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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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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럴드 홀트는 1908년 출생하여 1967년 실종된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인이다. 그는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35년 연방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여러 장관직을 역임하고 1966년 로버트 멘지스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지지하고 이민법을 완화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1967년 12월 수영 중 실종되었으며, 그의 사망 원인과 관련된 다양한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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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홀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존칭 접두사The Right Honourable
홀트, 1966년 SEATO 정상 회담
이름해럴드 에드워드 홀트
출생일1908년 8월 5일
출생지뉴사우스웨일스주 스탠모어
사망일1967년 12월 17일
사망지빅토리아주 체비엇 해변
사망 원인익사 (추정)
정당오스트레일리아 연합당 (1945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1945년 이후)
출신 학교멜버른 대학교
자녀3
친척베라 피어스 (이모)
직업변호사
서명
별명거너 홀트
군 복무오스트레일리아 제국군
복무 기간1939년–1940년
계급포병
부대제2/4 야전 연대
참전 전투제2차 세계 대전
정치 경력
직위오스트레일리아 총리
임기 시작1966년 1월 26일
임기 종료1967년 12월 17일
군주엘리자베스 2세
총독로드 케이시
부총리존 맥이웬 (사실상)
전임자로버트 멘지스
후임자존 맥이웬
자유당 대표 순서2대 자유당 대표
자유당 대표 임기 시작1966년 1월 20일
자유당 대표 임기 종료1967년 12월 18일
자유당 부대표윌리엄 맥마흔
자유당 대표 전임자로버트 멘지스
자유당 대표 후임자존 고튼 (1968년)
자유당 부대표 순서자유당 부대표
자유당 부대표 임기 시작1956년 9월 26일
자유당 부대표 임기 종료1966년 1월 20일
자유당 부대표 전임자에릭 해리슨
자유당 부대표 후임자윌리엄 맥마흔
하원 대표 순서하원 대표
하원 대표 임기 시작1956년 9월 26일
하원 대표 임기 종료1966년 1월 26일
하원 대표 전임자에릭 해리슨
하원 대표 후임자데이비드 페어베언
재무장관 순서재무장관
재무장관 임기 시작1958년 12월 10일
재무장관 임기 종료1966년 1월 26일
재무장관 전임자아서 패든
재무장관 후임자윌리엄 맥마흔
고용 및 국가 서비스 장관 순서고용 및 국가 서비스 장관
고용 및 국가 서비스 장관 임기 시작1949년 12월 19일
고용 및 국가 서비스 장관 임기 종료1958년 12월 10일
고용 및 국가 서비스 장관 전임자잭 홀로웨이
고용 및 국가 서비스 장관 후임자윌리엄 맥마흔
고용 및 국가 서비스 장관 순서고용 및 국가 서비스 장관
고용 및 국가 서비스 장관 임기 시작1940년 10월 28일
고용 및 국가 서비스 장관 임기 종료1941년 10월 7일
이민 장관 순서이민 장관
이민 장관 임기 시작1949년 12월 19일
이민 장관 임기 종료1956년 10월 24일
이민 장관 전임자아서 칼웰
이민 장관 후임자아톨 타운리
과학 산업 연구 담당 장관 순서과학 산업 연구 담당 장관
과학 산업 연구 담당 장관 임기 시작1940년 10월 28일
과학 산업 연구 담당 장관 임기 종료1941년 8월 28일
과학 산업 연구 담당 장관 전임자허버트 콜레트
과학 산업 연구 담당 장관 후임자존 데드먼
국회의원 선거구히긴스
국회오스트레일리아
히긴스 선거구 임기 시작1949년 12월 10일
히긴스 선거구 임기 종료1967년 12월 17일
히긴스 선거구 후임자존 고튼
국회의원 선거구포크너
국회오스트레일리아
포크너 선거구 임기 시작1935년 8월 17일
포크너 선거구 임기 종료1949년 12월 10일
포크너 선거구 전임자조지 맥스웰
포크너 선거구 후임자빌 부르크
주요 정책 및 사건
정부 구성
선거

2. 생애

오스트레일리아의 총리를 지낸 해럴드 홀트는 멜버른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다 1933년 오스트레일리아 연합당에 입문, 1935년 연방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로버트 멘지스 총리 정부에서 노동 및 국민병역부 장관(1941년), 노동 및 이민 장관(1949년 이후), 연방 재무장관(1958-1966년) 등 주요 각료를 역임했으며, 자유당 부당수(1956-1966년)로 활동했다. 재무장관 시절인 1960년 시행한 엄격한 물가상승 억제 정책은 경기 후퇴를 야기하여 1961년 선거에서 자유당이 고전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66년 멘지스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홀트는 미국베트남 전쟁 정책을 강력히 지지하며 남베트남에 대한 오스트레일리아 군대 파병을 확대하여 국내외적으로 논쟁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1966년 총선에서 다수표를 얻어 재선에 성공했다. 또한, 아시아계 이민자에 대한 입국 및 시민권 취득 조건을 완화하여 인종 차별적인 백호주의 정책을 사실상 폐지하는 중요한 변화를 이끌었다. 그는 미국과의 관계 강화를 중시하여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오스트레일리아 방문을 성사시켰는데, 이는 미국 현직 대통령의 첫 공식 방문이었다.[146]

수영을 즐겼던 홀트는 1967년 12월 17일, 빅토리아주 포트시 인근 체비엇 해안에서 수영을 하던 중 실종되었다.[148] 평소 "내 손등만큼 잘 안다"고 자신했던 곳이었으나 거센 파도에 휩쓸린 것으로 추정된다.[147] 실종 직후 대규모 수색 작업이 생중계되었으나 끝내 시신은 발견되지 못했고, 존 맥퀸이 총리직을 승계했다. 현직 총리의 갑작스러운 실종과 시신 미발견은 여러 음모론을 낳았다. 대표적으로 홀트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간첩이었으며 잠수함을 타고 망명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중국 요리조차 싫어했다는 아내의 증언 등으로 설득력을 잃었다.[149] 38년 후인 2005년 빅토리아주 검시관은 홀트가 거친 파도에 휩쓸려 익사했다는 공식 결론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갑자기 사라지거나 떠나는 행위를 뜻하는 '해럴드 홀트 하다(To Do a Harold Holt)'라는 속어가 생겨났다.[150] 그의 지역구였던 멜버른 인근 글렌 아이리스에는 그의 이름을 딴 수영장이 건립되었다.[151]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30년대 젊은 해럴드 홀트


