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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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뉴욕 돌스는 1971년 결성된 미국의 록 밴드이다. 펑크 록과 글램 록을 결합한 독창적인 스타일을 선보이며, 펑크 록의 선구자이자 글램 메탈에 영향을 미친 밴드로 평가받는다. 1970년대 초반 데뷔하여 두 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으나, 멤버 간의 갈등과 약물 문제로 해체되었다. 2004년 재결성하여 활동을 이어갔으며, 2021년 실베인 실뱅의 사망으로 데이비드 요한센이 유일한 원년 멤버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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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돌스 - [음악 그룹]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결성지 | 미국뉴욕주뉴욕 |
| 활동 기간 | 1971년 – 1976년 2004년 – 2011년 |
| 장르 | 하드 록 프로토 펑크 글램 록 펑크 록 글램 펑크 |
| 레이블 | 머큐리 로드러너 애트코 클레오파트라 429 |
| 웹사이트 | www.nydolls.org |
| 이전 구성원 | 데이비드 요한슨 실뱅 실뱅 조니 썬더스 아서 케인 빌리 머시아 릭 리베츠 제리 놀란 피터 조던 블래키 로리스 크리스 로비슨 토니 머신 바비 블레인 스티브 콘테 게리 파월 사미 야파 브라이언 쿠닌 프랭크 인판테 제이슨 힐 제이슨 서터 에런 리 태즈전 존 콘테 케니 에런슨 얼 슬릭 브라이언 딜레이니 클레이턴 피처 |
2. 역사
뉴욕 돌스는 1971년 뉴욕에서 결성된 미국의 록 밴드이다. 이들은 글램 록과 펑크 록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밴드는 1971년 조니 선더스(보컬, 기타), 아서 케인(베이스), 릭 리베츠(기타), 빌리 머시아(드럼)가 결성한 "Actress"를 모체로 한다. 이후 밴드명을 "뉴욕 돌스"로 바꾸고, 1972년 릭 리베츠가 탈퇴한 후 실베인 실베인(기타)과 데이비드 요한슨(보컬)이 합류했다. 이들은 페이스스의 영국 투어 오프닝 밴드로 기용되며 주목받았고, 앤디 워홀, 루 리드, 데이비드 보위 등에게 극찬을 받았다. 그러나 투어 중 드러머 빌리 머시아가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고, 밴드는 제리 놀란(드럼)을 영입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1973년 토드 룬드그렌의 프로듀싱으로 데뷔 앨범 《뉴욕 돌스》를, 1974년에는 두 번째 앨범 《투 머치 투 순》을 발표했다. 이후 말콤 맥라렌이 매니저를 맡기도 했다.
1975년, 밴드는 "월드 록 페스티벌"이라는 페스티벌 형식으로 5회 내한 공연을 가졌다. 당시 멤버는 데이비드 요한센, 실베인 실베인, 피터 조던(베이스), 토니 마신(드럼), Chris Robison|크리스 로비슨영어(키보드)이었다. 고라쿠엔 구장에서의 라이브는 녹음되어 1986년 『david & sylvain / TOKYO DOLLS LIVE!』라는 제목으로 LP가 발매되었다. 같은 해, 조니 선더스와 제리 놀란이 탈퇴하고, 밴드는 "돌스"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1977년, 뉴욕 돌스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1991년 조니 선더스가, 1992년에는 제리 놀란이 사망했다.
2004년, 모리세이의 주도로 데이비드 요한슨, 실베인 실뱅, 아서 케인이 재결합하여 멜트다운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다. 하지만 재결합 직후 아서 케인이 백혈병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같은 해 9월, 뉴욕 돌스는 약 30년 만에 내한 공연을 가졌다.
이후 뉴욕 돌스는 스티브 콘테, 새미 야파, 브라이언 델레이니 등을 새 멤버로 영입하여 활동을 재개했다. 2021년 실베인 실뱅이 암으로 사망하면서[81], 데이비드 요한슨이 밴드의 유일한 원년 멤버로 남게 되었다.
