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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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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아론은 기독교의 각 교파에서 마리아(예수의 어머니)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신학적 입장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영지주의에 대항하고 박해 시기 신앙의 중심 역할을 했다.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마리아를 '테오토코스'(하느님의 어머니)로 칭하면서 마리아론이 발전했으며,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어머니, 평생 동정녀, 원죄 없는 잉태, 성모 승천의 4대 교리를 공표했다. 동방 정교회는 테오토코스 칭호를 중심으로 마리아를 존경하며, 개신교는 마리아를 예수의 육신을 잉태한 여인이자 신실한 여인으로 여기지만, 마리아 숭배는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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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론
일반 정보
성모 마리아 머리글
성모 마리아
연대기
마리아론적 관점
가톨릭 마리아론
마리아 교의
문화 속의 마리아

2. 마리아론의 발전과 영향

분화된 기독교의 각 교파에서 마리아에 대한 생각은 서로 다르며, 그 차이는 매우 크다. 많은 경우에서 마리아에 대한 생각의 역사는 도전을 받고 변형되어 왔지만, 그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도 그 생각은 유지되었다. 성인들의 저술에 묘사된 "성모 발현"은 신학자와 로마 교황의 회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수 세기를 거치면서, 이처럼 가톨릭 교회의 마리아 신학은 「sensus fidelium영어」(신앙의 감각)에서 이 "성모 발현"에 이르는 다양한 압력에 의해 형태를 바꿔왔다.

4세기경, 로마 카타콤바의 벽면에 그려진 초기 성모자 성화.


아순타(Assunta) 성모 마리아상 몰타 아타르드(Attard)

2. 1. 신약성경 기록

신약성경에서 마리아는 요셉과 함께 예수를 낳고, 기르고, 만나는 인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록한 복음서에 등장한다.[15]

2. 2. 영지주의에 대항

초대교회는 예수가 신성과 인성을 지닌 존재로서 마리아가 출산하였다는 성경의 기록과 전승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고,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예수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강화하였다. 마리아가 그리스도론의 중요한 인물로 존중하였다. 예수가 거룩한 보이는 영이었다는 영지주의의 주장은 몸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으로서 예수 존재를 거부하였다.

2. 3. 박해 시기

초기 기독교의 박해 시기인 2-3세기에는 순교자에 대한 존경이 신앙에 가장 두드러졌다.[58] 순교자들에 대한 공경과 함께 박해기의 기독교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예수 그리스도를 낳아 구약과 신약 및 대망(待望)과 성취(成就)에서 역할을 하였다고 보았다.[58] 이탈리아 로마의 카타콤바에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린 프레스코화가 그려졌으며,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청한 가장 오래된 기도는 250년경에 작성된 ‘성모께 보호를 청하는 기도(sub tuum praesidium)’이다.[58] 이러한 점을 볼 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마리아가 고통받는 인류와 임금들의 임금이자 심판자인 아들 예수 사이를 중개하는 연민 어린 존재로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8]

2. 4. 보편교회 공인 이후

313년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성모 마리아는 '테오토코스'라는 칭호를 받았다.[38][39] 이는 마리아가 신성 출산을 했다는 의미로, 예수가 신성을 지니고 탄생했음을 확인하는 교의였다.[59] 네스토리우스파마리아를 '크리스토토코스'(Christotokos)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공의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40] 공의회는 마리아를 "테오토코스"로 부르는 것을 부정하면 예수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게 된다고 보았다.

에페소스 공의회성모자상도 승인했다.[41] 이미 로마의 지하 묘지에는 성모자상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을 정도로 마리아에 대한 신심은 널리 퍼져 있었다. 초기 교부들은 마리아를 '새로운 하와'로 간주했는데, 이는 하와가 하느님께 불순종한 반면 마리아는 순종했기 때문이다.[41] 마리아는 최초의 그리스도인이자 성인이며, 예수의 어머니라는 점에서 왕이자 심판자이신 아들 예수와 고뇌하는 인류를 이어주는 자비로운 중재자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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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에 들어서면서 성모 마리아의 생애를 다룬 전승과 유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성모 마리아 신심이 대중적으로 증대되기 시작했다.[60]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을 비롯하여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성당들이 본격적으로 건립되기 시작했다.[60] 6세기부터 비잔티움 궁정의 공식적인 보호와 후원 아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성모 마리아 신심이 화려하게 꽃피웠다.[59]

7세기 초, 609년 판테온에서 거행된 "성모 마리아와 순교자들"(Santa Maria ad Martyres) 재봉헌식,[44]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인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 등에서 마리아 신앙의 예를 찾을 수 있다.[45] 교황 세르지오 1세(687-701)는 최초로 로마 전례력 안에 성모 마리아의 축일을 포함시켰다.[61]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마리아하와를 대비시켜 “하와의 불순종이 묶어놓은 매듭을 마리아의 순명이 풀어 주었고, 하와가 불신으로 맺어놓은 것을 마리아가 믿음으로 풀었다.”라고 하였으며, 마리아를 ‘새 하와’ 또는 ‘제2의 하와’라고 불렀다.[62]하와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세상에 죽음과 불행을 가져왔으나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생명의 원천인 그리스도를 낳고, 마침내 세상에 구원과 축복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2. 5. 교회 대분열 이후 서방교회

교회 대분열 이후 서부 유럽의 서방교회에서 중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성모 신심은 시리아의 성 에프렘,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등 성모 신심가들의 영향을 받아 더욱 성장하여 한 차원 크게 발전하였다.[63] 성모송과 같이 마리아의 전구를 청하는 기도문들이 생겨나고, 수도원 등지에서 아베 마리아, 살베 레지나 등의 마리아를 찬미하는 성격을 띤 단선율 성가가 작사 작곡되었다. 그리하여 성모 신심 행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대중 사회에 굳건하게 자리잡았다.

르네상스 시대에 서방교회에서는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거장들의 손에 의해 마리아를 표현한 명작들이 무수히 탄생함으로써 마리아와 관련된 미술이 크게 성장하였다.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종교를 주제로 한 그림과 건축 양식을 법적으로 규정하였다. 그 결과, 바로크 시기에 마리아를 다룬 미술과 마리아론이 크게 발전하였다.

16세기 서방교회 종교개혁 시대에 개혁찬성파와 반대파가 나뉘며 마리아론에 대한 전면적 비판과 옹호가 대립했다. 개혁찬성파(현재, 개신교)는 미신적 요소와 비성서적 내용을 비판했고, 교황 지지 세력이었던 개혁반대파(현재, 천주교)는 신심의 중요성과 교황령을 근거로 옹호하였다. 이후 마리아론은 개혁반대파의 중요한 정체성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천주교회에서는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 해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천주교 국가의 연합 함대가 이를 마리아의 공적으로 돌린 것을 시점으로, 잠시 주춤했던 성모 신심을 강화하였다.[63] 마리아를 주제로 한 바로크 문학은 예상 외로 크게 성장하였다. 17세기에 한해서만 마리아론을 다룬 작품이 500권 이상 출판되었다.[64]

중세 시대에는 "새로운 이브"로서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앙이 여성의 지위 향상을 촉진했다. 여성은 이브의 딸로서 멸시받아 왔지만, 숭배의 대상이자 영감을 가진 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중세 시대에 기사도가 발달하면서 이에 따라 여성에게 경의를 표하는 개념이 나타났고, 이어서 기사도는 여성에 대한 경의에 헌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사도의 발달은 성모 마리아에 대한 생각에서 유래했을 뿐만 아니라, 이에 기여하기도 했다.

