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시아노파
1. 개요
노바시아노파는 3세기 로마에서 시작된 기독교 분파로, 배교자들에 대한 교회의 관용에 반대하여 엄격한 신앙 기준을 강조했다. 노바시아노는 로마 주교 코르넬리우스의 관용적인 정책에 반발하여 대립 교황이 되었으며, 배교자들의 교회 복귀를 반대하고 재세례를 주장했다. 노바시아노주의는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하고, 엄격한 도덕률을 강조하며, 4세기에는 수도원주의를 받아들였다. 이들은 로마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었으며, 도나투스파, 몬타누스파와 유사한 면모를 보였다.
| 이름 | 노바시아노파 |
|---|---|
| 다른 이름 | 카타리파 |
| 창시자 | 노바티아누스 |
| 시작 시기 | 기원후 251년경 |
| 소멸 시기 | 5세기 이후 |
| 분파 위치 |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
| 주요 신념 | 엄격주의, 교회 정화, 성례전의 유효성 부인 (특정 상황에서) |
|---|---|
| 반대 | 관대한 참회 정책 |
| 관련 인물 | 키프리아누스 코르넬리우스 칼릭스투스 1세 |
| 파생 | 카타리파 (일부 연관) |
| 주요 사건 | 로마 교황 선출 논쟁 (251년) 박해 시기 배교자 문제 |
|---|---|
| 쇠퇴 원인 | 교회의 관용 정책 강화 내부 분열 외부 압력 |
| 죄의 용서 | 배교 후에는 교회에서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고 주장 |
|---|---|
| 재세례 |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받은 신자를 다시 세례해야 한다고 주장 |
| 성직자 자격 | 배교한 성직자는 자격을 상실한다고 주장 |
| 주요 비판 | 지나치게 엄격하고 비성경적이라는 비판 |
|---|---|
| 반대자 | 키프리아누스 코르넬리우스 암브로시우스 |
| 특징 | 스스로를 '카타리'(Katharoi, 순결한 자)라고 부름 로마 외에 다른 지역에도 교회 조직을 세움 5세기까지 존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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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노바시아노의 생애와 활동
로마 제국의 사제였던 노바시아노는 데키우스 황제 치하의 박해 이후, 251년 고르넬리오가 로마의 새 주교로 선출되자 이에 반대한 인물이다. 그는 박해 시기에 신앙을 저버렸던 배교자(라틴어: lapsi)들은 교회와의 온전한 친교를 회복할 수 없으며, 배우자와 사별한 사람의 재혼도 불가하다고 주장하는 등 엄격한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견해는 테르툴리아누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노바시아노는 스스로 대립 주교가 되었으나 로마 시노드에서 파문되었고, 훗날 발레리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저술 활동을 통해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했으며, 구약의 육식 금지 규정을 문자적이 아닌 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기독교인이 세속적인 공공 오락에 참여하는 것을 비판하고 정결한 삶을 강조했다.
한편, 노바시아노는 카르타고의 사제 노바투스와는 다른 인물이다. 노바투스는 오히려 강제적인 참회 없이 배교자들의 교회 복귀를 주장했다. 일부 학자(라드너)는 유세비우스를 비롯한 그리스 교부들이 노바시아노를 '노바투스'라고 부른 것이 옳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는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가 로마의 노바시아노를 카르타고의 노바투스와 연관시키기 위해 '노바티아누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주장에 근거한다.
2.1. 대립 주교 선출과 파문
로마 제국의 데키우스 황제 치하 박해 기간 동안 교황 파비아노가 순교하자, 251년 로마 교구의 새 주교로 고르넬리오가 선출되었다. 당시 로마 교구의 사제였던 노바시아노는 이 선출에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고르넬리오가 박해 시기에 신앙을 저버렸던 배교자(라틴어: lapsi)들을 너무 쉽게 용서하고 다시 교회 안에 받아들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노바시아노는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키지 못한 배교자들은 다시 교회와 온전한 친교를 맺을 수 없으며, 배우자를 사별한 사람이라도 다시 혼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세 주교에게 서품을 받고 스스로 고르넬리오 주교에 맞서 대립 로마 주교임을 선언했다.
