식을 갖춘 이집트의 문화적 상징이자 관광 명소이다.
  • 카이로의 모스크 - 이븐 툴룬의 모스크
    이븐 툴룬의 모스크는 9세기 아흐메드 이븐 툴룬이 카이로에 건설한 이슬람 건축의 중요한 사례로, 나선형 미나렛과 넓은 안뜰이 특징이며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알아즈하르 모스크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알아즈하르 모스크
알아즈하르 모스크 외부 전경. 4개의 미나레트와 3개의 돔이 보임
알아즈하르 모스크 외부 전경
종교이슬람교
종파수니파
위치이집트 카이로
일반 정보
설립972년
건축 양식이슬람 건축, 파티마 건축, 맘루크 건축
수용 인원20,000명
미나레트 수5개
지도자
지도자아흐마드 알-타예브

2. 역사

알아즈하르 모스크는 파티마 왕조가 이집트를 정복한 직후인 970년에 건설되기 시작하여 972년에 완공되었다. 초기에는 '만수리야 모스크' 또는 '카이로 모스크'로 불렸으나, 이후 '가장 빛나는'이라는 뜻의 '알아즈하르'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는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를 가리키는 칭호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1] 파티마 왕조 시대에 알아즈하르는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 신앙의 중심지이자 학문 연구의 주요 기관으로 발전했다.

1171년 살라딘이 아이유브 왕조를 세우면서 알아즈하르는 시련을 겪었다. 살라딘은 시아파 학문에 반감을 가졌고, 알아즈하르에서의 집단 예배를 금지했으며, 교육 지원도 중단했다. 그러나 알아즈하르는 학문의 장으로서 명맥을 유지했고, 일부 학자들은 개인 교습을 통해 명맥을 이어갔다.[1]

맘루크 왕조 시대인 1266년, 술탄 바이바르스에 의해 알아즈하르 모스크에서의 집단 예배가 재개되었다. 샤피이파와 달리 하나피파는 한 지역 사회에 여러 개의 집단 예배 모스크를 허용했기 때문이다.[1] 바이바르스와 맘루크 왕조는 알아즈하르를 복원하고 지원했으며, 여러 차례 수리와 증축이 이루어졌다. 특히 카이트베이와 칸수 알구리 술탄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첨탑을 세우는 등 많은 개선을 했다.

1517년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를 정복한 후에도 알아즈하르는 존경받는 종교 기관으로 남았다. 오스만 제국의 아미르들은 알아즈하르에서 예배를 드렸고, 18세기에는 마물루크 엘리트들이 여러 개보수 공사를 후원했다.[1] 특히 1749년 예니체리의 수장이었던 압드 알 라흐만 카트쿠다는 모스크에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새로운 예배당을 추가하고 여러 문을 건설하는 등 대대적인 증축을 했다.[3][4]

1798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이집트를 점령하면서 알아즈하르는 또 다른 시련을 겪었다. 1798년 10월, 알아즈하르에서 프랑스군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프랑스군은 모스크를 포격하고 훼손하는 등 강경하게 진압했다. 프랑스 점령 기간 동안 알아즈하르는 폐쇄되었고, 1801년 프랑스군이 철수하면서 다시 문을 열었다.

무함마드 알리 왕조 시대에 알리는 알 아즈하르 율마의 영향력을 제한하고 서구식 교육 체계를 도입하려 했다. 그러나 이스마일 파샤와 투픽 파샤는 모스크 복원을 재개했고, 압바스 2세는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을 통해 알아즈하르를 현대화하려 했다.

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은 알아즈하르의 권한을 제한하고 국가 통제하에 두려 했다. 1961년 개혁법으로 이집트 대통령이 알아즈하르 학장을 임명하게 되었고, 알아즈하르는 국가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다. 나세르 사후 안와르 사다트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알아즈하르에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했지만, 여전히 국가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2011년 이집트 혁명 이후 알아즈하르는 다시 변화의 시기를 맞이했다. 무바라크 정권의 붕괴 이후, 알아즈하르는 국가로부터의 독립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집트 내에서의 역할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2018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으로 대대적인 복원 작업이 완료되었다.[1][2]

2. 1. 파티마 왕조 시대 (972년-1171년)

알-아즈하르 모스크는 969년 파티마 왕조가 이집트를 정복한 후 건설되었다. 파티마 왕조의 장군 자우하르 알-시킬리는 새 수도 카이로를 건설하면서 칼리프의 궁전과 군대를 위한 왕궁을 짓고, 시아파 이슬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 신앙을 전파하기 위한 중심지로 알-아즈하르 모스크를 세우도록 했다.

모스크 건설은 970년 4월 4일에 시작되어 972년에 완공되었으며, 그해 6월 22일 라마단 기간에 첫 금요기도가 열렸다. 처음에는 '만수리야 모스크'로 불렸으나, 이후 '카이로 모스크'로 이름이 바뀌었고, 최종적으로 '알-아즈하르'라는 현재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알-아즈하르'는 '가장 빛나는'이라는 뜻으로, 무함마드의 딸이자 칼리프 알리의 아내인 파티마를 가리키는 칭호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알-아즈하르는 곧 이슬람 세계의 학문 중심지로 떠올랐으며, 공식 발표와 법정 회의가 이곳에서 열렸다. 파티마 왕조는 이전에는 비밀리에 가르쳐졌던 이스마일파 교리를 일반 대중에게 공개했다. 알-누만 이븐 무하마드는 이스마일파 교리 교육을 담당하는 판사로 임명되었으며, 칼리프의 궁전과 알-아즈하르에서 수업이 진행되었고, 여성을 위한 별도의 강좌도 마련되었다. 973년 이드 알피트르에는 모스크가 카이로의 공식 회중 모스크로 지정되었다.

988년, 파티마 왕조의 첫 번째 공식 비지어였던 야쿠브 이븐 킬리스는 알-아즈하르를 이슬람 법 교육의 핵심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듬해에는 45명의 학자가 강의를 위해 고용되어, 알-아즈하르는 이슬람 세계의 주요 대학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후 여러 파티마 칼리프들이 모스크를 확장하고 개조했다. 알-아지즈 빌라는 모스크의 일부를 복원하고 천장을 높였으며, 알-하킴 비암르 알라는 새로운 나무 문을 설치했다. 1009년 알 하킴 모스크가 완공되면서 알-아즈하르는 그 중요성이 잠시 감소했으나, 알 무스탄시르 빌라 때 다시 복원되었다. 칼리프 알-하피즈는 1138년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를 통해 오늘날 안뜰에서 볼 수 있는 용골 모양의 아치와 조각된 스투코 장식, 그리고 기도실 중앙 입구의 돔을 만들었다.

전경에는 포장된 안뜰이 보이고, 그 뒤에는 기둥으로 받쳐진 각진 용골 모양의 아치형 만이 있는 벽이 있다. 벽 뒤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두 개의 첨탑, 돔, 그리고 또 다른 첨탑이 보인다. 멀리 배경 중앙에는 또 다른 첨탑의 꼭대기가 보인다.
모스크의 안뜰(파티마 왕조 시대). 위쪽의 첨탑들은 맘루크 왕조 시대의 것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알 아슈라프 칸수 알 구리의 쌍첨탑, 카이트베이의 첨탑, 그리고 아크부가의 첨탑(돔 뒤).


1138년경 알-하피즈 치하에서 건설된 기도실 입구 위 돔


1005년에는 파티마 칼리프가 수천 권의 사본을 기증하여 알-아즈하르 도서관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파티마 왕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스마일파 신앙은 대중에게 널리 퍼지지 못했고, 파티마 왕조가 멸망하면서 많은 사본들이 흩어졌다.