중세의 성모 숭배는 여성, 특히 귀족 사회 이외의 일반 서민적인 여성이 멸시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 시대에는 여성이 악의 근원으로 여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신과의 중재자로서의 마리아가 인류의 의지처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마리아 신학의 발달과 여성에 대한 태도의 변화는 서로 상응하며, 서로 공통적인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다.

2. 6. 종교개혁 시대

존 위클리프는 그의 초기 설교에서 "마리아의 도움 없이는 천국의 보상을 얻는 것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인류 전체에서 성별, 나이, 신분, 지위와 관계없이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청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라며 후기 중세의 마리아 신앙 정신을 반영했다.[2]

스트라스부르의 생 피에르 르 줴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루터교회에 있는 마리아 조각상


마르틴 루터는 마리아와 성도에 관한 문제에 대해 로마 가톨릭교회와 논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에큐메니컬 공의회의 마리아 관련 교리와 교회의 교리를 지지했다. 그는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이며 테오토코스 즉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믿음을 굳게 지켰다.[3] 특히 루터가 1854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원죄 없이 잉태되심이 교리로 제정되기 300년 전에 그 견해를 확고히 지지했다는 주장이 있다. 다른 이들은 루터가 말년에 당시 교회에서 정의되지 않았던 원죄 없이 잉태되심에 대한 입장을 바꾸어 생애 동안 마리아의 무죄를 유지했다고 주장한다.[4] 마리아 승천에 관해서는, 성경에 그것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고 말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마리아와 성도들이 죽음 이후에도 살아있다는 믿음이었다.[5] 루터는 마리아를 존경했지만, 인간에게서 보이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높은 존경과 다른 피조물에게 행해지는 종교적 봉사 사이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것에 대해 "교황주의자"를 비판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 축일 기념과 특히 마리아와 다른 세상을 떠난 성인들에게 드리는 중재 요청을 우상 숭배로 여겼다.[7]

독일 뤼벡 루터교 대성당의 성모 마리아 조각상


장 칼뱅은 마리아의 평생 동정과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제한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교황주의자"들의 과도한 숭배,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드려야 할 존경에 대해 극도로 반대했다.[8] 칼뱅은 마리아가 신자들의 변호인이 될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녀 또한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9] 만약 가톨릭 교회가 그녀를 하늘의 여왕으로 칭송한다면, 그것은 신성 모독이며 그녀 자신의 의도와 모순된다. 왜냐하면 그녀가 칭송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칭송받아야 하기 때문이다.[10] 칼빈은 에페소스 공의회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의 "미신적" 사용 가능성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11]

2. 7. 근대 기독교회

근대 동방교회 지역에서는 보편교회 범주를 따르며, 테오토코스 이외에 교리적 선언은 없고, 교리적 추가 사항도 없다. 서방교회 지역에서 개신교회 역시 보편교회 범주를 지키며, 테오토코스 이상의 그리스도론 관련 교리적 연구는 없고, 일부 급진적 개신교단에서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그러나 서방교회 지역의 천주교에서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며, 마리아론은 교리와 신심에서도 중요한 요소이다. 19세기에 1854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의가 선언했다. 20세기에는 교황 비오 12세성모 승천을 교의로 선포하였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마리아에게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헌정했다.

3. 천주교회의 마리아론

천주교회에는 성모 마리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4대 교의가 교회 교도권에 의해 선포되었다.

명칭교의 선언교의 내용
하느님의 어머니에페소 공의회 (431년)마리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된 하느님의 아들이다.
평생 동정녀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553년)마리아는 동정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하였으며, 예수를 낳을 때도 동정이었으며, 예수를 낳은 뒤에도 계속 동정으로 살았다.
원죄 없는 잉태교황 비오 9세 (1854년)마리아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 원죄 없이 잉태되어 태어났다.
성모 승천교황 비오 12세 (1950년)마리아는 지상 생애를 마친 다음, 하느님에 의해 영혼과 육신이 함께 하늘로 들어올림을 받았다.



부궤로의 작품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성모자.’


성모 마리아가 테오토코스, 즉 하느님의 어머니(또는 천주의 성모)라는 교리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선포된 교의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호칭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마리아가 낳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인간임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예수가 참된 하느님임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으로는 한처음부터 성부와 같은 몸으로 하느님의 제2위(성자)이며,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성령으로 인하여 스스로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서 인성을 취하였다. 이것이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이 교의가 확정되기까지는 커다란 신학적 논쟁을 거쳐야 했다. 4세기 말 기독교 신학의 주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로 나뉘어 서로 쌍벽을 이루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신성과 인성의 결합에서 신성을 강조하였고, 안티오키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하면서 인성과 신성을 나란히 놓고 보았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표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성 치릴로였고, 안티오키아 학파의 대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였다. 성 치릴로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라고 주장하였고,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어머니(크리스토토코스)’라고 주장하였다. 성 치릴로는 예수의 신성을,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위격을 신격과 인격으로 보기 때문에 마리아는 인간 그리스도의 어머니일 뿐이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대하여 성 치릴로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주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지니지만 말씀 안에서 위격적 일치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논쟁은 평신도들까지도 그 과정에 휘말려들 정도로 매우 격렬하게 불타올랐다. 결국 교황 첼레스티노 1세가 하느님의 어머니 논쟁을 진정시키기 위해 431년에 에페소 공의회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이 논의 끝에 동정 마리아는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함으로써 네스토리우스는 에페소 공의회에서 단죄되고 논쟁은 성 치릴로의 승리로 끝났다. 이에 신자들은 기뻐하며 교부들을 떠메고 횃불을 흔들며 거리를 행진했다.

에페소 공의회의 이 교의를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재확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에 있어서 세기 이전에 성부에게서 태어나셨다. 그러나 같은 그분이 인성에 있어서 마지막날에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

이러한 가르침은 그 후 여러 공의회를 통하여 재확인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다시 확인되었다.

