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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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토 노에는 일본의 여성 해방 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로, 1895년에 태어나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발생한 아마카스 사건으로 사망했다. 그는 여성 문학 잡지 '청탑'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며 자유 연애, 매춘 합법화 등 사회 개혁을 주장했으며, 엠마 골드만의 저서를 번역하는 등 아나키즘 사상을 일본에 소개했다. 또한, 오스기 사카에와 함께 아나키즘 운동을 펼치며 여러 저서를 공저했으나, 1923년 오스기 사카에, 그의 조카와 함께 군경에 체포되어 살해당했다. 이토 노에는 영화, 드라마, 소설 등 다양한 형태로 재조명되며, 그의 삶과 사상은 현재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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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노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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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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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95년 1월 21일 |
출생지 | 후쿠오카, 일본 |
사망일 | 1923년 9월 16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
배우자 | 츠지 준 |
직업 | |
직업 | 작가, 번역가, 편집자, 부인 해방 운동가, 무정부주의자 |
활동 기간 | |
활동 기간 | 1914년 - 1923년 |
언어 | |
언어 | 일본어 |
국적 | |
학력 | |
모교 | 우에노 고등 여학교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스에마츠 후쿠타로 (1912년 - 1913년) 츠지 준 (1915년 - 1923년) |
파트너 | 오스기 사카에 |
자녀 | 이치, 류지, 마코, 에마(사치코), 에마(에미코), 루이즈(루이), 네스토르 |
2. 생애
일본의 아나키스트이자 여성 해방 운동가인 이토 노에는 1895년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나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혼란 속에서 헌병대에 의해 학살당하기까지, 짧지만 격동적인 삶을 살았다.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도 학업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않고 도쿄로 상경하여 우에노 고등 여학교에 진학했다. 재학 중 영어 교사였던 츠지 준과 만나 1912년 졸업 후 동거를 시작했고, 이후 두 아들을 낳고 1915년 정식으로 결혼했다.
1912년경 히라츠카 라이초의 권유로 여성 문학 단체 청탑사에 참여했으며, 1915년에는 잡지 ''청탑''의 편집 겸 발행인이 되어 여성 문제에 대한 급진적인 논의를 이끌었다. 이 시기 엠마 골드만 등 해외 사상가들의 글을 번역 소개하기도 했다.
1916년 츠지 준과 헤어진 후, 아나키즘 운동가 오스기 사카에와 만나 연인이자 활동 동지로서 관계를 맺었다. 이들은 자유 연애를 실천하며 함께 저술 및 출판 활동을 통해 아나키즘 사상을 전파했으나, 이는 히카게차야 사건과 같은 갈등을 낳기도 했다. 1921년에는 사회주의 여성 단체 적란회 결성에 참여하고 강연 활동을 펼치는 등 여성 해방 운동과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3년 간토 대지진 발생 후 사회 혼란이 극심해진 가운데, 9월 16일 오스기 사카에, 그의 어린 조카와 함께 헌병대에 의해 불법적으로 연행되어 살해당했다(아마카스 사건). 당시 그녀의 나이는 28세였다.
2. 1. 유년기 및 교육
이토 노에는 1895년 1월 21일, 일본 후쿠오카현 이토시마군 이마주쿠 촌 (현: 후쿠오카시 니시구 이마주쿠)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은 본래 "요로즈야"라는 해산물 도매상을 운영했으나, 노에가 태어날 무렵에는 이미 몰락한 상태였다. 아버지 카메키치(1866년생)는 귀면와를 만드는 기와 장인이었으나 방탕하고 자존심이 강해 일에 성실하지 않았고, 어머니 무메(1867년생)가 염전 일용직이나 농사일을 도우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노에는 7남매 중 셋째이자 장녀였다.어린 시절, 노에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집안 사정으로 숙모 마츠의 집으로 보내졌다. 어머니 무메는 훗날 노에를 남의 집에 맡긴 것을 여러 번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1909년 (메이지 42년), 슈젠지 고등 초등학교를 졸업한 노에는 약 9개월간 지역 우체국에서 일하며 가계를 도왔고, 이 시기 잡지에 시와 단가를 투고하기도 했다. 같은 해 여름, 도쿄에서 온 친척을 만나면서 도쿄 생활에 대한 동경을 키웠고, "훌륭한 인물이 되어 은혜를 갚겠다"는 간절한 편지로 삼촌을 설득하여 그해 말 도쿄로 가게 되었다.
도쿄로 상경한 이듬해, 노에는 열심히 공부하여 우에노 고등 여학교 (현: 우에노 학원 고등학교) 4학년 편입 시험에 합격했다. 특히 작문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이 학교에서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우고 서양 및 일본 작가들의 진보적인 사상에 깊이 매료되었다. 또한, 영어 교사로 부임한 츠지 준을 만나게 되었다.
1910년 여름 방학, 고향에 돌아간 노에는 가족의 압력으로 스에마쓰 후쿠타로와의 결혼을 승낙하게 된다. 이는 그녀가 도쿄에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한 조건이었다. 노에는 스에마쓰의 재정 지원으로 학비를 충당하며 결혼식을 올리고 다시 도쿄로 돌아왔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를 갈망했던 노에는 이 관계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1912년 (메이지 45년·다이쇼 원년) 학교를 졸업하고 귀향한 노에는, 전년도 여름 자신도 모르게 스에마쓰가와 약혼 및 가(假)결혼까지 치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충격을 받고 스에마쓰가에 들어갔으나 8일 만에 집을 뛰쳐나와 다시 도쿄로 향했다. 그녀는 학창 시절 호감을 가졌던 전직 교사 츠지 준에게 의탁하여 그의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이 일로 츠지 준은 교사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노에와 츠지 준의 관계는 깊어졌고, 두 사람은 아들 마코토(1914년 1월 20일 출생)와 류지(1915년 8월 10일 출생)를 낳았다. 그들은 1915년 7월에 정식으로 결혼했으며, 이들의 관계는 약 4년간 지속되었다.
2. 2. 츠지 준과의 만남과 결혼
1911년 봄, 우에노 고등 여학교 4학년으로 편입한 이토 노에는 영어 교사였던 츠지 준을 만났다. 같은 해 여름, 노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가 정한 약혼자 스에마츠와 결혼식을 올리고 도쿄로 돌아왔다. 당시 가난했던 노에의 학비는 약혼자 측에서 지원해주었다.1912년 졸업 후 귀향한 노에는 이미 전년도 여름에 자신도 모르게 약혼자와의 가(假)결혼이 치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지못해 약혼자의 집에 들어갔으나, 8일 만에 집을 뛰쳐나와 다시 도쿄로 향했다. 도쿄에서 노에는 재학 시절 호감을 가졌던 츠지 준과 그의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츠지 준은 노에의 딱한 사정을 외면할 수 없었고, 노에를 돕겠다는 결심이 학교 측에 알려지자 교장으로부터 학교를 그만두라는 요구를 받았다. 당시 월급 30JPY~40JPY 정도의 박봉으로 가족을 부양하던 츠지 준은 즉시 교사직을 그만두었다. 두 사람은 1915년 7월 혼인 신고를 했다.