2. 2. 아이유브 왕조 시대 (1171년-1250년)

살라딘이 1171년 파티마 왕조를 무너뜨리고 아이유브 왕조를 세우면서, 알아즈하르 모스크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살라딘은 파티마 왕조 시대에 알아즈하르에서 가르치던 시아파 학문에 반감을 가졌기 때문에, 모스크는 한동안 방치되었다. 살라딘이 임명한 카디(qadi) 사드르 알딘 이븐 디르바스는 샤피이 교리에 따라, 혹은 새로운 수니파 통치자로서 이전 시아파 기관에 대한 불신 때문에 한 지역에서 회중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모스크를 하나로 제한했고, 그 결과 알아즈하르에서의 회중 기도는 금지되었다. 이 무렵, 훨씬 더 큰 알하킴 모스크가 완공되면서 카이로의 회중 기도는 그곳에서 열리게 되었다.[1]

살라딘은 알아즈하르를 회중 모스크로서의 지위를 박탈했을 뿐만 아니라, 모스크의 미흐랍에서 파티마 칼리프의 이름이 새겨진 은띠를 제거하도록 명령했다. 다른 모스크에서 제거된 은띠까지 포함하여 총 5,000 디르함에 달했다.[2] 그러나 살라딘이 모스크의 유지를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었고, 알-무파달에 따르면 모스크의 첨탑 중 하나는 살라딘 통치 기간에 세워졌다.[2]

알아즈하르는 교육 중심지로서의 기능도 타격을 입었다.[1] 한때 훌륭했던 도서관은 방치되었고, 파티마 교리 관련 사본들은 파괴되었다.[3][4] 아이유브 왕조는 카이로 전역에 마드라사(학교)를 건설하여 수니파 신학 교육을 장려했다.[1] 학생들에 대한 지원금이 끊기고,[1] 모스크에서 조직적인 수업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으며, 파티마 왕조 시대에 번성했던 교수들은 생계를 위해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아즈하르는 이 기간 동안 아랍 어원학의 중심지이자 학문의 장소로 남아 있었다.[1] 공식 수업은 중단되었지만, 모스크에서는 여전히 사교육이 제공되었다. 압드 알라티프 알바그다디로 추정되는 한 학자는 알아즈하르에서 법과 의학 등 여러 과목을 가르쳤다고 한다. 살라딘은 그에게 30디나르의 봉급을 지급했고, 살라딘의 후계자들은 이를 100디나르로 인상했다.[4] 살라딘과 그의 후계자들이 모스크를 방치했지만, 수니파 아이유브 왕조의 정책은 알아즈하르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니파 통치자들은 시아파 이슬람의 가르침을 이단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퇴치하기 위해 교육 기관을 설립했다. 이 대학들은 규모가 다양했지만, 수니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중점을 두었고, 수사학, 수학, 과학과 같이 종교적인 주제 이외의 과정을 포함하는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갖추고 있었다. 살라딘의 정복 당시 이집트에는 그러한 대학이 없었지만, 살라딘과 아이유브 왕조의 후대 통치자들은 살리히야 마드라사를 포함하여 26개의 대학을 건설했다.

알아즈하르는 결국 살라딘이 제정한 대학 시스템을 모델로 한 교육 개혁을 채택했고, 맘루크 왕조 시대에 학생 장학금과 교수진 (슈유크)의 봉급이 복원되면서 그 위상이 다시 높아지게 되었다.[3]

2. 3. 맘루크 왕조 시대 (1250년-1517년)

1266년, 맘루크 왕조 시대에 술탄 바이바르스에 의해 알아즈하르 모스크에서의 집단 예배가 재개되었다. 살라딘과 아이유브 왕조가 따랐던 샤피이파의 가르침은 한 지역 사회에서 한 개의 모스크만을 집단 예배 모스크로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맘루크들이 따랐던 하나피파 ''마드하브''에는 그러한 제한이 없었다.[1] 알아즈하르는 이제 파티마 왕조와 이스마일파 교리와의 연관성을 상실했고, 카이로의 급속한 확장으로 인해 모스크 공간의 필요성이 증가하여 바이바르스는 알아즈하르의 역사를 무시하고 모스크를 이전의 중요성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바이바르스와 맘루크 왕조 통치하에 알아즈하르는 학생과 교사를 위한 봉급의 복귀와 거의 100년 동안 방치되었던 모스크 수리 작업이 시작되었다.[2] 알무파달에 따르면, 이즈 알딘 아이다무르 알힐리 에미르가 모스크 옆에 자신의 집을 지으면서 모스크를 수리했다고 한다. 알마크리지는 에미르가 벽과 지붕을 수리하고 포장을 새로 하고 새로운 바닥 매트를 제공했다고 보고한다. 알하킴 통치 이후 최초의 ''쿠트바''는 1266년 1월 16일에 5일 전에 완공된 새로운 설교단에서 설교와 함께 거행되었다.[3]

1302년 지진으로 알아즈하르와 맘루크 영토 전역의 여러 다른 모스크가 피해를 입었다. 재건 책임은 왕조의 ''아미르''(왕자)들과 피해 복구를 담당한 군대의 수장인 사이프 알딘 살라르 사이에 분담되었다. 이러한 수리는 바이바르스 통치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4] 7년 후, 모스크 북서쪽 벽을 따라 전용 학교인 ''마드라사 알아크부가위야''가 건설되었다. 새로운 건물을 수용하기 위해 모스크 벽의 일부가 제거되었다. 또 다른 학교인 ''마드라사 알타이바르시야''의 건설은 1332~1333년에 시작되었다. 1339~1340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우두를 위한 분수인 ''미다아'' 부지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모스크의 구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두 ''마드라사'' 모두 알아즈하르를 보완하는 건물로, 별도의 입구와 예배당을 갖추고 있었다.

카이로에서 모스크의 위상이 회복되었지만, 수리 및 추가 작업은 술탄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것은 바르쿠크 즉, 부르지 왕조의 첫 번째 술탄의 통치하에서 바뀌었다. 술탄 바르쿠크와 그 뒤를 이은 술탄 알무아이야드는 각각 1397년과 1424년에 알아즈하르의 첨탑을 돌로 된 새로운 첨탑으로 교체하려고 시도했지만, 두 경우 모두 건설이 불량한 것으로 판명되어 철거해야 했다. 정부 최고위직 인사들의 직접적인 후원 재개는 맘루크 통치 종식까지 계속되었다. 카이트베이와 칸수 알구리 술탄은 수많은 수리 작업을 감독하고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첨탑을 세우는 등 개선과 추가 작업을 수행했다. 맘루크 술탄들은 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카이로 도시 경관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첨탑을 건설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술탄들은 명망 있는 알아즈하르와 눈에 띄는 연관성을 갖기를 원했다. 알구리는 원래 ''미흐랍'' 앞의 돔을 재건했을 수도 있다.

모스크 학교는 이슬람 세계의 주요 대학이었고 왕실의 후원을 회복했지만, 카이로 엘리트 사이에서 선호하는 교육 장소로서 ''마드라사''를 능가하지는 못했다. 알아즈하르는 독립적인 학문의 장소로서 명성을 유지한 반면, 살라딘 통치 기간에 처음 건설된 ''마드라사''는 국가 교육 체제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알아즈하르는 이집트와 중동의 다른 지역에서 온 학생들을 계속해서 유치하여 ''마드라사''에 다니는 학생 수를 훨씬 능가했다. 알아즈하르의 학생들은 국적에 따라 ''리와크''(학생 기숙사)로 조직되었고 이슬람법의 여러 분야를 연구했다. 평균 학위에는 6년의 수업이 필요했다.

14세기까지 알아즈하르는 법, 신학, 아랍어 연구의 중심지로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여 이슬람 세계 전역의 학생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집트의 ''울레마''(이슬람 학자) 중 3분의 1만이 알아즈하르에 다녔거나 가르쳤다고 보고되었다. 무함마드 이븐 이야스의 한 기록에 따르면, 맘루크 왕조 말기에 알아즈하르가 아니라 살리히야 마드라사가 "울레마의 요새"로 여겨졌다고 한다.

2. 4. 오스만 제국 시대 (1517년-1798년)

1517년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정복 이후에도 알아즈하르 모스크는 큰 존경을 받았다. 술탄 셀림 1세는 알아즈하르에서 주마(금요일 예배)에 참석했지만, 모스크 유지에 직접적인 기부는 하지 않았다. 이후 오스만 아미르들도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했지만, 큰 재정적 지원은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물루크 엘리트들은 18세기에 영향력을 회복하여 카이로와 알아즈하르에서 여러 개보수 공사를 후원했다.[1]

18세기 초, 강력한 마물루크 베이였던 알 카즈두글리는 시각장애 학생들을 위한 리와크를 추가하고, 까이뜨바이가 건설했던 터키와 시리아 리와크를 재건하는 등 여러 추가 공사와 개보수 공사를 후원했다.[2]

1749년 예니체리의 수장으로 임명된 압드 알 라흐만 카트쿠다는 알아즈하르 모스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세 개의 새로운 문을 건설했는데, 그중 바브 알 무자이닌(이발사의 문)은 학생들이 머리를 깎는 곳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결국 모스크의 정문이 되었다. 바브 알 사아이다(사아이드인들의 문)와 바브 알 슈르바(수프의 문)도 추가되었다. 또한, 원래 예배당 남쪽에 새로운 예배당을 추가하여 예배 공간을 두 배로 늘리고, 모스크를 둘러싼 여러 리와크를 개조하거나 재건했다.[3][4] 그는 1776년 알 아즈하르에 건설한 능묘에 묻혔는데, 이는 1588년 이후 모스크 안에 매장된 첫 번째이자 마지막 사례였다.

