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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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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1402년 조선에서 제작된 세계 지도로, 이회, 김사형, 이무 등이 참여했다. 이 지도는 이택민의 《성교광피도》, 청준의 《혼일강리도》, 조선과 일본의 지도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를 포함한 당시 사람들이 인식했던 세계의 모습을 담고 있다. 특히 서양의 지리 정보는 제한적이지만, 중국과 이슬람의 지리 정보는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현재 원본은 한국에 없고 일본에 류코쿠 대학본과 혼코지본 등 두 종이 보관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시기에 일본으로 유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는 몽골 제국의 영향, 조선 왕조의 권위, 그리고 동서양의 지리 정보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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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지도 정보
명칭
한국어 명칭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한자 명칭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로마자 표기Honil Gangni Yeokdae Gukdo Ji Do
약칭강리도
한자 약칭疆理圖
로마자 약칭Gangnido
기본 정보
제작 시기1402년
제작 국가조선
특징현존하는 동아시아 최고(最古)의 세계 지도
아프리카와 유럽을 묘사한 가장 오래된 동아시아 지도
제작 배경
제작 배경이회와 김사형 등이 제작 주도
명나라대명혼일도와 한국 및 일본의 지도를 참고
지도 내용
지도 범위서쪽으로는 아프리카
동쪽으로는 일본
남쪽으로는 자바
북쪽으로는 유럽
지도 특징
지도 표현세계를 구형으로 인식한 듯한 형태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묘사
실제 크기와 다른 왜곡된 표현
지리적 특징아프리카의 모습이 상세하게 묘사됨
유럽 지역의 모습도 어느 정도 나타남
인도 반도의 모습이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됨
한반도는 실제보다 크게 묘사됨
일본은 작게 묘사됨
중국 대륙이 크게 강조됨
역사적 의미
역사적 가치조선 초기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
서양 지도학이 동아시아에 영향을 주기 전의 지도
15세기 유럽 지리학 발전 이전의 아프리카 묘사
대항해시대 이전의 세계지도
기타
참고 문헌Cartography
ISBN0-226-31637-8

2. 제작 과정

태종 2년(1402년) 5월, 문신 이회가 직접 그린 《조선팔도도》(朝鮮八道圖)를 바쳤다. 석 달 뒤, 김사형, 이무, 이회 등이 주도하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완성했다. 권근은 지도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제작 동기를 밝힌 발문에서 김사형과 이무가 기획하고 이회가 실무를 맡았으며, 중국의 《혼일강리도》에 일본 지도를 추가하여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회는 《조선팔도도》 제작 경험이 있어 중국과 비례하는 조선 지도를 그리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2. 1. 조선 초기 지도 제작 배경

1402년 5월, 문신 이회가 직접 그린 《조선팔도도》(朝鮮八道圖)를 태종에게 바쳤다. 석 달 뒤, 의정부좌정승 김사형, 우정승 이무, 검상(檢詳) 이회 등이 주도하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완성했다. 지도 제작 당시 참찬이었던 권근은 지도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제작 동기를 밝힌 발문을 지었다.

권근의 발문에 따르면, 김사형과 이무가 기획하고 이회가 실무를 맡았으며, 중국의 《혼일강리도》에 일본 지도를 추가하여 제작했다.[46][47] 1398년(明)에서 제작한 《대명혼일도》와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으나, 《대명혼일도》의 직접적인 영향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회가 이미 《조선팔도도》를 그린 경험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제작의 실제 주역은 이회였다고 할 수 있다.

권근이 지도 제작에 참조했다고 한 《성교광피도》는 이슬람 계통의 세계지도로 추정된다. 실제로 지도에는 드문드문 아랍어 지명이 보이고, 아랍 계통의 지구의를 따라 바다는 녹색, 하천은 청색으로 표기되어 있다. 지도에는 중국 역대 왕국의 수도가 표기되어 있으며, 시대의 지명을 반영하고 있으나 기본적인 지리 정보는 (元) 시대에 중국을 거쳐 유입된 아라비아 계통의 지도로부터 얻은 것으로 보인다.[46][47] 하지만 아라비아 계통의 지도가 지구설에 기초해 원형으로 제작된 것과는 달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동양의 전통적인 천원지방 사상에 기초하여 사각형으로 제작되었다.

