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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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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오스의 역사는 석기 시대부터 시작되며, 라오족은 8세기경 북쪽에서 이주해 왔다. 라오스는 란쌍 왕국(1353-1707) 시기에 번성했으며, 이후 루앙프라방, 비엔티안, 참파삭의 세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받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지배를 거쳐 1953년 독립했다. 독립 후 내전과 베트남 전쟁을 겪었으며, 1975년 라오스 인민 민주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며 개혁 개방 정책을 추진해왔으며, 현재 빈곤 퇴치와 경제 발전을 위한 과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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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의 역사
지도
기본 정보
공식 명칭라오스 인민민주공화국
로마자 표기Lao People's Democratic Republic
현지어 표기ປະເທດລາວ
수도비엔티안
역사
초기무앙수아 (698–1353)
왕국 시대란쌍 왕국 (1353–1707)
지역 왕국 시대비엔티안 왕국 (1707–1828)
루앙프라방 왕국 (1707–1893)
무앙푸안 (1707–1899)
참파삭 왕국 (1713–1904)
식민 시대라오 반란 (1826–28) (1826–1828)
호 전쟁 (1865–1890)
1893년 프랑스-시암 위기 (1893)
프랑스령 라오스 보호령 (1893–1953)
프랑스-태국 전쟁 (1940–1941)
루앙프라방 왕국 (일본 괴뢰 국가) (1945)
자유 라오 운동 (라오 이싸라) (1945–1949)
독립 이후라오스 왕국 (1946–1975)
라오스 내전 (1953–1975)
북베트남의 라오스 침공 (1958–1959)
반공 반란 (1975–2007)
라오스 인민민주공화국 (1975–1991)
소련 붕괴 이후 라오스 (1991–현재)
정치
정치 체제공산주의 인민공화국
국가 원수통룬 시술릿
정부 수반소네사이 시판돈
지리
면적236,800 제곱킬로미터
인구
인구약 750만 명 (2022년 추정)
경제
통화라오스 킵 (LAK)
기타
국가 코드LA
국가 도메인.la
전화 코드+856
공휴일라오스 공휴일 참고

2. 역사

라오스의 역사는 란쌍 왕국에서 시작되어 현재 라오스 인민 민주 공화국까지 이어진다.

석기시대부터 라오스 땅에 인류가 살았다는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 남쪽에는 공룡 화석이, 북쪽에는 선사시대의 돌도끼, 항아리, 매장지 등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라오스를 이루는 라오족의 대부분은 8세기경 북쪽에서 내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오족은 타이족과 기원이 같으며, 기원전 1000년경 황하장강 중간까지 남하했다가 한족에게 밀려 현재의 쓰촨성 부근에 무앙(도시 국가)을 건국했다.

기원후 1세기경, 라오족은 애뢰국을 세웠다. 애뢰 건국 신화는 다음과 같다. 옛날 뢰산(애뢰산)에 살던 어부 사일이 침목(물에 잠긴 나무)에 감응하여 10명의 아들을 낳았다. 침목은 용으로 변신하여 사일을 찾아왔고, 아들 중 구륭만이 남아 침목룡의 핥음을 받았다. 장성한 아들들은 구륭을 왕으로 추대했고, 이들이 애뢰국의 시조가 되었다.

애뢰국은 한나라와 교류하며 성장했다.

연도사건
47년애뢰왕 현률이 녹다를 정벌했으나 실패함.
51년애뢰왕 현률이 한나라에 귀순(내부)하여 애뢰군장으로 책봉됨. 이때 애뢰의 호구는 2,770호 17,659명이었음.
69년애뢰왕 류모가 한나라에 귀순함. 이때 애뢰에는 77읍왕이 있었고, 호구는 56,890호 553,711명이었음. 한나라는 영창군을 설치함.
76년 ~ 77년애뢰왕 류뢰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됨.



이후 기원후 3세기경 라오족은 윈난성 북부 지역으로 이동했다. 6세기경에는 바이족, 라오족, 이족 등이 연합하여 남조를 세웠으나, 8세기에 남조가 당나라의 공격을 받자 라오족은 남쪽으로 이동했다. 722년, 라오인들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고, 8세기 중반, 라오족은 메콩강 부근으로 이주하여 루앙프라방, 비엔티안 등에 도시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1353년 파 응움(Fa Ngum) 왕이 란쌍 왕국을 건국하면서 라오족 최초의 통일 국가가 탄생했다.[44] 란쌍 왕국은 "백만 마리 코끼리의 땅"이라는 뜻으로, 초기 왕국의 왕권과 강력한 군사력을 상징한다. 1358년에는 크메르 제국으로부터 상좌부 불교가 전래되었다.[15]

16세기 후반, 버마의 통구 왕조(Toungoo dynasty)가 란쌍 왕국을 침입했다.[15] 1560년, 세타티랏(Setthathirath) 왕은 버마의 침공을 우려하여 수도를 루앙프라방에서 비엔티안으로 옮겼다.[15] 1563년부터 버마의 비엔티안 침공이 시작되었고, 1574년에는 수도 비엔티안이 점령되면서 란쌍 왕국은 버마에 예속되었다.[15] 그러나 세타티랏 왕은 게릴라전을 펼치며 저항했고, 1591년 그의 아들 노케오 쿠마네가 독립을 되찾았다.[15]

17세기에 수리냐 봉사(Sourigna Vongsa) 왕(1637년–1694년)의 치세는 란쌍 왕국의 번영기였다.[15] 17세기 말, 수리냐 봉사 왕이 죽은 후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란쌍 왕국은 루앙프라방, 비엔티안, 참파삭으로 분열되었다.[15][16][31]

19세기 말, 프랑스메콩강 동쪽의 시암(태국) 영토를 통치하게 되었고, 20세기 초 라오스는 프랑스 보호령이 되었다.[45] 1893년 프랑스-샴 조약으로 프랑스는 란쌍 왕국의 종주권을 획득했고,[45] 1899년 이 지역을 인도차이나 연방에 편입, 이후 라오스로 불렀다.[45]

1945년 3월, 일본은 프랑스를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몰아내고 라오스 독립을 선언했다.[4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가 다시 지배했지만, 1949년 라오스는 프랑스 연방 내에서 제한적 자치권을 얻었다.[45] 1953년 10월 22일, 프랑스와의 협정을 통해 라오스 왕국은 완전한 독립을 쟁취했다.[45]

1950년대 초, 좌파 파테트라오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베트남베트민과 연합하여 프랑스에 맞서 싸웠다.[45] 1975년 사이공과 프놈펜에서 반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자 파테트라오가 정권을 잡았고 라오스 인민 민주 공화국을 세웠다.[1] 라오스는 베트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46]

1991년 새 헌법이 공포되었다.

