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척식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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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홋카이도척식은행은 1900년 설립된 일본의 특수 은행으로, 홋카이도 개척 사업 자금 지원을 목적으로 했다. 홋카이도 내 산업에 장기 저리 융자를 제공하며, 홋카이도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39년 보통 은행 업무를 겸영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가라후토 은행 등을 합병하여 규모를 확대했다. 1946년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업무가 일시 정지되었고, 1950년 홋카이도척식은행법 폐지로 특수 은행으로서의 사명을 마쳤다. 이후 일반 은행으로 전환하여 사업을 확장했으나, 1980년대 후반 부동산 융자 확대로 부실 채권이 증가하며 1997년 경영 파탄을 맞았다. 1998년 호쿠요 은행에 도내 영업을 양도하고, 1999년 법인이 해산되면서 106년의 역사를 마감했다. 홋카이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탁긴 쇼크'로 불리는 경제 침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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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척식은행 - [회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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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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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 | 주식회사 홋카이도 척식 은행 |
영문 명칭 | The Hokkaido Takushoku Bank, Ltd. |
약칭 | 척은 (拓銀) 북척 (北拓) |
통일 금융 기관 코드 | '0012' |
SWIFT 코드 | HTAKJPJT |
설립일 | 1900년 4월 1일 |
해산일 | 2006년 2월 6일 (법인격 말소) |
본사 위치 |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 주오구 오도리니시 3초메 7번지 |
기업 정보 (파산 시점) | |
업종 | 은행 |
통일 금융 기관 코드 | '0012' |
SWIFT 코드 | HTAKJPJT |
자본금 | 1,237억 엔 |
상장 정보 | 도쿄 증권거래소 1부 (1949년 5월 16일 ~ 1998년 8월 27일) 오사카 증권거래소 1부 (1961년 10월 2일 ~ 1998년 8월 27일) 삿포로 증권거래소 (1950년 4월 1일 ~ 1998년 8월 27일) |
직원 수 | 2,950명 |
점포 수 | 195개 (도내 132개, 도외 63개) |
대표자 | 가와야 사다마사 (두취) |
총 자산 | 5조 9,838억 엔 |
예금 잔고 | 5조 9,006억 엔 |
외부 링크 | 홋카이도 척식 은행 (보관된 페이지) |
역사 | |
주요 사건 | 1997년 11월 17일 경영 파탄, 도산 |
2. 역사
1896년 "농업 및 제조업 은행법" 발표에 따라 일본 전역의 46개 현에 "농업 및 산업 은행"이 설립되었다. 홋카이도는 경제 개발의 주요 후보지로 여겨졌으며, 농업 및 산업 은행 대신 특별한 "정책 은행"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다. 1899년 홋카이도척식은행이 설립되었고, 1900년 2월 16일 "특수 은행"으로 설립, 홋카이도의 개발 자본으로 장기 저금리 대출을 제공했다. 대출 대상은 산업과 농업뿐 아니라 어업과 홋카이도의 추가 개발과 관련된 주요 산업도 포함했다.[6]
척식은행은 "농업 및 산업" 은행, 일본 강업 은행, 일본 공업 은행과 유사한 역할을 대체했기 때문에, 홋카이도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야 이러한 분야에서 비중을 늘렸다.
1939년 홋카이도척식은행법 개정으로 채권 발행 기반 장기 금융뿐 아니라 은행 계좌 처리 및 단기 금융도 가능해졌다. 일반 은행과 저축 은행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며 운영 규모를 확대했다. 전시 통합 과정에서 홋카이도 및 가라후토 관련 모든 은행(일반 은행, 저축 은행)이 합병되었다.
홋카이도를 기반으로 하는 유일한 도시 은행으로서 도의 경제를 지원하고 지역 재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도시 은행 중 가장 소규모였기 때문에 거품 경제기에 적극적인 확대 노선을 취한 것이 화가 되어 부채를 겹쳐 1997년 경영 파탄되었다. 사업은 북양 은행 등에 인계되었다. 전후 최초이자 2024년 현재까지 유일한 도시은행 파탄 사례이다. 통칭은 도외 매스컴이나 업계 내에서는 '''호쿠타쿠'''(北拓)라고도 불렸지만, 일반에게는 '''타쿠긴'''('''拓銀''')으로 불렸다. 도민들은 "타쿠긴 씨"라 부르며 친숙하게 여겼고, 노벨티 등에도 타쿠긴 이름을 사용했다.[7]
2. 1. 특수은행 설립 (1899년 ~ 1950년)
1896년 농공은행법 발표에 따라 일본 전역의 46개 현에 농공은행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홋카이도는 경제 개발의 주요 후보지로 여겨져 농공은행 대신 특별한 "정책 은행"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다.[6]이러한 배경 하에 1899년(메이지 32년) 홋카이도척식은행법(척은법)이 제정되었고, 이를 근거로 1900년(메이지 33년) 2월 16일 특수 은행인 홋카이도척식은행이 설립되었다.[6] (초대 은행장은 소네 시즈오). 당시 자본금은 정부 및 도외 자본을 포함하여 300만엔이었고, 직원 26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본점은 현재 홋카이도 전력 본사가 위치한 삿포로시 주오구 오도리히가시 1초메에 있었다. 홋카이도척식은행은 금융채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이 허용되어 도외의 풍부한 자금을 홋카이도로 공급하는 창구 역할을 수행하였다.

홋카이도척식은행은 도내 산업에 장기 저리 융자를 제공하였는데, 그 목적은 "홋카이도의 척식 사업에 자본을 공급한다"(척은법 제1조)는 광범위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홋카이도척식은행은 일본권업은행과 일본흥업은행의 역할까지 대신 수행했으며, 농공은행의 역할도 함께 수행했기 때문에 47개 도도부현 중 유일하게 홋카이도에만 설치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권업은행과 흥업은행의 홋카이도 진출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그러나 도내 상공업은 아직 미성숙 단계였기 때문에 융자의 대부분은 농업 부문에 집중되었다. 다이쇼 중기에는 수전 조성 융자가 확대되었으나, 냉해로 인한 흉작으로 연체 채권이 증가하여 쇼와 초기에는 1만 ha에 달하는 농지를 담보로 취득하기도 했다.
1939년(쇼와 14년) 척은법 개정으로, 기존의 채권 발행을 통한 장기 금융 중심에서 일반 예금을 통한 단기 금융도 가능하게 되었다. 같은 해 보통 은행이었던 북문은행을 합병하고, 저축 은행 업무 겸영으로 지역 내 업무 규모를 확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현일행주의에 따라 가라후토 은행(1941년, 쇼와 16년), 홋카이도 은행(1944년, 쇼와 19년), 북해저축은행(1945년, 쇼와 20년)을 합병하여 도내 보통 은행 및 저축 은행 업무를 독점하였다. 또한 도요하라 지점을 중심으로 전체 자산의 30% 이상을 가라후토에 보유하고 있었으며, 홋카이도 탄광 기선 등 군수 산업에 대한 신디케이트 론에도 참여하였다.
전후 1946년(쇼와 21년), GHQ에 의해 일시 업무 정지 처분을 받았으며, 1950년(쇼와 25년) 척은법 폐지로 특수 은행으로서의 역할은 종료되었다.
2. 2. 도시은행 전환과 확장 (1950년 ~ 1980년대)
北海道拓殖銀行法일본어이 폐지되면서 1950년 홋카이도척식은행은 일반 은행(도시은행)으로 전환되었다.[6] 1952년에는 홋카이도척식은행 창립 이래 발행해오던 "개척 채권" 발행이 중단되었고, 이 기능은 일본장기신용은행으로 이관되었다. 1955년에는 발행된 채권을 모두 상환하고 전국지방은행협회를 탈퇴하여 도시은행에 합류했다.홋카이도 내에서는 대다수의 가구가 "탁신 씨"에 계좌를 가지고 있었고, 사실상 모든 자치 단체가 고객이었다. "시중 은행"으로서 가장 작은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홋카이도 인민 은행"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7] "홋카이도척식은행에서 융자를 받고 있다"거나 "홋카이도척식은행에 당좌 예금 계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 기업의 신용도를 측정하는 척도인 동시에 경영자의 지위가 될 정도였다.[7] 홋카이도, 삿포로시를 비롯한 도내 시정촌 대부분으로부터 지정 금융 기관으로 지정받아, 도시 은행 13개 중 최소 규모이면서도 "도민 은행"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1965년 3월까지는 홋카이도 복권 발행도 위탁받았다.
혼슈에 지점을 개설하고 해외 거점을 정비하는 한편, 홋카이도척식은행은 홋카이도에서의 밀접한 지역적 기반을 바탕으로, 제조업이 약한 홋카이도 경제를 지탱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 때문에 홋카이도 재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홋카이도 경제 연합회의 역대 사무국장을 배출했고, 홋카이도 경제 동우회 대표 간사나 홋카이도 상공 회의소 회장에는 홋카이도척식은행의 은행장이 여러 번 취임했다.
홋카이도 재계가 공동으로 출자・기부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홋카이도척식은행・홋카이도 전력이 부담 비율을 결정한 후 나머지를 다른 기업에 할당하는 것이 관례였다. 금융 기관 간의 안건의 경우에도, 홋카이도척식은행 4 : 홋카이도 은행 3 : 호쿠요 은행 2 : 삿포로 은행 1의 부담 비율로 하는 것이 묵시적인 합의였다.
고도 경제 성장기 이후, 수도권(주로 도쿄・사이타마)에 다수의 지점을 개설하게 되지만, 도쿄 도심부 이외에는 교외 주택가의 역 근처에 점포를 여는 패턴이 많았다.