이 지도는 몽골 제국의 역사적 배경에서 유래하였는데, 서쪽 이슬람 세계와 중국권을 연결하였다. 몽골 제국은 지리학 논문과 세계 지도를 발간함으로써 세계 정복을 과시했고, 이슬람 과학과 전통적인 중국 지식의 통합을 가능하게 하였다.[31]

고려는 '서녀국'(quda, 사위 국가)으로서 몽골 제국과 밀접하게 통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지도들은 몽골 시대에 한국에서 이용 가능했을 가능성이 있다.[32]고려사』에는 나흥유(羅興儒)가 중국과 한국의 지도를 바탕으로 역사 지도를 제작하여 공민왕(재위 1352~1374)에게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다.[33]

일본 학자 미야 노리코(宮紀子)는 1402년이 새로 건국된 조선 왕조의 태종 재위 기간에 중요한 해였다고 추정한다. 태종은 피비린내 나는 왕위 계승 투쟁 끝에 1400년 왕위에 올랐고, 1401년에는 중국 황제로부터 조선왕으로 공식 인정받았다. 1402년 6월에는 이회의 한국 지도가 그의 생일을 축하하는 의식에서 헌상되었고, 이후 중국과 일본 지도와 결합하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왕권을 과시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기묘하게도,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지도에 대한 언급이 없다.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은 이 지도가 명나라 연호인 '건문'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건문제주디에게 패한 후, 새 황제는 1402년 10월에 건문 연호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에 이 지도는 홍무 연호를 사용했어야 했다. 그러나 건문 연호는 후대의 류큐와 본고지 사본에서도 발견된다. 이것은 강도지도가 중국에 공개된 적이 없음을 시사한다.[35]

2. 2. 중국 및 이슬람 지도 정보의 활용

권근이 지도 제작에 참조했다고 한 《성교광피도》는 이슬람 계통의 세계지도로 추정되는데, 실제로 드문드문 아랍어 지명이 보이고 아랍 계통의 지구의를 따라 바다는 녹색, 하천은 청색으로 표기되어 있다.[46][47] 지도에는 중국 역대 왕국의 수도가 표기되어 있다. 시대의 지명을 반영하고 있으나 기본적인 지리 정보는 원나라 시대에 중국을 거쳐 유입된 아라비아 계통의 지도로부터 얻은 것으로 보인다.[46][47] 하지만 아라비아 계통의 지도가 땅은 둥글다는 지구설에 기초해 원형으로 제작된 것과는 달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동양의 전통적인 천원지방(天圓地方) 관념에 토대를 두고 사각형으로 제작되었다.

이 지도는 몽골 제국의 역사적 배경에서 유래하였는데, 서쪽 이슬람 세계와 중국권을 연결하였다. 몽골 제국은 지리학 논문과 세계 지도를 발간함으로써 세계 정복을 과시했다. 그들의 시도는 이슬람 과학과 전통적인 중국 지식의 통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중국 출처 지도는 "일반 소비자용"이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다시 말해, 제국 자체를 위해 제작된 것이 아니었다. 몽골 정부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훨씬 더 자세한 정보를 수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31]

중국 출처 지도는 특히 닝보의 칭위안루(慶元路)에 있는 남중국 문인들에 의해 제작되고 유통되었다. 이웃 타이저우 출신인 칭쥔(慶俊)은 칭위안에 머무는 동안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제작했다. 중요한 서지학적 단서를 남긴 오사도 또한 칭위안 출신이었다. 게다가 칭위안루는 해상 루트가 푸저우와 광주, 동남아시아, 일본, 고려로 확장되는 가장 중요한 항구 중 하나였다.

이 지도들은 몽골 시대에 고려에서 이용 가능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고려는 '서녀국'(quda, 사위 국가)으로서 몽골 제국과 밀접하게 통합되었다.[32]

2. 3. 조선과 일본의 지도 정보 추가

1402년 5월, 문신 이회가 직접 그린 《조선팔도도》(朝鮮八道圖)를 태종에게 바쳤다. 석 달 뒤, 의정부좌정승 김사형과 우정승 이무, 검상(檢詳) 이회 등이 주도하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완성했다. 지도 제작 당시 참찬이었던 권근은 지도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제작 동기를 밝힌 발문을 작성했다.