| 시기 | 보컬 | 리드 기타 | 리듬 기타 | 베이스 | 드럼 | 키보드 |
|---|---|---|---|---|---|---|
| 1971년 10월 ~ 1972년 3월 | 데이비드 요한슨 | 조니 선더스 | 릭 리베츠 | 아서 케인 | 빌리 머시아 | 데이비드 요한슨 |
| 1972년 3월 ~ 1972년 11월 | 데이비드 요한슨 | 조니 선더스 | 실베인 실베인 | 아서 케인 | 빌리 머시아 | 실베인 실베인 |
| 1972년 12월 ~ 1975년 5월 | 데이비드 요한슨 | 조니 선더스 | 실베인 실베인 | 아서 케인 | 제리 놀란 | 실베인 실베인 |
| 1975년 5월 ~ 1975년 8월 | 데이비드 요한슨 | 블랙키 로리스 | 실베인 실베인 | 피터 조던 | 토니 머신 | 크리스 로비슨 |
| 1975년 8월 ~ 1976년 8월 | 데이비드 요한슨 | 실베인 실베인 | 피터 조던 | 토니 머신 | 크리스 로비슨 | |
| 1976년 8월 ~ 1977년 3월 | 데이비드 요한슨 | 실베인 실베인 | 피터 조던 | 토니 머신 | 바비 블레인 | |
| 2004년 6월 ~ 2004년 7월 | 데이비드 요한슨 | 스티브 콘테 | 실베인 실베인 | 아서 케인 | 게리 파월 | 실베인 실베인 |
| 2004년 7월 ~ 2004년 8월 | 데이비드 요한슨 | 스티브 콘테 | 실베인 실베인 | 존 콘테 | 게리 파월 | 실베인 실베인 |
| 2004년 8월 ~ 2005년 7월 | 데이비드 요한슨 | 스티브 콘테 | 실베인 실베인 | 새미 야파 | 게리 파월 | 실베인 실베인 |
| 2005년 7월 ~ 2006년 12월 | 데이비드 요한슨 | 스티브 콘테 | 실베인 실베인 | 새미 야파 | 브라이언 델레이니 | 브라이언 쿠닌 |
| 2006년 12월 ~ 2008년 7월 | 데이비드 요한슨 | 스티브 콘테 | 실베인 실베인 | 새미 야파 | 브라이언 델레이니 | 실베인 실베인 |
| 2008년 7월 ~ 2009년 12월 | 데이비드 요한슨 | 애런 리 타스잔 | 실베인 실베인 | 새미 야파 | 브라이언 델레이니 | 실베인 실베인 |
| 2009년 12월 ~ 2010년 12월 | 데이비드 요한슨 | 스티브 콘테 | 실베인 실베인 | 새미 야파 | 브라이언 델레이니 | 실베인 실베인 |
| 2010년 12월 ~ 2011년 5월 | 데이비드 요한슨 | 프랭크 인팬테 | 실베인 실베인 | 제이슨 힐 | 브라이언 델레이니 | 실베인 실베인 |
| 2011년 5월 ~ 2011년 7월 | 데이비드 요한슨 | 얼 슬릭 | 실베인 실베인 | 케니 애런슨 | 제이슨 서터 | 실베인 실베인 |
| 2011년 7월 ~ 2011년 10월 | 데이비드 요한슨 | 클레이튼 핏처 | 실베인 실베인 | 실베인 실베인 | 제이슨 서터 | 실베인 실베인 |
| 2011년 10월 ~ 현재 | 데이비드 요한슨 | 클레이튼 핏처 | 실베인 실베인 | 실베인 실베인 | 브라이언 델레이니 | 실베인 실베인 |
2. 1. 결성 (1971-1972)
1971년, 조니 선더스(보컬, 기타), 아서 케인(베이스), 릭 리베츠(기타), 빌리 머시아(드럼)가 "Actress"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이 밴드는 이후 "뉴욕 돌스"로 이름을 변경했다.[5]1972년에는 기타리스트 릭 리베츠가 밴드를 탈퇴하고, 실베인 실베인(기타)과 데이비드 요한슨(보컬)이 합류했다. 같은 해, 페이스스의 영국 투어 오프닝 밴드로 기용되면서 뉴욕 돌스는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들의 격렬한 라이브와 중성적인 패션은 앤디 워홀, 루 리드, 데이비드 보위 등에게 극찬을 받았다.[6]
하지만, 영국 투어 도중 드러머 빌리 머시아가 파티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정신을 잃었고, 안타깝게도 욕조에서 익사한 채 발견되었다.[7] 이후 밴드는 제리 놀란을 새 드러머로 영입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2. 2. 전성기 (1973-1975)
1973년, 토드 룬드그렌의 프로듀싱으로 데뷔 앨범 《뉴욕 돌스》를 발표했다.[10] 이 앨범은 미국 중부 지역에서 판매량이 부진했고, 1973년 ''스테레오 리뷰'' 잡지 평론가는 돌스의 기타 연주를 잔디 깎는 기계 소리에 비유할 정도였으나, 평론가들로부터는 호평을 받으며 밴드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크림'' 잡지 투표에서는 1973년 최고의 신인 그룹과 최악의 신인 그룹으로 동시에 선정되기도 했다.[10] 밴드는 유럽 투어도 진행했는데, 영국 텔레비전에 출연했을 때 BBC ''올드 그레이 휘슬 테스트''의 진행자 밥 해리스는 이 그룹을 "모크 록"이라고 비난하며 롤링 스톤스에 비해 좋지 않다고 평했다.[11]1974년에는 조지 "섀도" 모턴의 프로듀싱으로 두 번째 앨범 《투 머치 투 순》을 발표했다.[10] 모턴은 1960년대 중반 샹그릴라스와 다른 걸 그룹의 프로듀싱으로 밴드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듀서 중 한 명이었다. 이 시기에 밴드는 앤디 워홀, 루 리드, 데이비드 보위 등 유명 예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으며 뉴욕 언더그라운드 씬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1975년까지 뉴욕 돌스는 이전보다 더 작은 공연장에서 공연을 했다. 썬더스, 놀란, 케인의 약물 및 알코올 남용과 예술적 견해 차이는 멤버 간의 긴장감을 더했다.[12] 1975년 2월 말 또는 3월 초에 말콤 맥라렌이 밴드의 비공식 매니저가 되었다. 그는 밴드에게 무대에서 입을 빨간색 가죽 의상과 공산주의 시크 깃발을 배경으로 제공했다.[12] 돌스는 텔레비전과 퓨어 헬의 지원을 받아 뉴욕의 5개 자치구에서 5번의 콘서트 투어를 했다. 리틀 히포드롬 (맨해튼) 쇼는 녹음되어 1984년 뉴 로즈 레코드 자회사 팬 클럽에서 ''레드 페이턴트 레더''로 발매되었는데, 이는 이전에 부틀렉 앨범이었고 나중에 실뱅이 공식 발매를 위해 리믹스했으며, 전 매니저 마티 타우가 총괄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렸다.[12] 그날 밤 케인이 연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로드 매니저 피터 조던이 베이스를 연주했지만 "세컨드 베이스"를 연주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조던은 1973년 밴드의 미국 서부 해안 공연 전에 엄지 부상을 입는 등 케인이 연주할 수 없을 때 여러 번 대신했다.