해럴드 홀트는 1908년 8월 5일 시드니 교외 스탠모어의 자택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토마스 제임스 홀트와 어머니 올리브 메이(결혼 전 성 윌리엄스, 피어스(Pearce)라는 성을 사용하기도 함[2]) 사이의 두 아들 중 첫째였으며, 남동생 클리포드는 1910년에 태어났다.[2] 부모는 홀트가 태어나기 7개월 전인 1908년 1월에 결혼했다.[2] 부계는 1829년 뉴사우스웨일스에 도착한 영국 버밍엄 출신 구두 수선공 제임스 홀트의 후손이다.[3] 조부 토마스 홀트는 누바에 대규모 농장을 소유했고, 인근 월렌드빈 시장을 두 차례 지냈다. 아버지 토마스 제임스 홀트는 시드니에서 교사 훈련을 받았으며, 해럴드 출생 당시에는 서리힐스의 클리블랜드 스트리트 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일했다. 어머니 올리브 메이는 남호주주 유둔다 출신으로 콘월, 영국, 독일, 아일랜드계 혈통을 지녔으며, 이모는 배우 베라 피어스이다.[2]

1914년, 아버지가 애들레이드 페인햄에 있는 호텔 허가권자가 되면서 부모는 그곳으로 이주했다. 홀트와 남동생은 시드니에 남아 삼촌과 살면서 랜드윅 공립학교에 다녔다. 1916년 말에는 잠시 누바에 있는 조부모 댁으로 보내져 누바 주립학교에 다녔다. 이듬해 시드니로 돌아와 3년간 킬라라의 사립학교인 애벗홀름 칼리지에 다녔는데, 이 무렵 부모는 별거했다.[2]

1920년, 홀트는 멜버른의 웨슬리 칼리지에 기숙생으로 입학했다. 그는 인기 있고 재능 있는 학생으로, 졸업반에서 장학금을 받았고 졸업생 중 두 번째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홀트는 방학을 주로 누바의 친척이나 학교 친구들과 보냈다. 아버지는 티볼리 서킷 순회 공연단의 탤런트 에이전트로 일하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1925년에 사망했다. 당시 16세였던 홀트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4]

1927년, 홀트는 장학금을 받고 멜버른 대학교의 퀸스 칼리지에 기숙하며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대학 대표로 크리켓과 오스트레일리아식 풋볼 선수로 활동했으며, 법학과 학생회 회장과 퀸스 칼리지 사교 클럽 회장을 맡는 등 다양한 학생 단체 활동에 참여했다. 또한 연설과 논술 경연에서 상을 받았고, 대학 간 토론팀의 일원이었다. 1930년 법학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당시 런던에 거주하던 아버지의 영국 유학 제안은 거절했다.[5]

2. 2. 법조 경력

홀트는 시어도어 핑크(Theodore Fink), 로버트 베스트 & 밀러 법률회사에서 사무 수습 기간(articled clerk)을 보냈다. 그는 1932년 말 빅토리아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이듬해 자신의 법률 사무소를 열었다. 그러나 대공황 시대에는 의뢰인이 부족했고 제대로 된 수임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홀트는 하숙집에서 생활하며 친구들의 도움에 의존하기도 했다.[5] 그는 연예계에 있는 가족들과의 관계를 활용하여 빅토리아 영화 상영업자 협회의 서기직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직책을 맡으면서 연방 화해 및 중재 법원에 여러 차례 출석하는 경험을 쌓았다.[6][7] 이는 그의 사무소 운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이후 잭 그레이엄(Jack Graham)과 제임스 뉴먼(James Newman)을 파트너로 영입했다.[8] 홀트, 그레이엄 & 뉴먼 법률회사는 1963년 재정적 문제로 해산되었으나, 홀트의 아들 샘(Sam)이 새롭게 합류하여 홀트, 뉴먼 & 홀트로 재편되었다. 홀트는 정계에 입문하면서 점차 사무소 업무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고, 1949년에는 실질적으로 업무를 중단했지만, 총리가 되기 전까지 공식적으로 변호사직에서 은퇴하지는 않았다.[9]

2. 3. 정치 경력



멜버른 대학교 퀸스 칼리지에서 법학을 공부한 홀트는 1932년 말 빅토리아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이듬해 자신의 법률 사무소를 열었다.[5] 대공황 시기였기에 의뢰인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었으나, 빅토리아 영화 상영업자 협회 서기직을 맡으며 연방 화해 및 중재 법원에 출석하는 등 활동 영역을 넓혔다.[6][7][8]

1933년, 홀트는 오스트레일리아 연합당(UAP)의 청년 조직인 젊은 국민주의자들에 합류하며 정치에 발을 들였다.[7] 그는 메이벨 브룩스와의 친분을 통해 영향력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여성 국가 연맹(AWNL)의 지지를 얻었고, 비슷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로버트 멘지스의 후원을 받았다.[10] 1934년 연방 선거에서 야라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노동당제임스 스컬린에게 패배했고,[7] 1935년 빅토리아 주 선거에서도 클리프턴 힐 선거구에서 버트 크리미언에게 패했다.[11] 그러나 같은 해 8월, 조지 맥스웰의 사망으로 치러진 포크너 선거구 보궐 선거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연합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27세로 최연소 의원이었다.[10][12][13][14]

1939년 4월 26일, 멘지스가 처음 총리가 된 날 홀트와 로버트 멘지스


1939년 4월, 로버트 멘지스가 총리가 되자 홀트는 무임소 장관으로 임명되어 리처드 케이시가 이끄는 공급 및 개발부를 보좌하고 과학산업연구기구(CSIR)를 담당했다.[15][16] 또한 다른 장관들의 해외 출장 시 통상 및 관세 장관, 민간 항공 및 공군 장관 직무를 대행하기도 했다.[17] 그의 첫 장관직은 1940년 3월 국가당과의 연립 정부가 재개되면서 끝났다.[18] 1941년에는 멘지스 총리 아래에서 전시 동원을 위해 노동 및 국민병역부를 조직하는 역할을 맡았다.

1949년 멘지스가 다시 총리가 되자 홀트는 노동장관과 이민 장관을 역임했다. 이후 1956년부터 1966년까지 하원의장과 자유당 부당수를 겸임했으며, 1958년부터 1966년까지는 연방 재무장관을 지냈다. 그러나 재무장관 시절인 1960년에 시행한 엄격한 물가상승 억제 정책은 경기 후퇴를 야기했고, 이는 1961년 선거에서 자유당이 의석을 잃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66년 1월, 홀트는 멘지스의 뒤를 이어 오스트레일리아의 총리가 되었다. 총리로서 그는 미국베트남 전쟁 개입을 강력히 지지하며 남베트남에 대한 오스트레일리아 군대의 지원을 확대했는데, 이는 국내외적으로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6년 후반 총선에서는 다수표를 얻어 재선에 성공했다. 또한 그는 아시아계 이민에 대한 장벽을 완화하고 오스트레일리아 시민권 취득 자격 조건을 완화하는 등 백호주의 정책을 사실상 폐지하는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중시하여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오스트레일리아 방문을 성사시켰는데, 이는 미국 현직 대통령의 첫 공식 방문이었다.[146]

3. 총리 재임 (1966-1967)

1966년 1월 26일 총리 취임 직후의 홀트(오른쪽)


