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다 유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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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와다 유타카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한신 타이거스에서 선수, 코치,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선수 시절 통산 1,739안타를 기록했고, 1993년에는 최다 안타를 기록했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3년 연속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으며, 1992년과 1994년에는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한신 타이거스 감독을 역임했으며, 2014년에는 팀을 일본 시리즈에 진출시켰다. 2023년에는 한신 2군 감독으로 현장에 복귀했고, 2024년부터는 1, 2군 타격 순회 코디네이터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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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유타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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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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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와다 유타카 |
원어 이름 | 和田 豊 |
로마자 표기 | Yutaka Wada |
출생일 | 1962년 9월 2일 |
출생지 | 일본 지바현 마쓰도 시 |
신장 | 174cm |
체중 | 72kg |
포지션 | 내야수 |
투구 | 우투 |
타석 | 우타 |
프로 입단 | 1984년 (드래프트 3위) |
첫 출장 | 1985년 7월 11일 |
마지막 출장 | 2001년 10월 1일 (은퇴 경기) |
드래프트 순위 | 3위 |
선수 경력 | |
소속 구단 | 한신 타이거스 (1985년 ~ 2001년) |
지도자 경력 | |
감독 | 한신 타이거스 (2012년 ~ 2015년) |
코치 | 한신 타이거스 (2001년 ~ 2011년, 2023년 ~ 현재) |
현재 직책 | 1·2군 타격 순회 코디네이터 |
등번호 | 86 |
개인 기록 (NPB) | |
타율 | 0.291 |
안타 | 1,739 |
타점 | 407 |
도루 | 94 |
홈런 | 29 |
수상 내역 | |
베스트 나인 | 2회 (1992년, 1994년) |
골든 글러브 | 3회 (1992년 ~ 1994년) |
올스타 | 7회 (1989년, 1992년 ~ 1996년, 1999년) |
올림픽 메달 | |
종목 | 야구 |
대회 | 1984년 하계 올림픽 야구 |
메달 | 금메달 |
외부 링크 | |
데일리 스포츠 기사 (2015년 11월 7일) | 와다 전 감독, 시니어 어드바이저로 취임 |
닛칸 스포츠 기사 (2017년 10월 24일) | 한신, 와다 유타카 씨에게 구단 본부 기술 어드바이저 |
2. 선수 경력
니혼 대학 졸업 후 1984년 드래프트 3위로 한신 타이거스에 지명되어 입단했다.
1985년 야마와키 코지와 교체되어 1군에 승격되었고, 프로 첫 타석은 볼넷이었다. 신인 선수임에도 39경기에 출전하여 팀 사상 첫 일본 시리즈 우승에 내야수로서 기여했다.[41]
1988년 무라야마 미노루 감독으로부터 오노 히사시, 나카노 사토시와 함께 "한신 타이거스 소년대"(少年隊일본어)로 명명되었다. 개막부터 히라타 카츠오를 대신하여 유격수로 발탁되어 2번 타자로 활약했다. 당시 일본 기록을 경신하는 56개의 희생타를 기록했으며, 규정 타석 (14위, 타율 .279)에도 도달했다. 1989년에도 최다 희생타를 기록하며, 잔기술과 견실한 수비로 팀의 핵심 선수가 되었다.[41] 1988년에는 스위치 히터에도 도전했지만, 현역 생활은 우타자로만 활동했다.
1990년에는 타율 .304 (리그 5위)로, 개인 첫 3할을 넘는 타율을 기록했다. 시즌 홈런 8개는 생애 최다 홈런이었으며, 이 해 마지막 홈런이 된 8호는 런닝 홈런이었다. 장타율도 생애 유일하게 4할을 넘었지만, 같은 해의 삼진 59개는 생애 최악의 기록이 되었다.
레귤러를 확보한 초기에는 2번 타자로 기용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승부 근성과 삼진이 적은 타격을 인정받아 서서히 1번 타자로 자리 잡았고, 침체된 한신을 팀 리더로서 이끌었다.[41]
1992년부터 오카다 아키후미를 대신하여 2루수로 자리를 옮겨, 3년 연속으로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특히 1992년에는 루키 해 이후 팀의 우승 경쟁에 기여하여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었다.[41] 예술적인 밀어 치기와, 몰린 상황에서의 승부 근성을 무기로 "안타 제조기"로 활약하며, 통산 1,739안타를 기록했다.[41]
1993년에는 리그 최다 안타 (당시에는 타이틀이 아님)를 기록하는 등, 교묘한 타격의 내야수로서 활약했다. 한편, 극단적으로 장타가 적은 타자로 알려져, 1991년부터 1993년까지 규정 타석을 채웠음에도 3년 연속으로 0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1994년 5월 2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8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2점 홈런을 쳤는데, 이는 1,930타석 만에 나온 것이었고, 주자를 둔 홈런은 프로 입단 후 3,673타석 만에 처음이었다.[41]
1994년에는 타율 .318 (리그 4위)로, 개인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며 수위 타자 경쟁에도 참여했다. 시즌 종료 후 계약 갱신에서 한신의 육성 선수 출신으로는 최초로 1억 엔 플레이어가 되었다 (구단 최초의 1억 엔 플레이어는 이시미네 카즈히코). 이 해의 타순은 전반기에는 1번 타자, 후반기에는 롭 디어의 부진으로 인해 3번 타자를 맡았다. 이 해 시즌 147개의 단타는, 1988년 아라이 히로마사가 기록한 144개를 넘어섰지만, 오릭스의 이치로가 151개를 기록했기 때문에, 이 시즌 종료 시점에서는 센트럴 리그 신기록이자 일본 프로 야구 역대 2위 (우타자로는 1위)가 되었다[3] (센트럴 리그 기록으로는 2003년 아카호시 겐고가 기록을 따라잡았고, 2004년 아라키 마사히로가 갱신).
1995년은 전년도 최종전에서 자가 타구에 발을 맞아 골절된 영향으로 부진에 빠져, 세키카와 코이치에게 1번 타자를 양보하고 2번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1996년에는 개막부터 7번 타자로 시작했지만, 5월 말에는 1번으로 복귀하여 성적도 회복했다. 팀 사정으로 인해 3루수로서 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11월에 열린 미일 야구에도 출전했다. 특히 고시엔에서의 경기에서는 노모 히데오를 상대로 3루타를 쳐내 5타점을 올리는 활약을 펼쳤다.
1997년에는 다시 2루수로 복귀, 시즌 초부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며, 개막 이후 연속 안타 기록으로는 일본 기록인 24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지만, 7월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사구를 맞아, 왼손 검지와 중지를 골절당해, 9월까지 2개월간 전력에서 이탈했다. 레귤러로 자리 잡은 이후 처음으로 100경기 미만으로 시즌을 마쳤지만, 3년 만에 타율 3할을 기록했다.
1998년에는 결막염에 걸려, 한동안 안경을 쓰고 출전했다.