결국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같은 해 10월 로마에서 열린 시노드(주교회의)에서 파문되었다. 훗날 노바시아노는 발레리아누스 황제(재위 253–260) 치하의 박해 때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노바시아노는 카르타고의 사제 노바투스와는 다른 인물이다. 노바투스는 강제적인 참회 없이 배교자들의 교회 복귀를 옹호했으며,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는 노바시아노와 노바투스 양측의 입장에 모두 반대하며 배교자 문제 해결을 위한 공의회 개최를 주장했다.
3. 노바시아노주의의 신념
노바시아노 사후, 그의 사상은 '노바시아노주의'로 명명되어 여러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상당한 수의 추종자를 확보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부패한 보편교회의 로마 지역 교회가 보이는 '방만한 관행'과 결별한 ‘엄격주의자’라고 칭했다.
노바시아노주의자들은 특히 박해 시기에 신앙을 저버린 배교자(Lapsi)들에 대해 교회의 사면 권한을 부정하는 등 매우 엄격한 입장을 취했으며, 자신들의 가르침에 동조하여 합류한 신자들에게는 재세례를 베풀었다. 이러한 이유로 로마 교회는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배교자 문제에 대한 노바시아노주의자들의 엄격한 태도는 4세기에서 5세기에 활동했던 도나투스파와 유사한 면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적 입장과는 별개로, 노바시아노주의자들의 일상적인 관습은 4세기 수도원 제도를 포함하여 보편교회의 관습과 동일한 부분도 있었다.
3.1. 배교자(Lapsi) 문제
로마 제국의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 시기, 로마 교구 주교 파비아노가 순교한 후 251년 고르넬리오가 새로운 로마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로마 교구의 사제였던 노바시아노는 이에 반대하며 고르넬리오와 대립했다. 노바시아노가 고르넬리오를 반대한 주된 이유는, 고르넬리오가 박해 시기에 신앙을 저버렸던 배교자들을 너무 쉽게 용서하고 다시 교회 공동체로 받아들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노바시아노는 배교자들이 회개하고 평생 참회할 수는 있지만, 지상 교회에서 용서받을 수는 없으며 그들의 용서는 오직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아무리 박해 때문에 신앙을 잠시 버렸다 하더라도 이들을 다시 교회와 온전히 친교를 맺게 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히브리서를 인용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배우자를 사별한 사람의 재혼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입장을 취했다.
결국 노바시아노는 스스로 고르넬리오 주교에 맞서 대립 로마 주교를 자처했고, 그해 10월 로마에서 열린 주교 시노드에서 노바시아노와 그의 추종자들은 파문되었다. 이후 노바시아노는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바시아노 사후에도 그의 사상은 '노바시아노주의'로 명명되어 여러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고, 일부 지역에서는 상당한 수의 추종자를 얻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부패한 보편교회의 로마 교회의 '방만한 관행'과 결별한 '엄격주의자'라고 칭했으며, 자신들의 가르침에 동조한 신자들에게는 재세례를 베풀기도 했다. 로마 교회는 노바시아노주의자들이 교회의 권고를 따르지 않고, 특히 배교자와 같은 특정 사안에 대한 교회의 사면 권한을 정면으로 부정한다는 이유로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배교자 문제에 대한 노바시아노파의 엄격한 입장은 4세기에서 5세기에 활동했던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파와 유사한 면을 보인다. 도나투스파 역시 박해 시기에 신앙을 저버린 이들의 교회 복귀에 대해 매우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했다.