알 아즈하르 모스크의 바브 알 무자이닌(이발사의 문). 압드 알 라흐만 카트쿠다가 오스만 제국 시대에 건설하였다. 왼쪽의 미나레트는 마드라사 알 아크부가위야 위에 있으며, 카트쿠다에 의해 개조되었고, 20세기에 다시 개조되었다.


오스만 시대에 알아즈하르는 이집트 최고의 학문 기관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고, 율마(이슬람 학자)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율마는 정부에 영향을 미치는 자문 위원회에 임명되기도 했으며, 과학과 논리가 철학에 합류하는 등 더 많은 세속적인 과정이 도입되었다. 이 시기에 알아즈하르는 최초의 비말리키 학장을 맞이했다.

알아즈하르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시위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학생 시위가 자주 발생했고, 율마는 때때로 정부에 반항하기도 했다.
바브 알무자이닌 (이발사의 문)1753년에 건설된 바브 알무자이닌(باب المزينينar)은 카트쿠다가 건설한 문으로, 두 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 위에는 삼엽형 장식이 있는 둥근 아치 두 개가 있고, 그 위에는 사이프러스 나무 패널이 있는 프리즈가 있는데, 이는 오스만 양식의 특징이다.

바브 알무자이닌(이발사의 문)


카트쿠다가 건설한 독립식 미나레트(첨탑)가 원래 문 밖에 있었지만, 카이로 근대화 과정에서 투픽 파샤가 알아즈하르 거리를 개설하기 전에 철거되었다.

2. 5. 프랑스 점령기 (1798년-1801년)

나폴레옹은 1798년 7월 이집트를 침공하여 7월 2일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고 7월 22일 카이로로 진격했다.[1] 이집트 주민과 오스만 제국 모두를 달래기 위해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슬람과 술탄에 대한 존중을 선언하는 연설을 했다.

17세기 후반 프랑스 군복을 입고 세 개의 큰 깃털이나 잎으로 장식된 2각모를 쓴 남자가 그림 오른쪽에 서 있습니다. 그는 왼쪽에 칼집에 든 칼을 차고 있습니다. 그는 왼쪽에 있는 수염이 많은 남자에게 빨강, 흰색, 파란색 스카프를 건네주고 있습니다. 스카프를 받는 남자는 머리를 약간 숙이고 손바닥을 가슴에 겹쳐 놓고 서 있으며, 큰 사각형 터번과 발까지 내려오는 푸른색과 금색의 긴 카프탄을 입고 있습니다. 그의 왼쪽에는 야자수가 있고, 배경에는 피라미드와 낙타가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베이에게 삼색 스카프를 증정하는 모습 (1798–1800)


1798년 7월 25일, 나폴레옹 1세는 카이로 통치를 담당하는 9명의 알 아즈하르 학자들로 구성된 디완을 설립했다. 이는 오스만 점령 이후 처음으로 이집트인들이 공식 권력을 갖게 된 사례였다.[1][3]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 시작된 도시의 율마들로 의회를 구성하는 이러한 관행은 프랑스 점령 이집트 전역에 시행되었다.[4] 나폴레옹은 또한 알 아즈하르 이맘들로부터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선언하는 것이 이슬람 법에 따라 허용된다는 파트와를 얻으려 했지만 실패했다.[2]

이집트인과 오스만 제국 모두를 포섭하려는 나폴레옹의 노력은 실패했다. 오스만 제국은 1798년 9월 9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고, 1798년 10월 21일 알 아즈하르에서 프랑스군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돌, 창, 칼로 무장한 이집트인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약탈했다. 다음날 아침, 디완은 적대 행위를 평화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해 나폴레옹과 만났지만, 반군들은 이러한 움직임이 프랑스의 약점을 보여준다고 믿고 거부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알 아즈하르를 직접 겨냥하여 카이로 요새에서 도시에 포격을 명령했다. 반란 중 200~300명의 프랑스 병사가 사망하고 3,000명의 이집트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알 아즈하르의 율마 6명이 요약 판결에 따라 처형되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프랑스군에 붙잡힌 이집트인들은 투옥되었거나, 무기를 소지한 채 붙잡히면 참수되었다. 프랑스군은 신발을 신고 총을 들고 사원을 고의적으로 훼손했다. 군인들은 말을 미흐랍에 묶어두고 학생들의 숙소와 도서관을 약탈하여 코란을 바닥에 던져 놓았다. 반란의 지도자들은 나폴레옹과 합의를 시도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집트에서 존경을 받고 카이로 주민들 사이에서 "술탄 엘 케비르(Sultan el-Kebir)"(위대한 술탄)라는 별명을 얻었던 나폴레옹은 그들의 존경심을 잃고 더 이상 그렇게 불리지 않았다. 1800년 3월, 프랑스 장군 장 밥티스트 클레베르가 알 아즈하르 학생인 술레이만 알 할라비에게 암살당했다. 암살 이후 나폴레옹은 사원 폐쇄를 명령했고, 1801년 8월 오스만과 영국의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3]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인해 과학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던 사원의 보수적인 전통은 흔들렸다. 인쇄기가 이집트에 도입되면서 중요한 혁신이 일어났고, 교과 과정이 구두 강의와 암기에서 텍스트를 통한 교육으로 전환될 수 있게 되었지만, 사원 자체는 1930년에야 자체 인쇄기를 갖게 되었다. 프랑스군이 철수한 후, 무함마드 알리 파샤는 세속적 학문의 설립을 장려했고, 역사, 수학, 현대 과학이 교과 과정에 채택되었다. 1872년, 자말 알딘 아프가니의 지휘 아래 유럽 철학도 연구 프로그램에 추가되었다.

2. 6. 무함마드 알리 왕조 시대와 영국 점령기 (1805년-1952년)

무함마드 알리는 프랑스군 철수 후 이집트 통치권을 강화하고자 알 아즈하르 율마(이슬람 법학자)의 영향력을 제한했다. 1809년, 알 아즈하르의 주요 수입원인 리즈카 토지(사원 소유 면세 부동산)를 몰수해 율마들의 반발을 샀고, 우마르 마크람의 반란으로 이어졌으나 실패로 끝나고 마크람은 다미에타로 유배되었다.[1][2]

알리는 알 아즈하르 출신이 아닌 이들에게 정부 직책을 부여하고, 학생들을 프랑스에 유학 보내 서구식 교육을 받게 함으로써 알 아즈하르를 우회하는 새로운 교육 체계를 구축했다.[1]

이스마일 파샤 통치 기간에는 카이로를 유럽식 도시로 변모시키기 위한 대규모 공공 사업이 추진되었다. 초기에는 면화 산업 호황으로 자금 조달이 원활했으나, 결국 막대한 부채를 초래하여 영국이 이집트를 점령하는 빌미를 제공했다.[3][4]

이스마일 파샤는 알 아즈하르에 대한 왕실 후원을 재개했고, 그의 아들 투픽 파샤도 모스크 복원을 이어갔다. 압바스 힐미 2세는 모스크 주요 정면 재구성, 새로운 리와크 건설, 파티마 시대 사한 복원 등 개보수 작업을 지속하여 알 아즈하르를 현대화하고 대도시와 조화시키려 했다.

영국 점령하에서도 알 아즈하르 개혁은 계속되었다. 1872년 대학 채용 관행 및 시험 표준화, 1885년 이집트 내 다른 대학들의 알 아즈하르 관리 편입 등 변화가 있었다. 사드 자글룰은 교육부 장관 시절 알 아즈하르 교육 정책 수정에 기여했다.