1962년경부터 반달곰을 모티브로 한 "탁짱"을 캐릭터로 제정했다. 1989년부터 산리오의 "모두의 타아보"를 캐릭터로 채용했다.
2. 3. 버블 경제와 부동산 융자 확대 (1980년대 ~ 1990년대)
1985년경부터 홋카이도척식은행(타쿠긴)은 다른 은행들과 마찬가지로 도쿄와 오사카에 지점을 개설하고 부동산 융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은행은 부동산 가치의 70% 정도만 융자하지만, 당시 버블 경제 시기에는 토지 가치가 급격히 상승할 것으로 예상되어 부동산 가치의 120~130%까지 융자가 이루어졌다. 홋카이도척식은행은 이러한 부동산 융자에 다소 늦게 참여했다.[8]다른 금융 기관이 이미 담보로 설정한 토지에 후순위로 담보를 설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채무자인 부동산 회사가 파산하면 홋카이도척식은행이 회수할 수 있는 대출금이 줄어드는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현실이 되었다.[8]
1977년 내부 출신 고미 아키라가 2대 행장에 취임하고, 1983년 스즈키 시게루가 3대 행장에 취임하면서, 홋카이도척식은행 내에서는 사업 확장에 대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1985년경부터 일본 시중 은행들은 버블 경제에 편승하여 부동산 융자에 주력했고, 지가 상승은 수도권에서 3대 도시권을 중심으로 일본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8]
홋카이도는 경기의 파동이 도시권보다 늦게 도달했기 때문에, 홋카이도척식은행은 도쿄와 오사카 지점을 통해 부동산 융자를 시작했지만, 본격화된 것은 1988년경으로 다른 도시 은행들보다 늦었다. 요코하마 은행, 지바 은행 등 상위 지방 은행에도 뒤처지면서 홋카이도척식은행은 초조함을 느꼈고, 스즈키 행장은 확대 노선을 채택했다.[8]
1989년부터 구상되어 1990년에 수립된 '타쿠긴 21세기 비전'은 당초 '도내에서의 리딩 뱅크', '본주에서의 뉴 리테일(부유층 대상 자산 운용)', '아시아에서의 해외 전략'을 3대 축으로 삼았다. 그러나 홋카이도척식은행 간부의 제안으로 '기업 성장·부동산 개발 지원(인큐베이터)'이 최종안에 추가되었다. 스즈키 회장, 사토 야스히코 부행장, 가이도 히로시 상무의 3인은 'SSK 트리오'라고 불리며, 이들이 홋카이도척식은행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무리한 확대 노선을 추진했다.[8]
'21세기 비전'에서 부속에 불과했던 인큐베이터 전략은 홋카이도에 거품 경제가 도래하면서 주역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이를 담당하는 "종합개발부"가 신설되었다. 종합개발부는 업무 추진 그룹과 심사 그룹으로 나뉘었지만, 심사 기능이 극도로 경시되었다. 종합개발부 제1부는 삿포로, 제2부는 도쿄를 담당했는데, 제2부는 1991년 10월에 부동산 융자 동결을 결정하고 1년 만에 폐지되었지만, 제1부는 문란한 융자를 확대했다. 특히 가부토데콤과 소피아 두 회사에 대한 융자는 그 후 거대한 부실 채권으로 변모했다.[8]
2. 4. 경영 파탄과 사업 양도 (1997년 ~ 1998년)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홋카이도척식은행(이하 척식은행)은 부실 채권 증가로 경영난이 심화되었다. 특히 가부토데콤(카부토)과 소피아 등 주요 융자처에 대한 과도한 대출은 부실 채권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주요 융자처 관련 문제
- 카부토데콤 (카부토): 척식은행은 카부토에 총 2.803조엔을 융자하고, 1조엔 이상의 채무 보증을 제공했다.[3] 카부토는 호텔 에이펙스 토야 등 리조트 사업을 추진했지만, 채산성이 낮아 척식은행의 부실 채권을 늘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척식은행은 카부토의 부실을 은폐하기 위해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자금을 이동시키고, 우량 자산을 확보하려 했다.[3]
- 소피아: 척식은행은 소피아 그룹에 1조엔 전후의 자금을 융자했다.[3] 소피아는 삿포로 테르메(현 샤토레제 가토 킹덤 삿포로) 등 호텔 사업을 추진했지만, 척식은행의 부실 채권 증가에 영향을 미쳤다. 척식은행은 소피아 그룹 대상 융자에 대한 대장성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융자를 계속했다.[3]
기업명 | 주요 사업 | 홋카이도척식은행과의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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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토데콤 | 건설, 부동산, 리조트 개발 | 총 2.803조엔 융자, 1조엔 이상 채무 보증[3] | 호텔 에이펙스 토야 등 사업 실패 |
소피아 | 이발소 체인, 호텔 사업 | 1조엔 전후 융자[3] | 삿포로 테르메 등 사업 추진 |
이지 캐피탈 앤 컨설턴츠 | 꼬치구이 체인, 대부업 | 3조엔 융자 (에스코리스) | 3700억엔 사용처 불명, 부실 채권화 |
삼귀 | 보석, 의류 제조 소매 | 메인 뱅크, 임원 파견 | 버블 붕괴 후 경영 악화, 척식은행 파산으로 타격 |
흥륭후지상 | 부동산, 러브호텔 경영 | 불분명한 무담보 융자 | "홋카이도척식은행 파탄의 근원"으로 불림 |
주식회사 미야시타 | 실내 장식, 간판 공사 | 나가사키야 관련 사업 수주, 팥 시세 거래 실패 | 자회사 코신 상사 팥 시세 거래 실패 |
홋카이도 은행과의 합병 무산1997년 3월, 대장성은 척식은행과 홋카이도 은행(이하 도은)의 합병을 추진했다. 양측은 '신홋카이도 은행' 설립에 합의하고 4월 1일에 공식 발표했다.[3] 그러나 부실 채권에 대한 인식 차이와 척식은행에 대한 감정적 반감으로 인해 도은 직원들이 합병에 반대했다. 결국 9월 12일 합병 연기가 발표되었고, 이는 사실상 합병 무산을 의미했다.[3]
사업 중단 및 북양은행으로의 사업 양도1997년 11월 4일, 산요 증권 파산으로 척식은행의 자금 조달이 어려워졌다. 11월 13일 일본 은행은 척식은행에 대한 지원 중단을 통보했다.[3] 11월 17일 척식은행은 이사회를 열어 사업 중단을 결정하고, 북양은행에 도내 사업을 양도하기로 했다.[3]
탁긴 쇼크척식은행의 파산은 홋카이도 경제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를 "'''탁긴 쇼크'''"라고 부른다.[3] 척식은행을 주거래 은행으로 하던 많은 기업들이 연쇄 도산하고, 홋카이도 경제 전체의 신용 수축이 가속화되었다. 이는 장기적인 홋카이도 경제 불황의 한 원인이 되었다.
2. 5. 파산 이후 (1998년 ~ 현재)
1998년 11월, 홋카이도척식은행(타쿠긴)은 경영 파탄으로 인해 영업을 종료하고, 북양은행 등에 사업을 양도하게 되었다.[3][4] 이는 전후 최초이자 2024년 현재까지 유일한 도시은행 파산 사례이다. 홋카이도 내 영업은 당시 홋카이도에서 세 번째로 큰 은행이었던 북양은행이, 홋카이도 외 영업은 미쓰이 트러스트 은행이 각각 승계하였다.당시 일본은행은 무카이 마사나오 전 일본은행 감사국 차장이 이끌던 북양은행에 홋카이도척식은행의 영업 양도를 촉구했다. 1998년 11월 15일, 홋카이도척식은행 이사회는 영업 계속 포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했고, 북양은행은 이를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북양은행은 홋카이도척식은행 인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걸었다.
- 법인격으로서의 홋카이도척식은행과의 합병은 하지 않을 것
- 일본은행 특융 및 예금 보험 기구의 자금 공급에 의한 뱅크런 대응
- 북양은행의 인수는 도내에 한함
1998년 11월 17일, 북양은행 이사회는 홋카이도척식은행의 도내 영업 인수를 기관 결정했다.
홋카이도척식은행 주식(8312)은 1998년 8월 27일 상장 폐지되었고, 1999년 3월 31일 법인이 해산되어 청산 법인이 되었다. 2006년 1월 31일 임시 주주총회를 통해 청산을 마쳤고, 2월 6일 법인격이 말소되면서 106년 역사의 홋카이도척식은행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홋카이도척식은행 파산 당시 발표된 1998년 3월 결산에 따르면, 부실채권 총액은 대출금 잔액의 약 40%인 2조 3,433억 엔에 달했다. 파산 후 우량 대출처 감소와 대출 자산 악화로 인해 부실채권은 더욱 증가했다.
홋카이도척식은행의 파산은 홋카이도를 주거래 은행으로 하던 많은 도내 기업들을 연쇄 파산으로 몰아넣는 등 홋카이도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는 "타쿠긴 쇼크"라고 불리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홋카이도 경제 불황의 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홋카이도척식은행 파산 이후, 도내, 특히 지방 도시에서 대규모 설비 투자나 장기 자금 대출을 하는 은행이 사라지면서, 많은 기업들의 중장기 설비 투자가 둔화되었고, 이는 지방 도시 쇠퇴를 촉진하여 홋카이도 경제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홋카이도 외 자산과 예금은 1998년 2월 17일 중앙신탁은행 (현 미쓰이스미토모신탁은행)에 영업권을 양도하기로 합의되었다. 중앙신탁은행은 홋카이도척식은행의 고객을 확보하고 영업 기반을 확대하며, 신탁 업무를 전개하는 데 활용하고자 했다. 파산 당시 홋카이도 외 점포 수는 63개였으며, 이 중 59개 점포와 일부 자산, 행원 약 1,200명이 승계되었다. 중앙신탁은행은 2000년 4월 1일 미쓰이신탁은행과 합병하여 중앙미쓰이신탁은행이 되었고, 2012년 4월 1일에는 스미토모신탁은행과 합병하여 미쓰이스미토모신탁은행이 되었다.