1975년 3월과 4월에 맥라렌은 밴드를 사우스캐롤라이나와 플로리다 투어에 데려갔다. 조던은 그 쇼의 대부분에서 케인을 대신했다. 썬더스와 놀란은 말다툼 끝에 떠났고, 4월 11일 리처드 헬과 함께 더 하트브레이커스를 결성했다.[12] 이후 W.A.S.P.를 결성한 블랙키 로리스는 썬더스를 대신하여 투어의 남은 기간 동안 참여했으며, 이후 밴드는 해체되었다.[12][13][14]
2. 3. 해체와 재결성 (1975-2011)
1975년, 뉴욕 돌스는 이전보다 작은 공연장에서 공연을 했고, 멤버 간의 긴장감이 커졌다. 조니 선더스와 제리 놀란, 아서 케인의 약물 및 알코올 남용과 예술적 견해 차이가 갈등의 원인이었다.[12][13][14] 1975년 2월 말 또는 3월 초, 말콤 맥라렌이 비공식 매니저가 되어 밴드에게 빨간색 가죽 의상과 공산주의 깃발을 배경으로 하는 무대 연출을 제안했다. 뉴욕 돌스는 텔레비전, 퓨어 헬과 함께 뉴욕 5개 자치구에서 5번의 콘서트 투어를 진행했다. 맨해튼의 리틀 히포드롬 공연은 녹음되어 1984년 ''레드 페이턴트 레더''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12]1975년 3월과 4월, 맥라렌은 밴드를 사우스캐롤라이나와 플로리다 투어에 데려갔다. 이 투어에서 아서 케인을 대신하여 피터 조던이 베이스를 연주했다. 썬더스와 놀란은 말다툼 끝에 밴드를 떠났고, 1975년 4월 11일 리처드 헬과 함께 더 하트브레이커스를 결성했다.[12][13][14] W.A.S.P.를 결성한 블랙키 로리스가 썬더스를 대신하여 남은 투어에 참여했지만, 밴드는 결국 해체되었다.[12][13][14]
밴드는 1975년 7월에 제프 벡, 펠릭스 파파라디와 함께 일본 투어를 위해 재결성되었다. 데이비드 요한슨, 실뱅 실뱅, 피터 조던, 크리스 로비슨, 토니 머신이 참여한 이 투어의 공연은 ''도쿄 돌스 라이브''라는 앨범으로 발매되었다.[12]
뉴욕으로 돌아온 돌스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공연을 재개했지만, 1975년 10월 7일 머큐리 레코드에서 해고되었다.[15] 1975년 비콘 극장에서의 뉴 이어스 이브 공연은 호평을 받았지만, 로비슨이 해고되고 바비 블레인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16][12][17] 1976년 12월 30일, 맥스 캔자스 시티에서 블론디와 함께 마지막 공연을 했다.[12]
썬더스와 놀란은 리처드 헬과 더 하트브레이커스를 결성했고, 썬더스는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썬더스는 1991년 4월 23일 뉴올리언스에서 사망했는데, 헤로인과 메타돈 과다 복용이 원인으로 알려졌다.[18] 놀란은 1992년 1월 14일 세균성 수막염으로 인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요한센은 솔로 활동을 시작하여 1980년대 후반 버스터 포인덱스터라는 예명으로 성공을 거두었다.[19] 실뱅은 CBGB에서 인기 밴드인 더 크리미널스를 결성했다.
1981년, 뉴욕 돌스의 초기 데모 테이프를 모은 ''립스틱 킬러스''가 발매되었다.
2004년 6월 18일, 전 더 스미스의 모리세이의 주도로 데이비드 요한슨, 실뱅 실뱅, 아서 케인이 재결합하여 멜트다운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다. 그러나 재결합 직후인 2004년 7월 13일, 아서 케인이 백혈병 합병증으로 사망했다.[12]
2004년 9월, 뉴욕 돌스는 약 3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여 공연했다. 이후 스티브 콘테, 새미 야파, 브라이언 델레이니 등을 새 멤버로 영입하여 활동을 재개했으며, 2006년, 2009년, 2011년에 새 앨범을 발표했다. 2021년 1월 13일, 실뱅 실뱅이 암으로 사망하면서[81], 데이비드 요한슨이 밴드의 유일한 원년 멤버로 남게 되었다.
