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트 휘트먼 로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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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월트 휘트먼 로스토는 1916년 뉴욕에서 태어난 경제학자이자 정치 고문으로, 예일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략사무국에서 복무했으며, 이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서 경제학 교수로 재직했다. 로스토는 '경제 성장 단계' 이론을 제시하며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을 강조했고, 존 F. 케네디 행정부에서 국가 안보 보좌관으로 활동하며 베트남 전쟁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을 지지했으나, 1969년 공직에서 물러난 후 텍사스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쳤으며, 200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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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 휘트먼 로스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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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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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월트 휘트먼 로스토 |
원어 이름 | Walt Whitman Rostow |
출생 | 1916년 10월 7일 |
출생지 | 뉴욕주 뉴욕 |
사망 | 2003년 2월 13일 |
사망지 | 텍사스주 오스틴 |
국적 | 미국 |
배우자 | 엘스페스 데이비스 |
자녀 | 2명 |
학력 | |
학사 | 예일 대학교 |
석사 | 예일 대학교 |
박사 | 예일 대학교 |
학사 | 옥스퍼드 대학교 밸리올 칼리지 |
경력 | |
정당 | 미국 민주당 |
대통령 | 린든 B. 존슨 |
임기 시작 | 1966년 4월 1일 |
임기 종료 | 1969년 1월 20일 |
이전 | 맥 번디 |
다음 | 헨리 키신저 |
대통령 |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
임기 시작 | 1961년 12월 4일 |
임기 종료 | 1966년 3월 31일 |
이전 | 조지 C. 맥기 |
다음 | 로버트 R. 보위 |
대통령 |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
임기 시작 | 1961년 12월 4일 |
임기 종료 | 1966년 3월 31일 |
이전 | 조지 C. 맥기 |
다음 | 헨리 D. 오언 |
대통령 | 존 F. 케네디 |
임기 시작 | 1961년 1월 20일 |
임기 종료 | 1961년 12월 4일 |
이전 | 직책 신설 |
다음 | 칼 케이슨 |
수상 | |
훈장 | 대영 제국 훈장 (1945년) |
훈장 | 레지옹 오브 메리트 (1945년) |
훈장 | 대통령 자유 훈장 (1969년) |
2. 생애
로스토는 1916년 뉴욕 맨해튼에서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사회주의자였으며, 시인 월트 휘트먼의 이름을 따서 월트라는 이름을 지었다.[4] 그의 형제 유진은 미국 사회당 지도자 유진 V. 뎁스의 이름을 따서 법학자가 되었고, 그의 형제 랄프는 백화점 매니저가 되었다.
로스토는 15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액 장학금으로 예일 대학교에 입학하여 19세에 졸업했다. 그 후 로즈 장학금을 받아 발리올 칼리지, 옥스퍼드에서 공부하여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옥스퍼드에서 로스토는 미래의 영국 정치인 에드워드 히스와 로이 젠킨스와 친구가 되었으며, 특히 젠킨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4] 1936년 에드워드 8세 퇴위 위기 동안 그는 NBC 라디오 네트워크를 위해 사건을 보도한 방송인 앨리스터 쿡을 도왔다.[5] 예일 대학교로 돌아온 후, 1940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중 로스토는 윌리엄 조셉 도노반 휘하의 전략사무국에서 복무하며 미국 폭격 목표 선정에 참여했다. 니컬러스 카첸바흐는 "나는 격추되어 2년 동안 독일 포로 수용소에 갇힌 항해사였고, 월트는 내 목표를 고르던 사람이었다."라고 농담했다.[4]
1945년, 전쟁 직후 로스토는 워싱턴 D.C.의 미국 국무부에서 독일-오스트리아 경제부의 부관이 되었다. 1946년, 해롤드 비비안 하름스워스 미국사 교수로서 옥스퍼드로 돌아갔다. 1947년, 유럽 경제 위원회의 사무총장 보좌관이 되었고, 마셜 플랜 개발에 참여했다.
1950년부터 1961년까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MIT)에서 경제사 교수를 지냈고, MIT 국제 연구 센터 (CIS)의 직원이었다. 1954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경제 및 외교 정책을 조언했고, 1958년에는 그의 연설 작가가 되었다. 같은 해 존 F. 케네디 상원 의원과 처음 만났으며, 1960년에는 ''경제 성장 단계: 비공산주의 선언''을 출판하여 로스토의 경제 성장 도약 모델을 제안했다.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케네디 캠페인에서 연설문 작성 및 고문으로 활동했다. 1960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케네디가 연설한 "뉴 프런티어" 연설문을 작성했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은 로스토를 국가 안보 보좌관 맥조지 번디의 부관으로 임명했고, 그해 말 국무부 정책 기획실 실장이 되었다. 존 F. 케네디 암살 이후,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로스토를 맥조지 번디의 직책으로 승진시켰다. 로스토는 베트남 전쟁 정책 수립에 깊이 관여했다.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 취임 후 공직에서 물러나 오스틴 텍사스 대학교에서 30년간 경제학을 가르쳤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로스토는 1916년 뉴욕 맨해튼에서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사회주의자였으며, 월트 휘트먼의 이름을 따서 월트라는 이름을 지었다.[4] 그의 형제 유진은 미국 사회당 지도자 유진 V. 뎁스의 이름을 따서 법학자가 되었고, 다른 형제 랄프는 백화점 매니저가 되었다.로스토는 15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액 장학금으로 예일 대학교에 입학하여 19세에 졸업했다. 그 후 로즈 장학금을 받아 발리올 칼리지, 옥스퍼드에서 공부하여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옥스퍼드에서 로스토는 미래의 영국 정치인 에드워드 히스와 로이 젠킨스와 친구가 되었으며, 특히 젠킨스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4] 1936년 에드워드 8세 퇴위 위기 동안 그는 NBC 라디오 네트워크를 위해 사건을 보도한 방송인 앨리스터 쿡을 도왔다.[5] 예일 대학교로 돌아온 후, 1940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1]