알 아즈하르는 보수적 성향에도 불구, 무슬림 형제단 등 이슬람 근본주의에 반대하며,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 학생들을 유치하여 와하비 영향력에 대한 균형을 제공했다.

푸아드 1세 통치하에 알 아즈하르는 아랍어, 샤리아, 신학의 세 학과로 개편되었고, 학위 취득을 위한 공식 시험 도입 및 학교 본부 이전이 이루어졌다.

1900년대 초, 무함마드 아브두 등 개혁가들의 사상이 알 아즈하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무스타파 알 마라기 총장 임명 후 알 아즈하르 커리큘럼은 비아랍어, 현대 과학을 포함하도록 확장되었고, 알 자와히리 총장도 알 아즈하르 현대화 노력을 지속했다.

2. 7. 1952년 혁명 이후

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은 알아즈하르의 울라마(이슬람 학자) 권한을 제한하고 그 영향력을 활용하려 했다. 1952년, 와크프(이슬람 기부 재산)가 국유화되어 새로 설립된 이집트 종교재산부의 권한 아래 놓이면서, 모스크는 재정적 독립성을 잃었다. 1955년에는 종교 재판소가 국가 사법 제도와 합병되어 샤리아(이슬람 율법) 법정이 폐지됨으로써 울라마의 독립성이 크게 제한되었다.

1961년 개혁법은 이집트 대통령에게 알아즈하르 학장을 임명할 권한을 부여했다. 이 직책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 처음 만들어졌고, 설립 이후 울라마가 선출해 왔었다. 알아즈하르는 국가에 의지를 행사할 수는 없었지만, 계속해서 국민에게 영향을 미쳤고, 혁명 이후 국가 관료 체제에 점점 더 편입되었다. 교육과정의 독립성과 모스크로서의 기능은 사라졌다.

1952년 무함마드 나귀브와 함께 이집트 혁명을 이끈 가말 압델 나세르는 알아즈하르의 여러 개혁을 시행했다


나세르는 울라마를 국가 아래에 두려고 했지만, 타하 후세인이 제안한 알아즈하르의 초·중등 교육 시스템 해체와 대학을 현대적인 신학부로 전환하려는 시도는 허용하지 않았다. 이는 울라마의 반대보다는 알아즈하르를 이용해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정치적 고려 사항 때문이었다.

정부의 일부로 완전히 통합된 알아즈하르는 정부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울라마는 과거에 사회주의가 이슬람과 양립할 수 없다고 발표했지만, 혁명 이후 토지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나세르가 "이슬람적" 사회주의라고 부른 것에 대한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또한 무슬림 형제단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에 대한 대항마 역할을 했다.

나세르 암살 시도는 무슬림 형제단의 소행으로 규정되었고, 이 단체는 불법화되었다. 나세르는 울라마의 지지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알아즈하르에 대한 몇 가지 제한을 완화했다. 알아즈하르의 울라마는 무슬림 형제단을 해체하려는 그의 시도를 꾸준히 지지했고, 이후 정권에서도 그렇게 했다. 나세르와 알아즈하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형제단은 계속 활동했다. 알아즈하르는 1967년 6일 전쟁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며, 이스라엘과의 갈등을 "성전"이라고 선언했다.

1970년 나세르 사후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은 알아즈하르를 아랍 세계에서 이집트 지도력의 상징으로 복원하고자 했다. 그는 무슬림 형제단과 울라마에 대한 여러 제한을 완화했다. 그러나 1971년 9월, 자신의 정책을 비판하는 언론인과 단체들을 단속하면서 공식 정책을 비판하는 울라마에 대해 제재를 가했다. 알아즈하르의 울라마는 계속해서 정부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여러 단체의 비판을 받았다. 슈크리 무스타파는 울라마가 정부 편의를 위해서만 종교적 판단을 내린다고 비난했다. 사다트가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맺는 데 지지가 필요했을 때, 알아즈하르는 평화를 맺을 때가 왔다는 칙령을 내렸다.

1981년 사다트 암살 이후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모스크와 성직자들에게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했다. 1982년부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알아즈하르 학장을 지낸 자드 알하크는 국가로부터 독립성을 주장하며 때때로 극단적인 이슬람주의 분파를 선동하는 국가 정책을 비판했다. 무바라크 하에서 국가의 여러 권한이 알아즈하르에 양도되었다. 1990년대에는 검열법이 수정되어 알아즈하르가 인쇄 매체와 전자 매체를 검열할 수 있게 되었다.

알아즈하르는 전 세계 다른 수니파 종교 당국보다 높은 지위를 유지하며, 이슬람 세계 전체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집트 외부에서도 종교적 판단을 내려달라는 요청을 받아왔다. 걸프 전쟁 이전에 파흐드 국왕은 외국군 주둔 허가 팻와를 사우디아라비아의 대무프티 대신 알아즈하르 학장에게 요청했다. 2003년 니콜라 사르코지는 프랑스 이슬람 위원회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공립학교에서 무슬림 소녀들의 히잡 착용 금지 허용 판결을 알아즈하르에 요청했다. 알아즈하르 학장은 히잡 착용이 "이슬람 의무"이지만 프랑스 무슬림 여성은 프랑스 법을 따라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2. 8. 2011년 혁명 이후

2011년 이집트 혁명으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면서 알아즈하르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혁명 직후 몇 달 동안, 이전에는 금지되었던 무슬림 형제단이 학생회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최고군사평의회에 알아즈하르 사원의 독립성을 회복하라는 시위가 일어났고, 사원 자체적으로 정부로부터 더 큰 독립성을 부여받는 법안 초안 작성을 의뢰했다. 무바라크 정권의 정책을 지지하던 온건하고 일관된 목소리는 사라지고, 알아즈하르의 미래와 이집트 내 역할에 대한 논쟁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집트 내에서 알아즈하르의 미래 역할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한다. 무슬림 형제단과 같은 주요 이슬람주의 단체, 알아즈하르가 극우 살라피스트에 맞서는 보루가 되기를 바라는 자유주의 세력, 그리고 알아즈하르가 국가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재정과 지도력을 장악하고 국가 종교부를 관할하기를 바라는 이들까지, 여러 당사자들이 각자의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최근 복원 후 2019년의 모스크


2018년, 압둘라 국왕과 살만 국왕 등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으로 대대적인 사원 복원 작업이 완료되었다. 건물 기초 보강, 건축 요소 복원, 기반 시설 개선 등이 이루어졌다.[1][2] 다만, 복원 사업으로 인해 이전에는 사원의 주요 출입구 중 하나였던 바브 알 무자이닌(이발사의 문, ''Bab al-Muzayinīn'')의 접근성이 떨어졌다.[3]

2020년에는 나딘 아슈라프 학생이 시작한 소셜 미디어 캠페인에 영향을 받아, 사원 대표들이 이집트 내 성폭력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3. 건축

알아즈하르 모스크는 오랜 역사 동안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을 거치면서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파티마 왕조 시대: 모스크의 초기 구조는 길이 약 85.34m, 너비 약 69.19m의 직사각형 형태였으며, 안뜰을 중심으로 세 개의 아케이드가 배치되었다. 기도실은 키블라 벽을 향해 다섯 개의 통로가 있는 히포스타일 홀 형태로 건축되었으며, 기둥은 파라오 시대부터 로마, 콥트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유적에서 가져온 대리석 기둥을 재활용했다.
  • 맘루크 왕조 시대: 살라딘과 아이유브 왕조를 계승한 맘루크 왕조는 모스크를 복원하고 확장했다. 1266년 술탄 바이바르스는 알아즈하르 모스크에서 집단 예배를 재개하고, 학생과 교사에게 봉급을 지급하고 모스크 수리를 시작했다. 1302년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모스크는 사이프 알딘 살라르(Sayf al-Din Salar)의 지휘 아래 복구되었다. 이후 마드라사 알아크부가위야(Madrasa al-Aqbughawiyya)(1339년)와 마드라사 알타이바르시야(Madrasa al-Taybarsiyya)(1332~1340년)가 증축되어 모스크의 기능을 보완했다. 카이트베이(Qaytbay)와 칸수 알구리(Qansuh al-Ghuri) 술탄은 각각 1483년(또는 1495년)과 1509년에 첨탑(minaret)을 건설하여 모스크의 외관을 더욱 웅장하게 만들었다.
  • 오스만 제국 시대: 1749년 예니체리 부대장이었던 압드 알 라흐만 카트쿠다는 모스크에 세 개의 새로운 문(바브 알 무자이닌, 바브 알 사아이다, 바브 알 슈르바)을 건설하고, 원래 예배당 남쪽에 예배당을 추가하여 예배 공간을 확장했다. 또한 모스크를 둘러싼 여러 리와크를 개조하거나 재건했다.


