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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의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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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스페인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친추축국 성향과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에 대한 '빚'으로 인해 추축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정부 내에서는 친추축국과 친연합국 세력 간의 갈등이 있었으며, 외무장관이 여러 번 교체되는 등 외교 정책의 변화가 있었다. 스페인은 앙다예 회담을 통해 독일과 참전 협상을 진행했으나, 독일의 요구 조건과 전략적 우선순위 변화로 인해 참전하지 않았다. 대신 청색 사단을 파병하여 독일을 지원했으며, 전후에는 일본으로부터 전쟁 배상금을 받았다. 또한 연합국의 경제적 압박과 첩보 활동, 그리고 스페인 공화파의 참전 등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스페인은 유대인 난민들을 보호하는 인도주의적 행보를 보이기도 했지만, 전쟁 전후 나치 전범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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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의 스페인
지도
제2차 세계 대전 중 스페인
프랑코 정권의 스페인 국기
프랑코 정권의 스페인 국기
존속 기간1939년 9월 1일 ~ 1945년 9월 2일
위치유럽
수도마드리드
정부전체주의 국가
통치자프란시스코 프랑코
역사적 시대제2차 세계 대전
통계
인구26,000,000명 (1940년)
경제
통화스페인 페세타
관련 사건
관련 사건제2차 세계 대전
청색 사단
탕헤르 국제 지대 점령
기타
구분

2. 추축국과의 관계

프랑코 정권은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나치 독일이탈리아로부터 받은 군사적 지원에 대한 '빚'을 지고 있었으며, 프랑코 개인적으로도 추축국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이었다. 실제로 스페인은 독일에 군수물자 대금으로 2.12억달러의 빚을 지고 있었다. 이러한 친추축국 성향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정부 내부는 친추축국 지지자들과 친연합국 지지자들로 나뉘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초기 스페인 외무장관은 친연합국 성향의 후안 루이스 베그베데였으나, 전황이 추축국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프랑코는 그를 경질하고 친추축 성향이 강한 라몬 세라노 라모스를 임명했다. 그러나 1942년 연합군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승기를 잡자, 프랑코는 다시 라모스를 경질하고 친연합국 성향의 프란시스코 고메스 호르다나로 교체하며 기회주의적인 외교 노선을 보였다.

전쟁 초기, 특히 1942년 이전까지는 독일을 위시한 추축국이 우세를 점했다. 폴란드 침공 성공 이후 독일은 북유럽, 베네룩스, 프랑스를 차례로 점령했고,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위협하는 등 연합국은 위기에 몰렸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스페인은 여러 차례 추축국 가담 의사를 내비쳤다. 프랑코는 스페인 언론을 동원하여 모로코, 카메룬, 지브롤터의 반환을 요구하는 선전 활동을 벌였고,[1]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주독일 스페인 대사는 "특정 조건 하에서 스페인은 추축국에 가담할 준비가 되었다"고 독일에 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은 초기에는 스페인의 참전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히틀러는 스페인의 도움 없이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40년 8월, 영국 침공 작전인 바다사자 작전을 구상하면서 독일은 스페인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하고 참전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때 히틀러는 스페인에게 카나리아 제도스페인령 모로코의 군사 기지 사용 허가를 요청했으나, 프랑코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2] 또한, 프랑스 점령 이후 미국과의 잠재적 충돌에 대비해 강력한 해군력 증강 계획(Z 계획)을 추진하던 독일에게 스페인의 항구와 군사 기지는 매우 중요했으나, 스페인의 거부로 양국 관계에 긴장이 조성되었다.[3]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0년 10월, 프랑코와 히틀러는 참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앙다예 회담을 가졌으나, 스페인의 과도한 요구와 독일의 미온적인 태도로 구체적인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결국 스페인은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추축국에 협력했다. 1941년 11월 25일, 스페인은 방공 협정에 서명하여 추축국과의 연대를 과시했다. 이는 연합국에게 횃불 작전 당시 스페인이 중립을 포기하고 연합군을 공격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고, 연합군은 이에 대비하여 모로코의 카사블랑카 상륙 계획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또한, 스페인은 소련과의 전쟁을 명분으로 청색 사단이라는 이름의 자원병 부대를 편성하여 동부 전선에 파견함으로써 독일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2. 1. 앙다예 회담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나치 독일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이 군사적 우위를 점하자 프랑코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 받은 지원에 대한 보답과 스페인 식민제국 재건이라는 야심을 품고 추축국 측 참전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1940년 6월 19일, 프랑코는 히틀러에게 스페인 식민제국 재건에 독일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참전을 제안했다.[4]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40년 10월 23일, 프랑코와 히틀러는 스페인-프랑스 국경 마을인 앙다예의 기차역에서 만났다. 이 회담에는 스페인 외무장관 라몬 세라노 라모스와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도 동석했다.

