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전선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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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민전선(NF)은 1960년대 영국에서 결성된 극우 정당으로, 파시스트 또는 신파시스트로 분류된다. 영국 민족주의와 백인 우월주의를 표방하며, 반이민, 반유대주의, 홀로코스트 부정 등의 극단적인 이념을 가지고 있다. 1970년대에 지지율이 상승했으나 이후 쇠퇴하여 현재는 소규모 정당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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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전선 (영국) - [정당]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국민전선 |
| 원어 이름 | National Front |
| 약칭 | NF |
| 창립일 | 1967년 2월 7일 |
| 창립자 | A. K. 체스터턴 |
| 합병 | 영국 국민전선 과 대영제국 충성 동맹 의 합병 |
| 본부 | 영국 킹스턴어폰헐 |
| 웹사이트 | 국민전선 |
| 이전 웹사이트 | 국민전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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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부 | |
| 당수 | 토니 마틴 |
| 부당수 | 조던 폰트 |
| 이전 당수 | 케빈 브라이언 |
| 이전 부당수 | 데이비드 맥도날드 |
| 이념 및 정치 성향 | |
| 이념 | 영국 파시즘 네오파시즘 백인 우월주의 영국 내셔널리즘 |
| 내부 파벌 | 네오나치즘 인종 포퓰리즘 스트라세르주의 제3의 위치 반유대주의 이슬람 공포증 |
| 정치적 위치 | 극우 |
| 조직 및 연합 | |
| 국내 연합 | 국민주의자 동맹 (2005-2008) |
| 의회 의석 | |
| 하원 | 0 / 650 |
| 상원 | 0 / 802 |
| 유럽 의회 | 0 / 73 |
| 지방 의회 | 0 / 20565 |
| 스코틀랜드 의회 | 0 / 129 |
| 웨일스 의회 | 0 / 60 |
| 런던 의회 | 0 / 25 |
| 경찰국장 | 0 / 40 |
2. 역사
국민전선(NF)은 1960년대 영국 정계의 변방에서 활동하던 소규모 극우 단체들의 연합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은 1966년 초, 제국 충성자 동맹(League of Empire Loyalists, LEL)의 지도자였던 A. K. 체스터턴(A. K. Chesterton)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1930년대 영국 파시스트 운동에 오랫동안 참여한 인물로, 영국 파시스트 동맹(British Union of Fascists, BUF) 회원이었다.
몇 달 동안, 영국 국민당(1960)(British National Party (1960), BNP)의 앤드류 폰테인(Andrew Fountaine)과 필립 맥스웰(Philip Maxwell), 인종 보존 협회(Racial Preservation Society, RPS)의 데이비드 브라운, 그리고 대영 제국 운동(Greater Britain Movement, GBM)의 존 타인달(극우 활동가)(John Tyndall (far-right activist))과 마틴 웹스터(Martin Webster) 등 많은 극우 인사들이 체스터턴의 아파트를 방문하여 통합을 논의했다. 모두 통합에는 동의했지만, 개인적인 경쟁 때문에 과정이 어려웠다.
체스터턴은 LEL과 BNP의 합병에 동의했고, RPS의 한 파벌도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체스터턴과 BNP는 대영 제국 운동(Greater Britain Movement, GBM)이 신나치즘(neo-Nazism)과의 강한 연관성 때문에 새로운 정당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했다. 체스터턴은 "‘더러운 유대인’과 ‘더러운 흑인’에 대한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이 전쟁을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병원에 가야 할 정신병자일 뿐, 국민전선에 있을 자격이 없다"라고 말했다.
1966년 10월, LEL과 BNP는 정책 합의를 위한 실무 위원회를 설립했다. 위원회의 초기 정책은 영국의 정치 체제에 대한 반대, 반공주의(anti-communism), 로디지아(Rhodesia)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소수 정부 지지, 영국으로의 이민 금지 및 정착한 모든 비백인 이민자 추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66년 12월, 새로운 정당의 이름을 "국민전선(National Front)"으로 정했다.
국민전선은 1967년 2월 7일에 공식적으로 설립되었고, 체스터턴이 초대 의장이 되었다. 당시 회원 수는 약 2,500명이었으며, 그중 1,000명은 BNP 출신, 300명은 LEL 출신, 100명 이상은 RPS 출신이었다.
국민전선(NF)의 초기에는 제국 충성파 연맹(League of Empire Loyalists, LEL)과 영국 국민당(British National Party, BNP) 파벌 간의 권력 투쟁이 있었다. 전 LEL 파는 전 BNP 회원들의 행동에 불만을 가졌고, 전 BNP 파는 체스터턴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했다. 1967년 6월, 존 틴달은 대영 제국 운동(Greater Britain Movement, GBM)을 해산하고 회원들에게 국민전선 합류를 촉구했다. 틴달 배척에 대한 이전 약속에도 불구하고, 체스터턴은 그를 당에 환영했다. 틴달의 잡지 ''Spearhead''는 국민전선의 사실상 월간지가 되었다.
1968년, 체스터턴의 지도력은 앤드류 폰테인(Andrew Fountaine)에 의해 도전받았지만 실패했고, 폰테인은 당을 떠났다.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본부 임대 계약 종료 후, 전 LEL 회원들은 런던 중심부에 다른 거점을 원했지만, 전 GBM과 전 BNP 파벌은 털스 힐(Tulse Hill)로 이전하는 것을 선호했다. 체스터턴은 전 LEL의 입장을 지지했고, 플릿 스트리트(Fleet Street)에 작은 사무실을 제공했다. 1968년 4월, 보수당 정치인 이녹 파월(Enoch Powell)이 피의 강 연설(Rivers of Blood speech)을 한 후 이민이 전국 언론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주제가 되었다. 파월은 국민전선보다 더 온건한 조치를 제안했지만, 그의 언어 사용은 국민전선과 유사했고, 보수당 우익의 일부 인사들이 국민전선으로 전향했다.
국민전선은 1969년 지방 선거와 1970년 지방 선거에서 일부 성과를 거두었지만, 전반적으로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했다. 국민전선은 급진 좌파의 반대에 직면했고, 런던의 반파시스트 운동에 스파이를 심었다. 체스터턴의 의사에 반하여, 국민전선 활동가들은 선전 활동을 벌였다. 체스터턴이 남아프리카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틴달의 GBM 출신인 고든 브라운이 지도력 도전을 제기했고, 체스터턴은 사임했다. 1971년 2월, 존 오브라이언이 체스터턴의 뒤를 이어 의장이 되었다. 1972년 6월, 오브라이언과 그의 지지자들은 틴달이 신나치 단체와 관계를 유지한 것에 좌절하여 국민전선을 떠나 국가 독립당에 합류했다.
1972년 7월, 존 타인달이 당 의장이 되었다. 타인달 체제하에서 국민전선(NF)은 이민에 대해 분노하는 "인종주의 대중들을 파시스트로 개종시키려" 했다. 파시즘 역사가인 로저 이트웰(Roger Eatwell)은 타인달이 의장직을 맡으면서 "NF는 대중의 지지를 해칠까 봐 신나치즘을 대중의 시야에서 감추려고 애썼다"고 지적했다.
국민전선은 백인 노동 계급을 대상으로 호소력을 재집중하여, 1974년 6월 NF 노동조합 협회를 출범시켰다. 1972년 우간다 아시아인 난민의 도착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회원 수를 급증시켰다. 1973년 웨스트 브롬위치 보궐선거에서 16%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의회 선거에서 처음으로 10%를 넘어섰고, 더 많은 언론 보도를 받게 되었다. 1974년 2월 총선에서는 54명의 후보를 출마시켜 정당 정치 방송을 보장받았지만, 득표율은 3.2%로 1970년보다 약간 낮았다. 1970년대 중반까지 NF의 회원 수는 정체되었고 여러 지역에서는 감소했다. 1974년 10월 총선에 출마한 90명의 후보 전원이 보증금을 잃었다. 1975년 지방 선거에서는 이전 선거보다 훨씬 적은 60명의 후보를 출마시켰다.
로이 페인터(Roy Painter)의 지휘 아래 "대중주의자" 파벌이 당 내에서 등장했다. 이들은 NF의 간부가 전 BNP 및 GBM 회원들에 의해 지배되고 타인달이 여전히 신나치주의자라고 믿었기 때문에 좌절했다. 그들은 존 킹즐리 리드(John Kingsley Read)의 의장 선출을 확보했고, 타인달은 부의장으로 강등되었다. 타인달 지지자들과 대중주의자들 사이에 갈등이 커졌고, 리드와 집행위원회는 타인달과 그의 지지자 9명을 간부직에서 해임하기 전에 타인달을 당에서 제명했다. 타인달은 고등법원에 제명 문제를 상고했고, 그의 제명은 불법으로 선언되었다. 타인달과 타인달 지지자들을 축출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리드와 그의 지지자들은 1975년 12월 NF에서 분리되어 내셔널 파티(NP)를 결성했다.
1976년 2월, 존 타인달이 다시 국민전선(NF)의 지도자로 복귀했다. 당은 정부의 말라위 아시아 난민 수용 합의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이용하여 난민 입국 반대 시위를 벌였다. 1977년 그레이터 런던 의회 선거에서 런던에서의 지지율이 상승하고 1974년 10월 총선 결과보다 나은 성적을 거두자, 런던에서 추가적인 행진이 계획되었다. 1977년 8월 루이섬을 통과하는 행진은 반파시스트들과의 충돌로 이어져 "루이섬 전투"로 알려지게 되었다.
1979년 영국 총선에서 국민전선은 1918년 노동당 이후 어떤 신생 정당보다 더 많은 지역구에 후보를 냈지만, 총 득표율은 1.3%에 그쳐 1974년 10월 총선의 3.1%에서 감소했다. 이러한 하락은 반파시스트 운동이 증가했거나, 마거릿 대처 하에서 보수당이 이민에 대한 엄격한 입장을 취하면서 이전에 국민전선에 투표했던 많은 표가 보수당으로 돌아섰기 때문일 수 있다. 국민전선의 당원 수도 감소했다.
1970년대 후반, 타인달은 당의 문제에 대해 오랜 동지였던 마틴 웹스터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타인달은 웹스터가 극우 스킨헤드와 축구 훌리건들을 국민전선에 가입하도록 유도하려는 시도와, 웹스터가 당의 젊은 남성들에게 성적 접근을 시도했다는 주장에 분노했다. 1979년 10월 그는 국민전선 간부들에게 웹스터의 사퇴를 요구할 것을 촉구했지만 거절당했다. 타인달은 1980년 1월 당내 "역겨운 변태의 악취"를 이유로 사임했다. 1980년 6월, 타인달은 신국민전선(NNF)을 창설했으며, 국민전선 당원 3분의 1이 신국민전선으로 이탈했다고 주장했다.