현재 모스크의 주 출입구는 바브 알 무자이닌(Bab al-Muzayinīn)이며, 이 문을 통해 흰색 대리석으로 포장된 안뜰로 들어갈 수 있다.

3. 1. 파티마 왕조 시대의 건축



모스크의 원래 구조는 길이 약 85.34m, 너비 약 69.19m였으며, 안뜰 주변에 세 개의 아케이드가 있었다. 안뜰 남동쪽에는 원래의 기도실이 히포스타일 홀로 건축되었는데, 다섯 개의 통로가 있었지만 키블라 벽이 약간 정확한 각도에서 벗어나 있었다. 기도실을 이루는 네 개의 아케이드를 지탱하는 대리석 기둥들은 파라오 시대부터 로마 지배 시대, 콥트인의 지배 시대까지 이집트 역사의 여러 시대에 걸쳐 존재했던 유적지에서 재활용된 것이었다. 기둥 높이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두께가 다른 기단을 사용하여 높이를 맞추었다. 회반죽 외관은 압바스 왕조, 콥트, 비잔틴 건축의 영향을 보여준다.

결국 총 세 개의 돔이 건설되었는데, 이는 초기 북아프리카 모스크의 공통적인 특징이었지만, 알 아즈하르 모스크의 많은 개축 공사를 거치면서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역사가 알 마크리지는 원래 돔에 알 시킬리가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겼다고 기록했다. 자우하르는 칼리프의 칭호로 "아미르 알 무미닌"(신자들의 지휘관)이라는 경칭을 포함했고, 장군이 되기 전에 서기관으로 일하면서 얻은 "서기관"이라는 별명도 포함했다.

파티마 왕조의 ''미흐랍''. 이 지역은 여러 번 개조 및 복원되었지만, 벽감 반원형(콘치)의 회반죽 무늬는 원래의 것으로 여겨진다.
K. A. C. 크레스웰은 원래 구조에는 확실히 하나의 돔이 있었고, 아마도 대칭을 위해 두 번째 돔이 있었을 것이라고 썼다.

1933년에 발굴된 원래의 ''미흐랍''에는 양쪽에 대리석 기둥이 있는 반원형 돔이 있다. 정교한 회반죽 장식은 모스크의 두드러진 특징이었으며, ''미흐랍''과 벽은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미흐랍''에는 꾸란의 두 구절이 콘치에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아직 온전하다. 첫 번째 구절은 알 무미누운을 여는 세 구절이다. 다음 비문은 알 안암의 162절과 163절로 구성된다. 이러한 비문은 파티마 왕조 시대의 것으로 확실하게 확인된 유일한 장식이다.

다섯 개의 용골 모양 아치 (그리고 여섯 번째 아치의 일부)가 보인다. 아치는 원통형 기둥에 의해 지탱된다. 각 아치 위에는 큰 원형의 새겨진 회반죽 장식이 있고, 각 기둥 위에는 아치와 기둥의 모양을 반영하는 큰 새겨진 회반죽 장식이 있다. 기둥 줄 뒤에는 통로가 있고, 그 뒤에는 아치와 기둥의 모양과 크기의 출입구가 있는 벽이 있다.
회반죽 장식이 새겨진 안뜰 벽의 용골 모양 아치


대리석으로 포장된 중앙 안뜰은 1009년에서 1010년 사이에 추가되었다.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 아케이드에는 회반죽 비문이 있는 용골 모양의 아치가 있다. 아치는 알 하피즈 리딘 알라 통치 기간에 건설되었다. 회반죽 장식도 그의 통치 시대의 것이며 1891년에 다시 만들어졌다. 두 가지 유형의 장식이 사용되었다. 첫 번째는 아치 중앙 위에 나타나며 움푹 들어간 원형과 24개의 엽으로 구성되어 있다. 1893년에 식물 모티프의 원형 띠가 추가되었다. 두 번째 장식은 첫 번째 장식과 번갈아 아치 사이에 나타나며, 홈이 있는 후드 아래에 얕은 벽감으로 구성되어 있다. 후드는 내장 기둥 위에 놓여 있으며, 쿠피체 문자로 된 꾸란 글귀 띠로 둘러싸여 있다. 꾸란 글귀는 알 하피즈 통치 이후 파티마 왕조 시대에 추가되었다. 벽은 계단식 삼각형 크레넬레이션이 있는 별 모양 띠로 마무리된다. 안뜰 남동쪽 아케이드에는 기도실 정문이 있다. 아케이드 중앙 아치가 더 안쪽에 있고 그 위에 더 높은 직사각형 패턴이 있는 페르시아식 문틀이 기도실로 열린다.

1009년 알 하킴 통치 기간 동안 새로운 나무 문이 설치되었다. 1125년 알 아미르는 새로운 나무 ''미흐랍''을 설치했다. 알 하피즈 리딘 알라 통치 기간 동안 추가 돔이 건설되었다. 그는 또한 안뜰 주변에 네 번째 아케이드를 만들고 ''사한'' 서쪽 끝에 현관을 짓도록 명령했다.

3. 2. 맘루크 왕조 시대의 증축

살라딘과 아이유브 왕조의 뒤를 이은 맘루크 왕조는 모스크를 복원하고 증축하여 교육 프로그램의 확장을 감독하였다.[1] 복원 작업에는 다색 대리석을 사용한 미흐랍(mihrab)의 개조가 포함되었다.[2]

1266년, 맘루크 왕조 술탄 바이바르스에 의해 알아즈하르 모스크에서의 집단 예배가 재개되었다. 살라딘과 아이유브 왕조가 따랐던 샤피이파(Shāfi‘ī)의 가르침은 한 지역 사회에서 한 개의 모스크만을 집단 예배 모스크로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맘루크들이 따랐던 하나피파(Hanafi) ''마즈하브''(madh'hab)에는 그러한 제한이 없었다.[3] 알아즈하르는 이제 파티마 왕조와 이스마일파 교리와의 연관성을 상실했고, 카이로의 급속한 확장으로 인해 모스크 공간의 필요성이 증가하여 바이바르스는 알아즈하르의 역사를 무시하고 모스크를 이전의 중요성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바이바르스와 맘루크 왕조 통치하에 알아즈하르는 학생과 교사를 위한 봉급의 복귀와 거의 100년 동안 방치되었던 모스크 수리 작업의 시작을 보았다.[4] 알무파달(al-Mufaddal)에 따르면, 이즈 알딘 아이다무르 알힐리(’Izz al-Din Aydamur al-Hilli) 에미르가 모스크 옆에 자신의 집을 지으면서 모스크를 수리했다고 한다. 알마크리지(Al-Maqrizi)는 에미르가 벽과 지붕을 수리하고 포장을 새로 하고 새로운 바닥 매트를 제공했다고 보고한다. 파티마 칼리프 알하킴(al-Hakim) 통치 이후 최초의 ''쿠투바''(khutbah)는 1266년 1월 16일에 5일 전에 완공된 새로운 설교단에서 설교와 함께 거행되었다.

1302년 지진으로 알아즈하르와 맘루크 영토 전역의 여러 다른 모스크가 피해를 입었다. 재건 책임은 왕조의 ''아미르''(왕자)들과 피해 복구를 담당한 군대의 수장인 사이프 알딘 살라르(Sayf al-Din Salar) 사이에 분담되었다. 이러한 수리는 바이바르스 통치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7년 후, 모스크 북서쪽 벽을 따라 전용 학교인 ''마드라사 알아크부가위야(Madrasa al-Aqbughawiyya)''가 건설되었다. 새로운 건물을 수용하기 위해 모스크 벽의 일부가 제거되었다. 또 다른 학교인 ''마드라사 알타이바르시야(Madrasa al-Taybarsiyya)''의 건설은 1332~1333년에 시작되었다. 1339~1340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세정을 위한 분수인 ''미다아''(mida'a) 부지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모스크의 구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두 ''마드라사'' 모두 알아즈하르를 보완하는 건물로, 별도의 입구와 예배당을 갖추고 있었다.

