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 (15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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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지(李贄, 1527년 ~ 1602년)는 명나라 시대의 사상가로, 유교, 불교, 도교의 융합을 주장하며 기존의 주자학을 비판하고 인간의 본성을 강조하는 '동심설'을 제창했다. 그는 관료 생활을 거쳐 은둔 후 저술 활동에 전념하며 《분서》, 《장서》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지의 급진적인 사상은 당대의 지배층으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며, 만년에 투옥되어 자결했다. 사후에도 그의 저작은 금서로 지정되었지만, 후대에 공안파 문학, 근대 중국의 유교 비판, 일본의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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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1527년) |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지 |
다른 이름 | 임재지 |
자 | 홍보 |
호 | 탁오 |
출생 | 가정 6년 음력 10월 26일 |
사망 | 만력 30년 음력 3월 16일 |
출생지 | 천주부진장현 |
국적 | 명나라 |
민족 | 한족 |
직업 | 양명학자 |
한자 정보 | |
정체자 | 李贄, 林載贄 |
간체자 | 李贽, 林载贽 |
병음 | lǐ zhì, lín zǎizhì |
광동어 | Lei5 Zi3, Lam4 Zoi3 Zi3 |
철학 사상 | |
학파 | 양명학 |
영향 | |
영향 받은 사상가 | 왕수인 |
참고 사항 | |
관련 항목 | 양명학, 태주학파 |
2. 생애
이지는 1527년(가정 6년) 명나라 취안저우 부 진장 현에서 태어났다. 당시 명나라는 북로남왜에 시달리는 시대였다. 젊은 시절 취안저우에서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26세에 향시에 합격했지만 진사가 되지는 못하고 지방 관직을 역임했다. 40대는 베이징과 난징에서 관료 생활을 했으며, 54세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마청 현 룽후에 있는 즈포위안(芝佛院)에 정착하여 독서와 저술에 힘썼다.[12]
그의 사상은 양명학 좌파(태주 학파)에 속한다. 자오훙, 겅딩샹, 겅딩리 형제와 교류하고 양명학에 기울면서, 왕지, 뤄루팡과 같은 왕양명의 제자들을 만나 더욱 사색을 깊게 하였다.
만력 27년(1599년), 난징에 부임했을 때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와 만나 상호 이해를 깊게 하였다. 이지는 리치의 인품과 능력, 그의 저서 『교우론』에 높은 평가를 내렸다. 리치 또한 이지가 기독교에 일정 부분 이해를 보였고 문학과 과학에 정통하다고 기록했다. 이지는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 융합을 주장했기에 기독교에 이해를 보였지만, 상대주의자였던 이지는 절대 권위의 일신교인 기독교를 완전히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13]
관직 은퇴 후 간행한 시문집 『분서』(1589년)에는 겅딩샹과의 서한이 수록되어 주자학 및 도학자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그 때문에 주변에서 위험 사상으로 단정되어 압력을 받았다. 지방 향신과 학자들에게 박해를 받았으며, 룽후에 살았던 70세에는 순도(지방 사법 장관)가 "이지는 매우 공기를 더럽히고 있다. 만약 물러나지 않는다면 법에 따라 처치하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4]
이지에 대한 비판은 사상뿐만 아니라 승려가 된 것, 삭발, 결벽증, 여성에게 학문을 강의한 것 등 생활 습관에까지 미쳐 그를 괴롭게 했다. 62세 때 삭발 출가(剃髮)를 했다. 이지는 유서를 모은 『초담집』을 편집하는 등 유자의 정신을 버린 것은 아니었지만, 삭발은 "세속과의 결별, 유자의 포기"로 받아들여지는 행위[15]로서, 관리 등으로부터 크게 비판을 받았고, 박해와 체포로 이어졌다. 이지는 스스로를 겡개(狷介)·편협하다고 말하며, 세상과 맞지 않는 일이 많았다.
