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디펜베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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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디펜베이커는 1895년 온타리오주에서 태어나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1940년 캐나다 하원 의원에 당선되어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956년 진보보수당 대표가 되었고, 1957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캐나다 총리에 취임했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캐나다 권리장전을 제정하고, 영연방 내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비판하는 등 내정과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3년 총선에서 패배한 후 야당 대표로 활동하다가 197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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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디펜베이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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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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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 각하 |
이름 | 존 조지 디펜베이커 |
로마자 표기 | John George Diefenbaker |
출생일 | 1895년 9월 18일 |
출생지 | 온타리오주 노이스타트 |
사망일 | 1979년 8월 16일 |
사망지 | 온타리오주 오타와 |
안장 장소 | サスカ툰 디펜베이커 캐나다 센터 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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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캐나다 진보보수당 |
직업 | 정치인 변호사 |
학력 | サスカ츄완 대학교 (문학사, 문학 석사, 법학사) |
배우자 | |
배우자 | 에드나 브로워 (1929년 - 1951년, 사별) 올리브 팔머 (1953년 - 1976년, 사별) |
군 복무 | |
소속 국가 | 캐나다 |
군종 | 캐나다 원정군 |
복무 기간 | 1916년 - 1917년 |
계급 | 중위 |
소속 부대 | 196th 대대 |
참전 전투 | 제1차 세계 대전 |
총리 | |
제13대 총리 | 총리 |
임기 시작 | 1957년 6월 21일 |
임기 종료 | 1963년 4월 22일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총독 | 빈센트 매시 조르주 바니에 |
이전 총리 | 루이 생로랑 |
다음 총리 | 레스터 B. 피어슨 |
야당 대표 | |
야당 대표 | 야당 대표 |
임기 시작 | 1963년 4월 22일 |
임기 종료 | 1967년 9월 8일 |
이전 야당 대표 | 레스터 B. 피어슨 |
다음 야당 대표 | 마이클 스타 |
임기 시작 | 1956년 12월 14일 |
임기 종료 | 1957년 6월 20일 |
이전 야당 대표 | 윌리엄 얼 로 |
다음 야당 대표 | 루이 생로랑 |
정당 대표 | |
정당 대표 | 진보보수당 |
임기 시작 | 1956년 12월 14일 |
임기 종료 | 1967년 9월 9일 |
이전 대표 | 윌리엄 얼 로 (임시) |
다음 대표 | 로버트 스탠필드 |
외무장관 | |
외무장관 | 외무장관 |
임기 시작 | 1957년 6월 21일 |
임기 종료 | 1957년 9월 12일 |
총리 | 본인 |
이전 외무장관 | 레스터 B. 피어슨 |
다음 외무장관 | 시드니 얼 스미스 |
하원 의원 | |
선거구 | 프린스 앨버트 |
의회 | 캐나다 하원 |
임기 시작 | 1953년 8월 10일 |
임기 종료 | 1979년 8월 16일 |
이전 의원 | 프랜시스 헬름 |
다음 의원 | 스탠 호브데보 |
선거구 | 레이크 센터 |
의회 | 캐나다 하원 |
임기 시작 | 1940년 3월 26일 |
임기 종료 | 1953년 8월 10일 |
이전 의원 | 존 프레데릭 존스턴 |
다음 의원 | 선거구 폐지 |
음성 정보 |
2. 생애
온타리오주 노이슈타트 출신으로, 가족과 함께 서스캐처원주로 이주하여 성장했다. 서스캐처원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1919년 변호사가 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1920년대 진보보수당에 입당하며 정치에 발을 들였고, 여러 번의 도전 끝에 1940년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56년 당 대표로 선출되었으며, 1957년 총선을 승리로 이끌어 캐나다 제13대 총리 자리에 올랐다.
총리 재임 시절 캐나다 권리장전 제정, 이누이트 및 원주민의 선거권 확대 등 인권 분야에서 일부 진전을 이루었다. 또한, 캐나다 최초의 여성 장관과 원주민 출신 상원의원을 임명하기도 했다. 외교적으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은 논란으로 얼룩지기도 했다. 특히 캐나다의 항공 기술 자립을 상징하던 아브로 애로우 전투기 개발 계획을 1959년 돌연 중단시킨 결정은 큰 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미국의 보마크 미사일 도입을 둘러싼 국론 분열과 내각 내 갈등으로 정치적 리더십에 타격을 입었다. 결국 이러한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1963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1967년에는 당 대표직에서도 사임했다.
1979년 8월 16일 오타와 근교에서 사망했으며, 사후 그의 이름을 딴 새스커툰 국제공항이 명명되는 등 추모가 이루어졌다.
2. 1. 초기 생애 (1895년 ~ 1919년)

디펜베이커는 1895년 9월 18일 온타리오주 노이슈타트에서 윌리엄 토마스 디펜베이커와 메리 플로렌스 디펜베이커(옛 성씨 배너맨)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독일계 이민자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스코틀랜드계였다. 디펜베이커는 침례교 신자였다. 어린 시절 가족은 온타리오주 여러 곳으로 이사했다.[1] 아버지 윌리엄 디펜베이커는 교사였으며 역사와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를 학생들에게 심어주려 노력했다. 그는 이러한 노력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는데, 1903년 토론토 근처 그의 학교에 다니던 28명의 학생 중 4명(아들 존 포함)이 1940년부터 시작된 제19차 캐나다 의회에서 보수당 의원으로 활동했다. (다른 세 명은 로버트 헨리 맥그리거, 조셉 헨리 해리스, 조지 투스틴이었다.)
