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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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한전쟁은 진나라 멸망 후 항우와 유방 세력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진나라의 가혹한 통치에 대한 반란으로 시작되었으며,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 불공정한 분봉으로 제후들의 불만을 샀다. 유방은 관중 지역을 점령하려 했으나 항우에게 저지당해 한중으로 밀려났고, 이후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유방의 관중 기습, 팽성 전투에서의 유방 패배, 한신의 활약, 홍구 협정 체결과 파기, 해하 전투에서의 항우 자결로 이어졌다. 유방은 한신, 팽월 등의 도움을 받아 항우를 해하에서 포위했고, 항우는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전쟁 결과, 유방은 중국을 통일하고 한나라를 건국했으며, 공신들을 등용했으나 점차 의심하여 숙청했다. 초한전쟁은 신분 질서의 변화를 상징하며 민본주의 정치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된다. 또한, 이 전쟁과 관련된 다양한 고사성어와 작품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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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전쟁 | |
---|---|
구글 지도 | |
기본 정보 | |
전투 명칭 | 초한전쟁 |
다른 명칭 | 초한상쟁 초한전쟁 (중국어 간체: 楚汉战争, 병음: Chǔ Hàn zhànzhēng) |
로마자 표기 | Chu-Han Contention |
광둥어 | Co2 Hon3 zin3-zang1 |
주음부호 | ㄔㄨˇ ㄏㄢˋ ㄓㄢˋ ㄓㄥ |
전투 기간 | 기원전 206년 - 기원전 202년 |
전투 지역 | 중국 전역 |
전투 결과 | 한나라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세력 1 | 한나라 |
교전 세력 2 | 서초 삼진 서위 |
교전 세력 3 | 제 조 |
지휘관 | |
지휘관 1 | 유방 한신 장량 소하 영포 팽월 유고 장이 |
지휘관 2 | 항우 (사망) 용저 (사망) 계포 (항복) 종리말 조구 (사망) 범증 장한 (사망) 동예 (사망) 사마흔 (사망) 위표 (처형) |
지휘관 3 | 전영 (사망) 조헐 (사망) 진여 (처형) |
2. 역사적 배경
전국 시대 말엽, 진나라는 나머지 여섯 나라를 정복하고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진시황 사후,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났으나, 5개월 만에 진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3년 동안 다른 반란들이 잇달아 발생하였다.
이 반란의 지도자들은 진나라에 정복당한 이전 여섯 나라의 왕위를 주장하는 허위 군주들이거나 그들을 지지하는 자들이었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초나라 장군 가문 출신인 항우였다. 그는 회왕(懷王)을 명목상의 지도자로 삼아 초나라를 부흥시키고자 하였다. 항우는 주루 전투에서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자신을 "서초패왕(西楚霸王)"이라 칭하였다.
한편, 유방은 자신의 반군을 조직하였다. 주력 진나라 군대가 주루 전투에서 항우와 싸우는 동안, 유방은 진나라의 중심지인 관중 지역으로 진격하여 최소한의 저항만 받았다. 기원전 206년, 마지막 진나라 황제인 자영은 수도 선양을 유방에게 항복함으로써 진나라가 멸망하였다. 유방은 항우와의 초기 합의에도 불구하고 관중 지역의 지배권을 항우에게 넘겨야 했다. 그 합의란 관중을 먼저 점령한 자가 "관중왕"의 칭호를 얻는 것이었다.
항우는 선양을 장악한 후, 아방궁을 파괴하고 홍문연에서 유방을 암살하려고 시도했지만, 유방은 살아남아 탈출하였다. 항우는 유방을 관중에서 멀고 개발되지 않은 파촉 지역(현재 충칭과 쓰촨성)으로 이주하도록 강요하였다.