존 타인달의 탈퇴 후, 앤드루 브론스(Andrew Brons)가 당 의장이 되었고, 웹스터는 전국 활동 조직자로 남았다. 1983년 닉 그리핀(Nick Griffin)과 조 피어스가 이끄는 파벌에 의해 웹스터는 모든 유료 직책에서 축출되었다. 이 파벌은 스트라서주의(Strasserite) 계열의 나치즘을 고수하며, 1985년 5월 당 이사진의 장악권을 확보하고 반대파의 당적을 정지시켰다.
스트라서주의자들은 자신들을 "급진적이고 젊으며 성공적인" 집단으로 묘사하며, 내부 반대파의 "구식 보수 정책"과 대조적인 접근 방식을 강조했다. 1986년 11월 정기총회에서 스트라서주의자들은 중앙 집중식 간부 시스템에 따라 당을 재편성했다. 이들은 볼로냐 대학살(Bologna massacre) 이후 런던에 숨어 있던 이탈리아 파시스트 민병대 무장 혁명 핵(Nuclei Armati Rivoluzionari) 구성원들과의 강력한 유대 관계에 영향을 받았다.
내부 반대파들은 1987년 1월 플래그 그룹(Flag Group)을 결성하여 "국민전선"이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이들은 스트라서주의 그룹보다 더 많은 노동 계급 지도자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후자를 해외 이념적 유행을 추구하는 지식인으로 여겼다. 1990년까지 플래그 그룹과 스트라서주의자들의 공식 국민전선(Official National Front)이라는 두 개의 조직이 존재했다. 스트라서주의 공식 국민전선은 누벨 드로이트(Nouvelle Droite)의 영향을 받아 다인종 사회와 자본주의의 종식을 추구하는 "모든 색깔의 인종주의자들의 광범위한 전선"에 대한 지지를 촉진했고, 흑인 민족주의자인 루이스 퍼러칸(Louis Farrakhan)과 마커스 가르비(Marcus Garvey)를 칭찬했다. 그들의 출판물인 ''Nationalism Today''에는 리비아와 이란 정부에 대한 긍정적인 기사가 실려 있었다.
1989년, 닉 그리핀(Nick Griffin), 데렉 홀랜드, 콜린 토드는 국제 제3의 길(International Third Position)을 설립하기 위해 공식 국민전선을 이탈했다. 1990년 3월, 공식 국민전선은 지도자들에 의해 해산되었고, 그들은 새로운 조직인 제3의 길로 대체했다.
1990년대 동안 국민전선(NF)은 타인달의 새로운 영국국민당(BNP)에 밀려 영국 최고의 극우 운동으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1995년 랜즈다운 로드 축구 폭동 이후, 국민전선 의장 이안 앤더슨은 "국민전선"이라는 이름과 관련된 부정적인 연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명을 국민민주당으로 변경하려 했다. 그러나 소규모 파벌이 분리되어 국민전선이라는 이름을 유지했고, 1997년과 2001년 총선에 참여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2001년까지 국민전선은 신나치 준군사조직인 컴뱃 18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국민전선은 계속 집회를 조직했지만, 여러 집회가 연이은 내무장관들에 의해 금지되었다.[2]
2010년 고등법원 판결로 영국국민당은 헌법에서 비백인 회원 가입 금지 조항을 삭제해야 했고, 이는 국민전선으로의 이탈을 초래했다.[3] 잉글랜드 국방동맹(EDL)이 등장한 후, 국민전선은 연계를 추구했지만 EDL은 국민전선 및 기타 기존 극우 단체들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이후 EDL이 쇠퇴하면서, 국민전선은 EDL에서 분리된 일부 단체들과 협력했다. 2015년 3월 케빈 브라이언이 국민전선 의장이 되었고,[4] 2015년 11월 데이브 맥도널드가 그를 대신했으며,[5] 2018년 9월 토니 마틴이 의장직을 이어받았다.[1]
국민전선은 2015년 영국 총선 이후 어떤 선거에도 후보를 내지 않았다.
2. 1. 창당 배경 (1966–1967)
국민전선(NF)은 1960년대 영국 정계의 변방에서 활동하던 소규모 극우 단체들의 연합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은 1966년 초, 제국 충성자 동맹(League of Empire Loyalists, LEL)의 지도자였던 A. K. 체스터턴(A. K. Chesterton)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1930년대 영국 파시스트 운동에 오랫동안 참여한 인물로, 영국 파시스트 동맹(British Union of Fascists, BUF) 회원이었다.몇 달 동안, 영국 국민당(1960)(British National Party (1960), BNP)의 앤드류 폰테인(Andrew Fountaine)과 필립 맥스웰(Philip Maxwell), 인종 보존 협회(Racial Preservation Society, RPS)의 데이비드 브라운, 그리고 대영 제국 운동(Greater Britain Movement, GBM)의 존 타인달(극우 활동가)(John Tyndall (far-right activist))과 마틴 웹스터(Martin Webster) 등 많은 극우 인사들이 체스터턴의 아파트를 방문하여 통합을 논의했다. 모두 통합에는 동의했지만, 개인적인 경쟁 때문에 과정이 어려웠다.
체스터턴은 LEL과 BNP의 합병에 동의했고, RPS의 한 파벌도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체스터턴과 BNP는 대영 제국 운동(Greater Britain Movement, GBM)이 신나치즘(neo-Nazism)과의 강한 연관성 때문에 새로운 정당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했다. 체스터턴은 "‘더러운 유대인’과 ‘더러운 흑인’에 대한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이 전쟁을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병원에 가야 할 정신병자일 뿐, 국민전선에 있을 자격이 없다"라고 말했다.
1966년 10월, LEL과 BNP는 정책 합의를 위한 실무 위원회를 설립했다. 위원회의 초기 정책은 영국의 정치 체제에 대한 반대, 반공주의(anti-communism), 로디지아(Rhodesia)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소수 정부 지지, 영국으로의 이민 금지 및 정착한 모든 비백인 이민자 추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66년 12월, 새로운 정당의 이름을 "국민전선(National Front)"으로 정했다.
국민전선은 1967년 2월 7일에 공식적으로 설립되었고, 체스터턴이 초대 의장이 되었다. 당시 회원 수는 약 2,500명이었으며, 그중 1,000명은 BNP 출신, 300명은 LEL 출신, 100명 이상은 RPS 출신이었다.
2. 2. 초기 성장 (1968–1972)
국민전선(NF)의 초기에는 제국 충성파 연맹(League of Empire Loyalists, LEL)과 영국 국민당(British National Party, BNP) 파벌 간의 권력 투쟁이 있었다. 전 LEL 파는 전 BNP 회원들의 행동에 불만을 가졌고, 전 BNP 파는 체스터턴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했다. 1967년 6월, 존 틴달은 대영 제국 운동(Greater Britain Movement, GBM)을 해산하고 회원들에게 국민전선 합류를 촉구했다. 틴달 배척에 대한 이전 약속에도 불구하고, 체스터턴은 그를 당에 환영했다. 틴달의 잡지 ''Spearhead''는 국민전선의 사실상 월간지가 되었다.1968년, 체스터턴의 지도력은 앤드류 폰테인(Andrew Fountaine)에 의해 도전받았지만 실패했고, 폰테인은 당을 떠났다.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본부 임대 계약 종료 후, 전 LEL 회원들은 런던 중심부에 다른 거점을 원했지만, 전 GBM과 전 BNP 파벌은 털스 힐(Tulse Hill)로 이전하는 것을 선호했다. 체스터턴은 전 LEL의 입장을 지지했고, 플릿 스트리트(Fleet Street)에 작은 사무실을 제공했다. 1968년 4월, 보수당 정치인 이녹 파월(Enoch Powell)이 피의 강 연설(Rivers of Blood speech)을 한 후 이민이 전국 언론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주제가 되었다. 파월은 국민전선보다 더 온건한 조치를 제안했지만, 그의 언어 사용은 국민전선과 유사했고, 보수당 우익의 일부 인사들이 국민전선으로 전향했다.
국민전선은 1969년 지방 선거와 1970년 지방 선거에서 일부 성과를 거두었지만, 전반적으로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했다. 국민전선은 급진 좌파의 반대에 직면했고, 런던의 반파시스트 운동에 스파이를 심었다. 체스터턴의 의사에 반하여, 국민전선 활동가들은 선전 활동을 벌였다. 체스터턴이 남아프리카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틴달의 GBM 출신인 고든 브라운이 지도력 도전을 제기했고, 체스터턴은 사임했다. 1971년 2월, 존 오브라이언이 체스터턴의 뒤를 이어 의장이 되었다. 1972년 6월, 오브라이언과 그의 지지자들은 틴달이 신나치 단체와 관계를 유지한 것에 좌절하여 국민전선을 떠나 국가 독립당에 합류했다.
2. 3. 타인달의 첫 번째 지도기 (1972–1975)
1972년 7월, 존 타인달이 당 의장이 되었다. 타인달 체제하에서 국민전선(NF)은 이민에 대해 분노하는 "인종주의 대중들을 파시스트로 개종시키려" 했다. 파시즘 역사가인 로저 이트웰(Roger Eatwell)은 타인달이 의장직을 맡으면서 "NF는 대중의 지지를 해칠까 봐 신나치즘을 대중의 시야에서 감추려고 애썼다"고 지적했다.국민전선은 백인 노동 계급을 대상으로 호소력을 재집중하여, 1974년 6월 NF 노동조합 협회를 출범시켰다. 1972년 우간다 아시아인 난민의 도착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회원 수를 급증시켰다. 1973년 웨스트 브롬위치 보궐선거에서 16%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의회 선거에서 처음으로 10%를 넘어섰고, 더 많은 언론 보도를 받게 되었다. 1974년 2월 총선에서는 54명의 후보를 출마시켜 정당 정치 방송을 보장받았지만, 득표율은 3.2%로 1970년보다 약간 낮았다. 1970년대 중반까지 NF의 회원 수는 정체되었고 여러 지역에서는 감소했다. 1974년 10월 총선에 출마한 90명의 후보 전원이 보증금을 잃었다. 1975년 지방 선거에서는 이전 선거보다 훨씬 적은 60명의 후보를 출마시켰다.