2. 1. 초기 역사

라오스 땅에서는 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살았다는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 남쪽에는 공룡 화석이, 북쪽에는 선사시대의 돌도끼, 항아리, 매장지 등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라오스를 이루는 라오족의 대부분은 8세기경 북쪽에서 내려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라오족은 타이족과 기원이 같으며, 기원전 1000년경 황하장강 중간까지 남하했다. 이후 한족에게 밀려 현재의 쓰촨성 부근에 무앙(도시 국가)을 건국했다.

기원후 1세기경, 라오족은 애뢰국을 세웠다. 애뢰 건국 신화는 다음과 같다.

옛날 뢰산(애뢰산)에 살던 어부 사일이 침목(물에 잠긴 나무)에 감응하여 10명의 아들을 낳았다. 침목은 용으로 변신하여 사일을 찾아왔고, 아들 중 구륭만이 남아 침목룡의 핥음을 받았다. 장성한 아들들은 구륭을 왕으로 추대했고, 이들이 애뢰국의 시조가 되었다.

애뢰국은 한나라와 교류하며 성장했다.

연도사건
47년애뢰왕 현률이 녹다를 정벌했으나 실패함.
51년애뢰왕 현률이 한나라에 귀순(내부)하여 애뢰군장으로 책봉됨. 이때 애뢰의 호구는 2,770호 17,659명이었음.
69년애뢰왕 류모가 한나라에 귀순함. 이때 애뢰에는 77읍왕이 있었고, 호구는 56,890호 553,711명이었음. 한나라는 영창군을 설치함.
76~77년애뢰왕 류뢰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됨.



애뢰의 내부와 반란 진압을 거치면서 한나라는 미얀마, 인도, 대진으로 가는 새로운 길을 확보하였다. 애뢰 사람들은 코를 뚫고 귓불을 늘어뜨리는 풍습이 있었으며, 옷감을 짜고 무늬를 넣는 기술이 발달했다.

이후 기원후 3세기경 라오족은 윈난성 북부 지역으로 이동했다. 6세기경에는 바이족, 라오족, 이족 등이 연합하여 남조를 세웠다. 그러나 8세기에 남조가 당나라의 공격을 받자 라오족은 남쪽으로 이동했다. 722년, 라오인들은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고, 8세기 중반, 라오족은 메콩강 부근으로 이주하여 루앙프라방, 비엔티안 등에 도시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2. 2. 란쌍 왕국

란쌍의 영향권과 주변 국가들, 약 1540년


1353년 파 응움(Fa Ngum) 왕이 란쌍 왕국을 건국하면서 라오족 최초의 통일 국가가 탄생했다.[44] 파 응움 왕은 크메르 제국의 지원을 받아 봉기하여 스워를 탈환하고, 각지의 무앙을 점령하여 란쌍 왕국을 건국했다.[43] 란쌍 왕국은 "백만 마리 코끼리의 땅"이라는 뜻으로, 초기 왕국의 왕권과 강력한 군사력을 상징한다.

1358년에는 크메르 제국으로부터 상좌부 불교가 전래되었다.[15] 란쌍 왕국은 상좌부 불교를 수용하고 주변국과 교류하며 번영했다. 1353년부터 1560년까지 란쌍의 수도는 루앙프라방이었다.

16세기 후반, 버마의 통구 왕조(Toungoo dynasty)가 란쌍 왕국을 침입했다.[15] 1560년, 세타티랏(Setthathirath) 왕은 버마의 침공을 우려하여 수도를 루앙프라방에서 비엔티안으로 옮겼다.[15] 1563년부터 버마의 비엔티안 침공이 시작되었고, 1574년에는 수도 비엔티안이 점령되면서 란쌍 왕국은 버마에 예속되었다.[15] 그러나 세타티랏 왕은 게릴라전을 펼치며 저항했고, 1591년 그의 아들 노케오 쿠마네가 독립을 되찾았다.[15]

17세기에 수리냐 봉사(Sourigna Vongsa) 왕(1637년–1694년)의 치세는 란쌍 왕국의 번영기였다.[15] 그는 왕위 계승 분쟁을 극복하고 란쌍 왕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왕이 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외교 관계가 성공적으로 관리되었고, 그는 공정하고 단호한 통치자로 알려졌다.

17세기 말, 수리냐 봉사 왕이 죽은 후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란쌍 왕국은 루앙프라방, 비엔티안, 참파삭으로 분열되었다.[15][16][31]

2. 3. 외세 침략기

19세기 말, 프랑스메콩강 동쪽의 시암(태국) 영토를 통치하게 되었고, 20세기 초 라오스는 프랑스 보호령이 되었다.[45] 1893년 프랑스-샴 조약으로 프랑스는 란쌍 왕국의 종주권을 획득했고,[45] 1899년 이 지역을 인도차이나 연방에 편입, 이후 라오스로 불렀다.[45] 1905년 프랑스는 루앙프라방 왕국을 재편했고,[45] 1907년 프랑스령 라오스와 샴 사이의 국경선을 개정했다.[45]

1945년 3월, 일본은 프랑스를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몰아내고 라오스 독립을 선언했다.[4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가 다시 지배했지만, 1946년 프랑스는 루앙프라방 왕의 통치 아래 통일된 라오스를 승인했다.[45] 1949년 헌법이 공포되고 라오스는 프랑스 연방 내에서 제한적 자치권을 얻었다.[45]

1950년대 초, 좌파 파테트라오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베트남베트민과 연합하여 프랑스에 맞서 싸웠다.[45] 전쟁이 끝날 무렵 파테트라오는 2개 주를 통치했다.[45] 1953년 10월 22일, 프랑스와의 협정을 통해 라오스 왕국은 완전한 독립을 쟁취했다.[45]

2. 4. 라오스 내전과 사회주의 국가 수립

197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으며 다음 해 파테트라오와 우파가 함께 전라오스 통일 임시 정부를 형성했다.[1] 1975년 사이공과 프놈펜에서 반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자 파테트라오가 정권을 잡았고 지하에 숨어 있던 라오스 공산당이 모습을 드러내어 라오스 인민 민주 공화국을 세웠다.[1] 라오스는 베트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1980년대 베트남이 이끄는 인도차이나 동맹(라오스·베트남·캄보디아)의 일원이 되었다.[1]

2. 5. 라오스 인민 민주 공화국

197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으며, 다음 해 파테트라오와 우파가 함께 전라오스 통일 임시 정부를 형성했다. 사이공과 프놈펜에서 반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진 1975년 파테트라오가 정권을 잡았고, 지하에 숨어 있던 라오스 공산당이 모습을 드러내어 라오스 인민 민주 공화국을 세웠다. 라오스는 베트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1980년대 베트남이 이끄는 인도차이나 동맹(라오스·베트남·캄보디아)의 일원이 되었다.[46]

그러나 1990년대 초반부터 베트남의 영향력은 감소했다. 1989년 최초의 총선이 있었으며, 1991년 새 헌법이 공포되었다.

