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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살루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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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살루스 전투는 기원전 48년 8월 9일,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에 벌어진 로마 내전의 결정적인 전투이다. 카이사르는 디라키움 공방전의 패배 후 테살리아로 퇴각했고, 폼페이우스는 병력의 우세를 믿고 추격하여 파르살루스에서 양군은 대치했다. 폼페이우스는 수적으로 우세한 기병을 활용한 포위섬멸전을 계획했지만, 카이사르는 노련한 병사들을 활용하여 이를 무력화하고 승리했다. 이 전투로 카이사르는 로마의 유일한 권력자가 되는 발판을 마련했으며, 폼페이우스 세력은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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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살루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전투 정보
전투명파르살루스 전투
일부카이사르의 마케도니아 침공 중 카이사르의 내전
날짜기원전 48년 8월 9일
장소팔라이파르살로스, 그리스
결과카이사르파의 승리
영토 변화동부 로마 속주의 대부분이 카이사르에게 넘어감
교전 세력
교전 세력 1카이사르파
교전 세력 2폼페이우스파
지휘관
지휘관 1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지휘관 2폼페이우스
티투스 라비에누스
메텔루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전사)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병력 규모
병력 123,000명 이상
22,000명 (군단병)
1,000명 (기병)
약간의 경보병
병력 241,000–52,000명 이상
약 36,000–45,000명 (군단병)
5,000–7,000명 (기병)
수천 명의 경보병
부대 정보
부대 1레기오 제6
레기오 제7
레기오 제8
레기오 제9
레기오 제10
레기오 제11
레기오 제12
레기오 제13
부대 2시리아 군단
킬리키아 군단
레기오 I
레기오 III
사상자
사상자 1200–1,200명 사망
사상자 230,000–39,000명
6,000–15,000명 사망
24,000명 포로
추가 정보
관련 정보파르살루스 전투
파르살루스 전투,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전투
파르살루스 (기원전 48년)
로마자 표기Pharsalus
그리스어 표기Φάρσαλος

2. 전투 전 상황

기원전 48년 7월 6일 카이사르는 3개월에 걸친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패하고 그리스 중부의 테살리아로 급히 퇴각했다. 카이사르는 도미티우스와 합류하여 테살리아의 도시인 곤피스를 함락시키고 이어 메트로폴리스에 무혈입성했다. 이에 테살리아의 대부분의 도시가 카이사르 편으로 돌아섰다. 폼페이우스도 곧 테살리아에 도착하여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시리아 군단과 합류했다.[28]

카이사르는 병력이 열세였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이 갈리아 전쟁부터 카이사르를 따르던 역전의 용사들이었고 디라키움의 패배에도 총사령관 카이사르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어서 사기가 높았다. 카이사르는 테살리아로 퇴각하여 디라키움에서 움직이지 않던 폼페이우스를 끌어냈고, 양군은 파르살루스에서 진영을 폈다.

카이사르의 내전이 시작된 후, 카이사르는 로마를 점령하고 폼페이우스와 그의 동맹군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냈으며 스페인에서 폼페이우스의 부관들을 물리쳤다. 기원전 48년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디르라키움을 포위 공격했지만 패배했다.

그 후 카이사르는 시리아에서 도착하는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군대의 공격으로부터 한 부관을 구출하기 위해 테살리아 동쪽으로 철수했다. 그는 곰피가 저항하자 곰피를 포위 공격했다.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 침공을 막고 그리스 땅에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추격했다. 이를 통해 카이사르가 시리아에서 도착하는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군대를 무찌르는 것을 막고, 전쟁을 장기화하여 자신의 지휘권을 연장한다고 비난하는 자신만만한 동맹국들의 압력을 받았다.

기원전 49년 1월 10일,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 본토로 진격하자, 폼페이우스와 원로원파 의원들은 그리스로 후퇴하여 방어를 위해 군비를 정비했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추격하기 전에 히스파니아마르세유 등 원로원파 세력을 제압하여 지중해 서부 지역의 안정을 도모했다(마르세유 포위전, 일레르다 전투).

카이사르는 서방 속주에 있던 폼페이우스 세력을 진압한 후, 그리스에 주둔하는 폼페이우스 본대에 눈을 돌렸다. 폼페이우스는 대부분의 로마 속주와 동맹국의 지원을 받아 우세한 군세와 대규모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기원전 49년부터 기원전 48년 겨울, 카이사르 군과 다소 뒤늦게 진군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아드리아 해를 건너, 건너편의 두라조(두라키움)에서 원로원파 군대를 포위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 군의 보급선을 차단하여 굶주리게 만들려고 했다. 카이사르는 두라키움 진지를 기습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테살리아로 몰렸다(두라키움 전투). 원로원파 군대는 이들을 추격했고, 양군은 파르살루스에서 대치했다.

원로원파 군대는 수적으로는 압도적이었지만, 경험에서는 카이사르 군에 훨씬 못 미쳤다. 폼페이우스 자신은 식량과 자금 부족으로 곧 진영이 붕괴될 위기에 처한 카이사르 군에 대해 시간을 끌면서 소모전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폼페이우스의 의견에 동의한 것은 해군을 지휘하던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소 카토) 정도에 그쳤고, 원로원파 대부분은 약해진 카이사르파와의 결전을 폼페이우스에게 강요했다.

특히, 마르세유에서 패배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전투를 회피하고 있다", "왕 중의 왕, 아가멤논"(둘 다 독재자를 의미)이라고 폼페이우스를 비난했고, 일레르다 전투에서 패배한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는 "히스파니아에서 패배했을 때 매수되었다고 탄핵받았는데, 자신을 매수한 상인(카이사르)과 싸우지 않는가"라고 몰아세워,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 군과의 결전을 결의하게 되었다.