항우는 전 진나라 제국을 18왕국으로 나누었는데, 각 제후국은 반란 지도자 또는 항복한 진나라 장군이 통치하였다. 항우는 회왕에게 더 높은 칭호인 "의제"를 수여하였다. 그 직후, 그는 명목상의 황제를 천현(郴縣, 현재 침현)으로 유배 보내고, 몰래 영포에게 황제를 암살하도록 명령하였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항우는 팽성(현재 장쑤성쉬저우 시)을 근거지로 삼고 스스로 서초패왕이라 칭했다. 그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기원전에 제후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분봉을 실시했다.[1] 분봉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항우의 분봉 기준은 공적이 아니라 항우와의 관계가 원만했는지 여부였다. 이 불공평한 결과는 제후들에게 큰 불만을 품게 만들었다.[1] 항우는 초나라 회왕에게 의제라는 칭호를 주고 변방으로 유배 보낸 뒤, 구강왕 영포에게 명하여 그를 살해하게 했다. 또한 한왕성이 영토인 한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범증에게 명하여 그를 살해하게 했다. 이 때문에 한왕성을 섬겼던 장량이 유방 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1]
2. 1. 진나라의 붕괴
기원전 210년 시황제가 죽은 후, 진나라는 급격한 통일 정책과 과도한 부역으로 백성들의 불만을 샀다.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난은 5개월 만에 진압되었지만, 이후 3년 동안 다른 반란들이 잇따라 발생하였다.[1]이 반란의 지도자들은 진나라에 정복당한 이전 여섯 나라의 왕위를 주장하는 허위 군주들이거나 그들을 지지하는 자들이었다.[1]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은 초나라 장군 가문 출신인 항우였다.[1] 그는 회왕을 명목상의 지도자로 삼아 초나라를 부흥시키고자 하였다.[1] 항우는 주루 전투에서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자신을 "서초패왕(西楚霸王)"이라 칭하였다.[1]
한편, 처음에는 항우와 함께했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반란 지도자인 유방은 자신의 반군을 조직하였다.[1] 주력 진나라 군대가 주루 전투에서 항우와 싸우는 동안, 유방은 진나라의 중심지인 관중 지역으로 진격하여 최소한의 저항만 받았다.[1] 기원전 206년, 마지막 진나라 황제인 자영은 수도 선양을 유방에게 항복함으로써 진나라가 멸망하였다.[1] 유방은 자영을 존중하였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민간인을 해치거나 선양을 약탈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였다.[1] 그러나 항우가 결국 관중 지역에 도착했을 때, 유방은 그들 사이의 초기 합의에도 불구하고 관중 지역의 지배권을 항우에게 넘겨야 했다. 그 합의란 관중을 먼저 점령한 자가 "관중왕"의 칭호를 얻는 것이었다.[1]
항우가 선양을 장악한 후, 그는 그의 군대가 도시를 약탈하도록 허용하고 아방궁을 파괴하도록 명령하였다.[1] 항우는 또한 홍문연에서 유방을 암살하려고 시도했지만, 항우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유방은 살아남아 탈출하였다.[1] 나중에 항우는 유방을 관중에서 멀고 개발되지 않은 파촉 지역(현재 충칭과 쓰촨성)으로 이주하도록 강요하였다.[1]
2. 2. 항우와 유방의 등장
진나라 말기, 급격한 통일 정책과 과도한 부역으로 인해 기원전 210년 시황제 사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혼란 속에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주요 세력으로 떠올랐다.[1]항우는 초나라(楚) 귀족 출신으로, 숙부 항량(項梁)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초나라 왕족의 후손 웅심을 회왕(懷王)으로 추대했다. 기원전 207년, 항우는 주루 전투에서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칭하며, 량과 초나라 영토에 있던 9개의 군을 지배하고 팽성(彭城, 현재 쑤저우시)을 수도로 삼았다.[1]
한편, 평민 출신인 유방은 패현에서 군사를 일으켜 세력을 확장했다. 유방은 진나라의 수도 함양(咸陽)으로 진격하여 기원전 206년 마지막 진나라 황제 자영(子嬰)의 항복을 받아냈다. 유방은 자영을 존중하고 백성들을 보호하려 했으나, 항우는 유방에게 관중 지역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결국 유방은 항우의 압력에 굴복하여 멀고 험한 파촉 지역(현재 충칭과 쓰촨성)으로 근거지를 옮겨야 했다.[1]
항우는 홍문연에서 유방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전 진나라 제국을 18왕국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이 과정에서 항우는 자신이 추대한 회왕을 의제로 높였다가 유배 보내 살해하고, 한왕성을 죽이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이러한 불공정한 처사에 제후들의 불만이 커져갔고, 이는 훗날 초한전쟁의 불씨가 되었다.[1]
2. 3. 18제후왕 분봉과 불만
항우는 진나라에 의해 비롯된 중앙집권체제를 부정하고, 중국 전토에 여러 장수들을 봉건(封建)하여 전국시대(戰國時代)의 구질서를 부활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즉 의제를 옹립한 후, 자신은 '''서초'''의 패왕(覇王)이라 칭하고, 팽성에 도읍을 정하여 강소, 안휘 등지의 9군(郡)을 지배했다. 그리고 여러 장수들에 대해서는 군공(軍功)과 협력 정도에 따라 각 지역을 분봉(分封)했다. 유방에게는 파군, 촉군, 한중군의 땅을 떼어 주어 한왕(漢王)이라 하고, 기원전 206년 4월에는 군대를 해산하여 각각 봉국(封國)으로 철수시켰다.[1]그러나 항우가 실시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은 많은 불만을 남겼다. 특히 회왕(懷王)의 약속에 위반하여 벽지(僻地)의 한왕에 봉해진 유방은 가장 불만이 큰 사람이었다.[1]