로버트 멘지스가 은퇴한 후, 해럴드 홀트는 1966년 1월 26일 오스트레일리아의 총리로 취임했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지도자 선거에서 무투표 당선되었고, 윌리엄 맥마흔이 부총리로 선출되었다.[46] 그의 취임식은 국방장관 셰인 팔트리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해 연기되기도 했다.[47][48] 홀트는 20세기에 태어난 최초의 호주 총리였으며, 전임자 멘지스보다 거의 14살이나 젊었다. 57세의 나이로 총리가 되었지만, 이는 역대 네 번째로 많은 나이에 총리직을 맡은 경우였다. 그는 30년 이상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후 총리가 되었는데, 이는 비임시 총리 중 가장 긴 기간이었다.[49] 홀트는 멘지스보다 격식 없고 현대적인 스타일을 선보였으며, 언론에 전례 없는 수준의 접근을 허용하고 정기적인 기자 회견과 텔레비전 인터뷰를 진행했다.[50]

홀트의 첫 내각은 멘지스 내각과 거의 동일했다. 존 고튼과 레스 버리가 빈자리를 채웠고, 맥마흔이 홀트의 뒤를 이어 재무장관이 된 것을 제외하면 주요 부처 이동은 거의 없었다. 상원의원 안나벨 랭킨이 주택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실질적인 부처를 담당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51] 국가당 당수이자 사실상 부총리였던 존 맥이웬은 정부 내 최장수 각료로서 정책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66년 10월 마닐라에서 열린 SEATO 정상 회담에서 다른 세계 지도자들과 함께한 홀트(왼쪽에서 두 번째)


총리로서 홀트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호주군의 지원을 확대하고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백호주의 정책을 완화하고 십진법 화폐인 호주 달러 도입을 완료하는 등 변화를 추진했다.

1966년 11월 26일, 홀트는 총리로서 첫 총선을 치러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연립 정부는 하원 124석 중 82석을 차지하며 당시 호주 역사상 최대 다수 정부를 구성했다.[52] 그러나 이러한 승리는 홀트 개인의 능력보다는 당시 호주 노동당의 약세와 분열, 특히 야당 대표 아서 캘웰의 낮은 인기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당내 이견 때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53][54][55][56]

1967년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고프 휘틀럼이 노동당 대표가 되면서 홀트는 강력한 상대를 맞이하게 되었고, 노동당의 지지율은 회복세를 보였다.[1] 동시에 연립 정부 내에서도 경제 및 무역 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홀트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는데, 일부에서는 그가 "모호하고, 부정확하며, 회피적"이고 "너무 친절해서 품위가 약점으로 여겨진다"고 평가했다.

1967년 한 해 동안 홀트 정부는 여러 논란에 휩싸이며 정치적 입지가 흔들렸다. ABC 이사회 의장 재임명 거부 논란,[109] 침몰 사건 재조사 관련 논쟁에서의 미숙한 대응,[110][111] 그리고 VIP 항공기 남용 스캔들[1] 등은 홀트의 지도력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켰다. 특히 VIP 스캔들 당시 관련 장관 해임을 거부하면서 당내 지지 기반마저 약화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어려움 속에서 치러진 1967년 11월 상원 선거에서 연립 정부는 노동당에 패배했으며, 보궐 선거에서도 의석을 잃었다. 당내에서는 이러한 결과의 책임이 홀트의 미숙한 국정 운영에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1]

3. 1. 국내 정책

1953년의 홀트


8년간의 야당 생활 끝에 자유당-국가당 연립정부는 1949년 호주 연방 선거에서 승리했고, 로버트 멘지스는 두 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했다. 홀트는 선거구 재분할로 사라질 뻔한 자신의 지역구 대신 신설된 안전 지역구인 히긴스로 옮겨 쉽게 당선되었다. 그는 노동 및 국가봉사부 장관(1949~1958)과 이민부 장관(1949~1956)을 겸임하며 "멘지스의 확실한 후계자이자 잠재적인 총리"로 평가받았다. 이민부 장관으로서 홀트는 전임 노동당 아서 칼웰이 시작한 대규모 이민 프로그램을 이어갔지만, 백호주 정책의 강력한 옹호자였던 칼웰보다 더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1] 그는 칼웰이 인종을 이유로 입국을 거부했던 필리핀인 로렌조 감보아의 호주 정착을 허용하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34]

노동부 장관으로서 홀트는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여 연방 이후 최고의 노동부 장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당시 노동 운동 내 공산주의 영향력이 강했고 노사 갈등이 심화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경제 성장과 홀트의 현명한 노사 관계 접근 덕분에 파업으로 인한 노동 시간 손실은 1949년 200만 시간 이상에서 1958년 43만 9천 시간으로 크게 줄었다. 그는 정부, 법원, 고용주, 노동조합 간의 협력을 증진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노동 조합 평의회 회장 앨버트 몽크나 급진적인 오스트레일리아 해운 노조 지도자 짐 힐리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관용과 타협 의지로 명성을 얻었지만, 1953년 보웬 부두 분쟁 당시 군대를 동원해 화물 시설을 장악하기로 한 결정은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는 또한 멜버른 올림픽 개최에 대한 장관급 책임을 맡았다.[35]

1950년대 내내 홀트의 정치적 입지는 계속 상승했다. 그는 여러 위원회와 해외 대표단에서 활동했고, 1953년 추밀원 의원으로 임명되었으며,[1] 1954년에는 호주 최고의 남성 패셔니스타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56년 자유당 부당수로 선출되어 호주 하원 원내대표가 되면서,[1] 멘지스의 후계자로 확실시되었다.

홀트와 로버트 멘지스 총리


1958년 12월, 아서 패든의 은퇴 후 홀트는 호주 재무장관이 되었다.[1] 경제에 대한 깊은 지식이나 관심은 부족했지만, 이 자리는 멘지스의 후계자로서 그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36] 그는 재무부 장관 롤랜드 윌슨의 조언에 크게 의존했다.[37] 재무장관으로서 그의 주요 업적은 은행 시스템 개혁(호주 준비은행 설립 포함)과 십진법 화폐 도입 준비였다. 새로운 화폐 단위를 '로열(Royal)' 대신 '달러(Dollar)'로 정하도록 내각을 설득한 것도 홀트였다.[38]

홀트가 재무장관직을 맡았을 때 호주 경제는 새로운 철광석 광산 개발 등으로 강력한 성장세를 보였다.[39] 그러나 1959년 인플레이션이 4.5%에 달하자 재무부는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홀트는 처음에는 조치를 망설였으나, 1960년 11월 감세를 포함한 긴축 재정 정책 패키지를 도입했다. 또한 준비은행의 금리 인상에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이 신용 압축(credit squeeze) 정책은 "홀트의 충격(Holt's Jolt)"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경제를 침체에 빠뜨렸고, 실업률은 당시로서는 높은 3%까지 상승하여 정부의 완전 고용 정책 기조와 어긋났다.[40][41]