권근은 발문에서 김사형과 이무가 기획하고 이회가 실무를 맡았으며, 중국의 《혼일강리도》에 일본 지도를 추가하여 제작하였다고 설명했다. 1398년경 (明)에서 제작한 《대명혼일도》와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으나, 《대명혼일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회가 이미 《조선팔도도》를 그린 경험이 있으므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제작의 실제 주역은 이회였다고 할 수 있다. 이회는 《조선팔도도》 제작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과 비례하는 조선 지도를 그리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3. 지도 작성에 사용된 정보

1402년(태종 2년) 5월, 문신 이회가 직접 그린 《팔도도(팔도도)》를 태종에게 바쳤다. 석 달 뒤, 의정부좌정승 김사형과 우정승 이무, 검상(檢詳) 이회 등이 주도하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완성했다. 지도 제작 당시 참찬이었던 권근은 지도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제작 동기를 밝힌 발문을 작성했다.

권근의 발문에 따르면, 김사형과 이무가 지도의 제작을 기획하고 이회가 실무를 담당했다. 이들은 중국의 《혼일강리도》에 일본 지도를 추가하여 지도를 제작했다고 한다. 1398년경 (明)에서 제작한 《대명혼일도》와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는데, 《대명혼일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회가 이미 《팔도도(팔도도)》를 제작한 경험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제작의 실제 주역은 이회였다고 할 수 있다.

권근은 지도 제작에 참고한 자료로 다음 네 가지를 언급했다.


  • 李澤民중국어의 《성교광피도》(聲教廣被圖, 세계지도)
  • 淸浚중국어의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
  • 이름을 알 수 없는 조선인이 만든 한반도 지도
  • 이름을 알 수 없는 일본인이 만든 일본 지도 (行基圖일본어, 행기도로 추정)[48]


건문제 4년(1402년)에 김사형, 이무, 이회는 이 지도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 李澤民중국어의 지도는 만주 남부를 흐르는 요하 동쪽 지역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 지도를 추가하고 일본에서 전래된 지도를 바탕으로 일본 지도도 첨부하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제작했다.

3. 1. 이택민의 《성교광피도》

권근이 지도 제작에 참조했다고 한 《성교광피도》는 이슬람 계통의 세계지도로 추정되는데, 실제로 드문드문 아랍어 지명이 보이고 아랍 계통의 지구의를 따라 바다는 녹색, 하천은 청색으로 표기되어 있다.[46][47] 지도에는 중국 역대 왕국의 수도가 표기되어 있다. 시대의 지명을 반영하고 있으나 기본적인 지리 정보는 원나라 시대에 중국을 거쳐 유입된 아라비아 계통의 지도로부터 얻은 것으로 보인다.[46][47] 하지만 아라비아 계통의 지도가 땅은 둥글다는 지구설에 기초해 원형으로 제작된 것과는 달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동양의 전통적인 천원지방(天圓地方) 관념에 토대를 두고 사각형으로 제작되었다.

《성교광피도》는 중국뿐 아니라 아프리카유럽 지역도 포함하고 있는 세계지도였다. 나홍선의 지도나 《대명혼일도》의 내용을 통해 《성교광피도》 쪽이 훗날 조선에서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보다도 17세기 인도의 지리를 더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제작자 이택민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것이 별로 없다. 지도상의 지명으로부터 유추하건대 《성교광피도》는 1319년 무렵에 제작되었고, 1329년부터 1338년경에 수정이 더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후술할 오사도의 발언을 통해 《성교광피도》가 청준의 지도(1360년경?)보다도 새로울 가능성도 있다.

아프리카, 유럽, 중동의 세부 정보.


서투르키스탄, 페르시아, 아라비아, 이집트, 아나톨리아는 매우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이 지역들은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반면, 북서 유라시아 지역의 지명은 드물게 분포되어 있다. 이는 일 한국과 경쟁 세력인 킵차크 한국의 영토에 해당하며, 일 한국이 주요 정보원이었음을 강화한다.[18]

약 35개의 아프리카 지명이 있다. 아프리카 윤곽에 대한 지식은 유럽인들의 바스쿠 다 가마 탐험 이전 시대의 것이다. 특히 아프리카 남단이 매우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남아프리카의 오렌지 강에 해당하는 강도 표시되어 있다. 아프리카 대륙의 북쪽, 탐험되지 않은 "검은" 중앙 지역 너머에는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를 나타내는 탑이 표현되어 있으며, 아랍어로 카이로(al-Qāhira)를 뜻하는 "Misr"과 모가디슈(Maqdashaw)] 등이 표시되어 있다.[19] 지중해는 다른 해역과 달리 검게 표시되지 않고 명확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마그레브와 이베리아 반도는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제노바베네치아는 생략되어 있다. 유럽 국가에만 100개 이상의 지명[20]이 있는데, 라틴어 ''Alemania''(독일)을 뜻하는 "Alumangia"도 포함되어 있다.