1903년 디펜베이커 가족은 서쪽으로 이주하여 아버지가 포트 칼턴(현재 서스캐처원주) 근처에서 일자리를 얻었다.[1] 1906년에는 보든 근처에서 1/4구획(약 160acre)의 미개발 토지를 청구했다.[2] 1910년 2월, 가족은 사스커툰으로 이주했는데, 그곳에는 서스캐처원 대학교가 있었다. 부모는 존과 그의 형제 엘머가 사스커툰에서 더 나은 교육 기회를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2]
존 디펜베이커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여덟 살이나 아홉 살 때 어머니에게 언젠가 총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그것이 특히 프레리 지역에 사는 소년에게는 불가능한 야망이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존은 1910년 사스커툰에서 대학교 첫 건물의 기념비를 놓기 위해 방문한 당시 총리 윌프리드 로리 경에게 신문을 판매했던 경험을 정치와의 첫 만남으로 이야기하곤 했다. 현직 총리와 미래의 총리는 잠시 대화를 나누었고, 로리 경은 그날 오후 연설에서 자신에게 "총리님,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습니다. 일을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대화를 끝낸 신문 배달부를 언급했다고 디펜베이커는 주장했다.[2] 그러나 이 만남의 실제 여부에 대해서는 후대에 의문이 제기되었으며, 일부에서는 디펜베이커가 선거 운동 중에 만들어낸 이야기일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1][2]
1977년 CBC와의 인터뷰에서 디펜베이커는 어린 시절 프랑스계 캐나다인, 원주민 캐나다인 및 메티스에 대한 불공정을 직접 목격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차별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많은 캐나다인들은 이름과 인종적 기원 때문에 사실상 2등 시민이었습니다.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1등 시민은 영국계 또는 프랑스계 캐나다인뿐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젊은 시절 저는 모든 캐나다인이 인종적 기원에 관계없이 평등하다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고, 차별의 맹세한 적이라고 선언했습니다."라고 말했다.[3][4]

1912년 사스커툰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디펜베이커는 서스캐처원 대학교에 입학했다.[1] 그는 1915년 예술학사 학위를, 이듬해인 1916년에는 석사 학위를 받았다.[1]
디펜베이커는 1916년 5월 제196대대(서부 대학교), CEF에 중위로 임관되었다.[5] 그해 9월, 그는 배치 전 훈련을 받기 위해 영국으로 파견된 300명의 하급 장교 중 한 명이었다. 디펜베이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삽에 맞은 부상으로 결국 제대하여 귀국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군 의료 기록에는 그러한 부상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그의 전기 작가 데니스 스미스는 이 부상이 심인성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1]
1917년 군에서 제대한 후, 디펜베이커는 서스캐처원으로 돌아와 법률 수습 변호사로 일을 재개했다. 그는 1919년 법학 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서스캐처원 대학교에서 3개의 학위를 모두 받은 첫 번째 학생이 되는 기록이었다.[1] 1919년 6월 30일 그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1]
2. 2. 변호사 및 정치 입문 (1919년 ~ 1940년)
서스캐처원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1919년 서스캐처원주의 작은 마을 워코(Wakaw)에 자신의 법률 사무소를 열었다. 당시 워코는 인구 400명에 불과했지만, 농촌 지역의 중심지였고 자체 지방 법원도 갖추고 있었다. 사스커툰, 프린스앨버트, 험볼트 등 상급 법원이 있는 도시들과의 접근성도 좋았다. 지역 주민 대부분은 이민자였고 소송 성향이 강한 편이었다. 이미 마을에 있던 변호사에 대한 주민들의 충성심 때문에 처음에는 사무실 공간을 구하기 어려워, 빈 땅을 빌려 두 칸짜리 나무 오두막을 직접 지어야 했다.
디펜베이커는 뛰어난 변호 실력으로 곧 주민들의 인정을 받았다. 특히 방어 변호사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개업 첫해에 맡은 62건의 배심원 재판 중 절반가량에서 승소했다. 그는 변호측 증인을 거의 부르지 않는 전략을 사용하여 검찰의 반박 증언 기회를 줄이고 자신이 마지막 변론을 할 수 있도록 했다. 1920년에는 마을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3년간 활동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사스커툰에서 올리브 프리먼과 교제했으나 그녀가 1921년 브랜든으로 이사하면서 헤어졌고, 이후 베스 뉴웰과 약혼했지만 1923년 그녀가 결핵 진단을 받자 관계를 정리했다. 뉴웰은 이듬해 사망했다. 디펜베이커 자신도 위궤양으로 메이요 클리닉에서 수술을 받는 등 한동안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1924년 5월, 워코에서의 법률 업무를 장악한 디펜베이커는 프린스앨버트로 이주했고, 워코 사무실은 법률 파트너에게 맡겼다.
당시 서스캐처원주는 1905년 연방 가입 이후 강력한 정치 기계를 운영하는 자유당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디펜베이커는 훗날 "서스캐처원에서 보수당원은 수렵법에 의해서나 보호받을 수 있었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는 자유당원이었지만, 존 디펜베이커는 보수당에 끌렸다. 서부 캐나다에서 자유 무역이 인기가 있었음에도, 그는 자유 무역이 캐나다를 미국의 경제적 종속국으로 만들 것이라는 보수당의 주장에 동의했다. 그는 자유당 측으로부터 좋은 제안을 받기도 했으나 거절하고 1925년 보수당원임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1925년은 연방 선거와 주 선거가 모두 열리는 해였다. 디펜베이커는 6월 주 선거를 앞두고 보수당 조직위원회에서 연설했으며, 8월에는 프린스 앨버트 지역구의 보수당 후보로 지명되었다. 당시 이 지역구는 보수당에게 매우 불리한 곳이었다. 선거 운동 과정에서 그는 독일계라는 이유로 "훈족"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10월 29일 치러진 연방 선거에서 그는 자유당과 진보당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치며 선거 보증금마저 잃었다.

1925년 선거에서 당선된 찰스 맥도널드는 곧 윌리엄 라이온 맥켄지 킹 총리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킹 총리는 자신의 지역구에서 낙선했기 때문에 새로운 지역구가 필요했다. 1926년 2월 보궐선거에서 킹은 무난히 당선되었다. 한편, 1925년 연방 선거 결과 자체는 보수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확보했지만 과반에는 미치지 못해, 킹 총리는 진보당의 지지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몇 달 후 킹-바잉 사건으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아서 메이건이 이끄는 보수당이 잠시 집권했지만 곧 하원에서 패배했고, 결국 의회가 해산되어 1926년 연방 선거가 치러졌다. 디펜베이커는 다시 프린스 앨버트 지역구의 보수당 후보로 나서 현직 총리인 맥켄지 킹과 직접 대결하는 드문 상황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킹에게 패배했고, 자유당은 연방 선거에서 승리하여 킹은 총리직을 유지했다.