1999년에 노무라 카츠야가 한신의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감독이 바뀌어도 우리는 변하지 않는다"라고 발언한 것으로 보도되었고, 첫 미팅 때 노무라로부터 "변하지 않으니 팀이 침체된 채인 것이다"라고 질책을 받았다 (후술). 시즌에서는 타율이 3할을 넘었지만, 연속 규정 타석 달성은 11년 만에 끊겼다.
2000년에는 개막부터 3루수로 선발 출전했지만, 공수에서 노쇠화가 드러나 4월 중순에 선발 출전에서 제외되었고, 이후에는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늘어나, 1군 정착 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오프 시즌 계약 갱신에서는, 연봉 9,200만 엔에서 대폭 삭감된 4,600만 엔으로, 다음 해부터 타격 코치를 겸임 (코치 연봉으로 별도 1,000만 엔)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2001년에는 1988년 이래 계속해왔던 개막 선발 출전이 끊겼고, 개막부터 7월까지 20타석 이상 안타가 나오지 않는 부진을 겪었으며, 첫 안타는 7월 11일에 나왔다. 선수로서는 두 차례 2군 강등을 경험하는 한편, 코치로서 1군에 동행했기 때문에 연습 시간을 확보할 수 없어, 특히 원정 경기에서는 감각이 무뎌지지 않도록 일반 배팅 센터에 다니기도 했다.
9월 21일 현역 은퇴를 표명했고[4], 10월 1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가 은퇴 경기로 치러졌다[5]. 이 해 유일한 선발 출전으로 1번 2루수로 기용되어, 우전 안타와 볼넷으로 두 번 출루, 두 번 모두 홈을 밟았다. 이날 마지막 지휘를 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같은 치바현 출신이기도 함)에게 꽃다발 증정식 후, 와다의 은퇴 세레모니가 진행되었고[6], 스피치에서는 구단 관계자, 동료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 데 이어 "…일본 제일의 구장에서 항상 좋은 컨디션으로 경기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신 한신 조원 여러분. 그리고, 항상 묵묵히 뒷받침해 준 관계자 여러분, 언론 관계자 여러분…" 이라는 숨은 조력자들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와다의 은퇴로, 1985년 우승,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현역 선수는 모두 사라졌다.
연 도 | 소 속 | 경 기 | 타 석 | 타 수 | 득 점 | 안 타 | 2 루 타 | 3 루 타 | 홈 런 | 루 타 | 타 점 | 도 루 | 도 루 자 | 희 생 번 | 희 생 플 | 볼 넷 | 고 4 | 사 구 | 삼 진 | 병 살 타 | 타 율 | 출 루 율 | 장 타 율 | O P S |
---|---|---|---|---|---|---|---|---|---|---|---|---|---|---|---|---|---|---|---|---|---|---|---|---|
1985년 | 한신 | 39 | 54 | 49 | 10 | 14 | 0 | 0 | 0 | 14 | 2 | 0 | 0 | 0 | 0 | 5 | 0 | 0 | 3 | 3 | .286 | .352 | .286 | .638 |
1986년 | 8 | 5 | 3 | 0 | 1 | 1 | 0 | 0 | 2 | 0 | 0 | 0 | 0 | 0 | 2 | 0 | 0 | 0 | 0 | .333 | .333 | .667 | 1.000 | |
1987년 | 54 | 59 | 53 | 8 | 13 | 1 | 0 | 1 | 17 | 2 | 3 | 2 | 3 | 0 | 3 | 0 | 0 | 9 | 2 | .245 | .286 | .321 | .606 | |
1988년 | 127 | 493 | 398 | 57 | 111 | 12 | 1 | 1 | 128 | 20 | 17 | 3 | 56 | 1 | 37 | 0 | 1 | 51 | 5 | .279 | .341 | .322 | .663 | |
1989년 | 129 | 563 | 476 | 61 | 141 | 20 | 4 | 1 | 172 | 25 | 18 | 8 | 40 | 1 | 45 | 0 | 1 | 39 | 7 | .296 | .358 | .361 | .719 | |
1990년 | 126 | 569 | 496 | 72 | 151 | 16 | 4 | 8 | 199 | 36 | 17 | 9 | 12 | 3 | 54 | 6 | 4 | 59 | 8 | .304 | .375 | .401 | .776 | |
1991년 | 129 | 565 | 494 | 50 | 147 | 13 | 3 | 0 | 166 | 34 | 9 | 13 | 10 | 2 | 58 | 4 | 1 | 48 | 14 | .298 | .371 | .336 | .707 | |
1992년 | 132 | 606 | 550 | 65 | 153 | 23 | 8 | 0 | 192 | 23 | 1 | 6 | 15 | 0 | 40 | 3 | 1 | 48 | 9 | .278 | .328 | .349 | .677 | |
1993년 | 127 | 579 | 511 | 63 | 161 | 22 | 2 | 0 | 187 | 36 | 4 | 1 | 18 | 2 | 47 | 2 | 1 | 35 | 15 | .315 | .373 | .366 | .738 | |
1994년 | 130 | 601 | 519 | 76 | 165 | 13 | 3 | 2 | 190 | 43 | 8 | 7 | 11 | 3 | 65 | 3 | 3 | 40 | 6 | .318 | .395 | .366 | .761 | |
1995년 | 130 | 569 | 509 | 49 | 136 | 22 | 4 | 1 | 169 | 35 | 4 | 4 | 11 | 1 | 45 | 0 | 3 | 39 | 14 | .267 | .330 | .332 | .662 | |
1996년 | 130 | 573 | 520 | 66 | 155 | 22 | 3 | 5 | 198 | 44 | 2 | 7 | 6 | 4 | 43 | 2 | 0 | 48 | 10 | .298 | .349 | .381 | .730 | |
1997년 | 96 | 423 | 390 | 51 | 117 | 17 | 5 | 2 | 150 | 26 | 2 | 0 | 1 | 3 | 25 | 1 | 4 | 44 | 4 | .300 | .346 | .385 | .731 | |
1998년 | 130 | 495 | 438 | 39 | 119 | 15 | 1 | 4 | 148 | 32 | 1 | 4 | 10 | 1 | 45 | 0 | 1 | 39 | 10 | .272 | .340 | .338 | .678 | |
1999년 | 101 | 379 | 334 | 30 | 101 | 13 | 3 | 3 | 129 | 23 | 4 | 4 | 11 | 0 | 32 | 1 | 2 | 29 | 13 | .302 | .367 | .386 | .753 | |
2000년 | 88 | 228 | 194 | 19 | 49 | 8 | 1 | 1 | 62 | 20 | 3 | 2 | 6 | 0 | 26 | 4 | 2 | 16 | 3 | .253 | .347 | .320 | .666 | |
2001년 | 37 | 44 | 38 | 4 | 5 | 2 | 0 | 0 | 7 | 2 | 0 | 0 | 0 | 0 | 6 | 1 | 0 | 7 | 0 | .132 | .250 | .184 | .434 | |
통산 : 17년 | 1713 | 6805 | 5972 | 720 | 1739 | 220 | 42 | 29 | 2130 | 403 | 93 | 70 | 212 | 21 | 576 | 27 | 24 | 554 | 123 | .291 | .355 | .357 | .711 |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2. 1. 프로 입단 전
지바현 마쓰도시 출신으로, 지바 현립 아비코 고등학교 1학년 때 하계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다. 고교 졸업 후 니혼 대학에 진학하여 도토 대학 1부 리그에서 통산 78경기에 출전, 288타수 94안타, 타율 3할 2푼 6리, 4홈런, 22타점을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을 두 차례 선정되었다. 1983년 춘계 리그에서는 수위타자가 되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일본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금메달 획득에 기여했다.마쓰도 시립 토키와다이라 제1초등학교, 마쓰도 시립 토키와다이라 중학교를 거쳐 아비코 고등학교에 진학, 1978년 1학년 때 3루수로 여름 고시엔에 출전했다. 2회전에서 이시미네 카즈히코가 있던 토미구스쿠 고등학교에게 연장 10회 사요나라 패배를 당했다.