진나라가 멸망한 후, 항우는 근거지인 팽성(현재 장쑤성서주시)으로 돌아가 스스로 서초의 패왕이라 칭했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 항우는 기원전에 제후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분봉을 실시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2]
봉국 | 왕 | 비고 |
---|---|---|
한중 | 유방 | 옛 진나라 영토인 관중은 원래 가장 먼저 진입한 유방에게 주어질 약속이었으나, 항우는 이를 어기고 당시 변방 지역이었던 한중으로 유방을 몰아냈다. |
조 | 장이 | |
대 | 조협 | 조나라 왕이었던 조협을 조나라 북쪽 변방인 대로 옮기고, 항우를 따라 관중까지 군에 참여했던 조나라 재상 장이를 상산왕으로 삼아 조나라 옛 영토를 주었다. 진여는 항우와 함께 군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피만 얻는 데 그쳤다. |
구강 | 영포 | |
형산 | 오뢰 | |
임강 | 공오 | 영포는 초나라 군대 장군으로서 많은 공을 세웠으므로 구강왕으로 삼아 륙(현재 안후이성륙안시)에 도읍을 정하게 했다. 또한 영포의 장인이자 전 현령이었던 오뢰를 형산왕으로, 그의 부하 공오를 임강왕으로 삼아 오초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
요동 | 한광 | |
연 | 장도 | 옛 연나라 왕 한광을 요동으로 옮기고, 항우에게 협력했던 연나라 장군 장도를 연나라 왕으로 삼았다. |
고동 | 전시 | |
제 | 전도 | |
제북 | 전안 | 옛 제나라 왕 전시를 옮겨 고동왕으로 삼고, 항우에게 협력했던 제나라 장군 전도를 제나라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항우와 친분이 있던 제나라 왕족 전안을 제북왕으로 삼아 제나라를 3분했다. 또한, 전시를 추대했고 제나라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전영은 항우에게 협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
서위 | 위표 | |
하남 | 신양 | |
은 | 사마앙 | 옛 위나라 공자 위구의 동생(종제라고도 함)으로, 항량(항우의 삼촌)을 의지했던 위표에게 위나라를 나누어 서쪽을 주어 서위왕으로 봉하고, 무신·장이의 장수로 위나라 동부에 조나라 장군 신양을 두어 하남왕으로 삼았다. 또한 은나라 옛 땅에 역시 조나라 장군인 사마앙을 봉하여 은왕으로 삼았다. |
한 | 정창 | 한왕성이 유방과 친밀했기 때문에, 항우는 그를 감금하고 자신의 부하 정창을 세워 한왕으로 삼았다. |
기원전 206년, 유방은 한신의 계책에 따라 관중을 기습 공격하여 삼진을 정복하였다. 항우는 정창을 한왕으로 임명하여 유방을 견제하려 했지만, 유방은 민심을 얻는 데 주력하여 빠르게 관중을 장악했다.[1]
이처럼 항우의 분봉 기준은 당시 공적이 아니라 항우와의 관계가 원만했는지 여부였다. 따라서 그 결과는 매우 불공평한 것이었고, 제후들에게 큰 불만을 품게 만들었다.[2]
더욱이 항우는 그동안 섬겼던 초나라 회왕에게 의제라는 칭호를 주고 변방의 진으로 유배 보낸 뒤, 구강왕 영포에게 명하여 그를 살해하게 했다. 또한 한왕성이 영토인 한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뒤이어 범증에게 명하여 그를 살해하게 했다. 이 때문에 한왕성을 섬겼던 장량이 유방 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2]
3. 초한전쟁의 전개
기원전 205년, 유방은 56만 대군을 이끌고 항우의 근거지인 팽성을 함락시켰으나, 군기가 문란해져 항우가 이끄는 3만 정예병에게 대패했다(팽성 대전). 유방은 간신히 도망쳐 형양성으로 피신했고, 기신을 자신으로 변장시켜 탈출하는 계책을 써야 했다.
기원전 204년, 유방은 영양(현재 허난성영양시)에서 성을 쌓고 버티면서 진평의 계책을 이용하여 항우의 여러 장수들을 이반시키는 한편, 한신(韓信)을 제왕에 봉하여 배후에서 항우를 겨누게 했다. 또한 팽월에게 명하여 서초의 양도를 끊게 하는 등, 서서히 항우를 괴롭혔다.[1]
기원전 203년 8월,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는 홍구 협정이 성립되었으나, 유방은 장량과 진평의 계책에 따라 협정을 파기하고 항우를 추격했다.[4]
기원전 202년 해하 전투에서 유방은 한신, 팽월 등과 연합하여 항우를 포위했고,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서 항우는 오강에서 자결했다.
3. 1. 초기: 유방의 관중 진격과 삼진 평정
기원전 206년, 유방은 한신의 계책에 따라 관중을 기습 공격했다. 한신은 번쾌를 시켜 잔도를 보수하는 척하여 적을 방심하게 만들고, 몰래 진창을 통해 삼진을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장한을 비롯한 삼진의 왕들을 모두 꺾고, 유방은 대승을 거두었다.[1]
유방은 롱시군, 베이디군, 상군을 정복하고, 페이현에 사람을 보내 가족들을 데려오게 했다. 한편, 항우는 정창을 한왕으로 임명하여 유방을 견제하려 했다.[1]
이 과정에서 유방은 민심을 얻는 데 주력했다. 항우가 힘으로 성을 점령하는 것과 달리, 유방은 항복을 받아내어 무혈로 빠르게 관중을 장악했다. 진나라의 자영은 유방에게 항복했고, 진나라는 멸망했다.[1]
3. 2. 팽성 대전과 유방의 패배
기원전 205년, 유방은 56만 대군을 이끌고 항우의 근거지인 팽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유방과 병사들은 승리에 도취되어 매일 연회를 열고 약탈을 일삼는 등 군기가 문란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항우는 정예병 3만 명만을 이끌고 팽성으로 돌아와 방심하고 있던 유방의 군대를 공격했다. (팽성 대전)
항우가 이끄는 서초군은 잘 훈련되어 사기가 높았던 반면, 유방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는 군기가 무너져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대패했다. 유방은 간신히 도망쳐 형양성으로 피신했다. 이 과정에서 유방은 기신을 자신으로 변장시켜 여군을 이끌고 거짓 항복하게 하는 계책을 써서 탈출했다. 기신은 항우에게 화형당했고, 그가 이끈 여군들은 서초 병사들에게 겁탈당했다.