회담에서 스페인 측은 참전의 대가로 상당한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스페인 내전으로 피폐해진 경제와 군대를 재건하기 위해 막대한 양의 식량과 군수물자 지원을 요청했으며, 프랑스령 아프리카의 영토 할양을 요구했다.[5][6] 특히 스페인이 과거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던 프랑스령 카메룬까지 요구하자 독일 측은 스페인의 요구가 과도하다고 여겼다.[7]

히틀러와 독일 측은 스페인의 요구가 지나치게 크고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회담은 스페인이 약속한 날짜에 참전하며, 그 대가로 히틀러는 스페인에 아프리카 영토 할양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막연한 합의문에 서명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스페인의 팔랑헤주의 언론들은 한발 더 나아가, 만약 스페인이 참전한다면 당시 비시 프랑스 통치하에 있던 프랑스령 바스크프랑스령 카탈루냐 지역까지 병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8][9]

회담이 완전히 결렬된 것은 아니었으며, 히틀러는 스페인의 참전 약속을 확보했다고 여기고 독일로 돌아갔다.[10] 따라서 히틀러가 참전을 강하게 압박했다면 스페인이 전쟁에 참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당시 이탈리아그리스 침공 실패로 인한 발칸 반도 개입 문제와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 준비 등 다른 시급한 현안들로 인해 스페인 문제에 대한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11] 또한, 지중해 전역은 독일의 핵심 전략 목표가 아니었고, 스페인의 요구를 들어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이탈리아비시 프랑스와의 불필요한 외교적 마찰을 피하려는 현실적인 고려도 작용했다. 이러한 복합적인 이유로 스페인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은 최종적으로 무산되었다.

2. 2. 청색 사단

청색 사단의 문장.


청색 사단의 기념비.


비록 스페인의 직접적인 참전은 무산되었지만, 프랑코 정권은 독일을 지원하기 위해 청색 사단(División Azul)이라는 자원병 부대를 편성하여 파견했다. 독일 측은 스페인이 소련에 대해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하지 않은 것에 실망감을 표했으나, 1941년 6월 24일 청색 사단의 파병을 최종적으로 허락하였다.[12] 파병 결정 이후 1941년 7월 2일까지 총 18,373명의 스페인인이 청색 사단에 자원하였다.[13]

아구스틴 무뇨스 그란데스 장군이 지휘하는 이 부대는 독일 국방군(Wehrmacht) 제250 보병사단으로 명명되어 동부 전선에 투입되었다. 청색 사단 병사들은 공식적으로는 독일군 소속이었기 때문에 스페인군 제식 군복을 착용할 수 없었다. 대신 이들은 '에스파냐(España)'라는 문구가 새겨진 견장을 부착한 독일군의 야전회색(feldgrau) 군복을 입고 전투에 참여했다. 휴가 시에는 붉은 베레모와 푸른 셔츠, 카키색 바지를 착용하기도 했다.

2. 3. 전후 일본과의 관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일본 제국은 패망에 따라 다른 국가들에 끼친 피해를 보상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필리핀에 있던 스페인의 자산이 파괴되고 100명 이상의 스페인 선교사들과 스페인인들이 사망한 것에 대한 보상도 이루어졌다. 일본은 1957년, 스페인에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550만달러를 지급했다.