구 홋카이도척식은행 점포의 존속 및 이전 현황 (홋카이도 내)구 홋카이도척식은행 점포 중 북양은행 점포와 중복되는 곳은 지점명이 변경되었으며, 통합 시 존속 점포는 규모, 입지 조건, 건물 구조 및 노후화 정도 등을 고려하여 결정되었다.
'''구 홋카이도척식은행 점포가 존속 점포(북양은행 점포를 통합)'''
삿포로역 미나미구치 지점 | 기타나나조 지점 | 기타고조도리 지점 | 마루야마코엔 지점 |
고토니 주오 지점 | 에베쓰 주오 지점 | 지토세 주오 지점 | 하코다테 주오 지점 |
고료카쿠코엔 지점 | 미하라 지점 | 오타루 주오 지점 | 이와나이 주오 지점 |
무로란 주오 지점 | 나카지마초 지점 | 도마코마이 주오 지점 | 이와미자와 주오 지점 |
아사히카와 주오 지점 | 다이세쓰도리 지점 | 나가야마 주오 지점 | 슌코 지점 |
오비히로 주오 지점 | 구시로 주오 지점 | 기타미 주오 지점 | 스미카와 주오 지점 |
신하쓰사무 지점 | 신카와 주오 지점 | 에니와 주오 지점 | 마코마나이 주오 지점 |
시로이시 주오 지점 | 쓰키사무 주오 지점 | 니시마치 지점 | 기타주고조 지점 |
히라기시 주오 지점 | 아쓰베쓰 주오 지점 | 테이네 주오 지점 | 하나카와키타 지점 |
모이와 지점 | 노보리 주오 지점 | 키요타 구야쿠쇼마에 지점 |
'''북양은행 점포가 업무 계승 점포이지만, 구 홋카이도척식은행 점포 소재지로 이전'''
업무 계승 점포 | 이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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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점 영업부 | 오도리 지점 |
아사히가오카 지점 | 기타마루야마 출장소 |
야쿠모 지점 | 야쿠모 주오 지점 |
굿찬 지점 | 굿찬 주오 지점 |
다테 지점 | 다테 주오 지점 |
시즈나이 지점 | 시즈나이 주오 지점 |
우라카와 지점 | 우라카와 주오 지점 |
구리야마 지점 | 구리야마 주오 지점 |
비바이 지점 | 비바이 주오 지점 |
다키카와 지점 | 다키카와 주오 지점 |
스나가와 지점 | 스나가와 주오 지점 |
후라노 지점 | 후라노 주오 지점 |
루모이 지점 | 루모이 주오 지점 |
나요로 지점 | 나요로 주오 지점 |
와카나이 지점 | 와카나이 주오 지점 |
네무로 지점 | 네무로 주오 지점 |
아바시리 지점 | 아바시리 주오 지점 |
비호로 지점 | 비호로 주오 지점 |
엔가루 지점 | 엔가루 주오 지점 |
몬베쓰 지점 | 몬베쓰 주오 지점 |
구 홋카이도척식은행 홋카이도 외 영업 양도 점포 목록
점포 번호 | 拓銀(타쿠긴, 홋카이도척식은행) | 중앙신탁은행 | 중앙미쓰이신탁은행 | 폐지일 |
---|---|---|---|---|
201 | 도쿄 영업부 | 도쿄 중앙 | 도쿄 중앙 | 2003/2/17 |
202 | 마루노우치 | 마루노우치 | 마루노우치 | 2001/2/4 |
203 | 쓰키지 | 쓰키지 | 쓰키지 | 2002/5/7 |
204 | 바쿠로초 | 바쿠로초 | 바쿠로초 | 2001/2/4 |
205 | 토라노몬 | 히가시토라노몬 | 히가시토라노몬 | 2002/5/7 |
206 | 칸다 | 칸다 | 칸다 | 2002/5/7 |
207 | 우에노 | 우에노역 앞 | 우에노역 앞 | 2002/5/7 |
209 | 요코하마 | 요코하마 중앙 | 요코하마 중앙 | 2002/5/7 |
210 | 신주쿠 | 신주쿠 동 | 신주쿠 동 | 2002/5/7 |
211 | 사쿠라 | 사쿠라 | 사쿠라 | 2001/3/12 |
212 | 시부야 | 시부야 중앙 | 시부야 중앙 | 2003/2/17 |
213 | 이케부쿠로 | 히가시이케부쿠로 | 히가시이케부쿠로 | 2002/5/7 |
215 | 이케지리 | 이케지리 | 이케지리 | 2002/5/7 |
216 | 니시코야마 | 니시코야마 | 니시코야마 | 2002/5/7 |
217 | 니시신주쿠 | 니시신주쿠 | 니시신주쿠 | 2001/6/11 |
218 | 오기쿠보 | 오기쿠보 | 오기쿠보 남쪽 출구 | 2002/5/7 |
219 | 에이다이바시 | 에이다이바시 | 후카가와 | 2002/5/7 |
220 | 아카바네 | 아카바네 니시 | 아카바네 니시 | 2002/5/7 |
221 | 지바 | 지바역 앞 | 지바역 앞 | 2002/5/7 |
222 | 센주 | 센주 | 센주 | 2002/5/7 |
225 | 고탄다 | 고탄다 | 고탄다 | 2002/5/7 |
226 | 나카노 | 나카노 | 나카노 북 | 2002/5/7 |
228 | 가마타 | 니시가마타 | 니시가마타 | 2002/5/7 |
229 | 아사가야키타 | 아사가야키타 | 아사가야키타 | 2002/5/7 |
230 | 세타가야 | 세타가야 | 세타가야 | 2002/5/7 |
231 | 구리하시 | 구리하시 | 구리하시 | 2002/5/7 |
232 | 니시에이후쿠 | 니시에이후쿠 | 니시에이후쿠 | 2002/5/7 |
233 | 쓰쓰지가오카 | 쓰쓰지가오카 | 쓰쓰지가오카 | 2004/2/13 |
234 | 무사시세키 | 무사시세키 | 무사시세키 | 2002/5/7 |
235 | 고쿠분지 | 고쿠분지 | 고쿠분지 | 2004/4/9 |
236 | 신코이와 | 신코이와 | 신코이와 | 2002/5/7 |
237 | 고이시카와 | 고이시카와 | 고이시카와 | 2002/5/7 |
238 | 히노 | 히노 | 히노 | 2002/5/7 |
239 | 이시가미 | 이시가미 | 이시가미 | 현존. 단, 점포는 중앙미쓰이 시대에 이전 |
240 | 무사시사카이 | 무사시사카이 | 무사시사카이 | 2002/5/7 |
241 | 오아미 | 오아미 | 오아미 | 2001/3/26 |
242 | 마쓰도 | 마쓰도 | 마쓰도 동 | 2002/5/7 |
244 | 사야마 | 사야마 | 사야마 | 2002/5/7 |
245 | 스기토 | 스기토 | 스기토 | 현존. 단, 2024/11/25, 고시가야 지점(구 스미토모신탁 점포) 내에 브랜치 인 브랜치 |
247 | 히가시무라야마 | 히가시무라야마 | 히가시무라야마 | 2002/5/7 |
248 | 쓰루마 | 쓰루마 | 쓰루마 | 2002/5/7 |
249 | 기타모토 | 기타모토 | 기타모토 | 2002/5/7 |
251 | 나고야 | 사카에 | 나고야 중앙 | 2002/5/7 |
261 | 오사카 | 미도스지 | 미도스지 | 2002/5/7 |
264 | 고베 | 고베 모토마치 | 고베 모토마치 | 2002/5/7 |
265 | 교토 | 가라스마도리 | 가라스마도리 | 2002/5/7 |
271 | 센다이 | 센다이 중앙 | 센다이 중앙 | 2002/5/7 |
272 | 소카신덴 | 소카신덴 | 소카신덴 | 2002/5/7 |
273 | 오사쿠 | 오사쿠 | 오사쿠 | 2002/5/7 |
274 | 다카오 | 다카오 | 다카오 | 2002/5/7 |
275 | 카모이 | 카모이 | 카모이 | 2002/5/7 |
276 | 히가시카와구치 | 히가시카와구치 | 히가시카와구치 | 2002/5/7 |
277 | 이치카와오노 | 이치카와오노 | 이치카와오노 | 2002/5/7 |
278 | 이치가오 | 이치가오 | 이치가오 | 2002/5/7 |
279 | 호야 | 호야 | 호야 | 2002/5/7 |
280 | 자마 | 자마 | 자마 | 2002/5/7 |
281 | 로쿠카이 | 로쿠카이 | 로쿠카이 | 2002/5/7 |
283 | 도요하루 | 도요하루 | 도요하루 | 2001/11/12 |
284 | 이쿠타 | 이쿠타 | 이쿠타 | 2002/5/7 |
홋카이도척식은행은 1950년 홋카이도척식은행법 폐지로 일반 은행으로 전환되었고, 1952년에는 "개척 채권" 발행이 중단되었다(이 서비스는 일본장기신용은행으로 이관). 1960년에는 시중 은행 그룹에 진입했으며,[7] 1963년 3월에는 홋카이도 복권 운영을 인수했다.
3. 주요 특징
삿포로시에 본점을 두고 홋카이도를 기반으로 했지만, 도쿄, 오사카 등 일본 내 주요 도시와 홍콩, 뉴욕 등 해외에도 지점을 운영했다. 도시 은행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작았지만, 홋카이도 내에서는 "홋카이도 인민 은행"으로 불릴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졌다.