:동정 마리아께서는 천사의 아룀을 들으시고 하느님의 말씀(성자)을 마음과 몸에 받아들이시어 생명의 생명을 세상에 낳아 주셨으므로 하느님이신 구세주의 참 어머니로 인정받으시고 공경을 받으시는 것이다. 마리아께서는 아드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뛰어나게 구원을 받으시고 아드님과 불가분의 관계로 긴밀히 결합되셨으며 천주 성자의 어머니가 되는 직무와 품위를 갖추시었다.[66]

그러므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교의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다 보니 자연히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것이 부각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는데, 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이기 때문에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교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전제한다.[67] 가톨릭교회에서는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마리아의 평생 동정은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기 전에도 동정이었으며, 예수를 낳는 중에도 동정이었으며, 예수를 낳은 후에도 동정이었다는 가톨릭 교회의 교의이다. 여기서 잉태 이전의 동정성은 남성의 활동 없이 잉태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출산시의 동정성이 의미하는 것은 출산의 고통이나 동정성의 파괴 없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출산 후의 동정성은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출산 후에도 마리아가 인간적인 결혼 생활을 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평생 동정인 마리아 교의는 마리아가 인생 전반에 걸쳐 ‘영원한 동정녀(ἀειπάρθενος)’였으며, 그녀의 유일한 소생은 예수 한 사람뿐이었으며, 그마저도 동정의 몸으로 기적적으로 잉태하여 낳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마리아의 동정성에 관해서는 이미 초대 교회 때부터 믿음의 내용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교회 초창기부터 마리아의 이름은 언제나 ‘동정녀’라는 수식어구와 함께 나타났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과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도 마리아를 ‘동정녀’라고 불렀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탈출기 3장 2절을 예로 들며, 가시덤불이 불에 휩싸였음에도 타지 않은 것처럼 마리아도 아기를 낳았지만, 동정성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시리아의 성 에프렘은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진주를 비유로 설명하였다. 조개는 진주가 될 돌을 받아들일 때에도 그리고 그 돌이 진주가 되어 내어 놓을 때에도 손상을 받지 않는다. 마리아도 이와 비슷한 이치로 예수를 잉태할 때와 낳을 때에 아무런 고통도 손상도 입지 않을 수 있다고 보았다. 성 프로클로는 “만일 구세주의 어머니께서 동정이 아니셨다면, 그분께서 낳으신 구세주는 단지 인간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탄생의 신비는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구세주를 낳으시고 낳으신 후에도 마리아께서 계속 동정으로 계셨다면, 어찌 이것이 하느님께는 더 영광이 되고 더 훌륭한 신비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65]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의 육신이 참으로 육신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분께서는 여인으로부터 태어나셨다. 그러나 당신의 신성을 분명히 드러내시기 위하여 그분은 동정녀로부터 태어나셨다.”고 하였다. 성 예로니모는 예수가 동정남으로 살았듯이 마리아 또한 동정녀로 평생을 살았다고 말하였다.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마리아의 예수 출산전 동정성을 분명하게 언급한 구절은 마태오 복음서 1장 24절~25절이다. 마리아의 잉태 이전의 동정성과 출산 중의 동정성에 대해서는 2세기의 문헌인 야고보의 원복음서를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의해 미리 선택되었고,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것은 남자와의 관계없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출산 때도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동정성이 보존되었다고 나온다. 물론 이 이야기는 다소 전설적인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그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마리아의 평생 동정에 대한 사람들의 확신을 문학적인 표현을 빌어서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 교리는 점차 발전하여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553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셨다.”고 고백함으로써 교회의 가르침으로 공식 선포되었다. 그리고 649년 라테라노 시노드는 “성모님은 해산 전에, 해산 중에, 그리고 해산 뒤에도 동정녀이셨다.”는 말로써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을 더욱 강조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이런 교리를 다시 확인하였다.

원죄 없는 잉태는 '''무염시태(無染始胎)'''라고도 하는데, 1854년 교황 비오 9세가 회칙에 의해 교의화하였다. 하느님이 마리아를 죄의 영향 아래 놓이지 않게끔 태중에서부터 보호했다는 가톨릭교회의 교의로, 모든 인간은 원조인 아담과 하와의 영향으로 잉태된 순간부터 원죄를 물려받고 태어나게 되었지만, 마리아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인간 중에서는 유일무이하게 어머니의 태 안에 잉태된 바로 그 순간부터 원죄에 조금도 물듦이 없이 완전하게 보전되었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이며 지극히 거룩한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를 뱃속에 잉태하기 위해서는 그녀 또한 조그마한 흠도 티도 없이 깨끗해야 하고, 본죄 뿐만이 아니라 원죄의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는 또한 마리아는 일생동안 본죄 또한 저지르지 않았다고 믿는다.

파리노스의 작품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가톨릭교회는 동정 마리아 역시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리아 또한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단지 마리아는 다른 방식으로 구원받았을 뿐이다. 말하자면 ‘보다 숭고한 방식,’ 즉 ‘선취에 의한 구원’이다. 가령 사람은 병에 걸리면 수술을 받거나 약을 복용함으로써 치료받을 수 있으며, 또한 예방접종을 받아 아예 병에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 원죄 또한 마찬가지이다. 마리아의 경우는 후자에 속하며, 그리하여 그녀는 사탄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가톨릭교회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수태 사실을 전하기에 앞서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68]라고 한 인사말에서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의의 근거를 찾아냈다. 예수가 인류를 위해 은총을 획득하기 수년 전에 한 이 천사의 인사에서 알 수 있듯이, 마리아는 이미 ‘은총이 가득한 이’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교회는 아담의 타락 이후에 하느님이 원조들에게 죄를 짓게 한 사탄에게 저주를 내리며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리라.”[69]라고 한 말에서도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의의 근거를 보았다. 이 말은 여자의 후손, 즉 동정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의 왕국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런데 사탄이 패배하도록 예수의 구원 사업에 전적으로 협력하였던 마리아가 한순간이나마 사탄의 영향을 받아 죄의 노예로서 원죄에 물들었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리하여 하느님에 의해 계획된 동정 마리아와 뱀 사이의 적대는 죄에 대한 마리아의 승리로서 원죄 없는 잉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학자들 사이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는 지속적으로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믿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예수의 어머니를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예수에게 죄를 짓는 불경한 행위라고 말하였으며,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의 영예는 당신 모친이 범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조차 허락하시지 않는다.”고 하였다.[70] 둔스 스코투스는 마리아는 아담의 후손이므로 응당 원죄의 죄과를 받아야 했지만 하느님이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마리아를 원죄에서 면제해 주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고 하는 사실은 성모님이 예수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구원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19세기까지 이 문제는 신학자들의 연구 대상으로 남았으며, 교황들은 중립적 자세를 취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854년 교황 비오 9세가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을 통해 성모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어 태어났다는 것을 아래와 같은 말로 보편 교회 전체가 믿을 교의로 장엄하게 선포하였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은 12월 8일로 제정되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셨다.

그리고 1858년 루르드에 성모 발현이 일어나면서 이 교의는 사람들에게 재차 확인되었다(루르드의 성모).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마리아는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모두 18회 발현하였는데, 마지막 발현 때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다.”라고 말하였다.

귀도 레니의 작품 ‘성모 승천.’