이 신용 압축 정책의 여파로 연립 정부는 1961년 호주 연방 총선에서 겨우 1석 차이로 간신히 재집권하는 위기를 맞았다. 홀트의 경질 요구도 있었지만 멘지스의 신임으로 자리를 지켰다.[42] 그는 훗날 1960-61년을 "공직 생활 중 가장 어려운 해"라고 회고했다. 대부분의 긴축 조치는 1962년에 철회되었고,[38] 1963년 8월까지 실업률은 1.5%로 떨어졌다.[43] 이후 홀트는 예산 편성 기간 동안 퀸즐랜드에서 휴가를 보내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으며,[44] 1965년 예산에 대해서는 "내가 발표한 어떤 예산보다 가장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자평했다.[45]

1964년 재무장관으로서 새로운 호주 달러 주화를 소개하는 홀트의 모습을 보여주는 호주방송공사(ABC) 영상


총리로서 홀트는 때때로 경제 문제에 단호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1965년 심각한 호주 가뭄으로 경제 성장이 둔화되었지만, 인플레이션을 우려하여 정부 지출 확대를 주저했다.[58] 그가 재무장관 시절 추진했던 호주 달러는 총리 취임 직후인 1966년 2월 14일부터 유통되기 시작했다. 1967년 11월, 영국 정부가 예고 없이 파운드화를 14% 평가절하하자 홀트는 호주가 이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하며 사실상 호주를 스털링 지역에서 탈퇴시켰다. 이 결정은 1차 산업에 불리할 것을 우려한 국가당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국가당 대표 맥이웬은 공개적으로 이 결정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홀트는 이를 내각 연대 위반으로 간주했다. 이 갈등으로 홀트와 맥이웬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연정이 붕괴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결국 홀트에게 유리하게 해결되었다. ''더 불레틴''은 이 사건이 호주와 영국의 관계가 종식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보도했다.[59] 1966년 호주가 아시아 개발 은행의 창립 회원국이 된 것 외에 홀트 정부 하에서 중요한 경제 정책 개혁은 많지 않았다.[60]

총리로서 홀트는 이민 장관 시절부터 시작했던 이민법 자유화를 계속 추진했다. 당시 남아있던 백호주 정책은 명시적인 법률보다는 각료령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1966년 3월, 귀화에 필요한 거주 기간이 이전 비백인에게 적용되던 15년에서 모든 이민자에게 동일하게 5년으로 단축되었다. 가족 상봉 관련 차별 조항들도 폐지되었다.[61] 그 결과, 1966년 3월 이후 2년 동안 약 3,000명의 아시아계 이민자가 호주 시민권을 취득했는데,[62] 이는 이전 20년간의 4,100명과 비교되는 상당한 증가였다.[63] 또한 이민 장관 허버트 오퍼먼은 이민 희망자들이 "정착민으로서의 적합성, 쉬운 통합 능력, 그리고 호주에 유용한 자격 보유 여부"만을 기준으로 평가될 것이라고 발표했다.[64] 이는 이전 비백인들에게 요구되었던 "고도로 자격을 갖추고 뛰어난" 인물이어야 한다는 기준을 완화한 것이었다.[61]

키스 윌슨은 홀트 정부의 개혁이 "인종이나 피부색을 이유로 이민자를 차별하는 법이나 규정은 없을 것"임을 보장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실제 이민자 구성의 큰 변화는 이후 몇 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65] 홀트 자신도 "모든 국가는 자국민의 구성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심각한 소수 민족 및 인종 문제가 없는 공동체 생활"을 약속했다.[66] 그는 비백인 이민 제한의 전통적 지지 세력이었던 조직 노동계의 반발을 우려하여 이러한 변화를 기존 정책의 단순 수정으로 포장하려 애썼다.[58] 당시 야당인 노동당은 1965년에야 당 강령에서 "백호주" 문구를 삭제했고, 야당 대표 아서 칼웰은 여전히 "다인종 사회를 만들려는 어떤 시도에도 반대할 것"이라는 입장이었다.[67] 하지만 홀트는 해외에서는 백호주 정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리고, 아시아 국가 정부와 언론에 이러한 변화를 적극 홍보하도록 지시했다.[61][68]

홀트, 고든 브라이언트(왼쪽), 그리고 빌 웬트워스(오른쪽)가 FCAATSI 대표들과 회의하는 모습 – 왼쪽부터 페이스 밴들러, 더글러스 니콜스, 버넘 버넘, 그리고 위니 브랜슨


1967년, 홀트 정부는 헌법 개정을 통해 제51조(xxvi)를 수정하고 제127조를 삭제했다. 이로써 연방 정부는 호주 원주민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할 권한을 얻었고, 호주 인구조사에 원주민 인구를 포함시키게 되었다. 이 헌법 개정안은 국민투표에서 90% 이상의 압도적인 찬성률로 통과되었는데, 이는 호주 역사상 가장 높은 찬성률이었다. 홀트 개인은 이 개정이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고 보았지만, 국제 사회, 특히 아시아 국가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을 것으로 기대했다.[69] 배리 덱스터에 따르면, 홀트는 국민투표 결과가 통과될지 확신하지 못했기에 결과에 놀랐다고 한다.[70]

홀트는 이 국민투표 결과를 국민 정서의 변화로 받아들였다. 이후 몇 달간 그는 원주민 공동체를 방문하고 찰스 퍼킨스, 캐스 워커 등 원주민 지도자들과 협의했다. 주 정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호주 총리실 내에 새로운 원주민 업무국을 설립하고, H. C. 쿰스를 의장으로 하는 원주민 문제 자문 기구인 원주민 문제 협의회를 창설했다.[71] 쿰스와 폴 해즐럭에 따르면 홀트는 총리가 되기 전까지 원주민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총리로서 정책 처리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와 연방 정부가 이전에 주 정부의 영역이었던 많은 권한과 책임을 맡는 길을 열었다. 원주민 학자 개리 폴리는 홀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원주민들에게는 큰 좌절이었다고 평가했는데, 그의 후임자들이 그가 마련한 틀에 대해 같은 수준의 헌신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73]

홀트 정부는 또한 하원 의원 수가 상원 의원 수의 두 배에 가깝도록 규정한 호주 헌법 제24조(소위 '연관 조항')를 폐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관련 국민투표는 전국 찬성률 40%에 그쳤고, 뉴사우스웨일스주에서만 과반수 찬성을 얻었다. 주요 3당 지도부는 모두 찬성 운동을 벌였지만, 연립 정부 후방 의원들과 호주 민주노동당 (1955) 상원의원들이 주로 반대했다. 반대론자들은 제24조가 상원의 영향력, 즉 인구가 적은 주와 농촌 지역의 이익을 보호한다고 주장했다.[74] 홀트는 헌법 개정 없이도 중요한 사법 개혁을 추진했다. 1967년 9월, 그는 호주 헌법 제74조를 발동하여 호주 고등법원 판결이 영국 사법위원회에 상고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겠다고 발표했다. 관련 법안은 그의 사후에 통과되었다.