츠지 준과의 사이에서 노에는 두 아들을 낳았다. 장남은 훗날 시인이 된 츠지 마코토(辻 まこと, 1913-1975)이고, 차남 류지(流二, 1915-1998)는 다른 집에 입양되어 와카마쓰 류지(若松 流二)가 되었다. 류지는 요코하마의 무역 회사에 다니며 요코하마 전수 상업고등학교 야간부에서 공부했고, 이후 일본우선의 외양 항로 화물선 선원이 되었다가 징병되어 해군 수송선 기관원으로 복무했다. 종전 후에는 홋카이도 개척 이민단에 참여하여 히다카에서 개척 농장 일을 했다. 류지는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고, 만년에는 요코하마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그는 형 마코토와 교류했으며,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노에는 류지의 양가에 축하 옷을 보내기도 했으나, 류지는 주변에 어머니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16년 4월, 노에는 츠지 준과 이별하고 가족과 직장을 떠났다. 이후 아나키즘 운동가 오스기 사카에와 관계를 맺게 된다.
2. 3. 청탑사(青鞜社) 활동
1912년 6월, 이토 노에는 쓰지 준의 권유로 히라츠카 라이초를 만났고, 같은 해 10월경부터 히라츠카 등이 이끄는 여성 문학 단체 청탑사(青鞜社 ''세이토샤'')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요사노 아키코, 오카모토 카노코 등 당대의 "새로운 여성"들과 교류하며 영향을 받았다.1915년, 이토는 경영난에 처해 있던 청탑사의 기관지 ''청탑''(Seitō)의 편집 및 발행 업무를 히라츠카로부터 넘겨받았다.[4] 그녀는 "무주의, 무규칙, 무방침"을 모토로 내걸고, 기존의 엘리트 중심 문예지 성격에서 벗어나 일반 여성들에게도 지면을 개방하며 ''청탑''을 여성 문제에 대한 평론과 논쟁의 장으로 바꾸어 나갔다. 편집장으로서 이토는 낙태, 매춘, 자유 연애, 모성 등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주제들에 대한 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1]
이토의 편집 하에 ''청탑''은 더욱 비판적이고 급진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고, 이는 일본 정부의 탄압을 불러왔다. 정부는 국체(국가 통치 체제)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잡지 발행을 금지했는데, 이는 정략결혼 비판, 낙태 합법화 주장 등 당시 사회 통념에 도전하는 내용 때문이었다.[1] 또한 이 시기 이토는 야마카와 키쿠에와 매춘 합법화 문제를 두고 지면 논쟁을 벌였으며,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근거로 합법화를 주장했다.[1] 중류 계급 부인들이 주도한 유곽 폐지 운동(곽청회)에 대해서는 매춘부의 현실을 외면한 위선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1]
사회 비평과 소설 집필 외에도, 이토는 미국의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의 저작("여성 해방의 비극" 등)을 비롯한 사회주의 및 아나키즘 관련 글들을 번역하여 소개했다.[1] 아시오 광독 사건과 같은 사회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으로 인한 판매 방해와 자금난이 겹치면서 ''청탑''은 1916년 2월호를 마지막으로 무기한 휴간에 들어갔다.[4] ''청탑'' 폐간 이후 이토는 무정부주의(아나키즘)에 더욱 공감하며 오스기 사카에와 함께 활동하게 된다.[4]
2. 3. 1. 주요 기고 내용
이토 노에는 1912년 10월경부터 히라츠카 라이초 등이 만든 여성 문학 그룹 청탑사에 참여하며 요사노 아키코, 오카모토 카노코 등 당대의 "새로운 여성"들과 교류했다. 1915년에는 페미니즘 잡지 ''청탑''(Seitō)의 편집 및 발행 업무를 히라츠카로부터 넘겨받아 1916년까지 운영하며 총 61편의 글을 기고했다.[1][4] ''청탑'' 창립자인 히라츠카 라이초는 이토를 강렬하고 자연스러운 감성을 지닌 작가로 평가했다. 이토는 초기 기고작 "동쪽의 해변" 등에서 "불어라, 저것 봐라, 바람아, 폭풍아"와 같이 강렬한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는 "원시, 여성은 참으로 태양이었다"고 노래한 히라츠카와는 대조적이었다. 또한 이 시기 미국의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의 "여성 해방의 비극"을 번역하기도 했다.[1]

편집장으로서 이토는 "무주의, 무규칙, 무방침"을 내걸고 엘리트 여성뿐만 아니라 일반 여성에게도 지면을 개방하여, ''청탑''을 문예 잡지에서 여성 문제에 대한 평론과 논쟁의 장으로 변화시켰다.[4] 그녀는 낙태, 매춘, 자유 연애, 모성 등 광범위한 주제에 대한 논의를 포용했으며, 1916년 7월호 표지에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비판에 응수하며 ''청탑''을 "모든 여성을 위한 잡지, 이념과 철학이 없는 잡지"로 만들겠다는 "반(反) 선언문"을 싣기도 했다.[1]
이토의 편집 하에 ''청탑''은 더욱 급진적인 성향을 띠었고, 이로 인해 일본 정부는 국체(국가 통치 체제)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총 다섯 차례 잡지 발행을 금지했다. 금지된 호에는 정략결혼 비판, 낙태 합법화 주장, 성애 묘사, 사랑을 위한 결혼 촉구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예를 들어 1914년 2월호는 이토의 단편 소설 "탈출"(Shuppon)이 정략결혼에서 벗어나려다 배신당하는 여성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이유로, 1915년 6월호는 낙태 합법화 주장 기사 때문에 금지되었다.
이토는 ''청탑'' 기고글을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신념과 경험을 표현했다. 정략 결혼의 문제점, 자유 연애에 대한 갈망, 억압된 성적 본능 등은 그녀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였다. 1914년 단편 "미혹"(Mayoi)은 당시 쓰지 준과의 관계를, 소설 "전기"(Tenki)는 사회 운동 참여와 결혼 사이의 갈등이라는 자신의 고민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토는 사회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14년부터 1916년까지 야마카와 키쿠에와 매춘 합법화 여부를 두고 지면 논쟁을 벌였는데, 이토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근거로 낙태 합법화와 마찬가지로 매춘 합법화를 지지했다. 그녀는 당시 일본 사회가 여성에게 충분한 경제적 기회를 제공하지 않아 많은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매춘부가 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들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중류 계급 부인들이 주도한 유곽 폐지 운동(곽청회)을 매춘부의 현실을 외면한 위선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1]
이토는 점차 무정부주의에 공감하며 오스기 사카에와 가까워졌고, ''청탑'' 편집은 약 1년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4] ''청탑''은 자금난과 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1916년 2월호를 마지막으로 무기한 휴간에 들어갔다.[4]
2. 3. 2. 사회적 영향
이토 노에는 1915년 페미니즘 예술-문화 잡지인 ''청탑''(Seitō) 제작에 참여하며 청탑사(青鞜社 ''세이토샤'')에 합류했고, 1916년까지 글을 기고했다. 그녀는 편집장으로 활동한 마지막 해 동안 내용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며, "낙태, 매춘, 자유 연애 및 모성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를 위한 지면을 제공했다. ''청탑''의 창립자인 히라츠카 라이초는 이토를 강렬하고 자연스러운 감성을 지닌 작가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토가 편집자로 활동하던 시기는 순탄치 않았는데, 일부 독자들은 젊은 편집자가 잡지를 제대로 이끌지 못할 것이라 우려했다. 1916년 7월호 표지에서 이토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독자들의 비판적인 시각을 언급하며 "모든 여성을 위한 잡지, 이념과 철학이 없는 잡지"를 만들겠다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글을 게재했다.[1] 이토의 주도로 ''청탑''은 단순한 문예 잡지를 넘어 여성 문제에 대한 평론과 논쟁의 장으로 변모해갔다.이토의 편집 아래 ''청탑''은 점차 급진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고, 이는 당시 일본 정부의 검열과 탄압을 불러왔다. 정부는 ''국체(국가 통치 체제)''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청탑''의 발행을 금지했다. 1914년 2월호는 이토가 쓴 단편 소설 "탈출"(Shuppon) 때문에 금지되었는데, 이 소설은 정략결혼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연인에게 배신당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1915년 6월호는 일본 내 낙태 합법화를 촉구하는 기사 때문에 발행이 금지되었다.