2. 2. 학문적 경력
제2차 세계 대전 중 로스토는 윌리엄 조셉 도노반 휘하의 전략사무국에서 복무하며 미국 폭격 목표 선정에 참여했다.[6] 니컬러스 카첸바흐는 "나는 격추되어 2년 동안 독일 포로 수용소에 갇힌 항해사였고, 월트는 내 목표를 고르던 사람이었다."라고 농담했다.[6] 1942년 9월, 로스토는 정보 분석가로 적 목표 부대에서 복무하기 위해 런던에 도착하여 1945년 봄까지 근무했다.[6]1943년 1월, 로스토는 독일 전쟁 경제를 지원하는 핵심 산업을 식별하는 임무를 받았다.[6] 그는 1943년에 석유가 독일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확신하고, 미국 육군 항공대가 루마니아 유전과 독일 내 인공 석유 생산 공장 및 석유 저장 시설을 목표로 한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석유 계획" 전략을 세웠다.[6] 1944년 초, 로스토는 칼 스파츠 장군을 설득하여 "석유 계획"을 받아들이게 했다. "석유 계획"과 독일 및 프랑스 철도 시스템을 목표로 하는 "수송 계획"의 장점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었고, "수송 계획"은 오버로드 작전 준비의 일환으로 먼저 시행되었다.[6] "석유 계획"은 1944년 5월 육군 항공대에 의해 전략으로 시행되기 시작했는데, 로스토는 이를 재앙적인 실수라고 부르며, "석유 계획"이 더 일찍 채택되었다면 전쟁이 훨씬 더 일찍 승리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6] 그는 또한 미국이 냉전에 훨씬 더 강력한 입장에서 진입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6] 제2차 세계 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로스토는 전략 폭격을 확신하게 옹호하며, 독일 도시들에 대한 폭격이 전쟁을 승리하게 했다고 주장했다.[6] 전쟁 중 적 목표 부대에서 일한 공로로 로스토는 OBE 훈장을 받았다.[7]
1945년, 전쟁 직후 로스토는 워싱턴 D.C.의 미국 국무부에서 독일-오스트리아 경제부의 부관이 되었다. 로스토는 미국 전략 폭격 조사 (USSBS)에 참여하여 전략 폭격 캠페인이 독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데 참여했지만 거절했다.[6] 1960년대에 로스토의 미래의 적수들 중 몇몇, 예를 들어 조지 볼,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및 아서 M. 슐레징어 주니어는 USSBS에 참여했으며, 전략 폭격 캠페인이 지지자들이 약속했던 것처럼 독일 경제를 약화시키지 않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이들은 북베트남 폭격의 효능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6] "석유 계획"이 실제로 로스토가 약속한 대로 효과가 있었지만, USSBS에 참여한 사람들은 독일의 산업 생산이 1944년 12월에 정점에 달했다는 점도 언급했으며, 이는 국가의 경제를 파괴하는 방법으로서 전략 폭격의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6]
1946년, 그는 해롤드 비비안 하름스워스 미국사 교수로서 옥스퍼드로 돌아갔다. 1947년, 그는 유럽 경제 위원회의 사무총장 보좌관이 되었고, 마셜 플랜 개발에 참여했다. 로스토의 동료 중 한 명은 "1946년 초, 월트 로스토는 독일의 통일은 유럽의 통일 없이는 달성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고, 유럽의 통일은 외교 협상이 아니라 경제 문제에 대한 기술 협력을 통해 가장 잘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회상했다.[6] 유럽 경제 통일에 대한 로스토의 글은 국무 차관 딘 애치슨과, 1951년의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프랑스 외교관 장 모네의 관심을 끌었고, 결국 1957년의 유럽 경제 공동체로 발전했다.[6]
로스토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미국 역사 및 제도 피트 교수로 1년을 보냈다. 그는 1950년부터 1961년까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MIT)에서 경제사 교수를 지냈고, 1951년부터 1961년까지 MIT의 MIT 국제 연구 센터 (CIS)의 직원이었다. 한국 전쟁 중 북한의 대한민국 침공은 로스토의 소련에 대한 생각을 결정적으로 바꾸었다.[6] 한국 전쟁 전까지 로스토는 소련 체제가 스스로 "온화"해질 것이라고 믿었고, 냉전을 군사적 투쟁이 아닌 주로 외교적 갈등으로 보았다.[6] 북한의 대한민국에 대한 침략은 그에게 냉전이 더 군사화된 외교 정책을 필요로 한다고 확신하게 했고, 그는 1950년 가을 연설에서 더 큰 국방 지출을 요구하면서 "더 큰 완전한 동원이 신속하게 수행될 수 있다"고 말했다.[6] 더 높은 국방 지출을 충당하기 위해 로스토는 미국 국민들에게 "똑같이 할당된 매우 높은 수준의 과세"의 필요성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다.[6]
1951년 말부터 1952년 8월까지 로스토는 소련 취약성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CIS가 후원하고 미국 정부의 상당한 지원을 받은 이 프로젝트는 정치전/심리전과 관련하여 소련의 취약성을 식별하려 했으며, 최고의 소련 전문가 및 심리전 전문가들의 기여를 받았다.[6] 1955년 6월, 로스토는 "퀀티코 취약성 패널"이라고 불리는 강경한 냉전 지지자들의 그룹을 이끌었고, 소련에 대한 핵 강압을 옹호하는 보고서를 발표했다.[7] 전문가들은 넬슨 록펠러의 초청을 받았지만, 그들의 제안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정책과 상반되었다.[8]
1954년, 로스토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경제 및 외교 정책에 대해 조언했고, 1958년에는 그의 연설 작가가 되었다. 1954년 5월, 로스토는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 연합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충격을 받았으며, 프랑스 지도자들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베트남인들을 효과적으로 결집"할 정치적 정렬을 만드는 데 실패한 것에 대해 불쾌감을 표했다.[6] 로스토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위해 싸우는 공산주의 베트민을 베트남인들을 대표하지 않는 소수의 급진적 테러리스트라고 믿었고, 그는 베트남인 대다수가 1950년에 창설된 프랑스 지배하에 있지만 형식적으로 독립된 베트남을 지지한다고 믿었다.[6] 동시에 그는 아이젠하워가 전술 핵무기를 사용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미국의 개입을 요구하는 "작전 벌처"라는 암호명으로 작성된 계획에도 불구하고 "미국 부대를 전투에 투입하는 것을 거부"한 것을 비난했다.[6] 아이젠하워는 작전 벌처를 영국의 참여에 따라 실행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영국이 예상대로 참여를 거부하자 작전 벌처를 실행하지 않는 핑계로 삼았다.