니혼 대학 진학 당시에는 도토 대학 야구 리그 2부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1981년 가을 2부 리그에서 우승하고 승강전에서 고쿠시칸 대학을 꺾고 1부로 승격했다. 1983년 춘계 리그에서는 고마대에 이은 2위를 기록했고, 와다 유타카는 수위 타자를 획득했다. 도토 1부 리그 통산 기록은 베스트 나인(유격수) 2회 수상 경력을 포함한다.
1983년부터 2년 연속으로 미일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로 선출되었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일본 대표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했다.
2. 2. 한신 타이거스 시절 (1985-2001)
1984년 드래프트 3위로 한신 타이거스에 지명되어 입단했다. 그 해 은퇴한 후지타 히라의 후계자로 기대를 모았고, 등번호 '''6'''을 받았다.[41] 1985년 야마와키 코지와 교체되어 1군에 승격되었고, 프로 첫 타석은 볼넷이었다. 신인 선수임에도 39경기에 출전하여 팀 사상 첫 일본 시리즈 우승에 내야수로서 기여했다.[41]1988년 무라야마 미노루 감독으로부터 오노 히사시, 나카노 사토시와 함께 "한신 타이거스 소년대"(少年隊일본어)로 명명되었다. 개막부터 히라타 카츠오를 대신하여 유격수로 발탁되어 2번 타자로 활약했다. 당시 일본 기록을 경신하는 56개의 희생타를 기록했으며, 규정 타석 (14위, 타율 .279)에도 도달했다. 1989년에도 최다 희생타를 기록하며, 잔기술과 견실한 수비로 팀의 핵심 선수가 되었다.[41] 1988년에는 스위치 히터에도 도전했지만, 현역 생활은 우타자로만 활동했다.
1990년에는 타율 .304 (리그 5위)로, 개인 첫 3할을 넘는 타율을 기록했다. 시즌 홈런 8개는 생애 최다 홈런이었으며, 이 해 마지막 홈런이 된 8호는 런닝 홈런이었다. 장타율도 생애 유일하게 4할을 넘었지만, 같은 해의 삼진 59개는 생애 최악의 기록이 되었다.
레귤러를 확보한 초기에는 2번 타자로 기용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승부 근성과 삼진이 적은 타격을 인정받아 서서히 1번 타자로 자리 잡았고, 침체된 한신을 팀 리더로서 이끌었다.[41]
1992년부터 오카다 아키후미를 대신하여 2루수로 자리를 옮겨, 3년 연속으로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다. 특히 1992년에는 루키 해 이후 팀의 우승 경쟁에 기여하여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었다.[41] 예술적인 밀어 치기와, 몰린 상황에서의 승부 근성을 무기로 "안타 제조기"로 활약하며, 통산 1,739안타를 기록했다.[41]
1993년에는 리그 최다 안타 (당시에는 타이틀이 아님)를 기록하는 등, 교묘한 타격의 내야수로서 활약했다. 한편, 극단적으로 장타가 적은 타자로 알려져, 1991년부터 1993년까지 규정 타석을 채웠음에도 3년 연속으로 0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1994년 5월 2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8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2점 홈런을 쳤는데, 이는 1,930타석 만에 나온 것이었고, 주자를 둔 홈런은 프로 입단 후 3,673타석 만에 처음이었다.[41]
1994년에는 타율 .318 (리그 4위)로, 개인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며 수위 타자 경쟁에도 참여했다. 시즌 종료 후 계약 갱신에서 한신의 육성 선수 출신으로는 최초로 1억 엔 플레이어가 되었다 (구단 최초의 1억 엔 플레이어는 이시미네 카즈히코). 이 해의 타순은 전반기에는 1번 타자, 후반기에는 롭 디어의 부진으로 인해 3번 타자를 맡았다. 이 해 시즌 147개의 단타는, 1988년 아라이 히로마사가 기록한 144개를 넘어섰지만, 오릭스의 이치로가 151개를 기록했기 때문에, 이 시즌 종료 시점에서는 센트럴 리그 신기록이자 일본 프로 야구 역대 2위 (우타자로는 1위)가 되었다[3] (센트럴 리그 기록으로는 2003년 아카호시 겐고가 기록을 따라잡았고, 2004년 아라키 마사히로가 갱신).
1995년은 전년도 최종전에서 자가 타구에 발을 맞아 골절된 영향으로 부진에 빠져, 세키카와 코이치에게 1번 타자를 양보하고 2번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1996년에는 개막부터 7번 타자로 시작했지만, 5월 말에는 1번으로 복귀하여 성적도 회복했다. 팀 사정으로 인해 3루수로서 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11월에 열린 미일 야구에도 출전했다. 특히 고시엔에서의 경기에서는 노모 히데오를 상대로 3루타를 쳐내 5타점을 올리는 활약을 펼쳤다.
1997년에는 다시 2루수로 복귀, 시즌 초부터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며, 개막 이후 연속 안타 기록으로는 일본 기록인 24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지만, 7월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사구를 맞아, 왼손 검지와 중지를 골절당해, 9월까지 2개월간 전력에서 이탈했다. 레귤러로 자리 잡은 이후 처음으로 100경기 미만으로 시즌을 마쳤지만, 3년 만에 타율 3할을 기록했다.
1998년에는 결막염에 걸려, 한동안 안경을 쓰고 출전했다.
1999년에 노무라 카츠야가 한신의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감독이 바뀌어도 우리는 변하지 않는다"라고 발언한 것으로 보도되었고, 첫 미팅 때 노무라로부터 "변하지 않으니 팀이 침체된 채인 것이다"라고 질책을 받았다 (후술). 시즌에서는 타율이 3할을 넘었지만, 연속 규정 타석 달성은 11년 만에 끊겼다.