2. 4. 한국과의 관계
1975년, "월드 록 페스티벌"이라는 페스티벌 형식으로 5회 내한 공연을 가졌다.[79][80] 당시 멤버는 데이비드 요한센과 실베인 실베인 외에 피터 조던(베이스), 토니 마신(드럼), 크리스 로비슨(키보드)이었다. 고라쿠엔 구장에서의 라이브는 녹음되어 1986년에 『david & sylvain / TOKYO DOLLS LIVE!』라는 제목으로 LP가 발매되었다.2004년, 재결성 후 약 30년 만에 다시 한국을 방문하여 공연했다.[25]
3. 음악 스타일
뉴욕 돌스는 글램 록, 펑크 록, 하드 록 등 다양한 장르를 혼합한 독창적인 음악 스타일을 선보였다. 이들의 음악은 롤링 스톤스의 로큰롤, 스투지스의 원초적인 에너지, 데이비드 보위와 T. 렉스의 글램 록, 걸 그룹 팝 음악의 요소들을 결합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올뮤직의 편집자 스티븐 토마스 얼와인은 뉴욕 돌스가 하드 록 스타일을 독창적으로 발전시켜 펑크 록과 헤비 메탈을 예고했다고 평가했다.[25] 켄 터커는 뉴욕 돌스가 루 리드의 "뉴욕 감성"에 영향을 받은 프로토 펑크 밴드라고 언급했다.[26]
로버트 힐번은 뉴욕 돌스가 롤링 스톤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1974년 음반 ''Too Much Too Soon''을 통해 1950년대 중반 로큰롤의 유머와 자유분방함을 담아내며 독창적인 힘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32]
3. 1. 펑크 록의 선구자
올뮤직 편집자 스티븐 토마스 얼와인은 뉴욕 돌스가 펑크 록과 헤비 메탈을 모두 예고하는 독창적인 하드 록 스타일을 개발했으며, 롤링 스톤스의 "지저분한 로큰롤", 스투지스의 "무정부적인 소음", 데이비드 보위와 T. 렉스의 글램 록, 그리고 걸 그룹 팝 음악과 같은 요소를 차용했다고 평가했다.[25] 얼와인은 이 밴드가 "그런 용어가 생기기 전"에 펑크 록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25] 켄 터커는 그들을 프로토 펑크 밴드로 지칭하며, 루 리드의 "뉴욕 감성"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썼다. "돌스의 노래에 담긴 냉소적인 농담과 열정적인 냉소주의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함께 리드의 작품에 담겨 있었고, 돌스 특유의 음악적 기량 부족도 마찬가지였다."[26]사이먼 레이놀즈는 2009년 앨범 ''코즈 아이 세즈 소''를 통해 이 밴드가 "펑크 신화의 엉성하고 난폭한 돌스가 아닌, 탄탄하고 날렵한 하드 록 밴드"의 사운드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33]
뉴욕 돌스는 활동 당시 털이 덥수룩한 여장 패션, 잦은 무대 폭력, 센세이셔널한 언동, 멤버들의 알코올 및 마약 문제 등으로 기행 취급을 받으며 인기가 오래가지 못하고 앨범 2장만 남기고 해산했다. 그러나 이후 선더스가 펑크 부흥기 시대 영국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라몬즈, 섹스 피스톨즈 등 영미 펑크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주어 펑크와 글램 록의 선구적인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전 더 스미스의 모리세이가 뉴욕 돌스의 팬클럽을 주재하기도 했으며, 2004년 재결성은 그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3. 2. 글램 록과의 관계
뉴욕 돌스는 화려한 의상과 메이크업, 과장된 퍼포먼스로 인해 글램 록 밴드로 분류되기도 했다. 멤버들은 스판덱스와 통굽 부츠를 착용했고, 작사가이자 "컨셉 마스터"였던 데이비드 요한센은 하이힐과 드레스를 입기도 했다.[26][27] 패션 역사학자 발레리 스틸은 뉴욕 돌스가 영국의 글램 록 스타일을 따랐다고 말했다.[28]하지만 이들은 글램 록의 미학을 차용하면서도, 펑크 록의 반항적인 정신과 날 것의 에너지를 결합하여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했다. 올뮤직 편집자 스티븐 토마스 얼와인은 뉴욕 돌스가 롤링 스톤스의 "지저분한 로큰롤", 스투지스의 "무정부적인 소음", 데이비드 보위와 T. 렉스의 글램 록, 걸 그룹 팝 음악과 같은 요소를 차용했다고 평가했다.[25] 켄 터커는 그들이 루 리드의 "뉴욕 감성"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썼다.[26]
음악 저널리스트 닉 켄트는 뉴욕 돌스가 화려한 패션 때문에 "전형적인 글램 록커"였지만, 음악가로서의 기술적인 부족함 때문에 펑크 록 명성을 얻었다고 주장했다.[30] 반면, 로버트 크리스트가우는 그들을 글램 록 밴드로 분류하기보다는 "롤링 스톤스 이후 최고의 하드 록 밴드"로 분류하는 것을 선호했다.[31]
4. 멤버
뉴욕 돌스는 1971년 뉴욕에서 결성된 록 밴드로, 멤버 구성은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1971년 결성 당시 멤버는 데이비드 조한슨(보컬), 조니 선더스(기타), 릭 리베츠(기타), 아서 케인(베이스), 빌리 머시아(드럼)였다. 릭 리베츠는 몇 달 후 실뱅 실뱅으로 교체되었다. 1972년, 빌리 머시아가 영국 투어 중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고[7], 제리 놀란이 드럼으로 합류하면서 1975년까지 밴드의 핵심 라인업이 유지되었다.
1975년, 조니 선더스와 제리 놀란이 밴드를 떠나 더 하트브레이커스를 결성했다. 이후 피터 조던(베이스), 토니 머신(드럼), 블랙키 로리스(기타), 크리스 로빈슨(키보드), 바비 블레인(키보드) 등이 잠시 밴드를 거쳐갔다.