이 외에도 세 차례 더 발행 금지 조치를 당했는데, 각각 여성의 성적 경험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에로틱 단편 소설, 정략결혼의 파탄을 다룬 소설, 그리고 여성들에게 사랑을 위해 결혼하라고 촉구하는 "세계 여성에게"라는 제목의 기사가 문제가 되었다. 이토의 소설들은 정략결혼에 대한 비판, 자유 연애에 대한 갈망, 억압된 성적 본능 등 그녀 자신의 정치적, 개인적 신념과 경험을 반영하며 당시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억압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예를 들어, 1914년 단편 소설 "미혹"(Mayoi)은 전직 교사와 동거하게 된 여학생이 교사의 과거 연애 사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로, 쓰지 준과의 관계를 암시하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소설 "전기"(Tenki)에서는 주인공이 사회 운동에 이끌리지만 결혼이 장애물로 작용하는 등 이토 자신의 고민을 투영했다. 그녀는 ''청탑''에 총 61편의 글을 기고하며 자신의 신념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1]
이토의 편집 하에 ''청탑''은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였다. 1914년부터 1916년까지 이토는 또 다른 페미니스트인 야마카와 키쿠에와 매춘 합법화 문제를 두고 지면에서 논쟁을 벌였다. 이토는 낙태 합법화를 지지했던 것과 같은 논리로 매춘 합법화를 주장했는데, 여성의 몸은 오직 여성 자신의 것이며 국가가 여성의 몸에 대해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당시 일본 사회 시스템이 여성에게 충분한 경제적 기회를 제공하지 않아 많은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매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생존을 위한 선택에 대해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토는 사회 비평과 소설 쓰기 외에도 미국의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의 저작(''여성의 해방의 비극'' 등)을 비롯한 사회주의 및 아나키즘 관련 글들을 영어에서 일본어로 번역하며 사상적으로도 깊이를 더해갔다. 그녀는 아시오 광독 사건 등 사회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으로 유통업자들이 잡지 배포를 꺼리게 되면서 자금난에 부딪혔고, 결국 ''청탑''은 1916년 2월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을 중단(무기 휴간)하게 되었다.[4]
''청탑'' 폐간 이후 이토는 아나키즘에 더욱 공명하여 오스기 사카에와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1921년 결성된 사회주의 여성 단체 적란회에 고문 자격으로 참여하고 강연 활동을 펼치는 등 여성 해방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간토 대지진 이후의 혼란 속에서 이토 노에의 활동은 비극적으로 끝나게 된다. 계엄령이 선포된 1923년 9월 16일, 이토는 오스기 사카에, 그의 조카 타치바나 소이치와 함께 헌병대에 의해 불법적으로 연행되어 살해당했다(아마카스 사건). 훗날 발견된 사인 감정서에 따르면, 이토와 오스기는 늑골이 여러 개 부러지는 등 심한 폭행을 당한 후 살해된 것으로 밝혀져, 군법 회의에서 아마카스 마사히코 등이 "고통 없이 죽었다"고 한 진술이 거짓임이 드러났다. 연구에 따르면 학살 명령을 내린 것은 아마카스가 아니라 헌병대 상층부 또는 대일본 제국 육군 상층부였다고 추정된다. 이 사건은 희생자 중 한 명인 타치바나 소이치가 미국 국적을 가진 이중 국적자였기 때문에 주일본 미국 대사관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고, 이는 일본 정부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며 사건의 진상이 일부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사후 이토 노에는 오랫동안 고향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하고 묘가 훼손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5]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사상과 활동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이데 후미코, 세토우치 하루미 등에 의한 연구와 평전 출간, 2000년대 정본 이토 노에 전집 간행 등을 통해 그녀의 삶과 사상이 재조명되었다. 사후 100년이 지난 2023년에는 그녀의 출생지인 후쿠오카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관련 행사와 기획전이 열리는 등, 일본 근대 여성 운동과 아나키즘 운동에 끼친 이토 노에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7][8] 현재 그녀의 묘는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아오이구 구쓰야에 있는 "구쓰야 영원"에 안장되어 있다.[6]
2. 4. 오스기 사카에(大杉栄)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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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노에는 1916년 아나키즘 운동가인 오스기 사카에를 만났다. 두 사람은 정치 활동과 저술 활동을 함께하며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이들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 연애를 실천했다. 당시 오스기 사카에는 법적인 아내가 있었으며, 또 다른 여성주의자인 가미치카 이치코와도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이토는 오스기에 대한 감정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1916년 2월, 도쿄의 한 공원에서 오스기와 손을 잡고 산책하며 공개적으로 키스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 사회 통념상 매우 부도덕하고 충격적인 행동으로 여겨져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 오스기는 이 사실을 이치코에게 이야기했고, 이치코는 질투심을 느꼈다.
이후 이토는 오스기를 만나기 위해 이치코의 집까지 찾아갔고, 그곳에서 오스기를 사이에 둔 두 여성 간의 격렬한 다툼이 벌어졌다. 오스기는 두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며 상황을 정리하려 했지만, 세 사람의 복잡한 관계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1916년 11월, 오스기가 이토와 함께 시골 여관에서 밤을 보낸 사실을 알게 된 이치코는 질투심을 참지 못하고 다음 날 아침 여관을 나오던 오스기를 칼로 공격하여 목에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 이 사건은 '히카게차야 사건(日蔭茶屋事件)'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오스기는 병원에 입원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법적인 아내는 그를 떠났다.
히카게차야 사건 이후에도 이토와 오스기는 관계를 지속하며 사실상의 부부로 남은 생을 함께했다. 비록 법적으로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네 명의 아이를 낳았다.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연애를 넘어, 아나키즘 사상을 공유하고 함께 출판 활동을 하는 등 정치적인 동지 관계이기도 했다.[2]
2. 4. 2. 아나키즘 활동
1916년 오스기 사카에를 만나면서 이토의 아나키즘 활동은 본격화되었다. 두 사람은 정치 및 저술 활동을 함께했으며, 부부로서 자유 연애를 실천했지만 법적인 결혼은 하지 않았다. 당시 오스기는 다른 여성과 결혼한 상태였고, 또 다른 여성주의자인 가미치카 이치코와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1916년 2월, 이토는 도쿄의 한 공원에서 오스기와 공개적으로 키스하며 관계를 드러냈다. 당시 일본 사회에서 연인이 공공장소에서 손을 잡거나 키스하는 행위는 매우 부도덕하게 여겨졌기에, 이들의 행동은 큰 파장을 일으키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는 기존의 사회 규범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사건 이후, 오스기를 둘러싼 이토와 이치코 간의 갈등은 격화되었다. 이토가 오스기와 이치코의 대화를 엿듣고 끼어들면서 세 사람의 관계는 더욱 복잡해졌고, 결국 질투심에 사로잡힌 이치코가 1916년 11월, 한 여관에서 오스기를 칼로 공격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오스기는 이 사건으로 입원했고, 그의 법적 아내는 그를 떠났다.