원로원파는 이미 승리를 예상하고,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도미티우스 등은 관직을 놓고 다투기 시작했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진영 내에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농담을 하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결전 직전에 원로원파 기병대 사령관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회의에서 "승리를 거둘 때까지 전장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의를 밝히면서, 원로원파는 다시 전의를 다잡게 되었다.

이때 카이사르가 보유하고 있던 군단은 다음과 같았다.

군단특징
제10군단 에퀘스트리스(기병), 제8군단 아우구스타, 제9군단 히스파나, 제12군단 풀미나타 (en)갈리아 전쟁 이후의 노련한 병사들
제1군단 게르마니카, 제3군단 갈리카, 제4군단 마케도니카내전 시작 후 징집된 병사들



제9군단 등 카이사르의 충실한 병사들은 두라키움 전투나 그 이전 전투에서 굴욕적인 패배, 은수리기를 빼앗기는 등 많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카이사르는 일부러 벌하지 않았기 때문에, 직업 군인으로서 상당한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을 만회하려고 의기가 매우 높아져 있었다.

3. 전투의 경과

기원전 48년 8월 9일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유리한 진영에서 적을 상대하기 위해 진영을 물린 후 바로 선제공격을 시작했다. 폼페이우스는 부하인 트리아리우스의 제안에 따라 중무장 보병을 출동시키지 않았다. 이는 카이사르의 중무장 보병이 두 배의 거리를 달려오게 하여 지치게 하고 전열을 흩뜨려 전투에 불리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은 고참병이 주력이었기에 전투 경험으로 폼페이우스의 계략을 간파했다. 카이사르의 고참병들은 도중에 진격을 멈추고 호흡과 전열을 가다듬은 후 다시 돌격하였다. 폼페이우스의 중장보병은 카이사르 보병의 공격을 잘 견뎌냈다. 곧 폼페이우스 기병 7,000명이 배후로 돌아 들어가기 위해 공격해왔다. 카이사르의 기병은 옆으로 피하는 척하며 적 기병에게 길을 열었고, 그 앞을 창을 꼬나쥔 카이사르의 고참병 2,000명으로 구성된 제4열이 막아섰다. 카이사르의 기병도 그들의 배후를 포위하였고, 카이사르 군의 배후로 돌아가려던 기병은 고립되어 무력화되었다. 이로써 폼페이우스의 전술, 즉 적의 배후로 돌아 들어가 포위하는 전형적인 포위섬멸전 전술은 실패했다.[17]

카이사르의 최정예 보병들은 오른쪽 진영부터 차츰 적의 배후로 들어갔고, 카이사르는 처음 적진으로 돌격할 때 일부러 뒤에 남겨 놓아 힘을 비축해 놓았던 예비 병력까지 전력에 가담시켰다. 폼페이우스 군은 처음에는 잘 막아냈으나 시간이 갈수록 진형이 무너졌다. 폼페이우스는 진영이 돌파당하자 말을 타고 라리사로 도망쳤고, 폼페이우스 군은 무참히 무너졌다. 가까운 언덕으로 도망친 폼페이우스의 패잔병들은 카이사르의 포위 공격에 모두 투항했다.[17]

폼페이우스의 군대가 전진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휘하의 카이사르의 보병이 전진을 시작했다. 카이사르의 병사들이 투척 거리에 가까워지자 명령 없이 휴식을 취하고 재정비한 후 돌격을 계속했다.[19] 양군이 충돌하면서 폼페이우스의 우익과 중앙선은 버텼다.

폼페이우스의 보병이 싸우는 동안 라비에누스는 좌익에 있던 폼페이우스 기병에게 카이사르의 기병을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예상대로 그들은 카이사르의 기병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숨겨두었던 제4전열 보병을 드러내 폼페이우스 기병의 돌격을 기습했다.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필라를 던지는 대신 폼페이우스 기병을 찌르도록 명령받았다. 폼페이우스의 기병은 당황하여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고, 카이사르의 기병이 뒤를 돌아 그들을 추격했다.[20] 재편성에 실패한 나머지 폼페이우스의 기병은 언덕으로 후퇴하여, 카이사르의 기병이 측면을 돌면서 그의 군단 좌익을 숨겨진 부대에 노출시켰다. 카이사르는 그 후 가장 노련한 정예병이 포함된 제3전열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폼페이우스의 좌익 부대가 붕괴되어 전장에서 도망쳤다.[21]

폼페이우스의 기병을 격파한 카이사르는 마지막 예비대를 투입했다.[22]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기병과 군단이 전열을 이탈하고 전투에서 도망치는 것을 보면서 싸울 의지를 잃고, 나머지 부대를 내버려둔 채 자신의 진영으로 후퇴했다. 그는 가족을 모으고 금을 싣고 장군의 망토를 벗어던져 빠르게 탈출하기 위해 주둔 보조병들에게 진영을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나머지 폼페이우스의 군대가 혼란에 빠진 가운데, 카이사르는 그의 부하들에게 나머지 폼페이우스의 부대를 격파하고 폼페이우스의 진영을 점령하여 하루를 마무리하라고 촉구했다. 그들은 그의 바람대로 했고, 폼페이우스의 잔여 병력을 제압한 후 격렬하게 진영 벽을 공격했다. 폼페이우스 진영에 남아 있던 트라키아인들과 다른 보조병들, 총 7개의 코호르트가 용감하게 방어했지만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21]

카이사르는 그의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고, 약 200명의 병사와 30명의 백부장만을 잃었으며 옵티마테스의 손실은 6만 명이라고 주장했다.[23] 이 숫자들은 의심스럽게 과장된 것으로 보이며, 앱피아누스는 카이사르 측의 손실을 최대 1,200명, 폼페이우스 측의 손실을 6,000명으로 추정했다.