여러 차례의 선거 패배에도 불구하고 디펜베이커는 정치 활동을 계속했으며, 마침내 1940년 진보보수당 소속으로 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2. 3. 의회 활동 및 당수 경선 (1940년 ~ 1957년)
1940년 레이크 센터 선거구에서 보수당 소속으로 캐나다 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당시 보수당은 캐나다 하원 총 245석 중 39석만을 얻는 데 그쳤다. 보수당은 1942년 캐나다 진보보수당으로 당명을 변경했으며, 디펜베이커는 창당부터 소속되어 활동했다.1956년 그는 캐나다 진보보수당 당수로 선출되었다. 이후 1957년 총선에서 당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같은 해 6월 21일 캐나다의 제13대 총리로 취임하였다.
2. 4. 진보보수당 당수 및 총리 취임 (1956년 ~ 1957년)
1940년 서스캐처원주 레이크 센터에서 진보보수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이후 1956년 진보보수당 당수로 선출되어 11년 동안 당수직을 역임했다.1957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1957년 6월 21일 제13대 총리에 취임하였다. 총리로서 캐나다를 더욱 부유한 국가로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으며, 오대호와 대서양을 잇는 세인트로렌스 수로 개통에 기여했다. 또한 캐나다 최초의 여성 장관을 임명하고, 최초의 원주민 출신 상원의원을 임명하는 등 진보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3. 총리 재임 (1957년 ~ 1963년)
1957년 6월 21일, 캐나다 진보보수당의 당수로서 캐나다 제13대 총리에 취임하였다. 그는 캐나다를 더욱 부강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임기를 시작했으며, 오대호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세인트로렌스 수로 개통 사업을 지원하는 등 국가 발전에 기여했다.
디펜베이커 정부는 캐나다 역사상 최초로 여성 장관을 임명하고, 캐나다 원주민 출신 인사를 상원의원으로 임명하는 등 진보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또한 캐나다 권리장전을 제정하고 이누이트와 캐나다 원주민에게 연방 선거권을 부여하여 인권 신장에도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외교적으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며 남아공의 영연방 탈퇴를 압박하는 등 국제 사회에서 인권 문제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미국 케네디 행정부와는 보마크 미사일의 캐나다 내 핵탄두 배치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었으며,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의 일방적인 통보와 미흡한 초기 대응으로 국내외적인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러한 핵무기 관련 논쟁은 내각 분열로 이어졌고, 결국 아브로 애로우 전투기 개발 계획 취소와 더불어 디펜베이커 정부의 주요 실책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결국 보마크 미사일 도입을 둘러싼 논란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1963년 총선에서 패배하였고, 같은 해 4월 22일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3. 1. 내정
디펜베이커는 의원 수가 줄고 사기가 저하된 보수당 의원단에 합류했다. 당시 보수당 대표였던 로버트 매니언은 1940년 총선에서 자신의 의석조차 확보하지 못했고, 자유당은 181석을 차지하며 압승했다. 보수당은 전시 연립 정부 참여를 희망했지만,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 총리는 이를 거절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하원은 실질적인 역할을 거의 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국정 운영은 내각이 명령령을 통해 처리하는 비상 체제로 이루어졌다.디펜베이커는 캐나다 방위 규정에 관한 하원 위원회(전 당파 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재판 없이 체포 및 구금을 허용하는 전시 규정을 검토하는 역할을 맡았다. 1940년 6월 13일, 그는 하원에서 첫 연설을 통해 이 규정을 지지하면서도, 대부분의 독일계 캐나다인들은 국가에 충성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디펜베이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많은 일본계 캐나다인들의 강제 이주와 일본계 캐나다인 강제 수용에 반대하며 싸웠으나 실패했다고 주장했지만, 역사학자들은 그가 실제로 수용 반대 투쟁을 벌였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디펜베이커의 전기 작가 데니스 스미스에 따르면, 그는 매켄지 킹 총리의 정치적 수완에 대해 내심 감탄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펜베이커는 매켄지 킹에게 성가신 비판자로 자리매김했다. 디펜베이커와 동료 보수당 의원 하워드 그린이 정부를 비판하자, 격분한 총리는 보수당 의원들을 "폭도"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번은 디펜베이커가 다른 두 명의 보수당 지도자와 함께 전쟁 상황에 대한 총리의 브리핑에 참석했을 때, 매켄지 킹은 자신의 지역구(프린스 앨버트) 유권자이기도 했던 디펜베이커에게 "당신이 여기에 있을 자격이 뭐지? 당신이 말할 때마다 내 가슴을 후벼 파는군."이라고 쏘아붙였다.
보수당은 아서 메이건 전 총리에게 다시 당 대표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메이건은 1941년 R. B. 베넷 총리에 의해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으나, 당의 요청을 수락하고 상원의원직을 사임했다. 하지만 그는 온타리오주 하원 보궐선거에서 패배하여 하원에 입성하지 못했다. 하원에 들어가지 못했음에도 그는 몇 달간 당 대표직을 유지했다. 메이건은 자유당을 약화시키고 협동조합 연방당(CCF, 신민주당의 전신)으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 보수당의 노선을 좀 더 진보적으로 바꾸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매니토바주의 자유-진보당 총리였던 존 브래큰에게 보수당 대표직을 제안했다. 디펜베이커는 이러한 지도자 선출 과정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1942년 당 대표 대회에 직접 출마했다. 브래큰은 2차 투표에서 당선되었고, 디펜베이커는 두 번의 투표 모두에서 3위에 그쳤다. 브래큰의 요청에 따라 당명은 "캐나다 진보보수당"으로 변경되었다. 브래큰은 보궐선거를 통해 하원에 입성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이후 보수당이 새로운 원내대표를 선출했을 때, 디펜베이커는 한 표 차이로 패배했다.
브래큰은 1945년 캐나다 연방 총선에서 하원에 당선되어, 5년 만에 보수당은 하원에 의석을 가진 당 대표를 맞이하게 되었다. 진보보수당은 67석을 얻었고, 자유당은 125석, 기타 소수 정당 및 무소속 후보가 52석을 차지했다. 디펜베이커는 자신의 지역구에서 1,000표 이상 득표율을 높였고, 매켄지 킹 총리가 자신의 옛 지역구였던 프린스 앨버트에서 CCF 후보에게 패배하는 것을 지켜보는 만족감을 누렸다. (매켄지 킹은 몇 달 후 온타리오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의회로 복귀했다.)