3. 연합국과의 관계

스페인은 프랑코 정권 하에서 추축국에 대한 호감과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 독일이탈리아로부터 받은 지원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친추축 성향을 보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스페인 정부 내부는 친추축 지지자들과 친연합국 지지자들로 나뉘어 있었다. 전쟁 초기 외무장관은 친연합 성향의 후안 루이스 베그베데였으나, 전황이 추축국에 유리해지자 프랑코는 그를 경질하고 친추축 성향의 라몬 세라노 라모스를 임명했다. 하지만 1942년 연합국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승기를 잡자 다시 라모스를 경질하고 친연합 성향의 프란시스코 고메스 호르다나로 교체하는 등, 스페인은 국제 정세 변화에 따라 연합국과의 관계를 조율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연합국 입장에서 스페인은 불안정한 존재였다. 다분히 친추축적인 성향을 지닌 스페인이 만약 추축국 편에 서서 연합군을 공격한다면, 특히 지브롤터 등 전략적 요충지에서 큰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연합국은 스페인이 중립을 유지하도록 다양한 압력을 가했다. 대표적으로 미국산 석유에 의존하던 스페인의 경제적 약점을 이용하여 석유 공급을 제한하는 경제적 압박을 가했으며[14], 이는 스페인의 전쟁 수행 능력을 제한하고 중립을 강제하는 효과를 낳았다. 또한, 1941년 스페인이 방공 협정에 서명하자 연합국은 횃불 작전 실행 시 스페인이 연합군을 공격할 가능성을 우려하여 카사블랑카 상륙 계획을 포함시키는 등 군사적 대비를 하기도 했다.

한편, 영국은 스페인의 추축국 가담을 막기 위해 비밀 공작을 펼치기도 했다. 윈스턴 처칠 총리는 스페인 고위 장교들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것을 승인했으며[15], 영국 비밀정보부(MI6)는 스페인 고위 관료들에게 2억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16] 이러한 경제적, 외교적, 군사적, 첩보적 압박 속에서 스페인은 전쟁 기간 동안 UN 가입도 하지 못하고 다수 국가가 대사를 철수시키는 등 국제적 고립을 겪으며 불확실한 중립 노선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모든 스페인인이 프랑코 정권과 뜻을 같이 한 것은 아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패배하고 망명한 공화파 세력 중 다수는 프랑스 외인부대, 프랑스 레지스탕스, 자유 프랑스군 등에 합류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파시즘에 맞서 싸웠으며[17][18], 소련으로 망명한 이들은 소련군이나 파르티잔으로 활동하며 나치 독일과 싸웠다.

3. 1. 경제적 압박

연합국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 하의 스페인을 다분히 추축국에 우호적인 성향을 가진 불안정한 세력으로 보았다. 만일 스페인이 추축국에 가담하여 연합군을 공격할 경우 전황이 불리해질 수 있었기에, 연합국은 스페인의 중립을 유지시키기 위해 경제적 수단을 활용했다.[14] 당시 스페인은 미국산 석유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영국미국에게 스페인으로의 석유 수출을 줄이라고 요구했다. 미국이 이에 동의하면서 스페인의 석유 수입량은 크게 제한되었다. 이로 인해 스페인은 석유 확보를 위해 독일에 의존하려 했으나, 독일이 공급하는 석유는 대부분 점령한 프랑스의 매장량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한 대체제가 되지 못했다. 더불어 프랑코 정권의 노골적인 친추축국 행보는 스페인에 대한 국제 무역이 사실상 중단되는 결과를 낳았고, 스페인은 전쟁 기간은 물론 전후에도 상당 기간 고립되었다. 이러한 고립의 영향으로 스페인은 1955년까지 UN에 가입하지 못했으며, 많은 국가들이 스페인 주재 대사를 철수시키는 등 외교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스페인은 전쟁 기간 동안 불확실한 중립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3. 2. 첩보 활동