3. 3. 전선의 교착과 한신의 활약
기원전 204년, 유방은 팽성 전투에서 간신히 도망쳐 영양(현재 허난성영양시)에서 성을 쌓고 버티고 있었고, 항우군도 이를 추격하여 영양에 이르렀다(영양 전투). 유방은 궁지에 몰렸지만, 진평과 기신의 계책을 이용하여 탈출하여 관중으로 돌아가 소하가 준비한 병사와 물자로 체제를 재정비했다. 이때 영포를 자신의 진영에 포섭하는 데에도 성공했다.[1]
같은 시기에, 유방의 장군 한신(韓信)은 유방에게서 이탈한 서위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위왕 위표를 폐위시켜 서인으로 만들었다. 다음으로 유방의 명령에 따라 대를 정복하고, 다시 조를 공격했다. 이때 한신의 병력은 고작 2만 명이었지만, 독창적인 전술(배수의 진)로 20만 명이라고 자칭한 조군을 반나절 만에 격파하여 조를 점령하고, 조왕 조협(趙歇)과 대왕 진여를 처형한 후, 장이를 조왕으로 세웠다(정려(井陘)의 전투). 이후, 조의 항장 이좌차(李左車)의 계책을 받아들여, 연왕 장도(臧荼)을 항복시키는 데에도 성공한다.[2]
기원전 203년, 유방은 한신에게 제를 정벌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그 후 유방은 유자(儒者) 려식기(酈食其)를 파견하여 제와의 화평 협상을 진행하게 했고, 제도 이에 응했다. 한신은 제와의 국경 부근까지 온 뒤 이 소식을 알게 되었지만, 모사 괴통(蒯通)에게 "이러면 변사의 공적이 장군의 공적을 능가하게 될 것"이라고 부추김을 받고 제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려식기는 분노한 제왕 전광과 재상 전횡에 의해 가마솥에 삶아 죽이는 형벌에 처해졌다.
도망친 전광 등은 초에 구원을 요청했고, 초는 장군 용차(龍且)를 파견했지만, 한신은 이를 또한 격파했다(위수(濰水)의 전투). 이러한 공적들로 한신의 명성은 매우 높아졌고, 한신은 유방에게 자신을 제왕으로 삼아달라고 요청하여, 이를 인정받았다. 이에 이르러 한신은 유방의 장군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독립 세력으로서의 지위를 구축하게 되었다. 항우도 이를 두려워하게 되어, 무섭이라는 자를 파견하여 한신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한신은 과거 항우군에 있을 때 냉대받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를 거절했다.
괴통은 한신에게 대업을 삼분하여 독립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한신은 고민 끝에 유방에 대한 은의를 택했고, 괴통은 후환을 두려워하여 미친 척하고 도망쳤다.
3. 4. 홍구 협정과 결렬
기원전 203년 8월, 유방과 항우는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는 홍구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항우가 범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방과 강화하고 유방의 가족을 석방하자, 유방은 장량과 진평의 계책에 따라 협정을 파기하고 항우를 추격했다.[4]
3. 5. 해하 전투와 항우의 최후
기원전 202년 해하 전투에서 유방은 한신, 팽월 등과 연합하여 항우를 포위했다.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서 항우는 오강에서 자결했다. 항우가 자결하자 여마동을 비롯하여 왕예, 양무, 양희, 여승 등 여러 장수들이 항우의 시신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항우의 시신은 찢어졌고, 왕예가 항우의 머리를 들고 달아나자 나머지 장수들이 각자 팔과 다리를 하나씩 가져갔다. 이후 항우의 시신을 획득한 장수들 전원이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4. 초한전쟁의 결과와 의의
장량과 진평의 진언으로 유방은 항우를 추격했지만 패배했다. 한신과 팽월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오지 않자, 장량의 조언으로 한신을 제왕으로, 팽월을 양왕으로 봉하는 약속을 했다. 이후 한신과 팽월이 가세하여 한나라 군은 개하에서 초나라 군을 포위했다(개하 전투).
사면초가 상황에서 항우는 800기를 이끌고 탈출, 오강(현재의 안휘성마안산시화현 오강진)에서 한나라 군에 포위되었다. 항우는 오강 정장의 강동 도주 권유를 거절, 애마를 주고 26명의 보병과 함께 싸웠다. 수백 명을 베었지만, 결국 자결했다. 왕예가 항우의 목을, 여마동, 양희, 여승, 양무는 시신을 나누어 포상을 받았다.