3. 2. 청준의 《혼일강리도》

140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원나라 승려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를 참고하여 만들어졌다. 청준의 《혼일강리도》는 중국의 역사 지도로, 당시 지명과 함께 역대 왕조의 수도를 표시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전설적인 성군인 의 수도도 표시되어 있었다.[21]

청준의 지도는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명나라 시대의 책 수집가였던 엽성(1420~1474)이 저술한 《수동일기》에는 《광륜강리도》라는 이름으로 수정된 판본이 수록되어 있다. 엄절에 따르면 《광륜강리도》는 1360년에 제작되었다. 현존하는 지도는 당대 명나라 지명을 반영하도록 엄절에 의해 수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원래 지도는 몽골 원나라의 지명을 담고 있었다.[22]

《광륜강리도》는 중국 학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역사 지도였다. 송나라 지도에는 없는 몽골과 동남아시아 정보, 그리고 해로도 포함하고 있었다. 같은 해로가 일본 본묘사 지도에도 그려져 있다.[21]

청준의 지도 이름인 《혼일강리도》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강리도'라는 이름과 매우 유사하다. "우왕 공의 구주에 있는 역대 제왕들의 수도 지리도"를 포함하여 유사한 제목을 가진 중국 지도가 많이 있었다.[24]

3. 3. 오사도의 업적

권근의 발문에 따르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김사형이무가 기획하고 이회가 실무를 맡아 제작하였다. 이 지도는 중국의 《혼일강리도》에 일본 지도를 추가하여 제작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46][47]

지도 제작에는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와 승려 청준의 《혼일강리도》가 참고되었다. 《성교광피도》는 이슬람 계통의 세계지도로 추정되며, 실제로 지도에는 드문드문 아랍어 지명이 나타난다. 바다는 녹색, 하천은 청색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아랍 계통 지구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동양의 전통적인 천원지방 관념에 따라 사각형으로 제작되었지만, 기본적인 지리 정보는 원나라 시대에 중국으로 유입된 아라비아 계통의 지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46][47]

청준의 『혼일강리도』는 중국 문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던 역사 지도로, 당대 지명 외에도 중국 역대 왕조의 수도를 표시하고 있었다. 이 지도는 세계 지도가 아닌 중국 지도였지만, 송나라 지도와 달리 몽골과 동남아시아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해상 루트에 대한 정보도 제공했는데, 이는 혼묘사와 덴리 사본에 남아있다.[21]

청준의 지도는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명나라 시대의 책 수집가 여성(葉盛)의 『수동일기』에 『광륜강리도』라는 이름으로 수정된 판본이 수록되어 있다. 엄절의 발문(1452년)에 따르면, 『광륜강리도』는 1360년에 제작되었으며, 현존하는 지도는 엄절에 의해 수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2]

조선에서 제작된 지도의 의의는 두 개의 중국 지도를 결합시켰다는 데에 있으며, 이는 이미 오사도의 춘초재집에서 이루어진 바 있다. 오사도는 『광륜도』와 이여림의 『성교피화도』의 통합을 시도했는데, 여기서 광륜도는 『광륜강리도』, 이여림은 이택민, 성교피화도는 《성교광피도》와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학자들은 김사형이 1399년 중국 여행 때 이 두 종류의 중국 지도를 입수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권근의 발문을 통해 오사도의 업적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지도가 수집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3. 4. 조선의 지도

1402년(태종 2년) 5월, 문신 이회가 직접 그린 《팔도도(팔도도)》를 태종에게 바쳤다. 석 달 뒤, 김사형, 이무, 이회 등이 주도하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제작하였다. 제작 당시 참찬이었던 권근은 지도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제작 동기를 밝힌 발문을 작성했다.