이후 이토와 오스기는 남은 생을 함께하며 네 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연인을 넘어, 이토가 오스기의 출판 파트너로서 함께 활동하는 정치적 동지 관계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함께 글을 쓰고 출판하며 아나키즘 사상을 발전시켰고, 이러한 활동 때문에 국가와 비평가들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1921년에는 오스기와 함께 발행한 저널 ''노동 운동''에 글을 기고하는 등 활발한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2]
1916년부터 오스기와 함께 생활하며 이토는 여성주의 단체 내에서도 점차 두각을 나타내며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보여주었다. 아나키스트로서 이토는 일본의 기존 정치 시스템, 특히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체 사상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토는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작은 실천들을 통해 국체를 약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아나키즘이 "일상 생활에서" 구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대다수 일본인이 국가에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천황을 무조건적으로 신성시하는 현실을 비판하며, 비판적 사고를 가로막는 사회 구조에 대해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국체에 대한 이토의 도전적인 태도는 경찰의 끊임없는 감시와 탄압을 불러왔고, 그는 경찰의 방해 때문에 자유로운 외출조차 어려워 집이 감옥처럼 느껴진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2. 5. 아마카스 사건(甘粕事件)과 죽음
간토 대지진 직후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아나키스트 활동가였던 이토 노에는 오스기 사카에, 그리고 오스기의 어린 조카 무네카즈와 함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1923년 9월 16일, 이들은 아마카스 마사히코 중위가 이끄는 헌병 부대에 의해 연행되어 살해되었다. 당시 이토 노에의 나이는 28세였다.저명한 활동가 두 명과 어린 아이까지 함께 살해된 이 사건은 아마카스 사건으로 불리며,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충격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는 국가 권력에 의한 잔혹한 폭력의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되었다.
2. 5. 1. 진상 규명 노력
간토 대지진 직후의 혼란 속에서 이토 노에, 오스기 사카에, 그리고 오스기의 6살 조카 무네카즈(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출생)는 1923년 9월 16일, 헌병으로 알려진 군경 부대에 체포되었다. 작가 세토우치 하루미에 따르면, 이들은 아마카스 마사히코 중위가 이끄는 부대에 의해 목 졸려 살해된 후 버려진 우물에 던져졌다.이후 우물에서 시신을 수습하여 검사한 결과, 오스기와 이토의 시신에는 심하게 구타당한 흔적이 있는 멍 자국이 발견되었다. 한편, 문학 연구자 패트리샤 몰리는 이토와 오스기가 감옥 안에서 목 졸려 살해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이토 노에는 28세였다.
어린 조카와 함께 저명한 아나키스트들이 살해된 이 사건은 아마카스 사건으로 알려지며 일본 사회에 큰 충격과 분노를 일으켰다. 아마카스 마사히코는 살인 혐의로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겨우 3년 만에 석방되었다.
이토 노에와 오스기 사카에는 시즈오카시 아오이구에 있는 구츠노야 묘지에 함께 묻혔다.
3. 사상
이토 노에는 20세기 초 일본 사회의 인습에 도전하며 아나키즘, 페미니즘, 자유 연애 사상을 통합적으로 실천한 사상가이자 활동가였다. 후쿠오카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우에노 고등 여학교에서 교육받는 과정에서 츠지 준과 같은 인물들을 만나며 새로운 사상에 눈떴다. 특히 여성 문학 동인 "청구사"에 참여하고 잡지 "청구"의 편집을 맡으면서 초기 페미니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녀는 단순한 문예 활동을 넘어, 성매매 여성 문제 등 소외된 여성들의 현실에 주목하며 기존 여성 운동의 한계를 비판하고 보다 급진적인 여성 해방을 주장했다.
이후 아나키즘 운동의 중심 인물인 오스기 사카에와의 만남은 그녀의 사상과 삶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노에는 오스기와 함께 자유 연애를 실천하며 기존의 결혼 제도와 가부장제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이는 히카게차야 사건과 같은 사회적 파문과 비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노에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오스기와의 동반자 관계 속에서 "문명 비평", "노동 운동" 등의 잡지를 창간하고 다수의 저작을 공동으로 발표하며 아나키즘 사상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
특히 "자유 모권으로"와 같은 글을 통해 결혼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여성의 주체적인 삶과 모성을 주장했으며,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 단체인 적란회 결성에 참여하는 등 사상을 구체적인 사회 운동으로 연결시키고자 노력했다. 이토 노에의 사상은 개인의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아나키즘을 바탕으로,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여성 억압의 문제를 제기하고, 자유 연애를 통해 인습적인 사회 규범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그녀의 삶과 사상은 당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시대를 앞서간 급진성으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해석과 평가를 낳고 있다.
3. 1. 아나키즘
1916년 4월, 츠지 준과 헤어진 노에는 다음 달부터 아나키즘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던 오스기 사카에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고, 같은 해 가을부터 동거에 들어갔다. 당시 오스기에게는 사실혼 관계의 호리 야스코와 연인 관계인 도쿄 니치니치 신문 기자 카미치카 이치코가 있었다. 오스기가 내세운 자유 연애주의는 사회적 비판에 직면했으며, 노에의 합류로 복잡한 사각 관계가 형성되었다.


결국 1916년 11월, 가나가와현 하야마의 여관 '히카게차야'에서 이치코가 오스기를 칼로 찌르는 히카게차야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오스기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던 이치코가 구속되면서 오스기와 노에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고, 노에가 참여하던 잡지 "세이토"도 이 시점에 폐간되었다.
사건 이후 오스기는 야스코와 헤어졌고, 이치코는 살인 미수 혐의로 수감되었다. 노에는 오스기와의 관계를 이어갔으나, 주변으로부터 "악마"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시선을 역이용하여 첫 딸의 이름을 '마코(魔子, 악마의 아이)'라고 짓기도 했다(후에 '마코(真子)'로 개명). 가난과 당국의 감시 속에서도 오스기와의 동반자 관계는 계속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1918년 "문명 비평", 1919년 "노동 운동" 등의 잡지를 창간했으며, "[표트르 크로포트킨]] 연구", "가난의 명예", "두 혁명가"와 같은 저작들을 공동으로 발표하며 아나키즘 사상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
노에는 1921년 "부인 노동자의 각성"을 집필하고, 같은 해 "해방"지에 기존의 결혼 제도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자유 모권으로"를 발표하며 시대를 앞서 여성 해방 운동의 담론을 제시했다. 또한 사회주의 여성 단체인 적란회 결성에 참여하여 야마카와 키쿠에 등과 함께 활동했다.