전투는 우선 정면에 배치된 군단병들 간에 시작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군을 지치게 하기 위해 자군 병사들에게 돌격하지 않도록 명령했으나, 여러 나라에서 모인 잡색군이었기 때문에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혼란이 발생했다. 카이사르군의 베테랑 군단병들은 양군의 중간까지 돌격했으나, 거기서 원로원파 군의 변화를 감지하고 멈춰섰으며, 중장보병의 공격에서 경보병의 원거리 공격으로 전환했다. 카이사르군 우익 부대의 소대장이었던 가이우스 크라시안누스는 “죽든 살든 오늘은 카이사르에게 상을 받겠다”고 외치며 원로원파 병사들을 수많이 찔러 죽였으나, 결국 적에게 찔려 죽었다.

원로원파 군 좌익의 라비에누스는 기병을 이끌고 돌격하여 카이사르군 기병을 격퇴하고 코호르스 6개 대대로 구성된 제4전열과 부딪쳤다. 이때 카이사르는 자군의 투창병에게 기병에 대해 버티고, 필룸(창)을 던지거나 다리나 종아리를 노리지 말고, 기병의 얼굴이나 눈을 노려 직접 찌르도록 명령했다. 이 공격을 싫어한 원로원파 기병은 순식간에 붕괴했다.

제4전열은 그대로 전진하여 원로원파 군에 측면 공격을 가했고, 더 나아가 카이사르는 예비대인 제3전열을 전선에 투입했다. 두 방향에서의 공격을 받은 폼페이우스는 패배를 깨닫고, 이집트 쪽으로 도주했다. 카이사르군은 원로원파 군의 진지를 공격하여, 살아남은 원로원파 군의 지휘권을 장악했다. 라비에누스와 메텔루스 스키피오, 젊은 카토 등은 아프리카 속주우티카로 도망쳤으나, 도미티우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쳤으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와 함께 암살되었다.

브룬디시움(현: 브린디시) 근교의 함대를 이끌고 있던 데키무스 라엘리우스와 시리아 속주의 함대를 이끌고 있던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은 군대와 함께 카이사르에게 항복했고, 키케로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도 원로원파를 버리고 카이사르에게 투항했다.

3. 1. 병력 배치

카이사르군은 숫자가 폼페이우스군에 비해 월등히 적었으나 질적으로는 우수했다. 폼페이우스에게는 군사 경험이 많은 참모진이 있었던 반면 카이사르 휘하 참모들은 대부분 군사 경험이 부족한 젊은 장교들이었다. 그러나 백인대장과 같은 중견급 지휘관은 카이사르군이 폼페이우스군에 비해 월등히 우수했다.[30]

폼페이우스는 기병 7,000명을 모두 좌익 맨끝에 배치했고 그 지휘를 티투스 라비에누스에게 맡겼고,[30] 보병은 맨 오른쪽부터 히스파니아 용병, 중앙에는 시리아 군단을 포진시켰고, 좌익에는 자신의 옛 부하를 배치하여 지휘하게 했다. 폼페이우스 자신은 기병 우측에 포진했다. 적보다 우수한 기병의 숫자를 이용해서 적의 배후로 침입해 들어가는 전통적인 "포위섬멸전" 진영을 짠 것이다.

이에 대해 카이사르는 자신의 맨 오른쪽 끝에 기병을 모두 배치하고 좌익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제8군단과 제9군단을, 중앙에는 제11군단을, 그리고 우익에는 술라의 조카인 푸블리우스 술라가 이끄는 제10군단과 제12군단을 배치했고 카이사르 자신은 우익 뒷편에 포진했다. 그리고 특별히 훈련된 고참병력 2,000명을 따로 편성해 오른쪽 자신의 진영 바로 앞에 포진시켰다. 이는 우수한 적 기병의 기동력을 줄이고 포위하기 위해 카이사르가 특별히 고안한 부대로, 특별히 우수한 고참 병사들로 구성하고 며칠 동안의 연습으로 그 전력을 강화했다.

각 진영의 총병력 수는 알 수 없다. 고대 기록들은 이탈리아 레기오나리우스의 수에만 초점을 맞추고, 동맹 비시민 병력은 열등하고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에 따르면, 그의 군대는 80개 코호르트(8개 군단)에 배치된 22,000명의 로마 레기오나리우스와 1,000명의 갈리아 및 게르만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카이사르의 모든 군단은 병력이 부족했는데, 디르라키움에서의 손실과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느리게 진군하는 것보다 정예 병력으로 신속하게 진격하려는 카이사르의 의도 때문이었다. 일부 군단은 파르살루스 전투 당시 1,000명 정도의 병력만 보유하고 있었다.[16]

폼페이우스는 보조군, 특히 기병에서 가장 큰 이점을 가졌는데, 그 수는 카이사르의 군대를 훨씬 능가했다. 그는 5,000명에서 7,000명 사이의 기병과 수천 명의 궁수, 투석기병, 그리고 일반적인 경보병을 거느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갈리아와 게르만 기병과 함께 동방의 다양한 민족들, 즉 발칸반도의 그리스인, 트라키아인, 아나톨리아인과 레반트의 시리아인, 페니키아인, 유대인 등으로 구성된 매우 다양한 집단을 형성했다.