2004년, 데이비드 조한슨, 실뱅 실뱅, 아서 케인이 재결합하여 공연을 가졌으나, 아서 케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스티브 콘테(기타), 사미 야파(베이스), 브라이언 델라니(드럼) 등 새로운 멤버들이 합류하여 2011년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4. 1. 오리지널 멤버 (1971)
실뱅 실뱅과 빌리 머시아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함께 다녔으며, 1967년에 "더 폭스"라는 밴드에서 연주를 시작했다. 프론트맨이 탈퇴한 후, 머시아와 실뱅은 Truth and Soul이라는 의류 사업을 시작했고, 실뱅은 어빙 D. 체이스의 뉴욕 돌 병원 건너편에 있는 남성 부티크인 A Different Drummer에서 일하게 되었다.[5] 실뱅은 그 가게가 미래의 밴드 이름을 짓는 데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1970년, 그들은 다시 밴드를 결성했고, 조니 선더스를 베이시스트로 영입했지만, 결국 실뱅이 그에게 기타를 가르쳤다. 그들은 스스로를 돌스라고 불렀다. 실뱅이 몇 달 동안 런던에서 지내기 위해 밴드를 떠났을 때, 선더스와 머시아는 각자의 길을 갔다.선더스는 결국 브롱스에서 함께 연주하던 케인과 릭 리베츠에 의해 영입되었다. 선더스의 제안으로 머시아가 원래 드러머를 대체했다. 선더스는 리드 기타를 연주하고 밴드 Actress에서 노래를 불렀다. 리베츠가 녹음한 1971년 10월의 리허설 테이프는 ''Dawn of the Dolls''로 발매되었다. 선더스가 더 이상 프론트맨을 하고 싶지 않다고 결정했을 때, 데이비드 조한슨이 밴드에 합류했다. 처음에 이 그룹은 보컬 데이비드 조한슨, 기타리스트 조니 선더스와 릭 리베츠(몇 달 후에 실뱅 실뱅으로 교체됨), 베이스 기타리스트 아서 "킬러" 케인, 드러머 빌리 머시아로 구성되었다. 원래 라인업의 첫 공연은 197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노숙자 쉼터인 엔디콧 호텔에서 열렸다.
4. 2. 황금기 멤버 (1972-1975)
다음은 뉴욕 돌스의 황금기 (1972-1975) 멤버들이다.- 참고:
- 빌리 머시아는 1972년 11월 6일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7]
- 조니 선더스와 제리 놀란은 1975년 4월 11일 밴드를 탈퇴하여 더 하트브레이커스를 결성했다.[12]
- 아서 케인은 1973년 미국 서부 해안 공연 전에 엄지 부상을 입어 여러 차례 피터 조던으로 교체되었다.[12]
4. 3. 재결성 멤버 (2004-2011)
| 멤버 | 악기 | 활동 기간 | 비고 |
|---|---|---|---|
| 데이비드 조한센 | 보컬, 하모니카 | 2004년 - 2011년 | |
| 실뱅 실뱅 | 기타, 베이스, 피아노, 보컬 | 2004년 - 2011년 | 2021년 사망 |
| 아서 케인 | 베이스 | 2004년 | 2004년 사망 |
| 스티브 콘테 | 기타, 보컬 | 2004년 - 2010년 | |
| 존 콘테 | 베이스 | 2004년 | |
| 게리 파웰 | 드럼 | 2004년 | |
| 브라이언 쿠닌 | 키보드 | 2004년 - 2006년 | |
| 브라이언 델라니 | 드럼 | 2005년 - 2011년 | |
| 사미 야파 | 베이스 | 2005년 - 2010년 | |
| 아론 리 타스잔 | 기타 | 2008년 - 2009년 | |
| 프랭크 인판테 | 기타 | 2010년 - 2011년 | |
| 제이슨 힐 | 베이스, 백 보컬 | 2010년 - 2011년 | |
| 제이슨 서터 | 드럼 | 2011년 | |
| 케니 아론슨 | 베이스 | 2011년 | |
| 얼 슬릭 | 기타 | 2011년 | |
| 클레이튼 피처 | 기타 | 2011년 |
5. 영향력
뉴욕 돌스는 1970년대 초, 글램 록과 펑크 록 씬에 큰 영향을 미친 선구적인 밴드였다. 비록 상업적인 성공은 짧았지만, 그들의 독특한 음악 스타일과 파격적인 무대 매너는 후대 밴드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에어로스미스, 키스를 비롯한 여러 밴드에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섹스 피스톨스, 더 클래시 등 영국 펑크 록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40][41] 모리세이는 뉴욕 돌스의 팬클럽을 주재하기도 했으며, 2004년 재결성은 그의 노력 덕분이었다.
뉴욕 돌스 해체 이후, 조니 썬더스와 제리 놀란은 더 하트브레이커스를 결성했지만, 썬더스는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놀란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데이빗 요한슨은 솔로 활동과 버스터 포인덱스터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며 영화에도 출연했다. 실뱅 실뱅은 CBGB에서 인기 밴드인 더 크리미널스를 결성했다. 블래키 로리스는 뉴욕 돌스에서 짧게 활동한 후, 헤비 메탈 밴드 W.A.S.P.를 결성했다.