1962년경부터 반달곰을 모티브로 한 "타쿠찬"("작은 타쿠")을 캐릭터로 제정했다.[7] 타쿠찬 저금통은 오늘날까지 피규어 수집가들 사이에서 여전히 인기가 있다. 1989년부터는 산리오의 캐릭터를 사용했다.
1997년 경영 파탄으로 1998년 호쿠요 은행과 중앙신탁은행(현 미쓰이 스미토모 신탁 은행)에 사업이 양도되었고, 1999년 법인이 해산, 2006년 청산이 종결되었다. 경영 파탄 전까지 도쿄 증권 거래소 1부와 삿포로 증권 거래소에 주식이 상장되어 있었다.
3. 1. 홋카이도 내 기반
삿포로시에 본점을 두고 홋카이도를 기반으로 했다. 홋카이도에서는 대다수의 가구가 "탁신 씨"에 계좌를 가지고 있었고, 사실상 모든 자치 단체가 고객이었다. "시중 은행"으로서 가장 작은 규모였지만, "홋카이도 인민 은행"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7] 홋카이도, 삿포로시를 비롯한 도내 시정촌 대부분에서 지정 금융 기관으로 지정받아, 도시 은행 13개 중 최소 규모이면서도 "도민 은행"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홋카이도척식은행은 홋카이도에서 밀접한 지역적 기반을 가진 은행으로서, 홋카이도의 대다수 가정과 기업이 "홋카이도척식은행"에 예금 계좌를 가지고 있었으며, 금액이나 내용에 상관없이 "홋카이도척식은행에서 융자를 받고 있다", "홋카이도척식은행에 당좌 예금 계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 기업의 신용도를 측정하는 척도이자 경영자의 지위가 될 정도였다. 제조업이 약한 홋카이도 경제를 지탱하는 존재가 되어, 홋카이도 재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홋카이도 경제 연합회의 역대 사무국장을 배출했고, 홋카이도 경제 동우회 대표 간사나 홋카이도 상공 회의소 회장에는 홋카이도척식은행의 은행장이 여러 번 취임했다.
홋카이도 재계에서 공동으로 출자・기부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홋카이도척식은행・홋카이도 전력이 부담 비율을 결정한 후 나머지를 다른 기업에 할당하는 것이 관례였다. 금융 기관 간의 안건의 경우에도, 홋카이도척식은행 4 : 홋카이도 은행 3 : 호쿠요 은행 2 : 삿포로 은행 1의 부담 비율로 하는 것이 묵시적인 합의였다.
1998년 11월에 '''호쿠요 은행''' 및 중앙신탁은행 (미쓰이, 스미토모 신탁 은행을 거쳐 현재: '''미쓰이, 스미토모 신탁 은행''')에 사업을 양도했다. 삿포로시 주오구 오도리니시 3초메에 있던 구 홋카이도척식은행 본점은 "호쿠요 오도리 빌딩"으로 명칭을 변경했으며(청산 법인의 사무국도 있었음), 1층은 "호쿠요 은행 오도리 지점"으로 이름을 바꾸어 영업을 했다. 홋카이도척식은행이 완전 소멸한 후 2006년(헤이세이 18년) 11월에 재건축을 위해 해체되었고, 2010년 (헤이세이 22년) 5월 6일에 "호쿠요 오도리 센터 (오도리 빗세)"가 준공되었다. 이와 함께 인접해 있던 본점도 2011년 (헤이세이 23년) 1월 11일부로 이전했다. 이에 따라, 오도리 지점이 본점 영업부에 통합되어, 영업점으로서의 구 홋카이도척식은행 본점은 명실상부하게 소멸하게 되었다.
도내 점포는 호쿠요 은행 점포와 중복되는 지점명은 모두 구 홋카이도척식은행 점포가 지점명을 변경했으나, 통합 시 존속 점포는 규모, 입지 조건, 건물의 구조 및 노후화 정도 등을 감안하여 결정되었다. 그 결과, 구 홋카이도척식은행 점포를 존속점으로 하는 사례나 호쿠요 은행 점포가 계승 점포이지만, 통합 시 구 홋카이도척식은행 점포 소재지로 이전하는 사례가 많았다. 호쿠요 은행 점포에 통합된 것은 모리 주오, 후카가와 주오, 에사시 주오, 요이치 주오, 나카시베쓰 주오, 도요히라 주오, 히가시 구야쿠쇼마에, 기타히로시마 단지 지점의 8개 점포에 그쳤다.
'''구 홋카이도척식은행 점포가 존속 점포(호쿠요 은행 점포를 통합)'''
삿포로역 미나미구치 지점 |
기타나나조 지점 |
기타고조도리 지점 |
마루야마코엔 지점 |
고토니 주오 지점 |
에베쓰 주오 지점 |
지토세 주오 지점 |
하코다테 주오 지점 |
고료카쿠코엔 지점 |
미하라 지점 |
오타루 주오 지점 |
이와나이 주오 지점 |
무로란 주오 지점 |
나카지마초 지점 |
도마코마이 주오 지점 |
이와미자와 주오 지점 |
아사히카와 주오 지점 |
다이세쓰도리 지점 |
나가야마 주오 지점 |
슌코 지점 |
오비히로 주오 지점 |
구시로 주오 지점 |
기타미 주오 지점 |
스미카와 주오 지점 |
신하쓰사무 지점 |
신카와 주오 지점 |
에니와 주오 지점 |
마코마나이 주오 지점 |
시로이시 주오 지점 |
쓰키사무 주오 지점 |
니시마치 지점 |
기타주고조 지점 |
히라기시 주오 지점 |
아쓰베쓰 주오 지점 |
테이네 주오 지점 |
하나카와키타 지점 |
모이와 지점 |
노보리 주오 지점 |
키요타 구야쿠쇼마에 지점 |
'''호쿠요 은행 점포가 업무 계승 점포이지만, 구 홋카이도척식은행 점포 소재지로 이전'''
업무 계승 점포 | 이전지 |
본점 영업부 | 오도리 지점 |
아사히가오카 지점 | 기타마루야마 출장소 |
야쿠모 지점 | 야쿠모 주오 지점 |
굿찬 지점 | 굿찬 주오 지점 |
다테 지점 | 다테 주오 지점 |
시즈나이 지점 | 시즈나이 주오 지점 |
우라카와 지점 | 우라카와 주오 지점 |
구리야마 지점 | 구리야마 주오 지점 |
비바이 지점 | 비바이 주오 지점 |
다키카와 지점 | 다키카와 주오 지점 |
스나가와 지점 | 스나가와 주오 지점 |
후라노 지점 | 후라노 주오 지점 |
루모이 지점 | 루모이 주오 지점 |
나요로 지점 | 나요로 주오 지점 |
와카나이 지점 | 와카나이 주오 지점 |
네무로 지점 | 네무로 주오 지점 |
아바시리 지점 | 아바시리 주오 지점 |
비호로 지점 | 비호로 주오 지점 |
엔가루 지점 | 엔가루 주오 지점 |
몬베쓰 지점 | 몬베쓰 주오 지점 |
그 외, 다음과 같이 변화한 예도 있다.
- 후카가와 지점 (후카가와시) → 호쿠요 은행 후카가와 주오 지점 → 후카가와 지점으로 통합 후, 토지와 건물을 시에 양도. 건물 외관은 역사적 건축물로 보존되어, 공공 시설과 버스 대기소를 겸한 "플라자 후카가와"로 이용.