스페인은 프랑코 정권의 추축국에 대한 호감과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 독일이탈리아로부터 받은 지원 때문에 다분히 친추축국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연합국에게 큰 불안 요소였으며, 만일 스페인이 추축국에 가담하여 연합군을 공격할 경우 전황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14] 이에 연합국은 스페인의 중립을 유지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는 경제적 압박이었다. 당시 스페인은 미국산 석유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영국은 미국에게 스페인으로의 석유 수출을 줄이도록 요구했다. 미국이 이에 동의하면서 스페인의 석유 수급에 큰 차질이 생겼다.[14] 독일산 석유에 의존하려 했으나, 이는 대부분 프랑스 점령지의 매장량에 기반한 것이라 충분한 대체제가 되지 못했다. 이러한 경제적 압박과 고립 정책은 스페인이 전쟁 기간 동안 중립을 유지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한편, 물밑에서는 보다 직접적인 공작 활동도 이루어졌다. 2008년에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스페인이 추축국에 가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스페인 고위 장교들에게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제공하는 것을 승인했다.[15] 또한 2013년 5월에는 영국 비밀정보부(MI6)가 같은 목적으로 스페인의 고위 장교들과 주요 내각 인사들에게 2억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뇌물을 제공했다는 사실이 담긴 파일이 발견되기도 했다.[16] 이는 연합국, 특히 영국이 스페인의 참전을 막기 위해 비밀리에 상당한 규모의 첩보 및 공작 활동을 벌였음을 보여준다.

3. 3. 스페인 공화파의 참전

스페인 내전에서 패배한 후 스페인을 탈출한 공화파 잔존 세력 중 일부는 프랑스로 망명하여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들은 프랑스 외인부대에 입대하여 추축국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1940년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 이후에도 많은 스페인인들은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프랑코 정권의 동맹이었던 나치 독일에 대한 저항을 이어갔다.[17] 또한 수천 명의 스페인인들은 샤를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하여 연합군과 함께 싸웠다. 특히 1944년 파리 해방 당시 선봉에 섰던 자유 프랑스군 제9기갑중대는 스페인 내전 경험이 풍부한 공화파 참전용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18]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 입성하는 미국 육군 제11기갑사단의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건물에 걸린 현수막에는 "반파쇼 스페인인들이 해방군에게 경의를 표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한편, 스페인 내전 종결 후 소련으로 망명했던 스페인 공산주의자들과 고위 인사들도 있었다. 소련 정부는 이들을 받아들였고,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엔리케 리스테르와 같은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군에 입대하여 나치 독일과 싸웠다. 역사가 앤터니 비버에 따르면, 약 1,400명의 스페인인이 소련 측에서 싸웠는데, 이 중 절반인 700명은 정규 소련군으로, 나머지 700명은 전선 후방에서 파르티잔으로 활동하며 독일군에 맞섰다.

4. 관련 작전

나치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인 지브롤터를 점령하고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하기 위한 여러 군사 작전을 계획했다. 대표적으로 지브롤터 점령을 목표로 한 펠릭스 작전이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군사 기지 확보를 노린 이사벨라 작전 및 이를 수정한 일로나 작전 등이 구상되었다. 독일은 특히 영국 본토 항공전의 일환인 바다사자 작전 준비와 해군력 증강을 위한 Z 계획을 위해 스페인의 카나리아 제도와 스페인령 모로코의 군사 기지 사용 허가를 요청했으나, 프랑코는 이를 거절했다.[2][3]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0년 10월 23일, 프랑스-스페인 국경의 앙다예 기차역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프랑코가 직접 만나 스페인의 참전 문제를 논의했다. 프랑코는 스페인 식민제국 재건을 위한 독일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참전을 제안하며[4], 프랑스령 아프리카 영토 할양과 내전으로 피폐해진 스페인 경제 및 군대 재건을 위한 막대한 식량과 군수물자 지원을 요구했다.[5][6] 그러나 히틀러와 독일 측은 스페인의 요구, 특히 옛 독일 식민지였던 프랑스령 카메룬 요구 등에 대해 터무니없고 과도하다고 여겼다.[7] 회담은 결국 스페인이 약속한 날짜에 참전하고 히틀러는 스페인에 대한 아프리카 영토 보상을 보장한다는 막연한 합의에 서명하는 것으로 끝났다.[10] 하지만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 지원 문제와 바르바로사 작전 준비 등 당면한 다른 문제들로 인해 스페인 관련 계획을 변경해야 했고, 결국 스페인의 참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11]