3. 고고학

라오스의 고고학적 탐사는 여러 어려움으로 인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험준한 지형, 20세기 분쟁으로 인해 전국에 200만 톤이 넘는 불발탄이 남아있는 상황, 라오스 공산 정부와 지역 당국의 역사에 대한 민감성 등이 그 이유이다. 최초의 고고학적 탐사는 프랑스 극동학회의 후원을 받은 프랑스 탐험가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라오스 내전으로 인해 1990년대가 되어서야 본격적인 고고학적 연구가 시작될 수 있었다.[7] 2005년 이후, 중부 메콩 고고학 프로젝트(MMAP)와 같은 노력을 통해 라오스 북부 루앙프라방 주변 메콩강과 그 지류를 따라 수많은 유적지에 대한 발굴과 조사가 진행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메콩강과 그 지류 유역의 초기 인류 정착에 대한 조사를 목표로 한다.

탐 파 링 동굴에서 발견된 고대 인류 화석 유적


탐 파 링 동굴에서 발견된 화석을 통해, 5만 년 전 해부학적으로 현생 인류에 속하는 수렵 채집인들이 동남아시아로 이주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7] 이들은 호모 에렉투스의 고대 인구 집단 구성원들과 융합하여 번식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4만 6천 년에서 6만 3천 년 전으로 추정되는 이 화석은 현생 인류의 형태학적 특징을 지닌 이 지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화석이다.[8]

최근 연구는 초기 인류의 이동 경로에 대한 이해를 넓혀주고 있다. 초기 인류는 연안을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는 연속적인 파동으로 이동했지만, 이전에 이론화되었던 것보다 더 내륙과 북쪽의 강 계곡도 이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9]

호아빈 문화는 베트남 호아빈에서 처음 기술된 석기와 박편 자갈 유물의 산업과 문화적 연속성에 주어진 이름으로, 약 1만 년 전 동굴과 바위 그늘에서 나타난다. 이 문화는 라오스에서도 발견되었다.[10][11] 기원전 2000년경부터 중국 남부 양쯔강 유역에서 물논농업과 수수 재배 기술이 전래되었으며, 사냥과 채집은 특히 내륙의 산림 및 산악 지역에서 중요한 식량 공급원으로 남아 있었다.[13]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구리와 청동 생산은 기원전 2000년경 태국 북동부의 반창 유적과 베트남 북부의 풍응웬 문화에서 확인되었다.[14]

3. 1. 항아리 평원

시앙쿠앙의 항아리 평원


시엥쿠앙 고원에 있는 항아리 평원은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내륙 무역 사회가 형성되었던 거석 유적지이다. 199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1998년부터 현재까지 미폭발탄 제거 작업이 진행 중이다.[15]

초기 철기 시대(기원전 500년~기원후 800년)의 돌 석관인 항아리에서는 인골, 부장품, 도자기 등이 발견되었다. 일부 유적지에는 250개가 넘는 항아리가 있으며, 가장 큰 항아리의 높이는 3m가 넘는다. 이 항아리를 제작하고 사용한 문화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항아리들과 이 지역의 철광석 매장량을 고려할 때, 이 유적지를 만든 사람들은 수익성 있는 육로 무역에 종사했을 가능성이 높다.[16]

4. 초기 인도화된 왕국



1세기경, 푸난 왕국은 인도차이나 반도 남부에 등장하여 인도의 제도, 종교, 국정, 행정, 문화, 문자, 건축 등을 받아들이고 인도양 무역에 종사했다.[18][19]

2세기경, 참파 왕국이 베트남 중부에 건국되어 인도 문화를 받아들였다. 참족라오스 참파삭 주 근처에 최초의 정착지를 건설했다.[19][20]

4. 1. 첸라 왕국

참파삭 주(Champasak Province)의 와트푸(Wat Phu) 산악 유적의 하층 테라스


6세기경, 푸난이 팽창하여 참파삭 지역을 병합했으며, 이후 후계 정권인 첸라에 의해 대체되었다. 첸라는 라오스 토양 위 최초의 왕국으로 여겨질 만큼 현대 라오스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했다.[19][20]

초기 참파왕국의 수도는 샴파삭 근처에 위치한 스레스타푸라였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왓푸가 그 근처에 있다. 왓푸는 라오스 남부에 있는 광대한 사원 단지로, 자연 환경과 화려한 사암 구조물이 결합되어 있다. 900년경까지 참파인들이 이곳을 유지하고 장식했으며, 10세기에 크메르인들이 재발견하여 장식했다.

8세기경에는 참파왕국이 라오스에 위치한 ចេនឡាដីគោក|육지 첸라km와 캄보디아 삼보르 프레이 쿡 근처 마헨드라바르만(Mahendravarman)이 건국한 ចេនឡាទឹកលិច|물 첸라km로 분열되었다. 육지 첸라는 중국에서 "포루(Po Lou)" 또는 "웬단(Wen Dan)"으로 알려졌으며, 717년에 당나라 궁정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물 첸라는 참파, 자바에 기반을 둔 인도네시아의 마타람 해상 왕국, 그리고 해적들의 반복적인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불안정 속에서 크메르인들이 등장했다.[21]

4. 2. 드바라바티 도시 국가

8세기경, 몬족은 북쪽으로 진출하여 파다엣(태국 북동부), 시코타봉(현대 탁핵 부근, 라오스), 무앙 수아(루앙프라방), 찬타부리(비엔티안) 등에 "무앙"으로 알려진 도시 국가들을 건설했다.[15][16] 이 도시 국가들은 느슨하게 결합되었지만, 문화적으로는 유사했으며, 스리랑카 선교사들을 통해 상좌부 불교를 전파했다.[15][16] 시코타봉은 이들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고, 메콩 중류 지역의 무역을 장악했다.[15][16]

5. 타이족의 이동

타이족(그 중 라오인이 하위 집단임)의 기원에 대한 많은 이론들이 제기되었는데, 그중 타이족과 남조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이론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24] 중국 한나라의 남방 원정 기록에는 오늘날 중국 운남성과 광서 지역에 거주했던 타이-카다이어족을 사용하는 민족에 대한 최초의 서면 기록이 남아 있다.

타이족의 이동에 대한 가설 중 하나는 James R. Chamberlain (2016)의 주장인데, 그는 타이-카다이어족(크라-다이)이 기원전 12세기 초 장강 중류 유역에서 형성되었으며, 이는 대략 초나라의 건국과 주나라의 시작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25] 기원전 8세기경 크라어족과 흘라이어족(레이/리) 민족의 남쪽 이주 이후, 기원전 6세기에 베-타이족이 오늘날 절강성의 동해안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월나라를 형성했다.[25] 기원전 333년경 초나라 군대에 의해 월나라가 멸망한 후, 월족(베-타이족)은 중국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광서, 귀주, 베트남 북부에 이르러 뢰월(중앙-남서 타이어)과 오월(북방 타이어)을 형성했다.[25]

광서와 베트남 북부 출신의 타이족은 1천년대 초에 남쪽과 서쪽으로 이동하여 결국 동남아시아 본토 전체로 퍼져 나갔다.[26] 원시 남서 타이어의 중국어 차용어 층과 기타 역사적 증거를 바탕으로 Pittayawat Pittayaporn (2014)은 타이어를 사용하는 부족의 오늘날 광서와 베트남 북부에서 동남아시아 본토로의 남서쪽 이동은 8세기와 10세기 사이에 일어났을 것이라고 주장한다.[2] 타이어를 사용하는 부족들은 중국 세력 확장과 탄압에 의해 촉발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강을 따라 그리고 낮은 고개를 넘어 동남아시아로 남서쪽으로 이동했다.