1922년 오스기에게 베를린에서 열리는 국제 아나키스트 대회 초청장이 도착하자, 노에는 잠시 아이들과 고향에 머물렀으나 오스기의 해외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막내딸 루이즈만 데리고 다시 돌아왔다. 오스기는 같은 해 12월 일본을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3. 2. 페미니즘
1912년 6월, 츠지 준의 권유로 히라츠카 라이초를 만나 교류를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경부터 히라츠카 라이초 등이 이끌던 여성 문학 집단 "청구사"에 참여하며 요사노 아키코, 하세가와 시구레, 오카모토 카노코 등 당대의 "새로운 여성"들과 교류하고 영향을 받았다. 청구사의 기관지 "청구"에 시 "동쪽의 해변" 등을 발표하며 두각을 나타냈는데, 히라츠카가 "원시, 여성은 참으로 태양이었다"라고 노래한 것과 달리, 노에는 "불어라, 저것 봐라, 바람아, 폭풍아"라고 노래하며 다른 면모를 보였다. 이 시기 미국의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의 "부인 해방의 비극"을 번역하고, 아시오 광독 사건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사회 문제에 대한 인식을 넓혀갔다.1915년에는 여러 차례 판매 금지 처분을 받으며 경영난에 빠진 "청구"의 편집 및 발행 업무를 히라츠카로부터 넘겨받았다.[4] 노에는 "무주의, 무규칙, 무방침"을 모토로 삼아, 기존의 엘리트 여성 중심에서 벗어나 일반 여성들에게도 지면을 개방하며 잡지의 성격을 바꾸어 나갔다. 이를 통해 "청구"는 단순한 문예 잡지를 넘어 여성 문제에 대한 평론과 논쟁의 장으로 변모했다. 또한, 당시 중류 계급 부인들이 주도한 곽청회의 유곽 폐지 운동에 대해, 성매매 여성들의 현실적인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도덕적 잣대만을 들이대는 위선적인 행태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소외된 여성들의 목소리에 주목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 사상에 깊이 공감하고 오스기 사카에와 함께 활동하게 되면서, 노에는 "청구"의 편집을 1년여 만에 그만두었고, "청구"는 1916년 2월호를 마지막으로 무기한 휴간에 들어갔다.[4] 오스기와의 관계는 당시 사회 규범에 도전하는 자유 연애주의의 실천으로 이어졌으나, 이는 히카게차야 사건과 같은 갈등을 낳기도 했다.
1921년에는 "부인 노동자의 각성"을 집필했으며, 같은 해 "해방"지에 발표한 "자유 모권으로"에서는 결혼 제도의 한계를 비판하고 여성의 주체적인 모성을 주장하며, 이후 여성 해방 운동에서 제기될 결혼 제도 부정 논의를 수십 년 앞서 제기했다. 같은 해 4월에는 야마카와 키쿠에 등과 함께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 단체인 "적란회" 결성에 참여하여 여성 해방을 위한 사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3. 3. 자유 연애 사상
1912년 (메이지 45년·다이쇼 원년) 우에노 고등 여학교 졸업 후 귀향했을 때, 부모가 자신도 모르게 스에마츠 가문의 남성과 약혼시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년 여름에 이미 임시 결혼식까지 치러진 상태였고, 노에는 마지못해 스에마츠 가문에 들어갔으나 8일 만에 집을 뛰쳐나와 다시 상경했다. 이후 재학 시절 호감을 가졌던 영어 교사 츠지 준과 그의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혼인 신고는 1915년 7월). 이는 당시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결정이었으며, 츠지 준은 노에를 돕기 위해 교사직을 그만두어야 했다.1916년 (다이쇼 5년) 4월, 노에는 츠지 준과 헤어지고 가족과 직장을 버렸다. 다음 달부터 아나키즘 운동가 오스기 사카에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고, 가을에는 동거에 들어갔다. 그러나 오스기에게는 사실혼 관계의 아내 호리 야스코와 애인인 신문 기자 카미치카 이치코가 이미 있었다. 오스기의 자유 연애주의는 비판의 대상이었고, 노에가 합류하면서 사각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 복잡한 관계는 결국 1916년 11월, 카미치카 이치코가 가나가와현 하야마의 여관 '히카게차야'에서 오스기를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히는 히카게차야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카미치카는 투옥되었고, 오스기는 호리 야스코와 헤어졌다.
결과적으로 노에는 오스기와의 관계에서 '승리'했지만,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고 사회적으로 비난받았다. 1917년 9월 장녀를 출산하자 주변에서는 '악마의 자식'이라며 손가락질했고, 노에는 이를 역이용해 딸의 이름을 魔子|마코일본어(후에 真子|마코일본어로 개명)라고 지었다. 가난과 관헌의 감시 속에서도 오스기와의 동거 생활은 사상적으로 충실했으며, 두 사람은 "문명 비평"(1918), "노동 운동"(1919) 등의 잡지를 함께 창간하고, "표트르 크로포트킨 연구", "가난의 명예", "두 혁명가" 등 다수의 글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1921년 (다이쇼 10년) 셋째 딸 에마(후에 笑子|쇼코일본어로 개명)를 출산한 직후, 노에는 잡지 解放|해방일본어(1920년 4월호)에 기존의 결혼 제도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글 自由母権へ|자유 모권으로일본어를 발표했다. 이는 전후 여성 해방 운동이 본격적으로 제기한 결혼 제도 부정을 약 50년 앞서 주장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같은 해 4월에는 야마카와 키쿠에 등과 함께 사회주의 여성 단체인 적란회 결성에 참여하며 여성 해방 사상을 실천에 옮기고자 했다.
노에의 자유 연애 사상과 파격적인 삶의 방식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는 그녀 사후에도 이어져 고향에서는 묘가 훼손되는 일이 반복되기도 했다[5]. 지역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그녀를 언급하기 꺼렸으나, 사후 100년이 지난 2023년 무렵에는 재평가 움직임이 일고 있다[7].
4. 저작 및 번역 활동
이토 노에는 작가이자 번역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녀의 저술 활동은 여성 잡지 『청구』 편집 참여를 계기로 본격화되었으며, 이후 아나키즘 사상에 기반한 평론과 수필을 다수 발표했다. 특히 오스기 사카에와 함께 『두 명의 혁명가』와 같은 저작을 공동으로 집필하기도 했다. 그녀의 글은 당시 일본 사회의 인습에 도전하며 여성 해방, 개인의 자유, 사회 구조 비판 등 진보적인 문제의식을 담고 있었다.
번역 분야에서도 이토 노에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서구의 급진적인 사상가들의 저작을 일본에 소개했는데, 특히 미국의 아나키스트이자 페미니스트인 엠마 골드만의 저작을 다수 번역하여 일본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골드만의 『여성 해방의 비극』 번역은 그녀의 대표적인 번역 성과로 꼽힌다. 이 외에도 조지 버나드 쇼, 장앙리 파브르 등의 작품을 번역하며 다양한 사상과 문학을 소개하는 데 기여했다.
이토 노에의 저작과 번역물은 그녀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이후 여러 차례 전집 형태로 출간되어, 그녀의 사상과 문학 세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녀의 활동은 일본 초기 페미니즘과 아나키즘 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남겼다.