파르살루스 전투 초기 병력 배치 (기원전 48년 8월)


두 장군은 전통적인 삼열 전진(*triplex acies*)으로 군단을 배치했는데, 폼페이우스의 우익과 카이사르의 좌익은 에니페우스 강(Enipeus)에 닿아 있었다. 하천이 그쪽 측면을 충분히 보호해 주었기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그의 기병, 궁수, 투석병 대부분을 좌익으로 이동시켜 수적인 우세를 최대한 활용했다. 그의 우익에는 폰투스(Pontus) 기병 500~600명과 카파도키아(Cappadocia) 경보병 소수만 배치되었다. 폼페이우스는 그의 가장 강력한 군단들을 보병 전열의 중앙과 양익에 배치하고, 덜 숙련된 병사들에게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약 2,000명의 재입대 베테랑(Evocatus)들을 전체 전열에 걸쳐 분산시켰다. 폼페이우스의 코호르트들은 10열의 이례적으로 밀집된 대형으로 배열되었는데, 그들의 임무는 적 보병을 묶어두는 것이었고, 폼페이우스의 기병이 카이사르의 측면과 후방을 휩쓸어 승리를 거머쥐는 것이었다. 군단들의 열은 세 명의 부하 장군의 지휘하에 나뉘어 있었다.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기병 돌격의 지휘를 맡았고, 폼페이우스 자신은 전투의 진행 상황을 감독하기 위해 좌익 후방에 자리를 잡았다.

카이사르도 그의 병사들을 삼열로 배치했지만,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폼페이우스의 전선과 일치시키기 위해 그의 병력의 깊이를 6열로 줄여야 했다. 에니페우스 강에 닿아 있는 그의 좌익은 노련한 제IX 군단과 제VIII 군단으로 구성되었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들을 지휘했다. 제VI, 제XII, 제XI, 제XIII 군단은 중앙에 배치되었고, 그 다음에 제VII 군단이 배치되었고, 그의 우익에는 그가 총애하는 제X 군단을 배치하여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게 그 측면의 지휘를 맡겼다. 카이사르 자신은 폼페이우스의 맞은편인 우익에 자리를 잡았다. 폼페이우스 군대의 배치를 본 카이사르는 불안감을 느껴, 적 기병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그의 제3열을 더욱 얇게 하여 우익에 제4열을 형성했다. 그는 수적으로 열세인 자신의 기병이 적 기병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새로운 열에 그들이 수행할 역할에 대한 자세한 지시를 내리고, 그날의 운명이 그들에게 달려 있음을 암시하며, 특별히 명령이 있을 때까지 제3열은 돌격하지 말라는 엄격한 명령을 내렸다.

양측 사령관 모두 적군의 측면을 공격하는 쪽이 승리할 수 있다고 인식했기에, 모두 측면 공격과 방어에 주력했다. 카이사르 군은 에니페우스 강을 좌익으로 하여 진영을 구축하여 안전을 확보했기 때문에, 카이사르 군 우익의 공방이 초점이 되었다.

카이사르 측은 강변의 좌익 부대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중앙 부대를, 정예 제10군단을 중심으로 한 우익 부대는 카이사르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게 일부 부대를 맡겼다. 또한, 원로원파 좌익 부대의 핵심인 기병 부대에 대항하기 위해, 코호르스 6개 대대로 구성된 예비 제4전열을 우익 부대 후방에 배치했다.

원로원파는 폼페이우스 자신이 안토니우스와 대치하는 우익을 맡고, 우세한 기병을 이용한 측면 공격을 기도했으며, 정면에는 군단병, 좌익에는 기병과 투석병 및 궁병을 배치했다. 원로원파 군의 좌익은 이끌었고, 좌익 부대의 핵심인 기병 부대는 카이사르의 레가투스(총독대리)를 오랫동안 역임하여 그 전략을 잘 알고 있던 라비에누스가 지휘했다.

3. 2. 전투 전개

기원전 48년 8월 9일 전투 당일, 카이사르는 유리한 진영에서 적을 상대하기 위해 진영을 물린 후 바로 선제공격을 시작했다. 폼페이우스는 부하인 트리아리우스의 제안에 따라 중무장 보병을 출동시키지 않았다. 이는 카이사르의 중무장 보병이 두 배의 거리를 달려오게 하여 지치게 하고 전열을 흩뜨려 전투에 불리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은 고참병이 주력이었기에 전투 경험으로 폼페이우스의 계략을 간파했다. 카이사르의 고참병들은 도중에 진격을 멈추고 호흡과 전열을 가다듬은 후 다시 돌격하였다. 폼페이우스의 중장보병은 카이사르 보병의 공격을 잘 견뎌냈다. 곧 폼페이우스 기병 7,000명이 배후로 돌아 들어가기 위해 공격해왔다. 카이사르의 기병은 옆으로 피하는 척하며 적 기병에게 길을 열었고, 그 앞을 창을 꼬나쥔 카이사르의 고참병 2,000명으로 구성된 제4열이 막아섰다. 카이사르의 기병도 그들의 배후를 포위하였고, 카이사르 군의 배후로 돌아가려던 기병은 고립되어 무력화되었다. 이로써 폼페이우스의 전술, 즉 적의 배후로 돌아 들어가 포위하는 전형적인 포위섬멸전 전술은 실패했다.

카이사르의 최정예 보병들은 오른쪽 진영부터 차츰 적의 배후로 들어갔고, 카이사르는 처음 적진으로 돌격할 때 일부러 뒤에 남겨 놓아 힘을 비축해 놓았던 예비 병력까지 전력에 가담시켰다. 폼페이우스 군은 처음에는 잘 막아냈으나 시간이 갈수록 진형이 무너졌다. 폼페이우스는 진영이 돌파당하자 말을 타고 라리사로 도망쳤고, 폼페이우스 군은 무참히 무너졌다. 가까운 언덕으로 도망친 폼페이우스의 패잔병들은 카이사르의 포위 공격에 모두 투항했다.[17]

카이사르에 따르면 양군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부하들에게 돌격하지 말고 카이사르의 군단이 근접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폼페이우스의 고문관 가이우스 트리아리우스는 카이사르의 보병이 예상되는 전투 행군 거리의 두 배를 이동해야 한다면 지치고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정지한 부대는 필라 투척에 대해 더 잘 방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18] 폼페이우스의 군대가 전진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휘하의 카이사르의 보병이 전진을 시작했다. 카이사르의 병사들이 투척 거리에 가까워지자 명령 없이 휴식을 취하고 재정비한 후 돌격을 계속했다.[19] 양군이 충돌하면서 폼페이우스의 우익과 중앙선은 버텼다.