중국 역사 기록에 따르면, 722년에 40만 명의 '라오'[27]가 마이툭론(Mai Thúc Loan) 뒤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남월의 왕으로 광동에서 자칭했다. 722년 반란 이후 약 6만 명이 참수당했다. 726년, 오늘날 광서에서 '라오' 지도자의 반란 진압 후 3만 명 이상의 반란군이 체포되어 참수당했다. 756년, 또 다른 반란은 20만 명의 추종자를 끌어들였고 4년 동안 지속되었다. 860년대에 오늘날 베트남 북부의 많은 지역 주민들이 남조의 공격자들 편에 섰고, 그 결과 약 3만 명이 참수당했다. 1040년대에 아농(A Nong)이라는 강력한 여족 무당, 그녀의 족장 남편, 그리고 그들의 아들 농지고(Nong Zhigao)가 반란을 일으켜 남녕을 점령하고 광저우를 57일 동안 포위하고 그들에 맞서 파견된 다섯 개의 중국 군대의 지휘관들을 죽였지만 결국 패배했고, 그들의 지도자들 중 많은 수가 사망했다.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세기의 결과로 타이족은 남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라오족에 의한 통일 국가의 출현은 1353년의 란쌍왕국이지만, 그 이전부터 민족으로서의 활동은 활발했다.[37] 라오족의 기원은 알타이 산맥 기슭 부근으로 여겨지며, 시대가 지남에 따라 남하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른쪽


오른쪽


13세기 말 동남아시아 본토


다음은 타이족의 이동과 관련된 주요 사건들을 정리한 표이다.

시기사건내용
기원전 2000년-기원전 1000년경라오족 도시 국가 건국라오족이 시안의 북서쪽, 충칭(重慶市|重慶), 장사(長沙) 등에 도시 국가를 건국.
기원전 843년타타르족 남진타타르족의 남진으로 시안 북서쪽의 라오족이 충칭으로 이주.
기원전 215년한족 침공한족의 침공을 받아 거주 지역을 남하시켜 현재의 쿤밍(昆明) 동쪽에 무안 페가이를 건국.
기원전 110년무안 페가이와 전한 대립무안 페가이의 쿤멘 왕과 전한 무제의 대립 시작.
기원전 87년무안 페가이 멸망무안 페가이가 한의 지배하에 들어감.
9년무안 페가이 독립한으로부터 무안 페가이가 독립하지만 50년 후 다시 한의 지배하에 들어감.
395년라오족 육조와 당 대립라오족의 육조(六詔)와 의 대립 시작.
729년남조 건국남조가 육조를 통일하고 남조 왕국을 건국.
8세기라오족 남하라오족의 대규모 남하 시작.
1283년남조 멸망남조 왕국 멸망.


5. 1. 쿤 보롬 전설

라오족의 타이족 이동 역사는 신화와 전설에 보존되어 있다. '니탄 쿤 보롬'(Nithan Khun Borom) 또는 "쿤 보롬(Khun Borom) 이야기"는 라오족의 기원 신화를 다루며, 그의 일곱 아들들이 동남아시아의 타이 왕국을 건설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15][16] 이 신화에는 쿤 보롬의 법이 기록되어 있어 라오족 사이에서 공법과 정체성의 기초를 마련했다. 카무족(Khamu) 사이에서는 민속 영웅 타오 헝(Thao Hung)의 이야기가 '타오 헝 타오 추앙'(Thao Hung Thao Cheuang) 서사시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이주 시대 동안 타이족 유입에 맞선 토착민들의 투쟁을 보여준다.[15][16] 후대에 라오스 사람들은 이 전설을 기록으로 보존하여 라오스의 위대한 문학적 보물 중 하나이자 상좌부 불교와 타이 문화적 영향 이전 동남아시아의 삶을 묘사한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15][16]

6. 지역 왕국 (1707–1779)

란쌍 왕국은 1707년에 루앙프라방 왕국, 비엔티안 왕국, 참파삭 왕국으로 분열되었다.[15][16]


  • 루앙프라방 왕국: 1707년 란쌍 왕국에서 가장 먼저 분리 독립했다. 란쌍의 왕위 계승 분쟁 과정에서 아유타야 왕국의 지원을 받은 세력에 의해 분할이 중재되었다.[15][16]
  • 비엔티안 왕국: 란쌍 왕국에서 분리된 세 왕국 중 가장 강력했으며, 코랏 고원과 시엥쿠앙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15][16] 1779년 시암의 탁신에게 정복당하고 에메랄드 불상과 프라방을 빼앗겼다.[15][16]
  • 참파삭 왕국: 1713년 남부 라오스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세워졌다. 메콩 강을 통한 무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15][16]


1760년대와 1770년대에 시암과 버마는 라오스 왕국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 경쟁했고, 이는 라오스 왕국들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15][16]

6. 1. 루앙프라방 왕국

란쌍 왕국이 1707년에 분열되면서 가장 먼저 등장한 지역 왕국이다. 란쌍의 사이옹후에 왕이 수리냐 봉사의 손자인 킹키사랏에게 도전받았을 때였다. 사이옹후에는 란쌍에 대한 베트남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베트남 황제 레 뒤 힙의 지원을 받았다. 사이옹후에는 베트남 군대를 이끌고 비엔티안을 공격하여 왕위 계승자였던 난타랏 왕을 처형했다.[15] 이에 십송반나에서 수리냐 봉사의 손자인 킹키사랏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루앙프라방으로 이동했다. 킹키사랏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비엔티안에서 사이옹후에에게 도전했다. 그러자 사이옹후에는 아유타야 왕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아유타야 왕국에서 파견된 군대는 사이옹후에를 지원하기보다는 루앙프라방과 비엔티안 왕국 사이의 분할을 중재했다.[16]

1760년대와 1770년대 내내, 시암과 버마는 격렬한 무장 경쟁을 벌였고, 상대방보다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라오스 왕국들과 동맹을 맺으려고 노력했으며, 상대방에게 군사력을 제공하지 않으려 했다. 결과적으로 경쟁적인 동맹 관계는 루앙프라방과 비엔티안이라는 북부 라오스 왕국들 사이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두 주요 라오스 왕국 중 하나와의 동맹을 버마 또는 시암이 추구하면, 다른 한 쪽은 나머지 한 쪽을 지원하는 경향이 있었다. 동맹 관계는 18세기 후반의 정치 및 군사적 상황에 따라 변화했다.[15][16]