항우 패배 후 노는 항복했다. 유방은 항우를 노공으로 장사, 항백 등 항우 일족에게 “유”씨 성을 하사했다. 계부, 진영도 등용했으나, 종리매는 한신에게 의탁했다가 자결했다.
4. 1. 한나라의 건국과 통일
항우가 죽자 초나라 군대는 유방에게 항복했고, 중국은 유방의 통치 아래 통일되었다. 유방은 팽월을 량왕으로, 영포를 회남왕으로, 한신을 초왕으로 각각 봉했다. 몇 달 후, 신하와 제후들의 권유에 따라 유방은 스스로 황제라 선포하고 한나라를 중국의 통치 왕조로 세웠다. 수도는 낙양이었으나 나중에 장안(오늘날 서안, 산시성)으로 옮겨졌다. 유방은 부인 여씨를 황후로, 아들 유영을 태자로 삼았다.4. 2. 공신들의 몰락
유방은 황제가 되는 데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후하게 보상했지만, 점차 그들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충성심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한신은 기원전 202년 말 초왕에서 회음후로 강등되었고, 이후 기원전 196년 진희와 반란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여후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같은 해, 유방은 팽월도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을 믿고 팽월을 백성의 신분으로 강등시켰다. 팽월과 그의 가족들은 이후 여후에 의해 처형되었다.4. 3. 역사적, 사회적 의의
초한전쟁은 평민 출신 유방이 귀족 출신 항우를 꺾고 새로운 통일 왕조를 세웠다는 점에서 신분 질서의 변화를 상징한다. 전쟁 이후 한나라는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여 장기간의 평화와 번영을 이루었다. 중도 진보적 관점에서 볼 때, 민심을 얻은 유방의 승리는 민본주의 정치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1]5. 주요 전투
기원전 206년부터 기원전 202년까지 유방의 한나라와 항우의 초나라 사이에 벌어진 주요 전투는 다음과 같다.
- 삼진 공략: 유방은 한신을 보내 파촉에서 삼진으로 이어지는 길을 수리하는 척하며 적을 속이고, 다른 길을 통해 장한을 기습하여 승리했다. 이후 롱시군, 베이디군, 상군을 정복했다.[1]
- 팽성 대전: 기원전 205년, 팽성에서 유방의 한나라 군대는 항우의 초나라 군대에 대패했다. 유방은 기신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했으나, 가족들은 포로로 잡히고 많은 영토와 동맹을 잃었다.[1]
- 안읍 전투: 기원전 205년, 한신은 위보를 속여 안읍을 공격하고 사로잡았다. 이후 장이와 함께 대(代)나라를 공격하여 승리했다.[1] [2]
- 정형 전투: 한신은 정형관에서 배수의 진이라는 독창적인 전술로 조(趙)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조협과 진여를 처형했다.[1] [2]
- 위수 전투: 기원전 204년, 한신은 위수(濰水|유수중국어)에 둑을 쌓아 초나라 군대를 유인한 후 둑을 무너뜨려 롱주를 전사시키고 승리했다. 이후 제나라를 평정하고 제왕에 봉해졌다.[1]
- 해하 전투: 기원전 203년, 해하에서 유방, 한신, 팽월의 연합군에 포위된 항우는 사면초가의 상황 속에서 오강에서 자결했다.[1] [2]
5. 1. 삼진왕 vs. 유방
유방은 三秦|삼진중국어을 공격하기 위해 한신을 보내 파촉에서 삼진으로 이어지는 자고도를 수리하는 척하여 적의 경계심을 풀게 한 뒤, 몰래 천창(현재 산시성 보계시 천창구)을 통해 삼진으로 향하는 다른 길을 이용했다.[1] 한신은 용왕 장한을 기습하여 연이은 두 전투에서 그를 패퇴시켰다.[1]승승장구하던 유방은 이어 롱시군(현재 감숙성의 리우판산 서쪽 지역), 베이디군(감숙성 동부와 닝샤 후이족 자치구) 및 상군(현재 산시성 위린시 주변)을 정복했다.[1] 그는 또한 자신의 사람들을 페이현(현재 장쑤성 쉬저우시)에 있는 가족을 데려오도록 보냈다.[1] 유방의 공격 소식을 들은 항우는 유방의 군대를 막기 위해 양가(陽夏; 현재 허난성 타이캉현)에 군대를 파견했고, 정창을 한왕으로 임명하여 측면을 지원하게 했다.[1]
한편, 연왕 장도는 요동군 왕 한광을 죽이고 그의 땅을 빼앗아 스스로 연나라의 통치자라고 선포했다.[1]
5. 2. 팽성 대전
기원전 205년, 팽성에서 서초와 한나라의 대규모 충돌인 팽성 대전이 벌어졌다. 장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6만 대군을 일으킨 유방은 위표를 대장군으로 삼아 팽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유방은 매일 연회를 열었고, 군기는 점차 무너졌다. 항우는 이 소식을 듣고 3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팽성을 탈환하기 위해 출격했다. 군기가 무너진 한나라는 제대로 훈련된 서초군에 대패했고, 유방은 겨우 형양성으로 피신했다.[1]이 과정에서 유방은 기신을 자신으로 변장시키고, 여군을 편성하여 거짓 항복을 하는 사이 탈출했다. 기신은 항우에게 화형당했고, 그가 이끈 여군들은 서초 병사들에게 겁탈당했다.[1]