가톨릭교회에서는 1950년 모든 성인 대축일에 교황 비오 12세가 사도헌장을 통해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동정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다음 육신과 영혼이 함께 하늘나라로 불러올림을 받아 아들 예수와 함께 하늘나라에 영원히 머물러 있다는 내용의 성모 승천을 교의로 선포하였다. 다른 말로는 '''몽소승천(蒙召昇天)'''이라고도 한다. 가톨릭교회에서는 8월 15일을 성모 승천 대축일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죽은 인간들의 육신 부활은 세말의 공심판이 도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마리아의 육신은 원죄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곧장 하늘나라로 갈 수 있었다. 성모 승천 교의는 마리아를 새 하와로 보는 성경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만약 마리아가 죄를 정복한 새 아담의 승리를 공유하는 새 하와라면, 죽음과 육신의 부패를 정복한 새 아담의 승리 또한 공유해야 마땅하다. 또한 하느님에 의해 죄의 오염으로부터 보호받아 성별된 육신이 부패된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처사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자신의 왕국에 새로운 계약궤를 가지고 갔다. 요한 묵시록에서 저자 요한은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나는 환시[71]를 목격한 후에 한 여인을 보게 된다.[72] 요한이 목격한 이 계약궤와 여인은 새 하와이자 교회의 표상인 동정 마리아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가톨릭교회는 묵시록의 이 구절이 마리아의 승천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동방 교회에서는 리비아의 테오테크노가 강론을 통해 마리아는 육신과 영혼이 모두 하늘로 들어올림을 받았다고 강조하면서, 십자가상에서 오른편의 회개한 도적에게 한마디 말로써 낙원을 선사한 예수가 자신이 태중에 머물렀던 어머니에게 어찌 낙원을 선사하지 않겠느냐는 논리를 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제르마노는, 마리아의 운명은 그리스도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에 그 유사성 때문에라도 죽은 다음에 부활하여 승천해야만 하며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예수의 보답이며 사랑이라고 주장하였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마리아의 승천을 그녀의 동정성의 신비와 연결시켰다. 크레타의 안드레아는 마리아의 빈 무덤을 전하면서 순결한 여인이었던 마리아가 죄의 벌로 죽음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며 죽음 후 하늘에 올랐음을 주장하였다. 서방 교회에서는 투르의 성 그레고리오가 처음으로 성모 승천에 관해 언급했는데, 마리아의 임종으로 모든 사도들이 모였고 마리아의 육체는 무덤에 안장된 다음 영혼과 분리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중세시대에는 성모 승천에 관한 라틴어 문헌들이 많이 속출하였다. 특히 8-9세기경 성 아우구스티노의 서한에 의해 성모 승천은 신학적인 근거를 갖고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성 대 알베르토,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 보나벤투라, 교황 베네딕토 14세에 의해 성모 승천 사실이 끊임없이 재확인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1870년부터 교황들은 성모 승천을 교의로 공식화하자는 요청을 끊임없이 받게 되었다.[73] 그리하여 1950년 모든 성인 대축일 교황 비오 12세는 사도헌장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통해 성모 승천을 다음과 같이 장엄하게 교의로 선포하였다.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셨던,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신 다음,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상의 영광으로 들어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계시된 신앙의 진리다.

3. 1. 마리아에 관한 교의

천주교회에는 성모 마리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4대 교의가 교회 교도권에 의해 선포되었다.

명칭교의 선언교의 내용
하느님의 어머니에페소 공의회 (431년)마리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된 하느님의 아들이다.
평생 동정녀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553년)마리아는 동정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하였으며, 예수를 낳을 때도 동정이었으며, 예수를 낳은 뒤에도 계속 동정으로 살았다.
원죄 없는 잉태교황 비오 9세 (1854년)마리아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 원죄 없이 잉태되어 태어났다.
성모 승천교황 비오 12세 (1950년)마리아는 지상 생애를 마친 다음, 하느님에 의해 영혼과 육신이 함께 하늘로 들어올림을 받았다.


3. 1. 1.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가 테오토코스, 즉 하느님의 어머니(또는 천주의 성모)라는 교리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선포된 교의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호칭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마리아가 낳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인간임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예수가 참된 하느님임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으로는 한처음부터 성부와 같은 몸으로 하느님의 제2위(성자)이며,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성령으로 인하여 스스로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서 인성을 취하였다. 이것이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이 교의가 확정되기까지는 커다란 신학적 논쟁을 거쳐야 했다. 4세기 말 기독교 신학의 주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로 나뉘어 서로 쌍벽을 이루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신성과 인성의 결합에서 신성을 강조하였고, 안티오키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하면서 인성과 신성을 나란히 놓고 보았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표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성 치릴로였고, 안티오키아 학파의 대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였다. 성 치릴로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라고 주장하였고,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어머니(크리스토토코스)’라고 주장하였다. 성 치릴로는 예수의 신성을,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위격을 신격과 인격으로 보기 때문에 마리아는 인간 그리스도의 어머니일 뿐이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대하여 성 치릴로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주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지니지만 말씀 안에서 위격적 일치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 논쟁은 평신도들까지도 그 과정에 휘말려들 정도로 매우 격렬하게 불타올랐다. 결국 교황 첼레스티노 1세가 하느님의 어머니 논쟁을 진정시키기 위해 431년에 에페소 공의회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이 논의 끝에 동정 마리아는 참으로 하느님의 어머니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함으로써 네스토리우스는 에페소 공의회에서 단죄되고 논쟁은 성 치릴로의 승리로 끝났다. 이에 신자들은 기뻐하며 교부들을 떠메고 횃불을 흔들며 거리를 행진했다.

에페소 공의회의 이 교의를 451년 칼케돈 공의회가 재확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성에 있어서 세기 이전에 성부에게서 태어나셨다. 그러나 같은 그분이 인성에 있어서 마지막날에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

이러한 가르침은 그 후 여러 공의회를 통하여 재확인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다시 확인되었다.

:동정 마리아께서는 천사의 아룀을 들으시고 하느님의 말씀(성자)을 마음과 몸에 받아들이시어 생명의 생명을 세상에 낳아 주셨으므로 하느님이신 구세주의 참 어머니로 인정받으시고 공경을 받으시는 것이다. 마리아께서는 아드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뛰어나게 구원을 받으시고 아드님과 불가분의 관계로 긴밀히 결합되셨으며 천주 성자의 어머니가 되는 직무와 품위를 갖추시었다.[66]

그러므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교의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다 보니 자연히 마리아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것이 부각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는데, 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이기 때문에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교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전제한다.[67] 가톨릭교회에서는 1월 1일을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3. 1. 2. 마리아의 평생 동정

마리아의 평생 동정은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기 전에도 동정이었으며, 예수를 낳는 중에도 동정이었으며, 예수를 낳은 후에도 동정이었다는 가톨릭 교회의 교의이다. 여기서 잉태 이전의 동정성은 남성의 활동 없이 잉태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출산시의 동정성이 의미하는 것은 출산의 고통이나 동정성의 파괴 없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출산 후의 동정성은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출산 후에도 마리아가 인간적인 결혼 생활을 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평생 동정인 마리아 교의는 마리아가 인생 전반에 걸쳐 ‘영원한 동정녀(ἀειπάρθενος)’였으며, 그녀의 유일한 소생은 예수 한 사람뿐이었으며, 그마저도 동정의 몸으로 기적적으로 잉태하여 낳은 것이라고 가르친다.