5. 1. 펑크 록에 미친 영향
대중음악 백과사전(1995)에 따르면 뉴욕 돌스는 "지난 20년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록 밴드 중 하나"였다.[34] 작가 션 세넷은 롤링 스톤스를 선구로 하고 에어로스미스, 하노이 록스의 뒤를 이어 건즈 앤 로지스에 이르는 퇴폐적이고 영향력 있는 록 밴드의 유산의 일부로 이 밴드를 꼽았다.[35] 밴드의 데뷔 앨범이 발매될 즈음, 더 스틸레토스, 더 브라츠, Teenage Lust, The Harlots 등 뉴욕에서 파생된 많은 밴드를 낳았다. 그들이 영감을 준 초창기 그룹 중 두 곳은 키스와 에어로스미스였으며,[36] 이는 다시 록 음악, 특히 하드 록과 헤비 메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밴드 중 두 곳이 될 것이다.[37] 하노이 록스의 음악과 미학 또한 뉴욕 돌스에서 큰 영감을 받았으며, 그 자체로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38]뉴욕 돌스는 텔레비전, 토킹 헤즈, 패티 스미스, 라몬스, 블론디, 리처드 헬 앤 더 보이드스를 포함하는 뉴욕의 초기 펑크 록 신의 촉매제였으며,[39] 특히 섹스 피스톨스, 더 클래시, 더 댐드를 포함한 영국 펑크 록 발전에 가장 영향력 있는 밴드 중 하나였다.[40][41] ''론리 보이: 테일스 프롬 어 섹스 피스톨''에서 기타리스트 스티브 존스는 뉴욕 돌스를 섹스 피스톨스 스타일에 가장 영향을 미친 밴드 중 하나로 꼽았으며,[42] 2023년 ''스핀''과의 인터뷰에서 더 댐드의 데이브 배니안은 뉴욕 돌스의 동명 앨범을 그가 "없이는 살 수 없는" 다섯 앨범 중 하나로 꼽았다.[43] ''가디언'' 작가 이안 기틴스는 이 앨범을 "펑크 록의 제로 연도"라고 불렀다.[44] 이 밴드는 장르가 발전함에 따라 펑크 밴드에 계속 영감을 주었으며, 미스피츠, 소셜 디스토션, 그린 데이는 모두 그들의 영향을 회상했다.[72]
1980년대에 뉴욕 돌스의 영향은 글램 메탈 장르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45][46] 특히, 밴드의 양성적 미학과 스판덱스, 드레스, 하이힐, 과장된 헤어스타일은 해당 장르의 밴드들 사이에서 널리 모방되었다.[47] ''얼터너티브 프레스'' 작가 팀 스테갈은 이 밴드가 글램 메탈의 외모를 발명했다고 말했으며,[72] ''베이커 음악가 전기 사전''에서 행크 보르도비츠는 이 밴드를 헤어 메탈의 선구자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본 적 없는 가장 중요한 밴드"라고 불렀다.[48] 뉴욕 돌스의 영향을 받은 유명한 글램 메탈 밴드로는 머틀리 크루, 포이즌,[46] 래트,[49] 스키드 로우,[50] 트위스티드 시스터가 있다.[51] 1980년대가 진행되면서 글램 메탈의 상업화가 증가함에 따라, 이 장면 내의 많은 밴드들이 뉴욕 돌스의 영향에 더 중점을 둔 새로운 사운드를 형성했으며, 건즈 앤 로지스,[52] L.A. 건스,[53] 패스터 푸시캣이 그 예이다.[54]
뉴욕 돌스를 영향으로 꼽은 다른 음악가로는 스미스와 보컬리스트 모리세이,[55] 언더토네스,[56] 조안 제트 & 더 블랙하츠,[57] 데이비드 보위, 재팬, D 제너레이션,[58] 빌리 아이돌,[59] XTC의 테리 챔버스,[60] 데프 레파드, R.E.M.,[61] 더 리플레이스먼츠, 소울 어사일럼,[62] 앨리스 인 체인스, 사운드가든, 그린 리버의 브루스 페어웨더와 스톤 고서드 및 마더 러브 본 (후자는 펄 잼의 멤버이기도 함),[63][64] 루비 앤 더 레드넥스,[65] 할리우드 브라츠,[66] 후두 구루스, 더 사이언티스트,[67] 팔레이 로열,[68] 마릴린 맨슨,[69] 제트보이,[70] 록 시티 엔젤스,[71] 더 크램프스, 더 리버틴스,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가 있다.[72]
활동 당시에는 털이 덥수룩한 여장 패션이나 잦은 무대에서의 폭력 행위, 센세이셔널한 언동, 멤버들의 알코올 및 마약 문제 등으로 기행 취급을 받기도 하여 인기가 지속되지 못하고 앨범 2장을 남기고 해산했다. 하지만, 이후 선더스가 펑크 부흥기 시대의 영국에서 인기를 얻게 되면서 라몬즈나 섹스 피스톨즈 등의 영미 펑크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주어, 펑크와 글램 록의 선구적인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전 더 스미스의 모리세이가 뉴욕 돌스의 팬클럽을 주재하기도 했으며, 2004년 재결성은 그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1975년(선더스 탈퇴 직후)에 재적했던 블래키 로리스는[82][83][84][85], 1982년에 헤비 메탈 밴드 W.A.S.P.를 결성했다.