3. 2. 도외 및 해외 지점
홋카이도척식은행은 삿포로시에 본점을 두고 홋카이도를 기반으로 했지만, 도쿄, 사이타마, 지바, 가나가와, 미야기, 아이치, 오사카, 교토, 효고 등에도 지점을 운영했다. 또한, 홍콩, 뉴욕에도 해외 지점을 둔 대형 은행 중 하나였지만, 도시 은행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작았다.1998년 중앙신탁은행에 홋카이도 외 영업권이 양도될 당시 홋카이도 외 점포 수는 63개(지점 62개, 출장소 1개)였다. 이 중 4개 점포는 영업 양도 전에 통폐합되었고, 59개 점포와 점포 외 ATM 6개, 일부 요주의 채권을 포함한 자산, 약 1200명의 직원이 중앙신탁은행으로 승계되었다. 홋카이도척식은행은 1997년 경영 파탄 이후 1998년 호쿠요 은행 및 중앙신탁은행(현재: 미쓰이 스미토모 신탁 은행)에 사업이 양도되었으며, 1999년 법인이 해산되고 2006년 청산이 종결되었다.[1]
중앙신탁은행은 2000년 미쓰이신탁은행과 합병하여 중앙미쓰이신탁은행이 되었고, 2012년 스미토모신탁은행과 합병하여 미쓰이스미토모신탁은행이 되었다. 합병 후 구 홋카이도척식은행 점포 대부분은 통폐합 대상이 되어 2002년 5월 7일까지 6개, 2004년 4월 9일까지 2개 점포로 정리되었다.[2]
다음은 홋카이도척식은행의 영업 양도 점포 목록이다.[3]
홋카이도척식은행 | 중앙신탁은행 | 중앙미쓰이신탁은행 | 폐지일 |
---|---|---|---|
도쿄 영업부 | 도쿄 중앙 | 도쿄 중앙 | 2003/2/17 |
마루노우치 | 마루노우치 | 마루노우치 | 2001/2/4 |
쓰키지 | 쓰키지 | 쓰키지 | 2002/5/7 |
바쿠로초 | 바쿠로초 | 바쿠로초 | 2001/2/4 |
토라노몬 | 히가시토라노몬 | 히가시토라노몬 | 2002/5/7 |
칸다 | 칸다 | 칸다 | 2002/5/7 |
우에노 | 우에노역 앞 | 우에노역 앞 | 2002/5/7 |
요코하마 | 요코하마 중앙 | 요코하마 중앙 | 2002/5/7 |
신주쿠 | 신주쿠 동 | 신주쿠 동 | 2002/5/7 |
사쿠라 | 사쿠라 | 사쿠라 | 2001/3/12 |
시부야 | 시부야 중앙 | 시부야 중앙 | 2003/2/17 |
이케부쿠로 | 히가시이케부쿠로 | 히가시이케부쿠로 | 2002/5/7 |
이케지리 | 이케지리 | 이케지리 | 2002/5/7 |
니시코야마 | 니시코야마 | 니시코야마 | 2002/5/7 |
니시신주쿠 | 니시신주쿠 | 니시신주쿠 | 2001/6/11 |
오기쿠보 | 오기쿠보 | 오기쿠보 남쪽 출구 | 2002/5/7 |
에이다이바시 | 에이다이바시 | 후카가와 | 2002/5/7 |
아카바네 | 아카바네 니시 | 아카바네 니시 | 2002/5/7 |
지바 | 지바역 앞 | 지바역 앞 | 2002/5/7 |
센주 | 센주 | 센주 | 2002/5/7 |
고탄다 | 고탄다 | 고탄다 | 2002/5/7 |
나카노 | 나카노 | 나카노 북 | 2002/5/7 |
가마타 | 니시가마타 | 니시가마타 | 2002/5/7 |
아사가야키타 | 아사가야키타 | 아사가야키타 | 2002/5/7 |
세타가야 | 세타가야 | 세타가야 | 2002/5/7 |
구리하시 | 구리하시 | 구리하시 | 2002/5/7 |
니시에이후쿠 | 니시에이후쿠 | 니시에이후쿠 | 2002/5/7 |
쓰쓰지가오카 | 쓰쓰지가오카 | 쓰쓰지가오카 | 2004/2/13 |
무사시세키 | 무사시세키 | 무사시세키 | 2002/5/7 |
고쿠분지 | 고쿠분지 | 고쿠분지 | 2004/4/9 |
신코이와 | 신코이와 | 신코이와 | 2002/5/7 |
고이시카와 | 고이시카와 | 고이시카와 | 2002/5/7 |
히노 | 히노 | 히노 | 2002/5/7 |
이시가미 | 이시가미 | 이시가미 | 현존. 단, 점포는 중앙미쓰이 시대에 이전 |
무사시사카이 | 무사시사카이 | 무사시사카이 | 2002/5/7 |
오아미 | 오아미 | 오아미 | 2001/3/26 |
마쓰도 | 마쓰도 | 마쓰도 동 | 2002/5/7 |
사야마 | 사야마 | 사야마 | 2002/5/7 |
스기토 | 스기토 | 스기토 | 현존. 단, 2024/11/25, 고시가야 지점(구 스미토모신탁 점포) 내에 브랜치 인 브랜치 |
히가시무라야마 | 히가시무라야마 | 히가시무라야마 | 2002/5/7 |
쓰루마 | 쓰루마 | 쓰루마 | 2002/5/7 |
기타모토 | 기타모토 | 기타모토 | 2002/5/7 |
나고야 | 사카에 | 나고야 중앙 | 2002/5/7 |
오사카 | 미도스지 | 미도스지 | 2002/5/7 |
고베 | 고베 모토마치 | 고베 모토마치 | 2002/5/7 |
교토 | 가라스마도리 | 가라스마도리 | 2002/5/7 |
센다이 | 센다이 중앙 | 센다이 중앙 | 2002/5/7 |
소카신덴 | 소카신덴 | 소카신덴 | 2002/5/7 |
오사쿠 | 오사쿠 | 오사쿠 | 2002/5/7 |
다카오 | 다카오 | 다카오 | 2002/5/7 |
카모이 | 카모이 | 카모이 | 2002/5/7 |
히가시카와구치 | 히가시카와구치 | 히가시카와구치 | 2002/5/7 |
이치카와오노 | 이치카와오노 | 이치카와오노 | 2002/5/7 |
이치가오 | 이치가오 | 이치가오 | 2002/5/7 |
호야 | 호야 | 호야 | 2002/5/7 |
자마 | 자마 | 자마 | 2002/5/7 |
로쿠카이 | 로쿠카이 | 로쿠카이 | 2002/5/7 |
도요하루 | 도요하루 | 도요하루 | 2001/11/12 |
이쿠타 | 이쿠타 | 이쿠타 | 2002/5/7 |
파산 후 시부야 지점 건물은 매각되었지만, 2022년 현재 도큐 그룹 소유로 시부야 홋카이도척식은행 빌딩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남아 있다.[4]
3. 3. 마스코트와 광고
1962년경부터 반달곰을 모티브로 한 "탁짱"을 캐릭터로 제정했다.[7] 탁짱 저금통은 오늘날까지 피규어 수집가들 사이에서 여전히 인기가 있다. 1989년부터 산리오의 "모두의 타아보"를 캐릭터로 채용했으며, 1990년대에는 칸노 미호나 와타나베 마리나, 홋카이도가 무대인 텔레비전 드라마 『북쪽 나라에서』에 출연한 요시오카 히데타카, 홋카이도 출신인 마스다 키톤 등을 CM 캐릭터로 채용했다. 텔레비전 CM에서의 카피는 "'''당신의 꿈, 맡아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이야기, 맡아 드리겠습니다'''"였지만, 인쇄물에서는 70년대부터 파탄 시까지 "세심한 교제"를 카피로 사용했다.4. 파산 원인 분석
1990년대 거품 붕괴로 홋카이도척식은행의 부실채권이 급증했다. 특히 카부토와 소피아에 융자하여 건설된 호텔은 채산성이 없어 홋카이도척식은행 직원이 종업원으로 참여했음에도 적자가 확대되었다.[5] 1994년 숙박객은 목표의 절반에 불과했다.[5] 홋카이도척식은행은 폐쇄 대신 연명 자금을 투입해 부실채권을 늘렸다.[5]
카부토에 대한 직접 융자는 500억엔 정도였으나, 산하 기업 간 융자를 포함하면 총액은 수천억 엔 규모였다.[6] 1992년 3월 말 500억엔의 추가 융자 틀 설정, 제3자 할당 증자 인수 등으로 카부토에 대한 융자는 2803억엔, 카부토의 관련 회사 채무 보증도 1000억엔을 넘었다.[6] 홋카이도척식은행은 카부토의 채무 초과를 인지했으나, 페이퍼 컴퍼니를 통한 융자 등 부정행위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 재건 지원을 가장하며 카부토를 도산으로 이끌었다.[6]
1992년 "SSK 트리오"의 카이도 상무가 융자 책임을 지고 퇴임하고, 스즈키 회장도 퇴임하며 SSK 트리오는 붕괴했다.[6]
4. 1. 과도한 부동산 융자
1985년경부터 홋카이도척식은행(타쿠긴)은 도쿄와 오사카에 지점을 개설하고 부동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반적인 은행은 부동산 가치의 70% 정도만 융자하지만, 당시 버블 경제 시기에는 토지 가치가 급격히 상승할 것으로 예상되어 부동산 가치의 120~130%에 달하는 융자가 제공되었다. 타쿠긴은 이러한 부동산 융자에 다소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다른 금융 기관이 이미 담보로 설정한 토지에 후순위로 담보를 설정해야 했다. 이는 차입 부동산 회사가 파산할 경우 타쿠긴에 상환될 대출 부분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했고, 결국 실제로 이런 일이 발생했다.[8]1990년대 거품 붕괴가 일어나면서 홋카이도척식은행의 부실채권은 급증했다. 부실 채권은 1조 엔을 넘어섰고, 이를 회수할 방법이 없어졌다. 예를 들어, 삿포로의 부동산 회사 가부토 데콤에 1200억엔 이상을 융자했지만, 버블 붕괴로 부채가 부실해지자 1993년부터는 강압적으로 자금을 회수하려는 태도로 바뀌었다. 가부토 데콤 경영진과의 분쟁 결과, 가부토 데콤의 사장이 검찰에 의해 기소되어 체포되었다. 한편, 1994년 9월 일본 재무성 조사에서 리조트 회사에 대한 자금 지원과 관련하여 부실 채권 처분과 무관하게 100억엔의 대출이 계속되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1989년(헤이세이 원년)부터 구상되어, 1990년(헤이세이 2년)에 수립된 '타쿠긴 21세기 비전'은 '기업 성장·부동산 개발 지원(인큐베이터)'을 주요 전략으로 삼았다. 1980년대 후반에 인큐베이터 노선의 진두 지휘를 맡았던 사토 야스히코 부행장, '타쿠긴 21세기 비전'이 시작된 1990년에 진두 지휘를 맡았던 가이도 히로시 상무 등은 'SSK 트리오'라고 불리며 무리한 확대 노선을 추진했다.[8]
카부토와 소피아에 대한 융자로 세워진 호텔은 채산성이 전혀 없었고, 호텔 직원 경험이 없는 홋카이도척식은행 직원이 종업원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영업할수록 적자는 확대되었다. 1994년 숙박객 수는 목표의 절반에 불과했다. 홋카이도척식은행은 즉시 폐쇄하는 대신 연명 자금을 추가로 투입하여 부실채권은 더욱 증가했다.