마리아의 동정성에 관해서는 이미 초대 교회 때부터 믿음의 내용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래서 교회 초창기부터 마리아의 이름은 언제나 ‘동정녀’라는 수식어구와 함께 나타났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과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도 마리아를 ‘동정녀’라고 불렀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탈출기 3장 2절을 예로 들며, 가시덤불이 불에 휩싸였음에도 타지 않은 것처럼 마리아도 아기를 낳았지만, 동정성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시리아의 성 에프렘은 마리아의 평생 동정성을 진주를 비유로 설명하였다. 조개는 진주가 될 돌을 받아들일 때에도 그리고 그 돌이 진주가 되어 내어 놓을 때에도 손상을 받지 않는다. 마리아도 이와 비슷한 이치로 예수를 잉태할 때와 낳을 때에 아무런 고통도 손상도 입지 않을 수 있다고 보았다. 성 프로클로는 “만일 구세주의 어머니께서 동정이 아니셨다면, 그분께서 낳으신 구세주는 단지 인간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탄생의 신비는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구세주를 낳으시고 낳으신 후에도 마리아께서 계속 동정으로 계셨다면, 어찌 이것이 하느님께는 더 영광이 되고 더 훌륭한 신비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65]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의 육신이 참으로 육신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분께서는 여인으로부터 태어나셨다. 그러나 당신의 신성을 분명히 드러내시기 위하여 그분은 동정녀로부터 태어나셨다.”고 하였다. 성 예로니모는 예수가 동정남으로 살았듯이 마리아 또한 동정녀로 평생을 살았다고 말하였다.

신약성경을 살펴보면, 마리아의 예수 출산전 동정성을 분명하게 언급한 구절은 마태오 복음서 1장 24절~25절이다. 마리아의 잉태 이전의 동정성과 출산 중의 동정성에 대해서는 2세기의 문헌인 야고보의 원복음서를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의해 미리 선택되었고,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것은 남자와의 관계없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출산 때도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동정성이 보존되었다고 나온다. 물론 이 이야기는 다소 전설적인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그 당시에 널리 퍼져 있던 마리아의 평생 동정에 대한 사람들의 확신을 문학적인 표현을 빌어서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 교리는 점차 발전하여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553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며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셨다.”고 고백함으로써 교회의 가르침으로 공식 선포되었다. 그리고 649년 라테라노 시노드는 “성모님은 해산 전에, 해산 중에, 그리고 해산 뒤에도 동정녀이셨다.”는 말로써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을 더욱 강조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이런 교리를 다시 확인하였다.

3. 1. 3. 원죄 없는 잉태

원죄 없는 잉태는 '''무염시태(無染始胎)'''라고도 하는데, 1854년 교황 비오 9세가 회칙에 의해 교의화하였다. 하느님이 마리아를 죄의 영향 아래 놓이지 않게끔 태중에서부터 보호했다는 가톨릭교회의 교의로, 모든 인간은 원조인 아담과 하와의 영향으로 잉태된 순간부터 원죄를 물려받고 태어나게 되었지만, 마리아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인간 중에서는 유일무이하게 어머니의 태 안에 잉태된 바로 그 순간부터 원죄에 조금도 물듦이 없이 완전하게 보전되었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이며 지극히 거룩한 존재인 예수 그리스도를 뱃속에 잉태하기 위해서는 그녀 또한 조그마한 흠도 티도 없이 깨끗해야 하고, 본죄 뿐만이 아니라 원죄의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는 또한 마리아는 일생동안 본죄 또한 저지르지 않았다고 믿는다.

가톨릭교회는 동정 마리아 역시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리아 또한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단지 마리아는 다른 방식으로 구원받았을 뿐이다. 말하자면 ‘보다 숭고한 방식,’ 즉 ‘선취에 의한 구원’이다. 가령 사람은 병에 걸리면 수술을 받거나 약을 복용함으로써 치료받을 수 있으며, 또한 예방접종을 받아 아예 병에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 원죄 또한 마찬가지이다. 마리아의 경우는 후자에 속하며, 그리하여 그녀는 사탄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가톨릭교회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수태 사실을 전하기에 앞서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68]라고 한 인사말에서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의의 근거를 찾아냈다. 예수가 인류를 위해 은총을 획득하기 수년 전에 한 이 천사의 인사에서 알 수 있듯이, 마리아는 이미 ‘은총이 가득한 이’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교회는 아담의 타락 이후에 하느님이 원조들에게 죄를 짓게 한 사탄에게 저주를 내리며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리라.”[69]라고 한 말에서도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의의 근거를 보았다. 이 말은 여자의 후손, 즉 동정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의 왕국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런데 사탄이 패배하도록 예수의 구원 사업에 전적으로 협력하였던 마리아가 한순간이나마 사탄의 영향을 받아 죄의 노예로서 원죄에 물들었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리하여 하느님에 의해 계획된 동정 마리아와 뱀 사이의 적대는 죄에 대한 마리아의 승리로서 원죄 없는 잉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학자들 사이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는 지속적으로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믿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예수의 어머니를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예수에게 죄를 짓는 불경한 행위라고 말하였으며,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의 영예는 당신 모친이 범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조차 허락하시지 않는다.”고 하였다.[70] 둔스 스코투스는 마리아는 아담의 후손이므로 응당 원죄의 죄과를 받아야 했지만 하느님이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마리아를 원죄에서 면제해 주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고 하는 사실은 성모님이 예수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구원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19세기까지 이 문제는 신학자들의 연구 대상으로 남았으며, 교황들은 중립적 자세를 취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854년 교황 비오 9세가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을 통해 성모 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되어 태어났다는 것을 아래와 같은 말로 보편 교회 전체가 믿을 교의로 장엄하게 선포하였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은 12월 8일로 제정되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셨다.

그리고 1858년 루르드에 성모 발현이 일어나면서 이 교의는 사람들에게 재차 확인되었다(루르드의 성모).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마리아는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모두 18회 발현하였는데, 마지막 발현 때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다.”라고 말하였다.

3. 1. 4. 성모 승천



가톨릭교회에서는 1950년 모든 성인 대축일에 교황 비오 12세가 사도헌장을 통해 그리스도의 어머니인 동정 마리아가 지상 생애를 마친 다음 육신과 영혼이 함께 하늘나라로 불러올림을 받아 아들 예수와 함께 하늘나라에 영원히 머물러 있다는 내용의 성모 승천을 교의로 선포하였다. 다른 말로는 '''몽소승천(蒙召昇天)'''이라고도 한다. 가톨릭교회에서는 8월 15일을 성모 승천 대축일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죽은 인간들의 육신 부활은 세말의 공심판이 도래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마리아의 육신은 원죄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에 곧장 하늘나라로 갈 수 있었다. 성모 승천 교의는 마리아를 새 하와로 보는 성경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만약 마리아가 죄를 정복한 새 아담의 승리를 공유하는 새 하와라면, 죽음과 육신의 부패를 정복한 새 아담의 승리 또한 공유해야 마땅하다. 또한 하느님에 의해 죄의 오염으로부터 보호받아 성별된 육신이 부패된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처사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자신의 왕국에 새로운 계약궤를 가지고 갔다. 요한 묵시록에서 저자 요한은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가 나타나는 환시[71]를 목격한 후에 한 여인을 보게 된다.[72] 요한이 목격한 이 계약궤와 여인은 새 하와이자 교회의 표상인 동정 마리아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가톨릭교회는 묵시록의 이 구절이 마리아의 승천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동방 교회에서는 리비아의 테오테크노가 강론을 통해 마리아는 육신과 영혼이 모두 하늘로 들어올림을 받았다고 강조하면서, 십자가상에서 오른편의 회개한 도적에게 한마디 말로써 낙원을 선사한 예수가 자신이 태중에 머물렀던 어머니에게 어찌 낙원을 선사하지 않겠느냐는 논리를 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제르마노는, 마리아의 운명은 그리스도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에 그 유사성 때문에라도 죽은 다음에 부활하여 승천해야만 하며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예수의 보답이며 사랑이라고 주장하였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마리아의 승천을 그녀의 동정성의 신비와 연결시켰다. 크레타의 안드레아는 마리아의 빈 무덤을 전하면서 순결한 여인이었던 마리아가 죄의 벌로 죽음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며 죽음 후 하늘에 올랐음을 주장하였다. 서방 교회에서는 투르의 성 그레고리오가 처음으로 성모 승천에 관해 언급했는데, 마리아의 임종으로 모든 사도들이 모였고 마리아의 육체는 무덤에 안장된 다음 영혼과 분리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중세시대에는 성모 승천에 관한 라틴어 문헌들이 많이 속출하였다. 특히 8-9세기경 성 아우구스티노의 서한에 의해 성모 승천은 신학적인 근거를 갖고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성 대 알베르토,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 보나벤투라, 교황 베네딕토 14세에 의해 성모 승천 사실이 끊임없이 재확인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1870년부터 교황들은 성모 승천을 교의로 공식화하자는 요청을 끊임없이 받게 되었다.[73] 그리하여 1950년 모든 성인 대축일 교황 비오 12세는 사도헌장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통해 성모 승천을 다음과 같이 장엄하게 교의로 선포하였다.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셨던,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신 다음,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상의 영광으로 들어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계시된 신앙의 진리다.