권근은 발문에서 김사형과 이무가 기획하고 이회가 실무를 맡았으며, 중국의 《혼일강리도》에 일본 지도를 추가하여 제작하였다고 설명한다. 1398년경 (明)에서 제작한 《대명혼일도》와 유사한데, 《대명혼일도》의 직접적인 영향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회가 그린 《팔도도(팔도도)》가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제작의 실제 주역은 이회였다고 할 수 있다. 이회는 《팔도도(팔도도)》 제작 경험이 있어, 중국과 비례하는 조선 지도를 그리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권근이 지도 제작에 참조했다고 한 《성교광피도》는 이슬람 계통의 세계지도로 추정된다. 실제로 드문드문 아랍어 지명이 보이고, 아랍 계통의 지구의를 따라 바다는 녹색, 하천은 청색으로 표기되어 있다. 지도에는 중국 역대 왕국의 수도가 표기되어 있다. 시대 지명을 반영하고 있으나, 기본적인 지리 정보는 (元) 시대에 중국을 거쳐 유입된 아라비아 계통의 지도에서 얻은 것으로 보인다.[46][47] 하지만 아라비아 계통의 지도가 지구설에 기초해 원형으로 제작된 것과는 달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동양의 전통적인 천원지방(天圓地方) 관념에 토대를 두고 사각형으로 제작되었다.

일본에 소장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류코쿠 대학본과 혼코지본에는 지도 하단부에 권근이 쓴 발문이 있다. 『양촌선생문집』(陽村先生文集)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권근에 따르면, 해당 지도는 다음 네 종의 지도를 참고하였다.

  • 李澤民중국어의 성교광피도(聲教廣被圖, 세계지도)
  • 淸浚중국어의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
  • 이름을 알 수 없는 조선인의 한반도 지도
  • 이름을 알 수 없는 일본인의 일본 지도. 행기도(行基圖)로 보는 설도 있다.[48]


건문제(建文帝) 4년(1402년)에 김사형, 이무, 이회는 두 종류의 중국 지도를 합쳐 새 지도를 만들었다. 李澤民중국어의 지도는 만주 남부 요하 조금 앞까지만 그려냈지만, 한반도 전체와 일본까지 포함된 지도였다. 이것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권근은 한반도 지리에 관하여 李澤民중국어의 지도가 부정확하다고 보았다. 그가 손에 넣은 李澤民중국어 지도 남반부에는 자세한 기술이 없었다. 淸浚중국어의 지도는 고려 기술에 관해서는 李澤民중국어의 지도에서 어느 정도 보충하였다.

그러나 권근은 이를 올바른 한반도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이회의 《팔도도(팔도도)》를 참고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려 지도는 1470년대 것으로, 참고 정보가 무엇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권근의 주석에 따르면 한반도가 크게 그려진 것은 보기 쉽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그렸다고 한다.

권근은 李澤民중국어의 지도에 한국에 관한 많은 누락과 생략이 있었다고 적었다. 현존하는 파생본(원본의 남쪽 절반)에는 한국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 李澤民중국어의 지도에 한국이 어떻게 묘사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25] 淸俊중국어의 지도 수정본은 비록 거기에 제시된 지명이 고려 시대의 것이지만 한국의 모양을 비교적 정확하게 보여준다.[26]

권근에 따르면, 한국은 (실용적인 이유로) 의도적으로 크게 표현되었다.

3. 5. 일본의 지도

1402년 조선 조정의 김사형, 이무, 이회는 중국 지도 2종과 일본 지도를 참고하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제작했다. 이택민의 지도는 요하 동쪽 지역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과 일본 지도를 추가하여 보완했다.

중국 지도에 나타난 일본은 동서로 길게 뻗은 세 개의 섬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서복 전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전한 시대 사기에는 서복이 바다 위의 세 산으로 이루어진 섬을 언급했고, 중국인들은 오랫동안 이를 일본으로 여겼다.[27]

류코쿠 대학본 지도의 일본은 기존 중국 지도보다 정확하지만, 90도 회전되어 있다. 이는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야마타이 국 위치 논쟁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세 사본에서는 일본이 정상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류코쿠 대학본의 묘사는 예외적인 경우로 보인다.[28]

네 사본의 일본 관련 정보가 서로 달라 원본 지도의 모습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혼코지본 지도는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속 지도와 유사하여, 정보가 갱신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9]

권근이 언급하지 않은 부분은 《세종실록》 세종 즉위년 10월조에 기록된 박순지가 1401년 일본에서 얻은 지도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박순지는 1399년까지 오우치 씨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 설은 문제가 있다.[30][39]