73세에 난징에서 출판한 역사 인물 평론집 『장서』도 체포, 투옥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결국, 박해를 피해 베이징 근교에서 체포되었고, 옥중에서 자결했다. 향년 76세였다. 사후에도 탄압은 멈추지 않았고, 저작과 그 출판에 사용된 판목은 모두 불태워 없애졌으며, 왕조가 청으로 바뀌어도 금서 목록에 올랐다. 『명유학안』(명대 학자들의 학문 계통을 밝힌 책[16])에도 그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2. 1. 출생과 가계
이지(李贄)는 1527년 푸젠성 취안저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해상 무역에 종사했으며, 7대조 린누는 페르시아 호르무즈를 방문하여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현지 여성과 결혼했다.[1][2] 이러한 배경은 이지(李贄)의 개방적이고 다양한 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린누의 개종에도 불구하고 이지(李贄)의 가문은 이슬람 신앙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지는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가르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이지(李贄)는 어린 나이부터 교육을 받았다.2. 2. 관직 생활과 좌절
이지는 26세에 향시에 합격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지만, 진사 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허난성, 베이징, 난징 등지에서 하급 관리로 일했으며, 남경형부원외랑(南京刑部員外郞)을 거쳤다. 51세 때 윈난성 야오안의 지부(知府)가 되었으나 3년 만에 사직했다.[24]이지는 스스로를 성질이 편협하고, 성급하며, 거만한 데다, 미치광이 같은 마음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그는 사람들과의 교제 범위가 좁고, 쉽게 친해지지만, 한번 미워하면 평생 고통스럽게 하려 한다고 말했다. 또한, 따뜻한 옷과 풍성한 음식을 바라면서도 절개를 지킨 백이와 숙제를 닮고자 하는 등, 이상과 현실, 말과 행동이 다르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반어적인 면이 있으며, 실제로는 권세나 부와 같은 외적인 것에는 신경 쓰지 않고, 사람의 내면을 보려 노력했다.[24]
이지는 독선적이고 외곬수적인 성격으로, 사람들과 시비를 즐기고 매사에 도전적으로 대했다. 기행과 반유교적인 언사로 당대 사회에서 큰 주목을 받았고, 결국 명나라 사상계에서 이단으로 몰렸다. 1602년(만력 30년) 부패한 관료층의 탄압으로 '도를 혼란케 하고 세상을 미혹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자결했다. 향년 76세였다.[24]
2. 3. 사상적 방황과 양명학
이지는 관직 생활 동안 양명학에 깊이 빠져들었다. 왕수인(왕양명)과 왕기를 존경했으며, 자오훙, 겅딩샹, 겅딩리 형제 등 양명학자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특히 양명학 좌파인 태주학파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긍정하고 실천적인 삶을 강조하는 사상을 형성했다.[11] 그는 신유학에 기반을 두었지만, 당시 정통 주자학을 강하게 비판하고, 스스로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왕양명(1472-1529)과 태주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4]2. 4. 은둔과 저술 활동
54세에 관직에서 물러난 이탁오는 마청시 룽후의 지선원(芝仙院)에 은거하며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12]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대표작인 《분서》(焚書), 《장서》(藏書), 《속분서》(續焚書) 등을 집필했다.《분서》는 시문집으로, 주자학 및 그것을 신봉하는 도학자에 대한 엄격한 비판이 담겨 있어 주변으로부터 위험 사상으로 간주되어 압력을 받았다.[14]
《장서》는 전국 시대에서 원대까지를 기록한 기전체 역사서이다. 서두의 〈장서 세기열전 총목전론〉에서 시비와 선악에는 정해진 본체가 없고, 전부 상대적이며 병존적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장자의 사상과 많이 비슷하다. 〈세기총론〉, 〈덕업유신론〉, 〈후론〉 등 이 책의 전반적인 논조는 무위(無爲), 무사(無私)에 대한 반론, 공리(功利)의 주장, 전통적 가치관 및 규범 의식에 대한 반발, 송유도통론(宋儒道通論)의 부정 등 종래 사서(史書)인 《사기》, 《자치통감》, 《통감강목》의 춘추필법을 무시하고, 자유분방하고 독창적인 견해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2. 5. 만년의 박해와 죽음
1602년(만력 30년), 이지(李贄)는 부패한 관료층의 탄압을 받아 '도를 혼란케 하고 세상을 미혹하게 했다'라는 죄목으로 사상범으로 체포되었다.[24] 그는 장원다 및 어사대의 다른 관리들로부터 이단적인 사상으로 사회를 기만했다는 비난을 받았다.[3] 옥중에서 푸젠 성으로 유배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하인에게서 빼앗은 면도칼로 목을 그어 자결했다. 향년 76세였다.[24][3]그가 죽은 후, 퉁저우에 묻혔고, 그의 무덤은 아직 남아있다.[3] 사후에도 탄압은 멈추지 않았고, 그의 저작과 출판에 사용된 판목은 이미 출간된 것과 아직 출간되지 않은 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 불태워 없애졌다. 왕조가 청으로 바뀐 후에도 그의 저작은 금서 목록에 올랐다. 또한, 명나라 시대의 학자들을 나열하고 그 학문의 계통을 밝힌 책인 『명유학안』에도 그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16]