폼페이우스의 보병이 싸우는 동안 라비에누스는 좌익에 있던 폼페이우스 기병에게 카이사르의 기병을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예상대로 그들은 카이사르의 기병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숨겨두었던 제4전열 보병을 드러내 폼페이우스 기병의 돌격을 기습했다. 카이사르의 병사들은 명령에 따라 뛰어올라 필라를 던지는 대신 폼페이우스 기병을 찌르도록 명령받았다. 폼페이우스의 기병은 당황하여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고, 카이사르의 기병이 뒤를 돌아 그들을 추격했다.[20] 재편성에 실패한 나머지 폼페이우스의 기병은 언덕으로 후퇴하여, 카이사르의 기병이 측면을 돌면서 그의 군단 좌익을 숨겨진 부대에 노출시켰다. 카이사르는 그 후 가장 노련한 정예병이 포함된 제3전열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폼페이우스의 좌익 부대가 붕괴되어 전장에서 도망쳤다.[21]

폼페이우스의 기병을 격파한 카이사르는 마지막 예비대를 투입했다.[22]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기병과 군단이 전열을 이탈하고 전투에서 도망치는 것을 보면서 싸울 의지를 잃고, 나머지 부대를 내버려둔 채 자신의 진영으로 후퇴했다. 그는 가족을 모으고 금을 싣고 장군의 망토를 벗어 던져 빠르게 탈출하기 위해 주둔 보조병들에게 진영을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나머지 폼페이우스의 군대가 혼란에 빠진 가운데, 카이사르는 그의 부하들에게 나머지 폼페이우스의 부대를 격파하고 폼페이우스의 진영을 점령하여 하루를 마무리하라고 촉구했다. 그들은 그의 바람대로 했고, 폼페이우스의 잔여 병력을 제압한 후 격렬하게 진영 벽을 공격했다. 폼페이우스 진영에 남아 있던 트라키아인들과 다른 보조병들, 총 7개의 코호르트가 용감하게 방어했지만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21]

카이사르는 그의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고, 약 200명의 병사와 30명의 백부장만을 잃었으며 옵티마테스의 손실은 6만 명이라고 주장했다.[23] 이 숫자들은 의심스럽게 과장된 것으로 보이며, 앱피아누스는 카이사르 측의 손실을 최대 1,200명, 폼페이우스 측의 손실을 6,000명으로 추정했다. 전쟁에 대한 그의 기록에서 카이사르는 자신의 부대의 규율과 경험을 칭찬했고, 그의 백부장들을 각각 이름으로 기억했다. 그는 또한 폼페이우스가 돌격하지 않은 결정에 의문을 제기했다.[24]

양측 사령관 모두 적군의 측면을 공격하는 쪽이 승리할 수 있다고 인식했기에, 모두 측면 공격과 방어에 주력했다. 카이사르 군은 에니페우스 강을 좌익으로 하여 진영을 구축하여 안전을 확보했기 때문에, 카이사르 군 우익의 공방이 초점이 되었다.

카이사르 군원로원파 군



전투는 우선 정면에 배치된 군단병들 간에 시작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군을 지치게 하기 위해 자군 병사들에게 돌격하지 않도록 명령했으나, 여러 나라에서 모인 잡색군이었기 때문에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혼란이 발생했다. 카이사르군의 베테랑 군단병들은 양군의 중간까지 돌격했으나, 거기서 원로원파 군의 변화를 감지하고, 폼페이우스의 계략을 눈치채고 멈춰섰으며, 중장보병의 공격에서 경보병의 원거리 공격으로 전환했다. 카이사르군 우익 부대의 소대장이었던 가이우스 크라시안누스는 “죽든 살든 오늘은 카이사르에게 상을 받겠다”고 외치며 원로원파 병사들을 수많이 찔러 죽였으나, 결국 적에게 찔려 죽었다.

원로원파 군 좌익의 라비에누스는 기병을 이끌고 돌격하여 카이사르군 기병을 격퇴하고 코호르스 6개 대대로 구성된 제4전열과 부딪쳤다. 이때 카이사르는 자군의 투창병에게 기병에 대해 버티고, 필룸(창)을 던지거나, 다리나 종아리를 노리지 말고, 기병의 얼굴이나 눈을 노려 직접 찌르도록 명령했다. 이 공격을 싫어한 원로원파 기병은 순식간에 붕괴했다.

제4전열은 그대로 전진하여 원로원파 군에 측면 공격을 가했고, 더 나아가 카이사르는 예비대인 제3전열을 전선에 투입했다. 두 방향에서의 공격을 받은 폼페이우스는 패배를 깨닫고, 이집트 쪽으로 도주했다. 카이사르군은 원로원파 군의 진지를 공격하여, 살아남은 원로원파 군의 지휘권을 장악했다. 라비에누스와 메텔루스 스키피오, 듀라키움에 남아 있던 젊은 카토 등은 아프리카 속주우티카로 도망쳤으나, 도미티우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쳤으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와 함께 암살되었다.