5. 2. 글램 메탈에 미친 영향
New York Dolls영어는 글램 메탈 장르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45][46] 특히, 밴드의 양성적인 미학과 스판덱스, 드레스, 하이힐, 과장된 헤어스타일은 해당 장르의 밴드들 사이에서 널리 모방되었다.[47] ''얼터너티브 프레스'' 작가 팀 스테갈은 이 밴드가 글램 메탈의 외모를 발명했다고 언급했으며,[72] ''베이커 음악가 전기 사전''에서 행크 보르도비츠는 이 밴드를 헤어 메탈의 선구자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본 적 없는 가장 중요한 밴드"라고 불렀다.[48]머틀리 크루, 포이즌,[46] 래트,[49] 스키드 로우,[50] 트위스티드 시스터[51] 등은 뉴욕 돌스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글램 메탈 밴드들이다. 1980년대가 지나면서 글램 메탈이 상업화되자, 건즈 앤 로지스,[52] L.A. 건스,[53] 패스터 푸시캣[54] 등은 뉴욕 돌스의 영향을 더 강조한 새로운 사운드를 선보이기도 했다.
5. 3. 그 외의 영향
플로리다에서 돌아온 직후, 조니 썬더스와 제리 놀란은 리처드 헬을 베이시스트로 영입하여 더 하트브레이커스를 결성했다. 헬은 그들이 돌스를 탈퇴한 바로 그 주에 텔레비전을 떠났다. 썬더스는 이후 솔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1991년 4월 23일 뉴올리언스에서 헤로인과 메타돈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18] 그는 T 세포 백혈병도 앓고 있었다. 놀란은 1992년 1월 14일 세균성 수막염으로 인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1976년, 케인과 블랙키 로리스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킬러 케인 밴드를 결성했다. 뉴욕 돌스의 두 번째 해체 직후, 데이빗 요한슨은 솔로 커리어를 시작, 1980년대 후반에는 버스터 포인덱스터라는 예명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실뱅 실뱅은 CBGB에서 인기 있는 밴드인 더 크리미널스를 결성했다.뉴욕 돌스의 사후 앨범인 ''립스틱 킬러스''는 오리지널 돌스(드럼은 빌리 무르시아)의 초기 데모 테이프로 구성되어 있으며, 1981년 ROIR 레코드에서 카세트 테이프 에디션으로 발매되었고, 이후 CD로 재발매되었으며, 2006년 초에 다시 비닐로 발매되었다. 이 앨범의 모든 트랙은 ''머서 스트리트 세션''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뉴욕의 블루 록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으며, CD ''프라이빗 월드''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다른 곳에서 녹음된 다른 트랙들과 함께 이전에 발매되지 않았던 돌스 오리지널 곡인 "Endless Party"도 포함되어 있다. 또 다른 미발표 돌스 오리지널 곡 "Lone Star Queen"을 포함한 3개의 미발표 스튜디오 트랙이 ''록 'n' 롤''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나머지 두 곡은 커버곡으로, 오리지널 ''코리지어스 캣'' 만화 시리즈의 테마곡인 "코리지어스 캣"과 스티브 크로퍼와 에디 플로이드가 오티스 레딩을 위해 작곡한 "Don't Mess With Cupid"의 두 번째 시도이다.
요한센은 데이비드 요한센 그룹을 결성하여 1978년에 뉴욕 그린위치 빌리지의 바텀 라인에서 녹음한 동명의 LP를 발매했으며, 여기에는 실뱅 실뱅과 조니 썬더스가 게스트 뮤지션으로 참여했다. 1978년 5월에는 스티브 폴(전 더 신)이 만든 레이블 블루 스카이 레코드에서 "David Johansen"을 발매하기도 했다. 요한센은 솔로 프로젝트로 투어를 계속하며 ''In Style''(1979), ''Here Comes the Night''(1981), ''Live it'' ''Up''(1982), ''Sweet Revenge''(1984) 4장의 앨범을 발매했다. 1980년대 후반, 요한센은 뉴욕 돌스의 페르소나에서 벗어나고자 버스터 포인덱스터라는 페르소나를 만들었고, 이 활동으로 ''스크루지'',[19] ''프리잭'', ''렛 잇 라이드'' 등 여러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괴짜 민족음악학자 이름을 딴 데이비드 요한센 앤 더 해리 스미스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점프 블루스, 델타 블루스, 그리고 몇몇 오리지널 곡을 연주했다.
실뱅은 자신의 밴드 더 크리미널스를 결성한 후 RCA에서 솔로 앨범을 냈고, 요한센과도 함께 작업했다. 그는 나중에 뉴욕에서 택시 운전사가 되었다. 1990년대 초, 실뱅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피시헤드 레코드에서 앨범 ''Sleep Baby Doll''을 녹음했다. 이 앨범에는 드럼의 브라이언 키츠, 데이브 배니언의 팬텀 코드, 더 퍼즈톤즈와 함께 연주했던 스피디존 카루치, 리드 기타의 올리비에 르 바론이 참여했다. 블론디의 프랭크 인판테와 제너레이션 X의 데르우드 앤드류스의 게스트 출연도 포함되었다. 이 앨범은 ''뉴욕 어 고고''로 재발매되었다.