2000년에는 개막부터 3루수로 선발 출전했지만, 공수에서 노쇠화가 드러나 4월 중순에 선발 출전에서 제외되었고, 이후에는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늘어나, 1군 정착 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오프 시즌 계약 갱신에서는, 연봉 9,200만 엔에서 대폭 삭감된 4,600만 엔으로, 다음 해부터 타격 코치를 겸임 (코치 연봉으로 별도 1,000만 엔)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2001년에는 1988년 이래 계속해왔던 개막 선발 출전이 끊겼고, 개막부터 7월까지 20타석 이상 안타가 나오지 않는 부진을 겪었으며, 첫 안타는 7월 11일에 나왔다. 선수로서는 두 차례 2군 강등을 경험하는 한편, 코치로서 1군에 동행했기 때문에 연습 시간을 확보할 수 없어, 특히 원정 경기에서는 감각이 무뎌지지 않도록 일반 배팅 센터에 다니기도 했다.
9월 21일 현역 은퇴를 표명했고[4], 10월 1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가 은퇴 경기로 치러졌다[5]. 이 해 유일한 선발 출전으로 1번 2루수로 기용되어, 우전 안타와 볼넷으로 두 번 출루, 두 번 모두 홈을 밟았다. 이날 마지막 지휘를 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같은 치바현 출신이기도 함)에게 꽃다발 증정식 후, 와다의 은퇴 세레모니가 진행되었고[6], 스피치에서는 구단 관계자, 동료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 데 이어 "…일본 제일의 구장에서 항상 좋은 컨디션으로 경기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신 한신 조원 여러분. 그리고, 항상 묵묵히 뒷받침해 준 관계자 여러분, 언론 관계자 여러분…" 이라는 숨은 조력자들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와다의 은퇴로, 1985년 우승,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현역 선수는 모두 사라졌다.
연 도 | 소 속 | 경 기 | 타 석 | 타 수 | 득 점 | 안 타 | 2 루 타 | 3 루 타 | 홈 런 | 루 타 | 타 점 | 도 루 | 도 루 자 | 희 생 번 | 희 생 플 | 볼 넷 | 고 4 | 사 구 | 삼 진 | 병 살 타 | 타 율 | 출 루 율 | 장 타 율 | O P S |
---|---|---|---|---|---|---|---|---|---|---|---|---|---|---|---|---|---|---|---|---|---|---|---|---|
1985년 | 한신 | 39 | 54 | 49 | 10 | 14 | 0 | 0 | 0 | 14 | 2 | 0 | 0 | 0 | 0 | 5 | 0 | 0 | 3 | 3 | .286 | .352 | .286 | .638 |
1986년 | 8 | 5 | 3 | 0 | 1 | 1 | 0 | 0 | 2 | 0 | 0 | 0 | 0 | 0 | 2 | 0 | 0 | 0 | 0 | .333 | .333 | .667 | 1.000 | |
1987년 | 54 | 59 | 53 | 8 | 13 | 1 | 0 | 1 | 17 | 2 | 3 | 2 | 3 | 0 | 3 | 0 | 0 | 9 | 2 | .245 | .286 | .321 | .606 | |
1988년 | 127 | 493 | 398 | 57 | 111 | 12 | 1 | 1 | 128 | 20 | 17 | 3 | 56 | 1 | 37 | 0 | 1 | 51 | 5 | .279 | .341 | .322 | .663 | |
1989년 | 129 | 563 | 476 | 61 | 141 | 20 | 4 | 1 | 172 | 25 | 18 | 8 | 40 | 1 | 45 | 0 | 1 | 39 | 7 | .296 | .358 | .361 | .719 | |
1990년 | 126 | 569 | 496 | 72 | 151 | 16 | 4 | 8 | 199 | 36 | 17 | 9 | 12 | 3 | 54 | 6 | 4 | 59 | 8 | .304 | .375 | .401 | .776 | |
1991년 | 129 | 565 | 494 | 50 | 147 | 13 | 3 | 0 | 166 | 34 | 9 | 13 | 10 | 2 | 58 | 4 | 1 | 48 | 14 | .298 | .371 | .336 | .707 | |
1992년 | 132 | 606 | 550 | 65 | 153 | 23 | 8 | 0 | 192 | 23 | 1 | 6 | 15 | 0 | 40 | 3 | 1 | 48 | 9 | .278 | .328 | .349 | .677 | |
1993년 | 127 | 579 | 511 | 63 | 161 | 22 | 2 | 0 | 187 | 36 | 4 | 1 | 18 | 2 | 47 | 2 | 1 | 35 | 15 | .315 | .373 | .366 | .738 | |
1994년 | 130 | 601 | 519 | 76 | 165 | 13 | 3 | 2 | 190 | 43 | 8 | 7 | 11 | 3 | 65 | 3 | 3 | 40 | 6 | .318 | .395 | .366 | .761 | |
1995년 | 130 | 569 | 509 | 49 | 136 | 22 | 4 | 1 | 169 | 35 | 4 | 4 | 11 | 1 | 45 | 0 | 3 | 39 | 14 | .267 | .330 | .332 | .662 | |
1996년 | 130 | 573 | 520 | 66 | 155 | 22 | 3 | 5 | 198 | 44 | 2 | 7 | 6 | 4 | 43 | 2 | 0 | 48 | 10 | .298 | .349 | .381 | .730 | |
1997년 | 96 | 423 | 390 | 51 | 117 | 17 | 5 | 2 | 150 | 26 | 2 | 0 | 1 | 3 | 25 | 1 | 4 | 44 | 4 | .300 | .346 | .385 | .731 | |
1998년 | 130 | 495 | 438 | 39 | 119 | 15 | 1 | 4 | 148 | 32 | 1 | 4 | 10 | 1 | 45 | 0 | 1 | 39 | 10 | .272 | .340 | .338 | .678 | |
1999년 | 101 | 379 | 334 | 30 | 101 | 13 | 3 | 3 | 129 | 23 | 4 | 4 | 11 | 0 | 32 | 1 | 2 | 29 | 13 | .302 | .367 | .386 | .753 | |
2000년 | 88 | 228 | 194 | 19 | 49 | 8 | 1 | 1 | 62 | 20 | 3 | 2 | 6 | 0 | 26 | 4 | 2 | 16 | 3 | .253 | .347 | .320 | .666 | |
2001년 | 37 | 44 | 38 | 4 | 5 | 2 | 0 | 0 | 7 | 2 | 0 | 0 | 0 | 0 | 6 | 1 | 0 | 7 | 0 | .132 | .250 | .184 | .434 | |
통산 : 17년 | 1713 | 6805 | 5972 | 720 | 1739 | 220 | 42 | 29 | 2130 | 403 | 93 | 70 | 212 | 21 | 576 | 27 | 24 | 554 | 123 | .291 | .355 | .357 | .711 |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2. 3. 국가대표 경력
와다 유타카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3. 지도자 경력
와다 유타카는 은퇴 후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2003년에는 뛰어난 관찰과 지도로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7] 2005년에는 1군 타격 코치로 복귀하여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7] 히로사와 가쓰미가 타격 코치로 부임한 2007년부터는 내야 수비 주루 코치를 맡았고,[7] 2009년부터 다시 1군 타격 코치로 활동했다.[7]