로이 페인터(Roy Painter)의 지휘 아래 "대중주의자" 파벌이 당 내에서 등장했다. 이들은 NF의 간부가 전 BNP 및 GBM 회원들에 의해 지배되고 타인달이 여전히 신나치주의자라고 믿었기 때문에 좌절했다. 그들은 존 킹즐리 리드(John Kingsley Read)의 의장 선출을 확보했고, 타인달은 부의장으로 강등되었다. 타인달 지지자들과 대중주의자들 사이에 갈등이 커졌고, 리드와 집행위원회는 타인달과 그의 지지자 9명을 간부직에서 해임하기 전에 타인달을 당에서 제명했다. 타인달은 고등법원에 제명 문제를 상고했고, 그의 제명은 불법으로 선언되었다. 타인달과 타인달 지지자들을 축출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리드와 그의 지지자들은 1975년 12월 NF에서 분리되어 내셔널 파티(NP)를 결성했다.
2. 4. 타인달의 두 번째 지도기 (1976–1982)
1976년 2월, 존 타인달이 다시 국민전선(NF)의 지도자로 복귀했다. 당은 정부의 말라위 아시아 난민 수용 합의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이용하여 난민 입국 반대 시위를 벌였다. 1977년 그레이터 런던 의회 선거에서 런던에서의 지지율이 상승하고 1974년 10월 총선 결과보다 나은 성적을 거두자, 런던에서 추가적인 행진이 계획되었다. 1977년 8월 루이섬을 통과하는 행진은 반파시스트들과의 충돌로 이어져 "루이섬 전투"로 알려지게 되었다.1979년 영국 총선에서 국민전선은 1918년 노동당 이후 어떤 신생 정당보다 더 많은 지역구에 후보를 냈지만, 총 득표율은 1.3%에 그쳐 1974년 10월 총선의 3.1%에서 감소했다. 이러한 하락은 반파시스트 운동이 증가했거나, 마거릿 대처 하에서 보수당이 이민에 대한 엄격한 입장을 취하면서 이전에 국민전선에 투표했던 많은 표가 보수당으로 돌아섰기 때문일 수 있다. 국민전선의 당원 수도 감소했다.
1970년대 후반, 타인달은 당의 문제에 대해 오랜 동지였던 마틴 웹스터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타인달은 웹스터가 극우 스킨헤드와 축구 훌리건들을 국민전선에 가입하도록 유도하려는 시도와, 웹스터가 당의 젊은 남성들에게 성적 접근을 시도했다는 주장에 분노했다. 1979년 10월 그는 국민전선 간부들에게 웹스터의 사퇴를 요구할 것을 촉구했지만 거절당했다. 타인달은 1980년 1월 당내 "역겨운 변태의 악취"를 이유로 사임했다. 1980년 6월, 타인달은 신국민전선(NNF)을 창설했으며, 국민전선 당원 3분의 1이 신국민전선으로 이탈했다고 주장했다.
2. 5. 스트라서주의자들과 플래그 그룹 (1983–1990)
존 타인달의 탈퇴 후, 앤드루 브론스(Andrew Brons)가 당 의장이 되었고, 웹스터는 전국 활동 조직자로 남았다. 1983년 닉 그리핀(Nick Griffin)과 조 피어스가 이끄는 파벌에 의해 웹스터는 모든 유료 직책에서 축출되었다. 이 파벌은 스트라서주의(Strasserite) 계열의 나치즘을 고수하며, 1985년 5월 당 이사진의 장악권을 확보하고 반대파의 당적을 정지시켰다.스트라서주의자들은 자신들을 "급진적이고 젊으며 성공적인" 집단으로 묘사하며, 내부 반대파의 "구식 보수 정책"과 대조적인 접근 방식을 강조했다. 1986년 11월 정기총회에서 스트라서주의자들은 중앙 집중식 간부 시스템에 따라 당을 재편성했다. 이들은 볼로냐 대학살(Bologna massacre) 이후 런던에 숨어 있던 이탈리아 파시스트 민병대 무장 혁명 핵(Nuclei Armati Rivoluzionari) 구성원들과의 강력한 유대 관계에 영향을 받았다.
내부 반대파들은 1987년 1월 플래그 그룹(Flag Group)을 결성하여 "국민전선"이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이들은 스트라서주의 그룹보다 더 많은 노동 계급 지도자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후자를 해외 이념적 유행을 추구하는 지식인으로 여겼다. 1990년까지 플래그 그룹과 스트라서주의자들의 공식 국민전선(Official National Front)이라는 두 개의 조직이 존재했다. 스트라서주의 공식 국민전선은 누벨 드로이트(Nouvelle Droite)의 영향을 받아 다인종 사회와 자본주의의 종식을 추구하는 "모든 색깔의 인종주의자들의 광범위한 전선"에 대한 지지를 촉진했고, 흑인 민족주의자인 루이스 퍼러칸(Louis Farrakhan)과 마커스 가르비(Marcus Garvey)를 칭찬했다. 그들의 출판물인 ''Nationalism Today''에는 리비아와 이란 정부에 대한 긍정적인 기사가 실려 있었다.
1989년, 닉 그리핀(Nick Griffin), 데렉 홀랜드, 콜린 토드는 국제 제3의 길(International Third Position)을 설립하기 위해 공식 국민전선을 이탈했다. 1990년 3월, 공식 국민전선은 지도자들에 의해 해산되었고, 그들은 새로운 조직인 제3의 길로 대체했다.
2. 6. 쇠퇴와 현재 (1990–현재)
1990년대 동안 국민전선(NF)은 타인달의 새로운 영국국민당(BNP)에 밀려 영국 최고의 극우 운동으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1995년 랜즈다운 로드 축구 폭동 이후, 국민전선 의장 이안 앤더슨은 "국민전선"이라는 이름과 관련된 부정적인 연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명을 국민민주당으로 변경하려 했다. 그러나 소규모 파벌이 분리되어 국민전선이라는 이름을 유지했고, 1997년과 2001년 총선에 참여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2001년까지 국민전선은 신나치 준군사조직인 컴뱃 18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국민전선은 계속 집회를 조직했지만, 여러 집회가 연이은 내무장관들에 의해 금지되었다.[2]2010년 고등법원 판결로 영국국민당은 헌법에서 비백인 회원 가입 금지 조항을 삭제해야 했고, 이는 국민전선으로의 이탈을 초래했다.[3] 잉글랜드 국방동맹(EDL)이 등장한 후, 국민전선은 연계를 추구했지만 EDL은 국민전선 및 기타 기존 극우 단체들과 거리를 두려고 했다. 이후 EDL이 쇠퇴하면서, 국민전선은 EDL에서 분리된 일부 단체들과 협력했다. 2015년 3월 케빈 브라이언이 국민전선 의장이 되었고,[4] 2015년 11월 데이브 맥도널드가 그를 대신했으며,[5] 2018년 9월 토니 마틴이 의장직을 이어받았다.[1]
국민전선은 2015년 영국 총선 이후 어떤 선거에도 후보를 내지 않았다.
3. 이념
국민전선(NF)은 극우 또는 극단우익 정당으로, 정치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이를 파시스트 또는 신파시스트로 규정한다. 역사학자 마틴 더럼은 국민전선이 프랑스의 국민전선과 독일의 공화당처럼 "고전적 파시즘의 직계 후손"을 대표한다고 말했다. 정치 심리학자 마이클 빌리그는 국민전선이 파시즘의 반복되는 특징들을 많이 보여주었다고 지적한다. 즉,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의 강조, 반마르크스주의적 입장, 국가주의와 사기업 지원, 그리고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적대적인 시각 등이다.
국민전선은 스스로를 "파시스트"라고 묘사하는 용어를 거부했고, 기존 파시스트 운동과의 연관성을 숨기려 했으며, 지도자들의 과거 파시스트 활동을 부인했다.
== 인종주의와 민족주의 ==
국민전선(NF)은 영국 민족주의 정당이다. 초기 정책 선언문에서 "모든 문제에서 영국의 완전한 국가 주권 회복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고 밝혔다. 국제주의를 거부했으며,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모두에 반대했는데, 이는 국제주의가 보편적 가치를 지지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국가는 각자 고유한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민족주의 정당이라고 칭하며, 인종과 밀접하게 연관된 민족주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국민전선 당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을 "인종주의자"라고 불렀으며, 이 정당은 인류가 고유한 신체적, 사회적 특징을 가진 생물학적으로 구분되는 인종으로 나뉜다고 주장했다.
국민전선은 모든 구성원이 공통의 이익을 공유하는 별개의 영국 인종 "국가"의 존재를 주장했다.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민족주의는 영국 인종 통합에 대한 위협으로 비난받았다. 영국 국가 내에서 계급을 허구의 구분으로 간주했으며, 계급 투쟁 개념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거부했고, 대부분의 파시스트 집단과 마찬가지로 계급 간의 경계를 넘어 지지를 얻으려고 했다. 국민전선에게 애국심은 영국 국가의 결속에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며, 민족주의는 애국심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간주되었다. 당원들은 자신들을 애국자로 여겼고, 이 정당은 유니온 플래그와 현충일과 같은 영국 애국적 상징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백인 우월주의 정당인 국민전선(NF)은 인종 평등의 개념을 거부했다. 서로 다른 능력을 기반으로 인종을 계층적으로 순위를 매길 수 있으며, "우월한 인종"이 세계 지배를 위해 경쟁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전선은 인종 간 결혼과 혼혈에 반대했으며,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유혹하는 것에 대해 특히 불안감을 표출했다. 자신들의 인종적 편견은 다른 인종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인종 보존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비백인 인종 집단이 "코카소이드와 몽골로이드"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 중반, 타인달은 ''Spearhead''를 통해 "흑인은 백인보다 뇌가 작고 훨씬 덜 복잡한 대뇌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 초, ''Nationalism Today''는 흑인 아프리카인의 평균 IQ가 백인보다 낮아 "백인 학교에 다니거나 백인 사회에서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국민전선이 발행한 자료는 흑인을 더럽고 비위생적이며, 질병에 감염되어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 없는 존재로 묘사했다.