4. 1. 주요 저작 목록
- 1914년 『여성 해방의 비극』 (엠마 골드만 저, 이토 노에 역, 시운도 서점)
- 1922년 『두 명의 혁명가』 (오스기 사카에, 이토 노에 공저, 아루스)
- 1925년 - 1926년 『오스기 사카에 전집』 별책 (이토 노에 전집), 오스기 사카에 전집 간행회
- 내용 세목: 창작, 감상과 수필, 사실과 비평, 번역 소설: 소수와 다수・결혼과 연애・여성 해방의 비극 (엠마 골드만 저, 이토 노에 역), 엠마 골드만 전
- 1970년 『이토 노에 전집 상』, 가쿠게이 서림, ISBN 4905640938
- 세목: 「잡음」, 「동요」, 「미혹」, 「거지의 명예」, 「전기」, 「백치의 어머니」, 「어떤 남자의 타락」, 「불을 지르는 히코시치」, 「제멋대로」, 「가출」, 해설: 이토 노에 소전 (이데 후미코), 해설 대담: 자신에게 산 사람 (세토우치 하루미, 아키야마 키요시), 연보
- 1970년 『이토 노에 전집 하』, 가쿠게이 서림, ISBN 4905640946
- 세목: 청구사 시대 전기 (1912-14년), 청구사 시대 후기 (1915-16년), 아나키즘 시대 (1917-23년) 해제 (이데 후미코) 해설 대담 아나키즘을 사는 (다다 미치타로・아키야마 키요시)
- 1985년 1월 『두 명의 혁명가』 (오스기 사카에, 이토 노에 공저, 흑색 전선사)
- 아루스 다이쇼 13?년 간행의 복제
- 1985년 11월 『거지의 명예』 (오스기 사카에, 이토 노에 공저, (총서 청도사의 여자들 제 2권), 후지 출판)
- 사회 문예 총서 3 (슈에이카쿠 다이쇼 9년 간행)의 복제
- 1986년 6월 『오스기 사카에・이토 노에 선집』 제 1권, 흑색 전선사
- 『크로포트킨 연구』
- 내용 세목: 크로포트킨 총서-무정부주의와 근대 과학, 크로포트킨의 생물학-상호 부조론, 크로포트킨의 사회학-인류사상의 전통・중세 길드의 이야기 오스기 사카에 저. 크로포트킨의 경제학-전원, 공장, 직장, 크로포트킨의 교육론-두뇌 노동과 근육 노동의 조화 이토 노에 저. 청년에게 호소・혁명의 연구・자유 합의-현 사회의 무정부・공산 식당 크로포트킨 저 오스기 사카에 역. 무정부의 사실 이토 노에 저. 주요 문헌: p183 - 185
- 1987년 5월 『오스기 사카에・이토 노에 선집』 제 8권, 흑색 전선사
- 『상호 부조론』 / 크로포트킨 저, 오스기 사카에 역
- 1988년 2월 『오스기 사카에・이토 노에 선집』 제 2권, 흑색 전선사
- 사색과 방법 생의 투쟁 자서 오스기 사카에 저 외 42편, 해설 오사와 마사미치 저
- 1988년 3월 『오스기 사카에・이토 노에 선집』 제 3권, 흑색 전선사
- 『사회적 개인주의』
- 내용 세목: 사회와 개인 사회적 개인주의 자서, 유일자-막스 슈티르너론, 의지의 교육-막스 슈티르너의 교육론 오스기 사카에 저. 생의 도덕 장 마리 귀요 저 오스기 사카에 역. 반역자의 심리 조르주 파랑트 저 오스기 사카에 역. 주관적 역사론-표트르 라브로프론, 근대 개인주의의 여러 모습, 사물의 생각, 다이쇼 5년 문단의 예상, 최근 사상계의 경향, 무정부주의의 팔 오스기 사카에 저. 필연에서 자유로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 오스기 사카에 역. 사적 사회관-고월군의 도전에 응하여 나의 사회관을 논함・나의 현대 사회관 오스기 사카에 저. 무정부주의와 조직 엠마 골드만 저 오스기 사카에 역. 성의 해방 수치와 정조・남녀 관계의 진화 오스기 사카에 저. 동물의 혼인과 가족 샤를 J.M. 르투르노 저 오스기 사카에 역. 여학생 - 스트린드베리 작・ 여성 해방의 비극・처녀와 정조와 수치와 - 노에 씨에게 주어서 옆에서 바 화산을 꾸짖음・남녀 관계에 관하여 - 아내에게 주어서 그녀에 대한 한 첩의 심정을 이야기하는 문・자크바랑에게 고백하여 여론에 답함 - 새로운 남녀의 한 쌍 오스기 사카에 저. 해설 오사와 마사미치 저. 불을 지르는 히코시치 이토 노에 저
- 1988년 4월 『오스기 사카에・이토 노에 선집』 제 4권, 흑색 전선사
- 『도덕의 창조』
- 내용 세목: 가정 잡지에서 불행의 신 오스기 사카에 저 외 78편 해설 아키야마 키요시 저
- 1988년 7월 『오스기 사카에・이토 노에 선집』 제 5권, 흑색 전선사
- 『노동 운동의 철학』
- 내용 세목: 노동 운동의 정신 노동 운동의 정신 오스기 사카에 저 외 37편. 해설 고마츠 류지 저. 그녀의 진실 - 나카조 유리코 씨를 논함・「어떤」아내에서 남편으로 이토 노에 저
- 1988년 12월 『오스기 사카에・이토 노E 선집』 제 6권, 흑색 전선사
- 『아나키스트가 본 러시아 혁명』
- 내용 세목: 러시아 혁명론 무정부주의자가 본 러시아 혁명 자서 오스기 사카에 저 외 27편. 해설 오사와 마사미치 저. 크로포트킨의 자서전에 나타난 러시아의 여성 운동 이토 노에 저
- 1988년 12월 『오스기 사카에・이토 노에 선집』 제 13권, 흑색 전선사
- 『어떤 여자의 재판』
- 내용 세목: 어떤 여자의 재판 야마카와 키쿠에론・자유 모권 쪽으로・어떤 여자의 재판・거지의 명예 이토 노에 저. 진화에 관하여 근대 과학의 경향-크로포트킨에 의한・창조적 진화-앙리 베르그손론・『종의 기원』에 관하여・생물학에서 본 개성의 완성・오카 박사의 생물학적 인생 사회관을 논함 오스기 사카에 저
- 1989년 4월 『오스기 사카에・이토 노에 선집』 제 7권, 흑색 전선사
- 『한 혁명가의 추억』 / 크로포트킨 저, 오스기 사카에 역
- 1989년 5월 『오스기 사카에・이토 노에 선집』 제 14권, 흑색 전선사
- 『오스기 사카에 서간집』
- 1989년 9월 『오스기 사카에・이토 노에 선집』 제 10권, 흑색 전선사
- 『자서전・죽어가는 재 속에서』
- 1989년 7월 『오스기 사카에・이토 노에 선집』 제 12권, 흑색 전선사
- 『문예 평론』
- 1996년 5월 『이토 노에 전집』 이토 노에 저, (총서 여성론 23), 다이쿠샤, ISBN 475680182X
- 오스기 사카에 전집 간행회 다이쇼 14년 간행의 복제
- 내용 세목: 창작 (잡음, 동요, 미혹, 미혹, 거지의 명예, 전기, 백치의 어머니, 어떤 남자의 타락, 불을 지르는 히코시치) 사실과 비평 (먹히는 여자, 계급적 반감, 무정부의 사실, 사카이 토시히코론, 자유 합의에 의한 결혼의 파멸) 번역 (소수와 다수・결혼과 연애・여성 해방의 비극 골드만 저, 엠마 골드만 전 히포트・아브에르 저), 부: 이토 노에 연표
- 1998년 2월 25일 오치아이 게이코 편 『여심』 (일본의 명수필 별권 84), 사쿠힌샤, ISBN 4878936649