4. 보존본의 역사

강리도의 원본은 현재 한국에 없고 일본에 2종이 보관되어 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원본은 임진왜란 중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 지도를 일본으로 가져가 자신의 개인 사찰인 혼묘지에 보관했고, 훗날 교토의 류코쿠(龍谷) 대학이 이를 기증받아 보관하였다. 다른 한 종은 에도 시대 혼코지(本光寺)에서 이를 복사한 것으로 텐리 대학에서 보관 중이다.[11]

1968년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교수였던 고(故) 이찬 교수(1923~2003)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필사본을 발견했을 때, 류코쿠 대학측에서는 이 지도의 사진 촬영조차도 허가하지 않고 있었다. 이찬 교수는 인맥을 총동원하여 류코쿠 대학측에서 보관하고 있던 거의 완전한 실물 사진을 입수하였고, 이 사진을 초상화 전문가에게 보여주어 초상화를 모사하듯 지도를 필사하도록 요청했다. 그렇게 형체가 완성된 지도 위 빽빽하게 적힌 글씨들은 서예가의 도움을 받아 지명 하나하나를 옥편에서 찾아가며 확인 가능한 글씨들을 지도 위로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15년 만인 1983년에 모사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완성될 수 있었다. 이 모사본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두 점의 지도 사본만이 알려져 있으며, 모두 일본에서 보존되어 있고 후대에 수정된 흔적을 보인다.

류코쿠 대학(이하 류코쿠 사본)에 소장된 지도는 20세기 초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비단에 그려진 이 지도는 크기가 158cm x 163cm이다. 류코쿠 사본은 한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언제 일본으로 반입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오타니 고즈이가 구입했다는 주장도 있고,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약탈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서홍안지 절에 기증되었다는 주장도 있다.[6] 이 지도에는 1402년 이후의 한국 지명이 포함되어 있어, 류코쿠 사본은 1402년 원본을 바탕으로 1470년대~1480년대경 부분적으로 수정된 것으로 추정된다.[7]

후대의 본고지 버전 지도.


또 다른 사본(본고지 사본[8])은 1988년 시마바라의 본고지 절에서 발견되었다. 크기는 220cm x 280cm로 류코쿠 사본보다 훨씬 크며, 종이에 그려져 있다. 본고지 사본은 에도 시대 일본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9] 한국 지명으로 미루어 1560년대경에 수정된 것으로 추정된다.[10]

일본에는 이 지도와 관련된 두 점의 지도 사본이 더 있다. 하나는 구마모토의 본묘지 절에 소장되어 있는 본묘지 사본으로 "대명국지도(大明國地圖)"로 알려져 있다. 다른 하나는 텐리 대학에 소장된 텐리 사본으로 제목이 없으며, 유사한 이름(大明國圖)으로 임시적으로 불린다.[11] 이들은 원본을 후대에 각색한 것으로 여겨진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중국 지명이 원본의 몽골 원나라의 행정 구역 명칭에서 명나라의 명칭으로 갱신되었다는 점이다.

절의 전설을 바탕으로 본묘지 사본이 임진왜란을 준비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구마모토의 지배자 가토 기요마사에게 주어졌다는 단순한 추측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는 1593년 가토에게 항복한 한 조선 관리의 아들이 중국과 조선의 지도를 베껴 그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현존하는 본묘지 지도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12]

5. 내용

1402년(태종 2년) 5월, 문신 이회가 직접 그린 《조선팔도도》를 태종에게 바쳤다. 이후 3개월 뒤, 의정부 좌정승 김사형, 우정승 이무, 검상 이회 등이 주도하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완성했다. 지도 제작에 참여했던 권근은 지도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제작 동기를 밝힌 발문을 작성했다.