디펜베이커는 진보보수당 내에서 좌파 대중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대부분의 캐나다인이 의회가 시민자유를 보호해주기를 바란다고 믿으며, 정부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막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권리장전 제정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는 매켄지 킹 정부가 전쟁 후 소련 스파이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재판 없이 사람들을 투옥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고, 전시 비상 권한이 평시에도 영구적으로 유지되려는 정부의 경향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1948년 초, 당시 73세였던 매켄지 킹이 은퇴를 발표했고, 그 해 말 루이 생로랑이 그의 뒤를 이었다. 브래큰 대표 체제 하에서 보수당 의석 수가 거의 두 배로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내 유력 인사들은 그의 지도력에 불만을 품고 사퇴 압력을 가했다. 이들은 온타리오주 총리로서 3번의 연속적인 주 선거 승리를 이끌고 프랑스어권 지역에서도 지지 기반을 확보한 조지 드류가 진보보수당을 승리로 이끌 적임자라고 믿었다. 1948년 7월 17일 브래큰이 사임하자 디펜베이커는 당 대표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주로 토론토의 베이 스트리트를 중심으로 한 재계 인사들은 디펜베이커의 서부 대중주의 노선보다 드류의 보수적인 정치 성향을 선호했다. 보수당 지도부는 오타와에서 열린 1948년 대표 선출 대회에서 드류를 지지하며 300명이 넘는 대의원을 직권으로 임명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 당원은 이를 두고 "베이 스트리트의 보이지 않는 손이 표시한 유령 투표용지와 유령 대의원들이 조지 드류를 선택할 것이고, 그는 우리 모두를 격려하는 유령이 쓴 연설을 할 것이며, 우리는 정치적 무덤으로 활기차게 행진할 것이다"라고 냉소적으로 비판했다. 드류는 1차 투표에서 디펜베이커를 압도적인 표 차이로 누르고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후 1949년 캐나다 연방 총선에서 진보보수당은 41석으로 의석수가 줄어드는 참패를 당했는데, 이는 1940년 최저치보다 단 두 석 많은 결과였다. 퀘벡주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은 퀘벡에서 단 두 석을 얻는 데 그쳤다.
피터 뉴먼은 디펜베이커가 여러 차례의 실패를 겪지 않았다면 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만약 그가 신참 변호사 시절 1925년이나 1926년 연방 선거에서 프린스 앨버트 지역구 의석을 따냈다면... 디펜베이커는 아마 베넷의 대공황 내각의 무명 장관으로만 기억되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1933년 고향 시장 선거에서 승리했다면... 아마 전혀 기억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가 1942년 당 대표 선거에서 성공했다면, 그는 존 브래큰의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고, 6년 동안 몰락하는 당의 지도자로서, 충분히 변화하지 못한 당을 이끌었던 프레리의 급진주의자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1948년 드류를 물리쳤다면,] 그는 1949년과 1953년 선거에서 루이 생 로랑의 정치적 힘 앞에서 좌절했을 것이다.
집권 자유당은 디펜베이커의 지역구를 없애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다. 1948년, 레이크 센터 지역구는 디펜베이커에게 유리한 지역을 제외하도록 선거구가 조정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1949년 선거에서 서스캐처원주 출신의 유일한 진보보수당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52년에는 자유당이 주도하는 선거구 재획정 위원회가 레이크 센터 지역구를 완전히 폐지하고 유권자들을 다른 세 개의 지역구로 분산시켰다. 디펜베이커는 회고록에서 당시 정계 은퇴를 고려했다고 밝혔다. 자신보다 겨우 한 살 많은 드류가 당 대표로 있는 한 서부 출신인 자신이 승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고, 온타리오주의 로펌으로부터 좋은 조건의 제안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노골적인 게리맨더링에 분노하여 계속 싸우기로 결심했다. 진보보수당은 프린스 앨버트 지역구에서 1911년 단 한 번 승리했을 뿐이었지만, 디펜베이커는 1953년 캐나다 연방 총선에서 이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는 이후 남은 정치 인생 동안 이 지역구를 지켰다. 디펜베이커가 전국을 돌며 당 후보들을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보수당은 1953년 선거에서 51석을 얻는 데 그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생 로랑의 자유당은 5회 연속 과반수 정부를 구성했다. 정부는 그의 의회 퇴출을 시도하는 것 외에도, 디펜베이커의 프린스 앨버트 자택 바로 옆에 미혼 원주민 여성을 위한 주택을 건설하기도 했다.
디펜베이커는 변호사로서의 활동도 계속했다. 1951년, 그는 캐누 강 열차 충돌 사건으로 기소된 젊은 전신 기사 아서톤의 변호를 맡아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사고로 21명이 사망했는데, 대부분 한국 전쟁 참전을 위해 이동 중이던 캐나다 군인들이었다. 디펜베이커는 1500CAD를 지불하고 형식적인 변호사 시험을 치러 브리티시컬럼비아 법조협회에 가입하여 사건을 수임했고, 결국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그는 배심원단의 편견 가능성을 지적하고, 과거 유사 사건에서 통신 간섭으로 인해 정보가 잘못 전달된 사례를 제시하며 변론했다.
1940년대 중반, 그의 첫 부인 에드나는 정신 질환을 앓기 시작하여 한동안 사립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1951년 사망했다. 1953년, 디펜베이커는 와카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올리브 팔머(결혼 전 성은 프리먼)와 재혼했다. 올리브 디펜베이커는 남편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두 번의 결혼 모두 자녀는 없었다. 2013년에는 DNA 검사 결과 그가 혼외 자식을 최소 두 명 두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검사를 진행한 관계자에 따르면, 두 자녀의 어머니 사이에는 디펜베이커가 두 사람 모두를 고용했다는 점 외에는 다른 공통점이 없었으며, 친자 관계 확률은 99.99%에 달한다고 밝혔다.