1967년 11월, 홀트는 그의 마지막 주요 정책 발표 중 하나로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미술관과 오스트레일리아 예술위원회 설립 계획을 밝혔다. 1982년에 개관한 국립미술관은 연방 정부가 자금을 지원한 최초의 주요 예술 관련 기반 시설 프로젝트였다. 홀트는 이것이 "호주와 수도의 문화 생활에 상당히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76] 함께 발표된 오스트레일리아 예술위원회는 최초의 국가 예술위원회로서, 예술 지원에 관해 오스트레일리아 총리부에 독립적인 자문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77] 루퍼트 마이어는 "홀트의 유산은 모든 정부 단계에서 문화 활동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이라는 핵심 신념과 광범위한 대중적 요구"여야 한다고 평가했다.[78]

3. 2. 외교 정책

홀트와 1967년 키가 호주를 방문했을 당시의 남베트남 총리 응우옌까오키


1966년 7월 펜타곤에서 미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와 함께 있는 홀트


1966년 10월, 홀트와 미국의 린든 B. 존슨 대통령


해럴드 홀트와 자라 홀트가 1967년 해럴드 윌슨(Harold Wilson)과 메리 윌슨(Mary Wilson, Baroness Wilson of Rievaulx)을 만나는 모습


홀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총리로서 "동포들과 동맹국, 그리고 전 세계에 현대 호주를 보여주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겼다.[79] 그의 외교 및 국가 안보 정책은 국제 공산주의에 대한 강한 반대와 아시아와의 관계 증진 필요성에 중점을 두었다. 홀트는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사실"이 "공산권과 자유 세계 사이의 엄청난 권력 갈등"이라고 보았다.[80] 그는 도미노 이론봉쇄 정책을 신봉하며,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어디서든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55] 1967년 4월 의회 연설에서는 "지리적으로 우리는 아시아의 일부이며, 점점 더 아시아 문제에 대한 우리의 개입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위험과 가장 큰 희망은 아시아의 미래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아시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81] 훗날 고프 휘틀럼은 홀트가 "호주를 아시아에서 더 잘 알려지게 했고, 호주인들이 이전보다 아시아를 더 잘 알게 했다"며 이를 홀트의 중요한 공헌으로 평가했다.[82]

홀트는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외교적 유대를 강화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다른 세계 지도자들과의 친밀한 관계 구축에 힘썼다.[83] 그러나 이러한 접근 방식은 당시 외교부 장관이었던 폴 해즐럭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해즐럭은 홀트가 "즉각적인 외교"를 선호하며 외교관들의 노력을 자신의 개인적 매력 덕분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84] 홀트는 총리로서 여러 차례 아시아 국가들을 순방했다. 1966년 4월에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남베트남, 태국을 방문했고,[85] 1967년 3월과 4월에는 캄보디아, 라오스, 한국, 대만을 방문했다. 당시 대부분의 국가는 호주 총리가 처음 방문하는 곳이었다.[86][87] 또한 일본의 사토 에이사쿠, 라오스의 수반나 푸마, 태국의 타놈 키티카촌 등 동아시아 지도자들의 호주 방문도 이루어졌다.[86] 이 중 가장 논란이 된 것은 1967년 1월, 홀트가 개인적으로 초청한 남베트남 총리 응우옌까오키의 방문이었다. 내각과 상의 없이 이루어진 이 초청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감이 커지던 시점에 이루어져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다. 당시 야당 대표 아서 칼웰은 키를 "비참한 작은 도살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키의 방문 자체는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어 ''더 불레틴''은 이를 "개인적 승리"라고 평가했다.[88]

홀트 재임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외교 정책 현안은 베트ナム 전쟁이었다. 그는 1962년부터 시작된 호주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강력히 지지했으며,[83] 비판자들을 향해 "향락의 땅(Lotus Land)" 같은 태도를 취한다고 비난했다.[89] 홀트는 호주의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SEATO) 가맹국으로서의 의무를 강조하는 한편, "공산주의의 파괴 활동과 침략에 저항하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 및 경제 질서를 선택할 권리를 옹호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논리로 참전을 정당화했다. 그는 "모든 소국에 대한 안보가 없다면 어떤 소국도 안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90] 1966년 3월, 홀트는 기존에 파병되었던 제1 로열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대대(1st Battalion, Royal Australian Regiment)를 철수시키고, 누이닷(Nui Dat)에 주둔하는 여단 규모의 독립 부대인 제1 오스트레일리아 임무 부대(1st Australian Task Force)를 창설하여 파병한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 베트남 주둔 호주군은 약 4,500명으로 세 배 가까이 늘어났으며, 여기에는 처음으로 전투에 투입된 1,500명의 징집병도 포함되었다.[91] 홀트 임기 말에는 3개 군에서 파견된 8,000명 이상의 호주군이 남베트남에 주둔했으며, 마지막 병력 증강은 1967년 10월에 발표되었다.[83] 홀트는 북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폭격과 남베트남 주둔 외국군 증강이 군사적 승리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92] 훗날 존 고튼은 "평화주의자였던 그가 호주가 참여한 가장 큰 군사력 증강 중 하나를 주재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고 평가했다.[93]

초기에 정부의 전쟁 개입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고, 이는 1966년 총선 압승의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여 "카키 선거(khaki election)"라고 불리기도 했다.[94] 그러나 이듬해 말에는 여론 조사에서 전쟁 반대 여론이 우세해졌고, 이전까지 정부를 지지했던 언론들도 홀트의 결정을 비판하기 시작했다.[95] 홀트는 이후 본격화된 대규모 반전 시위를 직접 겪지는 못했다. 전쟁에 대한 정치적 반대는 처음에는 아서 칼웰 야당 대표가 주도했으며, 그는 완전 철수를 주장하며 전쟁을 "잔인하고 승리할 수 없는 내전"이라고 규정했다.[94] 그의 후임자인 고프 휘틀럼은 전쟁 자체의 정당성보다는 정부의 명확한 탈출 전략(exit strategy) 부재 등 정책의 구체적인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는 보다 실용적인 비판 노선을 취했다.[96]

홀트는 미국린든 B. 존슨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미국의 방패가 없다면 아시아와 남태평양에 사는 우리 대부분은 지속적인 불안감을 느낄 것"이라고 믿었다. 양국 협력은 베트남 전쟁을 넘어 NASA와 미국 정보기관을 위한 지구국 건설 승인으로 이어졌다. 파인 갭, 호니석크릭, 티드빈빌라 등의 시설 건설로 호주는 "미국 본토를 제외한 미국 미사일 및 우주 작전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97]