자신의 견해에 대한 학문적 지원을 추구하며, 과학적 인종주의 출판물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국민전선의 도서 목록에는 과학적 인종주의를 옹호하는 학술적 및 준학술적 서적이 포함되어 있었고, 초기 당 서적에서는 종종 한스 아이젠크, 윌리엄 쇼클리, 아서 젠슨, 리처드 허른스타인의 저술을 인용했으며, ''Spearhead'' 및 기타 국민전선 출판물에서는 ''인류 계간지''의 기사를 반복적으로 인용했다.
== 반이민주의와 본국 송환 ==
국민전선(NF)의 핵심 공약은 모든 비백인 이민자와 그 자손들을 강제 추방하는 것이었다. 혼혈 관계에 있는 백인 영국인 배우자도 추방 대상에 포함되었다. 추방 전 비백인들은 영국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복지, 교육, 주택 접근에 있어 백인 영국인보다 낮은 순위로 밀려날 것이라고 명시했다. 또한, 향후 비백인의 영국 이주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 국민전선은 영연방 국가 출신 백인 이민자의 입국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다른 지역 출신 백인의 이주에 대해서는 "엄격한 통제"를 요구했다.
국민전선은 영국이 백인 국가로 남아야 한다는 이유로 모든 유색인종 이민을 반대하며, 이미 영국에 있는 유색인종 이민자들과 그 자손 및 부양 가족들을 가능한 한 인도적인 방법으로 본국으로 송환할 것을 옹호했다.
초기에는 이민자들 자신이 아닌 정치인들이 이민을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1969년에는 "여러분의 적은 유색인종 이민자가 아니라 수십만 명의 이민자를 들여온 영국 정부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노동당은 표를 늘리기 위해 이민을 장려했고 보수당은 이민자들을 값싼 노동력으로 여겼다고 주장했다.
국민전선은 여러 문제들을 인종 및 이민과 연결시켰고, 이민자들이 일자리, 주택, 복지에 대한 경쟁이 된다는 백인 영국인들의 우려를 이용했다. 이민자들이 나병과 결핵과 같은 질병을 옮긴다는 것, 국민건강보험 서비스(NHS)에 부담이 된다는 것,등의 주장을 펼쳤다.
==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 부정 ==
국민전선(National Front)은 반유대주의적이다. 이들은 유대인이 생물학적으로 구별되는 인종이며, 세계의 "우수 인종" 중 하나로서 백인 "코카소이드" 인종을 파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전선은 유대인 음모 집단이 영국으로의 비백인 이주를 조직했으며, 인종 혼합, 국제주의, 내부 분열 조장을 통해 백인 인종을 약화시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19세기 러시아의 반유대주의적 위작인 '''시온 장로 의정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국민전선은 홀로코스트 이후 반유대주의에 대한 대중적 반감을 인지하고 "유대인" 대신 "금권", "국제주의자", "세계주의자" 등의 은어를 사용했다.
체스터턴, 틴달, 웹스터를 포함한 국민전선의 많은 핵심 당원들은 당에 가입하기 전부터 반유대주의적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틴달은 1963년에 "유대인은 세계적인 해충"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은 홀로코스트를 "600만 명의 신화"라고 언급하며 홀로코스트 부정에 가담했다.
== 정부와 국가 ==
1970년대 국민전선(NF)은 영국의 자유민주주의를 "가짜 민주주의"라고 비난하며 주요 현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활용하여 "진정한 민주적 정치 체제"를 구축하겠다고 선언했다.
국민전선은 민주주의를 국가의 보존에 종속되는 사치품으로 여겼다. 틴달(Tyndall)은 ''Spearhead''에서 만약 국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면 의회 민주주의를 지지할 것이지만, "영국의 생존과 국가 회복이 무엇보다 최우선 과제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정치적 방법을 지지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치적 당파심이나 선거에 구애받지 않는 강력한 지도자의 통치를 요구했는데, 그 이유는 소집단의 이익이나 단기적인 고려 사항이 아닌 국가 이익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980년대 스트라서파 지도부 하에서 국민전선은 리비아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녹색서』에서 제시한 제3세계 이론의 영향을 크게 받아 정부에 대한 다른 입장을 채택했다. 그것은 거리 의회, 지역 의회, 카운티 의회, 그리고 "각 영국 국가"를 위한 국가 인민 의회와 같은 공동체적 정치 구조의 수립을 촉진했다.
== 국제 관계 ==
국민전선(NF)은 유대인 음모에 의한 세계 단일 정부 계획의 일환으로 국제기구들을 반대했다. 영국의 국제연합 및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에 반대했다. EEC을 대체하기 위해 NF는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같은 영국 연방의 "백인 국가들"뿐만 아니라 로디지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소수 정부와의 더욱 강력한 영국과의 관계를 촉구했다. 국민전선에 따르면, 이는 "전 세계 영국계 민족들 간의 민족적, 문화적, 가족적 유대를 강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NF가 이끄는 영국은 유대인 음모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이유로 미국과 동맹을 유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북대서양 조약 기구 탈퇴를 촉구하며, 대신 핵무기를 통해 영국의 방어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 동안 국민전선은 영국 연합주의자로서, 영국의 통일을 옹호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국민전선은 얼스터 연합주의자들을 지지하며, 아일랜드 공화주의를 영국 통일을 약화시키려는 공산주의 음모로 간주했다. NF는 영국이 과격한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을 다루는 데 너무 온화했다고 주장하며, 민간 법정을 군사 법정으로 대체하고, 임시 아일랜드 공화군 대원들을 구금하고, 파괴 행위나 살인죄를 저지른 자들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경제 정책 ==
1970년대 국민전선은 자신들을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것으로 규정하며, 양쪽 모두의 요소를 결합한 경제 시스템을 지지했다. 민간 기업을 지지했지만, 자유 시장 자본주의는 국가의 이익보다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며 거부했다. 국가 경제 자립을 강조하며 국제 자유 무역을 거부하는 경제적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이러한 접근 방식을 통해 유대인 음모에 의해 통제된다고 믿었던 국제 금융 시스템으로부터 영국을 분리시키고자 했다. 영국 산업에 대한 외국 자본의 소유를 반대했고, 보호 무역주의와 통화주의 정책을 지지하며, 은행 및 금융 서비스에 대한 국가 통제를 주장하고, 주택 건설 자금 조달을 위한 무이자 대출을 제공하는 국가 은행 설립을 요구했다.
1980년대 스트라서파가 장악한 후, 국민전선은 분배주의 정책을 채택했다. 1980년 당의 자료에 따르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혁명적 민족주의"에 의해 극복되어야 할 "쌍둥이 악"이라고 주장했다. 스트라서파의 분배주의에 따라 1980년대 국민전선은 대기업과 산업을 소규모 민간 기업, 노동자 협동조합, 그리고 금융 기관 및 중공업의 경우 국유 기업으로 구성된 3자 시스템으로 재분배할 것을 요구했다.
== 사회 문제 ==
국민전선(NF)은 자유주의적이고 사회적으로 관대한 정책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며, 영국 사회의 점증하는 관용이 유대인 음모에 의해 조직된 것이라고 주장했다.[7] 이 당은 전통적인 성역할의 변화에 반대했다. 동성애, 혼혈 결혼, 그리고 매춘을 규탄했다.
1970년대에 국민전선(NF)은 교육계가 "공산주의자"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했고, 국민전선(NF) 정부 하에서는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교사가 해고될 것이라고 밝혔다.
국민전선(NF)은 자급자족을 숭상하여 개인은 국가에 봉사할 의향이 있어야 하며 시민의 권리는 그들의 의무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에 국민전선(NF)은 영국의 복지 국가를 비판하며 영국을 "게으름뱅이의 낙원"으로 인식하는 것을 종식시키고 싶다고 밝혔다. 국민전선(NF)은 초창기부터 법과 질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취하여, 더 가혹한 형사 처벌, 더 엄격한 교도소, 그리고 사형, 징병제의 재도입을 촉구했다.
3. 1. 인종주의와 민족주의
국민전선(NF)은 영국 민족주의 정당이다. 초기 정책 선언문에서 "모든 문제에서 영국의 완전한 국가 주권 회복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고 밝혔다. 국제주의를 거부했으며,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모두에 반대했는데, 이는 국제주의가 보편적 가치를 지지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국가는 각자 고유한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민족주의 정당이라고 칭하며, 인종과 밀접하게 연관된 민족주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국민전선 당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을 "인종주의자"라고 불렀으며, 이 정당은 인류가 고유한 신체적, 사회적 특징을 가진 생물학적으로 구분되는 인종으로 나뉜다고 주장했다. 일부 발행물에서는 "백인"과 "흑인" 인종만 언급했지만, 다른 곳에서는 "노르딕", "코카소이드", "네그로이드", "셈족", "튀르코-아르메노이드" 등 다양한 인종 집단을 나열했다. 이는 인종 집단 내에 "인종 내 인종"의 형태인 "국가"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많은 당 활동가들은 "인종"과 "국가"라는 용어를 서로 바꿔 사용했다.
국민전선은 모든 구성원이 공통의 이익을 공유하는 별개의 영국 인종 "국가"의 존재를 주장했다.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민족주의는 영국 인종 통합에 대한 위협으로 비난받았다. 영국 국가 내에서 계급을 허구의 구분으로 간주했으며, 계급 투쟁 개념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거부했고, 대부분의 파시스트 집단과 마찬가지로 계급 간의 경계를 넘어 지지를 얻으려고 했다. 국민전선에게 애국심은 영국 국가의 결속에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며, 민족주의는 애국심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간주되었다. 당원들은 자신들을 애국자로 여겼고, 이 정당은 유니온 플래그와 현충일과 같은 영국 애국적 상징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내부자와 외부자의 변증법"이 "이데올로기의 핵심"이며, 국민전선의 "내부 집단과 외부 집단 사이의 엄격한 경계"는 극우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1974년 선거 공약에서 국민전선은 백인 영국인의 "활발한 출산율"을 요구했으며, 영국의 인구 과잉은 영국 연방으로 이민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제국주의적 견해를 홍보했다. 이 정당은 또한 백인 영국인의 질적 향상과 양적 증가를 촉구하며 우생학을 홍보했다.
백인 우월주의 정당인 국민전선(NF)은 인종 평등의 개념을 거부했다. 서로 다른 능력을 기반으로 인종을 계층적으로 순위를 매길 수 있으며, "우월한 인종"이 세계 지배를 위해 경쟁한다고 주장했다. 인종 차별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신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고 믿었지만, 비백인들이 영국과 다른 백인 다수 국가로 이주하여 원주민과 혼혈하여 동화를 통해 "백인 제노사이드"를 초래하도록 부추겨졌다고 주장했다.