한편, 유방은 자신에게 항복한 왕들의 지원을 받아 약 56만 명의 군대를 모았다. 기원전 205년 9월~10월, 초나라의 수도 팽성(현재 장쑤성 서주)이 유방이 이끄는 연합군에 함락되었다. 항우는 유방이 팽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3만 명의 군대로 팽성을 탈환하기 위해 출격했다. 유방은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그의 군대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그의 가족들은 초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혔다. 전투 후, 유방은 초나라에서 얻은 영토와 동맹국들의 지원을 잃었다.[1]
5. 3. 안읍 전투
기원전 205년, 위보(魏豹)는 병든 친척을 방문한다는 구실로 유방(劉邦)을 떠나 자신의 영토로 돌아가 항우(項羽)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유방에게 반기를 들었다. 유방은 이이지(李揖)를 보내 위보를 설득하려 했으나 위보는 거절했고, 유방은 한신(韓信)에게 위보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1]위보는 포판(蒲阪)(현재 산서성 용지현(永濟市))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임진(臨晉)(현재 섬서성 달현(大荔縣))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한신은 몰래 하양(夏陽)(현재 섬서성 한성(韓城))에서 군대를 보내 강을 건너 안읍(安邑)(현재 산서성 하현(夏縣))을 공격하면서, 임진을 공격할 계획인 것처럼 위보를 속였다.[1]
기원전 205년 10월~11월, 위보는 직접 한신을 공격했으나 전투에서 패하고 사로잡혔다. 유방은 위보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그를 장군으로 임명했다. 같은 달, 한신은 장이(張耳)(서한)의 지원을 받아 대(代)나라를 공격하여 승리하고 대나라 승상 하소(夏說)를 사로잡았다.[1] [2]
5. 4. 정형 전투
한신과 장이가 대나라를 정복한 후, 정형관(井陉關)에서 조(趙)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 왕 조협(趙歇)과 승상 진여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한나라 군대에 맞섰다. 조나라 장군 이좌차(李左車)는 10일 안에 한신을 함정에 빠뜨릴 계획을 제안했다. 그는 3만 명을 이끌고 한신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후퇴로를 막는 한편, 진여는 최전선을 굳게 지켜 한신의 진격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여는 이좌차(李左車)의 계획을 따르지 않았다.[1]전투 전날 저녁, 한신은 한나라 군기 2,000개를 든 기병 2,000명을 조나라 진영 근처에 배치했다. 다음날 아침, 한신은 조나라 군대와의 작은 전투에서 패배한 척하여 그들을 유인하는 한편, 그의 2,000명의 병사들은 그 틈을 타 방비가 허술한 조나라 진영을 점령했다. 한편, 조나라 군사들은 한신의 요새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후퇴했고, 돌아왔을 때 그들의 진영이 한나라 군대에 점령당한 것을 보고 놀랐다. 조나라 군대는 혼란에 빠졌고, 한신은 이 기회를 틈타 역습을 가해 승리를 거두었다. 진여는 전사했고 조협과 이좌차(李左車)는 사로잡혔다.[1]
이때 한신의 병력은 고작 2만 명이었지만, 독창적인 전술(배수의진)로 20만 명이라고 자칭한 조군(趙軍)을 반나절 만에 격파하여 조(趙)를 점령하고, 조왕(趙王) 협(歇)과 대왕(代王) 진여(陳余)를 처형한 후, 장이를 조왕(趙王)으로 세웠다.[2]
5. 5. 위수 전투
기원전 204년, 한신은 린치를 공격하고 천광에게 항복을 권유한 리이지를 삶아 죽인 제나라 군대를 고미까지 추격했다.[1] 천광은 항우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항우는 롱주를 보내 2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천광을 돕게 했다.[1]한신이 롱주를 전투에서 물리친 후, 롱주는 방어를 강화하고 천광이 함락된 기나라 지역에서 지원을 얻도록 하는 데 집중하라는 조언을 받았다.[1] 그러나 롱주는 그 조언을 따르지 않고 한신을 공격하기로 했다.[1] 전투 전날 밤, 한신은 부하들에게 위방(현재 산둥성 위방 부근)의 위수(濰水|유수중국어)에 사주머니로 둑을 쌓도록 했다.[1]
다음날 아침, 초나라 군대와의 소규모 충돌 후, 한신은 패배한 척 후퇴하여 적을 유인했다.[1] 강을 건넌 초나라 군대가 4분의 1쯤 되자, 한신은 부하들에게 둑을 무너뜨리라고 신호를 보냈다.[1] 많은 초나라 병사들이 익사했고 롱주는 그의 군대 일부만을 거느리고 고립되었다.[1] 한신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역습을 가했고, 롱주는 전사했다.[1] 나머지 초나라 군대는 와해되었고 한신은 계속 공격을 가했다.[1] 천광은 도망쳤고 한신은 철수하는 초나라 군대를 성양(城陽, 현재 주현 부근)까지 추격했다.[1]
이러한 공적들로 한신의 명성은 매우 높아졌고, 한신은 유방에게 자신을 제왕(齊王)으로 삼아달라고 요청하여, 이를 인정받았다.[1]
5. 6. 해하 전투
기원전 203년 12월, 유방, 한신, 팽월은 세 방향에서 항우를 공격했다. 보급품이 부족해진 항우와 그의 군대는 해하(垓下; 현재 안후이성 링비현 남동쪽)에서 한나라 군대에 포위되었다. 한신은 그의 군대에게 초나라 민요를 부르게 하여 초나라 영토가 한나라에 항복했고 많은 초나라 병사들이 한나라에 투항했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항우 군대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고 많은 병사들이 탈영했다.[1]항우는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오강(烏江; 현재 안후이성 허현 부근) 북쪽 강변에 도착했을 때는 겨우 28명만 남았다. 그는 최후의 항전을 벌여 수백 명의 한나라 병사를 죽였으나 결국 압도당하여 자결했다.[1]