홀트와 존슨은 개인적인 친분도 깊었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존슨이 해군 장교로 멜버른을 방문했던 1942년에 처음 만났고, 이후 정치 역정도 비슷했다. 홀트는 1966년 두 차례 미국을 방문했으며, 7월 방문 때는 캠프 데이비드에 초대받아 함께 시간을 보냈다.[98][99] 1966년 10월에는 존슨 대통령이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호주를 공식 방문했다. (같은 해 2월에는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이 방문했었다.)[91] 존슨 대통령의 5개 도시 순방은 대규모 환영 인파와 함께 격렬한 반전 시위에 부딪히기도 했다. 야당은 이 방문을 선전 쇼라고 비판했다.[100] 존슨은 이후 홀트의 추모식 참석차 다시 호주를 방문했고, 홀트의 미망인 자라가 1969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백악관에 머물도록 초대하기도 했다.[98]

1966년 미국 첫 방문 당시, 홀트는 백악관 연설에서 "LBJ와 끝까지 함께(All the way with LBJ)"라는 발언을 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준비된 원고에서 벗어나 "각하, 어떤 국가 지도자에게도 찾아오는 더 고독하고 낙담스러운 순간에도, 당신이 존경하는 친구, 즉 ''LBJ와 끝까지 함께할'' 충실한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는 당신 마음과 마음 한구석이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101] 이는 존슨의 1964년 대선 캠페인 슬로건을 인용한 것으로, 홀트는 "관대한 주인에 대한 밝은 기분의 호의 표시"라고 해명했다.[102]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였으나, 이 발언이 호주에 보도되면서 미국의 정책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과 국가적 굴종을 상징하는 "어리석고, 아첨하며, 위험한 발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98] 빌 헤이든은 이 발언이 "많은 호주인들을 충격에 빠뜨리고 모욕했다 [...] 그러한 비굴함은 당황스럽고 걱정스러운 일이었다"고 회고했다.[103] 신문 사설들은 홀트가 오해받았다는 주장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판단 착오에 대해서는 비판했다.[104] 이 발언은 반전 정서를 더욱 강화시켰지만, 1966년 선거 결과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LBJ와 끝까지 함께"는 홀트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발언으로 남게 되었다.[83]

홀트는 영연방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특히 "모국"인 영국에 대해 회원국들이 도덕적 의무를 지닌다고 믿었다.[105] 그러나 영국 총리 해럴드 윌슨과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홀트는 미국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이 "수에즈 동쪽" 지역에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거듭 설득했고, 1967년 초에는 윌슨으로부터 병력 감축은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확답을 받았다.[88] 하지만 같은 해 중반, 윌슨 정부는 1970년대 초까지 홍콩을 제외한 아시아의 모든 영국군 기지를 폐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06] 홀트의 우려에 대해 윌슨은 칵번 사운드에 영국 해군 기지를 건설하는 방안을 제안했지만,[107] 홀트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며 윌슨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오도했다고 느꼈다.[108]

아시아인 이민에 대한 장벽이 일부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시민이 되기 위한 자격조건과 입국을 위한 예비조건을 완화해 백호주의를 사실상 무력화 시켰다.

4. 실종

1967년 12월 17일, 수영을 즐겨 했던 해럴드 홀트는 빅토리아주 포트시 인근의 체비엇 해안에서 수영 중 실종되었다.[148][113] 평소 잘 아는 곳이라 자신했지만 거친 파도에 휩쓸린 것으로 추정된다.[148][113] 대규모 수색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고,[114][148] 결국 사망한 것으로 공식 처리되었다.[115] 이후 존 맥이웬이 임시 총리직을 맡았고, 존 고튼이 후임 총리로 선출되었다.[148][120][121]

홀트의 실종과 시신 미발견은 여러 음모론을 낳았으며,[149][118]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에서는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해럴드 홀트 하다(To do a Harold Holt)'라는 속어가 생기기도 했다.[150] 그의 지역구였던 멜버른 인근 글렌 아이리스에는 그를 기리는 수영장이 건립되었다.[151]

4. 1. 실종 경위

수영을 즐겨 했던 그는 주변의 염려에도 "총리가 익사하거나 상어에 잡아먹힐 확률이 얼마나 되겠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147] 홀트는 바다, 특히 창작업을 좋아했고, 빅토리아주 포트시와 퀸즐랜드주 빙길 베이에 별장을 소유하고 있었다.[112]

1967년 12월 17일, 홀트가 포트시에서 주말을 보내는 동안 그와 동행한 네 명은 항해사 알렉 로즈가 단독으로 세계 일주를 시도하며 더 립을 통과하는 것을 보기 위해 포인트 니피언으로 향했다. 포트시로 돌아오는 길에 홀트는 점심 식사 전에 외딴 체비엇 해안에서 수영을 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이전에 여러 차례 이곳에서 창작업을 했으며 포트시 인근 바스 해협에 있는 이 해변을 "내 손등만큼 잘 안다"고 자신했다.[148] 거친 바다 상황 때문에 앨런 스튜어트 단 한 명만 홀트와 함께 물에 들어갔다. 스튜어트는 해안 가까이에 있었지만, 홀트는 더 깊은 곳으로 헤엄쳐 나갔고, 이안류에 휩쓸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목격자 중 한 명인 마조리 길레시피는 "마치 나뭇잎이 휩쓸려 가는 것 같았다 [...] 너무나 빠르고 결정적이었다"라고 묘사했다.[113]

홀트가 실종된 체비엇 해안


홀트의 실종은 "호주 역사상 가장 큰 수색 작전 중 하나"를 촉발했고, 실종 2시간 만에 생중계된 대규모 수색 작업이 시작되었다.[114] 6일간의 대규모 수색에도 불구하고 홀트의 시신이나 유품은 발견되지 않았다.[148][114] 주요국의 총리가 실종되는 사례는 적어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로는 유례가 없다.

12월 18일 오후 10시, 총독 케이시 경은 홀트의 사망을 추정하고 총리직에서 해임했다고 발표했다.[115] 컨트리당의 당수인 존 맥이웬이 12월 19일 임시 총리로 취임했고,[120] 자유당은 당대표 선거를 1968년 1월 9일에 실시하여 존 고튼이 폴 해즐럭, 빌리 스네든, 레스 버리를 물리치고 총리직을 계승하였다.[148][121] 고튼은 상원 의원이었고, 헌법 관례에 따라 홀트의 사망으로 인한 보궐선거에서 하원 의원직을 얻었다.[121]

홀트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으면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에 대한 많은 억측이 제기되었다. 1968년 초 발표된 경찰 보고서는 홀트의 사망에 대한 결정적인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38년 후인 2005년 9월 2일, 빅토리아주 검시관은 다른 수난 실종 사례와 함께 "홀트 총리는 거친 파도에 휩쓸려 익사했다"는 우발적 익사 평결을 내렸다.[116] 일반적으로 홀트가 자신의 수영 실력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116] 일각에서는 홀트가 자살했다고 주장했지만, 그와 가까운 사람들은 그의 성격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117] 대표적인 음모론은 홀트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간첩이었고, 잠수함을 타고 중국으로 갔다는 것이다.[149] 이 이론은 홀트가 중국 요리도 싫어했다는 아내의 증언으로 설득력을 잃었다.[149] 다른 음모론에는 홀트가 자신의 죽음을 위장했다거나 CIA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등의 주장도 포함되어 있다.[118]