1954년 8월, 로스토와 동료 CIA 관련 MIT 경제학 교수 맥스 F. 밀리칸은 아이젠하워를 설득하여 아시아 및 기타 지역에서 그가 "미국식" 경제 성장을 확산시키는 정책의 일환으로 개발을 위한 미국 대외 원조를 대폭 확대하도록 했으며, 이는 군사력에 의해 뒷받침되었다.[9][10] 냉전을 본질적으로 유럽 중심적인 용어로 본 많은 1세대 "냉전 전사"와 달리 로스토는 냉전을 제3세계가 가장 중요한 전장인 세계적인 투쟁으로 보았다.[6] 로스토는 종종 조지 F. 케넌과 딘 애치슨과 같은 사람들을 인종 차별주의자라고 비난했는데, 그들이 유럽을 아시아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6] 1958년 2월 26일, 로스토는 권력을 이해하는 학자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존 F. 케네디 상원 의원과 처음 만났다.[6] 1958년 2월 27일, 로스토는 미국 상원 외교 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미리 정해진 대로 케네디가 미국이 인도에 제공하는 경제 원조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현재 원조 프로그램은 올해 약 2.9억달러에 달하는데, 이는 터무니없이 부적절하다"는 답변을 얻었다.[6] 이 증언의 목적은 아이젠하워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이었는데, 두 사람은 그가 제3세계를 무시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6] 로스토는 케네디를 위해 두 개의 연설문을 썼고, 케네디는 상원 본회의에서 이를 연설하며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인도를 무시하고 있는 반면, 소련은 그렇지 않다고 비난했고, 결국 그해 늦게 인도는 미국 수출입 은행으로부터 1.5억달러의 교환 크레딧을 받게 되었다.[6] 1958년 9월, 로스토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교수로 가기 위해 떠났고, 그곳에서 그의 대표작인 마르크스주의를 이론으로 반박하기 위한 책인 ''경제 성장의 단계''를 쓰기 시작했다.[6] 니키타 흐루쇼프가 5개년 계획을 통해 소련이 조만간 미국을 넘어 세계 지배적인 경제 강국이 될 것이라고 자랑할 때, 그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과거와 미래를 모두 설명한다고 해석했는데, 미국 정치 및 지식인 사회에서 그 이념적 차원을 평가하려는 열망이 컸다.
2. 3. 정부 경력
제2차 세계 대전 중 로스토는 윌리엄 조셉 도노반 휘하의 전략사무국에서 복무하며 미국 폭격 목표 선정에 참여했다.[6] 1945년 전쟁 직후, 미국 국무부에서 독일-오스트리아 경제부 부관이 되었다.[6] 1947년에는 유럽 경제 위원회 사무총장 보좌관으로 마셜 플랜 개발에 참여했다.[6]1954년, 로스토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경제 및 외교 정책에 대해 조언했고, 1958년에는 그의 연설 작가가 되었다.[6] 같은 해 2월 26일, 존 F. 케네디 상원 의원과 처음 만났으며,[6]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케네디 캠페인에서 연설문 작성자이자 고문으로 활동했다.[6]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은 로스토를 국가 안보 보좌관 맥조지 번디의 부관으로 임명했다.[6] 그해 말, 국무부 정책 기획실의 실장이 되었다.[6] 존 F. 케네디 암살 이후,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로스토를 맥조지 번디의 직책으로 승진시켰다.[6] 로스토는 국가 안보 보좌관으로서 베트남 전쟁 정책 수립 책임을 맡았으며,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존슨의 주요 강경파가 되었다.[6]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 취임 후, 로스토는 공직에서 물러났다.[6]
2. 4. 베트남 전쟁과 로스토
로스토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략사무국에서 복무하며 미국 폭격 목표 선정에 참여했다. 그는 독일 전쟁 경제를 지원하는 핵심 산업을 파악하는 임무를 받았고, 1943년에 석유가 독일의 약점이라고 확신하여 루마니아 유전과 독일 내 인공 석유 생산 시설 및 석유 저장 시설을 목표로 하는 "석유 계획" 전략을 세웠다.[6]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전략 폭격을 옹호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베트남 전쟁에 대한 그의 관점에 영향을 미쳤다.존 F. 케네디 대통령 당선 이후, 로스토는 국가 안보 보좌관 맥조지 번디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피그스 만 침공을 지지했으며, 진보를 위한 동맹의 주요 아이디어를 제공했다.[6] 그는 케네디에게 북베트남 폭격을 조언했고, 도미노 이론을 신봉하여 남베트남이 함락되면 동남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될 것이라고 예측했다.[6] 1961년 10월, 로스토는 맥스웰 테일러 장군과 함께 남베트남을 방문하여 미국의 개입 확대를 주장하는 테일러-로스토 보고서를 작성했다.[6]
존 F. 케네디 암살 이후,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로스토를 맥조지 번디의 후임으로 임명했다. 로스토는 존슨에게 북베트남에 대한 전략 폭격이 전쟁에서 승리하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하며, "단계적인" 압력 정책을 촉구했다.[6] 그는 통킹만 결의안 통과에 만족했으며, 북베트남의 산업 시설과 석유 저장 시설 파괴를 통해 북베트남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6]
로스토는 베트남 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모든 노력을 "항복"으로 간주하고, 미국이 승리하고 있다는 정보를 강조하여 존슨의 신임을 얻었다.[6] 그는 롤링 선더 작전의 주요 옹호자였으며, 북베트남 침공까지 주장했다.[6] 1966년 매리골드 작전과 1967년 해바라기 작전 등 평화 협상 시도가 있었으나, 로스토는 북베트남의 의도를 의심하고 협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협상 결렬에 영향을 미쳤다.[6]
로스토는 존슨의 주요 강경파로서 베트남 전쟁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확신과 낙관적인 전망은 존슨의 정책 결정에 반영되었다. 하지만, 정치학자 찰스 킹 (국제 문제 교수)은 로스토가 옹호한 거의 모든 전략이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비판했다.[11]
2. 5. 은퇴 이후