알타이바르시야 마드라사의 미흐랍


타이바르스 아미르(Amir Taybars)의 묘를 포함하고 있는 알타이바르시야 마드라사(Madrasa al-Taybarsiyya)는 1309년에 건립되었다. 원래 알아즈하르 모스크(al-Azhar)의 보조 모스크로 기능할 목적으로 건립되었으나, 이후 모스크의 다른 부분들과 통합되었다. 이 마드라사에서는 말리키(Maliki)와 샤피이(Shāfi‘ī) 마즈하브(madh'hab)가 연구되었으나, 현재는 도서관의 사본을 보관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원래 건물에서 남아있는 유일한 부분은 키블라 벽과 다색 미흐랍(mihrab)이다. 알마크리지(al-Maqrizi)는 이 마드라사가 샤피이 학파 연구에만 사용되었다고 기록했지만, 역사가 이븐 두크막(Ibn Duqmaq)은 이 마드라사의 리완(liwan) 중 하나는 샤피이 학파 강의를 위해, 다른 하나는 말리키 학파 강의를 위해 예약되었다고 기록했다.

이 마드라사는 압드 알라흐만 카트후다(Abd al-Rahman Katkhuda)에 의해 완전히 재건되었으며, 남동쪽 벽과 그 미흐랍만 손대지 않고 남아있다. K. A. C. 크레스웰(K. A. C. Creswell)은 이 미흐랍을 "카이로에서 가장 훌륭한 것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 미흐랍의 틈새는 너비 1.13m이고 깊이 76cm이다. 틈새의 양쪽에는 높이 2.78m의 포르피리 기둥이 서 있다. 기둥 위에는 채색 기하학적 디자인으로 장식된 임포스트 블록이 있다. 미흐랍 상단의 반원형 돔은 외부 아치 안에 설치되어 있다. 이 아치 주위에는 직사각형의 외부 프레임을 형성하는 몰딩이 있다. 이것은 이집트에서 이러한 유형의 프레임을 가진 최초의 미흐랍이다. 프레임 안에는 석류나무를 묘사한 유리 모자이크가 있다.

알 악부가위야 마드라사(Madrasa al-Aqbughawiyya) 위의 첨탑. 원래는 마무룩 왕조 시대에 독립적인 모스크의 일부로 건설되었으나, 오스만 시대에 카트쿠다(Katkhuda)에 의해 개조되었다.


돔과 첨탑으로 덮인 알 악부가위야 마드라사(Madrasa al-Aqbughawiyya)는 1339년에 건립된 아미르 악부가(Amir Aqbugha)의 묘를 포함하고 있다. 설립자인 사이프 앗딘 악부가 압드 알 와히드(Sayf al-Din Aqbugha 'Abd al-Wahid)라는 또 다른 마멀루크 에미르는 이 마드라사를 독립적인 모스크와 학교로 계획했으나, 이후 모스크의 다른 부분들과 통합되었다. 여기에는 작은 묘실과 더 큰 홀이 있으며, 두 곳 모두 미흐랍(mihrab)이 있다. 입구, 키블라 벽, 그리고 유리 모자이크로 장식된 미흐랍(mihrab)들은 모두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뾰족한 돔은 오스만 시대에 재건되었다. 파사드의 일부는 1888년 헤디브 테우픽(Khedive Tewfik)에 의해 개조되었다. 첨탑의 꼭대기는 압드 알 라흐만 카트쿠다(Abd al-Rahman Katkhuda)에 의해 개조되어 그가 모스크 입구 주변에 건설한 다른 오스만식 첨탑들과 같은 뾰족한 꼭대기를 갖게 되었지만, 1932년 이후 어느 시점에 다시 마멀루크 양식의 장식으로 개조되어 오늘날 우리가 보는 모습이 되었다.

모스크 북동쪽 모퉁이에 있는 가우하르 알-카나크바이(Gawhar al-Qanaqba'i)의 묘와 마드라사 돔


1440년에 건립된 가우하르 묘(Madrasa Gawhariyya)에는 술탄의 재무관이었던 수단 출신 내시 가우하르 알-카나크바이(Gawhar al-Qanaqba'i)의 묘가 있다. 마드라사의 바닥은 대리석이며, 벽에는 에보니, 상아, 진주층을 장식적으로 상감한 장식장이 늘어서 있다. 묘실은 작은 석재 돔으로 덮여 있으며, 외부에는 아라베스크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러한 종류의 장식이 사용된 카이로의 가장 초기 돔 중 하나로(나중에 카이이트베이 묘소의 돔에서 더욱 세련되게 발전됨), 북쪽 묘지에 위치한다. 이 건물은 1980년에서 1982년 사이에 복원되었다.

카이트베이 첨탑


1483년 또는 1495년에 건설된 이 첨탑은 정사각형 기단, 팔각형 몸체로 이어지는 전이 구간, 10각형 몸체, 그리고 8개의 벽돌 기둥으로 이루어진 원통형 몸체(각 기둥 사이에는 벽돌이 끼워져 있음)로 구성되어 있다. 카이트베이 첨탑에는 또한 세 개의 발코니가 있는데, 이 발코니들은 ''무카르나스'' (평평한 표면에서 곡면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천장 장식의 일종. 이집트에서는 1085년에 처음 사용된 것으로 기록됨)로 지지되고 있으며, 첨탑을 장식하고 있다. 첫 번째 팔각형 몸체는 각 면에 용골 아치형 패널로 장식되어 있으며, 각 패널 사이에는 세 개의 기둥이 묶여 있다. 이 몸체 위에는 두 번째 팔각형 몸체가 있는데, 이는 발코니를 통해 첫 번째 몸체와 분리되며 엮음 장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두 번째 발코니는 이 몸체를 네 개의 아치로 장식된 최종 원통형 몸체와 분리한다. 그 위에는 세 번째 발코니가 있고, 그 위에 첨탑 장식이 놓여 있다.

이 첨탑은 이전 파티마 시대의 벽돌 첨탑이 있던 곳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전 첨탑은 여러 차례 재건축되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파티마 시대의 첨탑은 건설상의 결함이 있어 여러 차례 재건축이 필요했으며, 바이바르스 술탄 통치 시대의 ''카디 알-쿠다트''(최고 법원의 수석 판사)였던 사드르 알-딘 알-아드라'이 알-디마슈키 알-하나피의 지휘 아래 한 번 재건축되었다. 1397년 바르쿠크 치하에서 다시 한번 재건축되었지만, 첨탑이 위험할 정도로 기울기 시작하여 카이로의 ''왈리''이자 ''무흐타시브''였던 타즈 알-딘 알-샤우바키에 의해 1414년과 1432년에 다시 재건축되었다. 카이트베이 첨탑은 모스크 입구 재건축의 일환으로 그 자리에 세워졌다.

알-아슈라프 칸수 알-구리(Al-Ashraf Qansuh al-Ghuri)의 2개의 첨탑이 있는 미나레트


2개의 첨탑이 있는 이 미나레트는 1509년 칸수 알-구리(Qansuh al-Ghuri)에 의해 건설되었다. 정사각형 기단 위에 서 있는 첫 번째 기둥은 팔각형이며, 네 면에는 장식적인 용골 아치가 있으며, 인접한 면과는 두 개의 기둥으로 분리되어 있다. 두 번째 기둥은 12각형 다각형으로, 무카르나스(muqarnas)로 지지되는 장식된 발코니에 의해 첫 번째 기둥과 분리되며, 파란색 파얀스(faience)로 장식되어 있다. 발코니는 세 번째 층을 두 번째 기둥과 분리한다. 세 번째 층은 각 기둥의 양쪽에 말굽형 아치가 있는 두 개의 직사각형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개의 기둥 위에는 각각 두 개의 동일한 양파 모양의 구근 위에 첨탑이 놓여 있으며, 발코니는 첨탑과 기둥을 분리한다.