국민전선은 인종 간 결혼과 혼혈에 반대했으며,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유혹하는 것에 대해 특히 불안감을 표출했다. 자신들의 인종적 편견은 다른 인종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인종 보존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비백인 인종 집단이 "코카소이드와 몽골로이드"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 중반, 타인달은 ''Spearhead''를 통해 "흑인은 백인보다 뇌가 작고 훨씬 덜 복잡한 대뇌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 초, ''Nationalism Today''는 흑인 아프리카인의 평균 IQ가 백인보다 낮아 "백인 학교에 다니거나 백인 사회에서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국민전선이 발행한 자료는 흑인을 더럽고 비위생적이며, 질병에 감염되어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 없는 존재로 묘사했다. ''Spearhead''에는 흑인이 인육을 먹는 사람이라는 언급이 있었고, 적어도 한 기사에서는 흑인이 흙과 배설물을 먹는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견해에 대한 학문적 지원을 추구하며, 과학적 인종주의 출판물에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국민전선의 도서 목록에는 과학적 인종주의를 옹호하는 학술적 및 준학술적 서적이 포함되어 있었고, 초기 당 서적에서는 종종 한스 아이젠크, 윌리엄 쇼클리, 아서 젠슨, 리처드 허른스타인의 저술을 인용했으며, ''Spearhead'' 및 기타 국민전선 출판물에서는 ''인류 계간지''의 기사를 반복적으로 인용했다. 이러한 연구를 인용하면서 국민전선은 자신의 견해가 과학적이라고 주장했지만, 필딩은 국민전선의 인종적 견해가 "'과학적' 근거만큼이나 맹목적인 주장, 믿음에 의존한다"고 지적했다.
1967년 2월 7일에 설립되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지지율이 상승했지만, 그 후 하락하여 현재는 소규모 정당이 되었다. 백인 우월주의를 표방하며, 이민과 유색인종 등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3. 2. 반이민주의와 본국 송환
국민전선(NF)의 핵심 공약은 모든 비백인 이민자와 그 자손들을 강제 추방하는 것이었다. 혼혈 관계에 있는 백인 영국인 배우자도 추방 대상에 포함되었다. "본국 송환" 과정은 10년이 걸릴 수 있으며, 추방 전 비백인들은 영국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복지, 교육, 주택 접근에 있어 백인 영국인보다 낮은 순위로 밀려날 것이라고 명시했다. 또한, 향후 비백인의 영국 이주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 국민전선은 영연방 국가 출신 백인 이민자의 입국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다른 지역 출신 백인의 이주에 대해서는 "엄격한 통제"를 요구했다.국민전선은 영국이 백인 국가로 남아야 한다는 이유로 모든 유색인종 이민을 반대하며, 이미 영국에 있는 유색인종 이민자들과 그 자손 및 부양 가족들을 가능한 한 인도적인 방법으로 본국으로 송환할 것을 옹호했다.
초기에는 이민자들 자신이 아닌 정치인들이 이민을 가능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1969년에는 "여러분의 적은 유색인종 이민자가 아니라 수십만 명의 이민자를 들여온 영국 정부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노동당은 표를 늘리기 위해 이민을 장려했고 보수당은 이민자들을 값싼 노동력으로 여겼다고 주장했다. 초기 출판물에서는 일반적으로 비백인에 대한 경멸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당 집회에서는 그러한 언어가 사용되었다. 국민전선의 언론은 "흑인 야만인들이 노인들을 테러한다"나 "아시아인들이 기이한 성 살인 의식을 수입한다"와 같은 인종적으로 선동적인 헤드라인을 포함했으며, 비백인 이민자들을 해충에 비유하여 특정 지역을 "이민자들로 가득 찬" 지역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국민전선은 여러 문제들을 인종 및 이민과 연결시켰고, 이민자들이 일자리, 주택, 복지에 대한 경쟁이 된다는 백인 영국인들의 우려를 이용했다. 이민자들이 나병과 결핵과 같은 질병을 옮긴다는 것, 국민건강보험 서비스(NHS)에 부담이 된다는 것, 무능한 이민자 직원들이 NHS에 해롭다는 등의 주장을 펼쳤다. 또한 이민자들이 세금을 탈세하고 직장에서 거만하고 공격적이며 비위생적이라고 주장했다. 흑인들은 범죄의 원인이며, 흑인 학생들이 학교 질을 저하시킨다고 주장했다.
3. 3.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 부정
국민전선(National Front)은 반유대주의적이다. 이들은 유대인이 생물학적으로 구별되는 인종이며, 세계의 "우수 인종" 중 하나로서 백인 "코카소이드" 인종을 파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전선은 유대인 음모 집단이 영국으로의 비백인 이주를 조직했으며, 인종 혼합, 국제주의, 내부 분열 조장을 통해 백인 인종을 약화시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19세기 러시아의 반유대주의적 위작인 '''시온 장로 의정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국민전선은 홀로코스트 이후 반유대주의에 대한 대중적 반감을 인지하고 "유대인" 대신 "금권", "국제주의자", "세계주의자" 등의 은어를 사용했다. 1970년대에 이들은 자신들을 "반시온주의적"이라고 칭하며 모든 유대인이 아닌 "시온주의자"에 반대한다고 주장했지만, "시온주의"라는 단어는 유대인 음모 집단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체스터턴, 틴달, 웹스터를 포함한 국민전선의 많은 핵심 당원들은 당에 가입하기 전부터 반유대주의적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틴달은 1963년에 "유대인은 세계적인 해충"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은 홀로코스트를 "600만 명의 신화"라고 언급하며 홀로코스트 부정에 가담했다. 이는 나치 독일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전술적 이유였을 가능성이 있다.
3. 4. 정부와 국가
1970년대 국민전선(NF)은 영국의 자유민주주의를 "가짜 민주주의"라고 비난하며 주요 현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활용하여 "진정한 민주적 정치 체제"를 구축하겠다고 선언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국민의 의지를 대표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함으로써 국민전선은 포퓰리즘적 수사를 사용했다. 그러나 필딩(Fielding)은 "국민전선 이념의 본질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믿었고, 오히려 "포퓰리즘적 수사"와 상반되는 "엘리트주의적 경향"을 반영했다고 보았다.국민전선은 민주주의를 국가의 보존에 종속되는 사치품으로 여겼다. 틴달(Tyndall)은 ''Spearhead''에서 만약 국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면 의회 민주주의를 지지할 것이지만, "영국의 생존과 국가 회복이 무엇보다 최우선 과제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정치적 방법을 지지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치적 당파심이나 선거에 구애받지 않는 강력한 지도자의 통치를 요구했는데, 그 이유는 소집단의 이익이나 단기적인 고려 사항이 아닌 국가 이익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Spearhead''에서 틴달은 "다당제 또는 양당제, 강력한 노동조합, '자유로운' 언론과 같은 '세련된' 서구 제도가 아직 뿌리내리지 않은 바나나 공화국에서만 진정한 개성과 결단력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여 진정으로 이끌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필딩은 국민전선이 정권을 잡았다면 의회를 소외시키고 토탈리타리즘적 방식으로 통치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1980년대 스트라서파 지도부 하에서 국민전선은 리비아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녹색서』에서 제시한 제3세계 이론의 영향을 크게 받아 정부에 대한 다른 입장을 채택했다. 그것은 거리 의회, 지역 의회, 카운티 의회, 그리고 "각 영국 국가"를 위한 국가 인민 의회와 같은 공동체적 정치 구조의 수립을 촉진했다. 그들의 미래에 대한 견해에서 영국 국민은 무장하고 군사 전술 훈련을 받아 국가가 통제하는 전문 군대가 아닌 지역 민병대를 설립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3. 5. 국제 관계
국민전선(NF)은 유대인 음모에 의한 세계 단일 정부 계획의 일환으로 국제기구들을 반대했다. 영국의 국제연합 및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에 반대했다. EEC을 대체하기 위해 NF는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같은 영국 연방의 "백인 국가들"뿐만 아니라 로디지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소수 정부와의 더욱 강력한 영국과의 관계를 촉구했다. 국민전선에 따르면, 이는 "전 세계 영국계 민족들 간의 민족적, 문화적, 가족적 유대를 강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NF가 이끄는 영국은 유대인 음모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이유로 미국과 동맹을 유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북대서양 조약 기구 탈퇴를 촉구하며, 대신 핵무기를 통해 영국의 방어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970년대 동안 국민전선은 영국 연합주의자로서, 영국의 통일을 옹호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국민전선은 얼스터 연합주의자들을 지지하며, 아일랜드 공화주의를 영국 통일을 약화시키려는 공산주의 음모로 간주했다. NF는 영국이 과격한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을 다루는 데 너무 온화했다고 주장하며, 민간 법정을 군사 법정으로 대체하고, 임시 아일랜드 공화군 대원들을 구금하고, 파괴 행위나 살인죄를 저지른 자들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 초, 아일랜드 공화국이 공화주의 과격파를 은닉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며, 이는 "전쟁 행위"이므로 무역 제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같은 10년 동안 NF는 전위 연합 진보당을 지지했지만, 많은 얼스터 연합주의자들은 NF를 의심했고, 1973년 얼스터 방위 협회는 NF를 "신나치 운동"으로 규정했다. 1985년 - 당시 스트라서주의자들이 당을 장악한 시점 - NF는 영국-아일랜드 협정에 대한 대응으로 북아일랜드가 독립을 선언할 것을 촉구했다.
3. 6. 경제 정책
1970년대 국민전선은 자신들을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것으로 규정하며, 양쪽 모두의 요소를 결합한 경제 시스템을 지지했다. 민간 기업을 지지했지만, 자유 시장 자본주의는 국가의 이익보다 기업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며 거부했다. 국가 경제 자립을 강조하며 국제 자유 무역을 거부하는 경제적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이러한 접근 방식을 통해 유대인 음모에 의해 통제된다고 믿었던 국제 금융 시스템으로부터 영국을 분리시키고자 했다. 영국 산업에 대한 외국 자본의 소유를 반대했고, 보호 무역주의와 통화주의 정책을 지지하며, 은행 및 금융 서비스에 대한 국가 통제를 주장하고, 주택 건설 자금 조달을 위한 무이자 대출을 제공하는 국가 은행 설립을 요구했다. 이러한 경제적 견해는 영국의 극우 정당들 사이에서 공통적이었으며, 예를 들어 영국 파시스트 연맹(BUF)의 견해와 유사했다.1980년대 스트라서파가 장악한 후, 국민전선은 분배주의 정책을 채택했다. 1980년 당의 자료에 따르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혁명적 민족주의"에 의해 극복되어야 할 "쌍둥이 악"이라고 주장했다. 스트라서파의 분배주의에 따라 1980년대 국민전선은 대기업과 산업을 소규모 민간 기업, 노동자 협동조합, 그리고 금융 기관 및 중공업의 경우 국유 기업으로 구성된 3자 시스템으로 재분배할 것을 요구했다. 실업 문제 해결을 위해 도시에서 시골로의 인구 이동을 장려하고, 기계화된 농업을 소규모 노동 집약적 농장으로 대체할 것이라고 밝혔다.