이후 1941년 11월 25일, 스페인은 방공 협정에 서명했다. 이는 연합국으로 하여금 북아프리카 상륙 작전인 횃불 작전 실행 시 스페인이 중립을 포기하고 연합군을 공격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게 했다. 비록 공식적인 참전은 없었지만, 스페인은 나치 독일을 지원하기 위해 청색 사단이라는 이름의 자원병 부대를 편성하여 동부 전선에 파견했다. 아구스틴 무뇨스 그란데스가 지휘한 이 부대는 독일 국방군 제250 보병사단으로 명명되어 소련군과 싸웠다.[12][13] 청색 사단 병사들은 공식적으로 독일군 소속이었기에 스페인군 군복 대신 '에스파냐(España)' 문구가 새겨진 견장을 부착한 독일군 야전회색 군복을 착용했다.

전쟁 후반기, 독일의 전황이 불리해지자 연합군의 이베리아 반도 상륙 가능성에 대비한 방어 계획인 뉘른베르크 작전이 1943년 6월에 고안되기도 했으나, 이 역시 실행되지는 않았다.

4. 1. 펠릭스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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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초기 스페인과 나치 독일지브롤터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지브롤터는 수에즈 운하와 함께 지중해의 입구로서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만일 추축국이 지브롤터를 점령한다면 영국 지중해함대를 지중해에 고립시킬 수 있었다. 나치 독일은 이러한 지브롤터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였고, 이 계획에서는 차후 일어날 연합군의 침공을 방지하기 위해 독일군이 지브롤터에 주둔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펠릭스 작전은 스페인과 독일 간의 협상이 실패하기 전에 완성되었는데, 협상이 큰 성공을 거두는 데 실패한 이후 작전은 계속하여 연기되었다. 펠릭스 작전이 연기되는 동안 1941년 3월까지 독일군의 역량은 바르바로사 작전소련 침공을 위해 할당되었고, 이후 펠릭스 작전은 소련 침공보다 후선시되어 펠릭스-하인리히 작전으로 수정, 바르바로사 작전이 성공하면 발동하게 할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성공을 앞두고 소련군의 반격에 부딪혔으며, 결국 바르바로사 작전은 실패한데다 스페인은 전쟁은 참전하지 않았다.[21]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빌헬름 카이텔은 "소련을 침공하는 것 대신 지중해를 봉쇄하여 대영제국을 압박했어야 했다"라고 논평하기도 했다.[22]

4. 2. 이사벨라, 일로나 작전과 뉘른베르크 작전

이사벨라 작전(Unternehmen Isabellade)은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스페인포르투갈의 군사 기지를 점령하여 영국을 압박하기 위해 세운 군사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1941년 5월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제시되었으나 실제로 실행되지는 않았다.[23] 이사벨라 작전은 이후 일로나 작전으로 이어지는 이베리아 반도 침공 계획의 초기 구상안이었다.

작전의 목표는 펠릭스 작전과 유사하게 스페인 본토, 포르투갈, 안도라, 지브롤터, 아소로스, 카보베르데를 점령하고 군사 기지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펠릭스 작전과는 달리, 이사벨라 작전은 스페인군이 독일군에 협력할 것이며, 만약 연합군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할 경우 독일이 스페인군을 지원한다는 가정을 전제로 계획되었다.[24][25]
일로나 작전(Unternehmen Ilonade)은 이사벨라 작전을 축소한 버전으로, 나중에 기셀라 작전(Unternehmen Giselade)으로 다시 명명되었다. 이 작전은 1942년 5월에 계획되었으며, 이전 계획들과는 다르게 스페인이 중립을 유지하더라도 침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여기에는 독일군 10개 사단이 바르셀로나살라망카로 진군하는 계획도 포함되었다.
뉘른베르크 작전(Unternehmen Nürnbergde)은 1943년 6월에 고안되었다. 앞선 세 작전들과는 달리, 이 작전은 독일군의 전황이 불리해진 시점에 작성되었다. 따라서 이 계획은 공격적인 점령보다는, 연합군이 이베리아 반도에 상륙할 경우를 대비하여 피레네 산맥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스페인을 통해 진격해오는 연합군을 저지하는 데 초점을 맞춘 방어 계획이었다.

5. 스페인과 난민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스페인 정부는 공식적으로 난민의 입국을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했다.[26] 그러나 실제로는 이 법률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았고, 나치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 등 서유럽에서 탈출한 사람들과 동유럽의 유대인을 포함한 많은 난민이 스페인으로 유입되었다.