브룬디시움(현: 브린디시) 근교의 함대를 이끌고 있던 데키무스 라엘리우스와 시리아 속주의 함대를 이끌고 있던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은 군대와 함께 카이사르에게 항복했고, 키케로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도 원로원파를 버리고 카이사르에게 투항했다.

플루타르코스는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협력하여 7만의 군대를 이끌고 진군한다면, 파르티아의 궁병이라도 스키타이의 기병 부대라도, 인도의 부유함을 가지고서도 대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적의 장군이었던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우정도 결국은 진정한 우정이 아니었다”고 적고 있다.[29]

3. 3. 전술적 분석

기원전 48년 8월 9일 벌어진 파르살루스 전투는 양측 사령관 모두 적군의 측면을 공격하는 쪽이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측면 공격과 방어에 집중했다. 카이사르 군은 에니페우스 강을 좌익으로 하여 진영을 구축, 안전을 확보했기 때문에 카이사르 군 우익의 공방이 중요했다.

카이사르는 강변의 좌익 부대를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중앙 부대를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에게 맡겼다. 정예 제10군단을 중심으로 한 우익 부대는 카이사르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게 일부 부대를 맡겼다. 또한, 원로원파 좌익 부대의 핵심인 기병 부대에 대항하기 위해, 코호르스 6개 대대로 구성된 예비 제4전열을 우익 부대 후방에 배치하는 전략을 짰다.

원로원파는 폼페이우스 자신이 안토니우스와 대치하는 우익을 맡고, 우세한 기병을 이용한 측면 공격을 시도했다. 정면에는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지휘하는 군단병, 좌익에는 기병과 투석병 및 궁병을 배치했다. 원로원파 군의 좌익은 도미티우스가 이끌었고, 좌익 부대의 핵심인 기병 부대는 카이사르의 레가투스(총독대리)를 오랫동안 역임하여 그 전략을 잘 알고 있던 라비에누스가 지휘했다.

전투는 정면에 배치된 군단병들 간에 시작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군을 지치게 하기 위해 자군 병사들에게 돌격하지 않도록 명령했으나, 여러 나라에서 모인 병사들이었기 때문에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혼란이 발생했다. 카이사르군의 베테랑 군단병들은 양군의 중간까지 돌격했으나, 원로원파 군의 변화를 감지하고 멈춰섰으며, 중장보병의 공격에서 경보병의 원거리 공격으로 전환했다.

원로원파 군 좌익의 라비에누스는 기병을 이끌고 돌격하여 카이사르군 기병을 격퇴하고 코호르스 6개 대대로 구성된 제4전열과 부딪쳤다. 이때 카이사르는 자군의 투창병에게 기병에 대해 버티고, 필룸(창)을 던지거나 다리나 종아리를 노리지 말고, 기병의 얼굴이나 눈을 노려 직접 찌르도록 명령했다. 이 공격을 싫어한 원로원파 기병은 순식간에 붕괴했다.

제4전열은 그대로 전진하여 원로원파 군에 측면 공격을 가했고, 카이사르는 예비대인 제3전열을 전선에 투입했다. 두 방향에서의 공격을 받은 폼페이우스는 패배를 깨닫고 이집트 쪽으로 도주했다. 카이사르군은 원로원파 군의 진지를 공격하여, 살아남은 원로원파 군의 지휘권을 장악했다. 라비에누스와 메텔루스 스키피오, 젊은 카토 등은 아프리카 속주우티카로 도망쳤으나, 도미티우스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쳤으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와 함께 암살되었다.[29]

4. 전투의 결과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에서 가장 중요한 결전이었던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의 압승으로 끝났다. 카이사르 측 전사자는 200명뿐이었으나 폼페이우스 측은 15,000명 또는 6,000명이 전사하고[35] 24,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폼페이우스군 지휘관 중에서는 폼페이우스군 좌익 사령관으로 카이사르 기병에게 최후를 맞은 아헤노바르부스가 전사했고[36],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카이사르에게 투항했다. 라비에누스, 메텔루스 스키피오 등 폼페이우스 측 장군들 대부분은 도망쳤고 키케로와 카토는 디라키움에 남아있었다. 마르쿠스 브루투스나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은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카이사르에게 항복했고 이들은 훗날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가 되었다. 폼페이우스의 근거지였던 동방은 카이사르에게 돌아갔고,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세력권인 시리아에서 재기할 수 없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 추격당하며 그리스를 거쳐 이집트로 도망쳤고 에게해를 지나 알렉산드리아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 배신당해 죽었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로마의 유일한 권력자가 되었다.

4. 1. 정치적 영향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에서 가장 중요한 결전인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의 압승으로 끝났다. 카이사르 측 전사자는 200명뿐이었으나, 폼페이우스 측은 15,000명 또는 6,000명이 전사하고[35] 24,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폼페이우스군의 좌익 사령관 아헤노바르부스는 카이사르 기병에게 최후를 맞았고[36],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카이사르에게 투항했다. 그러나 라비에누스, 메텔루스 스키피오, 아프라니우스, 페트레이우스를 비롯한 폼페이우스의 장군들 대부분은 도망쳤고, 키케로와 카토는 디라키움에 남아있었다. 반면 마르쿠스 브루투스나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은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카이사르에게 항복했고, 이들은 훗날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가 되었다. 폼페이우스의 근거지였던 동방 지역은 일제히 카이사르에게 돌아섰다. 따라서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세력권인 시리아에서 재기할 수 없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추격을 받으며 그리스를 횡단하여 동맹국인 이집트로 도망쳤고, 에게해를 거쳐 알렉산드리아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 배신당해 죽었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로마의 유일한 권력자가 되었다.