1779년까지, 탁신 장군은 버마 군대를 시암에서 몰아냈고, 정복하여 참파삭과 비엔티안 라오 왕국을 점령했으며, 루앙프라방을 속국으로 만들었다 (루앙프라방은 비엔티안 포위 공격 당시 시암을 도왔다).[15][16]

1791년, 아누룻다는 라마 1세에 의해 루앙프라방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6. 2. 비엔티안 왕국

란쌍 왕국은 1707년 비엔티안 왕국, 루앙프라방 왕국, 참파삭 왕국으로 분열되었다.[15][16] 비엔티안 왕국은 이들 중 가장 강력하여 코랏 고원(현재 태국의 일부)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시엥쿠앙 지배권을 두고 루앙프라방 왕국과 갈등을 빚었다.[15][16]

18세기 동남아시아: 비엔티안 왕국, 루앙프라방 왕국, 참파삭 왕국, 프안(시엥쿠앙) 공국


1760년대와 1770년대 시암과 버마는 치열하게 경쟁하며 라오스 왕국들과 동맹을 맺어 서로에게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 했다.[15][16] 이러한 동맹 관계는 루앙프라방과 비엔티안 왕국 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15][16]

1779년, 탁신 장군은 버마 군대를 시암에서 몰아내고 정복을 통해 참파삭 왕국과 비엔티안 왕국을 점령했으며, 루앙프라방 왕국을 속국으로 만들었다.[15][16] 탁신은 비엔티안에서 에메랄드 불상과 프라방 불상을 빼앗아 톤부리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고, 라오 왕국 지배층에게 시암에 대한 속국 맹세를 요구했다.[15][16]

에메랄드 불상


1782년 탁신이 폐위되고 라마 1세가 시암의 왕이 되면서 라오 왕국에 대한 통치가 강화되었다.[15][16] 1778년에는 나콘랏차시마만이 시암의 조공국이었지만, 라마 1세 통치 말기에는 시삭엣, 우본, 로이엣, 야소톤, 콘깬, 칼라신 등이 방콕에 직접 조공을 바쳤다.[15][16] 태국 기록에 따르면 1826년까지 이산 지역의 도시 수는 13개에서 35개로 증가했다.[15][16]

1780년 비엔티안의 마지막 독립 국왕 시리부냐산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난타센, 인타봉, 아누봉은 방콕으로 끌려갔다.[15][16] 이들은 이후 시암의 종주권 하에 비엔티안의 왕이 되었다.[15][16] 난타센은 프라방을 가지고 비엔티안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에메랄드 불상은 방콕에 남아 라오인들에게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15][16] 1792년 난타센은 라마 1세에게 아누룻다가 버마와 은밀히 거래하고 있다고 설득했고, 시암은 난타센이 군대를 이끌고 루앙프라방을 포위, 점령하도록 허락했다.[15][16] 아누룻다는 방콕으로 보내졌다가 1795년 석방되었다.[15][16] 이후 난타센은 시암에 반역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사망했고, 인타봉(1795-1804)이 비엔티안의 다음 국왕이 되었다.[15][16]

아누봉은 오늘날에도 논란이 되는 인물이다.[15][16] 1826년부터 1829년까지 시암에 대한 그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라오스인들 사이에서는 저항과 민족 정체성의 상징으로 남아있다.[15][16]

라마 3세는 코랏 고원을 직접 병합하기 위해 강제 인구 이동, 부역, 국가 상징과 명성의 상실 등의 조치를 취했다.[15][16] 1812년 시암과 베트남은 캄보디아 왕위 계승을 놓고 대립했고, 베트남이 우위를 점하자 시암은 당렉 산맥과 메콩 강을 따라 스텅트렝 지역을 병합했다.[15][16] 이로 인해 메콩 강을 통한 라오스의 국제 무역은 차단되었고, 라오스 상인들에게는 무거운 관세가 부과되었다.[15][16]

1819년 참파삭 왕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아누봉은 아들 뇨를 보내 진압했고, 그 대가로 아들이 참파삭의 왕이 되도록 했다.[15][16] 아누봉은 비엔티안, 이산, 시엥쿠앙, 참파삭에 걸쳐 영향력을 확장했다.[15][16]

1825년 라마 2세가 사망하고 라마 3세가 즉위하는 과정에서 아누봉의 손자 중 한 명이 살해되었다.[15][16] 아누봉은 장례식에서 여러 요청을 했지만 기각되었고, 그의 아들은 강제 노역을 당했다.[15][16] 라마 3세는 코랏 고원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강제 문신과 세금 증가 정책을 시행했고, 이는 대중의 분노를 일으켰다.[15][16]

1826년 말, 아누봉은 반란을 준비했다.[15][16] 그의 전략은 라오스 민족을 메콩 강 우안으로 송환하고, 라오스인들에게 문신을 한 시암인들을 처형하며, 치앙마이 및 루앙프라방과 동맹을 맺고, 국제적인 지원을 얻는 것이었다.[15][16] 라오스 군대는 나콘라차시마, 칼라신, 롬삭을 점령했고, 참파삭에서는 우본과 수완나품을 점령했다.[15][16]

아누봉의 군대는 사라부리까지 진격했지만, 농부아람푸에서 시암군에게 패배했다.[15][16] 시암군은 비엔티안을 점령했고, 아누봉은 베트남 국경으로 도망쳤다.[15][16] 1828년 아누봉은 체포되어 방콕으로 보내져 죽었다.[15][16] 라마 3세는 비엔티안을 평평하게 만들고 주민들을 이산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15][16]

6. 3. 참파삭 왕국

1713년, 남부 라오스 귀족들은 수리냐 봉사의 조카인 노카삿의 지휘 아래 사이옹후에에 대한 반란을 계속했고, 참파삭 왕국이 등장했다.[15][16] 참파삭 왕국은 세방 강 남쪽에서 스텅트렝까지, 그리고 코랏 고원의 하류 문 강과 치 강 지역을 포함했다.[15][16] 루앙프라방이나 비엔티안보다 인구는 적었지만, 참파삭은 메콩 강을 통한 지역 권력과 국제 무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15][16]

1791년에는 쏨 케오(Shen Keo)의 반란이 발생하여 당시 국왕인 사이냐 쿠마र्न(Saiña Kumārn)이 사망했다. 이 반란은 시암(샴)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반란 진압의 공로를 인정받아 반 싱터(Ban Sintar)에 주둔하고 있던 차오 파이너(Chao Phina)가 새로운 국왕이 되었다. 1813년에 즉위한 차오 마 노이(Chao Mā Noi)와 부왕 탐마키티카(Thammakitti) 사이에 권력 투쟁이 발발했지만, 시암의 부왕 해임으로 큰 피해 없이 혼란은 수습되었다.