홋카이도척식은행에서 카부토에 대한 직접 융자는 500억엔 정도로 추산되었지만, 산하 기업 간의 융자를 포함한 총액은 수천억 엔 규모로 팽창했다. 1992년 3월 말에는 500억엔의 추가 융자 틀이 설정되었고, 제3자 할당 증자 인수도 있었으며, 최종적으로 카부토에 대한 융자는 2803억엔, 카부토에 의한 관련 회사에 대한 채무 보증도 1000억엔을 넘어섰다. 홋카이도척식은행은 카부토의 채무 초과를 인지했지만, 부정의 실태가 드러나는 것을 우려하여 재건 지원을 가장하면서 카부토를 도산으로 이끌었다.
1992년에는 확대 노선을 추진해 온 "SSK 트리오" 중 가이도 상무가 난맥 융자의 책임을 지고 퇴임하고, 스즈키 회장도 이사 상담역으로 퇴임하면서 SSK 트리오는 붕괴하고 영향력을 잃었다.
4. 2. 경영진의 판단 오류
1977년 고미 아키라가 내부 출신으로 2대째 행장이 되었고, 1983년 스즈키 시게루가 3대째 행장에 취임하면서, 홋카이도척식은행 내에서는 사업 확장에 대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8] 1985년경부터 일본의 시중 은행들은 버블 경제에 편승하여 부동산 융자에 주력했고, 지가 상승은 수도권에서 3대 도시권을 중심으로 일본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8]홋카이도는 경기의 파동이 도시권보다 늦게 도달했기 때문에, 홋카이도척식은행은 다른 도시 은행들보다 늦은 1988년경에 도쿄 영업부나 오사카 지점을 통해 부동산 융자를 시작했다.[8] 이미 수익 경쟁에 돌입한 다른 도시 은행들과의 격차는 벌어졌고, 요코하마 은행이나 지바 은행 등 상위 지방 은행에까지 따라잡히면서 홋카이도척식은행은 초조함을 느꼈다.[8] 이에 스즈키 행장은 확대 노선을 채택했다.[8]
일반적인 은행 업무라면 토지 평가액의 70% 정도만 융자를 하지만, 버블기에는 향후 지가 상승을 예상하여 당시 평가액의 120~130%에 달하는 융자를 했다.[8] 홋카이도척식은행은 후발 주자였기 때문에, 다른 금융 기관이 이미 담보로 삼고 있는 토지에 후순위로 담보 설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8] 이는 차입자의 부동산 회사가 파산했을 때 회수 가능한 부분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8]
1989년부터 구상되어 1990년에 수립된 '탁은 21세기 비전'은 미국의 컨설팅 회사 맥킨지에 의뢰한 것으로, '기업 성장·부동산 개발 지원(인큐베이터)'이 최종안에 추가되었다.[8] 행장 시대에 확대 노선을 결정한 스즈키 회장, 80년대 후반에 인큐베이터 노선의 진두 지휘를 맡았던 사토 야스히코 부행장, '탁은 21세기 비전'이 시작된 1990년에 진두 지휘를 맡았던 가이도 히로시 상무의 3인은 'SSK 트리오'라고 불렸다.[8] 이 'SSK 트리오'가 사실상 행내 인사권을 장악하여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하고, 홋카이도척식은행의 기업 체력을 뛰어넘는 무리한 확대 노선을 추진했다.[8]
'21세기 비전'에서 부속에 불과했던 인큐베이터 전략은 홋카이도에 거품 경제가 도래하면서 주역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이를 담당하는 "종합개발부"가 홋카이도척식은행에 신설되었다.[8] 종합개발부에는 업무 추진 그룹과 심사 그룹이 있었지만, 인원 배치는 업무 추진 8명에 심사 2명으로, 심사 기능이 극도로 경시되었다.[8]
종합개발부는 제1부(삿포로 담당)와 제2부(도쿄 담당)로 나뉘었는데, 총량 규제 통보와 닛케이 평균 주가 하락으로 거품 경제의 종말을 느낀 제2부는 부동산 융자 동결을 결정했다.[8] 그러나 제1부에는 위기감이 전달되지 않았고, 제2부는 1991년 10월에 설치 1년 만에 폐지되었다.[8] 제1부는 더욱 기세를 올려 문란한 융자를 확대했고, 특히 가부토데콤과 소피아 두 회사에 대한 융자는 거대한 부실 채권으로 변모했다.[8]
1990년대에 들어서 거품 붕괴가 일어나면서 홋카이도척식은행의 부실채권도 급증했다.[8]
4. 3. 외부 환경 변화
1990년대 거품 붕괴와 일본 경제 침체는 홋카이도척식은행의 부실채권 급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부실 채권은 1조 엔을 넘어섰고, 이를 회수할 방법이 없어졌다.[4] 예를 들어, 삿포로의 부동산 회사 가부토 데콤에 1200억엔 이상을 지원했지만, 버블 붕괴로 부채가 부실해지자 1993년부터 강압적으로 자금을 회수하려 했다.[4] 가부토 데콤 경영진과의 분쟁 결과, 사장이 검찰에 기소되어 체포되기도 했다.[4]1994년 9월 일본 재무성 조사에서는 리조트 회사에 대한 자금 지원과 관련하여 부실 채권 처분과 무관하게 100억엔의 대출이 계속되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4] 카부토와 소피아에 대한 융자로 건설된 호텔은 채산성이 전혀 없었고, 호텔 직원 경험이 없는 홋카이도척식은행 직원이 종업원으로 참여하면서 적자가 확대되었다.[5] 1994년 숙박객 수는 목표의 절반에 불과한 5만 7,000명에 그쳤다.[5] 홋카이도척식은행은 즉시 폐쇄하는 대신 연명 자금을 추가 투입하여 부실채권을 더욱 증가시켰다.[5]
홋카이도척식은행의 카부토에 대한 직접 융자는 500억엔 정도로 추산되었지만, 산하 기업 간 융자를 포함한 총액은 수천억 엔 규모로 증가했다.[6] 1992년 3월 말에는 500억엔의 추가 융자 틀이 설정되었고, 제3자 할당 증자 인수도 있었다.[6] 최종적으로 카부토에 대한 융자는 2803억엔, 카부토에 의한 관련 회사에 대한 채무 보증도 1000억엔을 넘어섰다.[6] 홋카이도척식은행 측은 "실질적으로 카부토는 채무 초과"라고 인정했지만, 융자 중에는 페이퍼 컴퍼니를 통한 것도 있어, 카부토가 즉시 도산하면 부정행위가 드러날 것을 우려했다.[6] 이러한 책임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홋카이도척식은행은 표면상으로는 재건 지원을 가장하면서, 카부토를 수개월에 걸쳐 도산으로 이끄는 방향으로 움직였다.[6]
1994년 1월, 『주간 현대』에 "척식은행 해체의 충격 시나리오"라는 기사가 게재되면서 처음으로 언론에서 "위험한 은행"으로 지목되었다.[7] 같은 해 4월, 난맥 융자의 중심이었던 종합 개발부를 폐지했다.[7] 그 해 말에는 대장성으로부터 "결산 승인 은행" 지정을 받아 금융 당국의 강력한 관리하에 놓이게 되었고, 이 사실은 극비 사항으로 유지되었다.[8] 1995년 5월 발표된 3월 결산에서는 설립 이후 95년 만에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했다.[8] 여름에는 무디스로부터 "매우 취약한 재무 내용·어떠한 외부의 지원을 필요로 한다"는 평가와 함께 E 등급을 받았다.[8]
1997년 1월 하순, 은행 주식은 일제히 최저가를 갱신했고, 특히 홋카이도척식은행 주식은 외자계 증권 회사로부터 대량의 공매도를 당해 18년 만에 주가가 200엔 아래로 떨어졌다.[9] 대규모 기관 투자자를 중심으로 예금 해약이 시작되었고, 같은 해 3월에는 선데이 프로젝트에서 은행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주가로 보면 실질적으로 파탄했습니다."라는 발언이 방송되면서 일반 이용자에게까지 불안이 확산되어 뱅크런이 발생했다.[9]
5. 파산 이후 영향
1997년 홋카이도척식은행(타쿠긴)의 경영 파탄은 홋카이도 경제, 사회, 금융 시스템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홋카이도를 기반으로 하는 유일한 도시 은행이었던 타쿠긴의 파산은, "도시 은행은 망하지 않는다"는 안일한 인식과 지역 언론의 소극적인 보도 태도[3] 속에서 예고 없이 찾아왔다.
타쿠긴 파산 소식은 이른 아침부터 텔레비전으로 보도되었고, 신문사는 길거리에서 호외를 배포했다. 무로란시 지점에는 개점 30분 만에 100명이, 구시로시 지점에는 200명이 몰려 혼란에 대비하여 홋카이도 경찰의 경찰관도 동원되었다. 점포에는 향후 예금 보호, 융자 계약 확인, 타쿠긴에 대한 비판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3]
11월 15일 (토요일) 도쿄도 지요다구의 팔레스 호텔에서 열린 이사회 결정이 삿포로시 본점에 전달되자, 11월 17일 (월요일) 뱅크런에 대비하기 위해 일본은행은 타쿠긴 예금의 2%에 해당하는 현금 800억 엔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타쿠긴이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360억 엔이었고, 부족분은 일본은행 특별 융자를 이용해야 했다.[3]
11월 16일 (일요일) 저녁부터 현금 수송이 시작되었고, 각 지점에 통지가 전달되어 작업이 끝난 것은 21시였다. 본점 근무 행원들은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지점 지원을 나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심야의 타쿠긴 본점에서는 거래처 배포 문서, 점포 포스터, 기자 회견 예상 문답집 등이 준비되고 있었다.[3]
11월 17일 아침, 타쿠긴 본점 기자 회견장에서 경영진은 어려운 영업 양도 경위를 설명하고, 호쿠요 은행에 홋카이도 지역 업무를 승계하기로 결정했음을 발표했다. 가와타니(河谷) 머니저는 "정말 여러분께 폐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동석한 전 임원들과 함께 고개 숙여 인사하며 사죄했다.[3]
타쿠긴 파산으로 홋카이도 주민들의 심리적 불안은 컸고, 파산 발표 당일에만 600억 엔, 이후 3일 동안 총 4,900억 엔의 예금이 해약되었다. 일부 지점에서는 예금 해약 관련 전표나 청구서가 부족하여 복사기로 복사한 장표를 사용해야 했다.[3]
홋카이도척식은행 파산은 홋카이도 경제 침체, 금융 시스템 변화, 관련 기업 영향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참조).