3. 사상
이지(李贄)는 유교 사상의 틀 안에서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는 죽음에 대한 유교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거나 강에 던져 달라고 할 정도로 자유로운 사고를 했다.[5] 이는 "진실한 감정"을 따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5]
이지는 유교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여성의 지적, 영적 능력은 남성과 동등하다고 보았다. 남녀 모두에게 자기 수양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7] 그는 음양론에 기반한 남녀 차별을 비판하고, 부부 관계를 친구 관계처럼 평등하게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7]
당시 여성은 "근시안" 때문에 도(道)를 이해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이지는 "시야"에는 성별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원시안"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며, 무왕의 아홉 번째 신하 이강과 주 문왕의 배우자이자 "현자"로서 그의 "덕 있는 행동"이 너무 높은 기준을 설정하여 남부 지역의 관습을 "개선"한 태사를 예로 들었다.[8]
이지는 자신의 저서 《분서》에서 친구들의 질문에 답하며 당시 학자들의 잘못을 비판했다. 그는 이 책이 자신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랐다.[8] 또한, 《분서》에서 부부 관계의 친밀함은 섹스와 우정을 넘어선다고 묘사하며, 고인이 된 아내의 "여성적인" 덕목을 칭찬했다.[8]
《장서》는 고대부터 현재까지의 선행과 악행을 기록한 책으로, 이지는 "육안"을 가진 자는 이 책을 읽을 수 없다고 했다.[8] 그는 주자학을 비판하고,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긍정했으며, 문학과 역사에 대한 독자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3. 1. 동심설(童心說)
童心說중국어이탁오 사상의 핵심은 '동심설'이다. 《분서》 제3권에 실린 글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이탁오는 동심(童心)을 진심(眞心, 참다운 마음)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동심은 "거짓이 전혀 없고 순진무구한 최초 일념(一念)의 본심"을 뜻한다. 이 마음을 잃으면 참다운 인간(眞人)이 아니게 된다.[24]
사람은 동심을 갖고 태어나지만, 자라면서 세상에 대한 지혜가 발달하면서 동심이 방해를 받고 거짓 행동이나 말을 하게 되어 결국 동심을 상실한다. 참다운 인간의 마음을 상실하고, 가짜 인간(假人)이 되는 것이다.[24]
이탁오는 당시(唐詩, 당나라 시), 원곡(元曲, 원나라 연극), 명나라 소설 《수호전》 등과 같이 동심에서 출발한 작품들이 천하에서 최고로 치는 문장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비해 육경(六經)이나 《논어》, 《맹자》 같은 경서들에는 동심이 담겨 있지 않다고 보았다. 육경, 《논어》, 《맹자》는 공부 못 하는 제자들이 스승의 설명을 조금씩 알아들은 걸 모아 놓은 책이거나 권위에 약한 사관들이 함부로 성인을 추어올리면서 쓴 책이기 때문이다. 이런 책들은 성인의 마음을 직접 전한 것이 아니고, 도학자들이 핑계나 변명 거리로 삼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24]
이탁오가 말하는 동심은 욕망도 포함하여, 살아 있는 인간의 적나라한 마음에 가깝다. 그 반대편에 있는 거짓 마음은 동심을 압착하여 그것을 어떤 주형에 넣으려는 기성 질서나 도덕관, 권위를 뜻한다. 구체적으로는 옛 경전의 권위를 구실 삼아 강요되는 기성 도덕의 가르침이다. 이탁오는 이를 도리의 견문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견문이 사람 내부에 주입되면 진실한 마음인 적나라한 동심은 사라진다. 그 탓에 사람은 가짜 인간이 되고, 거짓 행동을 일삼으며,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게 된다.[24]
이탁오는 사회의 기성관념, 현재의 거짓 사회관계를 거짓으로 부정한다. 구체적으로는 당대 유행했던 주자학적 도통 관념, 또는 그 관념에 사로잡혀 자신의, 인간의 진실한 희망이나 욕구를 망각하는 일이다.[24]
이탁오에 따르면, 사람은 거짓을 끊고 순수하게 참다운 최초의 일념인 본심, 즉 하지 않으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적나라한 동심에 바탕을 두고 진실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참다운 삶이고, 그러한 삶에 의해 구축된 진실을 따라 바람직한 사회관계나 이념을 실현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참다움은 기존 사회 통념에 대해서는 파괴적이다. 반면 바람직한 미래의 사회상에 대해서는 창조적으로 작용한다.[24]
이탁오는 자신의 저서 《분서》에서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은 보고 들은 지식이 밖으로부터 들어와 안의 주인이 되고, 도리가 들어와 안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라면서, 특히 도리를 부정적으로 간주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음란을 가르치는 《서상기》, 도둑을 가르치는 《수호전》 등과 같은 속문학(俗文學)이 고금의 지극한 문장[至文]이고, 육경·《논어》·《맹자》는 도학자들의 핑계로 삼는 책으로 위선자를 만드는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3. 2. 주자학 비판