2011년 10월 28일, 마유미 아키노부 감독의 후임으로 제32대 한신 타이거스 감독으로 취임하여 2012년부터 팀을 이끌었다.[8] 이는 요시다 요시오 전 감독 이후 14년 만에 타 구단 소속 경력이 없는 한신 출신 감독의 취임이었다.[8][9]
감독 취임 첫 해인 2012년에는 팀이 5위에 그쳤지만, 2013년에는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성공하며 2위를 기록했다. 2014년에도 2위를 기록하며 일본 시리즈에 진출했으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19] 2015년에는 팀이 3위를 기록했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패배한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25]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2012년 | 한신 | 5위 | 144 | 55 | 75 | 14 | .423 | 31.5 | 58 | .236 | 2.65 | 50세 |
2013년 | 2위 | 144 | 73 | 67 | 4 | .521 | 12.5 | 82 | .255 | 3.07 | 51세 | |
2014년 | 2위 | 144 | 75 | 68 | 1 | .524 | 7 | 94 | .264 | 3.88 | 52세 | |
2015년 | 3위 | 143 | 70 | 71 | 2 | .496 | 6 | 78 | .247 | 3.47 | 53세 | |
통산 : 4년 | 575 | 273 | 281 | 21 | .493 | A클래스 : 3회, B클래스 : 1회 |
연도 | 소속 | 경기명 | 상대팀 | 성적 |
---|---|---|---|---|
2013년 | 한신 |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 히로시마 도요 카프(센트럴 리그 3위) | 0승 2패 = 패전 |
2014년 |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 히로시마 도요 카프(센트럴 리그 3위) | 1승 1무 =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 | |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 | 요미우리 자이언츠(센트럴 리그 1위) | 4승 1패 = 일본 시리즈 진출 (※1) | ||
일본 시리즈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퍼시픽 리그 1위) | 1승 4패 = 패전 | ||
2015년 |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 요미우리 자이언츠(센트럴 리그 2위) | 1승 2패 = 패전 | |
- 성적에서의 '''굵은 글씨'''는 승리한 것을 나타냄.
:※1 : 어드밴티지 1승을 포함
2015년 시즌 후, 구단 오너 부속 시니어 어드바이저(SA)로 취임했다. 2017년에는 구단 본부 부속 테크니컬 어드바이저(TA)로 이동하여 아마추어 야구 스카우트 및 트랙맨 데이터 분석 등을 담당했다. 2020년에는 임시 코치로 현장에 복귀하기도 했다.[29]
2023년,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의 요청으로 한신 2군 감독으로 취임하여 현장에 복귀했다.[30] 2024년부터는 1,2군 타격 순회 코디네이터를 맡게 되었다.
3. 1. 한신 타이거스 코치 시절 (2002-2011)
와다 유타카는 은퇴 후 2002년부터 등번호를 86번으로 변경하면서 코치직을 계속 맡았다.[7] 2003년에는 뛰어난 관찰과 지도로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7] 2004년에는 2군 종합 코치를 맡았지만,[7] 2005년에 1군 타격 코치로 복귀하면서 팀은 2년 만에 리그 우승을 제패했다.[7] 코치로서 치밀한 데이터 해석을 하면서 선수들의 신뢰를 얻었다.[7]2007년부터는 히로사와 가쓰미가 타격 코치로 부임하면서 내야 수비 주루 코치가 되었고,[7] 2009년부터는 다시 1군 타격 코치로 전환되었다.[7] 2007년에는 1루, 2008년에는 3루 베이스 코치를 담당했다.[7]
2011년 10월 28일, 마유미 아키노부 감독의 후임으로 제32대 한신 타이거스 감독으로 취임하여 2012년부터 지휘를 맡게 되었는데, 타 구단에서의 소속 경력이 없는 토박이 감독으로서는 1998년에 퇴임한 요시다 요시오 전 감독 이후 14년 만의 일이었다.
3. 2. 한신 타이거스 감독 시절 (2012-2015)
2011년 10월 28일, 마유미 아키노부 감독의 후임으로 제32대 한신 타이거스 감독으로 취임하여, 2012년부터 지휘를 맡게 되었다.[8] 타 구단에서의 소속 경력이 없는 한신 출신 감독으로서는 1998년에 퇴임한 요시다 요시오 전 감독 이후 14년 만이었다. 취임 회견에서는 "지금의 전력에 약간의 스파이스를 더하면 우승 경쟁을 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9]감독 취임 1년째인 2012년에는 주력 선수의 부진과 선수층의 얇음 등으로 팀이 부진했고, 요미우리전에서 크게 패한 것도 영향을 미쳐 팀은 5위로 마감했다.
2013년에는 '스파이스'로서 시즌 전에 메이저 리그에서 영입한 니시오카 츠요시, 후쿠도메 코스케, 드래프트 1순위 후지나미 신타로 등을 더한 전력이 맞아떨어져 교류전에서는 한때 단독 선두에 섰지만, 요미우리에게 빼앗긴 이후에는 선두에 서지 못했고, 8월 27일부터의 요미우리와의 직접 대결 3연전에서 3연패를 당한 것도 영향을 미쳐 요미우리의 우승을 허용했다. 결과적으로 3년 만의 시즌 승리 및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을 결정했지만, 최종적으로 요미우리에게 12.5 경기 차이로 2위를 기록했다. 히로시마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2연패를 당해 탈락했다.
2014년에는 교류전에서 9승 15패로 크게 패했지만, 7년 만의 8연승으로 전반기 흑자 턴을 확정했다.[11] 9월에는 6연패를 당하는 등 불안정한 시기도 있었다.[12] 그러나 9월 27일에는 전년에 이어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을 확정했고[13], 75승 68패 1무(승률 .524)를 기록하여[14], 전년보다 약간이나마 성적을 향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최종적으로 2년 연속 2위를 기록했다.[15]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파이널 스테이지의 히로시마전을 1승 1무로 승리했고[16],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요미우리를 상대로 4연승을 거두어, 구단 사상 최초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패로, 9년 만의 일본 시리즈 진출을 결정했다.[17][18] 일본 시리즈에서는 2003년 일본 시리즈 이후 일본 시리즈에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을 치르게 되어, 구단에게도, 당시 코치였던 와다에게도 설욕할 기회였지만, 결과는 1승 4패로 끝나 설욕을 하고 29년 만의 일본 제일이 되지는 못했다.[19]
2015년에는 주니치를 상대로 개막 3연승으로 시작했지만[20], 이후에는 부진하여 초반에는 빚더미에 앉았다. 그러나 5월 28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전에서 구단 사상 최초의 교류전 개막 3연승[21]과 구단 통산 5,000승을 달성했다[22][23](요미우리 다음으로 12개 구단 중 2번째로 빠른 달성이다[24]). 그러나, 이 해에도 후반에 부진하여 리그 우승을 놓쳤기 때문에, 같은 시즌을 끝으로 퇴임이 결정되었다[25] 최종적으로 3위로 시즌을 마쳤다. CS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리그 2위의 요미우리와 대결했지만 1승 2패로 패퇴했다.