5. 1. 홋카이도 경제 침체
1997년 홋카이도척식은행(타쿠긴)의 파산은 홋카이도 경제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를 '''타쿠긴 쇼크'''라고 부른다. 타쿠긴은 홋카이도를 기반으로 하는 유일한 도시 은행이었기 때문에, 그 파산은 도내 기업들의 연쇄 도산, 신용 경색, 투자 위축, 고용 감소 등 광범위한 경제적 악영향을 초래했다.[3]타쿠긴 파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거품 경제 시기에 무리한 대출 확대였다. 특히 카부토 그룹에 대한 과도한 융자는 부실 채권 증가로 이어졌다.[3] 1998년 3월, 타쿠긴의 부실 채권 총액은 대출금 잔액의 약 40%인 2조원 3,433억 엔에 달했고, 예금 유출도 심각하여 1조원 1,725억 엔의 채무 초과 상태에 이르렀다.[4]
"도시 은행은 망하지 않는다"는 안일한 인식과 지역 언론의 소극적인 보도 태도[3]는 타쿠긴 파산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 주요 원인이었다. 파산 이후 홋카이도 내에서는 장기 자금 대출을 해주는 은행이 사라져, 기업들의 설비 투자가 위축되고 지방 도시의 쇠퇴가 가속화되었다.[3]
타쿠긴 파산은 야마이치 증권의 자율 폐업, 일본장기신용은행의 연쇄 도산 등 일본 금융 시스템 전체에도 영향을 미쳤다.[4]
5. 2. 금융 시스템 변화
1997년 11월 17일, 홋카이도척식은행은 경영 파탄으로 인해 사업을 계속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홋카이도 내 영업은 1998년 11월 10일을 기해 북양은행에 양도되었다. 당시 북양은행은 홋카이도 내에서 3위 규모의 제2 지방은행이었으며, 홋카이도척식은행의 종업원 수, 총 자산액, 자본금은 각각 북양은행의 1/3, 1/5, 1/10 수준이었다.[11]북양은행은 홋카이도척식은행의 영업 인수를 결정하면서 "법인격으로서의 홋카이도척식은행과의 합병은 하지 않을 것", "일본은행 특융 및 예금 보험 기구의 자금 공급에 의한 뱅크런 대응", "북양은행의 인수는 도내에 한함"을 조건으로 내걸었다.[11]
홋카이도 외 자산과 예금은 본주의 금융기관에 영업 양도하기로 결정되었으며, 1998년 2월 17일 중앙신탁은행에 홋카이도 외 영업권을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중앙신탁은행은 홋카이도척식은행의 고객을 확보하여 영업 기반을 확대하고, 신탁 업무를 전개하는 데 활용하며, 공적 자금 주입을 통해 재무 기반을 강화하고자 했다. 홋카이도척식은행 파산 당시 홋카이도 외 점포 수는 63개(지점 62개, 출장소 1개)였으며, 이 중 4개 점포는 영업 양도 전에 통폐합되었다. 1998년 11월 16일, 59개 점포와 점포 외 ATM 6개, 일부 요주의 채권을 포함한 자산, 행원 약 1200명이 중앙신탁은행에 승계되었고, 예금보험기구로부터 467억엔이 증여되었다.[11]
중앙신탁은행은 2000년 4월 1일에 미쓰이신탁은행과 합병하여 중앙미쓰이신탁은행이 되었고, 2012년 4월 1일에는 스미토모신탁은행과 합병하여 미쓰이스미토모신탁은행이 되었다. 합병 후, 구 홋카이도척식은행 점포의 대부분은 수익성이 낮아 통폐합 대상이 되었다.[11]
홋카이도척식은행의 시스템(벤더는 일본 아이비엠)으로 전면 전환하는 결정은, 기존 북양은행 시스템이 노후화되었고 갱신 시기에 접어들었으며, 총자산이 5배나 되는 홋카이도척식은행의 정보량이 부하가 너무 컸기 때문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시스템 담당자는 "시스템 변경에 따른 설비 도입 비용이나 개수 비용을 비롯하여 오퍼레이터 재교육에 드는 비용 등을 고려해도, 일본에서 가장 진보된 홋카이도척식은행의 시스템으로 갈아타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11]
금융기관의 온라인 시스템, 특히 핵심인 계정계 시스템은 업무 그 자체와 동의어이며, 행원의 각종 사무 처리나 예금 통장의 계속 사용 여부를 좌우한다. 이러한 이유로, 북양은행 직원들 사이에서는 "구 홋카이도척식은행에 잠식당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불안감과 불쾌감이 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타케이(武井) 행장은 "컴퓨터 시스템이 구 홋카이도척식은행의 것으로 바뀌더라도, 우리 방식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융자 심사 능력을 비롯해, 사무 시스템은 우리가 훨씬 우수하다.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하며 시스템 이행을 실행했다.[11]
'''영업 양도 점포 목록'''
점포 번호 | 홋카이도척식은행 | 중앙신탁은행 | 중앙미쓰이신탁은행 | 폐지일 |
---|---|---|---|---|
201 | 도쿄 영업부 | 도쿄 중앙 | 도쿄 중앙 | 2003/2/17 |
202 | 마루노우치 | 마루노우치 | 마루노우치 | 2001/2/4 |
203 | 쓰키지 | 쓰키지 | 쓰키지 | 2002/5/7 |
204 | 바쿠로초 | 바쿠로초 | 바쿠로초 | 2001/2/4 |
205 | 토라노몬 | 히가시토라노몬 | 히가시토라노몬 | 2002/5/7 |
206 | 칸다 | 칸다 | 칸다 | 2002/5/7 |
207 | 우에노 | 우에노역 앞 | 우에노역 앞 | 2002/5/7 |
209 | 요코하마 | 요코하마 중앙 | 요코하마 중앙 | 2002/5/7 |
210 | 신주쿠 | 신주쿠 동 | 신주쿠 동 | 2002/5/7 |
211 | 사쿠라 | 사쿠라 | 사쿠라 | 2001/3/12 |
212 | 시부야 | 시부야 중앙 | 시부야 중앙 | 2003/2/17 |
213 | 이케부쿠로 | 히가시이케부쿠로 | 히가시이케부쿠로 | 2002/5/7 |
215 | 이케지리 | 이케지리 | 이케지리 | 2002/5/7 |
216 | 니시코야마 | 니시코야마 | 니시코야마 | 2002/5/7 |
217 | 니시신주쿠 | 니시신주쿠 | 니시신주쿠 | 2001/6/11 |
218 | 오기쿠보 | 오기쿠보 | 오기쿠보 남쪽 출구 | 2002/5/7 |
219 | 에이다이바시 | 에이다이바시 | 후카가와 | 2002/5/7 |
220 | 아카바네 | 아카바네 니시 | 아카바네 니시 | 2002/5/7 |
221 | 지바 | 지바역 앞 | 지바역 앞 | 2002/5/7 |
222 | 센주 | 센주 | 센주 | 2002/5/7 |
225 | 고탄다 | 고탄다 | 고탄다 | 2002/5/7 |
226 | 나카노 | 나카노 | 나카노 북 | 2002/5/7 |
228 | 가마타 | 니시가마타 | 니시가마타 | 2002/5/7 |
229 | 아사가야키타 | 아사가야키타 | 아사가야키타 | 2002/5/7 |
230 | 세타가야 | 세타가야 | 세타가야 | 2002/5/7 |
231 | 구리하시 | 구리하시 | 구리하시 | 2002/5/7 |
232 | 니시에이후쿠 | 니시에이후쿠 | 니시에이후쿠 | 2002/5/7 |
233 | 쓰쓰지가오카 | 쓰쓰지가오카 | 쓰쓰지가오카 | 2004/2/13 |
234 | 무사시세키 | 무사시세키 | 무사시세키 | 2002/5/7 |
235 | 고쿠분지 | 고쿠분지 | 고쿠분지 | 2004/4/9 |
236 | 신코이와 | 신코이와 | 신코이와 | 2002/5/7 |
237 | 고이시카와 | 고이시카와 | 고이시카와 | 2002/5/7 |
238 | 히노 | 히노 | 히노 | 2002/5/7 |
239 | 이시가미 | 이시가미 | 이시가미 | 현존. 단, 점포는 중앙미쓰이 시대에 이전 |
240 | 무사시사카이 | 무사시사카이 | 무사시사카이 | 2002/5/7 |
241 | 오아미 | 오아미 | 오아미 | 2001/3/26 |
242 | 마쓰도 | 마쓰도 | 마쓰도 동 | 2002/5/7 |
244 | 사야마 | 사야마 | 사야마 | 2002/5/7 |
245 | 스기토 | 스기토 | 스기토 | 현존. 단, 2024/11/25, 고시가야 지점(구 스미토모신탁 점포) 내에 브랜치 인 브랜치 |
247 | 히가시무라야마 | 히가시무라야마 | 히가시무라야마 | 2002/5/7 |
248 | 쓰루마 | 쓰루마 | 쓰루마 | 2002/5/7 |
249 | 기타모토 | 기타모토 | 기타모토 | 2002/5/7 |
251 | 나고야 | 사카에 | 나고야 중앙 | 2002/5/7 |
261 | 오사카 | 미도스지 | 미도스지 | 2002/5/7 |
264 | 고베 | 고베 모토마치 | 고베 모토마치 | 2002/5/7 |
265 | 교토 | 가라스마도리 | 가라스마도리 | 2002/5/7 |
271 | 센다이 | 센다이 중앙 | 센다이 중앙 | 2002/5/7 |
272 | 소카신덴 | 소카신덴 | 소카신덴 | 2002/5/7 |
273 | 오사쿠 | 오사쿠 | 오사쿠 | 2002/5/7 |
274 | 다카오 | 다카오 | 다카오 | 2002/5/7 |
275 | 카모이 | 카모이 | 카모이 | 2002/5/7 |
276 | 히가시카와구치 | 히가시카와구치 | 히가시카와구치 | 2002/5/7 |
277 | 이치카와오노 | 이치카와오노 | 이치카와오노 | 2002/5/7 |
278 | 이치가오 | 이치가오 | 이치가오 | 2002/5/7 |
279 | 호야 | 호야 | 호야 | 2002/5/7 |
280 | 자마 | 자마 | 자마 | 2002/5/7 |
281 | 로쿠카이 | 로쿠카이 | 로쿠카이 | 2002/5/7 |
283 | 도요하루 | 도요하루 | 도요하루 | 2001/11/12 |
284 | 이쿠타 | 이쿠타 | 이쿠타 | 2002/5/7 |
5. 3. 관련 기업 영향
홋카이도척식은행(타쿠긴)의 파탄은 홋카이도를 기반으로 한 많은 기업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른바 '''타쿠긴 쇼크'''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도시 은행은 파산하지 않는다"는 안이한 믿음과 홋카이도 신문 등 지역 언론이 타쿠긴을 주요 스폰서로 두어 경영 실태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홋카이도 경제 전반에 신용 경색을 불러왔다.[9]타쿠긴 파탄 이후, 도내, 특히 지방 도시에서는 장기 자금 대출이나 대규모 설비 투자를 진행하는 은행이 사라져, 많은 기업들의 중장기 설비 투자가 위축되었고, 이는 지방 도시 쇠퇴와 홋카이도 경제 발전 저해로 이어졌다.