5. 1. 유대인 난민 보호

유대인들의 공통적인 상징인 다윗의 별.


전쟁 초기 스페인은 난민의 입국을 막는 법률을 만들었으나[26], 실제로는 이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많은 난민이 스페인으로 들어왔다. 이들 대부분은 프랑스의 수용소를 피해 온 서유럽 출신이었지만, 동유럽의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작가 트루디 알렉시(Trudi Alexy)는 나치의 최종 해결책을 피해 온 유대인들이, 역설적이게도 4세기 이상 유대인을 추방했던 스페인으로 자발적으로 도망쳐 망명을 요청하는 상황을 '모순과 역설'이라고 표현했다[27].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스페인 외교관들은 동유럽, 특히 헝가리의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이 스페인계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별도의 증명 없이도 보호를 받아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전쟁의 흐름이 연합국에게 유리해지면서 프란시스코 고메스 호르다나가 외무장관이 되자, 스페인 정부는 점차 유대인에게 동정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 자신은 유대인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피했다. 비슷한 시기, 폴란드에 파견되었던 스페인 의료진들은 폴란드 총독 한스 프랑크로부터 독일군의 유대인 학살 계획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되었다. 이들은 귀국 후 이 사실을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에게 보고했고, 블랑코는 다시 프랑코에게 전달했다[28].

전쟁 발발 직후부터 스페인은 그리스,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스페인 시민권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시민권을 주고 안전 가옥을 제공했으며, 최소한의 스페인어를 가르쳐 스페인인처럼 행세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를 통해 스페인은 헝가리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헝가리 주재 스페인 대사가 헝가리를 떠나게 되면서, 보호받던 유대인들은 다시 독일군에게 체포되거나 추방될 위험에 처했다. 이때 이탈리아 외교관이었던 조르조 페를라스카가 자신이 새로운 스페인 대사라고 헝가리 당국을 속여 유대인들을 계속 보호하는 용감한 행동을 보였다[29].

결과적으로 스페인은 대부분의 다른 중립국들보다 유대인 학살을 막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평가받는다[30]. 프랑코 정권은 시오니즘과 소위 '유대-프리메이슨 음모론'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광적인 반유대주의까지 공유하지는 않았다. 스페인을 거쳐 약 25,000명에서 35,000명에 달하는 난민(대부분 유대인)이 나치의 감시를 피해 포르투갈 등 다른 나라로 안전하게 이동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스페인의 행동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일부 역사가는 이를 스페인의 인도주의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증거로 보지만, 다른 이들은 프랑코의 권위주의 정권이 단지 유대인들이 스페인을 '거쳐 가는 것'만 허용했을 뿐이며, 이는 기회주의적인 행동이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전쟁 전후 스페인이 유대인 학살과 강제 이주에 책임이 있는 나치 전범들이나 오토 슈코르체니, 레옹 드그렐과 같은 파시스트들에게 우호적이었으며 피난처를 제공했다는 사실이 지적된다[31]. 또한, 1941년 5월 13일 내무부 장관 호세 마리아 피나트는 스페인 내 모든 주지사에게 해당 지역의 모든 유대인(스페인 국적자 및 외국인 포함) 명단을 작성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렸다. 이렇게 전국적으로 집계된 약 6,000명의 명단은 나치 독일의 친위대 지도자 하인리히 힘러에게 전달되었다. 1945년 독일 패망 후 스페인 정부는 이러한 나치 협력 증거를 파기하려 했으나 실패했다[32]. 이는 프랑코 정권의 유대인 정책이 인도주의적 동기보다는 정치적 계산에 따른 이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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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적 A World In Arm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4] 서적 A World in Arm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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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웹사이트 Giorgio Perlasca 2006-07-21
[30] 웹사이트 Franco & the Jews 2006-07-21
[31] 뉴스 Toujours Vichy: a reckoning with disgrace Harper's 2006-10
[32] 뉴스 WWII Document Reveals: General Franco Handed Nazis List of Spanish Jews http://www.haaretz.c[...] Haaretz 2010-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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