감독 퇴임으로 인해 1985년에 선수로 입단한 이후 31년 연속으로 착용해 온 한신 타이거스 유니폼을 벗게 되었다.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2012년 | 한신 | 5위 | 144 | 55 | 75 | 14 | .423 | 31.5 | 58 | .236 | 2.65 | 50세 |
2013년 | 2위 | 144 | 73 | 67 | 4 | .521 | 12.5 | 82 | .255 | 3.07 | 51세 | |
2014년 | 2위 | 144 | 75 | 68 | 1 | .524 | 7 | 94 | .264 | 3.88 | 52세 | |
2015년 | 3위 | 143 | 70 | 71 | 2 | .496 | 6 | 78 | .247 | 3.47 | 53세 | |
통산 : 4년 | 575 | 273 | 281 | 21 | .493 | A클래스 : 3회, B클래스 : 1회 |
연도 | 소속 | 경기명 | 상대팀 | 성적 |
---|---|---|---|---|
2013년 | 한신 |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 히로시마 도요 카프(센트럴 리그 3위) | 0승 2패 = 패전 |
2014년 |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 히로시마 도요 카프(센트럴 리그 3위) | 1승 1무 =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 | |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 | 요미우리 자이언츠(센트럴 리그 1위) | 4승 1패 = 일본 시리즈 진출 (※1) | ||
일본 시리즈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퍼시픽 리그 1위) | 1승 4패 = 패전 | ||
2015년 |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 요미우리 자이언츠(센트럴 리그 2위) | 1승 2패 = 패전 | |
- 성적에서의 '''굵은 글씨'''는 승리한 것을 나타냄.
:※1 : 어드밴티지 1승을 포함
3. 3. 한신 타이거스 프런트 및 2군 감독 (2016-)
은퇴 후 2002년부터 등번호를 86번으로 변경하면서 코치직을 계속 맡았고, 뛰어난 관찰과 지도로 2003년에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2004년에는 2군 종합 코치를 맡았지만, 2005년에 1군 타격 코치로 복귀하여 팀은 2년 만에 리그 우승을 제패했다. 코치로서 치밀한 데이터 해석을 하면서 선수들의 신뢰를 얻기도 했다. 2007년부터는 히로사와 가쓰미가 타격 코치로 부임하면서 내야 수비 주루 코치가 되었고, 2009년부터는 다시 1군 타격 코치로 전환되었다.2011년 10월 28일, 마유미 아키노부 감독의 후임으로 제32대 한신 타이거스 감독으로 취임, 2012년부터 지휘를 맡게 되었는데 타 구단에서의 소속 경력이 없는 토박이 감독으로서는 1998년에 퇴임한 요시다 요시오 전 감독 이후 14년 만의 일이었다.
2015년 12월 1일자로 구단 신설 포스트인 오너 부속 시니어 어드바이저(SA)에 취임했다. 취임 후에는 사카이 신야 오너에게 정보와 조언을 수시로 제공하는 한편, 나카무라 카츠히로GM(팀의 원정에 동행했던 같은 해 9월 23일에 도쿄에서 급서)이 담당했던 "프런트와 현장의 가교 역할"을 이어받았다.[26]
SA직 취임 후에는 간사이 TV・NHK 오사카 방송국・마이니치 방송・선 TV 등에서 프로 야구 중계에 게스트 출연하거나, 산케이 스포츠의 야구 평론가로서도 활동하고 있다.
2017년 11월 1일, 구단 본부 부속 테크니컬 어드바이저(TA)로 이동했다. 특명 스카우트로서 아마추어 야구의 시찰・조사 활동에 본격적으로 임하고 있다. 트랙맨(투구 및 타구의 궤도를 측정하는 기기)를 팀에 도입하는 2018년 시즌부터는, 트랙맨으로 측정된 데이터의 분석을 담당한다.[27] 같은 해부터 신설된 진흥부의 운영으로, 2018년 4월 1일에 개교한 "타이거스 아카데미 베이스볼 스쿨"(중학생까지의 아동 대상 야구 교실)에서도, 특별 고문으로서 정기적으로 지도를 하고 있다.[28] 2020년 2월의 2군 아키 춘계 캠프에서는, 임시 코치로서, 1군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 5년 만에 현장에서 지도를 했다.[29]
2023년부터, 그 해에 재취임한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으로부터 "언제까지 넥타이를 하고 있나"라는 말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되어 2군 감독 취임을 요청받아, 한신의 2군 감독에 취임했다.[30] 등번호는 다시 '''86'''이다.[30] 1군 감독 경험자가 2군 감독에 취임하는 것은 한신에서는 처음이다. 8년 만의 현장 복귀가 된다. 오카다가 2024년으로 퇴임한 후에는, 1군・2군 타격 순회 코디네이터를 맡게 되었다.
4. 논란 및 평가
와다는 노무라 가쓰야가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우리는 변하지 않는다"라는 발언을 했지만, 이는 노무라의 야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었다.[32] 오히려 노무라의 취임을 환영하며 "굳이 축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까지와 변함없이 야구를 할 것이니, 이토록 좋은 기회를 살리지 않을 이유는 없다"는 뉘앙스였다.[32] 또한, "어려운 데이터에 얽매이는 것은 아닌가", "스코어러 등도 일이 늘어나서 힘들게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팀 내 불안의 목소리에 대한 말이기도 했지만, 언론 보도로 인해 정반대의 의미로 받아들여져 소동이 벌어졌다.[32]
2000년 6월 7일 도쿄 돔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는 전년까지 팀 동료였던 투수 다렐 메이와 대결했다. 와다가 타임을 요청하고 타석을 벗어나자, 메이는 이를 지연 행위로 오해하고 와다의 머리에 강속구를 맞힐 뻔했다. 와다는 맞지 않았고 노무라 감독의 항의도 없어 경기는 속행되었지만, 메이가 고의로 와다의 머리를 노린 것이 밝혀져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와다는 이 타석에서 2루타를 쳐냈다.
와다는 현역 시절, 오프 시즌에 하루 동안 마음껏 장타를 노리는 배팅 연습을 하는 날을 마련했다. 이는 "나처럼 힘없는 타자는 장타를 노릴 수 없다"고 스스로를 경계했던 와다가, 이 날 마음껏 장타를 연발함으로써 시즌 중의 "장타를 치고 싶다"는 욕구를 해소하기 위함이었다.[33] 또한, 현역 시절부터 방대한 자료와 선수들의 특징을 메모(와다 노트)에 기재했으며, 지도자로 전향한 후에도 "와다 노트"에 기재된 내용을 작전 면에서 활용했다.