타쿠긴과 거래 관계에 있던 기업들의 구체적인 피해 사례는 다음과 같다.
기업명 | 피해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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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 전기(そうご電器) | 홋카이도 내 대형 가전 양판점이었으나, 타쿠긴 파탄을 기점으로 매출이 저조해져 2001년에 파산했다. |
니토리(니토리 홀딩스(ニトリホールディングス)) | 타쿠긴을 주거래 은행(メインバンク)으로 하여 전환사채형 신주인수권부 사채(転換社債型新株予約権付社債) 형태로 스위스 은행(スイス銀行)에서 약 50억엔의 융자를 받고 있었다. 타쿠긴과 주간사였던 야마이치 증권(山一證券)의 동시 파산으로 스위스 은행(スイス銀行)으로부터 잔액 일괄 청구를 받아 스미토모 신탁 은행(住友信託銀行)(현 미쓰이 스미토모 신탁 은행(三井住友信託銀行))에서 고금리 추가 차입을 해야 했다. 이후 무차입 경영을 관철하게 되었으나, 창업자 니토리 아키오(似鳥昭雄)와 경영진의 노력으로 현재는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
이하라 수산(井原水産) | 루모이시(留萌市)에 본사를 둔 명란젓 생산 대기업. 캐나다 사업 확장을 위해 타쿠긴에 융자를 의뢰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호쿠요 은행(北洋銀行)에 융자를 의뢰하여 성사되었고, 몇 달 후 타쿠긴이 파탄했다. |
나시오(ナシオ) | 원래 기타미시(北見市)에 본사를 두고 있었으나, 타쿠긴 파탄의 영향으로 기타미에서 철수하고 삿포로로 본사를 이전했다. |
카도하타 상점(角幡商店) | 아시베츠시(芦別市)에 본사를 둔 전통 있는 슈퍼마켓. 타쿠긴 파탄의 영향으로 도호쿠 랄즈(道北ラルズ)(현 도호쿠 아크스(道北アークス))에 매각되었다. |
소고(そごう) | 일본 흥업 은행(日本興業銀行), 일본 장기 신용 은행(日本長期信用銀行), 산와 은행(三和銀行) 등에 이은 대규모 융자처였으나, 장기 신용 은행 파탄에 따른 하자담보 조항(瑕疵担保条項)의 영향으로 금융 지원에 어려움을 겪어 2000년에 민사 재생법(民事再生法)을 신청하고 경영 파탄했다. 삿포로 에스타(札幌エスタ) 내 "삿포로 소고"는 불채산 점포로 폐점했고, 2001년에 빅카메라(ビックカメラ)가 입점했다. |
허드슨(ハドソン) | 삿포로시(札幌市) 도요히라구(豊平区) 히라기시에 본사를 둔 게임 메이커. 타쿠긴이 주거래 은행이었으나, 타쿠긴 파탄 후 경영이 악화되어 코나미(후의 코나미 홀딩스(コナミホールディングス)) 자회사가 되고 본사를 도쿄로 이전했다. 2012년 코나미 디지털 엔터테인먼트(コナミデジタルエンタテインメント)에 흡수 합병되어 소멸했다. |
이 외에도 토야 홈(土屋ホーム), 이와타 지사키 건설(岩田地崎建設), 이토구미 도건(伊藤組土建), 산아이 석유(三愛石油), 홋카이도 방송(北海道放送), 홋카이도 텔레비전 방송(北海道テレビ放送), 삿포로 텔레비전 방송(札幌テレビ放送), 그랑비스타 호텔 & 리조트(グランビスタ ホテル&リゾート), 도시바 호쿠토 전자(東芝), 오에논 홀딩스(オエノンホールディングス), 로지넷 재팬(ロジネットジャパン), 아크스 (홋카이도의 기업)(アークス) 등이 주요 융자 관계처로 언급되었다.
6. 사회 공헌 활동
홋카이도척식은행은 야구, 스키, 배구, 탁구 등 여러 스포츠 팀을 운영하며 사회 공헌 활동을 했다.[21] 특히 야구부는 '''탁신'''이라는 팀명으로 사회인 야구 팀을 운영하며 도시 대항 야구 대회 20회, 사회인 야구 일본 선수권 대회 10회 출전하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22] 스키 점프 선수단도 운영했다.[23]
6. 1. 스포츠 사업
야구, 스키, 배구, 탁구부 등 여러 팀이 활동했다.[21]팀명은 '''탁신'''으로 사회인 야구 팀을 운영했다.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20회, 사회인 야구 일본 선수권 대회에 10회 출전한 실적을 가지고 있다. 특히 1976년 제47회 도시 대항에서는 준우승, 1978년 제5회 일본 선수권에서는 우승이라는 성적을 거두었으며, 사회인 야구 홋카이도 5강 중 하나로 꼽혔다.
1996년 도시 대항 야구 대회를 마지막으로 "휴부"를 발표했다. 해당 대회의 홋카이도 예선에서 탁신 야구부는 예선 탈락하여 본 대회 출전은 무산되었고, 활동을 중지했다.[22] 이듬해 1997년 11월에 홋카이도척식은행 본체가 경영 파탄했다. 영업 양도처인 북양 은행・미쓰이 스미토모 신탁 은행 어느 쪽에도 사회인 야구팀은 존재하지 않아, 야구부 부활 가능성은 사라졌다.
홋카이도라는 지역 특성에 걸맞게, 실업 야구와 마찬가지로 "'''탁긴'''" 팀으로서 스키 점프 선수단이 있었다.[23]
7. 관련 인물
홋카이도척식은행에는 역대 은행장 외에도 여러 저명인사들이 재직했다.
- 모리분 주: 주국은행 은행장을 지냈으며, 홋카이도척식은행의 "중흥의 조"로 불린다.[23]
- 우치다 쇼렌: 수련 사범이자 일본 최초의 올림픽 수영 선수였다.[23]
- 고바야시 다키지: 소설가로 활동했다.[23]
- 오카베 다카노부: 1998년 나가노 올림픽 스키 점프 금메달리스트이다.[21]
- 가네코 쇼지: 1972년 삿포로 올림픽 스키 점프 70m급 은메달을 획득했으며, "히노마루 비행대" 중 한 명이다.[21]
- 야기 히로카즈: 1980년 레이크플래시드 올림픽 스키 점프 70m급 은메달리스트이다.[21]
- 사토 신이치: 전 프로 야구 선수(외야수)로, 야쿠르트에서 활동했으며 현재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2군 코치이다.[23]
- 요시다 슈지: 전 프로 야구 선수(투수)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오릭스에서 활동했으며 현재 야구 해설가이다.[23]
- 시마다 슌페이: 전 오비히로 지점장으로, 호쿠요 은행 상무 이사를 거쳐 이시야 제과, 사자에 식품 사장을 역임했다.[23]
- 나카마쓰 요시하루: 전 오타루 지점장으로, 호쿠요 은행 오타루 중앙 지점장, 오타루 시장을 역임했다.[23]
- 이시이 준지: 호쿠요 은행 은행장, 제2지방은행협회 회장을 역임했다.[23]
- 다카기 히로토시: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23]
7. 1. 역대 은행장
대만총독부 민정국장야마가타현 지사
조선은행 총재
법학박사 미노베 다쓰키치의 형
조선은행 이사
조선은행 총재
대만총독부 재무국장
만주흥업은행 총재
홋카이도 소다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