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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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소사는 1784년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이 세례를 받은 해에 태어났다. 그녀는 17세에 결혼했으나 남편과 사별하고, 어린 남동생 이호영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지키며 살았다. 1835년 체포되어 고문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고 1839년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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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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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이소사 아가타 |
| 출생 | 1784년, 경기도 이천 |
| 사망 | 1839년 5월 24일, 서울 |
| 축일 | 9월 20일 |
| 신분 | 순교자 |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
| 시복자 | 교황 비오 11세 |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 시성자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2. 생애
1784년 경기도 이천 구월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천주교 교리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17세에 비(非)천주교 집안으로 시집갔다. 결혼 생활 중 자녀를 갖지 못했고, 결혼 3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여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친상까지 겪으면서 삶의 의미와 안정을 찾고자 친정으로 돌아왔다.
친정에서 19살 어린 남동생 이호영을 돌보며 신앙 생활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며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동생에게도 가르쳤다. 남매는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며 신앙 공동체 내에서 존경받는 삶을 살았다.
1835년 2월, 동생 이호영과 함께 포졸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심문 과정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다른 교우들의 이름을 대기를 거부했다.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왕의 승인이 늦어져 4년간 옥살이를 더 해야 했다.
동생 이호영이 옥중에서 사망한 지 6개월 뒤인 1839년 5월 24일, 이소사는 다른 8명의 교우들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56세였다.
2. 1. 출생과 가정 환경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에서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된 해에, 경기도 이천 구월에서 태어났다.그녀는 마음이 따뜻하고 예절 바른 성품으로 주변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나, 어릴 때는 종교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 아버지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고 어머니는 예비 신자였지만, 그녀 자신은 교리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다.
17세에 비(非)천주교 집안으로 시집을 갔으며, 초기 결혼 생활에서는 종교적 색채가 옅었다. 그러나 자녀를 갖지 못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커졌다. 결혼한 지 2년 뒤, 19살 어린 남동생 이호영이 태어나 그녀에게 큰 기쁨이 되었다. 하지만 동생이 태어난 지 1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결혼 생활 3년 만에 자녀 없이 과부가 되었다. 이 비극은 그녀가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게 했고, 삶의 안정과 가치를 더욱 갈망하게 만들었다. 남편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이러한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결국 그녀는 시집을 떠나 친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는 신앙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마음과 함께, 어린 남동생 이호영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기도 했다. 친정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어머니가 임종 직전 아버지에게 세례를 베풀어 평화롭게 눈감을 수 있게 한 것에 대해 깊이 감사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은 매우 어려워졌다. 어머니와 동생을 보살피는 사이 아버지가 남긴 약간의 유산마저 모두 사라졌고, 그녀는 바느질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평온함을 잃지 않았으며, 천주교 교리를 꾸준히 공부하고 동생에게도 가르쳤다. 남매는 가난 속에서도 하느님을 섬기며 십계명을 따르는 삶을 살았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순교자들의 모범적인 모습과 신앙을 지키다 맞이한 죽음은 그들 남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이 순교자들을 본받으려 노력했듯이, 다른 교우들도 이들 남매를 모범적인 천주교 가정으로 존경했다.
현석문 가롤로는 그의 저서 《기해일기》에서 이소사 아가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소사 아가타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재산을 모두 잃었다. 그녀는 늙은 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살았지만, 그 어려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항상 행복한 미소를 지었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녀의 선하고 아름다운 말과 행동은 전부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녀는 겸손하고 공손하여 모든 이들이 그녀의 훌륭한 행실을 칭찬하고 사랑하며 감복하였다."
2. 2. 신앙 생활
남편과 아버지가 잇달아 세상을 떠난 후, 이소사는 시집을 떠나 친정으로 돌아왔다. 이는 신앙의 원천으로 돌아가려는 마음과 더불어, 19살 어린 남동생 이호영을 돌보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친정의 형편은 아버지가 남긴 약간의 유산마저 모두 사라져 매우 어려웠다. 이소사는 바느질로 생계를 꾸리며 노모와 어린 동생을 부양했다.