디펜베이커는 1953년 프린스 앨버트 지역구에서 승리했지만, 진보보수당은 드류 대표 체제 하에서 두 번 연속 총선에서 패배했다. 언론에서는 드류 대표의 사퇴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드류는 자리를 지키려 했고, 디펜베이커는 불충성스럽게 보일 수 있는 행동을 신중하게 피했다. 그는 매일 오후 5시에 드류의 사무실에 모여 술을 마시며 환담하던 드류의 측근 그룹인 이른바 "5시 클럽"의 일원은 아니었다. 1955년 무렵에는 보수당 내에서 드류가 당을 승리로 이끌 능력이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동시에 고령의 생 로랑 총리가 정치에 염증을 느끼면서 자유당 내부도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드류는 1956년 트랜스캐나다 파이프라인 건설을 둘러싼 소위 파이프라인 논쟁에서 정부에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정부가 파이프라인 자금 조달 법안 처리를 서두르면서 논쟁 초반부터 토론 종결을 강행하자, 진보보수당과 CCF는 몇 주 동안 의회 의사 진행을 방해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디펜베이커는 파이프라인 논쟁에서는 비교적 소극적인 역할을 했으며, 단 한 차례 발언하는 데 그쳤다.
3. 2. 외교 정책
1957년 취임 직후, 디펜베이커는 런던에서 열린 1957년 영연방 총리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캐나다의 미국 수입품 지출 중 15%를 영국 수입품으로 돌리자는 제안으로 주목받았으나, 영국이 제안한 자유무역협정은 캐나다가 거절했다. 해롤드 맥밀런 영국 정부가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을 추진하자, 디펜베이커는 캐나다의 대영 수출에 타격이 올 것을 우려했다. 그는 영국이 영연방을 우선해야 한다고 믿으며 영국의 EEC 가입을 막으려 했고, 이는 영국의 불만을 샀다. 영국의 첫 EEC 가입 시도는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에 의해 거부되었다.1959년까지 디펜베이커 정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대해 비판을 자제하는 입장을 유지했다. 이는 당시 자유당의 입장과 비슷했으나, 협동 연방(CCF)의 헤이즌 아규 대표는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1960년, 남아공 백인 유권자들이 196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투표를 통해 공화국 전환을 결정할 경우에도 영연방 회원국 지위를 유지하려 하자 상황이 변했다. 남아공은 1960년 영연방 총리 회의에 국민투표 결과와 상관없이 영연방 잔류를 허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디펜베이커는 남아공 외무장관 에릭 루에게 개인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반감을 표하며, 최소한 과거에 흑인과 유색인종이 가졌던 대표성이라도 회복시켜 줄 것을 촉구했다. 당시 암살 시도에서 회복 중이던 헨드릭 페르보에르트 총리를 대신해 참석한 루 장관은 이를 거절했다. 회의에서는 사전 결정이 남아공 내정에 간섭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960년 10월 5일, 남아공 백인 유권자들은 공화국 전환을 결정했다. 1961년 1961년 영연방 총리 회의에서 페르보에르트 총리는 남아공의 영연방 잔류를 공식 요청했다. 총리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리자, 디펜베이커는 남아공이 다른 회원국들과 함께 아파르트헤이트를 원칙적으로 비난하는 성명에 동의하는 경우에만 재가입을 허용하자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남아공의 회원 자격 유지가 어려워지자 페르보에르트는 결국 신청을 철회하고 영연방을 탈퇴했다. 피터 뉴먼은 이를 "디펜베이커의 국제 정치에 대한 가장 중요한 공헌"이라 평가하며, 디펜베이커가 이 일로 영웅 대접을 받으며 귀국했다고 기록했다.
수상 재임 기간 동안 미국 존 F. 케네디 행정부와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1961년 2월 디펜베이커가 워싱턴 D.C.를 방문했을 때, 케네디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그의 이름을 잘못 부르는 등 캐나다를 가볍게 여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디펜베이커는 케네디에게 오타와 방문을 요청했지만, 케네디는 오타와 공항 도착 시 또다시 디펜베이커의 이름을 잘못 불렀다. 또한, 케네디는 캐나다 의회 연설에서 디펜베이커가 이미 반대 의사를 밝혔던 캐나다 내 핵무기 배치 문제와 캐나다의 미주기구(OAS) 가입 문제를 거론하며 압박했으며, 회담 후에는 디펜베이커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자필 메모를 실수로 남겼고, 공식 만찬 자리에서는 디펜베이커보다 야당 대표였던 레스터 B. 피어슨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였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디펜베이커에게 직접적인 사전 연락 없이, 자신의 TV 연설 2시간 전에 전직 대사를 파견해 통보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에 분노한 디펜베이커는 캐나다가 미국과 쿠바 사이에서 중립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미국 정부는 이를 미국에 대한 지원 거부이자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불신으로 받아들였다. 미국이 방어준비태세인 DEFCON 3으로 격상했음에도, 디펜베이커는 캐나다군에 즉각적으로 동일 수준의 경계 태세 발령을 지시하지 않아 국내 여론과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결정적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으로서 캐나다 내에 핵탄두를 장착한 보마크 미사일을 배치하는 문제에 대한 디펜베이커의 모호한 태도는 내각 분열과 야당의 거센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미국 국무부가 "디펜베이커 총리가 의회 연설에서 사실과 다른 내용을 말했다"는 취지의 이례적인 공개 비판 성명을 발표하자, 캐나다 정부는 이에 항의하며 역사상 처음으로 주미 대사를 소환했다. 디펜베이커는 "캐나다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야 하는가"를 국민에게 묻겠다며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피어슨이 이끄는 자유당을 지원했다. 내각에서도 절반의 각료만이 디펜베이커를 지지하는 등 분열된 상황 속에서 치러진 선거 결과, 진보보수당은 자유당에 패배했고 디펜베이커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3. 3. 몰락