3.2. 삼위일체와 그리스도론
노바티아누스는 삼위일체론자였다. 그는 영지주의의 가르침에 맞서 아버지를 세상의 창조주로 옹호했다. 노바티아누스는 또한 신성과 예수 안에서의 인류의 단일성을 옹호했으며, 마르키온파, 양태론 및 양자론에 맞서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구분을 강조했다. 노바티아누스는 성령의 역할이 오직 세례 중에 주어지는 축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3.3. 교회론
노바시아노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엄격주의자’라고 부르며, 부패한 보편교회의 로마 지역 교회가 보이는 방만한 관행과 결별했음을 주장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에 동조하는 신자들에게 재세례를 베풀었다. 로마 교회는 노바시아노주의자들이 교회의 권고를 거부하고, 특히 박해 시기에 신앙을 저버린 배교자들에 대한 교회의 사면 권한을 정면으로 부정한 점을 들어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키프리아누스와 달리, 노바시아노는 교회에 속하는 것 자체가 구원의 필수 조건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교회를 성도들의 모임으로 정의하며, 죄인이 교회에 들어올 경우 교회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바시아노파는 그의 출신지인 로마에 항상 후계자를 두었으며, 주교정치 체제를 유지했다.
이러한 신학적 입장과 별개로 노바시아노주의자들의 일상 관습은 4세기 수도원 제도를 포함한 보편교회의 관습과 같았다. 한편, 4세기에서 5세기에 활동한 도나투스파 역시 박해의 압력으로 잠시 신앙을 저버린 기독교인들에 대해 노바시아노주의자들과 유사한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
3.4. 기타 신념
테오도레토스에 따르면, 노바시아노파는 견신례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에울로기우스에 따르면 노바시아노파는 순교자들을 공경하지도 않았다. 또한 노바시아노파는 재혼을 금지했다. 그리스도론적으로 노바티아누스는 대체로 정통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일부에서는 그가 후대의 네스토리우스파와 유사점을 지닌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비판을 받았다.
4세기 경에는 수도원주의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일부 노바시아노파는 십사일파에 속하기도 했다.
3.5. 세례
아우구스티누스는 노바시아누스파가 가톨릭 교회에서 온 사람들을 재세례했다고 기록했다. 일부에서는 노바시아누스파가 유아 세례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의 입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노바시아누스파가 신자 세례를 했다는 주장은 다소 미약한 증거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 시기에는 이미 정통 기독교 작가들 사이에서 유아 세례가 보편화되고 명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4. 노바시아노주의의 확산과 영향
노바시아노가 사망한 후, 그의 사상을 따르는 노바시아노주의는 로마 제국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가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상당한 규모의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노바시아노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엄격주의자' 또는 καθαροι그리스어(정결파)라고 칭하며, 당시 보편교회, 특히 로마 지역 교회의 느슨해진 관행과 자신들을 구별하고자 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신자들에게 재세례를 베풀기도 했다.
로마 교회는 노바시아노주의자들이 로마 주교의 권위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분열주의자로 간주했으며, 박해 시기에 신앙을 저버린 배교자들과 같은 특정 사안에 대한 교회의 사면 권한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와는 별개로, 노바시아노주의자들의 관습은 4세기 수도원 제도를 포함하여 당시 보편교회의 관습과 동일하였다.
4세기와 5세기 북아프리카 지역의 도나투스파 역시 박해 아래 신앙을 저버린 기독교인들에 대해 노바시아노파와 유사하게 엄격한 입장을 취했으며, 이들 또한 이단으로 선언되었다. 한편, 일부 노바시아노파는 시간이 흐르면서 몬타누스파와 융합되기도 했다. 노바시아노주의의 엄격한 견해는 그 이전 헤르마스의 목자와 같은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도 유사한 흐름을 찾아볼 수 있다.
4.1. 초기 확산
노바티아누스의 엄격한 견해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헤르마스의 목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사후 노바티아누스파는 빠르게 확산되어 로마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발견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다. 노바티아누스의 교리에 동조한 이들은 "노바티아누스파"라고 불렸지만, 스스로는 καθαροι그리스어('정결한 자들'이라는 뜻) 또는 "정결파"라고 칭했다. 이는 당시 보편 교회가 타락했다고 여겨지는 느슨한 관행을 따르지 않으려는 그들의 의지를 보여준다. (후대의 카타리파와는 구별된다.)