3. 7. 사회 문제
국민전선(NF)은 자유주의적이고 사회적으로 관대한 정책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며, 영국 사회의 점증하는 관용이 유대인 음모에 의해 조직된 것이라고 주장했다.[7] 이 당은 전통적인 성역할의 변화에 반대했다. 동성애, 혼혈 결혼, 그리고 매춘을 규탄했다.1970년대에 국민전선(NF)은 교육계가 "공산주의자"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했고, 국민전선(NF) 정부 하에서는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교사가 해고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 10년 동안, 학생들의 다양한 능력에 맞는 교육을 강조했지만 종합학교 교육을 전면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다. "엉성한 좌익에서 영감을 받은 교육 유행"을 거부하면서 시험과 스포츠 경쟁에 대한 더 큰 강조를 요구했다.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영국 역사 교육을 강조하고, 사회과학을 희생하여 교육과정에서 과학기술을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민전선(NF)은 자급자족을 숭상하여 개인은 국가에 봉사할 의향이 있어야 하며 시민의 권리는 그들의 의무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에 국민전선(NF)은 영국의 복지 국가를 비판하며 영국을 "게으름뱅이의 낙원"으로 인식하는 것을 종식시키고 싶다고 밝혔다. 국민전선(NF)은 초창기부터 법과 질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취하여, 더 가혹한 형사 처벌, 더 엄격한 교도소, 그리고 사형, 징병제의 재도입을 촉구했다. 자기 책임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잘못을 사회적 배경 탓으로 돌리는 생각을 거부했다.
4. 조직 및 구조
1970년대 전성기 시절, 국민전선(NF)은 7명에서 20명 사이의 당원들로 구성된 지도부에 의해 운영되었다. 지도부는 지역 조직들을 엄격하게 통제하며 당의 정책을 결정하고, 조직과 재정을 관리하며, 입당과 제명을 감독하고, 전술을 결정했다. 지도부의 3분의 1은 매년 사퇴해야 했으며, 후임은 당원들의 우편 투표로 결정되었다.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지도부는 그 구성원 중 두 명을 의장과 부의장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1977년 정기총회에서 존 틴들의 제안에 따라 의장은 당원들의 우편 투표를 통해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지도부는 런던에서 자주 회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당 운영은 의장과 부의장에게 맡겨졌다.
국민전선의 지역 조직은 12명 미만의 회원으로 구성된 "그룹"과 12명 이상의 회원으로 구성된 "지부"로 나뉘었다. 1973년 7월에는 32개의 지부와 80개의 그룹이, 1974년 1월에는 30개의 지부와 54개의 그룹이 있었다. 대부분은 영국 남동부에 있었는데, 그레이터 런던에 11개의 지부와 8개의 그룹, 남동부 다른 지역에 5개의 지부와 22개의 그룹이 있었다. 미들랜드 지역에 5개의 지부와 3개의 그룹, 북부 지역에 7개의 지부와 11개의 그룹, 영국 서부에 1개의 지부와 7개의 그룹,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에 각각 1개의 그룹이 있었다. 각 지부 또는 그룹에는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있었고, 위원회 직책은 매년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 보통 술집에서 열렸던 지부 회의는 자금 조달과 같은 실질적인 문제에 주로 집중되었다. 일부 국민전선 지부는 당원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지지자들을 위한 지지자 협회를 설립했다. 지지자 조직은 다른 지역에도 설립되었는데, 1977년 뉴질랜드, 1978년 호주, 캐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설립되었다. 1974년 4월, 당은 전국 당과 지역 그룹 및 지부 간의 조정을 위해 지역 위원회를 도입했다.
1986년에 스트라서파가 장악한 후, 공식적으로 간부 시스템의 지도 체제를 채택했다. 이는 각 국민전선 당원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주의적 악몽"을 거부하고 국가에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 개인적인 "정신 혁명"을 겪는 "정치적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관련이 있었다.
4. 1. 지도부와 지부
1970년대 전성기 시절, 국민전선(NF)은 7명에서 20명 사이의 당원들로 구성된 지도부에 의해 운영되었다. 지도부는 지역 조직들을 엄격하게 통제하며 당의 정책을 결정하고, 조직과 재정을 관리하며, 입당과 제명을 감독하고, 전술을 결정했다. 지도부의 3분의 1은 매년 사퇴해야 했으며, 후임은 당원들의 우편 투표로 결정되었다. 1971년부터 1975년까지 지도부는 그 구성원 중 두 명을 의장과 부의장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1977년 정기총회에서 존 틴들의 제안에 따라 의장은 당원들의 우편 투표를 통해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지도부는 런던에서 자주 회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당 운영은 의장과 부의장에게 맡겨졌다.국민전선의 지역 조직은 12명 미만의 회원으로 구성된 "그룹"과 12명 이상의 회원으로 구성된 "지부"로 나뉘었다. 1973년 7월에는 32개의 지부와 80개의 그룹이, 1974년 1월에는 30개의 지부와 54개의 그룹이 있었다. 대부분은 영국 남동부에 있었는데, 그레이터 런던에 11개의 지부와 8개의 그룹, 남동부 다른 지역에 5개의 지부와 22개의 그룹이 있었다. 미들랜드 지역에 5개의 지부와 3개의 그룹, 북부 지역에 7개의 지부와 11개의 그룹, 영국 서부에 1개의 지부와 7개의 그룹,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에 각각 1개의 그룹이 있었다. 각 지부 또는 그룹에는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있었고, 위원회 직책은 매년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 보통 술집에서 열렸던 지부 회의는 자금 조달과 같은 실질적인 문제에 주로 집중되었다. 일부 국민전선 지부는 당원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지지자들을 위한 지지자 협회를 설립했다. 지지자 조직은 다른 지역에도 설립되었는데, 1977년 뉴질랜드, 1978년 호주, 캐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설립되었다. 1974년 4월, 당은 전국 당과 지역 그룹 및 지부 간의 조정을 위해 지역 위원회를 도입했다.
1986년에 스트라서파가 장악한 후, 공식적으로 간부 시스템의 지도 체제를 채택했다. 이는 각 국민전선 당원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주의적 악몽"을 거부하고 국가에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 개인적인 "정신 혁명"을 겪는 "정치적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관련이 있었다.
4. 2. 보안 및 폭력
1970년대 내내 국민전선은 보안에 힘쓰며 반대 세력의 이름과 주소를 기록한 파일을 만들었다. 행진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 그룹” 또는 “명예 경호대”를 결성하여 즉석 무기를 휴대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진은 이민자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고, 인종적 긴장을 고조시키며,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민자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자주 이루어졌다. 지방 당국은 때때로 행진을 금지했는데, 2012년 애버딘 시의회는 아돌프 히틀러의 생일에 행진을 허가해 달라는 국민전선의 요청을 거부했다. 또한 국민전선은 반파시스트 및 주류 정치 집회를 방해했다. 1975년 국민전선 활동가들은 시민자유 전국협의회 회의를 공격하여 8명이 병원에 입원했고, 또 다른 사례로는 로디지아의 흑인 다수 통치로의 이행을 논의하는 영국 자유당 회의에 난입하여 "백인 우월주의"를 외쳤다.
국민전선은 자기 방어를 위해서만 폭력을 사용했다고 주장했지만, 필딩은 1970년대에 이 단체가 “공격적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필딩은 국민전선과 관련된 가장 주목할 만한 폭력 충돌은 1974년 6월 레드 라이언 광장 폭동에서 반파시스트 시위대인 케빈 게이트리가 사망한 사건이라고 언급했다. 1977년 8월 루이섬에서는 트로츠키즘 그룹이 국민전선 행진대열을 공격하여 “루이섬 전투”가 벌어졌다. 1979년 4월 사우스올에서는 국민전선 반대 시위가 경찰과 충돌하여 블레어 피치가 사망했다.
은밀한 국민전선의 개입이 의심되지만 증명되지 않은 사건들도 있다. 1974년 몇몇 남성들이 브라이턴에 국민전선 포스터를 붙이고, 유대인이라고 비난한 사람들을 폭행하고, 영국 공산당(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점을 공격했지만, 현지 국민전선 지부는 연루를 부인했다. 1978년 6월 반나치 동맹 본부가 방화 공격을 받았는데, 건물에는 "국가전선이 지배한다(NF Rules OK)"라는 구호가 낙서되어 있었지만, 국민전선은 책임을 부인했다. 당 지도부는 당원과 지지자들의 폭력에 거의 무관심했고, 폭력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일부 당원들을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4. 3. 하부 조직
국민전선(NF)은 다양한 하부 조직을 결성했다. 1974년에는 NF 노동조합원 협회를 출범시켰고, 짧은 기간 동안 노동조합 관련 잡지인 ''The British Worker''를 발행했다. 1970년대에는 국민전선을 홍보하기 위해 헌트 사보타주 협회(Hunt Saboteurs Association)와 납세자 및 주민 협회 등 다른 단체에 당원들이 잠입하도록 장려했다. 1978년에는 1976년 인종관계법에 따라 인종적 증오를 선동한 혐의로 기소되는 당원 수가 증가함에 따라 당 지도부가 법률부를 설립했다. 또한 1970년대에는 학생회를 결성하고 학생 잡지 ''Spark''를 발행했다. NF 학생회는 처음에는 대학생들을 모집하려고 했지만, 나중에는 학교와 식스폼(sixth form)으로 초점을 옮겼다.1978년에는 청년 국민전선(YNF)을 출범시켰다. 회원 자격은 14세에서 25세로 제한되었다. YNF는 뉴스레터 ''Bulldog''를 발행하고 YNF 팀 간의 축구 경기를 조직했다.