1961년 2월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의 첫 만남부터 디펜베이커 정부와 미국 행정부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다. 케네디는 기자회견에서 디펜베이커의 이름을 잘못 부르는 등 캐나다를 다소 가볍게 여기는 태도를 보였다.[33] 디펜베이커의 초청으로 케네디가 오타와를 방문했을 때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케네디는 오타와 공항 도착 시 또다시 디펜베이커의 이름을 잘못 불렀고, 캐나다 의회 연설에서는 디펜베이커가 이미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캐나다 내 핵무기 배치 문제와 캐나다의 미주기구 가입 문제를 거론하며 압박했다. 심지어 회담 후에는 디펜베이커를 비판하는 내용의 손글씨 메모를 실수로 남기기도 했으며, 공식 만찬 자리에서는 디펜베이커보다 야당 대표였던 피어슨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34][35]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는 디펜베이커에게 직접적인 사전 연락 없이 TV 연설 2시간 전에 전직 대사를 보내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에 분노한 디펜베이커는 미국과 쿠바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개입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 정부는 이를 자국에 대한 지원 거부이자 케네디에 대한 불신으로 받아들였다.[34] 미국이 방어준비태세인 DEFCON 3으로 격상했음에도 디펜베이커는 캐나다군에 즉각 동일 수준의 경계 태세 발령을 주저했고, 이는 결국 캐나다 국내 여론과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핵무기 문제는 디펜베이커 정부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NATO의 일원으로서 캐나다가 미국산 보마크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하여 배치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은 내각을 분열시켰다. 1963년 1월 3일, 은퇴를 앞둔 NATO 최고 사령관 로리스 노르스타드 장군은 오타와 기자회견에서 캐나다가 핵무기를 수용하지 않으면 NATO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는 핵무기 문제에 대한 논란을 더욱 증폭시켰고, 디펜베이커는 이 발언이 자신의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케네디 행정부의 음모라고 의심했다. 이전까지 핵무기 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보이지 않던 자유당 대표 피어슨은 1월 12일, 정부가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핵무기 수용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내각은 핵무기 수용을 주장하는 더글러스 하크니스 국방장관 지지파와 반대하는 하워드 그린 외무장관 지지파로 나뉘어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디펜베이커는 1월 25일 하원에서 연설했지만, 그의 입장은 여전히 모호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크니스는 처음에는 디펜베이커가 핵무기 수용을 지지하는 것으로 해석했으나, 언론과의 대화 후 자신의 해석이 보편적이지 않음을 깨닫고 디펜베이커에게 명확한 입장을 요구했다. 그러나 디펜베이커는 계속해서 확답을 피했다. 설상가상으로 1월 30일, 미국 국무부는 디펜베이커의 하원 연설 내용에 오류가 있다는 이례적인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이는 캐나다 주권에 대한 간섭으로 받아들여졌고, 캐나다 정부는 항의의 표시로 워싱턴 주재 대사를 소환하는 초유의 조치를 취했다. 모든 정당이 미국의 행동을 비난했지만, 야당들은 디펜베이커에게 핵무기 문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힐 것을 더욱 강하게 요구했다.
내각 분열은 극에 달했다. 최소 6명의 각료가 디펜베이커의 사퇴를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2월 3일 열린 긴급 내각 회의에서 하크니스 장관은 디펜베이커가 더 이상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한다며 사임을 선언했다. 디펜베이커는 자신을 지지하는 각료들에게 일어설 것을 요청했으나 절반 정도만 호응하자 총독에게 사임 의사를 밝히겠다고 말했다. 그린 장관은 동료들을 "배신자들의 소굴"이라고 비난했지만, 결국 디펜베이커는 다음 날 예정된 불신임안 표결에 맞서기로 했다. 그러나 하크니스는 사임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정부의 운명을 결정할 사회신용당과의 협상이 결렬되면서, 2월 5일 하원에서 정부 불신임안은 찬성 142표, 반대 111표로 가결되었다.

불신임안 가결 다음 날, 두 명의 각료가 추가로 사임했다. 1963년 캐나다 연방 총선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진보보수당은 여론조사에서 자유당에 15% 포인트나 뒤처져 있었다. 피어슨이 이끄는 자유당의 압승이 예상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디펜베이커는 포기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선거 운동에 임했다. 정치 평론가 피터 스터스버그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옛 디펜베이커는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정부 붕괴의 모든 고통은 사라졌고, 그는 국민과의 접촉으로 부활한 거인처럼 보였다. 이것은 디펜베이커의 최고의 선거였다. 그는 유세장에서 사실상 혼자였다. 고든 처칠과 같은 충실한 지지자들조차도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위해 싸우고 있는 자신의 지역구에 밀착해야 했다.
백악관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했지만, 케네디 대통령은 비공식적으로 자유당의 승리를 원했으며 자신의 여론 조사 전문가인 루 해리스를 자유당 선거 운동을 돕도록 파견하기도 했다. 1963년 4월 8일 치러진 선거 결과, 자유당은 129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으나 과반수에는 5석이 부족했다. 진보보수당은 95석을 얻는 데 그쳤다. 디펜베이커는 며칠간 사임을 미뤘으나, 6명의 퀘벡 사회신용당 의원들이 피어슨의 정부 구성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자 결국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들의 지지로 피어슨은 하원에서 과반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고, NDP의 지지를 받아 소수 정부를 구성했다.
4. 총리 퇴임 이후 (1963년 ~ 1979년)
1963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캐나다 진보보수당 대표직을 유지하며 야당 대표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1963년 11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암살 소식을 듣고 캐나다 하원에서 "자유의 등불이 꺼졌다. 어떤 의견 차이가 있었든, 그는 나에게 있어 자신의 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자유의 구현으로 여겨졌다"고 추모 연설을 했다.
1964년 캐나다 국기 논쟁 당시, 디펜베이커는 당시 총리였던 레스터 피어슨의 자유당 정부가 추진한 단풍잎 깃발 디자인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기존의 캐나다 적색기나 영연방과의 유대를 상징하는 디자인을 선호했으며, 채택된 단풍잎 깃발을 페루 국기에 빗대어 "페루 사람들이 경례할 만한 깃발"이라고 비판했다. 퀘벡 주에서의 지지율 하락을 우려한 레옹 발서 등 퀘벡 보수당 인사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피어슨 정부는 토론 종결 동의(cloture)를 통해 법안 통과를 강행했다. 표결 당시 디펜베이커는 반대파 의원들을 이끌고 "갓 세이브 더 퀸"을 불렀고, 찬성파 의원들은 "오 캐나다"를 불렀다.
1966년에는 문징거 사건이 불거졌다. 디펜베이커 정부 시절 두 명의 각료가 소련 스파이로 의심받던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의혹이었다. 피어슨 정부는 이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왕립 위원회를 설치했고, 디펜베이커는 이를 정치적 공격으로 간주했다. 위원회는 실제적인 안보 침해는 없었다고 결론 내렸지만, 디펜베이커가 해당 각료들을 해임하지 않은 점을 비판했다.