이탁오는 당시 지배적인 사상이었던 주자학을 강하게 비판했다. 주자학은 인간의 본성을 성(性)과 정(情)으로 나누고, 성을 이(理)로 규정하는 '성즉리'를 주장했지만, 이탁오는 이러한 주자학의 주장이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고, 동심을 잃게 만든다고 비판했다.[8] 그는 독서를 통해 도리를 깨우치는 것보다,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이탁오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마음인 '동심(童心)'을 강조했는데, 이는 양명학의 '양지'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사람이 성장하면서 얻는 지식과 도덕 관념이 오히려 이 동심을 흐리게 한다고 보았다.[8]
이러한 생각은 당시 주류 사상이었던 주자학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주자학은 독서와 수양을 통해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지만, 이탁오는 그러한 노력이 오히려 인간의 본성을 억누른다고 비판했다. 그는 '동심'을 잃은 사람의 말과 행동은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거짓이라고 주장했다.[8]
특히 이탁오는 사대부 계층의 위선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겉으로는 인의(仁義)를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대부들의 이중성을 지적하며, 그들의 가치관을 혐오했다.[8]
이러한 반발은 이탁오가 기존에 낮게 평가받던 인물이나 문학 작품을 재평가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그는 진시황이나 풍도 같은 인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서상기, 서유기, 수호전과 같은 대중 소설을 높이 평가했다. 이는 사대부 중심의 가치관에서 벗어나 대중의 솔직한 감정을 중시하는 그의 철학을 반영한다.[8]
3. 3. 욕망 긍정
李贄|이지중국어는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이 인륜의 물리(物理)"라고 말하며[5],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그는 욕망을 억압하는 대신, 동심에 따라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충족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지는 좋은 삶의 필수적인 자질은 "[우리의] 진정한 욕구에 [따름]"이라고 믿었다.[5]3. 4. 문학관
이지는 문학에서도 동심(童心)의 발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당시(唐詩), 원곡(元曲), 수호전과 같은 소설을 높이 평가하고, 육경이나 논어, 맹자와 같은 경서는 동심이 결여된 가짜 글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문학이 인간의 진실한 감정과 욕망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5]3. 5. 역사관
이탁오는 역사에 대한 독자적인 관점을 제시했다. 그는 《장서》에서 전국 시대부터 원나라까지의 역사를 다루면서, 기존의 역사 평가 기준을 비판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인물과 사건을 재평가했다. 그는 진시황이나 풍도와 같이 전통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받던 인물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5]이탁오의 대표작 《장서》는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이지만, 인물 분류와 각 열전에 붙여진 평론을 통해 그의 사상을 담고 있다. 이탁오는 공자의 평가 기준도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보았으며, 각자는 자신의 판단 기준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5]
그는 희곡과 소설에서도 '동심'의 발현을 인정하여, 시문과 속문학의 가치를 동등하게 평가했다. 이러한 가치 판단은 외적인 규범보다 자신의 내면의 진심, 즉 '동심'을 중시하고, 옳고 그름에 정해진 기준이 없다고 본 그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5]
4. 여성관
李卓吾|이지탁오중국어는 여성의 지적 능력과 사회적 역할에 대해 진보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여성들에게도 가르쳤으며, 여성의 교육과 사회 참여를 지지했다.[8] 그는 "부부에 대한 논의"에서 사회 질서가 부부 관계를 "궁극적인 근원"으로 의존하고 있으므로, 이 관계는 기꺼이 협력하기로 결정한 친구 간의 관계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8] 李卓吾|이지탁오중국어는 여성의 원시적인 생각에 분노하는 것은 근시안적인 남자일 뿐이며, 진정으로 원시적인 남자는 근시안적인 남자와 교류하거나 그들의 승인을 바라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만약 그럴 경우 그 자신도 그런 근시안적이고 "소심한" 남자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8]
5. 영향