NF는 락 어게인스트 레이시즘(Rock Against Racism)과 같은 음악 활동을 통해 좌파가 반파시스트 지지를 어떻게 조직했는지 관찰하고 유사한 기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1979년 당시 YNF 지도자였던 피어스(Pearce)는 RAC을 설립하여 NF가 네오나치 스킨헤드 밴드의 공연을 개최했다. 타인달(Tyndall)과 다른 NF 고위 당원들은 RAC가 제공하는 당원 확장 기회를 좋아했지만, 스킨헤드 하위 문화와의 연관성이 NF의 이미지를 손상시킬까 우려했다. 1982년 타인달이 당을 떠난 후 스크류드라이버(Skrewdriver)를 주력 밴드로 하여 RAC가 부활했다. 1983년 NF는 레코드 레이블인 화이트 노이즈 레코드(White Noise Records)를 출범시켰고, 이는 수년 동안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RAC는 공연장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1984년 닉 그리핀(Nick Griffin) 부모의 서퍽(Suffolk) 자택에서 첫 대규모 야외 콘서트를 개최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1980년대 후반, 스크류드라이버(Skrewdriver)는 NF에서 독립하여 자신의 극우 음악 홍보 네트워크인 블러드 앤드 아너(Blood & Honour)를 설립했다.
5. 지지 기반
1970년대 국민전선(NF)이 받은 지지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이는 득표율과 지부의 규모와 수에 모두 반영되었다. 영국 파시스트 동맹(BUF)의 초기 지지와 마찬가지로, 국민전선의 세력은 영국에 집중되어 있었고,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에서는 훨씬 약했다. 영국 내에서는 남해안과 런던, 버밍엄에 지지가 집중되었다.
국민전선의 선거 지지는 압도적으로 도시 지역과 잉글랜드에 집중되었으며, 잉글랜드의 시골 지역이나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에서는 지지가 거의 없었다. 1974년 선거 결과는 국민전선의 핵심 지지 기반이 런던 이스트엔드와 북동부 내륙 교외 지역에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베스널 그린(Bethnal Green), 쇼어디치(Shoreditch), 혹스턴(Hoxton), 해거스턴(Haggerston) 등 이스트엔드 내 특정 지역에 지지가 집중되었다.
1977년 에식스 대학교(University of Essex)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가 국민전선에 투표할 가능성이 있다고 응답했으며, 이는 이스트 미들랜즈(East Midlands)(10%)에서 가장 강했고, 런던(8%), 이스트앵글리아(East Anglia)(7%), 웨스트 미들랜즈(6%), 요크셔 험버사이드(6%) 순이었다. 1980년 보고서에서는 대런던과 웨스트 미들랜즈가 국민전선의 가장 큰 지지 기반 지역이며, 전국 득표율의 48%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국민전선 지지자의 72%가 노동 계급이었으며, 71%는 남성이었다. 숙련 노동자들 사이에서 반숙련 및 비숙련 노동자들보다 지지가 다소 강했다. 유권자들은 국민전선이 인종적 긴장을 조장(응답자의 3분의 2)하거나, 나치적 요소(64%)를 가지고 있으며, 영국을 독재 국가로 만들기를 원한다(56%)고 인식했다.
5. 1. 재정
국민전선은 재정 상황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자금이 부족하다고 자주 강조했다. 전성기에는 정규직 당직자 2명, 본사 사무직원 3명의 급여와 당 운영비를 충당할 정도의 자금만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앙당 자금은 회원비, 출판물 판매, 기부금, 복권 등 여러 출처에서 충당되었다. 기부금은 유세 및 집회에서 요청되었고, 해외의 부유한 지지자들로부터도 제공되었다. 지부는 선거 운동에서 후보자 자금을 조달해야 했으며, 헌옷 및 잡화 판매 및 사회 행사를 통해 자금을 모았다.5. 2. 회원 수
국민전선은 높은 회원 이탈률에 직면했다. 1977년, 워커는 국민전선의 회원 수를 "두 개의 수도꼭지가 모두 열리고 배수구는 막힌 욕조와 같다. 회원들이 들어오고 나간다"고 묘사했다. 필딩은 이에 동의하며 국민전선의 "안정적인 회원 수"는 "가입했다 탈퇴한" 사람들의 수보다 적다고 말했다. 테일러는 1970년대에 "최소 1만 2천 명"이 가입했다가 탈퇴했다고 추정했다. 반이민주의 때문에 이 당에 끌린 많은 사람들은 파시스트 이념을 알게 된 후 탈퇴했을 것이다. 다른 경우에는 사회적 따돌림, 실직, 언어적 학대, 그리고 드물게는 폭행과 같은 어려움을 견딜 수 없게 되어 탈퇴했을 수도 있으며, 특히 1970년대 후반 당의 운세가 기울면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국민전선은 회원 수를 공개하지 않았다. 서로는 반파시스트 잡지인 서치라이트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추정치"를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서치라이트는 1968년 4,000명으로 시작한 당의 회원 수가 1972년 1만 7,500명으로 정점을 찍었다가 1979년 1만 명, 1984년 3,148명, 1985년 1,000명으로 감소했다고 주장했다. 1989년 당원 수 추산에 따르면 플래그 그룹은 약 3,000명, 슈트라세르파 파벌은 약 600명이었다. 1970년대 정점에 이르렀을 때조차 국민전선의 회원 수는 1930년대 전성기 영국파시스트연맹(BUF)의 절반에 불과했다.
5. 3. 회원 구성
국민전선 당원에 대한 적절한 사회학적 표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1970년대 테일러(Taylor), 필딩(Fielding), 빌리그(Billig)에 의해 당원들과의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1973년 맥스 하나(Max Hanna)는 대부분의 국민전선 당원들이 "숙련 노동자 계급과 중하층 계급 출신"이었지만, 지부별로 차이가 있었다고 언급했다. 필딩은 당 활동은 일반적으로 하층 중산층보다는 상층 노동 계급과 중하층 계급 구성원에 의해 수행되었다고 지적했다. 필딩은 또한 당에는 모든 연령대의 개인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40대는 가족을 부양하는 데 보통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30대와 50대 남성이 40대보다 많았다고 덧붙였다.필딩은 국민전선 당원들이 자신들이 "파시스트" 또는 "괴짜"라는 생각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대신 자신들을 "애국자" 또는 "민족주의자"로 여겼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인종이 당원들이 국민전선에 가입하게 된 주요 이유였고, 그들이 자신의 인종적 사상을 "상식"으로 여겼으며, 비백인 영국인에 대한 심한 편견을 표출했다고 지적했다. 당원들 사이에서 흔한 인식은 영국에서 삶이 악화되었다는 것이었고, 종종 "나라는 망해가고 있다"는 표현으로 요약되었다. 필딩이 접한 당원들은 영국의 정치 지도자들을 부패하고 잔인하다고 널리 인식했고 음모론을 믿는 경향이 있었다.
필딩은 일부 당원들은 "자신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공동체와 안심을 찾는 데 동기가 부여되었다"고 믿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국민전선에 가입하는 것이 사회에 대한 심리적인 반항 행위였고, 많은 사람들이 친구나 친척이 가입했기 때문에 가입했다. 필딩은 국민전선이 게으름뱅이와 반사회적인 요소들에 대해 느끼는 도덕적 분노가 상층 노동 계급과 중하층 계급 영국인들에게 특별한 매력을 가졌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가장 적은 보상을 위해 가장 열심히 일한다고 느끼는 사회 계층이기 때문이라고 제안했다.
1970년대 국민전선은 새로운 하위 그룹을 통해 청년들을 끌어들이려고 시도했다. 라이언 샤퍼(Ryan Shaffer)는 1980년대 당의 전통적인 선거운동에서 벗어나 네오나치 청소년 단체와의 관계가 강화됨에 따라 "대부분 젊은이들"에게만 호소력이 제한되었다고 말했다.
5. 4. 유권자 기반
국민전선(NF)의 선거 지지는 압도적으로 도시 지역과 잉글랜드에 집중되었으며, 잉글랜드의 시골 지역이나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에서는 지지가 거의 없었다. 1974년 선거 결과는 국민전선의 핵심 지지 기반이 런던 이스트엔드와 북동부 내륙 교외 지역에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베스널 그린(Bethnal Green), 쇼어디치(Shoreditch), 혹스턴(Hoxton), 해거스턴(Haggerston) 등 이스트엔드 내 특정 지역에 지지가 집중되었다.1977년 에식스 대학교(University of Essex)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가 국민전선에 투표할 가능성이 있다고 응답했으며, 이는 이스트 미들랜즈(East Midlands)(10%)에서 가장 강했고, 런던(8%), 이스트앵글리아(East Anglia)(7%), 웨스트 미들랜즈(6%), 요크셔 험버사이드(6%) 순이었다. 1980년 보고서에서는 대런던과 웨스트 미들랜즈가 국민전선의 가장 큰 지지 기반 지역이며, 전국 득표율의 48%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국민전선 지지자의 72%가 노동 계급이었으며, 71%는 남성이었다. 숙련 노동자들 사이에서 반숙련 및 비숙련 노동자들보다 지지가 다소 강했다. 유권자들은 국민전선이 인종적 긴장을 조장(응답자의 3분의 2)하거나, 나치적 요소(64%)를 가지고 있으며, 영국을 독재 국가로 만들기를 원한다(56%)고 인식했다.
6. 선거 결과
국민전선(National Front)은 1972년부터 1977년 사이에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70년대 후반이 되자 당의 지지율은 급격히 감소했고, 1980년대에는 선거 참여에서 대부분 물러났다. 1970년대 국민전선의 등장은 영국 정치에서 "전례 없는 발전"으로, 극우 정당이 이렇게 많은 표를 얻은 것은 처음이었다.
==== 총선 및 보궐선거 ====
국민전선은 하원에서 단 한 번도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1970년 총선에서 10명의 후보를 내세워 평균 3.6%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후 보궐선거에서는 더 나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1972년 액스브리지 보궐선거에서는 8.2%, 1973년 웨스트브롬위치 보궐선거에서는 16%를 득표하여 처음으로 정당 보증금을 지켰다. 1974년 2월 총선에서는 54명의 후보가 평균 3.3%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1974년 10월 총선에서는 90명의 후보가 평균 3.1%를 기록했다. 1974년 10월 총선에서 국민전선은 영국파시스트연맹이 어떤 선거에서도 얻은 득표수보다 25배 이상 많은 득표를 얻었다.