당내에서는 디펜베이커의 리더십에 대한 불만이 점증했다. 특히 1965년 총선에서 진보보수당이 의석을 소폭 늘리는 데 그치자, 당 대표 달튼 캠프를 중심으로 디펜베이커의 퇴진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1966년 진보보수당 전당대회에서 캠프는 차기 지도부 선출 대회 개최를 요구하는 안을 관철시켰다. 디펜베이커는 당 정책 회의에서 캐나다를 '두 개의 국가(two nations)'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에 반발하여 1967년 지도부 대회 출마를 결심했으나, 세 차례의 투표에서 모두 5위에 머무른 뒤 로버트 스탠필드가 최종 승리하자 후보직에서 사퇴했다. 그는 대회 연설에서 "나의 길은 끝났다... 은퇴하지만, 캐나다를 하나의 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나의 열망은 변함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당 대표직 상실 이후 디펜베이커는 후임자인 스탠필드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1967년 12월 피어슨이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피에르 트뤼도가 자유당 대표 및 총리가 되었다. 디펜베이커는 트뤼도에 대해 불신과 존중이 뒤섞인 감정을 보였다. 1968년 총선에서 트뤼도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과반 정부를 구성했고, 진보보수당은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25석을 잃는 참패를 당했다. 디펜베이커는 스탠필드와 자신을 축출하는 데 앞장섰던 달튼 캠프(이 선거에서 낙선)의 실패에 대해 공공연히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지역구인 프린스 앨버트에서는 쉽게 재선되었다.
스탠필드는 당 통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디펜베이커와 그의 지지자들은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특히 캐나다 공식 언어법 제정 당시 디펜베이커는 당론과 달리 법안 반대를 촉구했고, 진보보수당 의원 중 거의 절반이 당 대표의 지침에 반하거나 기권하는 등 당내 분열상이 노출되기도 했다. 의정 활동 외에도 디펜베이커는 활발한 강연 활동을 펼쳤으며,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총 3권의 회고록을 출간했다. 1972년 오랜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피어슨이 암으로 사망했을 때, 디펜베이커는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요청받았으나 "그가 노벨상을 받을 만한 이유는 없었다"고만 언급했다.
1972년 총선에서는 트뤼도 정부에 대한 실망감으로 진보보수당을 위해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에 참여했다. 이 선거에서 진보보수당은 자유당에 불과 2석 뒤지는 결과를 얻었다. 디펜베이커는 트뤼도가 과반수 확보에 실패한 것에 안도하면서도 스탠필드가 정권을 잡지 못한 것에도 만족감을 느꼈다. 1974년 총선에서 트뤼도가 다시 과반수를 확보했지만, 디펜베이커는 자신의 지역구에서 1만 1천 표 이상의 압도적인 표차로 재선되었다.
1976년 신년 서훈에서 디펜베이커는 영국 군주가 직접 수여하는 명예 동반자 훈장(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 22일, 오랜 투병 생활을 하던 아내 올리브 디펜베이커가 사망하면서 깊은 슬픔에 잠겼다.
1976년 스탠필드의 후임으로 조 클라크가 당 대표로 선출되었으나, 디펜베이커는 클라크가 과거 자신의 지도력에 도전했던 인물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앙금을 품고 있었다. 디펜베이커는 경선에서 클로드 와그너를 지지했지만, 클라크가 승리하자 공개적으로는 "이 당의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클라크에 대한 비판을 계속했으며, 스탠필드가 공개적으로 "클라크에게 칼을 꽂는 것을 그만두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1978년 디펜베이커는 다시 한번 총선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1979년 5월 총선을 앞두고 경미한 뇌졸중을 겪었으나, 언론에는 독감으로 알려진 채 선거 운동을 완주하여 신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이 선거에서 조 클라크가 이끄는 진보보수당은 트뤼도의 자유당을 꺾고 소수 정부를 구성했다. 디펜베이커는 클라크 내각의 취임식을 보기 위해 오타와로 돌아왔으나, 여전히 클라크와는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두 달 뒤인 1979년 8월 16일, 디펜베이커는 오타와 자택 서재에서 심장마비로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디펜베이커의 장례식은 그가 생전에 정부 관계자들과 협의하여 세부적으로 계획한 대로 국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유해는 국회의사당 명예의 전당(Hall of Honour)에 이틀 반 동안 안치되었으며, 약 1만 명의 시민들이 조문했다. 운구 행렬은 기차를 이용해 오타와에서 서스캐처원주 새스커툰까지 느리게 이동했으며, 많은 캐나다인들이 철로변에 나와 마지막 길을 지켜보았다. 그의 유해는 서스캐처원 대학교 캠퍼스 내에 건립된 디펜베이커 센터 외부에 안장되었으며,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올리브의 유해도 함께 묻혔다.
5. 유산
디펜베이커의 정책 중 일부는 그의 퇴임 이후 16년간 이어진 자유당 정부 시대에 폐기되었는데, 특히 외교 정책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캐나다 역사가 로버트 보스웰(Robert Bothwell)은 "디펜베이커가 사임할 무렵 그의 외교 정책 수행 방식은 점점 더 많은 캐나다인들에게 비난을 받았고, 미국과 영국과의 관계는 최악이었다"고 평가했다. 1963년 말 첫 번째 보마크(Bomarc) 미사일 탄두가 캐나다에 배치되었으나, 이는 논란 끝에 1984년 존 터너(John Turner)의 단기 정부 동안 마지막 탄두가 제거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디펜베이커가 캐나다를 미주기구 밖에 두기로 한 결정은 후임자인 피어슨 정부에서도 유지되었고, 캐나다는 1989년 브라이언 멀러니의 진보보수당 정부 하에서야 미주기구에 가입했다.