권근의 발문에 따르면, 김사형이무가 기획하고 이회가 실무를 맡았으며, 중국의 《혼일강리도》에 일본 지도를 추가하여 제작했다고 한다. 1398년명나라에서 제작된 《대명혼일도》와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는데, 《대명혼일도》의 직접적인 영향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이회가 이미 《조선팔도도》를 그린 경험이 있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제작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권근이 지도 제작에 참조했다고 언급한 《성교광피도》는 이슬람 계통의 세계지도로 추정된다. 실제로 지도에는 드문드문 아랍어 지명이 보이며, 아랍 계통의 지구의를 따라 바다는 녹색, 하천은 청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는 중국 역대 왕국의 수도가 표기되어 있으며, 기본적인 지리 정보는 원나라 시대에 중국을 거쳐 유입된 아라비아 계통의 지도에서 얻은 것으로 보인다.[46][47] 하지만 아라비아 계통의 지도가 지구는 둥글다는 지구설에 기초하여 원형으로 제작된 것과는 달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동양의 전통적인 천원지방(天圓地方) 관념에 따라 사각형으로 제작되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이택민의 《성교광피도》를 기초로 제작되었다. 서쪽 지역(아프리카, 유럽)은 실제보다 상당히 작게 표현되었지만, 동쪽의 일본에 이르기까지 당시 사람들이 인식했던 '세계'의 윤곽을 비교적 정확하게 보여준다. 특히 몽골 제국 시대 이전에는 동방 사회에서 알지 못했던 아프로·유라시아 대륙에 대한 지리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지도상의 지명으로 보아 서방에 대한 정보는 14세기 전반의 것으로 추정된다.[42]

지도에서 갱신된 정보는 델리와 비슈바리크(우루무치 근교)를 잇는 남북선을 기준으로 동쪽 지역에 해당한다. 비슈바리크는 우구데이에서 몽케 시대에 걸쳐 몽골 제국의 중앙아시아 행정 중심지였다. 이보다 서쪽에 있는 지역은 실제로는 비슈바리크 서쪽에 위치하지만, 지도에는 북쪽이나 동쪽에 그려진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당나라와 압바스 왕조가 충돌한 탈라스 전투의 전장인 탈라스 강은 실제로는 비슈바리크 북서쪽에 있지만, 지도에는 북동쪽에 그려져 있다.

인도티베트의 지리는 당나라를 방문했던 일본 불교 신자들의 순례 기록 등 중국 측 정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현재의 델리, 다울라타바드 등 인도 서부 지명을 통해 이 지역 정보는 일 칸국에서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5. 1. 서방 세계 정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서방 세계는 실제보다 작게 표현되었지만, 아프로·유라시아 대륙의 지리 정보를 비교적 정확하게 담고 있어 당시 동방 사회에서는 획기적인 자료였다.[50]

투르키스탄 서부, 이란 고원, 아라비아 반도, 이집트, 아나톨리아 반도는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특히 아프리카에는 35개 정도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으며, 바스쿠 다 가마의 탐험 이전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남단의 오렌지 강으로 추정되는 강까지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알렉산드리아 등대, 맘루크 왕조의 수도 카이로, 모가디슈 등의 지명도 확인할 수 있다.[19]

지중해는 다른 바다와 달리 육지와 같은 색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마그레브와 이베리아 반도는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되었지만, 제노바베네치아는 생략되었다. 유럽에는 100개 이상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으며,[51] 독일을 라틴어 표기인 'Alumangia'로 표기한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서방 세계 정보는 대부분 일 칸국으로부터 얻은 것으로 보이며,[17] 탈라스 전투의 전장인 탈라스 강이 실제 위치(북서쪽)와 다르게 비슈바리크 북동쪽에 그려져 있는 등 일부 오류도 존재한다.

5. 2. 동방 세계 정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이택민의 《성교광피도》를 기초로 하고 있지만, 몽골 제국 시대 이전에는 동방 사회에서 알지 못했던 아프로·유라시아 대륙에 대한 지리적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지도상의 지명을 통해 서방에 대한 정보는 14세기 전반의 것으로 추정되며,[50] 이후 마테오 리치와 같은 유럽인들이 서양의 정보를 전달할 때까지 동방에서는 서방의 지리 정보가 갱신되지 않았다.

지도에서 갱신된 정보는 델리와 비슈바리크(우루무치 근교)를 잇는 남북선 동쪽 지역에 해당한다. 비슈바리크는 우구데이에서 몽케 시대에 걸쳐 몽골 제국의 중앙아시아 행정 중심지였다. 이보다 서쪽 지역은 실제로는 비슈바리크 서쪽에 위치하지만, 지도에는 북쪽이나 동쪽에 그려진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당나라와 이슬람의 압바스 왕조가 충돌한 탈라스 전투의 전장인 탈라스 강은 실제로는 비슈바리크 북서쪽에 위치하지만, 지도에는 북동쪽에 그려져 있다.