1969년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이 되자 로스토는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30년 동안 아내 엘스페스 로스토와 함께 오스틴 텍사스 대학교의 린든 B. 존슨 공공 정책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가르쳤으며, 엘스페스는 나중에 대학원 학장이 되었다.[1] 1969년 베트남 전쟁 지지 탓에 MIT에서 강의를 재개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텍사스 대학교에 자리를 잡았다.[1] 1968년까지 자유주의적인 미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베트남 전쟁은 엄청난 재앙이라는 일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졌고, 1969년 1월 로스토가 공직에서 물러났을 때 그는 자유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는 인물이 되어 MIT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했다.[2] 로스토의 전기 작가인 영국의 역사학자 데이비드 밀른은 "1969년에 로스토는 너무나 악명이 높아서 미국의 엘리트 대학 중 어느 곳도 그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려 하지 않았다"고 썼다.[3] 하버드, 옥스퍼드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MIT에서 교수를 역임한 그에게 오스틴 텍사스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학계에서 상당한 몰락으로 여겨졌다.[4]로스토는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옹호하는 글을 많이 썼다. 로스토의 국가 안보 보좌관 후임인 하버드 교수 헨리 키신저는 "이 행정부의 월트 로스토"가 될까 봐 두려워했다.[5] 키신저는 로스토처럼 텍사스 대학교와 같은 "받아들일 수 없는" 기관에서 가르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하버드에서 교수로 복귀하기를 원했다.[5]
로스토는 텍사스 대학교 캠퍼스가 텍사스 주 정부가 석유 부를 사용하여 빛나는 현대적인 캠퍼스를 만들었기 때문에 매우 현대적이라고 언급했지만, 대학교 행정부가 연구와 교육보다 롱혼스라는 풋볼 팀을 지원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고 불평했다.[6] 1969년부터 1971년까지 로스토는 존슨의 회고록인 《The Vantage Point》의 유령 작가 중 한 명으로, 외교와 관련된 모든 장을 썼다.[7] 텍사스 대학교에서의 강의 부담이 매우 가벼웠기 때문에 로스토는 연구할 시간이 많았고, 1969년부터 2003년까지 주로 경제 현대화에 초점을 맞춘 21권의 책을 썼다.[8] 자신의 회고록 《권력의 확산》에서 로스토는 베트남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1962년에 북베트남 침공하라는 자신의 조언을 무시한 케네디를 비난하며, "이것은 1960년대 미국 외교 정책의 가장 큰 단일 실수였다"고 썼다.[8] 존슨과의 친분을 반영하여 로스토는 회고록에서 그에게 덜 가혹했지만, 여전히 존슨이 중국과의 핵전쟁 가능성에 대해 너무 걱정했고 북베트남을 침공하라는 자신의 조언을 따랐어야 했다고 비난하며, 중국과의 핵전쟁 위험은 감수할 만하다고 주장했다.[8] 《권력의 확산》의 주요 악당은 맥나마라였는데, 로스토는 1966년부터 그를 패배주의자라고 비난하며, 북베트남을 침공하지 않고 존슨이 주저하게 만든 것은 그의 약점과 전쟁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라고 주장했다.[8]
1980년대에 로스토는 박정희 장군 치하에서 경제가 크게 산업화된 대한민국을 방문했다.[9] 방문 중에 로스토는 대한민국을 《경제 성장 단계》에서 제시한 자신의 이론의 가장 좋은 예로 칭찬하며,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이 실제로 대한민국을 "산업적 도약"으로 이끌었다고 주장했다.[9] 1998년 로스토는 한국 경제학자 박태균에게 대한민국의 경험이 《경제 성장 단계》의 정확성을 증명한다고 말했으며, 더 많은 제3세계 지도자들이 박정희 장군과 같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표명했다. 그러나 경제학자 박은 박정희 장군의 5개년 계획 정책이 로스토의 생각을 반영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9]
1986년 로스토의 저서 《미국과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 기구, 1965–1985》가 출판되었다.[10] 이 책에서 로스토는 미국이 실제로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전쟁이 동남아시아의 나머지 지역이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공산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10] 로스토는 1965년 당시 남베트남의 상황을 근거로 그 해에 공산주의자들에게 넘어갔을 것이며, 미국의 개입이 결국 남베트남을 구하지 못했지만 동남아시아의 나머지 지역이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10년을 더 주어 다른 "도미노"가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고 주장했다.[10]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태국, 필리핀으로 구성된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의 대부분 회원국들의 경제적 성공은 베트남 전쟁이 그들을 위해 "시간을 벌어준" 덕분이라고 주장했는데, 그 국가들 중 어느 나라도 공산주의 국가가 되지 않았고, 필리핀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아시아의 호랑이" (즉, 급성장하는 경제)였기 때문이다.[10]
1995년 맥나마라는 자신의 회고록 《사후 고찰》을 출판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대해 "우리는 틀렸다. 끔찍하게 틀렸다"고 유명하게 선언했다.[11] 1995년 6월 9일 《더 타임스 문학 부록》에서 로스토는 《전쟁의 명분》이라는 제목으로 《사후 고찰》에 대한 신랄한 서평을 썼는데, 맥나마라가 베트남에서 사망한 미국인 가족들을 모욕했다고 비난하고, 미국이 실제로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동남아시아의 비공산주의 국가들이 "1960년에서 1981년 사이에 실질 GNP가 4배 증가"했으며, 이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싸우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로스토는 주장했다.[12] 《더 타임스 문학 부록》의 서평은 맥나마라와 로스토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반영했는데, 후자는 맥나마라가 종종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그의 "패배주의"가 건전하지 못한 정신 상태 때문이라고 시사했다.[12] 로스토는 맥나마라가 1966년에 신경쇠약을 겪었고 베트남에 대한 그의 "패배주의"는 전쟁의 압박으로 인해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믿었다.[12] 밀른은 맥나마라가 실제로 우울증을 겪은 것은 맞지만, 로스토가 국방부 장관으로서 정신을 잃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고 썼다.[12] 밀른은 또한 동남아시아의 높은 경제 성장률이 베트남 전쟁을 정당화한다는 로스토의 주장이 전쟁에서 사망한 모든 미국인과 베트남인의 가족들에게 무자비하다고 썼다.[13]