카이로에서 모스크의 위상이 회복되었지만, 수리 및 추가 작업은 술탄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것은 알자히르 바르쿠크 즉, 부르지 왕조의 첫 번째 술탄의 통치하에서 바뀌었다. 술탄 바르쿠크와 그 뒤를 이은 술탄 알무아이야드(al-Mu'ayyad)는 각각 1397년과 1424년에 알아즈하르의 첨탑을 돌로 된 새로운 첨탑으로 교체하려고 시도했지만, 두 경우 모두 건설이 불량한 것으로 판명되어 철거해야 했다.[3] 정부 최고위직 인사들의 직접적인 후원 재개는 맘루크 통치 종식까지 계속되었다. 카이트베이(Qaytbay)와 칸수 알구리(Qansuh al-Ghuri) 술탄은 수많은 수리 작업을 감독하고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첨탑(minaret)을 세우는 등 개선과 추가 작업을 수행했다. 맘루크 술탄들은 권력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카이로 도시 경관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첨탑을 건설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술탄들은 명망 있는 알아즈하르와 눈에 띄는 연관성을 갖기를 원했다. 알구리는 원래 ''미흐랍''(mihrab) 앞의 돔을 재건했을 수도 있다.[2]

3. 3. 오스만 제국 시대의 증축

1749년 예니체리 부대의 수장이었던 압드 알 라흐만 카트쿠다는 카이로와 알아즈하르 모스크 전체에 걸쳐 여러 건축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의 지휘 아래, 세 개의 새로운 문이 건설되었다. 학생들이 머리를 깎았던 바브 알 무자이닌(이발사의 문)은 모스크의 정문이 되었다. 상이집트인을 뜻하는 바브 알 사아이다(사아이드인들의 문)와 학생들에게 쌀 수프를 제공하던 바브 알 슈르바(수프의 문)도 건설되었다. 원래 예배당 남쪽에 예배당을 추가하여 예배 공간을 두 배로 늘렸다. 카트쿠다는 모스크를 둘러싼 여러 리와크도 개조하거나 재건했다.[1]

카트쿠다는 1735년 시각장애 학생들을 위한 리와크를 추가했고, 까이뜨바이가 건설했던 터키와 시리아 리와크도 재건했다.[2]

1309년에 건립된 알타이바르시야 마드라사는 원래 알아즈하르 모스크의 보조 모스크로 기능했으나, 이후 모스크와 통합되었다. 이 마드라사에서는 말리키와 샤피이 마드하브가 연구되었으나, 현재는 도서관 사본을 보관하는 데 사용된다. 원래 건물에서 유일하게 남은 부분은 키블라 벽과 다색 미흐랍이다. 압드 알라흐만 카트후다는 이 마드라사를 완전히 재건했지만, 남동쪽 벽과 미흐랍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K. A. C. 크레스웰은 이 미흐랍을 "카이로에서 가장 훌륭한 것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3] 미흐랍 틈새는 너비 1.13m이고 깊이 76cm이다. 틈새 양쪽에는 높이 2.78m의 포르피리 기둥이 있고, 기둥 위에는 채색 기하학적 디자인으로 장식된 임포스트 블록이 있다.[4] 미흐랍 상단의 반원형 돔은 외부 아치 안에 설치되어 있으며, 아치 주위에는 직사각형 외부 프레임을 형성하는 몰딩이 있다. 이것은 이집트에서 이러한 유형의 프레임을 가진 최초의 미흐랍이다. 프레임 안에는 석류나무를 묘사한 유리 모자이크가 있다.

3. 4. 현재의 구조



모스크의 현재 주 출입구는 바브 알 무자이닌(Bab al-Muzayinīn)이며, 주 기도실 반대편 끝에 있는 흰색 대리석으로 포장된 안뜰로 열린다.[1][2] 바브 알 무자이닌 북동쪽에는 안뜰이 마드라사 알 아쿠부가위야(Madrasa al-Aqbughawiyya)의 정면에 위치하며, 안뜰의 남서쪽 끝은 마드라사 알 타이바르시야(Madrasa al-Taybarsiyya)로 이어진다.[3] 바브 알 무자이닌 입구와 안뜰 바로 맞은편에는 1495년에 건설된 바브 알 긴디(Bab al-Gindi)(카이트베이의 문)가 있으며, 그 위에는 카이트베이의 첨탑이 서 있다.[1] 이 문을 통해 기도실 안뜰로 들어갈 수 있다.[4]

현재 기도실의 압드 알 라흐만 카트쿠다 확장부에 있는 미흐랍과 민바르


미흐랍은 최근에 금색 무늬가 있는 평범한 대리석으로 바뀌었는데, 일부 맘루크 시대의 대리석을 대체했지만, 반원형 돔의 회반죽 조각은 파티마 시대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4]

돔과 첨탑으로 덮인 알 악부가위야 마드라사는 1339년에 건립된 아미르 악부가(Amir Aqbugha)의 묘를 포함하고 있다. 설립자인 사이프 앗딘 악부가 압드 알 와히드(Sayf al-Din Aqbugha 'Abd al-Wahid)라는 또 다른 맘루크 에미르는 이 마드라사를 독립적인 모스크와 학교로 계획했으나, 이후 모스크의 다른 부분들과 통합되었다. 여기에는 작은 묘실과 더 큰 홀이 있으며, 두 곳 모두 미흐랍(mihrab)이 있다. 입구, 키블라 벽, 그리고 유리 모자이크로 장식된 미흐랍들은 모두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뾰족한 돔은 오스만 시대에 재건되었다. 파사드의 일부는 1888년 헤디브 테우픽(Khedive Tewfik)에 의해 개조되었다. 첨탑의 꼭대기는 압드 알 라흐만 카트쿠다(Abd al-Rahman Katkhuda)에 의해 개조되어 그가 모스크 입구 주변에 건설한 다른 오스만식 첨탑들과 같은 뾰족한 꼭대기를 갖게 되었지만, 1932년 이후 어느 시점에 다시 맘루크 양식의 장식으로 개조되어 오늘날 우리가 보는 모습이 되었다.

4. 사회적·정치적 역할

무함마드 알리, 1805년부터 1952년 이집트 혁명까지 이집트를 통치한 알라위 왕조의 창시자


무함마드 알리는 프랑스군 철수 후 이집트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는 알 아즈하르 율마(이슬람 법학자)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해 알 아즈하르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리즈카 토지(사원이 소유한 면세 부동산)와 마드라사에 세금을 부과하고,[4] 1809년에는 모든 리즈카 토지를 국가에 몰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율마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실패했고, 율마들의 동맹자였던 우마르 마크람은 다미에타로 유배되었다. 알리는 또한 알 아즈하르 출신이 아닌 사람들에게 정부 직책을 배정하고, 학생들을 프랑스에 유학 보내 서구식 교육을 받게 하여 알 아즈하르를 우회하는 교육 체계를 만들었다.[4]

무함마드 알리의 손자 이스마일 파샤는 카이로를 유럽식 도시로 변모시키려는 공공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초기에 면화 산업 호황으로 자금을 조달받았으나, 결국 막대한 부채를 초래하여 영국이 이집트를 점령하는 구실이 되었다. 이스마일 파샤 시대에는 알 아즈하르에 대한 왕실 후원이 부활하여 모스크 복원이 이루어졌다. 그의 아들 투픽 파샤와 압바스 힐미 2세도 개보수 공사를 계속하여 모스크를 현대화했다.

영국 점령 기간에도 알 아즈하르에 대한 개혁은 계속되었다. 무함마드 마흐디 알 압바시는 대학 채용 관행과 시험을 표준화했고, 힐미의 통치하에 교육 시스템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1885년부터는 이집트의 다른 대학들이 알 아즈하르 모스크의 직접적인 관리하에 놓였다.

사드 자글룰은 1919년 이집트 혁명을 이끌기 전 교육부 장관으로서 알 아즈하르 교육 정책 수정에 노력했다. 알 아즈하르는 보수주의의 보루였지만, 1928년 설립된 무슬림 형제단의 이슬람 근본주의에는 반대했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 영향력에 대한 균형을 제공하며 전 세계 학생들을 유치했다.

푸아드 1세는 알 아즈하르를 아랍어, 샤리아, 신학의 세 학과로 나누고, 공식 시험을 통해 학위를 수여하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학교 본부도 모스크 맞은편 건물로 이전되었다.

무함마드 아브두와 같은 개혁가들의 사상은 1928년 무스타파 알 마라기가 총장으로 임명되면서 알 아즈하르에서 자리를 잡았다. 알 마라기는 비아랍어와 현대 과학을 포함하도록 커리큘럼을 확장했고, 무함마드 알 아흐마디 알 자와히리도 알 아즈하르 현대화 노력을 계속했다.