4. 동방 정교회의 마리아론

동방 정교회의 신학에서는 마리아를 테오토코스, 즉 ‘하느님을 낳은 이’라고 호칭한다.[87] 이는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이 아니라, 그녀가 낳은 예수가 사람의 몸으로 태어난 하느님이기 때문에 예수의 인성과 함께 신성을 강조하고자 한 말이다. 정교회 마리아론의 중심은 마리아의 동정성과 모성이다. 그리하여 정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으므로 종종 마리아에 대해 ‘영원한 동정녀’라는 수식어를 붙이거나 성모 마리아를 찬미할 때 하느님의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존귀한 피조물로서 케루빔보다 더 고귀하고, 세라핌보다 더 영광스러운 존재로 묘사한다.[87] 블라디미르의 성모 성화는 동방 정교회의 마리아 신심을 잘 보여주는 예시다.

블라디미르의 성모 성화


마리아에 대한 동방 정교회의 공식적인 교리는 '''테오토코스''' 이외에는 없다.[88] 이미 2세기부터 사용된 이 용어는 동방 정교회가 지닌 유일한 신학적 교리이다. 5세기부터 대중적인 성모 신심이 형성되어 8세기에 동방 교회의 교부인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이 성모 안식에 관한 대중적 저술을 하기도 했다.[89] 정교회의 마리아론은 초대 교회 때부터 전해져 온 전통에서 나타나 일반 대중들의 신심을 허용하나 정확한 기준을 제시한다. 동방 정교회에서는 테오토코스 이외에 어떠한 신학적 사유나 교리적 정의는 이뤄지지 않았다.[89] 그러므로 동방 정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19세기 교리인 원죄 없는 잉태와 20세기 교리인 성모 승천에 대해 반대한다.[90] 동방정교회에서 마리아는 지극한 겸손과 순종으로 그리스도에게 육신을 주고,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도록 한 여인이다.[90]

동방 정교회는 그리스도론의 추상적 개념들을 일반 신자가 이해하도록 돕는 신성과 인성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를 쉽게 설명하는 일환으로서 마리아론을 언급한다. 정교회 신학자들은 마리아를 "테오토코스"(Θεοτόκος: Theotokos,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른다. 이는 하느님을 낳은 자를 의미하며, 이 칭호는 예수가 인간으로서의 몸을 받은 "성육신"과 관련된 마리아의 하느님의 어머니로서의 지위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은 "만물 창조의 영원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마리아가 "영원한 처녀의 잉태"를 했다는 것은 정교회 신앙에서 마리아 신학의 중심에 놓여 있으며, "영원한 처녀"라는 칭호는 정교회에서 자주 사용된다. 정교회의 마리아 신학적인 접근은 마리아의 숭고한 신성함, 죄의 속죄에서 마리아에게 할당된 역할, 하느님으로부터의 은혜를 중재하는 역할을 강조한다.[29][30]

14세기에 정교회의 마리아 신학은 비잔틴 신학자들 사이에서 번성했다. 그들은 마리아 신학에서 우주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예수와 마리아를 함께 우주의 중심에 두고, 이 두 사람을 세계 역사의 최종 지점으로 보았다.[29]

정교회의 마리아 신학은 20세기에 러시아의 신학자들에 의해 새롭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마리아는 교회의 마음이며 창조의 중심이라고 한다.[29] 하지만 가톨릭교회의 마리아 신학에 대한 접근과 달리, 정교회의 마리아 신학은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관해서는 이를 지지하지 않는다.[29] 정교회에서는 "원죄"를,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죄로 인해 인간에게 생긴, 인간성의 병·왜곡으로 해석한다. 정교회에서는 마리아를 "평범한 사람"으로 파악하여, 교회를 체현하고, 크리스천의 삶의 모범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마리아를 "원죄 없는 잉태"로 하는 교리에 반대한다.[33]

20세기 이전 시대의 정교회의 마리아 신학은 전례 규정에 거의 완전히 준거하고 있었지만, 가톨릭교회의 마리아 신학처럼 체계적인 설명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르게이 불가코프와 같은 20세기의 신학자에 의해, 정교회의 마리아 신학에 대한 상세한 체계가 발전하기 시작했다.[34][35][36] 불가코프의 마리아 신학에 대한 명확한 기술은,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로서 현현하는 신비 속에서, 성령과 마리아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한다.[30]

정교회의 주요 축일은 다음과 같다:

  • 주의 봉헌 축일
  • 성모 영보 대축일
  • 예수 승천 대축일
  • 성령 강림 대축일
  • 성모 몽소승천 대축일
  • 성모 탄생 축일
  • 성모 도입 축일
  • 예수 성탄 대축일
  • 생신녀 보호 축일

4. 1. 테오토코스 외 교리적 선언 부재

4. 2. 마리아론의 목적

전통적인 신학 논문과 마리아론을 연관시키는 데는 두 가지 접근 방식이 있다. 첫 번째는 마리아에 대한 생각이나 측면을 기존 논문에 수용하는 방식으로, 교부들과 중세 시대에 행해졌다. 이는 마리아론이 다른 신학에서 분리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마리아의 다양한 역할과 인간성을 간과하고, 개별적인 마리아론적 주장의 연관성을 부각시킬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49] 두 번째는 각각을 독립적으로 발표하는 방식으로, 마리아론이 다른 신학에서 고립되고 때로는 신학적 경계를 벗어나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구원, 죄의 속죄 등 각 사례별로 논의된다면 이러한 문제점을 피할 수 있다.[49]

마리아 신학은 신학의 근원, 논법, 기준, 그리고 사도신경까지 거슬러 올라가 거기에서 공식적으로 마리아에게 행해진 선언을 사용하여 논의된다. 성서를 기반으로 한 의문점이 강조되며[50], 가톨릭교회의 마리아 신학에서는 가톨릭 교리의 전체적인 상황과 다른 교회의 가르침도 고려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에는 성서 인용이 21곳 있으며, 마리아에 관한 전체적 개념, 예수의 탄생 및 어린 시절, 몇몇 사건에 대한 마리아의 역할, 십자가 아래에서 마리아가 받은 사명 등이 언급되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보고는 추상적인 우화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이며, 이는 베네딕토 16세가 강조한 내용이다.[51]

마리아론에서 발표되는 내용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다양하다. 역사적 발전을 발표하거나, 내용에 따라 교리, 은총, 구원에 관련된 역할 등으로 분류하기도 하고, 마리아의 특성에 대해 발표하거나, 전체 신학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에 통합하려는 시도도 있다.