이탁오의 사상은 당대에는 이단으로 취급받았지만,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명말 청초의 공안파(公安派)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원굉도, 원매 등은 이탁오의 동심설을 계승하여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과 욕망을 표현하는 문학을 추구했다.[3] 근대 이후 중국에서 유교가 비판받으면서, 이탁오는 유교에 저항한 선구적인 사상가로 재조명되었다. 그의 사상은 현대 중국의 사상과 문화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의 요시다 쇼인은 이탁오의 『분서(焚書)』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의 사상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했다.[18] 미야케 세츠레이, 나이토 고난 등도 이탁오를 높이 평가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이탁오가 제창한 「동심」과 비슷한 사상을 전개했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도」의 근본적인 의미가 「진심」에 있으며, 그것은 동심과 마찬가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얻는 지식이나 학습 등에 의해 잃어버린다고 보았다. 이 진심과 동심은 모두 「타고난」, 「자연스러운 상태」를 강조한다.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내면의 자연」으로서 인간의 사욕을 용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탁오의 사상과 통하는 점이 있다.[23]
6. 저서
- 《분서》
- 《속분서》(續焚書)
- 《장서》
- 《속장서》(續藏書)
- 《이씨문집》(李氏文集)
- 《탁오대덕》(卓吾大徳)
- 《고도록》(古道録)
- 《손자참동십삼편》(孫子参同十三篇)
- 《정토결》(浄土訣)
- 《파공연보》(坡公年譜)
《분서》는 전6권으로, 이탁오가 호북성 황안현에서 경정향(耿定向)과 사상적 대립으로 절교한 후 마성현 용호(龍湖) 지선원(芝仙院)에 거주하던 시절 십여 년 동안 써 놓은 서간, 수필, 시 등을 모은 문집이다. 대표적 논문은 제3권에 수록된 〈동심설(童心說)〉이다.
《장서》는 전68권으로, 전국 시대에서 원대까지를 기록한 기전체(紀傳體) 역사서다. 이 책은 이탁오가 지선원에 체류하던 십수 년 동안 저술한 것이다. 서두의 〈장서 세기열전 총목전론〉(藏書世紀列傳總目前論)에서 시비와 선악에는 정해진 것이 없고, 전부 상대적, 병존적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명대(明代)의 『서유기』의 바리에이션 중 하나로 『이탁오선생비평서유기(李卓吾先生批評西遊記)』가 있는데, 이것은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이탁오(李卓吾)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한 것이다.
7. 평가
이지는 주류 유교 사상에 도전하고 독자적인 사상을 펼쳤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는 양명학의 영향을 받아 실천적인 지식과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했으며, 불교 사상에도 심취하여 유교의 권위주의를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당시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그의 저서 《분서(焚書)》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부정하고 파격적인 주장을 담고 있어 큰 논란을 일으켰다. 결국 그는 이단적인 사상으로 사회를 기만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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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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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Li Zhi (1527–1602): A Confucian Feminist of Late-Ming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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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A Book to Burn & a Book to Keep (Hidden): Selected Writings of Li 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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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The Origins and Impact of Literati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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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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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末の文人李卓吾 中国にとって思想とは何か
中央公論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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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公論社
199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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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이탁오 평전
글항아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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