4. 1. 종교적 권위

알아즈하르 모스크는 수니파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종교 기관 중 하나로 손꼽힌다. 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 가말 압델 나세르는 알아즈하르의 율마(ulema) 권력을 제한하고 그 영향력을 자신의 이익에 활용하려는 노력을 했다.[4] 1961년 법률은 교육기관과 종교기관의 이중적인 역할을 분리하여,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존중받는 판결을 내리도록 했다. 이 법률은 또한 의학, 공학, 경제학과 같은 세속적인 학과를 알아즈하르에 설립하여, 프랑스 점령 이후 처음으로 시작된 현대화 노력을 더욱 발전시켰다.

나세르는 와크프를 국유화하고 종교 재판소를 국가 사법 제도와 합병하여 율마의 독립성을 크게 제한했다. 1961년 개혁법은 이집트 대통령에게 알아즈하르 학장을 임명할 권한을 부여했다. 알아즈하르는 국가에 의지를 행사할 수 없었지만 계속해서 국민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혁명 이후 국가 관료 체제에 점점 더 편입되었고, 교육과정의 독립성과 모스크로서의 기능은 사라졌다.

정부의 일부로 완전히 통합된 알아즈하르는 정부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율마는 과거에 사회주의가 이슬람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발표했지만, 혁명 이후 토지 개혁이 이루어지면서 나세르가 "이슬람적" 사회주의라고 부른 것에 대한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새로운 견해가 제시되었다. 율마는 또한 무슬림 형제단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 영향에 대한 대항마 역할을 했다. 알아즈하르는 1967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며, 이스라엘과의 갈등을 "성전"이라고 선언했다.

안와르 사다트는 "아랍 세계는 이집트와 알아즈하르 없이는 기능할 수 없다"고 말하며 알아즈하르를 아랍 세계 전역에서 이집트 지도력의 상징으로 복원하기를 원했다. 사다트가 이집트 국민 대다수가 적대시하는 이스라엘과의 평화를 맺는 데 지지를 필요로 했을 때, 알아즈하르는 평화를 맺을 때가 왔다는 칙령을 내렸다.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 하에서는 모스크와 그 성직자들에게 더 많은 자율성이 주어졌다. 1990년대에는 기존 검열법이 수정되어 알아즈하르가 인쇄 매체와 전자 매체를 검열할 수 있게 되었다.

알아즈하르는 전 세계 다른 수니파 종교 당국보다 높은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수니파가 이슬람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알아즈하르는 이슬람 세계 전체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걸프 전쟁 이전에 사우디아라비아의 파흐드 국왕은 외국군의 왕국 내 주둔을 허가하는 팻와를 요청했는데, 이슬람의 두 성지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우디아라비아의 대무프티 대신 알아즈하르의 학장에게 요청했다.

4. 2. 교육 기관

1900년경 알 아즈하르 모스크의 안뜰


무함마드 마흐디 알 압바시는 1872년 대학 채용 및 시험 표준화를 위한 개혁을 단행했다. 1919년 이집트 혁명 이전 사드 자글룰은 교육 정책 수정에 힘썼다. 1928년 무스타파 알 마라기 총장 임명 후, 무함마드 아브두 등의 사상이 반영된 개혁이 시작되어 전통 과목 외 프로그램이 확장되었다. 푸아드 1세는 알 마라기를 무함마드 알 아흐마디 알 자와히리로 대체했으나, 알 마라기는 1935년 복귀, 비아랍어 및 현대 과학을 커리큘럼에 추가했다. 알 자와히리 역시 현대화 노력을 지속했다.[1]

1930년, 학교는 아랍어, 샤리아, 신학의 세 학과로 재편되었고, 각 학과는 카이로 내 별도 건물에 위치했다. 학위 취득을 위한 공식 시험도 도입되었다. 1936년, 학교 본부는 모스크 맞은편 새 건물로 이전되었고, 이후 학과 건물들이 추가되었다.[1]

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 무함마드 나귀브와 가말 압델 나세르이집트 왕정을 타도하고, 1961년 알아즈하르 대학교를 모스크와 분리했다. 1955년까지 모스크 주변 건물들이 매입 및 철거되어 현대적 캠퍼스가 조성되었다. 모스크는 더 이상 학교로 사용되지 않았고, 1961년 대학교로 공식 지정되었다. 같은 해 법률은 교육 및 종교 기관의 역할을 분리하고, 의학, 공학, 경제학 등 세속 학과를 설립했다.[1] 교육 과정 개혁으로 학생 수가 급증하여, 2001년에는 130만 명을 넘었다.[1]

4. 3. 정치적 역할

무함마드 알리는 1805년부터 1952년 이집트 혁명까지 이집트를 통치한 알라위 왕조의 창시자로, 프랑스군 철수 후 이집트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는 알 아즈하르 율마(이슬람 법학자)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해 알 아즈하르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리즈카 토지(사원이 소유한 면세 부동산)와 마드라사에 세금을 부과했다.[4] 1809년에는 모든 리즈카 토지를 국가에 몰수하라는 명령을 내려 율마들의 반란을 야기했다. 이 반란은 실패했고, 율마들의 동맹자였던 우마르 마크람은 다미에타로 유배되었다. 알리는 또한 알 아즈하르 출신이 아닌 사람들에게 정부 직책을 배정하고, 학생들을 프랑스에 유학 보내 서구식 교육을 받게 하여 알 아즈하르를 우회하는 교육 체계를 만들었다.[4]

무함마드 알리의 손자 이스마일 파샤는 카이로를 유럽식 도시로 변모시키려는 공공 사업을 시작했다. 이 사업은 초기에 면화 산업 호황으로 자금을 조달받았으나, 결국 막대한 부채를 초래하여 영국이 이집트를 점령하는 구실이 되었다. 이스마일 파샤 시대에는 알 아즈하르에 대한 왕실 후원이 부활하여 모스크 복원이 이루어졌다. 그의 아들 투픽 파샤와 압바스 힐미 2세도 개보수 공사를 계속하여 모스크를 현대화했다.

영국 점령 기간에도 알 아즈하르에 대한 개혁은 계속되었다. 무함마드 마흐디 알 압바시는 대학 채용 관행과 시험을 표준화했고, 힐미의 통치하에 교육 시스템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1885년부터는 이집트의 다른 대학들이 알 아즈하르 모스크의 직접적인 관리하에 놓였다.

사드 자글룰은 1919년 이집트 혁명을 이끌기 전 교육부 장관으로서 알 아즈하르 교육 정책 수정에 노력했다. 알 아즈하르는 보수주의의 보루였지만, 1928년 설립된 무슬림 형제단의 이슬람 근본주의에는 반대했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 영향력에 대한 균형을 제공하며 전 세계 학생들을 유치했다.

푸아드 1세는 알 아즈하르를 아랍어, 샤리아, 신학의 세 학과로 나누고, 공식 시험을 통해 학위를 수여하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학교 본부도 모스크 맞은편 건물로 이전되었다.

무함마드 아브두와 같은 개혁가들의 사상은 1928년 무스타파 알 마라기가 총장으로 임명되면서 알 아즈하르에서 자리를 잡았다. 알 마라기는 비아랍어와 현대 과학을 포함하도록 커리큘럼을 확장했고, 알 자와히리도 알 아즈하르 현대화 노력을 계속했다.

2011년 이집트 혁명 이후, 학생회 선거에서 무슬림 형제단이 승리했다. 알 아즈하르는 정부로부터 더 큰 독립성을 요구받았고, 내부에서는 미래 역할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다양한 이슬람주의 단체와 자유주의 세력, 그리고 알 아즈하르의 완전한 독립을 원하는 이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렸다.

2018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으로 대대적인 모스크 복원이 완료되었다.[1] [2] 2020년, 알 아즈하르는 이집트의 성폭력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참조

[1] 웹사이트 Al-Azhar Mosque shines after years-long restoration - Politics - Egypt https://english.ahra[...] 2022-06-18
[2] 웹사이트 Al-Sisi, Saudi Crown Prince inaugurate Al-Azhar Mosque renovation https://almashareq.c[...] 2022-06-18
[3] 서적 Routledge Handbook of Sustainable Heritage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4] 서적 알아즈하르의 역사 https://books.googl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