인도티베트의 지리는 당나라를 방문했던 일본 불교 신자들의 순례 기록 등 중국 측의 정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현재의 델리, 다울라타바드 등 인도 서부의 지명을 통해, 이 지역의 정보는 일 칸국으로부터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투르키스탄 서부, 이란 고원, 아라비아 반도, 이집트, 아나톨리아 반도의 묘사는 정확하고 상세하다. 유라시아 북서부의 지명은 드물게 기재되어 있지만, 이들 지역의 지명은 매우 자세하다. 이는 일 칸국과 그 북쪽에 접해 있던 주치 울루스의 영역과 일치하며, 이들 정보 또한 일 칸국으로부터 얻은 것으로 보인다.

아프리카에는 35가지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으며, 해안선 정보는 바스코 다 가마 등의 유럽 탐험가들보다 앞선다. 특히 남단에 대한 정보는 정확하며 오렌지강으로 추정되는 강도 그려져 있다. 아프리카 중앙부는 거의 생략되어 있지만, 14세기 후반까지 존재했던 알렉산드리아 등대가 그려져 있다. 맘루크 왕조의 수도 카이로와 12세기부터 16세기까지 소말리아 남쪽을 지배했던 베르베르인 계통 파흐르딘 가문 정권의 수도 모가디슈 등의 지명도 확인할 수 있다. 지중해는 다른 바다와 달리 육지와 같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그 모양도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마그리브(아프리카 북안)와 이베리아 반도는 정확하게 묘사되었지만, 제노바베네치아는 그려져 있지 않다. 유럽의 지명은 100개 이상 기록되어 있으며,[51] 독일의 라틴어 표기인 Alemania를 의도한 Alumangia 등도 보인다.

5. 3. 아프리카 상세 정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아프리카와 관련하여 35개 정도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아프리카 해안선 묘사는 바스코 다 가마와 같은 유럽 탐험가들의 정보보다 앞선다. 특히 남단에 대한 정보는 정확하며, 오렌지 강으로 보이는 강도 그려져 있다.[19] 아프리카 중부는 거의 생략되었지만, 14세기 전반까지 존재했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등대가 표현되어 있다. 또한 이집트(아랍어 "미스르" مصر Miṣr)를 지배했던 맘루크 왕조의 수도 카이로, 12세기부터 16세기까지 소말리아 이남을 지배했던 베르베르계 파흐르딘 가문 정권의 수도 모가디슈 등의 지명이 나타난다.[19]

지중해는 다른 바다(검게 표현됨)와 달리 육지와 같은 색으로 표현되었고, 그 형태도 정확하다. 마그레브(아프리카 북쪽 해안)와 이베리아 반도는 상세하게 묘사되었지만, 제노바베네치아는 빠져 있다.[19]

5. 4. 유럽 상세 정보



투르키스탄 서부, 이란 고원, 아라비아 반도, 이집트, 아나톨리아 반도의 묘사는 정확하고 상세하다. 유라시아 북서부의 지명은 드물게 기재되어 있지만, 이들 지역의 지명은 매우 자세하다. 이 범위는 일 칸국과, 일 칸국에 북쪽으로 접해 있던 주치 울루스(킵차크 칸국)의 영역과도 일치하는데, 이들 정보도 일 칸국으로부터 얻은 것으로 보인다.[50]

지중해의 모양도 정확하게 그려져 있는데, 다른 바다(검게 그려져 있다)와는 다르게 육지와 같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마그레브(아프리카 북안)와 이베리아 반도는 정확한데, 제노바베네치아는 그려져 있지 않다. 유럽의 지명은 100개가 넘게 쓰여있으며,[51] 독일의 라틴어 표기인 Alemania를 의도한 Alumangia 등도 보인다.

6. 현대 한국 사회에 주는 의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몽골 제국 시대 이후 지도 제작의 정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지도는 국가적 위신의 상징으로 여겨져 비밀에 부쳐졌다.[35] 조선의 관리들은 토지 측량을 실시하고 주변 국가로부터 지도를 수집하여 지도를 정기적으로 갱신했지만, 서쪽 지역에 대한 지리 정보는 16세기에서 17세기에 유럽의 지식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갱신되지 않았다.[35]

이는 당시 조선이 동아시아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당시 조선이 세계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자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며, 현대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그 의의가 크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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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문서 Miya 2006:598–599,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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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뉴스 '지도 이야기' <1> 혼일강리역대국지도 http://news20.busan.[...] 부산일보 2009-12-28
[48] 웹사이트 混一疆理歴代国都之図 http://opac.lib.ryuk[...]
[49] 논문 Miya 20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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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서적 The Mongols and the 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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