차오 마 노이의 시대에는 초능력자를 자칭하는 고승 사(サー)가 주민들을 선동하여 참파삭 왕도를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차오 마 노이는 이 사건을 계기로 방콕으로 도피했으나 사망하였고, 1819년, 아누봉의 아들인 차오 뇨(Chao Nyo)가 새 국왕이 되었다. 차오 뇨는 성벽 수리와 세제 개혁 등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명군으로 불렸지만, 1825년, 아버지 아누봉이 일으킨 비엔티안 왕국의 독립 전쟁에 동참하여 거병했기 때문에 시암에 의해 체포되어 옥중에서 사망했다.

차오 나크(Chao Nak) 왕의 1837년에 참파삭은 큰 화재를 당하여 왕도를 반 히트호트(Ban Hit Hoat) 교외로 옮겼다. 그 후 코티탐톤(Kotitathom) 왕의 1863년에 다시 천도되어 메콩 강 서안, 폰폭(Phon Phock)과 라콘 사원(Lakhon temple) 사이로 옮겨졌다. 이때 천도에 의해 만들어진 도성이 오늘날 참파삭의 기초가 되었다.

7. 시암의 종주권과 라오스 민족주의 (1779-1893)

18세기 말, 시암은 탁신 장군의 지휘 아래 버마 군대를 몰아내고 라오스의 여러 왕국을 정복했다. 참파삭 왕국과 비엔티안 왕국을 점령하고 루앙프라방 왕국을 속국으로 만들었다.[15][16] 시암은 만달라 모델에 따라 지역의 인구와 자원을 통제하고 종교적, 세속적 권위를 확보하려 했다. 탁신 장군은 에메랄드 불상과 프라방 불상을 비엔티안에서 빼앗아 시암의 정통성을 강화했다.

1782년 탁신이 폐위되고 라마 1세가 즉위하면서 시암은 라오스 지역, 특히 코랏 고원(이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1778년에는 나콘랏차시마만이 시암의 조공국이었지만, 라마 1세 통치 말에는 시삭엣, 우본, 로이엣, 야소톤, 콘깬, 칼라신 등이 방콕에 직접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태국 기록에 따르면 1826년까지 이산의 도시 수는 13개에서 35개로 증가했다.[15][16]

시암은 라오스인들을 강제 이주시켰고, 이는 노동력 확보와 세금 증대에 기여했다. 비엔티안의 마지막 독립 국왕 시리부냐산이 1780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들이 방콕으로 끌려갔다. 이후 그의 아들들이 시암의 종주권 하에 비엔티안의 왕위를 계승했다. 프라방은 라오스로 반환되었지만, 에메랄드 불상은 방콕에 남아 라오스인들에게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1791년 아누룻다루앙프라방의 왕이 되었고, 1792년 난타센은 아누룻다가 버마와 내통한다고 주장하여 시암이 루앙프라방을 포위 공격하도록 했다. 난타센은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사망했고, 인타봉이 비엔티안의 왕위를 계승했다. 인타봉은 버마의 침략에 맞서 시암을 지원했다.[15][16]

이후, 아누봉 시기에 아누봉의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프랑수아 가르니에(Francis Garnier)가 이끈 메콩 탐험대에서 루이 델라포르트(Louis Delaporte)가 묘사한 비엔티안의 폐허 (약 1867년)


1779년부터 시암은 라오족을 강제 이주시켰다. 1828년 아누봉 왕의 패배 이후 10만 명에서 30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강제 이주가 18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이주된 사람들은 대부분 이산 지역에 정착하여 ''차 로이(cha loei)'' 또는 "전쟁 포로"로 간주되어 농노로 일했다. 이로 인해 태국과 라오스의 인구 통계와 문화 전통이 변화되었다.[15][16]

1828년 반란 이전에도 라오 지역에는 노예 제도가 존재했지만, 반란의 패배와 그에 따른 라오족의 이주는 인구 감소와 취약한 상황을 초래했다. 라오 텅 고지 부족은 조직적인 노예 습격의 주요 피해자가 되었고, 태국과 라오스에서 집합적으로 ''카(kha)'' 또는 "노예"로 알려지게 되었다. 19세기 말에는 인구 이동과 노예 습격이 완화되었다. 1880년 노예 약탈과 매매는 불법화되었지만, 출랄롱꼰 왕의 칙령에 따라 1905년까지 채무 노예는 지속되었다. 프랑스는 시암의 노예 제도를 라오스 보호령 수립의 주요 명분 중 하나로 사용했다.[15][16]

7. 1. 아누봉의 반란

아누봉은 오늘날에도 상징적이고 논란이 되는 인물이다. 1826년부터 1829년까지 시암(태국)에 대한 반란은 실패로 끝나 비엔티안 왕국과 도시의 완전한 멸망으로 이어졌지만, 라오스인들 사이에서는 굴하지 않는 저항과 민족 정체성의 강력한 상징으로 남아 있다.[15][16] 태국과 베트남의 역사 기록에는 아누봉이 방콕에서 라마 2세의 장례식에서 겪은 개인적인 모욕 때문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적혀 있지만, 아누봉의 반란은 3년 동안 지속되었고, 더 복잡한 이유로 코랏 고원 전체를 휩쓸었다.

강제 인구 이동, 부역, 국가 상징과 명성의 상실(가장 두드러진 예로 에메랄드 불상)은 라마 3세가 이산 지역을 직접 병합하기 위해 취한 구체적인 행동의 배경이 되었다. 1819년 참파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아누봉은 아들 뇨를 지휘하는 군대를 파견하여 갈등을 진압했고, 그 대가로 그의 아들이 참파삭의 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주장했다. 아누봉은 비엔티안, 이산, 시엥쿠앙 등지에 영향력을 확장했다.

1825년 라마 2세가 사망했고, 라마 3세는 왕자 몽꿋(라마 4세)에 맞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라마 3세의 즉위 전 권력 투쟁 과정에서 아누봉의 손자 중 한 명이 살해되었다. 아누봉이 장례식에 도착했을 때, 그는 라마 3세에게 여러 가지 요청을 했지만 기각되었다. 비엔티안으로 돌아가기 전에 아누봉의 아들인 왕세자 응아우는 강제 노역을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구타를 당했다.