3. 로스토의 경제성장 단계
1960년 로스토는 《경제 성장 단계: 비공산주의 선언》을 출판하여 로스토의 경제 성장 도약 모델을 제시했다. 이 모델은 경제 성장의 주요 역사적 모델 중 하나로, 경제 현대화가 전통 사회, 도약 전 단계, 도약, 성숙으로의 진전, 그리고 높은 대량 소비의 다섯 가지 기본 단계로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회 진화론에서 현대화 이론의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이 책은 미국 의사 결정자들이 냉전의 핵심 문제 중 하나로 여겼던 제3세계 빈곤층 문제에 대해, 미국 경제 원조와 성장을 통해 육성될 현대화 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1]
로스토는 산업 혁명을 이끈 영국을 사례로 들어 자신의 이론을 제시하고, 칼 마르크스의 역사 구성과 논쟁을 벌였다.[12] 그는 제3세계의 많은 지역이 "전통적인 단계" 또는 "도약 전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 "도약"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발도상국이 ... 민주주의 세계의 범위 내에서 도약 전 단계를 거쳐 잘 확립된 도약으로 성공적으로 이동하여 공산주의의 감언이설과 유혹에 저항할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것이 서방의 가장 중요한 의제라고 믿었다.[12]
로스토의 주장은 서구 개발 모델을 보편화하여 라틴 아메리카나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와 같은 곳에서는 복제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서구와 같은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에 기반한 사회가 모든 사람이 모방하고 싶어하는 이상적인 사회라는 주장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12]
대한민국은 당시 제3세계 국가로서, 로스토의 책에 대해 경제학자와 정책 입안자 모두 많은 관심을 보였다.[12] 특히 로스토의 "경제 도약" 개념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그는 한국이 선진국 경제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연설에서 이 개념을 자주 사용했다.[12]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1962년부터 "경제 도약" 단계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정부 주도의 5개년 계획 정책을 시작했으며, 재벌에게 특정 목표를 달성하도록 요구했다.[12]
로스토의 경제 성장 5단계는 다음과 같다.
1. 전통 사회 (Traditional society)2. 도약 준비 단계 (Preconditions for take-off)3. 도약 단계 (Take-off)4. 성숙 단계 (Drive to maturity)5. 고도 대량 소비 단계 (Age of high mass-consumption)
3. 1. 전통 사회 (Traditional society)
로스토는 그의 저서 《경제 성장의 단계: 비공산주의 선언》(1960)에서 경제 성장의 단계를 제시하며, 그 첫 번째 단계로 '전통 사회'를 설명했다.[19]3. 2. 도약 준비 단계 (Preconditions for take-off)
로스토는 경제 성장에 관한 여러 저서를 출판했다.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3. 3. 도약 단계 (Take-off)
로스토는 1960년에 《경제 성장 단계: 비공산주의 선언》을 출판하여 로스토의 경제 성장 도약 모델을 제시했다.[11] 이 모델은 경제 성장의 주요 역사적 모델 중 하나로, 경제 현대화가 전통 사회, 도약 전 단계, 도약, 성숙으로의 진전, 그리고 높은 대량 소비의 다섯 가지 기본 단계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회 진화론에서 현대화 이론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되었다.로스토는 산업 혁명을 이끈 영국을 사례로 들어 자신의 이론을 제시하고, 칼 마르크스의 역사 구성과 논쟁을 벌였다.[12] 그는 제3세계의 많은 지역이 "전통적인 단계" 또는 "도약 전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 "도약"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발도상국이 ... 민주주의 세계의 범위 내에서 도약 전 단계를 거쳐 잘 확립된 도약으로 성공적으로 이동하여 공산주의의 감언이설과 유혹에 저항할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것이 서방의 가장 중요한 의제라고 믿었다.[12]
로스토의 주장은 당시 서구 개발 모델을 보편화하여 라틴 아메리카나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와 같은 곳에서는 복제할 수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서구와 같은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에 기반한 사회가 모든 사람이 모방하고 싶어하는 이상적인 사회라는 주장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12]
대한민국은 당시 제3세계 국가로서, 로스토의 책에 대해 경제학자와 정책 입안자 모두 많은 관심을 보였다.[12] 특히 로스토의 "경제 도약" 개념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그는 한국이 선진국 경제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연설에서 이 개념을 자주 사용했다.[12]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1962년부터 "경제 도약" 단계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정부 주도의 5개년 계획 정책을 시작했으며, ''재벌''에게 특정 목표를 달성하도록 요구했다.[12]
3. 4. 성숙 단계 (Drive to maturity)
성숙 단계는 월트 휘트먼 로스토의 저서 『경제 성장의 단계: 비공산주의 선언』(1960)에서 제시된 경제 성장 5단계 중 네 번째 단계이다.[19] 로스토는 이 단계에서 경제가 성숙해지면서 기술 발전과 산업 다각화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3. 5. 고도 대량 소비 단계 (Age of high mass-consumption)