그러나 현대 캐나다의 중요한 특징 중 일부는 디펜베이커에게서 비롯되었다. 그가 추진한 캐나다 권리장전은 여전히 유효하며, 캐나다 정치 문화의 변화를 예고했고, 결국 그의 사후에 발효된 캐나다 권리와 자유 헌장(Canadian Charter of Rights and Freedoms)의 토대가 되었다. 캐나다 철학자 조지 그랜트(George Grant)는 디펜베이커의 경력을 캐나다 국가 정체성의 더 넓은 궤적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 디펜베이커의 혼란과 불일치는 캐나다 운명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의 행정부는 기득권층의 합리적인 통치하에 캐나다가 회복할 수 있는 일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 고귀한 목표에 적합한 정책을 찾으려는 당황한 시도였습니다. 1957년 선거는 캐나다 국민의 마지막 국민주의적 몸부림이었습니다. 디펜베이커 정부는 그 희망의 격렬한 종말의 노래였습니다.[10]
역사가 콘래드 블랙(Conrad Black)은 디펜베이커에 대해 "성공적인 총리는 아니었다"고 평가하며, 정책 부재, 부족한 행정력, 비일관성, 우유부단함 등을 지적했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무서운 존재였고, 치명적인 선거 운동가였으며, 특이하지만 종종 고무적인 연설가였고, 뛰어난 국회의원이었으며, 많은 미덕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덧붙였다. 블랙은 디펜베이커가 재정적으로 정직했고, 평범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열정적으로 지지했으며, 인종적, 종교적, 사회경제적 차별에 격렬히 반대했다고 평가했다.[9]
디펜베이커의 이름은 여러 장소에 남아있다. 그의 고향인 서스캐처원주에는 가장 큰 호수인 디펜베이커 호수(Lake Diefenbaker)와 프린스 앨버트의 디펜베이커 다리(Diefenbaker Bridge) 등이 그의 생전에 명명되었다. 사후인 1993년에는 서스캐툰 시가 공항 이름을 서스캐툰 존 G. 디펜베이커 국제공항(Saskatoon John G. Diefenbaker International Airport)으로 변경했다. 프린스 앨버트시는 1947년부터 1975년까지 그가 거주했던 집을 디펜베이커 하우스(Diefenbaker House)라는 공립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이 집은 2018년 캐나다 국립 사적지(National Historic Sites of Canada)로 지정되었다.[11]
디펜베이커는 캐나다에서 침체되었던 정당 시스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1957년 승리에 영감을 받은 클라크와 멀러니는 이후 진보보수당을 이끌고 총선 승리를 거두었다. 전기 작가 데니스 스미스(Denis Smith)는 "그는 정치에서 실패와 좌절 속에서 겨우 2년 남짓 성공을 거두었지만, 생애의 끝과 그 이후까지도 깊이 헌신적인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을 유지했다"며 "그가 부흥시킨 연방 보수당은 그가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난 후 25년 동안 프레리 주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남았다"고 평가했다. 스티븐 하퍼 정부는 캐나다의 장소와 기관 명명에서 보수당 총리들이 소홀히 다뤄졌다고 보고, 오타와의 연방 사무실 건물(전 오타와 시청)을 존 G. 디펜베이커 건물(John G. Diefenbaker Building)로 명명했다. 또한 디펜베이커의 이름을 딴 인권상과 쇄빙선 건조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스티븐 하퍼는 연설에서 종종 디펜베이커의 북부 개발 비전을 언급했다.
보수당 상원의원 마조리 르브레통(Marjory LeBreton)은 디펜베이커가 야당 대표 시절 그의 사무실에서 일했으며, "그는 캐나다에 많은 최초들을 가져왔지만, 그 후에 온 사람들에 의해 역사에서 많이 지워졌다"고 회고했다. 역사가 마이클 블리스(Michael Bliss)는 디펜베이커를 "프레리 지역 대중주의자로서 보수당을 혁신하려 했던 역할"이 그의 개인적 특이성보다 더 중요하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블리스는 "그가 직면한 어려움은 당시 자유당과 적대적인 언론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해결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개인적이고 평등주의적 가치의 매혹적이고 여전히 관련성 있는 조합을 위해 싸웠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의 리더십에는 "어떤 종류의 무질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의 유산 중에는 캐나다 최초의 여성 장관 임명, 최초의 원주민 출신 상원의원 임명, 그리고 이누이트와 원주민에게 선거권을 부여한 것 등이 포함된다.
6. 서훈
- 1976년 컴패니언 오브 아너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영어, CH)
7.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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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25년 선거 | 하원의원 (프린스앨버트 선거구) | 15대 | 보수당 | 23.30% | 2,412표 | 3위 | 낙선 |
1926년 선거 | 하원의원 (프린스앨버트 선거구) | 16대 | 보수당 | 35.13% | 4,838표 | 2위 | 낙선 |
1940년 선거 | 하원의원 (레이크 센터 선거구) | 19대 | 보수당 | 36.29% | 5,974표 | 1위 | |
1945년 선거 | 하원의원 (레이크 센터 선거구) | 20대 | 캐나다 진보보수당 | 41.54% | 6,884표 | 1위 | |
1949년 선거 | 하원의원 (레이크 센터 선거구) | 21대 | 캐나다 진보보수당 | 48.67% | 8,845표 | 1위 | |
1953년 선거 | 하원의원 (프린스앨버트 선거구) | 22대 | 캐나다 진보보수당 | 44.07% | 10,038표 | 1위 | |
1957년 선거 | 하원의원 (프린스앨버트 선거구) | 23대 | 캐나다 진보보수당 | 53.08% | 12,349표 | 1위 | |
1958년 선거 | 하원의원 (프린스앨버트 선거구) | 24대 | 캐나다 진보보수당 | 72.13% | 16,583표 | 1위 | |
1962년 선거 | 하원의원 (프린스앨버트 선거구) | 25대 | 캐나다 진보보수당 | 70.78% | 18,276표 | 1위 | |
1963년 선거 | 하원의원 (프린스앨버트 선거구) | 26대 | 캐나다 진보보수당 | 71.39% | 17,824표 | 1위 | |
1965년 선거 | 하원의원 (프린스앨버트 선거구) | 27대 | 캐나다 진보보수당 | 65.06% | 15,635표 | 1위 | |
1968년 선거 | 하원의원 (프린스앨버트 선거구) | 28대 | 캐나다 진보보수당 | 56.04% | 17,850표 | 1위 | |
1972년 선거 | 하원의원 (프린스앨버트 선거구) | 29대 | 캐나다 진보보수당 | 59.50% | 19,410표 | 1위 | |
1974년 선거 | 하원의원 (프린스앨버트 선거구) | 30대 | 캐나다 진보보수당 | 59.14% | 17,787표 | 1위 | |
1979년 선거 | 하원의원 (프린스앨버트 선거구) | 31대 | 캐나다 진보보수당 | 48.96% | 16,438표 | 1위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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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eting in Saskatoon between Diefenbaker and Laurier never happened, author s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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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 calls for removal of Saskatoon Diefenbaker statue because he says it is based on l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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