라마 3세는 통치 초기에 코랏 고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인구 조사를 명령했는데, 여기에는 각 마을 주민의 인구 조사 번호와 마을 이름을 강제로 문신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 정책의 목표는 방콕에서 라오스 영토를 더욱 엄격하게 관리하는 것이었고, 강제 문신과 증가된 세금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반란의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1826년 말, 아누봉은 무장 반란을 위한 군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누봉의 전략은 세 가지 목표를 포함하고 있었다. 첫째는 시암에 거주하는 모든 라오스 민족을 메콩 강 우안으로 송환하고 라오스인들에게 문신을 한 시암인들을 처형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치앙마이루앙프라방과 동맹을 맺어 라오스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으며, 셋째이자 마지막 목표는 베트남, 중국, 버마 또는 영국 중 하나로부터 국제적인 지원을 얻는 것이었다. 1월에 적대 행위가 시작되었고, 라오스 군대는 비엔티안에서 나콘라차시마, 칼라신, 롬삭을 점령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아누봉의 군대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결국 사라부리에 도착하여 그곳의 라오스인들을 해방시켰지만, 북쪽으로 밀려드는 난민의 물결이 군대의 후퇴를 늦추었다. 아누봉은 또한 버니 조약에 따라 유럽의 나폴레옹 전쟁에서 시암에 무기를 제공했던 시암의 무기 비축량을 심각하게 과소평가했다. 이산의 전통적인 라오스 거점인 농부아람푸에서 라오스 방어가 펼쳐졌지만, 시암군이 승리하여 도시를 평평하게 만들었다. 시암군은 북쪽으로 진격하여 비엔티안을 점령했고, 아누봉은 베트남 국경으로 도망쳤다. 1828년까지 아누봉은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고, 그의 가족과 함께 방콕으로 보내져 우리에 갇혀 죽었다. 라마 3세는 차오 보딘에게 돌아와 비엔티안 도시를 평평하게 만들고, 전 라오스 수도의 모든 주민을 이산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시키라고 명령했다.[15][16]

8. 프랑스 식민 통치 (1893-1953)

19세기 말, 프랑스메콩강 동쪽에 있는 시암(태국) 영토를 통치하게 되었고, 20세기 초 라오스는 프랑스 보호령이 되었다.[32]

프랑스의 식민지적 이해관계는 1860년대 두다르 드 라그레프랑수아 가르니에의 탐험대 파견으로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메콩강을 중국 남부로 가는 길로 활용하기를 희망했다. 1886년, 영국이 시암 북부 치앙마이에 대표를 임명할 권리를 확보하자, 프랑스는 루앙프라방에 대표부를 설립하고 오귀스트 파비를 파견하여 프랑스의 이익을 확보하려 했다.

오귀스트 파비, 프랑스령 라오스 초대 총독


1887년, 파비와 프랑스군은 루앙프라방을 공격한 중국과 타이 산적들로부터 국왕 운캄을 구출했다. 이 사건은 프랑스가 시프송추타이를 장악하고 라오스에서 시암의 약점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1892년, 파비는 방콕의 주재공사가 되어 프랑스 정책을 추진했고, 시암은 프랑스의 무역 이익을 거부하며 군사적 과시와 군함 외교를 벌였다. 1893년 빡남 사건과 프랑스-시암 분쟁 결과, 라오스에서 프랑스의 영토 주장이 인정되었다.

프랑스 군함이 빡남의 시암 요새를 폭격하는 모습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시암이 포기한 영토, 태국의 영토 손실 지도로 묘사됨. 프랑스-시암 분쟁의 결과로 1893년 라오스가 프랑스에 할양되었다.


프랑스는 메콩강 동쪽 지역이 인구가 감소하고 황폐화된 것을 알고 있었다. 아누봉 반란 이후 시암의 강제 인구 이동으로 동쪽 지역 인구의 5분의 1만 남았고, 대부분 라오룸과 푸안족은 코랏 고원 주변으로 재정착되었다. 1893년의 영토 확장은 메콩강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력을 확보하고, 시암의 영토 지배력을 최대한 부정하며, 영국 버마와 안정적인 국경을 협상하기 위한 발판이었다.

1895년, 프랑스는 중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루앙남타와 퐁살리를 장악했다. 1896년, 영국과의 협정으로 무엉싱을 얻는 대신 차오프라야 강 유역에 대한 시암의 주권을 인정했다. 그러나 코랏 고원에 대한 시암의 지배 문제와 말레이 반도에 대한 영국의 이익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1904년, 앙탕트 코르디알 협정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동남아시아에서 각국의 영향권을 확립했지만, 프랑스의 영토 요구는 1907년까지 계속되었다.

8. 1. 프랑스 식민 통치의 영향

프랑스는 19세기 말 메콩강 동쪽의 모든 시암(태국) 영토를 통치하게 되었고, 20세기 초 라오스는 프랑스 보호령이 되었다.[32] 프랑스는 라오스를 베트남의 부속 지역 정도로 여겼으며, 식민 통치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32]

프랑스는 행정, 사법, 공공 사업 등 모든 식민 행정을 담당했다.[32] 프랑스 지휘관 아래 베트남 병사들로 구성된 토착 경비대가 식민지 수도의 군사력을 유지했다.[32] 루앙프라방, 사바나켓, 빡세와 같은 주요 지방 도시에는 부주재관, 경찰, 재무관, 우체국장, 교사, 의사 등이 있었다.[32]

행정 조직에서 베트남인들은 상급 및 중급 직책 대부분을 차지했고, 라오스인들은 하급 서기, 통역, 주방 직원, 일반 노동자로 고용되었다.[32] 마을은 전통적으로 지역 지도자인 ''차오 무앙''의 권위 아래 있었다.[32] 프랑스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인의 수는 수천 명을 넘지 않았다.[32]

프랑스 통치하에 베트남인들은 라오스로 이주하도록 장려되었고, 1943년까지 베트남 인구는 거의 4만 명에 달해 라오스 최대 도시에서 다수를 차지했다.[33] 이들은 자신의 지도자를 선출할 권리를 누렸다.[33] 비엔티안 인구의 53%, 타켁의 85%, 빡세의 62%가 베트남인이었으며, 루앙프라방만 예외적으로 라오스인이 다수였다.[33]

프랑스 식민주의에 대한 라오스인들의 반응은 엇갈렸다.[32] 귀족들은 프랑스를 시암보다 선호했지만, 대다수의 라오스인들은 가혹한 세금과 징용 노동 요구에 시달렸다.[32]

옹 케오가 이끈 ''성자의 반란''(1901-1910)은 프랑스 식민 통치에 대한 초기 저항 운동이었다.[32] 이 반란은 남부 라오스에서 시작되어 볼라벤 고원 전역으로 확산되었다.[32] 북부에서는 타이 뤼 집단이 프랑스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고(1914-1917), 중국인과 라오 텅은 아편 무역에 대한 세금 부과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1914-1917).[32] 무당 파 차이 뷰는 몽족의 고향을 건설하려는 반란을 일으켰다(1919-1921).[32]

1920년까지 대부분의 프랑스령 라오스는 평화를 되찾았고 식민 질서가 확립되었다.[32] 1928년 라오스 공무원 양성을 위한 최초의 학교가 설립되어 라오스인들이 베트남인이 차지했던 직책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32]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프랑스 극동 학술원의 연구를 통해 라오스 민족주의 정체성의 첫 징후가 나타났다.[15][16]

8. 2. 제2차 세계 대전과 독립 운동

1945년 3월 9일 일본 제국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프랑스를 몰아내고 라오스의 독립을 선언하였다.[16]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가 다시 지배하기 시작했지만, 1946년 프랑스는 루앙프라방 왕의 통치 아래 통일된 라오스를 승인하였다.