카를 바르트나 카를 라너와 같은 20세기의 몇몇 신학자들은 마리아론을 그리스도론의 일부로만 보았다. 그러나 카를 라너의 형인 후고 라너/위고 라너영어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및 초기 기독교 교회의 저술가들의 기술을 바탕으로 마리아론을 발전시켰다.

5. 개신교의 마리아관

'''개신교의 마리아관'''은 마리아를 신학적 분야로 적합하지 않다고 보며, 단지 영지주의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육신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를 있게 한 여인이며, 모순을 지닌 인간이자 신실한 여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여기는 견해를 기초로 한다.[91][92] 마르틴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등 종교개혁 당시부터 마리아에 대해 입장이 달랐다. 칼뱅의 개혁교회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느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을 강조하면서 마리아를 공경하지 않는다. 루터교는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것에 동의하나 마리아에 대한 기도, 찬양을 부정한다. 성공회는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부르고는 있지만, 성공회 신자 성향에 따라 평생 동정, 원죄 없음, 몽소승천 같은 교리를 믿는 것을 자유롭게 한다.

개신교의 전형적인 마리아관은 하느님 앞에서 그녀의 겸손함과 자신에 대한 하나님 계시에 대해 마음을 열고 순명함으로써 성자가 인성을 취하게끔 한 종으로서의 역할에 중점을 두고 있다. 최근 들어 개신교계에서 새로이 두각되고 있는 마리아관은 그녀를 거침이 없고 자신감에 찬, 급진적인 여인으로 보는 관점이다.[93]

초기 일부 개신교 개혁가들은 마리아를 숭배하고 존경했다. 마르틴 루터는 마리아에 대해 "우리 또한 그녀를 존경해야 한다"고 말했다.[1] 울리히 츠빙글리는 "나는 하느님의 어머니를 매우 존경한다"고 말했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커질수록 마리아에 대한 존경과 명예도 커져야 한다"고 말했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다양한 개신교 단체들은 가톨릭, 성공회, 오리엔트 정교회동방 정교회의 마리아 공경 및 신심 행위를 "마리아 숭배"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비판했다.[18][19] 이러한 경향은 21세기에 들어 일부는 완화되었지만, 다른 이들은 반대를 강화했다. 예를 들어, 2006년 5월 윌싱엄의 성모 축제 동안, 성공회 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마리아 행렬을 거행했을 때, 비국교도 개신교 야유꾼들은 미사, 우상 숭배 및 "마리아 숭배"를 비난하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20][21]

스테인드 글라스로 묘사된 성모와 아기 예수,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주 애시필드의 성 요한 성공회 교회


프로테스탄트의 마리아론은 각 교파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마르틴 루터, 장 칼뱅, 칼 바르트 등에 의한 마리아관은 모두 현대 프로테스탄트의 마리아관에 기여했다. 칼 바르트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칭하는 교리를 수용했으며,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동의했다.[12]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의 마리아 숭배를 끔찍한 실수이자 우상 숭배적인 이단으로 간주했다.[13]

5. 1. 종교개혁가들의 다양한 견해

초기 개신교 종교개혁가들 중 일부는 마리아를 존경하고 숭배했다.[1] 마르틴 루터는 마리아에 대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서로 존경할 의무가 있기에 마리아를 존경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합당한 존경을 드려야 하며, 그녀가 받아야 할 존경보다 훨씬 더 많은 존경을 받고 있음을 걱정한다."라고 말했다.[1] 츠빙글리는 "하느님의 어머니를 매우 존경한다"고 말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커질수록 마리아에 대한 존경과 명예도 커져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초기 개신교인들은 존경과 높은 명예라는 개념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개신교 종교 개혁가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주어지는 존경의 정도였고, 마리아론에 대한 실질적인 의미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

존 위클리프는 그의 초기 설교에서 "마리아의 도움 없이는 천국의 보상을 얻는 것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인류 전체에서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청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라며 후기 중세의 마리아 신앙 정신을 반영했다.[2]

신학자들은 마르틴 루터가 에큐메니컬 공의회의 마리아 관련 교리와 교회의 교리를 지지했다고 본다. 그는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이며 테오토코스 즉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믿음을 굳게 지켰다.[3] 특히 루터가 1854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원죄 없이 잉태되심이 교리로 제정되기 300년 전에 그 견해를 확고히 지지했다는 주장에 주목한다.[4] 다만, 다른 이들은 루터가 말년에 마리아의 무죄를 유지하면서도 원죄 없이 잉태되심에 대한 입장을 바꾸었다고 주장한다.[4] 마리아 승천에 관해서는, 성경에 그것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고 말했다.[5] 루터는 마리아를 존경했지만, 로마 가톨릭교회성인 축일 기념과 특히 마리아와 다른 세상을 떠난 성인들에게 드리는 중재 요청을 우상 숭배로 여겼다.[7]

존 칼빈은 마리아의 평생 동정과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제한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만 드려야 할 존경을 마리아에게 돌리는 것에 대해 극도로 반대했다.[8] 칼빈은 마리아가 신자들의 변호인이 될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녀 또한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9] 만약 가톨릭 교회가 그녀를 하늘의 여왕으로 칭송한다면, 그것은 신성 모독이며 그녀 자신의 의도와 모순된다고 보았다.[10] 칼빈은 에페소스 공의회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의 "미신적" 사용 가능성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며,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말하는 것은 무지한 자들을 그들의 미신에서 더욱 완고하게 만들 뿐이라고 하였다.[11]

5. 2. 현대 개신교의 마리아관

마르틴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 등 종교개혁 당시부터 마리아에 대해 입장이 달랐다.[91][92] 칼뱅의 개혁교회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느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을 강조하면서 마리아를 공경하지 않는다. 루터교는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부르는 것에 동의하나 마리아에 대한 기도, 찬양을 부정한다. 성공회는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부르고 있는 것은 같으며, 다만 성공회 신자 성향에 따라 평생 동정, 원죄 없음, 몽소승천 같은 교리를 믿는 것을 자유롭게 한다.