와다 유타카는 현역 시절부터 방대한 자료와 선수들의 특징을 메모(와다 노트)에 기재했으며, 지도자로 전향한 후에도 "와다 노트"에 기재된 내용을 작전 면에서 활용했다.[33] 한신 1군 타격 코치 재임 중 2003년에는 한신 공식 사이트에서 일기 "호랑이의 기개"를 연재했다.[34] 현역 시절이나 외모의 수수하고 얌전한 이미지와는 달리 파격적인 내용으로 화제를 모았다. 2008년 춘계 캠프부터 2009년 4월까지 "호랑이의 기개 Part2", 2009년 8월부터 2011년 춘계 캠프 기간 동안 "호랑이의 기개 Part3"를 개인 블로그로 개설했다.[35]
한신 1군 감독 시절 2014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 4차전 승리로 일본 시리즈 진출을 결정했을 때, 선수들이 헹가래를 준비했지만 와다는 "헹가래는 일본 제일이 되었을 때 해 달라"며 사양했다.[36] 인터뷰에서도 "어디까지나 우승한 것은 자이언츠니까요"라고 언급했다. 결국 일본 시리즈에서 패했기 때문에, 감독 재임 중 헹가래는 실현되지 않았다.
아비코 고등학교에서는 성우 겸 음향 감독인 츠지야 코지, 성우 코오로기 사토미와 동급생이며, 츠지야와는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프로 야구 선수가 되기 전에는 교사를 목표로 했다. 유년 시절부터의 꿈이었으며, 초등학생 시절에는 교사가 되기 위한 일환으로 검도와 수영 교실에도 다녔다. 대학교 4학년이었던 1984년에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일본 대표팀 멤버로 선발되자 교원 채용 시험 일정과 겹쳐 고민 끝에 유년 시절부터의 꿈을 단념했다.[31]
가족으로는 아내와 아들 1명, 딸 2명(첫째가 장녀, 둘째, 셋째 아들, 막내딸이 쌍둥이)이 있다. 장남은 호토쿠 학원 고등학교의 내야수로 2009년 제81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했다. 졸업 후 진학한 간사이 대학에서도 선수로 활약했으며, 3학년이 된 2012년부터는 1루수로 간사이 학생 야구 리그 공식전에 레귤러로 출전했다.
4. 1. 노무라 가쓰야 감독과의 관계
와다 유타카는 노무라 가쓰야가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우리는 변하지 않는다"라는 발언을 했지만, 이는 노무라의 야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었다.[32] 오히려 노무라의 취임을 환영하며 "굳이 축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까지와 변함없이 야구를 할 것이니, 이토록 좋은 기회를 살리지 않을 이유는 없다"는 뉘앙스였다.[32] 또한, "어려운 데이터에 얽매이는 것은 아닌가", "스코어러 등도 일이 늘어나서 힘들게 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팀 내 불안의 목소리에 대한 말이기도 했지만, 언론 보도로 인해 정반대의 의미로 받아들여져 소동이 벌어졌다.[32]2000년 6월 7일 도쿄 돔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는 전년까지 팀 동료였던 투수 다렐 메이와 대결했다. 와다가 타임을 요청하고 타석을 벗어나자, 메이는 이를 지연 행위로 오해하고 와다의 머리에 강속구를 맞힐 뻔했다. 와다는 맞지 않았고 노무라 감독의 항의도 없어 경기는 속행되었지만, 메이가 고의로 와다의 머리를 노린 것이 밝혀져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와다는 이 타석에서 2루타를 쳐냈다.
한신 1군 감독 시절 2014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 4차전 승리로 일본 시리즈 진출을 결정했을 때, 선수들이 헹가래를 준비했지만 와다는 "헹가래는 일본 제일이 되었을 때 해 달라"며 사양했다.[36] 인터뷰에서도 "어디까지나 우승한 것은 자이언츠니까요"라고 언급했다.
4. 2. '스파이스' 발언
와다는 현역 시절, 오프 시즌에 하루 동안 마음껏 장타를 노리는 배팅 연습을 하는 날을 마련했다. 이는 "나처럼 힘없는 타자는 장타를 노릴 수 없다"고 스스로를 경계했던 와다가, 이 날 마음껏 장타를 연발함으로써 시즌 중의 "장타를 치고 싶다"는 욕구를 해소하기 위함이었다.[33] 또한, 현역 시절부터 방대한 자료와 선수들의 특징을 메모(와다 노트)에 기재했으며, 지도자로 전향한 후에도 "와다 노트"에 기재된 내용을 작전 면에서 활용했다.4. 3. 지도자로서의 평가
와다 유타카는 현역 시절부터 방대한 자료와 선수들의 특징을 메모(와다 노트)에 기재했으며, 지도자로 전향한 후에도 "와다 노트"에 기재된 내용을 작전 면에서 활용했다.[33] 한신 1군 타격 코치 재임 중 2003년에는 한신 공식 사이트에서 일기 "호랑이의 기개"를 연재했다.[34] 현역 시절이나 외모의 수수하고 얌전한 이미지와는 달리 파격적인 내용으로 화제를 모았다. 2008년 춘계 캠프부터 2009년 4월까지 "호랑이의 기개 Part2", 2009년 8월부터 2011년 춘계 캠프 기간 동안 "호랑이의 기개 Part3"를 개인 블로그로 개설했다.[35]한신 1군 감독 시절 2014년에는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 4차전 승리로 일본 시리즈 진출을 결정했을 때, 선수들이 와다의 헹가래를 준비했다. 그러나 정규 시즌을 2위로 마쳤다는 사정으로 "헹가래는 일본 제일이 되었을 때 해 달라"며 헹가래를 사양했다.[36] 인터뷰에서도 "어디까지나 우승한 것은 자이언츠니까요"라고 언급했다. 결국 일본 시리즈에서 패했기 때문에, 감독 재임 중 헹가래는 실현되지 않았다.
5. 수상 및 타이틀 경력
와다 유타카는 1993년에 최다 안타(당시는 타이틀이 아님)를 기록했다. 1992년과 1994년에는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고, 1992년부터 1994년까지 3년 연속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1997년 4월에는 월간 MVP를 수상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통산 1713경기에 출장하여 5972타수, 720득점, 1739안타, 29홈런, 403타점, 600사사구/사구, 554삼진, 114도루, 212희생타, 83실책, 타율 .291를 기록했다.
그 외 수상 경력으로는 야나세(YANASE) 한신 타이거스 MVP상(1989년), 산스포 MVP 대상(1997년), 마츠도시 시민 영예상(2001년)이 있다.
6. 개인 기록
와다 유타카의 개인 통산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첫 출장 : 1985년 7월 11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13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5회말에 이토 히로미쓰의 대타로서 출장
- 첫 선발 출장 : 1985년 7월 17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4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6번·2루수로서 선발 출장
- 첫 안타·첫 타점 : 상동, 2회초에 가와구치 가즈히사로부터 적시타
- 첫 홈런 : 1987년 8월 21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7차전(나고야 구장), 9회초에 가시마 다다시로부터 솔로 홈런
- 통산 1000안타 : 1994년 7월 26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7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6회말에 미야모토 가즈토모로부터 우전 적시타 ※역대 178번째.