일본의 압력 아래 시사왕봉 국왕은 1945년 4월에 독립을 선포했다.[16] 이러한 움직임은 라오 세리(Lao Seri)와 라오 펜 라오(Lao Pen Lao)를 포함한 라오스의 여러 독립 운동이 페차라트 라타나봉사 왕자의 지휘 아래 라오 이사라(Lao Issara, "자유 라오스" 운동)로 통합되는 것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들은 라오스의 프랑스 복귀에 반대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은 친프랑스 세력을 고무시켰고, 페차라트 왕자는 시사왕봉 국왕에 의해 해임되었다. 굴하지 않고 페차라트 왕자는 9월에 쿠데타를 일으켜 루앙프라방(Luang Prabang)에 있는 왕족을 가택 연금했다. 1945년 10월 12일, 페차라트 왕자의 민정 아래 라오 이사라 정부가 선포되었다.

1949년 1월 20일에는 반프랑스 공투 단체 "파테트 라오"가 결성되었다. 1950년대 초 파테트라오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베트남베트민과 힘을 합쳐 프랑스와 싸웠다.

그 후 6개월 동안 프랑스는 라오 이사라에 맞서 싸웠고, 1946년 4월 인도차이나(French Indochina in World War II)에 대한 통제권을 재확립할 수 있었다. 라오 이사라 정부는 태국으로 도피하여 1949년까지 베트민(Vietminh)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그룹이 분열되고 파테트 라오(Pathet Lao)가 형성될 때까지 프랑스 식민 제국에 대한 저항을 유지했다.[16] 라오 이사라가 망명한 후, 1946년 8월 프랑스는 시사왕봉 국왕을 수장으로 하는 라오스에 입헌 군주제를 수립했고, 태국은 프랑스-태국 전쟁(Franco-Thai War) 중에 점령한 영토를 반환하는 대신 유엔(United Nations)에서 대표권을 얻는 데 동의했다.

1949년 프랑스-라오스 일반 협약은 라오 이사라의 대부분 구성원에게 협상을 통한 사면을 제공했고, 프랑스 연합(French Union) 내의 준독립적인 입헌 군주국인 라오스 왕국(Kingdom of Laos)을 설립함으로써 회유를 시도했다. 1950년, 국가 군대에 대한 훈련과 지원을 포함하여 라오 왕국 정부(Royal Lao Government)에 추가 권한이 부여되었다. 1953년 10월 22일, 프랑스-라오스 친선 협정은 남은 프랑스의 권한을 독립적인 라오 왕국 정부로 이양했다. 1954년까지 디엔비엔푸 전투(Battle of Dien Bien Phu)에서의 패배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First Indochinese War) 중 베트민과의 8년간의 전투에 종지부를 찍었고,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16]

9. 라오스 왕국과 라오스 내전 (1953-1975)

1955년 선거가 치러졌고, 수반나 푸마 왕자가 이끄는 최초의 연립 정부가 1957년에 구성되었다.[34] 그러나 이 연립 정부는 1958년에 붕괴되었다. 1960년, 콩 레 대위는 쿠데타를 일으켜 중립 정부의 개혁을 요구했다. 수반나 푸마가 다시 이끄는 두 번째 연립 정부는 권력을 유지하지 못했고, 푸미 노사반 장군 휘하의 우익 세력에 의해 축출되었다. 북베트남은 1958년에서 1959년 사이에 호찌민 루트를 건설하기 위해 라오스를 침략했다.

1961년에서 1962년에 걸쳐 열린 제2차 제네바 회의는 라오스의 독립과 중립성을 규정했지만, 이 협정은 실질적인 의미를 갖지 못했고 전쟁은 곧 재개되었다.[34] 라오스 내 북베트남 군사력의 증가는 라오스를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1954년-1975년)에 더욱 깊숙이 끌어들였다. 그 결과, 거의 10년 동안 라오스 동부는 미국이 라오스를 통과하는 호찌민 루트를 파괴하고 공산주의 세력을 패배시키기 위한 격렬한 폭격을 경험했다.[34] 북베트남은 파테트 라오를 강력히 지원하며 라오스를 반복적으로 침략했고, 라오스 정부와 군대는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미국은 정규 왕국 라오스군과 몽족을 비롯한 소수 민족으로 구성된 불규칙군을 훈련시켰다.

파리 평화 협정으로 미국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직후, 파테트 라오와 정부 간의 휴전으로 새로운 연립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라오스에서 철수하지 않았고, 파테트 라오는 베트남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에 불과했다. 1975년 4월 남베트남이 공산주의 세력에 함락된 후,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파테트 라오는 거의 저항 없이 전권을 장악했다. 1975년 12월 2일, 국왕은 퇴위를 강요당했고 라오스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내전이 끝난 후, 300만 명의 총 인구 중 약 30만 명이 국경을 넘어 태국으로 피난했다.[35][16]

10. 라오스 인민 민주 공화국 (1975-현재)

197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으며, 이듬해 파테트라오와 우파는 전라오스 통일 임시 정부를 구성했다. 1975년 파테트라오가 정권을 잡고 지하에 있던 라오스 공산당이 모습을 드러내 라오스 인민 민주 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부터 베트남의 영향력은 감소했다. 1989년 최초의 총선이 실시되었고, 1991년 새 헌법이 공포되었다.[16]

10. 1. 사회주의 국가 건설과 개혁 개방

1975년 사이공과 프놈펜에서 반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진 후, 파테트라오가 정권을 잡고 라오스 인민 민주 공화국을 세웠다. 라오스는 베트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1980년대 베트남 주도의 인도차이나 동맹(라오스·베트남·캄보디아)의 일원이었다.[16][36]

카이손 폼비한(Kaysone Phomvihane)이 이끄는 새 공산 정부는 중앙집권적인 경제 정책을 시행하고 이전 정부와 군대의 많은 구성원들을 "재교육 수용소"에 수감했는데, 여기에는 몽족(Hmong)도 포함되었다. 공산 정부는 명목상으로는 독립적이었지만, 수년 동안 베트남의 지시를 받는 꼭두각시 정권에 불과했다.[16][36]

정부의 정책으로 인해 라오스 인구의 약 10%가 국가를 떠났다. 라오스는 1991년 소련 붕괴까지 베트남을 통해 전달되는 소련의 지원에 크게 의존했다. 1990년대에 공산당은 경제의 중앙 집중적 관리를 포기했지만, 여전히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16][36] 1989년 최초의 총선이 있었으며, 1991년 새 헌법이 공포되었다.

10. 2. 현대 라오스의 과제

1990년대에 라오스 공산당은 경제의 중앙 집중적 관리를 포기했지만, 여전히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16][36] 이러한 상황은 라오스가 빈곤 퇴치, 경제 발전, 사회 통합, 민주주의 발전 등 여러 과제를 해결하는 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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