1977년에는 세 번의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시티오브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우스에서 5.2%, 버밍엄 스테치포드에서 8.2%, 애시필드에서 3.8%를 득표했다. 버밍엄 스테치포드 보궐선거에 이어 버밍엄 레이디우드와 램베스 센트럴 보궐선거에서 자유당을 제치고 3위를 차지했다. 1979년 총선에서는 303명의 후보를 내세워 전국 평균 0.6%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보증금 4만 5천 파운드를 잃었다. 출마한 선거구에서 평균 1.3%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대런던 지역에서 출마한 88개 선거구에서는 2%까지 상승했다. 이 선거는 "투표를 통해 정치적 정당성을 추구하려는 운동의 종말의 시작을 알렸다". 1983년 총선에서 국민전선은 54개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각 선거구에서 평균 1%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 연도 | 후보자 수 | 총 득표수 | 득표율 | 보증금 회수 | 국회의원 수 |
|---|---|---|---|---|---|
| 1970 | 10 | 11,449 | 0.04 | 0 | 0 |
| 1974년 2월 | 54 | 76,865 | 0.2 | 0 | 0 |
| 1974년 10월 | 90 | 113,843 | 0.4 | 0 | 0 |
| 1979 | 303 | 191,719 | 0.6 | 0 | 0 |
| 1983 | 60 | 27,065 | 0.1 | 0 | 0 |
| 1987 | 1 | 286 | 0.0 | 0 | 0 |
| 1992 | 14 | 4,816 | 0.1 | 0 | 0 |
| 1997 | 6 | 2,716 | 0.0 | 0 | 0 |
| 2001 | 5 | 2,484 | 0.0 | 0 | 0 |
| 2005 | 13 | 8,029 | 0.0 | 0 | 0 |
| 2010 | 17 | 10,784 | 0.0 | 0 | 0 |
| 2015 | 7 | 1,114 | 0.0 | 0 | 0 |
==== 지방 선거 ====
국민전선(NF)은 전국 단위 선거보다 지방 선거에서 더 나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지방 의회 의석을 확보한 적은 없었다. 1969년 10월, 완즈워스 런던 자치구 의회의 보수당 의원 두 명, 애슬린 오코넬과 피터 미첼이 국민전선으로 당적을 바꾸었지만, 12월에 다시 보수당으로 복귀했다. 1974년 런던 지방 선거에서 국민전선은 해링이, 이즐링턴, 브렌트, 사우스워크, 루이셤 자치구에서 평균 10%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하운슬로에서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1976년 4월 지방 의회 선거에서 국민전선은 많은 도시에서 득표율을 높였으며, 샌드웰에서 21%, 울버햄프턴에서 20.7%, 레스터에서 18.54%, 왓퍼드에서 1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1977년 대런던 의회 선거에서 국민전선은 거의 모든 의석에 후보를 냈고, 91명의 대런던 의회 후보는 12만 표를 획득했는데, 이는 1974년 전 영국에서 얻은 총 득표수의 두 배가 넘는 수치였다. 런던 내부 지역에서 국민전선은 세 번째로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런던 득표율도 증가하여, 1974년 10월 총선의 4.4%에서 1977년 대런던 의회 선거의 5.3%로 상승했다. 해크니, 뉴엄, 타워 해멀릿 자치구에서는 평균 1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1977년과 1978년 지방 선거부터 국민전선의 득표율은 정체되기 시작했다. 1978년 런던 자치구 의회 선거에서는 런던에서 "상당히 감소"했으며, 이는 영국의 다른 지역 지방 선거에도 반영되었다.
2010년, 국민전선은 로더햄 대도시 자치구 의회의 지방 의원 존 갬블이 잉글랜드 제일당에서 국민전선으로 당적을 변경하면서 35년 만에 처음으로 선출직 대표를 얻었다. 2011년 그는 6개월 동안 회의에 불참한 이유로 의원직에서 해임되었다.[11]
6. 1. 총선 및 보궐선거
국민전선은 하원에서 단 한 번도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1970년 총선에서 10명의 후보를 내세워 평균 3.6%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후 보궐선거에서는 더 나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1972년 액스브리지 보궐선거에서는 8.2%, 1973년 웨스트브롬위치 보궐선거에서는 16%를 득표하여 처음으로 정당 보증금을 지켰다. 1974년 2월 총선에서는 54명의 후보가 평균 3.3%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1974년 10월 총선에서는 90명의 후보가 평균 3.1%를 기록했다. 1974년 10월 총선에서 국민전선은 영국파시스트연맹이 어떤 선거에서도 얻은 득표수보다 25배 이상 많은 득표를 얻었다.1977년에는 세 번의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시티오브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우스에서 5.2%, 버밍엄 스테치포드에서 8.2%, 애시필드에서 3.8%를 득표했다. 버밍엄 스테치포드 보궐선거에 이어 버밍엄 레이디우드와 램베스 센트럴 보궐선거에서 자유당을 제치고 3위를 차지했다. 1979년 총선에서는 303명의 후보를 내세워 전국 평균 0.6%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보증금 4만 5천 파운드를 잃었다. 출마한 선거구에서 평균 1.3%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대런던 지역에서 출마한 88개 선거구에서는 2%까지 상승했다. 이 선거는 "투표를 통해 정치적 정당성을 추구하려는 운동의 종말의 시작을 알렸다". 1983년 총선에서 국민전선은 54개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각 선거구에서 평균 1%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 연도 | 후보자 수 | 총 득표수 | 득표율 | 보증금 회수 | 국회의원 수 |
|---|---|---|---|---|---|
| 1970 | 10 | 11,449 | 0.04 | 0 | 0 |
| 1974년 2월 | 54 | 76,865 | 0.2 | 0 | 0 |
| 1974년 10월 | 90 | 113,843 | 0.4 | 0 | 0 |
| 1979 | 303 | 191,719 | 0.6 | 0 | 0 |
| 1983 | 60 | 27,065 | 0.1 | 0 | 0 |
| 1987 | 1 | 286 | 0.0 | 0 | 0 |
| 1992 | 14 | 4,816 | 0.1 | 0 | 0 |
| 1997 | 6 | 2,716 | 0.0 | 0 | 0 |
| 2001 | 5 | 2,484 | 0.0 | 0 | 0 |
| 2005 | 13 | 8,029 | 0.0 | 0 | 0 |
| 2010 | 17 | 10,784 | 0.0 | 0 | 0 |
| 2015 | 7 | 1,114 | 0.0 | 0 | 0 |
6. 2. 지방 선거
국민전선(NF)은 전국 단위 선거보다 지방 선거에서 더 나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지방 의회 의석을 확보한 적은 없었다. 1969년 10월, 완즈워스 런던 자치구 의회의 보수당 의원 두 명, 애슬린 오코넬과 피터 미첼이 국민전선으로 당적을 바꾸었지만, 12월에 다시 보수당으로 복귀했다. 1974년 런던 지방 선거에서 국민전선은 해링이, 이즐링턴, 브렌트, 사우스워크, 루이셤 자치구에서 평균 10%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하운슬로에서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1976년 4월 지방 의회 선거에서 국민전선은 많은 도시에서 득표율을 높였으며, 샌드웰에서 21%, 울버햄프턴에서 20.7%, 레스터에서 18.54%, 왓퍼드에서 1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1977년 대런던 의회 선거에서 국민전선은 거의 모든 의석에 후보를 냈고, 91명의 대런던 의회 후보는 12만 표를 획득했는데, 이는 1974년 전 영국에서 얻은 총 득표수의 두 배가 넘는 수치였다. 런던 내부 지역에서 국민전선은 세 번째로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런던 득표율도 증가하여, 1974년 10월 총선의 4.4%에서 1977년 대런던 의회 선거의 5.3%로 상승했다. 해크니, 뉴엄, 타워 해멀릿 자치구에서는 평균 1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1977년과 1978년 지방 선거부터 국민전선의 득표율은 정체되기 시작했다. 1978년 런던 자치구 의회 선거에서는 런던에서 "상당히 감소"했으며, 이는 영국의 다른 지역 지방 선거에도 반영되었다.
2010년, 국민전선은 로더햄 대도시 자치구 의회의 지방 의원 존 갬블이 잉글랜드 제일당에서 국민전선으로 당적을 변경하면서 35년 만에 처음으로 선출직 대표를 얻었다. 2011년 그는 6개월 동안 회의에 불참한 이유로 의원직에서 해임되었다.[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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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Yesterday the Directorate appointed me Chairman of the National Front and Jordan Pont as deputy
http://www.nationalf[...]
2018-09-09
[2]
뉴스
National Front march banned
http://news.bbc.co.u[...]
BBC News
2000-04-18
[2]
뉴스
National Front march banned
http://news.bbc.co.u[...]
BBC News
2001-11-16
[2]
뉴스
National Front march is banned
http://news.bbc.co.u[...]
BBC News
2002-09-24
[3]
뉴스
Far Right: BNP 'losing members'
http://news.bbc.co.u[...]
BBC News
2010-02-19
[4]
웹사이트
Registration summary ref PP2707
http://search.electo[...]
2015-03-26
[5]
웹사이트
New National Front Leadership Announced
http://www.britishna[...]
National Front
2015-11-17
[6]
웹사이트
Scottish election: National Front profile
https://www.bbc.co.u[...]
BBC News
2011-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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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National Front 'will not protest'
http://news.bbc.co.u[...]
BBC News
2009-09-04
[8]
뉴스
National Front rally in Grantham sees two arrests
https://www.bbc.co.u[...]
BBC News
2017-08-21
[9]
뉴스
National Front bid to march on Hitler's birthday in Aberdeen rejected
https://www.bbc.co.u[...]
BBC News
2012-03-27
[10]
뉴스
A look back at the Battle of Lewisham
https://www.bbc.co.u[...]
BBC News
2017-08-30
[11]
뉴스
Far right councillor axed after missing meetings
https://www.sheffiel[...]
2011-12-12
[11]
뉴스
Extremist councillor claimed £25,000 council expenses
https://www.rotherha[...]
2011-12-09
[12]
보고서
Harrogate Borough Council Parish Council Election
https://www.harrogat[...]
[13]
뉴스
BNP councillor joins the National Front
https://eastmidlands[...]
[14]
뉴스
Dates and Commi|ttes
http://www.biltonina[...]
2011-06-00
[15]
뉴스
National Front man loses council seat
https://www.derbytel[...]
2011-09-01
[16]
웹사이트
UK's National Front leader Dave MacDonald is elected to Aberdeen community council
http://www.thenation[...]
201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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