현직 총리의 갑작스런 실종으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갑자기 떠나버린다는 뜻의 '해럴드 홀트 하다(To Do a Harold Holt)' 또는 '해리를 하다(do the Harry)'라는 속어가 생겼다.[150] 그의 지역구였던 멜버른 인근 글렌 아이리스에는 그의 이름을 딴 수영장이 생겼다.[151] 12월 22일, 멜버른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홀트를 위한 추모 예배가 열렸고, 많은 세계 지도자들이 참석했다.[119]

4. 2. 수색 및 조사



1967년 12월 17일, 홀트는 친구들과 함께 빅토리아주 포트시 인근 체비엇 해안에서 수영을 하던 중 실종되었다.[148][113] 그는 평소 수영을 즐겼으며, 실종 당일에도 항해사 알렉 로즈가 더 립을 통과하는 것을 본 후, 점심 식사 전에 체비엇 해변에서 수영할 것을 제안했다. 홀트는 이 해변에서 여러 차례 창작업을 했으며 "이 해변을 손바닥처럼 안다"고 자신했지만,[112][113] 당시 바다는 파도가 거칠었다. 앨런 스튜어트만이 홀트와 함께 물에 들어갔는데, 스튜어트는 해안 가까이에 머물렀지만 홀트는 더 깊은 곳으로 헤엄쳐 나갔다가 리프 해류에 휩쓸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목격자 마조리 길레시피는 "마치 나뭇잎이 휩쓸려 가는 것 같았다 [...] 너무나 빠르고 결정적이었다"라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113] 홀트는 주변의 염려에도 "총리가 익사하거나 상어에 잡아먹힐 확률이 얼마나 되겠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전해진다.[147]

홀트의 실종 이후 "호주 역사상 가장 큰 수색 작전 중 하나"로 불리는 대규모 수색 작업이 시작되었고, 실종 2시간 만에 생중계되기도 했으나 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못했다.[114][148] 12월 18일, 총독 케이시 경은 홀트의 사망을 추정하고 총리직 해임을 공식 발표했다.[115] 컨트리당의 당수인 존 맥이웬이 12월 19일 임시 총리로 취임했으며,[120] 이후 1968년 1월 9일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 당대표 선거에서 존 고튼이 선출되어 총리직을 승계했다.[121]

1968년 초 발표된 경찰 보고서는 홀트의 사망 원인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116] 38년 후인 2005년 9월 2일, 빅토리아 주검찰청은 다른 수난 실종 사례와 함께 홀트의 사건을 재조사하여, 그가 거친 파도에 휩쓸려 익사했다는 '우발적 익사'로 최종 판단을 내렸다. 일반적으로 홀트가 자신의 수영 실력을 과대평가했다는 견해가 받아들여지고 있다.[116]

현직 총리의 갑작스러운 실종은 여러 음모론을 낳았다. 홀트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간첩이었고 잠수함을 타고 중국으로 망명했다는 설이 대표적이지만, 홀트가 중국 요리를 싫어했다는 아내의 증언으로 설득력을 잃었다.[149] 이 외에도 홀트가 자살했다는 주장(가까운 사람들은 그의 성격상 그럴 리 없다고 반박),[117] 자신의 죽음을 위장했다는 설, CIA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설 등이 제기되었다.[118]

12월 22일, 멜버른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홀트를 위한 추모 예배가 열렸고, 많은 세계 지도자들이 참석했다.[119] 사망 당시 59세였던 홀트는 조셉 라이온스(1939년)와 존 커틴(1945년)에 이어 재임 중 사망한 세 번째 호주 총리가 되었다. 이 사건은 호주에서 갑자기 사라지거나 도망치는 행위를 뜻하는 '해럴드 홀트 하다(To Do a Harold Holt)' 또는 '해리 하다(do the Harry)'라는 속어의 어원이 되었다.[150] 또한 그의 지역구였던 멜버른 인근 글렌 아이리스에는 그의 이름을 딴 수영장이 건립되었다.[151]

4. 3. 음모론

홀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고, 그의 실종을 둘러싸고 많은 음모론이 제기되었다.[148] 대표적인 음모론 중 하나는 홀트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스파이였으며, 잠수함을 타고 중국으로 망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홀트가 중국 요리조차 싫어했다는 아내의 증언으로 설득력을 잃었다.[149]

이 외에도 홀트가 자신의 죽음을 위장했다거나, CIA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등의 다양한 음모론이 존재한다.[118] 일각에서는 홀트가 자살했다는 주장도 제기했지만,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그의 성격상 그럴 가능성이 낮다고 반박했다.[117]

2005년 빅토리아주 검시관은 홀트가 거친 파도에 휩쓸려 익사했다는, 즉 '우발적 익사'라는 최종 판단을 내렸다.[116] 일반적으로는 홀트가 자신의 수영 실력을 과대평가하다 사고를 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116]

5. 유산 및 평가

1967년 11월, 홀트는 그의 마지막 주요 정책 발표 중 하나로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미술관과 오스트레일리아 예술위원회 설립 계획을 밝혔다. 1982년에 개관한 국립미술관은 연방 정부가 자금을 지원한 첫 대규모 예술 관련 기반 시설 프로젝트였다. 이전까지 유사한 프로젝트는 주 정부나 민간 기부를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홀트는 이 계획이 "오스트레일리아와 수도의 문화생활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76] 발표의 다른 핵심 요소인 오스트레일리아 예술위원회는 최초의 국가 예술위원회로서, 예술 기금 지원에 관해 총리 부서에 독립적인 자문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77] 루퍼트 마이어는 "홀트의 유산은 모든 정부 차원에서 문화 활동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이라는 핵심 신념과 광범위한 대중적 요구여야 한다"고 평가했다.[78]

멜버른의 해럴드 홀트 수영 센터


발라랫 식물원의 총리 거리에 위치한 해럴드 홀트 흉상


해럴드 홀트는 멜버른 글렌 아이리스 교외에 있는 해럴드 홀트 기념 수영 센터[139]로 기념되고 있다. 이 시설은 홀트가 실종될 당시 건설 중이었으며, 그가 해당 지역구 의원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익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수영장으로 기념하는 아이러니는 많은 호주인들에게 씁쓸한 농담거리가 되었다.[140] 베트남 남부에 주둔했던 제1호주지원부대 내 수영장도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141]

1968년, 새로 취역한 미국 해군의 녹스급 호위함 USS 해럴드 E. 홀트(FF-1074)가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홀트의 미망인 자라 여사가 1969년 5월 3일 로스앤젤레스의 토드 조선소에서 진수식을 주관했으며, 이는 외국 지도자의 이름을 딴 최초의 미국 군함이었다.