로스토는 경제 성장 단계를 5단계로 나누었으며, 그중 마지막 단계가 고도 대량 소비 단계이다. 이 단계는 그의 저서 《경제 성장의 단계: 비공산주의 선언》(1960)에서 제시되었다.[19]4. 대한민국과의 관계
대한민국은 당시 제3세계 국가였는데, 로스토의 저서에 대해 경제학자와 정책 입안자 모두 많은 관심을 보였다.[11]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뒤, 로스토의 "경제 도약" 개념에 주목했다. 그는 한국이 선진국 경제로 성장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일할 것을 촉구하는 연설에서 이 구절을 자주 사용했다.[11] 박정희는 1962년부터 "경제 도약" 단계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정부가 설정한 특정 목표를 ''재벌''이 달성해야 하는 5개년 계획 정책을 시작했다.[11] 1969년 정부가 발행한 ''한국 경제 개발의 이론과 조건''에는 주요 경제학자들의 17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는데, 그 중 절반은 ''경제 성장 단계''에 명시된 이론을 한국에 적용하려 했다.[11]
4. 1. 비판적 시각
로스토는 독자적인 경제 발전 단계설을 정립했으며, 그 안의 용어인 "테이크 오프(이륙)"는 널리 알려졌다. 이는 경제사 논의에 한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경제 성장사학이라고도 불린다). 그는 베스트 앤드 브라이티스트의 일원으로서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행정부의 정책 결정에 깊이 관여했고, 이스라엘의 핵 개발 계획에도 관여하여[20] "미국의 라스푸틴"이라고 불렸다[21].1961년 한국 경제에 관한 보고서에서 로스토는 "한국 경제가 수백 년 동안 끌어온 고질적이고 동양적인 문제 때문에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한국 정계의 분열과 부정이 교정 불가능한 풍토병과 같은 것이며, 독자적인 노선에 의한 공업화 추구 등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30년 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도대체 이 민족에게 자신도 모르는 어떤 문명적인 저력이 있었는가"라고 질문했다[22].
5. 평가
로스토는 국가 안보 보좌관으로서 베트남 전쟁 정책 수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존슨 대통령의 강경파 주장을 지지했다.[14] 그는 존슨 대통령과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존경심과 애정을 표하며, 당시 존슨 대통령과 그 가족이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 깊은 연민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당시 언론은 로스토의 국가 안보 보좌관 임명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뉴욕 타임스''는 사설에서 로스토를 "독창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학자이자 경험이 풍부한 관료이자 정책 기획자... 존 F. 케네디의 외교 정책 설계자 중 한 명"이라고 칭찬하며, 존슨 대통령이 복잡한 세계 문제와 선택 사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14] 존슨 대통령은 로스토를 자신의 "지성인"이라고 칭하며, 이전 케네디 행정부의 지식인들과는 다른 유대감을 느꼈다고 언급했다.[14]
텍사스의 가난한 농가 출신인 존슨 대통령은 소외된 사람들에게 공감하며 제3세계 개발에 대한 로스토의 계획에 큰 관심을 보였다.[14] 로스토는 존슨 대통령이 "항상 약자를 위했다"고 회고했다.[14] 존슨 대통령은 특히 남베트남의 빈곤을 종식시키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농촌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겠다는 로스토의 계획에 공감했다.[14] 또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로스토의 낙관적인 평가는 존슨 대통령에게 전쟁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다.[14]
로스토는 존슨 대통령에게 베트남 전쟁의 평화적 해결은 "항복"과 같다고 주장하며, 미국의 승리를 강조하는 보고서를 제출하여 존슨 대통령의 신임을 얻었다.[14] 그의 낙관적인 보고서는 행정부 내 비둘기파의 비관적인 보고서보다 선호되었다.[14] 1966년 6월 25일 메모에서 로스토는 "모든 곳에서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중공[중국 공산주의자]의 지원을 받는 하노이의 작전은 더 이상 미래의 물결로 간주되지 않습니다. 미국의 힘이 느껴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14]
W. 에버럴 해리먼 특사는 로스토를 "미국의 라스푸틴"이라고 부르며, 존슨 대통령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비판했다.[14]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에 대해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에 집중하고 싶어하는 마음과 전쟁을 원치 않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로스토는 존슨 대통령에게 전쟁 승리가 국내 업적을 보호하고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설득했다.[14]
로스토는 지속적인 폭격 프로그램을 통해 북베트남의 지원을 중단시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4] 그는 롤링 선더 작전의 주요 옹호자였으며, 북베트남의 석유 저장 시설과 수력 발전망 파괴가 전쟁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14]
1966년 불교도 봉기 당시, 로스토는 응우옌 카오 키 공군 원수를 지지하고 불교도 투쟁 운동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존슨 대통령에게 강경 대응을 조언했다.[14] 그는 불교도 봉기를 1789년 파리와 191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같은 고전적인 혁명 상황에 비유하며, 미국의 군사 개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14]
로스토는 미국이 북베트남을 침공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심지어 중국과의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그는 1981년 인터뷰에서 존슨 대통령이 북베트남 침공 제안을 거부한 것에 대해 실망감을 표했다.[14] 그러나 존슨 대통령은 중국과의 핵전쟁 가능성을 우려하여 북베트남 침공에 반대했다.[14]
1966년, 국제 통제 위원회의 폴란드 대표 야누스 레반도프스키는 평화 제안을 전달했지만, 로스토는 이를 "함정"이라고 주장하며 존슨 대통령에게 하노이 폭격을 계속하도록 설득했다.[14] 결국 폴란드에서 계획된 회담은 결렬되었다.[14]