개신교의 전형적인 마리아관은 하느님 앞에서 그녀의 겸손함과 자신에 대한 하나님 계시에 대해 마음을 열고 순명함으로써 성자가 인성을 취하게끔 한 종으로서의 역할에 중점을 두고 있다. 최근 들어 개신교계에서 새로이 두각되고 있는 마리아관은 그녀를 거침이 없고 자신감에 찬, 급진적인 여인으로 보는 관점이다.[93]

초기 일부 개신교 개혁가들은 마리아를 숭배하고 존경했다. 마르틴 루터는 마리아에 대해 "우리 또한 그녀를 존경해야 한다"고 말했다.[1] 츠빙글리는 "나는 하느님의 어머니를 매우 존경한다"고 말했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커질수록 마리아에 대한 존경과 명예도 커져야 한다"고 말했다.

칼 바르트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칭하는 교리를 수용했으며,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동의했다.[12] 그러나 로마 가톨릭교회의 마리아 숭배를 끔찍한 실수이자 우상 숭배적인 이단으로 간주했다.[13]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다양한 개신교 단체들은 가톨릭, 성공회, 오리엔트 정교회동방 정교회의 마리아 공경 및 신심 행위를 "마리아 숭배"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비판했다.[18][19] 이러한 경향은 21세기에 들어 일부는 완화되었지만, 다른 이들은 반대를 강화했다.

프로테스탄트의 마리아론은 각 교파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마르틴 루터, 장 칼뱅, 칼 바르트 등에 의한 마리아관은 모두 현대 프로테스탄트의 마리아관에 기여했다.

6. 한국 기독교와 마리아론

6. 1. 민주화 운동과 마리아 신심

6. 2. 개신교의 비판적 수용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다양한 개신교 단체들은 "마리아 숭배"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가톨릭, 성공회, 오리엔트 정교회동방 정교회의 마리아 공경 및 신심 행위를 지칭하기 시작했다.[18][19] 그들의 연구에 따르면, 마리아에게 쏟는 관심은 극단적이며, 하느님 숭배를 방해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우상 숭배일 수 있다고 보았다.[18][19]

이러한 경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양한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때때로 이 문제에 대한 태도를 완화했지만, 다른 이들은 21세기에 들어 반대를 강화했다. 예를 들어, 2006년 5월 윌싱엄의 성모 축제 동안, 성공회 신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마리아 행렬을 거행했을 때, 비국교도 개신교 야유꾼들은 미사, 우상 숭배 및 "마리아 숭배"를 비난하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20][21]

6. 3. 종교 간 대화와 이해 증진

참조

[1] 서적 Festival Sermons of Martin Luther https://books.google[...] Mark V Publiscations 2005
[2] 간행물
[3] 문서 Marienlexikon Gesamtausgabe Institutum Marianum 1994
[4] 문서
[5] 문서
[6] 서적 The One Mediator, The Saints and Mary, Lutherans and Roman Catholic in Dialogue Augsburg Fortress
[7] 문서 Luther's Works
[8] 서적 Commentary on John 2008-05-19
[9] 문서 Works
[10] 서적 Harmony of the Evangelists 2008-05-19
[11] 문서 Gleanings of a few scattered ears, during the period of Reformation in England and of the times immediately succeeding : A.D. 1533 to A.D. 1588 https://archive.org/[...] Bell and Daldy 1857
[12] 문서 Kirchliche Dogmatic I
[13] 문서 Church Dogmatics
[14] 문서 Did the First Christians Worship Jesus? : the New Testament Evidence SPCK.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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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서적 The Everything Jesus Book: His Life, His Teachings
[21] 서적 Walsingham in Literature and Culture from the Middle Ages to Mod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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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적 Encyclopedia of theology: a concise Sacramentum mundi
[24] 서적 Encyclopedia of Protestantism, Volume 3
[25] 문서 Encyclopedia of Social History
[26] 서적 The Everything Mary Book
[27] 웹사이트 Walsingham shrinine http://www.walsingha[...]
[28] 서적 Mariology: A Guide for Priests, Deacons, Seminarians, and Consecrated Pers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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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서적 The encyclopedia of Christianity, Volume 3
[31] 문서 Homily 2 on the Dormition 14PG 96
[32] 문서 Homily 2 on the Dormition 16; PG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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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서적 The Orthodox Church
[35] 서적 The Celebration of Faith: The Virgin Mary
[36] 서적 Modern Russian Theology: Ortholdox Theology In A New Key 2000
[37] 간행물 Protestantische Marien Ku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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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웹사이트 The Canons of the Two Hundred Holy and Blessed Fathers Who Met at Ephesus http://www.cce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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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간행물 "Early Medieval Painting in San Clemente, Rome: The Madonna and Child in the Niche" 1981
[44] 서적 Liber Pontificalis
[45] 문서 First mentioned under this new dedication in the Salzburg Itinerary, undated but first half of the seventh century
[46] 서적 Liber Pontifica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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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문서 Kihn,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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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간행물 "The Theotokos in sixth-century Constantinople" 1978
[60] 간행물 "Early Medieval Painting in San Clemente, Rome: The Madonna and Child in the Niche" 1981
[61] 서적 Liber Pontificalis
[62] 웹인용 Mary, The New Eve https://web.archive.[...] 2008-10-08
[63] 문서 Otto Stegmüller, Barock, in Marienkunde, 1967 566
[64] 문서 A Roskovany, conceptu immacolata ex monumentis omnium seculrorum demonstrate III, Budapest: 1873
[65] 문서 Oratio in laudibus S Mariae
[66] 문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53항 참조.
[67] 서적 신자 재교육을 위한 5분 교리 가톨릭신문사
[68] 문서 루카 1, 28.
[69] 문서 창세 3, 15.
[70] 문서 신학대전, Ⅲ,Q,27,ART.4.
[71] 성경 묵시 11,19
[72] 성경 묵시 12,1
[73] 웹사이트 성모 승천의 근거와 의의 http://avemaria.sihm[...]
[74] 기타 Letter to Patriarch St. Germanus of Constantinople PL 89:508B
[75] 서적 가톨릭교회 교리서 제1편 963항
[76] 성경 루카 1,30; 로마 8,29; 에페 1,4
[77] 성경 루카 1,43
[78] 성경 루카 8,20
[79] 성경 요한 19, 25~27
[80] 간행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Redemptoris Mater) 23항
[81] 기타 S. Gregorius Naz., Poemata dogmatica, XVIII, v. 58 PG XXXVII, 485
[82] 기타 Idem, Oratio ad Ssmam Dei Matrem Opera omnia, Ed. Assemani, t. III (graece), Romae, 1747, pag. 546
[83] 기타 Encomium on the Dormition of the Holy Mother of God PG 86B:3305B
[84] 성경 묵시 12,1-5
[85] 성경 루카 1,31-33
[86] 성경 시편 45,6-11
[87] 서적 Eastern Orthodoxy through Western eyes
[88] 서적 비잔틴 신학: 역사적 변천과 주요 교리 정교회출판사
[89] 서적 비잔틴 신학: 역사적 변천과 주요 교리 정교회출판사
[90] 웹사이트 한국정교회 대교구 누리집, 성인 소개 ttps://www.orthodoxk[...]
[91] 서적 Das Marienlob der Reformatoren Tübingen
[92] 서적 The Thousand Faces of the Virgin Mary https://archive.org/[...] Liturgical Press
[93] 저널 The Mary We Never Knew http://www.christian[...] 2008-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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