한나라 군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려오자(사면초가), 항우는 초나라 군의 대부분이 항복했다고 생각하여 승리를 포기하고, 남은 800기(騎)를 이끌고 탈출하여 남하했다. 도중 습지대에 길을 잃는 등의 일이 있던 항우 등은 수천 기의 한나라 군에게 추격당하여, 마침내 결심을 하고 싸움을 걸었다. 28기로 줄어든 기병을 4개 대로 나눈 항우는 한나라 군에 뛰어들어 대장 1명을 베고, 산 동쪽에 부하를 집결시켜 다시 뛰어들어 100명이나 되는 병사를 베었다. 이 사이 항우가 잃은 것은 2기뿐이었다.[2]
항우는 오강(현재의 안휘성마안산시화현 오강진)에 이르렀다. 강의 나루터에서는 오강의 정장이 배를 준비하고 있었고, 항우에게 강동으로 도망가라고 권했다. 그러나 항우는 그것을 거절하고 애마를 정장에게 주고, 살아남은 26명의 보병을 이끌고 한나라 군을 맞아 싸웠다. 항우는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수백 명의 한나라 병사를 베었다. 항우는 옛 친구인 여마동을 적군 속에서 발견하고, “한왕이 나에게 막대한 상금을 걸고 만호후를 약속했다는 것이 아닌가. 너는 옛 친구이니, 내 수급을 선물로 주어 공을 세우도록 하라”고 말하며 스스로 목을 쳤다. 왕예가 달려가 목을 주웠지만, 주위의 한나라 병사들도 몰려들어 서로 베어 항우의 시체를 빼앗았다. 수십 명의 사망자를 낸 결과, 여마동・왕예・양희・여승・양무의 5명이 항우의 머리와 양팔다리를 나누어 가지고, 포상을 5분하여 받았다.[2]
6. 관련 인물
초한전쟁에는 유방과 항우를 중심으로, 이들을 따르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 유방 세력: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 데 공헌한 인물들이다. 장량, 한신, 소하, 진평 등이 대표적이다.
- 항우 세력: 항우와 함께 초나라 부흥을 위해 싸웠던 인물들이다. 범증, 영포, 종리매 등이 있다.
6. 1. 유방 세력
유방은 한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진나라 말기에 패현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며, 기원전 207년 항우와 함께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진격하여 진나라를 멸망시켰다.[1] 이후 팽성 전투에서 대패하였으나, 한신 등의 활약으로 세력을 회복하고, 결국 초한전쟁에서 승리하여 천하를 통일하였다. 유방의 주요 세력은 다음과 같다.이름 | 설명 |
---|---|
장량 | 유방의 책사로, 뛰어난 지략으로 유방을 보좌했다. 팽성 전투에서는 유방의 56만 대군 동원에 반대하기도 했다. |
한신 |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가진 장수로, 초한전쟁 승리의 일등 공신이다. 자고도를 수리하는 척하며 진창을 통해 삼진을 기습하여 장한을 격파하고, 정형 전투에서는 배수의 진 전술로 조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위수 전투에서는 롱주가 이끄는 초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제나라를 평정했다. |
소하 | 유방의 후방을 책임지며, 안정적인 보급을 지원했다. |
진평 | 유방의 책사로, 이간계를 활용하여 항우 세력을 약화시켰다. |
팽월 | 유격전을 통해 항우의 후방을 교란했다. 전융에 의해 제나라 군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항우를 공격했다. |
영포 | 원래 항우의 부하였으나, 유방에게 귀순하여 활약했다. 구강왕이었으나, 롱주에게 패하고 유방에게 합류했다. |
기신 | 팽성 전투에서 유방을 대신하여 미끼를 자처하여, 유방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고 장렬히 화형당했다. |
이이지 | 유방의 명을 받아 위표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천광을 설득하여 항복을 받아냈으나, 한신의 공격으로 인해 삶아 죽는 형벌을 당했다. |
괴통 | 한신에게 제나라를 공격할 것을 조언하고, 천하삼분지계를 주장했으나, 한신이 듣지 않자 미친 척하며 도망쳤다. |
6. 2. 항우 세력
항우는 진나라 말기에 숙부 항량(項梁)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으며, 초나라 왕족 웅심을 회왕(懷王)으로 추대했다. 기원전 207년, 항우는 진나라 수도 함양(咸陽)으로 진격했다. 이후 의제(義帝)에게 팽성(彭珹)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자 영포를 시켜 의제를 죽였다. 이는 백성들의 비난을 받았고, 여러 나라들이 항우에게 등을 돌리는 원인이 되었다.팽성대전 이후, 기원전 203년 8월 평화협정을 맺었으나, 유방이 협정을 어기고 공격해오자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한신의 전략에 밀려 팽성이 함락되고, 결국 해하 전투에서 패배한 항우는 오강에서 자결했다.