''대중음악 백과사전(1995)''에 따르면 뉴욕 돌스는 "지난 20년 동안 가장 영향력 있는 록 밴드 중 하나"였다.[34] 작가 션 세넷은 롤링 스톤스를 선구로 하고 에어로스미스, 하노이 록스의 뒤를 이어 건즈 앤 로지스에 이르는 퇴폐적이고 영향력 있는 록 밴드의 유산의 일부로 이 밴드를 꼽았다.[35] 밴드의 데뷔 앨범이 발매될 즈음, 이미 더 스틸레토스, 더 브라츠, Teenage Lust, The Harlots를 포함하여 뉴욕에서 파생된 많은 밴드를 낳았다. 그들이 영감을 준 초창기 그룹 중 두 곳은 키스와 에어로스미스였으며,[36] 이는 다시 록 음악, 특히 하드 록과 헤비 메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밴드 중 두 곳이 될 것이다.[37] 하노이 록스의 음악과 미학 또한 뉴욕 돌스에서 큰 영감을 받았으며, 그 자체로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38]
뉴욕 돌스는 텔레비전, 토킹 헤즈, 패티 스미스, 라몬스, 블론디 및 리처드 헬 앤 더 보이드스를 포함하는 뉴욕의 초기 펑크 록 신의 촉매제였으며,[39] 특히 섹스 피스톨스, 더 클래시 및 더 댐드를 포함한 영국 펑크 록 발전에 가장 영향력 있는 밴드 중 하나였다.[40][41] ''론리 보이: 테일스 프롬 어 섹스 피스톨''에서 기타리스트 스티브 존스는 뉴욕 돌스를 섹스 피스톨스 스타일에 가장 영향을 미친 밴드 중 하나로 꼽았으며,[42] 2023년 ''스핀''과의 인터뷰에서 더 댐드의 데이브 배니언은 뉴욕 돌스의 동명 앨범을 그가 "없이는 살 수 없는" 다섯 앨범 중 하나로 꼽았다.[43] ''가디언'' 작가 이안 기틴스는 이 앨범을 "펑크 록의 제로 연도"라고 불렀다.[44] 이 밴드는 장르가 발전함에 따라 펑크 밴드에 계속 영감을 주었으며, 미스피츠, 소셜 디스토션 및 그린 데이는 모두 그들의 영향을 회상했다.[72]
1980년대에 뉴욕 돌스의 영향은 글램 메탈 장르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45][46] 특히, 밴드의 양성적 미학과 스판덱스, 드레스, 하이힐, 과장된 헤어스타일은 해당 장르의 밴드들 사이에서 널리 모방되었다.[47] ''얼터너티브 프레스'' 작가 팀 스테갈은 이 밴드가 글램 메탈의 외모를 발명했다고 말했으며,[72] ''베이커 음악가 전기 사전''에서 행크 보르도비츠는 이 밴드를 헤어 메탈의 선구자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본 적 없는 가장 중요한 밴드"라고 불렀다.[48] 뉴욕 돌스의 영향을 받은 유명한 글램 메탈 밴드로는 머틀리 크루, 포이즌,[46] 래트,[49] 스키드 로우[50] 및 트위스티드 시스터가 있다.[51] 1980년대가 진행되면서 글램 메탈의 상업화가 증가함에 따라, 이 장면 내의 많은 밴드들이 뉴욕 돌스의 영향에 더 중점을 둔 새로운 사운드를 형성했으며, 건즈 앤 로지스,[52] L.A. 건스[53] 및 패스터 푸시캣이 그 예이다.[54]
뉴욕 돌스를 영향으로 꼽은 다른 음악가로는 스미스와 보컬리스트 모리세이,[55] 언더토네스,[56] 조안 제트 & 더 블랙하츠,[57] 데이비드 보위, 재팬, D 제너레이션,[58] 빌리 아이돌,[59] XTC의 테리 챔버스,[60] 데프 레파드, R.E.M.,[61] 더 리플레이스먼츠, 소울 어사일럼,[62] 앨리스 인 체인스, 사운드가든, 그린 리버의 브루스 페어웨더와 스톤 고서드 및 마더 러브 본 (후자는 펄 잼의 멤버이기도 함),[63][64] 루비 앤 더 레드넥스,[65] 할리우드 브라츠,[66] 후두 구루스, 더 사이언티스트,[67] 팔레이 로열,[68] 마릴린 맨슨,[69] 제트보이,[70] 록 시티 엔젤스,[71] 더 크램프스, 더 리버틴스 및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가 있다.[72]
활동 당시에는 털이 덥수룩한 여장 패션이나 잦은 무대에서의 폭력 행위, 센세이셔널한 언동, 멤버들의 알코올 및 마약 문제 등으로 기행 취급을 받기도 하여 인기가 지속되지 못하고 앨범 2장을 남기고 해산해 버렸다. 하지만, 이후 썬더스가 펑크 부흥기 시대의 영국에서 인기를 얻게 되면서 라몬즈나 섹스 피스톨즈 등의 영미 펑크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주어, 펑크와 글램 록의 선구적인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전 더 스미스의 모리세이가 뉴욕 돌스의 팬클럽을 주재하기도 했다. 2004년 재결성은 그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1975년(선더스 탈퇴 직후)에 재적했던 블래키 로리스는[82][83][84][85], 1982년에 헤비 메탈 밴드 W.A.S.P.를 결성했다. 참고로, BURRN! 2024년 1월호(신코 뮤직 발행)에 게재된 인터뷰 기사에서 그는, 뉴욕 돌스에서는 2번의 무대만을 섰을 뿐인데 모두가 그것을 과장되게 이야기한다고 답했다.
6. 음반 목록
인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