- 「별거」에 대해 를 수록 (4권본 정본 이토 노에 전집에는 수록되지 않음)
- 2000년 3월 『정본 이토 노에 전집』 제 1권, 이토 노에 저, 이데 후미코, 호리키리 토시타카 편, 가쿠게이 서림, ISBN 4875170521
- 『창작』
- 내용 세목: 『청구』의 시대 (동쪽의 물가, 일기에서, 동요, 제멋대로, 가출, 미혹, 유서의 일부에서, 잡음), 『문명 비평』 이후 (전기, 거지의 명예, 미혹, 백치의 어머니, 감옥 삽화 면회인 대기소, 어떤 여자의 재판, 불을 지르는 히코시치, 어떤 남자의 타락), 해제: 오카노 사치에, 호리키리 토시타카 저
- 2000년 5월 『정본 이토 노에 전집』 제 2권, 이토 노에 저, 이데 후미코, 호리키리 토시타카 편, 가쿠게이 서림, ISBN 487517053X
- 평론・수필・서간 1
- 『청구』의 시대
- 2000년 9월 『정본 이토 노에 전집』 제 3권, 이토 노에 저, 이데 후미코, 호리키리 토시타카 편, 가쿠게이 서림, ISBN 4875170548
- 평론・수필・서간 2
- 『문명 비평』 이후
- 2000년 12월 『정본 이토 노에 전집』 제 4권, 이토 노에 저, 이데 후미코, 호리키리 토시타카 편, 가쿠게이 서림, ISBN 4875170556
- 번역
- 내용 세목: 여성 해방의 비극, 볼셰비키의 폭정 엠마 골드만 저, 워렌 부인의 직업 바나드 쇼 저, 과학의 불가사의 앙티・파브르 저, 오스기 사카에, 이토 노에 공역, 울림의 그림자 마츠코 저, 해제: 야마이즈미 스스무 저, 저작 목록, 연보
- 2001년 11월 『불어라, 가거라, 바람아, 폭풍아 이토 노에 선집』 이토 노에 저, 모리 마유미 편, 가쿠게이 서림, ISBN 4875170572[12]
- 2013년 5월 『노에 씨를 찾아서 - 정본 이토 노에 전집 보유・자료・해설』 호리키리 토시타카 편저, 가쿠게이 서림
- 2019년 『이토 노에의 편지』 (오스기 유타카 편, 도요샤)
4. 2. 번역 작품 목록
5. 평가 및 영향
이토 노에는 아나키즘과 여성 해방 운동에 헌신했던 인물로, 그의 급진적인 사상과 활동, 그리고 아마카스 사건으로 인한 비극적인 죽음은 사후 일본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비록 그의 활동은 갑작스럽게 중단되었으나, 후대의 연구와 창작 활동을 통해 재평가되고 있다. 그의 삶과 사상은 특히 여성 운동과 사회 운동 분야에서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이토 노에의 삶은 그의 가족에게도 깊은 영향을 남겼다. 츠지 준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츠지 마코토는 시인이 되었고, 차남 류지(와카마쓰 류지)는 입양되어 다른 삶을 살았다. 류지는 주변에 어머니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토로하기도 했으며, 마코토 역시 딸에게 어머니의 이름 '노에'를 붙이려 했으나 가족의 반대로 '노(野)' 자만 따서 '노부(野生)'라고 지었다는 일화는 그의 파격적인 삶이 가족에게 남긴 복잡한 감정을 보여준다.[11]
오스기 사카에와의 사이에서는 네 명의 자녀(마코, 에마(사치코), 에마(쇼코), 루이즈(루이))와 사산된 아들(네스토르)을 두었다. 자녀들의 이름은 각각 악마(마코), 엠마 골드만(에마), 루이즈 미셸(루이즈), 네스토르 마흐노(네스토르) 등에서 따온 것으로, 그의 사상적 지향을 드러낸다. 부모 사후 자녀들은 오스기의 여동생 부부나 노에의 삼촌 등 친척에게 맡겨져 길러졌다. 장녀 마코는 결혼 후 평범한 삶을 살았고, 차녀 사치코는 스게누마 고로와 결혼했다. 넷째 딸 이토 루이의 삶은 1997년 다큐멘터리 영화 "루이즈 그 여정"으로 만들어져 주목받기도 했다. 증손으로는 게임 시나리오 작가 쇼다 타카시가 있으며, 그는 자신의 작품에서 아마카스 사건을 모티브로 삼기도 했다.
5. 1. 재평가
이토 노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61년 이데 후미코가 『청탑 원시 여성은 태양이었다』의 한 장을 할애하면서 시작되었다. 1965년 4월부터는 세토우치 하루미(후의 자쿠초)가 문예춘추에 전기 소설 『미는 난조에 있다』를 연재하며 대중적 관심을 높였다.1976년 8월 26일, 아마카스 사건 당시의 "사인 감정서"가 발견되어 학살 직전 심한 폭행이 있었음이 밝혀지면서 사건의 잔혹성이 재조명되었다. 이후 1979년 10월에는 이데 후미코가 평전 『자유 그것은 나 자신 평전・이토 노에』를 간행했고, 1981년 1월부터는 세토우치 하루미가 다시 문예춘추에 『조화는 거짓이다』를 연재하며 노에의 삶을 깊이 다루었다.
2000년에는 『정본 이토 노에 전집』이 간행되어 그녀의 사상과 문학을 집대성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노에의 넷째 딸 이토 루이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루이즈 그 여정"(감독 후지와라 토모코)은 1997년 키네마 준보 문화 영화 부문 1위를 수상하며 노에의 가족사를 통해 그녀의 삶을 반추하게 했다.
2023년 서거 100주년을 맞아 출생지인 후쿠오카현 등지에서 다양한 추모 행사와 기획전이 열려 현대에도 그녀의 삶과 사상이 여전히 주목받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증손인 게임 시나리오 작가 쇼다 타카시는 자신의 작품에서 아마카스 사건을 모티브로 사용하기도 했다.
5. 2. 여성 운동에 대한 영향
1912년 6월, 이토 노에는 츠지 준의 권유로 히라츠카 라이초를 만나 교류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경부터는 히라츠카 등이 이끌던 여성 문학 단체 청구사에 참여하며 요사노 아키코, 하세가와 시구레, 오카모토 카노코 등 당대의 "새로운 여성"들과 교류하며 사상적 자극을 받았다. 청구사의 기관지 "청구"에 시 "동쪽의 해변"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이름을 알렸는데, "원시, 여성은 참으로 태양이었다"고 노래한 히라츠카와 달리 노에는 "불어라, 저것 봐라, 바람아, 폭풍아"와 같이 강렬한 표현을 사용했다. 이 시기 미국의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의 "부인 해방의 비극"을 번역했다.