5. 역사적 평가 및 논쟁

파르살루스 전투는 그 역사적 중요성과 더불어 여러 논쟁점을 안고 있다.
역사적 중요성폴 K. 데이비스는 "카이사르의 승리는 그를 권력의 정점으로 이끌었고, 공화정을 사실상 종식시켰다"고 평가했다.[25] 이 전투는 내전을 종식시키지는 못했지만, 카이사르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주며 그에게 절실했던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전까지 이탈리아를 제외한 로마 세계의 상당수는 폼페이우스와 그의 동맹을 지지했지만, 폼페이우스의 패배 이후 많은 이들이 카이사르에게 합류했다. 이는 신들이 카이사르를 편든다는 믿음, 혹은 자기 보존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고대인들은 성공, 특히 파르살루스 전투와 같이 거의 확실한 패배를 앞두고 거둔 성공을 신의 가호로 여겼다. 카이사르는 이 승리를 통해 권력을 공고히 하고, 옵티마테스들을 망명에 가깝게 몰아넣었다.
전투 명칭 논쟁현대 역사에서는 '파르살루스 전투'라는 명칭이 자주 사용되지만, 고대 자료에서는 이 명칭이 드물게 나타난다. 카이사르는 "테살리아 전투"(proelium in Thessaliāla)라고 칭했고, 키케로와 히르티우스는 "파르살리쿠스 전투"(Pharsālicum proeliumla) 또는 "파르살리아 전투"(pugna Pharsāliala)라는 표현을 사용했다.[14] 히르티우스는 전투가 '팔라에파르살루스'에서 벌어졌다고 언급했으며, 스트라보, 프론티누스, 에우트로피우스, 오로시우스도 이 명칭을 사용한다.[14] 루칸은 서사시에서 '파르살리아'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리비우스와 타키투스도 이 용어를 사용했다.[14] 파르살루스에서 전투가 있었다고 언급하는 고대 자료는 파스티 아미테르니니라는 달력과 그리스 저자 플루타르코스, 아피아누스, 폴리아이누스뿐이다.[14]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파르살리아'가 전투 명칭으로 더 적합하다고 주장한다.[15]

이 전투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는 미국 뉴욕주의 마을과 루카누스의 서사시 『파르살리아』가 있다.

5. 1. 전투 장소 논쟁

파르살루스 전투의 장소는 오랫동안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었다. 카이사르 자신은 그의 저서에서 몇몇 지명만 언급했다.[8] 현대 저술가들은 이 전투를 파르살루스(Pharsalos)를 따서 명명했지만, 네 명의 고대 저술가들은 이 전투가 특히 팔라이파르살루스("옛" 파르살루스, Palaepharsalos)에서 일어났다고 명시한다. 스트라보는 그의 『지리학』에서 옛 파르살루스와 새로운 파르살루스를 모두 언급하며, 스코투사(Scotoussa) 남쪽에 있는 테티스(Thetis) 신전인 테티데이온(Thetideion)이 두 도시 모두 근처에 있었다고 적고 있다. 기원전 198년,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필리포스 5세는 팔라이파르살루스를 약탈했지만, 새로운 파르살루스는 건드리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두 도시가 가까운 이웃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팔라이파르살루스의 위치를 확신하지 못하고 압피아누스를 따라 기원전 48년 전투를 에니페우스 강 남쪽 또는 파르살루스(오늘날의 파르살라) 근처에 위치시켰다.[9]

그러나 점점 더 많은 학자들이 강 북쪽 위치를 주장하고 있다. 존 D. 모건은 그의 저서 "팔라이파르살루스 – 전투와 도시"[10]에서 팔라이파르살루스가 베키뇽, 크로마이어, 꽥킨, 루카스와 홈즈가 생각했던 위치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모건은 고대 라리사에서 파르살루스로 가는 고대 도로 바로 근처에 있는 Κρήνη Λάρισας|Krini Larisas|크리니 라리사스el (이전 이름은 드리스콜리) 마을 동쪽 언덕에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한다. 이곳은 파르살루스에서 북쪽으로 약 약 9.66km, 에니페우스 강에서 북쪽으로 약 4.83km 떨어져 있으며,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적뿐만 아니라 기원전 1세기 이후의 거주 흔적도 있다. 모건은 폼페이우스의 진영을 크리니 서쪽 약 1.61km, 아브라(이전 이름은 사리카야) 마을 북쪽에, 카이사르의 진영을 폼페이우스 진영에서 동남동쪽으로 약 약 6.44km 떨어진 곳에 위치시킨다. 따라서 이러한 재구성에 따르면 전투는 압피아누스가 쓴 것처럼 파르살루스와 강 사이가 아니라, 옛 파르살루스와 강 사이에서 벌어졌다.

팔라이파르살루스에 대한 흥미로운 부가 설명은 고대 자료에서 때때로 프티아(아킬레우스의 고향)와 동일시되었다는 점이다.[11] 옛 파르살루스와 새로운 파르살루스 근처에는 테티데이온(Thetideion), 즉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에게 봉헌된 신전이 있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와 그의 아버지 펠레우스의 왕국인 프티아는 대개 훨씬 더 남쪽에 있는 스페르케이오스 강 하류 계곡과 동일시된다.[12][13]

5. 2. 전투의 명칭

현대 역사가들은 종종 파르살루스 전투라고 부르지만, 고대 자료에서는 이 이름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단순히 "테살리아 전투"(proelium in Thessaliāla)라고 부르고, 키케로와 히르티우스는 "파르살리쿠스 전투"(Pharsālicum proeliumla) 또는 "파르살리아 전투"(pugna Pharsāliala)라고 부르며, 다른 저자들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다.[14] 그러나 히르티우스(만약 그가 알렉산드리아 전쟁의 저자라면)는 이 전투가 '팔라에파르살루스'에서 일어났다고 언급하며, 이 이름은 스트라보, 프론티누스, 에우트로피우스, 오로시우스에게서도 나타난다. 루칸은 그의 내전 서사시에서 '파르살리아'라는 이름을 규칙적으로 사용하며, 이 용어는 리비우스의 요약자와 타키투스도 사용한다.[14] 파르살루스에서 전투가 있었다고 언급하는 유일한 고대 자료는 파스티 아미테르니니라는 특정 달력과 그리스 저자 플루타르코스, 아피아누스, 폴리아이누스이다.[14]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파르살리아"가 파르살루스보다 전투의 이름으로 더 정확할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15]