- 통산 1000경기 출장 : 1994년 10월 4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26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3번·2루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323번째.
- 통산 1500안타 : 1998년 5월 23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7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4회말에 팻 머홈즈로부터 투수 내야 안타 ※역대 74번째.
- 통산 1500경기 출장 : 1999년 4월 18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3차전(후쿠오카 돔), 2번·3루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125번째.
- 통산 200희생타 : 1999년 6월 1일,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9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1회말에 후쿠모리 가즈오로부터 1루 앞 희생타 ※역대 19번째.
- 올스타전 출장 : 7회(1989년, 1992년 ~ 1996년, 1999년)
- 올스타전 통산 타율 : .433(30타수 13안타)
- 시즌 최다 희생타 일본 기록(당시) : 56희생타(1988년)
- 개막 이후 연속 경기 안타 일본 기록 : 24경기(1997년)
시즌 | 팀 | 경기 | 타수 | 득점 | 안타 | 홈런 | 타점 | 사사구/사구 | 삼진 | 도루 | 희생타 | 실책 | 타율 |
---|---|---|---|---|---|---|---|---|---|---|---|---|---|
1985 | 한신 | 39 | 49 | 10 | 14 | 0 | 2 | 5 | 3 | 0 | 0 | 2 | .286 |
1986 | 8 | 3 | 0 | 1 | 0 | 0 | 0 | 0 | 0 | 2 | 0 | .333 | |
1987 | 54 | 53 | 8 | 13 | 1 | 2 | 3 | 9 | 3 | 3 | 1 | .245 | |
1988 | 127 | 398 | 57 | 111 | 1 | 20 | 38 | 51 | 17 | 57 | 7 | .279 | |
1989 | 129 | 476 | 61 | 141 | 1 | 25 | 46 | 39 | 18 | 41 | 5 | .296 | |
1990 | 126 | 496 | 72 | 151 | 8 | 36 | 58 | 59 | 17 | 15 | 9 | .304 | |
1991 | 129 | 494 | 50 | 147 | 0 | 34 | 59 | 48 | 9 | 12 | 11 | .298 | |
1992 | 132 | 550 | 65 | 153 | 0 | 23 | 41 | 48 | 1 | 15 | 6 | .278 | |
1993 | 127 | 511 | 63 | 161 | 0 | 36 | 48 | 35 | 4 | 20 | 2 | .315 | |
1994 | 130 | 519 | 76 | 165 | 2 | 43 | 68 | 40 | 8 | 14 | 8 | .318 | |
1995 | 130 | 509 | 49 | 136 | 1 | 35 | 48 | 39 | 4 | 12 | 7 | .267 | |
1996 | 130 | 520 | 66 | 155 | 5 | 44 | 43 | 48 | 2 | 10 | 7 | .298 | |
1997 | 96 | 390 | 51 | 117 | 2 | 26 | 29 | 44 | 2 | 4 | 5 | .300 | |
1998 | 130 | 438 | 39 | 119 | 4 | 32 | 46 | 39 | 1 | 11 | 7 | .272 | |
1999 | 101 | 334 | 30 | 101 | 3 | 23 | 34 | 29 | 4 | 11 | 2 | .302 | |
2000 | 88 | 194 | 19 | 49 | 1 | 20 | 28 | 16 | 3 | 6 | 4 | .253 | |
2001 | 37 | 38 | 4 | 5 | 0 | 2 | 6 | 7 | 0 | 0 | 0 | .132 | |
통산 | 1713 | 5972 | 720 | 1739 | 29 | 403 | 600 | 554 | 114 | 212 | 83 | .291 |
-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7. 등번호
와다는 1985년부터 2001년까지 등번호 6번을 사용했다.[42] 2002년부터 2015년까지는 등번호 86번을 사용했다.[4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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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田前監督 シニアアドバイザーに就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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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役時代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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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コアラーも脱帽するデータ解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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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強い決意と信念で」=阪神の和田監督が就任会見-プロ野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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就任会見でキッパリ!和田新監督「少しのスパイスで優勝争いでき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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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緊急連載4】監督とコーチの仲たがい/デイリースポーツ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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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阪神8連勝で2位浮上 打線爆発16安打12得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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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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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人3連勝 阪神2ケタ安打も泥沼6連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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阪神CS進出!福留V打で2連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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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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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虎CS突破へ和田監督ゲキ「巨人倒そ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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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5
[15]
뉴스
広島 痛恨の逆転負けで3位転落 CS本拠地開催ならず 阪神2位確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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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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阪神 史上初!引き分けコールド CSファーストS球団初突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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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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阪神 9年ぶり日本S決めた!速攻3発、宿敵巨人を4連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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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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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田監督CS突破「日本一目指す」一問一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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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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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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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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阪神福留、前夜と同じ顔で2戦連続サヨナラ打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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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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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夜も福留!サヨナラ押し出しで虎通算5000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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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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阪神、2夜連続サヨナラで球団通算5000勝!福留が押し出し四球選ぶ
https://www.sanspo.c[...]
2015-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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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阪神 史上2チーム目の通算5000勝達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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阪神、和田監督の退任を発表/デイリースポーツ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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阪神・和田前監督がフロント入り オーナー付アドバイザー就任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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阪神和田TAトラックマンチーム加入 優れた分析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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阪神・和田TA アカデミー特別顧問に、来年4月1日開校予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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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ポーツニッポ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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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阪神和田豊TAが来春二軍キャンプで臨時コーチ就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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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刊スポー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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阪神・和田2軍監督が就任会見 岡田新監督から「いつまでネクタイしとんね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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デイリースポーツ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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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田豊 攻守に職人肌のプレーが光ったトラの背番号6/プロ野球1980年代の名選手 {{!}} 野球コラ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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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たな挑戦 猛虎復活
宝島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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阪神タイガースDVDブック『猛虎列伝』VOL.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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虎の意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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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田 豊オフィシャルブログ「野球日記 ~虎の意地~」 Powered by Ameba
https://ameblo.jp/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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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さえた和田采配 胴上げ拒否…こらえた涙
https://www.daily.co[...]
201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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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2台目ベンツゲット!虎・福留「来年優勝」してEクラス頂く(5)ヤナセ・阪神タイガースMVP賞歴代受賞者
https://www.sansp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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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ァン交歓会一問一答】原口、関西弁の女性「いいと思います」(画像6)歴代サンスポMVP大賞、新人賞の受賞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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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戸市民栄誉賞(平成11年7月1日制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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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戸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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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刊タイガース
2000-05
[41]
문서
당시 한신 타이거스의 1992년 시즌 성적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공동으로 2위를 차지했다.
[42]
문서
당초 한신의 코치로 발탁되면서 추계 스프링 캠프에 참가했을 당시의 등번호는 81번이었지만 ‘6’이 들어가 있는 등번호를 고집하면서 [[요시다 야스오]] 코치와 등번호를 교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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