항우가 자결한 후, 여마동, 왕예, 양무, 양희, 여승 등 여러 장수들이 항우의 시신을 나누어 가졌고, 이들은 모두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항우의 패배에도 항복하지 않던 노는 항우의 목을 보고 항복했다. 유방은 항우를 노공으로 장사 지내고, 항백 등 항우 일족에게는 "유"씨 성을 주어 살려주었다. 항우의 부하였던 계부나 진영도 등용했다. 그러나 종리매는 한신이 숨겨 주었지만, 한신에게 반역 의심이 가해지자 자결했다.
7. 관련 작품 및 저서
- 사마천의 사기 중 본기의 고조본기, 항우본기와 열전의 회음후열전에서 초한전쟁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3][4][5][6]
- 소설 초한지는 초한전쟁을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 이동민의 《초한전쟁》은 초한전쟁을 지정·지리학의 관점에서 서술한 책이다.
- 장기에서 양측을 구분하는 중앙 부분은 "초하강(楚河漢界)"이라고 불리며, 빨간색과 검은색은 각각 한(漢)과 초(楚)를 나타낸다.
- 베이징 오페라인 패왕별희는 개하 전투에서 항우의 패배와 유씨와의 로맨스를 묘사한다.
- 피파를 위한 음악 작품 "십면매복"과 "패왕사갑(霸王卸甲)"은 각각 한(漢)과 초(楚)의 관점에서 개하 전투를 묘사한다.
- 초한쟁패의 사건에서 유래한 성어(중국어 관용구)와 속담은 다음과 같다.
성어/속담 | 설명 | 유래 |
---|---|---|
破釜沉舟|파부침주중국어 |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를 보여주는 표현 | 절록 전투에서 항우의 명령 |
홍문연 | 표면적으로는 즐거운 자리이지만 실제로는 위험한 함정을 의미하는 비유적인 표현 | 기원전 206년 항우가 유방을 잔치에 초대하면서 잔치 도중 암살을 계획했던 사건 |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暗度陳倉) | 자신의 행동을 더 명백한 행동으로 위장하는 것 | 한신이 삼진을 공격하기 위한 전략 |
배수일전(背水一戰) |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결의를 보여주는 표현 | 정형 전투 |
십면매복(十面埋伏) | 포위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 | 개하 전투에서 한신이 항우를 포위하기 위한 전략 |
四面楚歌|사면초가중국어 | 사방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있음 | 개하 전투에서 한(漢)군이 포위된 초(楚)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초나라 민요를 불렀던 것 |
; 영화
- 항우와 유방/그들의 사랑과 흥망 (1994년, 중국·홍콩)
- 초한지: 영웅의 부활 (2011년, 중국)
- 항우와 유방/White Vengeance (2011년, 중국)
- 항우와 유방 홍문의 회 (2012년, 중국)
; 텔레비전 드라마
- 항우와 유방·배수의 진 (1991년, 중국)
- 유방과 항우 (1997년, 중국)
- 대한풍 ~항우와 유방~ (2004년, 중국)
- 항우와 유방 (2004년, 홍콩)
- THE MYTH/신화 (2009년, 중국)
- 항우와 유방 King's War (2012년, 중국)
; 소설
- 항우와 유방 (사마료타로)
- 항우와 유방 (동문동이)
- 한초군담 (타오카 노리아키)
- 사면초가―한초전기 (고지마 신지)
- 유방 (미야기타니 마사미츠)
; 희곡
- 항우와 유방 (나가요시 젠로)
; 만화
- 항우와 유방 (요코야마 미쓰테루)
- 사기 (요코야마 미쓰테루)
- 적룡왕 (혼구 히로시)
- 레드 드래곤 (이케노 마사히로)
- 용수의 날개 사기·류후세가이전 (카와하라 마사토시)
; 게임
참조
[1]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ections: Emperor Gaozu of Han, Xiang Yu, The Marquis of Huaiyin
[2]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ections: Cao Shen, Fan Kuai, Guan Ying, Jin Xi
[3]
웹사이트
破釜沉舟
https://www.mdbg.net[...]
[4]
웹사이트
破釜沉舟
http://www.zdic.net/[...]
[5]
웹사이트
破釜沉舟
https://www.mdbg.net[...]
[6]
웹사이트
四面楚歌
http://www.zdic.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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