1969년, 셰비엇 해변의 바다 밑바닥에 홀트를 기리는 명판이 설치되었다. 명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호주의 총리였으며 바다를 사랑했던 해럴드 홀트를 기리며, 그는 1967년 12월 17일 이곳 근처에서 실종되었다."

다른 기념물은 다음과 같다.

  • 홀트 (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 교외 지역
  • 해럴드 E. 홀트 해군 통신 기지
  • 빅토리아주 오스트레일리아 하원의 선거구인 홀트 선거구
  • 멜버른 웨슬리 칼리지의 기숙사 건물
  • 해럴드 홀트 어업 보호 구역 – 포트 필립 남부에 위치한 5개 보호 구역(스완 베이, 포인트 론즈데일, 머드 아일랜드, 포인트 니피언, 포프스 아이)
  • 멜버른 일반묘지의 '총리 정원' 내 기념비


민간에서는 "해럴드 홀트처럼 하다"(do a Harold Holt) 또는 "해리처럼 하다"(do the Harry)라는 호주 속어 표현으로 기억되는데, 이는 "갑자기 설명 없이 사라지다"라는 뜻의 운율 슬랭이다. 주로 추정 사망 사건보다는 사교 모임 등에서 갑자기 자리를 뜨는 상황에 사용된다.[142]

1968년 6월 여왕 생일 기념 서훈에서 홀트의 미망인 자라는 대영 제국 훈장 데임 커맨더(DBE)로 서훈되어 자라 홀트 여사가 되었다.[143] 그녀는 이후 홀트의 자유당 동료였던 제프 베이트와 세 번째 결혼을 하여 자라 베이트 여사로 알려졌다.

광물 홀타이트는 그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이 광물은 서호주 그린부시 주석 광산에서 발견되었으며 1971년에 공식적으로 기술되었다.[144][145]

6.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1차 득표율1차 득표수2차 득표율2차 득표수결과당락
1935년 포크너 재보궐선거하원의원 (포크너 선거구)14대통합 오스트레일리아당59.9%24,594표 1위
포크너 하원의원 당선
1937년 오스트레일리아 의회 선거하원의원 (포크너 선거구)15대통합 오스트레일리아당55.1%33,277표 1위
1940년 오스트레일리아 의회 선거하원의원 (포크너 선거구)16대통합 오스트레일리아당60.8%38,387표 1위
1943년 오스트레일리아 의회 선거하원의원 (포크너 선거구)17대통합 오스트레일리아당33.4%23,931표58.0%41,602표1위
1946년 오스트레일리아 의회 선거하원의원 (포크너 선거구)18대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53.5%39,047표 1위
1949년 오스트레일리아 의회 선거하원의원 (히긴스 선거구)19대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66.8%26,018표 1위
1951년 오스트레일리아 의회 선거하원의원 (히긴스 선거구)20대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64.4%24,217표 1위
1954년 오스트레일리아 의회 선거하원의원 (히긴스 선거구)21대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65.4%22,849표 1위
1955년 오스트레일리아 의회 선거하원의원 (히긴스 선거구)22대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64.4%25,476표 1위
1958년 오스트레일리아 의회 선거하원의원 (히긴스 선거구)23대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63.2%24,486표 1위
1961년 오스트레일리아 의회 선거하원의원 (히긴스 선거구)24대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56.7%22,004표 1위
1963년 오스트레일리아 의회 선거하원의원 (히긴스 선거구)25대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60.1%22,835표 1위
1966년 오스트레일리아 의회 선거하원의원 (히긴스 선거구)26대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63.3%23,918표 1위



1966년 11월 26일, 홀트는 총리로서 치른 첫 번째이자 유일한 총선에서 예상 밖의 압승을 거두었다. 연립 정부는 2개 정당 선호 투표에서 56.9%를 득표하여 10석을 추가 확보했고, 호주 하원 의석 수를 124석 중 82석으로 늘려 당시 호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다수 정부를 구성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은 단독 과반 정부 구성에 단 2석만을 남겨두었다. 이는 멘지스가 자유당 대표로서 8번의 선거에서 거둔 승리보다 높은 득표율이었으며, 호주 노동당에게는 31년 만에 최악의 참패였다.[52]

그러나 홀트는 연립 정부의 이러한 선거 승리에 대해 그 공을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53] 노동당의 부실한 선거 운동이 패배의 주된 원인이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당시 야당 대표였던 아서 캘웰은 70세의 고령이었고 대중적 인기가 낮았다. 선거 전 갤럽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24%에 불과했던 반면, 홀트의 지지율은 60%에 달했다.[54] 캘웰은 그 해 초 부대표였던 고프 휘틀럼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고, 대중은 여전히 노동당이 분열되어 있다고 인식했다.[55] 베트남 전쟁이 주요 쟁점이었던 이 선거에서 캘웰과 휘틀럼은 주요 정책에 대해 공개적으로 상반된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캘웰은 베트남에서 모든 호주군을 철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휘틀럼은 노동당이 징집병만 철수하고 정규군은 남겨두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시사했다.[56] 노동당은 반전 입장을 내세웠지만, 국가 안보를 우려하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여기에 캘웰이 백호주 정책을 고수한 점까지 더해져 노동당은 고립주의적이고 국제 문제에 순진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당시 노동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던 ''더 불레틴''조차 캘웰이 호주를 "대륙 유럽 사람은 물론이고 다른 두려운 지역 사람들도 없는 아늑하고 작은 고립된 영국 공동체"로 만들려 한다고 비판했다.[56] 캘웰은 홀트에 비해 훨씬 덜 매력적인 후보였고, 세련되고 여유로운 홀트와 달리 거칠고 적대적인 이미지를 주었다. 선거 1주일 전 애들레이드 유세에서 캘웰은 홀트가 "2차 세계 대전에서 겁먹고 도망쳤고, 그의 세 아들도 오늘날 베트남 전쟁에서 겁먹고 도망치고 있다"고 비난하는 실언을 했다. 홀트 가족에 대한 이러한 공격(캘웰은 철회를 거부했다)은 필사적이고 품위 없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홀트와 달리 캘웰 자신은 2차 세계 대전에서 군 복무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했다.[56]

1967년 초, 캘웰은 노동당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뒤를 이은 휘틀럼은 캘웰보다 훨씬 효과적인 경쟁자로 부상하여 언론과 의회에서 홀트보다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노동당은 빠르게 선거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 지지율을 회복하기 시작했다.[1] 이 무렵, 경제 및 무역 정책을 둘러싼 연립 정부 파트너 간의 오랜 갈등도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멘지스는 자유당 대표 시절 강력한 당 장악력을 보였지만, 그가 물러나자 불협화음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자유당 의원들은 홀트의 리더십에 점차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언론인 앨런 레이드는 홀트가 사망하기 몇 달 전부터 당내에서 "모호하고, 부정확하며, 회피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너무 친절해서 그의 본질적인 품위가 오히려 약점으로 여겨졌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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