이러한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이소사는 평온함을 잃지 않고 천주교 교리를 깊이 공부하며 동생에게도 이를 가르쳤다. 남매는 함께 가난을 견디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십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았다.
특히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자들이 보여준 모범과 죽음을 통한 영원한 승리는 남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순교자들을 본받아 생활했으며, 이러한 모습은 다른 교우들에게도 천주교 가정의 모범으로 여겨져 존경을 받았다.
동시대 인물인 현석문은 그의 저서 《기해일기》에서 이소사 아가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며 그녀의 신앙심과 인품을 증언했다:
: 이소사 아가타는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재산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그녀는 늙은 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극도의 가난을 견디며 살았다. 그녀가 감내한 가난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녀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행복한 미소를 지었으며 평화로워 보였다. 그녀의 선하고 아름다운 말과 행동을 전부 다 기록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녀는 겸손하고 공손하였으므로, 모든 이들이 그녀의 훌륭한 행실을 들어 그녀를 칭찬하고 사랑하며 감복하였다.
2. 3. 체포와 투옥
1835년 2월, 동생 이호영과 함께 포졸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1] 포장은 심문 과정에서 고문을 가하며 배교를 강요하고 다른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을 대라고 협박했지만, 이소사와 이호영은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당신에게 다른 교우들의 이름을 댄다면, 그들에게 해로운 일이 닥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신앙을 지켰다.[1]포장은 1732년부터 영조의 교지로 금지되었던 잔혹한 고문 방법을 천주교 신자들의 심문을 위해 다시 사용하도록 명령했다.[1] 이소사는 살가죽이 늘어나고 다리가 비틀리는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자, 형리들은 그녀를 발가벗기고 팔을 뒤로 묶어 매달아 온몸을 몽둥이로 구타하는 고문까지 자행했다.[1] 며칠 후 다시 끌려 나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질을 당했지만, 이소사는 "나는 교회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하며 신앙을 지켰다.[1]
포장은 이소사 남매에게서 배교 선언을 받아낼 수 없음을 깨닫고 그들을 형조로 이송했다. 형조에서는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1] 그러나 왕의 사형 승인이 내려오지 않아 4년 동안 옥살이를 더 해야 했다.[1] 동생 이호영이 옥사한 지 6개월 뒤에야 사형 집행 명령이 내려졌다.[1] 1839년 5월 24일, 이소사는 나중에 체포된 다른 8명의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서소문 밖 처형장으로 끌려가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1] 이때 그녀의 나이는 56세였으며, 순교 직전 경건하게 십자성호를 그었다고 전해진다.[1]
2. 4. 순교
1835년 2월, 이소사는 동생 이호영과 함께 포졸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심문 과정에서 포장은 그들에게 신앙을 포기하고 다른 신자들의 이름을 댈 것을 강요하며 고문을 가했다. 당시 사용된 고문 방식은 매우 잔인하여 1732년부터 교지로 금지되었던 방법까지 동원되었으나, 이소사 남매는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다른 교우들의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했다.이소사는 살가죽이 늘어나고 다리가 비틀리는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다. 형리가 그녀를 벌거벗기고 등 뒤로 팔을 묶어 매달아 온몸을 구타하는 고문에도 "나는 교회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포장이 남매에게서 배교 선언을 받아낼 수 없음을 깨닫고 그들을 형조로 이송시켰고, 형조는 사형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왕의 최종적인 사형 집행 승인이 내려지지 않아 그들은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동생 이호영이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고 6개월 뒤인 1839년 5월 24일, 마침내 사형 집행 명령이 내려왔다. 이소사는 다른 여덟 명의 교우들과 함께 서소문 밖의 처형장으로 압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56세였다. 그녀는 목이 베이기 직전, 경건하게 십자성호를 그었다고 전해진다.
3. 시복 및 시성
이소사 아가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고,[1]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3. 1. 시복
이소사 아가타는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다.[1]3. 2. 시성
이소사 아가타는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다.[1] 이후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집전한 미사 중 거행된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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