1967년,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수상이 런던을 방문하여 해럴드 윌슨 영국 총리와 함께 베트남 전쟁 종식을 위한 중재 노력을 펼쳤다. 그러나 로스토는 윌슨 총리를 불신하며 해바라기 작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고, 결국 평화 회담은 실패로 돌아갔다.[14]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 취임 이후, 로스토는 공직에서 물러나 오스틴 텍사스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쳤다.[14] 베트남 전쟁 지지 때문에 MIT에서 강의를 재개할 수 없었던 그는, 자유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는 인물이 되어 학계에서 어려움을 겪었다.[14]
로스토는 개발도상국에서 신자유주의 경제학을 옹호하는 글을 썼으며, 헨리 키신저는 "이 행정부의 월트 로스토"가 될까 봐 두려워했다.[14]
1980년대에 로스토는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정책을 칭찬하며 자신의 경제 성장 단계 이론의 가장 좋은 예라고 주장했다.[14] 1998년에는 한국 경제학자 박태균에게 대한민국의 경험이 자신의 이론을 증명한다고 말했다.[14] 그러나 박태균은 박정희 대통령의 5개년 계획 정책이 로스토의 생각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14]
1986년, 로스토는 저서 《미국과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 기구, 1965–1985》에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하며, 전쟁이 동남아시아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고 주장했다.[14] 그는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 회원국들의 경제적 성공이 베트남 전쟁 덕분이라고 주장했다.[14]
1995년, 로버트 맥나마라가 회고록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해 "끔찍하게 틀렸다"고 선언하자, 로스토는 맥나마라를 비난하며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했다.[14] 그는 맥나마라의 "패배주의"가 정신 건강 문제 때문이라고 시사했다.[14]
로스토는 독자적인 경제 발전 단계설을 정립했으며, "테이크 오프(이륙)"라는 용어를 널리 알렸다.[14] 그는 케네디, 존슨 행정부의 정책 결정에 깊이 관여했으며, 이스라엘의 핵 개발 계획에도 관여하여 "미국의 라스푸틴"이라고 불렸다.[20][21]
1961년 한국 경제에 대한 보고서에서 "절망적인 상태"라고 결론지었으나, 30년 후 한국을 방문하여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도대체 이 민족에게 자신도 모르는 어떤 문명적인 저력이 있었는가"라고 질문했다.[22]
6. 주요 저서
출판 연도 | 제목 | 원제 | 비고 |
---|---|---|---|
1938년 | 투자와 대공황 | Investment and Great Depression | 경제사 검토 |
1948년 | 19세기 영국 경제에 대한 소론(小論) | Essays on the British Economy of the Nineteenth Century | |
1950년 | 이론과 실제상의 교역 조건 | The Terms of Trade in Theory and Practice | 경제사 검토 |
1951년 | 교역 조건에 대한 역사적 분석 | The Historical Analysis of Terms of Trade | 경제사 검토 |
1952년 | 경제 성장의 과정 | The Process of Economic Growth | |
1953년 | 영국 경제의 성장과 변동, 1790–1850: 영국의 경제 발전에 대한 역사적, 통계적, 이론적 연구 | The Growth and Fluctuation of the British Economy, 1790–1850: An Historical, statistical, and Theoretical Study of Britain's Economic Development | 아서 게이어, 안나 슈워츠 공저 |
1953년 | 소비에트 사회의 역학 | The Dynamics of Soviet Society | 노턴 앤 컴퍼니, 1954년 앵커 에디션 출간 |
1955년 | 세속적 성장의 자원 배분 추세 | Trends in the Allocation of Resources in Secular Growth | 뒤프리에 편집, 《경제 진보》 |
1955년 |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정책 | An American Policy in Asia | R.W. 해치 공저 |
1956년 | 자립 경제 성장에서의 도약 | The Take-Off into Self-Sustained Growth | 경제 저널 |
1957년 | 효과적인 대외 정책을 위한 제안 | A Proposal: Key to an effective foreign policy | 맥스 밀리칸 공저 |
1959년 | 경제 성장의 단계 | The Stages of Economic Growth | 경제사 검토 |
1960년 | 경제 성장의 단계: 반공산당 선언 | The Stages of Economic Growth: A non-communist manifesto | [19] |
1960년 | 세계 무대에서의 미국: 최근 역사의 에세이 | The United States in the World Arena: An Essay in Recent History | |
1971년 | 정치학과 경제 성장의 단계 | Politics and the Stages of Growth | |
1975년 | 현대 경제의 기원 | How it All Began: Origins of the modern economy | |
1978년 | 세계 경제: 역사와 미래 | The World Economy: History and prospect | |
1980년 | 왜 거지는 부자가 되고 부자는 서서히 가라앉는가? | Why the Poor Get Richer and the Rich Slow Down: Essays in the Marshallian long period | |
1985년 | 아이젠하워, 케네디, 그리고 외원 | Eisenhower, Kennedy, and Foreign Aid | |
1990년 | 경제 성장 이론 - 데이빗 흄에서 현대까지 | Theorists of Economic Growth from David Hume to the Present | |
1998년 | 거대한 인구 급증과 그 이후 | The Great Population Spike and After: Reflections on the 21st Century | |
1946년 | 미국의 외교 혁명 | The American Diplomatic Revolution: An Inaugural Lecture Delivered before the University of Oxford on 12 November 1946 | 클래런던 출판사 |
1948년 | 19세기 영국 경제 | British Economy of the Nineteerth Century | 클래런던 출판사 |
1952년 | 경제 성장의 과정 | The Process of Economic Growth | 노턴 |