1915년, 노에는 판매 금지 처분 등으로 경영난을 겪던 "청구"의 편집 및 발행 업무를 히라츠카로부터 넘겨받았다[4]. 그녀는 "무주의, 무규칙, 무방침"을 내걸고 엘리트 여성뿐 아니라 일반 여성에게도 지면을 개방하며 "청구"를 단순한 문예 잡지에서 여성 문제에 대한 평론과 논쟁의 장으로 변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노에는 창작, 평론, 편집 등 다방면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또한, 중류 계급 부인들이 주도한 곽청회의 폐창 운동을 창부의 처지에 대한 이해 없이 "추업부"라는 이름을 씌우는 위선으로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노에가 무정부주의에 공감하여 오스기 사카에와 함께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청구"의 운영은 1년여 만에 중단되었고, 잡지는 1916년 2월호를 끝으로 무기한 휴간에 들어갔다[4]. 이후에도 노에는 1921년 사회주의 여성 단체인 적란회에 고문 자격으로 참가하고 강연 활동을 이어가는 등 여성 운동에 관여했다. 그녀는 "부인의 반항", "적란회에 대하여", "부인 문제의 난관", "직업 부인에 대해" 등의 글과 강연을 통해 여성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의 혼란 속에서 9월 16일, 노에는 오스기 사카에, 조카 타치바나 소이치와 함께 헌병대에 연행되어 아마카스 마사히코 등에 의해 살해당했다(아마카스 사건). 이 사건으로 그녀의 활동은 갑작스럽게 중단되었으나, 사후 그녀에 대한 연구와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5. 3. 사회 운동에 대한 영향
이토 노에는 청구사 활동을 통해 일본 사회 운동에 발을 들였다. 1912년 히라츠카 라이초를 만나 청구사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11], 1915년에는 라이초의 뒤를 이어 『청구』의 편집 겸 발행인이 되었다[11]. 『청구』에 『새로운 여자의 길』(1913) 등 자신의 글을 발표하고, 에마 골드만과 엘렌 케이의 저작을 번역하여 『부인 해방의 비극』(1914)을 간행하는 등[11], 여성 해방 사상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전파하는 데 힘썼다.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와의 만남 이후, 이토 노에의 활동은 더욱 급진적인 사회 운동으로 확장되었다. 오스기와 함께 『문명 비평』(1918)을 창간하고, 『거지의 명예』(1920), 『크로포트킨 연구』(1920), 『두 사람의 혁명가』(1922) 등을 공저하며 아나키즘 사상을 탐구하고 알렸다[11].
특히 1921년에는 일본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 단체인 적란회에 고문으로 참여하며 여성 운동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11]. 적란회 관련 강연회에서 연설하고, 『부인의 반항』, 『적란회에 대하여』 등의 글을 발표하며 여성들의 사회 참여와 해방을 촉구했다[11].
1923년 관동 대지진 이후 혼란 속에서 아마카스 사건으로 오스기 사카에, 타치바나 소이치와 함께 학살당하면서[11] 그의 활동은 비극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사상은 이후 일본 사회 운동과 여성 운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후 오랫동안 그의 업적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으나, 1961년 이데 후미코의 저작을 시작으로[11]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1976년에는 학살 직전 심한 폭행이 있었음을 밝히는 "사인 감정서"가 발견되기도 했다[11]. 세토우치 하루미의 전기 소설과 평전[11], 『정본 이토 노에 전집』(2000) 발간[11] 등을 통해 그의 사상과 활동이 재평가되었으며, 2023년 서거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추모 행사와 기획전이 열리는 등[11], 그의 저항 정신과 자유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6. 대중 문화에서의 이토 노에
이토 노에의 삶은 영화, 드라마, 소설 등 다양한 대중 문화 매체를 통해 재조명되었다. 예를 들어, 요시다 기주 감독의 1969년 영화 ''에로스 + 학살''에서는 이토 노에가 중요하게 다루어졌으며, 무라야마 유카의 소설 ''바람아, 폭풍아''는 NHK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3]
6. 1. 영화
- 1960년 고모리 시로 감독, 신토호 작품인 『대학살』에서는 미야타 후미코가 이토 노에 역을 연기했다. 이 영화는 아마카스 사건을 소재로 하며, 주인공은 기요틴샤의 후루타 다이지로를 모델로 한 인물(아마치 시게루 분)이다. 비디오 출시명은 『폭압 관동 대지진과 군부』였다.
- 1970년 요시다 기주 감독, ATG 작품인 『에로스+학살』에서는 오카다 마리코가 이토 노에 역을, 호소카와 토시유키가 오스기 사카에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히카게차야 사건을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다.
- 1988년 후카사쿠 긴지 감독, 도에이 작품인 『화의 난』에서는 이시다 에리가 이토 노에 역을, 카자마 모리오가 오스기 사카에 역을 연기했다. 나가하타 미치코의 동명 소설 등을 원작으로 하며, 다이쇼 시대의 사회 운동과 예술 운동을 배경으로 한 군상극이다. 요시나가 사유리가 요사노 아키코 역, 마츠다 유사쿠가 아리시마 다케오 역으로 주연을 맡았다.
6. 2. 드라마
2022년에는 무라야마 유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바람아, 폭풍아''가 제작되었다.[16] 이 드라마에서 이토 노에 역은 요시타카 유리코가 맡았으며, 오스기 사카에 역은 나가야마 에이타가 연기했다.이 드라마는 NHK의 여러 채널을 통해 방영되었다. NHK BS8K 채널에서는 2022년 3월 31일에 120분 분량의 단편으로 방송되었고, NHK BS 프리미엄과 NHK BS4K 채널에서는 같은 해 9월 4일부터 18일까지 총 3회에 걸쳐 49분 분량의 시리즈로 방영되었다.[17][3]
6. 3. 소설
무라야마 유카는 2020년 이토 노에의 삶을 다룬 소설 ''바람아, 폭풍아''를 발표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제작되어 NHK의 여러 채널을 통해 방영되었으며, 배우 요시타카 유리코가 이토 노에 역을 연기했다.[3] 드라마는 NHK 8K 채널에서 2022년 3월 31일에 120분 분량의 단편으로 처음 방영되었고, 이후 NHK 4K와 NHK BS 프리미엄 채널에서 2022년 9월 4일부터 18일까지 49분 분량의 3부작 시리즈로 방영되었다.[3]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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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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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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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プレミアムドラマ「風よ あらしよ」9月4日(日) 夜10時放送スタート!
https://www.nhk.jp/g[...]
2022-07-29
[4]
논문
『青鞜』の創刊
吉川弘文館
2007
[5]
뉴스
「無名碑の墓石山中に」
読売新聞
2023-09-09
[6]
웹사이트
静岡)大杉栄らの墓前祭、色とりどりのバラ献花
https://www.asahi.co[...]
朝日新聞DIGITAL
2019-09-16
[7]
웹사이트
昔は「触っても拝んでもいかん」伊藤野枝の墓石ひっそり 福岡市、旧今宿村出身の女性解放運動家
https://www.nishinip[...]
西日本新聞
2023-05-23
[8]
웹사이트
「権力の横暴は忘れない」甘粕事件から100年 静岡で最後の墓前祭
https://www.nishinip[...]
西日本新聞
2023-09-17
[9]
웹사이트
地元で再評価、フェス開催 伊藤野枝、没後100年【スクランブル】
https://www.at-s.com[...]
あなたの静岡新聞
2023-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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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藤野枝の手紙
土曜社
2019-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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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歴史と人物
中央公論社
1976-10
[12]
문서
[13]
문서
[14]
논픽션
[15]
문서
[16]
뉴스
吉高由里子が伊藤野枝役で主演に 永山瑛太、稲垣吾郎も出演『風よ あらしよ』制作決定
https://realsound.jp[...]
株式会社blueprint
2022-01-14
[17]
웹사이트
プレミアムドラマ「風よ あらしよ」9月4日(日) 夜10時放送スタート!
https://www.nhk.jp/g[...]
NHK
2022-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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