이 전투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5. 3. 전투의 중요성

폴 K. 데이비스는 "카이사르의 승리는 그를 권력의 정점으로 이끌었고, 공화정을 사실상 종식시켰다"고 썼다.[25] 전투 자체가 내전을 끝낸 것은 아니었지만, 결정적인 승리였으며 카이사르에게 꼭 필요한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때까지 이탈리아를 제외한 로마 세계의 상당 부분은 폼페이우스와 그의 동맹국들을 지지했는데, 그 이유는 폼페이우스가 공화정 전역에 걸쳐 광범위한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의 패배 후, 이전 동맹국들은 카이사르에게 붙기 시작했는데, 일부는 신들이 카이사르를 편들고 있다고 믿었고, 다른 일부에게는 단순한 자기 보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성공을 신의 호의의 징조로 매우 중시했다. 이것은 특히 파르살루스에서 카이사르가 경험했던 것처럼 거의 확실한 패배 앞에서의 성공에 더욱 해당된다. 이를 통해 카이사르는 이 단 한 번의 승리를 이용하여 광대한 추종자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권력 장악을 더욱 공고히 하고, 옵티마테스들을 거의 망명 상태로 몰아넣어 카이사르에 맞서 싸우기 위한 동맹국을 찾도록 강요했다.

이 전투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6. 대중문화 속 파르살루스 전투

파르살루스 전투는 다음 분야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에서 저자는 카이사르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적들의 얼굴을 베도록 명령했다는 이야기를 언급한다. 그들의 허영심이 목숨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26]

만키위츠의 1963년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 파르살루스 전투 직후의 상황이 영화의 시작 장면으로 사용되어 이야기의 흐름을 설정한다.[27]

참조

[1] 웹사이트 The Battle of Pharsalus, 9 August 48 BC The Past https://the-past.com[...] 2023-08-08
[2] 웹사이트 Battle of Pharsalus Summary, Facts, & Significance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3-07-18
[3] 웹사이트 Pharsalus (48 BCE) – Livius https://www.livius.o[...] 2023-07-18
[4] 웹사이트 The Battle of Pharsalus, 9 August 48 BC https://the-past.com[...] 2023-07-18
[5] 서적 Caesar, BC III 99,1
[6] 웹사이트 The Battle of Pharsalus https://www.worldhis[...] 2021-11-22
[7] 문서 List of ancient Roman fasti; Fasti Amiternini; Fasti Antiates (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 I, 324, 328)
[8] 서적 Bellum Civile 3.81–98
[9] 간행물 Map with conjectured locations, Annual of the British School at Athens, No. XXIV, 1921 https://www.jstor.or[...]
[10] 간행물 The American Journal of Archaeology, Vol. 87, No. 1, Jan. 1983
[11] 서적 Holmes (1908), p. 275; cf. Strabo, Geography, 9.5.6; Little Iliad frag. 19; Euripides Andromache 16ff.
[12] 간행물 Μυρμιδόνων Πόλις https://www.jstor.or[...] 1906-05
[13] 백과사전 Phthia https://referencewor[...]
[14] 서적 Morgan (1983), p. 27.
[15] 서적 Postgate (1905); Bruère (1951).
[16] 뉴스 Battle of Pharsalus http://militaryhisto[...] militaryhistory.com 2013-06-18
[17] 서적 Caesar, BC III 92,1.
[18] 서적 Caesar, BC III, 92,2.
[19] 서적 Caesar, BC III, 93,1.
[20] 웹사이트 Roman Armageddon at Pharsalus https://warfarehisto[...] 2016-12-14
[21] 웹사이트 48 BC: The Battle of Pharsalus https://www.academia[...]
[22] 서적 Caesar, BC III, 93,4
[23] 서적 Caesar, BC III 99,1.
[24] 서적 Caesar, BC III, 92,3.
[25] 서적 100 Decisive Battles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The World’s Major Battles and How They Shaped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26] 서적 The Three Musketeers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27] 웹사이트 37.2.Gardner https://classicalstu[...] Society for Classical Studies 2012-11-13
[28] 서적 カエサル『内乱記』3.87.5
[29] 서적 プルタルコス「英雄伝」ポンペイウス70
[30] 문서 이는 폼페이우스가 라비에누스를 매우 신뢰했음을 보여준다.
[31] 문서 Lucius Afranius, 기원전 60년도 집정관, 세르토리우스 전쟁 당시부터 폼페이우스를 따른 심복이다.
[32] 문서 Qintus Caecilius Metellus Pius Scipio Nasica, 기원전 52년도 집정관으로 폼페이우스의 장인이다.
[33] 문서 Lucius Domitius Ahenobarbus, 기원전 54년도 집정관, 카이사르의 숙적이자 카토의 동료이다.
[34] 문서 Gnaeus Domitius Calvinus, 기원전 53년도 집정관으로 카이사르 사후, 옥타비아누스파가 된다.
[35] 문서 카이사르의 내전기에는 폼페이우스군 전사자가 15000명으로 적혀있고, 아시니우스 폴리오의 기록을 인용한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6000명이 전사했다고 적혀있다.
[36] 문서 내전기의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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