1960년 | 세계 무대에서의 미국: 최근 역사의 에세이 | The United States in the World Arena: An Essay in Recent History | 하퍼 & 로 |
1960년 | 경제 성장의 단계: 비공산주의 선언 | The Stages of Economic Growth: A Non-Communist Manifesto |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
1964년 | 7층에서 본 관찰 | View from the Seventh Floor | 하퍼 & 로 |
1971년 | 정치와 성장의 단계 | Politics and the Stages of Growth |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
1972년 | 권력의 분산: 최근 역사의 에세이 | The Diffusion of Power: An Essay in Recent History | 맥밀란 |
1975년 | 모든 것의 시작: 현대 경제의 기원 | How It All Began: Origins of the Modern Economy | 맥그로힐 |
1978년 | 여기서 거기로 가기 | Getting from Here to There | 맥그로힐 |
1978년 | 세계 경제: 역사와 전망 | The World Economy: History & Prospect | 맥밀란 |
1980년 | 왜 가난한 자는 부유해지고 부자는 둔화되는가: 마셜식 장기 시대의 에세이 | Why the Poor Get Richer and the Rich Slow Down: Essays in the Marshallian Long Period | 텍사스 대학교 출판부 |
1981년 | 영국 무역 변동, 1868-1896: 연대기와 해설 | British Trade Fluctuations, 1868-1896: A Chronicle and a Commentary | 아르노 출판사 |
1981년 | 침공 전 폭격 전략: 1944년 3월 25일 아이젠하워 장군의 결정 | Pre-Invasion Bombing Strategy: General Eisenhower's Decision of March 25, 1944 | 텍사스 대학교 출판부 |
1981년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분할, 1946년 | The Division of Europe after World War II, 1946 | 텍사스 대학교 출판부 |
1982년 | 스탈린 이후의 유럽: 1953년 3월 11일 아이젠하워의 세 가지 결정 | Europe after Stalin: Eisenhower's Three Decisions of March 11, 1953 | 텍사스 대학교 출판부 |
1982년 | 열린 하늘: 1955년 7월 21일 아이젠하워의 제안 | Open Skies: Eisenhower's Proposal of July 21, 1955 | 텍사스 대학교 출판부 |
1983년 | 야만적인 반혁명: 원인과 치료 | The Barbaric Counter-Revolution: Cause and Cure | 텍사스 대학교 출판부 |
1985년 | 아이젠하워, 케네디, 그리고 외원 | Eisenhower, Kennedy, and Foreign Aid | 텍사스 대학교 출판부 |
1986년 | 미국과 아시아 태평양 지역 기구, 1965-1985 | The United States and the Regional Organization of Asia and the Pacific, 1965-1985 | 텍사스 대학교 출판부 |
1987년 | 부국과 빈국: 과거에 대한 성찰, 미래를 위한 교훈 | Rich Countries and Poor Countries: Reflections on the Past, Lessons for the Future | 웨스트뷰 출판사 |
1988년 | 반세기의 에세이: 아이디어, 정책, 행동 | Essays on a Half-Century: Ideas, Policies, and Action | 웨스트뷰 출판사 |
1990년 | 역사, 정책, 경제 이론: 상호작용에 관한 에세이 | History, Policy, and Economic Theory: Essays in Interaction | 웨스트뷰 출판사 |
1990년 | 데이비드 흄부터 현재까지의 경제 성장 이론가들: 다음 세기에 대한 전망 | Theorists of Economic Growth from David Hume to the Present: with a Perspective on the Next Century |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
1998년 | 거대한 인구 급증과 그 이후: 21세기에 대한 성찰 | The Great Population Spike and After: Reflections on the 21st Century |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
2003년 | 개념과 논쟁: 60년간 아이디어를 시장에 내놓다 | Concept and Controversy: Sixty Years of Taking Ideas to Market | 텍사스 대학교 출판부 |
1953년 | 소련 사회의 역학 | The Dynamics of Soviet Society | Alfred Levin과 공저, Secker & Warburg |
1953년 | 영국 경제의 성장과 변동, 1790-1850: 영국의 경제 발전에 대한 역사적, 통계적, 이론적 연구 | The Growth and Fluctuation of the British Economy, 1970-1850: An Historical, statistical, and Theoretical Study of Britain's Economic Development | 아서 D. 가이어(Arthur D. Gayer), 안나 슈워츠와 공저, 2권, Clarendon Press |
1954년 | 공산 중국의 전망 | The Prospects for Communist China | R. W. 해치(R. W. Hatch), F. A. 키어먼 주니어(F. A. Kierman, Jr.), A. 엑스타인(A. Eckstein)과 공저, Chapman & Hall |
1955년 | 아시아의 미국 정책 | An American Policy in Asia | 리처드 W. 해치(Richard W. Hatch)와 공저, John Wiley & Sons |
1957년 | 제안: 효과적인 외교 정책의 열쇠 | A Proposal: Key to An Effective Foreign Policy | 맥스 밀리칸과 공저, Harper |
1969년 | 동서 관계: 데탕트(detente)는 가능한가? | East-West Relations: Is Detente Possible? | 윌리엄 E. 그리피스(William E.Griffith)와 공저,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for Public Policy Research |
1977년 | 국가 에너지 정책: 임시 개요, 1977년 9월 12일 | National Energy Policy: An Interim Overview, September 12, 1977 | W. L. 피셔(W. L. Fisher), H. H. 우드슨(H. H. Woodson)과 공저, Council on Energy Resources,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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