노바티아누스는 박해 시기에 기독교 신앙을 부인했다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려 했던 이들, 즉 lapsi라틴어에게 면죄를 베푸는 것을 거부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이 원칙을 더욱 확대하여 우상 숭배, 살인, 간음, 음행과 같은 모든 치명적인 죄에 대해서도 면죄를 거부했다. 또한, 노바티아누스파의 다수는 재혼을 금지했다. 그들은 항상 로마에 노바티아누스의 후계자를 두었으며, 각 지역에서 주교의 통치를 받았다.
노바티아누스파(노바티아누스 포함)는 로마의 주교에게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 교회로부터 분열주의자로 간주되었다. 또한 로마 교회는 노바티아누스파가 lapsi라틴어와 같은 특정 경우에 교회가 죄를 사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4세기와 5세기에는 북아프리카 지역의 도나투스파가 박해의 압력 속에서 신앙을 저버린 기독교인들에 대해 노바티아누스파와 유사한 엄격한 입장을 취했으며, 그들 역시 이단으로 선언되었다.
일부 노바티아누스파는 몬타누스파와 통합되기도 했다.
4.2. 로마 교회와의 관계
노바시아노 사후, 노바시아노주의는 빠르게 확산되어 여러 지역에서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엄격주의자' 또는 καθαροι그리스어(정결파)라고 불렀는데, 이는 당시 보편교회의 로마 지역 교회가 보여준 방만한 관행과 부패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려는 의도였다. 후대의 카타리파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노바시아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에 동조한 신자들에게 재세례를 베풀기도 했다.
노바시아노주의자들은 박해 시기에 신앙을 부인했다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려는 이들(lapsi)에게 용서를 베푸는 것을 거부했다. 이러한 엄격한 입장은 헤르마스의 목자에서도 유사한 견해를 찾아볼 수 있다. 노바시아노의 추종자들은 이 원칙을 우상 숭배, 살인, 간음 또는 음행과 같은 모든 중대한 죄로 확대 적용했으며, 대부분 재혼도 금지했다. 그들은 로마에 항상 노바시아노의 후계자를 두었고, 각 지역에서 주교의 통치를 받았다.
로마 교회는 노바시아노주의자들이 로마 주교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분열주의자로 규정했다. 또한, 박해로 인해 신앙을 저버린 배교자들과 같은 특정 사안에 대해 교회가 사면할 권한이 있다는 것을 노바시아노주의자들이 부정했기 때문에, 로마 교회는 이들을 이단으로 선언했다.
4세기와 5세기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파 역시 박해의 압력 속에서 신앙을 저버린 기독교인들에 대해 노바시아노주의자들과 유사한 엄격한 입장을 가졌으며, 이들 또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일부 노바시아노주의자들은 몬타누스파와 융합되기도 했다.
4.3. 도나투스파와의 비교
4세기에서 5세기에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활동했던 도나투스파는 박해의 압력 때문에 잠시 신앙을 저버린 기독교인들에 대해 노바시아노파와 유사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두 그룹 모두 신앙을 잠시 버렸던 이들, 즉 '라프시'(lapsi)를 교회 공동체에 다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매우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
노바시아노파는 자신들이 보편교회의 느슨하고 부패했다고 여겨지는 관행과 다르다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정결파'( καθαροι그리스어)라고 불렀는데, 이는 후대의 카타리파와는 구별된다. 이들은 박해 시기에 신앙을 부인했던 이들뿐만 아니라, 우상숭배, 살인, 간음 또는 음행과 같은 다른 중대한 죄(치명적인 죄)를 지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교회가 사면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로마 교회의 권위와 정면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로마 교회는 노바시아노파를 분열주의자이자 이단으로 규정했다.
도나투스파 역시 비슷한 이유로 보편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선언되었다. 박해 아래에서 신앙을 저버린 이들에 대한 엄격한 태도는 노바시아노파의 특징적인 주장이었지만, 이러한 엄격주의적 경향 자체는 노바시아노 이전, 예를 들어 헤르마스의 목자와 같은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부 노바시아노파는 시간이 지나면서 몬타누스파와 융합되기도 했다.
4.4. 몬타누스파와의 융합
일부 노바티아누스파는 몬타누스파와 융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